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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 행20:24~35

by 【고동엽】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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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남긴 고별설교 즉 마지막 유언의 내용 중 일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행20: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바울이 3차전도여행을 매듭짓기 위해서 고린도를 출발해서 드로아에 이르기까지

각 성을 거칠 때마다, 성령님께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이 결박과 환란이 도사린 길 임을, 바울에게 계속 일러 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예고하셨다면,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투옥당하고,

죽음과도 같은 시련과 고난을 당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성령님의 거듭된 예고에 감사를 드리면서,

얼마든지 예루살렘 행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도리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결박과 환란이 도사린 예루살렘 행을

자신이 달려가야할 인생 여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즉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소명을 완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바울은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나머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도전이나 시련도,

주님의 부르심을 좇아가려는, 자신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만약 성령님의 거듭된 결박과 환란의 예고를 접한 바울이

예루살렘 행을 피해버렸더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겠습니까?

 

바울은, 육체적으로는 결박과 환란의 위험에서 벗어나서

편안함과 안일함을 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그 결박과 환란의 길로 불러내신 하나님을

자기 의지로 외면하는,

미련과 무지를 범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적으로 안락한 여생을 누리면서, 계속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를 수는 있었겠지만,

그 바울을 통해서, 로마제국과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던 주님의 뜻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그 고귀한 뜻은, 주님의 부르심에 절대 순종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본문의 위대한 선포를, 지금 홀로 골방이나 산속에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놓고,

그 앞에서 자신의 예루살렘 행이 결박과 환란이 도사린 길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길을 완주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선포했습니다.

그것도 마지막 유언으로 말입니다.

 

도대체 그 의도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길닦이들에 의해서, 사회와 역사와 미래가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는, 오늘날의 터키 대륙인 소아시아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에,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인 아데미 신전이 있어서,

원근각처에서 신전을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에베소는 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우상, 돈, 향락, 패션, 유행 그리고 온갖 볼거리와 흥밋거리로 가득 찬 그 에베소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자녀들을 불러내시고, 당신의 종(장로)으로 세우셨습니다.

우상의 도시, 맘몬의 도시, 향락의 도시, 타락의 도시 에베소에서,

당신의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름 받은 에베소 장로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온갖 시련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그들에게, 그래도 그 길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 길을 포기하는 것은, 그 길로 여러분들을 불러내신 주님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여러분을 이 길 위로 불러내신 이상, 반드시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그러므로 이 길을 완주하기 위해서, 두려움 없이 여러분의 생명을 던지라고

지금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우리 말 ‘보라’로 번역된 헬라어 ‘이두’는

감탄을 표할 때, 또는 상대의 이목을 집중케 하거나, 혹은 특별히 자신의 말을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영어로는 behold, '주목하여 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22절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동안 바울이 각 성을 거쳐 올 때마다,

그의 예루살렘 행이, 결박과 환란이 도사린 길임을, 성령님께서 그에게 계속 일러 주셨지만,

바울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에베소 장로들에게 천명하면서, ‘보라’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자신의 굳은 결심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25절 역시 ‘보라’로 시작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보라’라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헬라어에는 ‘카이 눈 이두’인데, ‘그리고, 이제 보라’입니다. *and now hehold

 

바울은, 이렇게 운을 뗌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에베소 장로들이 경각심을 더 높여주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보라(이두)’에 이어지는 바울의 말은,

헬라어 문법상 우리말 성경과 순서가 다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바울은 먼저 ‘내가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헬라어는 동사의 어미가 주어의 성과 수를 나타내므로,

일반적으로 헬라어에서는 주어가 생략됩니다 .

그런데도 바울은, 굳이 1인칭주어 ‘나(에고)’를 사용해서 ‘내가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강조적 표현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강조하기 원한 내용은,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 볼 줄 못함을 내가 안다’였습니다.

바울이 강조한 그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리면

‘자, 이제 보십시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내가 안다고 강조한 것은,

에베소 장로들과는 달리,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 땅에서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베소 장로들은, 이번 작별이,

이 세상에서 바울과의 영원한 작별임을 아직까지 절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는 강조형과, ‘나(주어)’를 사용하면서까지 강조해서,

‘여러분이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을 내가 안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여러분이 다시는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며 말했습니다.

 

이 유언의 깊은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이 유언을 통해서

에베소 장로들의 심령 속에 새겨주고자 했던 메시지는,

‘그러므로 나의 얼굴을 지금 똑바로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에베소 장로 여러분들도,

앞으로 나와 같은 얼굴로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유언을 남기는 바울은, 대체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었겠습니까?

본문 25절을 따르자면,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유언은, 26절에서 이렇게 계속됩니다.

 

 

◑행20: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우리말 ‘오늘’은 헬라어에서 ‘그 오늘이라는 날’입니다. *

바울은 이렇게 ‘오늘’이라는 단어도, 지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에베소의 장로들이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바울은 절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오늘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면서, ’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내가 깨끗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바울이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한 것은

자기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구약 ‘에스겔서 3장 파수꾼’의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서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이 복음의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으므로

누군가가 복음을 듣지 않고 멸망당한다 할지라도,

자신은 그 모든 피에 대해 깨끗하다고 선언한 그 진의는,

 

그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이제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책임 회피가 아니라,

에베소 장로 여러분들도,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로 살아달라고 당부하는데 있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만, 인간을 위해 그 영혼이 복음에 사로잡혀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살아생전에는 두말 할 것도 없고,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에도,

후회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교회를 짓밟던 폭도였던 바울에게, 그런 얼굴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복음의 파수꾼으로 불러내신 주님께서,

불러내신 것으로 그치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바울 속에 임해 계시고,

말씀으로 바울을 품어주신 덕분이었습니다.

 

 

◑행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바울은 먼저 에베소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삼가라고 명령했습니다.

헬라어에서현재 명령형은 지속과 반복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번 삼가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삼가라는 명령입니다.

 

먼저는 에베소 장로들,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다음으로는 온 양떼들, 즉 주님께서 부르신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삼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삼가라는 헬라어 프로세코는 ‘주의하다, 경계하다’ 는 의미입니다. *heed

무엇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인지 바울은 계속 설명합니다.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졌고, 바울은 3년 동안이나 에베소 교회를 보살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고, 교인들 가운데 장로들을 택해 세운 장본인도

바로 바울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내가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그들을 에베소 교회의 감독자로 세우셨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바울이 말한 감독자의 역할은,

성자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당신의 교회를 보살피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말 감독자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스코포스’는 관리자, 보호자 라는 의미입니다. *overseers

 

 

◑20: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나운 이리’는,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을 일컫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영영 에베소를 떠나가면,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이

에베소를 찾아와서 교인들을 미혹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계속 에베소에 머문다면, 자기 자신이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을 척결하겠지만,

이제 자신이 떠나면, 에베소 장로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그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에베소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삼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장로들이 삼가야 하는 데는 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20: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지금 에베소 장로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제 내가 떠난 뒤에 나를 대신해서 에베소 장로 여러분들이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잘 감당해 줄 것을, 나는 확신한다’ 라는 식의 덕담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은, 전혀 의외였습니다.

이단과 거짓선지자들처럼, 에베소 장로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교인들을 미혹해서 자기의 유익을 꾀하려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나올 줄 내가 안다

바울이 단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어그러지다’는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스트레포’는 왜곡시킨다는 말입니다. *perverse things

 

거짓선지자들과 이단처럼, 자기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할 사람들이

에베소 장로들 여러분들 사이에서 나오게 될 것을 내가 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사람’이란 단어를 단수가 아닌 복수로 사용했습니다.

에베소 장로 (복수) 여러분들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이 어쩌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 여러 사람이 (복수), 그렇게 할 줄을 내가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삶의 절대 기준인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해 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우리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다반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고, 또 왜곡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지금 그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을 동시에 망치는 길인 탓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단과 거짓선지자들로부터 당할 수 있는 외적 공격에,

자기 자신들과 교인들을 지킬 수 있게끔, 그리고 자기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려는 내적 유혹에서 깨어 있을 수 있게끔,

너희는 먼저 삼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게끔,

앞으로 에베소 장로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바울은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3년 동안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밤낮 눈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도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줄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에베소의 유력자들이나 권력자들에게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을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그들의 삶을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의탁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만,

말씀에 의해, 말씀으로 바르게 세움 받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2천년 전 은, 금, 의복으로 대변되던 세상의 재물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천막제조기술을 보유했던 바울은, 자비량으로 전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천막을 제조하여 판매하면서, 전도의 필요한 경비를 직접 충당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였다’고 밝혔습니다.

바울은 필요한 자신의 경비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전도여행하는 동행자들의 경비까지

자기 손으로 직접 충당해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면서,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다고 밝혔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에베소의 장로들도

이미 3년동안 자신들의 눈으로 목격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물질로도 연약한 사람을 도우면서,

‘받은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더 복되다’는 참된 믿음의 표본을,

에베소 교인들 앞에서 3년 동안 보여 온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에베소 장로들 역시 에베소 교인들앞에서,

자신과 같이 믿음의 표본으로 살아주기를 촉구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장로들을 자신을 통해 불러 세우신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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