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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은 위기 가운데 드러난다.
▲죽기 바로 전날 밤
사도 베드로(이하 베드로)는 군인 4명 1조, 4교대로 된 감시 하에 있었다.
오직 베드로 1명을 지키는 데만, 군인을 16명이나 동원한 것이다.
그 외 감옥 전체에 대한 경비병은 또 얼마나 더 많았을까?
군인들은 아예 베드로를 샌드위치처럼 감싸고 있었다.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주님께서 베드로를 구출해 주신 것은
헤롯 아그립바(이하 헤롯)가 베드로를 죽이려고 하던 바로 그 전날 밤이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행12:6
▲왜 베드로를 꼭 막판에 가서 구출해 주시는 것일까?
이왕에 구출해 주시기로 작정하셨으면,
베드로가 투옥되던 첫 날에 구출해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교절은 7일간 계속 되는데, 베드로가 감옥에 여러 날 갇혀 있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처형되기 2~3일 전에 꺼내주셨더라면, 그렇게 초조하지 않았을 터인데..,
꼭 처형되기 바로 전날, 그것도 낮이 아닌 깊은 밤에, 완전히 막다른 골목까지 가서야
비로소 꺼내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하는 수제가가 아닌가?
구출하시기로 작정하셨다면,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구출해 주셨어야 했었다.
그런데 왜 베드로를, 여러 날 동안 그 감방 속에 내버려 두신 것일까?
▲만약 <내가> 그 감옥에 갇힌 베드로 입장이었다면
아마 첫 날 밤에는, 완전 밤샘 철야기도를 꼬박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안전 석방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서원기도까지 드렸을 것이다.
감옥에서 안전하게 석방되는 것을 확실히 믿는.. 소위 ‘믿음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났다고 가정해 보자.
아무리 감옥에서 몸부림치며 애간장을 끊듯이 기도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때 <나는> 완전히 탈진할 것이다.
처형 날짜는 점점 가까워지는데,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 없으니까, 탈진하는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날 하루를 남겨놓았다.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 믿었다.
그날 저녁 해지기 전까지는, 뭔가 일어나야 했었는데...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나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여러분, 프랑스 대혁명 때를 그린 영화를 보면,
수녀들이 왕정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시민 정권에 의해 단두대 처형이 확정되었을 때,
수녀들이 그 집행을 며칠 앞두고 도저히 편히 잠을 못자는 것을 (영화에서) 보았다.
어떤 수녀는 밤에 자다가,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며 자기 목을 붙잡고 벌떡 일어났다.
악몽을 꾸었는데, 자기 목이 잘리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목을 붙잡고 자다가 벌떡 일어났던 것이다. 그만큼 두렵다는 얘기다.
여러분,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아마도 후회, 한숨, 탄식, 두려움이 교차해서 밀려오는 가운데
벌벌 떨면서, 간혹 경기(놀라는 몸짓)를 일으키면서, 일초 일초를 초조하게 보낼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전날 밤, 과연 <나의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
베드로처럼, 과연 <믿음으로> 정말 깊은 잠을 잘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그 날 밤은, 과거에 내가 가졌던 <믿음>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버릴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심, 인자하심, 사랑의 섭리를 굳게 믿었던 내 <믿음>은
한낱 허울 좋은 말장난 이었다는 것을 ..
현실에서 내 피부로 실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 <믿음>은 산산조각 나서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릴 것이고,
오직 두려움, 공포, 절망에 휩싸여 일초 일초를 바들바들 떨면서 지낼 것이다.
이렇게 공포가 극심하게 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방뇨하기도 하며,
또한 자신도 모르게 똥을 싸기도 한다. ‘생 똥을 싼다’는 말이 그런 말이다.
두려움에 휩싸여 자기의 자율신경계가 마비되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전혀 달랐다. 엉뚱하기까지 하다.
베드로는 지금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묶여서 자고 있다.
그는 거기서 평화롭게 잠을 청하고 있다.
그가 얼마나 편하게 두 다리 쭉 뻗고 자는가 하면,
겉옷을 벗고, 허리띠를 풀어 제쳐놓고, 신발도 다 벗고...
마치 자기 집 안방에서처럼 편안하게 잠자고 있다.
12: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는, 주님이 자기를 구출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에
편안하게 잠을 잔 것이 아님을, 지난번에 살펴보았다. → <보시려면 여기 클릭!>
베드로가 실제로 구출 받았을 때,
그것은 자기가 환상 중에 일어난 일로 착각했다. 12:9
그러니까 베드로는, 실제로 자기가 구출 받을 것을,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기대했더라면, 구출되고나서 그렇게 어리둥절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인지라, 그런 기적적 구출 상황을 기대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겠지만,
꼭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그 길만 정해놓고 기다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베드로, 참된 믿음을 보여주다
▲참된 믿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주님의 전능하신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마지막 날 밤, 마지막 순간까지
이제 해가 뜰 때 참수형을 당해야 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에
베드로가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참수를 당해 목이 달아나 죽는다 할지라도
내가 믿는 주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고,
자신을 영원히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기적적으로 풀려나면.. 그래서 좋고
참수를 당해서 순교하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섭리로
자기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래도 좋고/저래도 좋고... 그래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다.
▲막판/막장까지 몰고 가시는 주님의 목적
왜 주님께서 베드로를 첫 날에 구해주지 않으시고,
왜 베드로를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구해주셨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①주님께서는
최후의 순간, 절망적인 순간에서까지
전혀 흔들림이 없는, 베드로의 믿음을 보기 원하셨다.
이것은 시험이지만, 상을 주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본다.
②이런 일을 몇 번 겪으면,
베드로의 믿음이 정말 단단하고 큰 바윗돌처럼 강해진다.
즉, 베드로의 믿음의 연단이 일어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막판,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응답하신다.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상 주시기 위함이며,
-또한 우리의 믿음이 강하게 연단되는 것이다. 산전수전 겪음을 통해서!
쉽게 말하면, 믿음의 특전사가 되는 것이다.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③그만큼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하듯이, 믿음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참된 믿음을 보시기 원하시고,
참된 믿음을 주시기 원하시고,
내 믿음이 굳세어지도록 연단하기 원하신다.
그만큼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구원을 위해서도.. 내 믿음이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기 위해서도.. 내 믿음이 중요하고
오늘 주님이 내게 관심 가지기 원하시는 것은.. 내 믿음이다. 그걸 보고 싶어하신다.
▲과거에 베드로는, 믿음이 있었지만,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지 못했었다.
①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
그는 정말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곧장 ‘사탄아 물러가라’고 주님께 엄하게 책망 들었다.
②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에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다른 제자들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은 죽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베드로는 호언장담했다.
그 때 베드로는 정말 ‘믿음의 사람’인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곧장 주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하고 말았다.
③새벽이 되어 새벽닭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의 잘못으로 통곡할 때 베드로는
잃어버렸던 자기 ‘믿음’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쳐버린 베드로는
누가 뭐라고 해도.., ‘믿음의 사람’이라 말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수없이 많은 신앙행위, 믿음의 행위를 했지만, (위의 ①고백, ②호언장담, ③눈물)
그 행위들은 진정한 그의 믿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아직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믿음이 제자리걸음만 계속했던 것이다. 3년 동안이나!
그의 믿음은 살아서 역사하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본문 행12장의 베드로는 <정말 믿음의 사람 베드로>를 잘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던 것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일 때처럼,
그것이 죽는 것이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안심하는 것이다.
꼭 <살려 달라/ 풀어 달라>가 아니었다.
대신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였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현재 내게 허락하신 환경과 처지에 만족하고, 거기서 주님 뜻을 발견하는가?
-하나님마저 굴복시키고, 가르치려 드는 강한 내 의지가 죽었는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감사함으로 수용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녕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이, 제법 큰 교회의 담임으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 선정 3인 안에 들어갔다.
그는 장로님들과 전화를 통화하면서, 좋은 친분관계를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정작 막상 결선투표에서, 청빙위원회는
단 1표차이로, 다른 목회자를 뽑고 말았다.
책보따리도 대충 싸 두었는데, 다시 보따리를 풀었어야 했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제 기나긴 개척교회 생활을 끝내는가 싶었는데...
‘왜 하나님은 단 1표만 더 내게로 던지도록 역사해 주시지 않으신 것일까?’
그때 문득 ‘감사하라’는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그렇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종종 내 뜻과 섭리와 어긋날 때도 있다.
감사는 .. 내 뜻대로 도와주시면 하고, 내 뜻과 어긋나면 안 하고 .. 그런 것이 아니다.
진정한 믿음의 감사는.. 내 뜻과 관계없이 .. 내 뜻과 어긋나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회자와 사모는, 억울함과 원망함을 접고, 대신에 감사드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대안
▲아군들도 적지 않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대적들만 날뛴 것이 아니었다.
성경을 자세히 보니까, 예수님의 편도 소수지만 분명히 있었다.
전세가 100% 마귀 쪽으로만 기운 것은 아니었다. 아군들도 틈틈이 숨어 있었다.
-예수님을 보고 ‘저 옳은 사람’이라고 했던 빌라도의 아내 마27:19
-골고다 길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과, 울면서 따라갔던 여인들 눅23:27
-예수님을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 멀리서 바라보던 갈릴리에서 온 여자들 눅23:49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 구레네 시몬
-예수님의 옳음을 말해 준 한 편 강도 눅23:41, 십자가 밑의 백부장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한 아리마대 요셉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고 집으로 돌아간 많은 사람들 눅23:48
▲이렇게 많은 아군들의 지지가 있었는데, 왜 하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도록 침묵하셨나?
그 아군들의 변호나 변론을 정상참작 하셔서라도,
채찍은 맞았고, 가시 면류관은 쓰셨을지언정
십자가에서 막판 뒤집기라도 일어나서, 거기서 당당히 내려오셔야 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대안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활’이었다.
그 대안이 있으셨으니까, 하나님은,
많은 변호자들의 변호를.. 잠시 유예하신/ 미뤄놓으신 것이다. 사흘 후로!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서도.. 하나님은 대안이 있으셨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서도.. 많은 변호인단이 있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여서, 베드로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다.
결국 하나님은 대안을 꺼내 드셨다.
그리고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해 주셨다.
여러분, 참된 믿음이란?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의 대안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평안한 것이다. 베드로처럼 두 다리 쭉 뻗고 잘 만큼!
그 대안은, 내가 원하는 것과 방향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선한 대안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
그것을 믿는 것이 참된 믿음이고, 하나님은 오늘 그 믿음을 내 속에서 보기 원하신다. ▣ 믿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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