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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용기다 행7:35~38

by 【고동엽】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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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요약

믿음은 용기다! 그런데 그 용기가, 세상 영웅호걸의 용기와 다른 점은

그 용기의 출처가 하나님이시다. 인간 자신이 아니다.

 

그런 용기와 대의가 불분명할 때, 그 결과,

지금 한국사회는 이기심의 극치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인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기독교를 자기 이기심을 위한 하등기복종교로 전락시켜 왔다.

용기와 대의가 부실한 결과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대의와 가치를 추구하고 발견할 때에만

자기를 뛰어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대의(大義)를 분명히 하고,

거기서 나오는 용기로

모세처럼 결단할 때,

이 땅이 변화되는 큰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자세히 읽어보세요!

 

 

◑1. 연합국이 독일을 이긴 이유 - 용기

 

▲연합국 승리 원인은 공군력 장악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개전초기 1년 만에 유럽 대부분을 장악했는데,

전략, 전술, 무기, 조직 등 모든 면에 걸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연합국에 패배했다.

 

그 중요한 패인 중 하나가, 독일이 연합국에 공군력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공군력 역시 독일이 연합국보다 더 우세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 주축의 연합국 공군 조종사들의 목숨 건 출격으로

독일 공군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궤멸되었다.

 

독일은 공군력이 상실되자, 연합국의 공중폭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그 때부터 패망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독일 공군력을 무력화시키기까지 희생된 영미 조종사 숫자는

무려 1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연합국 조종사들의 용기, 대의가 분명했다.

매일 출격할 때마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젊은 조종사들이 속출했다.

오늘 살아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는 출격에서, 운 좋게 살아 돌아왔는데,

내일 또 다시 출격해야 하는 그들 마음이 과연 어땠을까?

 

당시 그 젊은 조종사들을 인터뷰한 기록영상물을 본 적이 있다.

매일 숱한 희생 속에서 감행되어야 하는 출격 소감을 물었을 때,

그 때 한 젊은 병사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의 희생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을 확신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 때 세계 연합국 조종사들의 숱한 희생으로 통해서

결국 2차대전은 종식되었고, 덕분에 오늘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는 것이다.

 

근래에, 당시 조종사들 중에 아직 생존해 있는 분들의 인터뷰를 TV에서 보았다.

매일매일 수없이 많은 군인들이 죽어가는 가운데

‘출격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백발이 된 노인은 이렇게 답했다.

 

두려웠습니다. 밤에도 두려웠고, 아침에도 두려웠고, 낮에도 두려웠습니다.

매일 매일이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 있게 출격할 수 있었는지를 묻자,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용기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용기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희생되더라도, 나로 인해서 조국과 세계의 평화가 지켜질 수 있다는 신념(대의)이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긴가!

매일 죽음의 포탄이 무수히 쏟아지는 전장 속으로 (어쩌면 죽는 날까지)

계속 출격을 안 나설 수 없는 그 절망의 연속 속에서

젊은이들에게 어찌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조국과 세계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과 대의를 가졌을 때

그것이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용기는 대의에서 나온다.

대의란, ‘사회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 각자가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를 위하여 마땅히 행해야 할 큰 도리’를 뜻한다.

 

바로 그 대의에 대한 자각과 신념이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인간은, 위대한 대의와 가치를 찾을 때에만

자신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용기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

 

▲신앙도 똑같다.

신앙은 용기이다.

자기 자신에게 임하는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는 용기가 바로 신앙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 아브람에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

그 곳에서 펼쳐질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러나 아브람은 고향을 등지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미지의 땅을 항해 나아갔다. 그것은 아브람의 용기였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처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을 고지하셨을 때,

미혼 처녀가 아기를 배면 돌에 맞아죽는 율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대에

마리아에게 어찌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했던 것은

마리아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곧 용기였다.

그리고 그 용기의 출처는, 그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이 절대자이심을 믿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적 대의와 가치로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순종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2차대전 당시에 연합국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조국과 세계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對독일 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독일이 패배한 이유

 

▲독일 패배 이유 - 용기와 대의의 출처가 인간 (↔하나님)

독일군은 용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독일군 역시 용기 있는 전사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독일의 젊은이들도 자기 조국을 위해서, 또한 지도자 히틀러에게 세뇌 받았던 바

히틀러식의 세계평화를 위해, 용기 있게 참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젊은이들은 패배했고

그들이 지키려했던 조국을 지키지 못 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양 진영의 젊은이들이 똑같이 대의를 걸고 목숨을 바쳐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왜 한 쪽은 패배하고, 한 쪽은 승리했을까?

 

연합군의 대의(세계평화)는 상대적으로 의로왔고,

독일군의 대의(게르만족 세계 지배)는 불의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2차대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역사상 그 숱한 전쟁에서, 군인들은, 지켜야할 조국과 대의명분을 위해

살벌한 목숨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용기 있게 싸웠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쟁에서 어느 한 쪽은 반드시 패배했고,

이긴 자의 승리 역시 영원하지 못 했다.

이긴 자의 승리의 축배는 머지않아 패배의 쓴 잔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사람들이 용기 있게 나가서 싸워도

그 용기의 출처가 인간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쟁을 불사하면서 까지도 지키려했던 체제, 제도, 이념, 대의명분이

아무리 그럴듯하다 할지라도, 그 출처가 인간인 이상,

반드시 어느 한 쪽은 패배할 수밖에 없고,

승리한 자 역시 이내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대의는 양쪽 다 불안정)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고 유한한 존재인데, 그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어찌 영원한 생명과 가치를 지닐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인류역사상 영원히 지켜진 나라,

영원히 지켜진 제도,

영원히 지켜진 이념이 없었다는 사실은

유념해 보아야 한다. 인간의 대의는 언제나 불완전했다. ★★

 

▲용기와 대의의 출처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마리아에게서 믿음은 용기였지만

그 용기의 출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영원하신 하나님만이 절대자임을 믿었기에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절대 지켜야 할 대의와 가치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자신들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패배를 모르는 영원한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4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영원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마리아는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가장 존귀한 성모 마리아로 우뚝 서 있다.

그들에게 그 영원한 승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용기였고,

그 용기의 출처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3. 모세의 용기와 그 출처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행7:35

 

하나님은 40년 전에 이미 동족으로부터 배척당했던 그 80세 노령의 모세를

당시 초강대국 애굽으로부터 히브리 노예들을 구해내는 지도자로 세우셨다.

한마디로 그 모세는 구속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책'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장인 집에 얹혀 살면서 고작 양치기 생활을 해 온 모세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실현불가능한 일이었고

실로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출4장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이고 사양하였음을 본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몇 차례에 걸쳐 망설였다는 것은

그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을 치렀다는 것이다.

 

▲모세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자신에게 익숙하고 보다 안전해 보이는 광야의 양치기로 여생을 끝낼 것인가?

아니면, 미래가 불확실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의 대책'에 순종할 것인가?

 

자신의 판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이집트 귀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집트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질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남아있는 여생을 자신의 안일만을 위해 살 것인가?

아니면, 자기희생과 헌신을 통해, 자기민족을 구원하는 도전적인 삶을 살 것인가?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살려는 이기심의 신발을 벗으라는 명령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선택으로, 이기심의 끈을 더 조여 맬 것인가?

 

모세는 그 두 길 가운데 한 길을 선택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모세는 몇 번에 걸친 망설임 끝에, 마침내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길을 선택했다. 믿음은 '용기'인 것이다.

 

불확실해 보이는 이집트 귀환에 대한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대책’이 되기 위해 자기 삶을 거기에 던졌다.

 

모세에게도 믿음은 용기였고

그 용기의 출처는 하나님이셨다.

 

그 결과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행7:36

 

빈털터리 무기력한 노인이었던 모세가, 이스라엘 노예들을 출애굽 시킨 것은

이집트 왕 파라오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을 의미한다.

모세에게 단 한 명의 군사, 단 한 개의 무기도 없었지만,

이집트의 파라오는 모세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노예들을 해방시켜주어야만 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해 주셨기 때문이다.

용기있는 결단의 결과 주어지는 기적이다.

 

▲용기 있게 결단한 결과

그 이후에 모세는 홍해와 광야에서 엄청난 기사와 표적(기적)을 행했다.

그저 한 두 번이거나, 하루 이틀만이 아니었다.

무려 40년 동안이나,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

 

모세 그 자신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오직 하나님만을 쫓는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표적과 기사를 40년 동안 친히 행해주셨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빈털터리 노인 모세가

우리가 아는 위대한 신앙의 지도자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온갖 표적과 기사로 함께 해 주셨던 그 40년 때문이었고,

그것은 '용기'있는 믿음의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모세는, 3천4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영원한 출애굽의 승리자로 우리 가운데 살아있다.

 

만약 그 때 모세가 용기를 저버리고,

무기력한 자기 한 몸만 소중히 생각해서 자신만 돌보기를 선택했더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영광이었다.

 

모세에게 믿음은 '용기'였고,

그 용기의 출처는 하나님이셨다.

 

▲오늘 이 설교의 주제는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보다 더 큰 대의와 가치를 발견하고 추구할 때에만

자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적인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마찬가지로 신앙인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라는 대의와 신념이 있을 때

아무리 어려운 난관과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고, 자기 두려움도 극복하고,

영적 전쟁에서 용감히 싸울 수 있다.

 

바꾸어 말해서, 인간이 아무리 고상해 보여도

자기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대의와 신념(사명감)이 없이

고작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대의와 신념으로 살 때,

인간은 자기 이기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한다.

그 결과, 이 사회에 공헌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밖에 없다.

 

 

◑4. 이기적인 한국인을 회개함

 

*대의(大義, 마땅히 행할 도리, 의로운 명분과 가치관)

 

▲애국심 꼴찌의 한국 청소년

2006년 8월에, 청소년 계발위원회에서

한국, 중국, 일본의 3개국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었다.

 

‘만약 전쟁이 터져 적군이 침입하면, 조국을 위해 기꺼이 나가 싸우겠느냐?' 라는

질문에

일본 청소년들은 41.1%가 싸우겠다고 응답,

중국 청소년들은 14.4%가 싸우겠다고 응답

한국 청소년들은 10.2%로 최하위였다.

 

자신의 조국에 전쟁이 터져서 사랑하는 가족이 위험에 처하고

동족이 죽고 나라의 안보가 위태로워져도

이 땅의 청소년 10명 중 9명은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자기가 피 흘려 싸우겠다는 데 대해서

어떤 가치나 대의명분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의 반영이다.

 

자기 나라를 지키는 그 자체를 대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남아 있는 가치나 대의는 오직 자기자신 또는 자기 자식 뿐이다!

 

▲이기적인 한국인

왜 이 땅의 청소년들이 이렇듯 이기적인 인간으로 살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 부모들이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다.

 

이 땅의 부모들이 자신과 자기 자식만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중도덕과 예의범절이

이 사회에서 실종된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어디를 가든, 사회의 공익에는 아랑곳없이

남녀노소 개인집단을 불문하고, 자기만 안다.

자기의 사적 이익만을 위해 다투는 이기주의자들만 가득 차 있다.

 

자기보다 더 큰 대의와 가치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공익을 위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만을 들여다본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하다.

 

▲크리스천은 어떤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의 삶조차도,

여기서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크리스천조차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사명을 다해 지켜야할 대의와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그 결과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우주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도인 기독교를

고작 자기 집안이나 자기 사업의 안녕을 꾀하는 (가내안전, 사업번창)

천박한 하등기복종교로 전락시키고 있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야,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대책’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가 드러날 수 있겠는가!

 

▲회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회의 주일인 사순절 3번째 주일을 맞이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하나님보다 나 자신에게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했던

우리의 어리석음을 회개하십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지켜야할 대의와 가치로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자기와의 싸움에서 백전백패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회개하십시다.

 

이 생명의 종교를 천박한 하등기복종교로 전락시켜온 우리의 죄를 회개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아브라함, 모세, 마리아처럼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지켜야할 절대적 대의와 가치로 받아들임으로써

언제 어디서나 우리 자신을 이기는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때부터 우리 자신의 삶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사회 속에 비로소 소망의 빛이 비치게 될 것이다.

 

80세 빈털터리였던 모세의 마지막 40년 동안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끝 날까지 우리를 도구삼아

이 민족을 이기심의 굴레에서 출애굽 시키시고

이 나라를 새롭게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통해 날마다 표적과 기사를 행해 주실 것이다.

 

▲마치는 말

모세가 영원한 출애굽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명령)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와 대의임을 믿음으로써

이집트 귀환을 두려워하는 자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 있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로 하여금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게 하셨고

그 모세로 인해, 이스라엘 전 민족은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 받았다.

 

이 모든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이라도 용기 있는 신앙인이 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통해 능히 한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 삶은 전반에 걸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용기가 없었음을 회개한다.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대책으로 존재해야할 절대적인 가치와 대의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지 않았음을 회개한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길 수 없었고,

이 사회의 공익을 지키기 보다는, 오히려 해치는데 앞장섰고,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를 우리 자신의 이기심을 위한

천박한 기복종교로 전락시켜왔음을 회개한다.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임)

 

우리 모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써

자신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좇아 사는

용기 있는 크리스천이 되게, 주여 도와주소서!

 

우리 크리스천의 삶을 통해, 이 민족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사와 표적이 우리의 남은 생애 동안 날마다 드러나게 하소서!

 

빈털터리 노인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 출애굽의 역사는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라

용기 있는 신앙인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이다.

 

특별히 이 땅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은혜를 받아

젊은 시절부터 용기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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