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3:27-31
제목: 율법과 믿음의 상호지지와 견인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이란 말은 전부 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란 말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리가 믿는 ‘믿음’ 아닙니다. 27절부터 31절의 모든 ‘믿음’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하면은 정확한 번역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이때 ‘행위로’라는 말은 할례라는 뜻입니다. 할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그 할례라는 행위, “그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란 말이 안 들어가면 ‘믿음’ 자체가 또한 ‘공로’ 가 돼버립니다. 큰일 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그 믿음을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가 아니라 ‘내가 믿음으로’ 이러한 뜻으로 풀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교인들이 정확하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할례에 대한 맹목적 집착과 똑같습니다. 할례를 행하므로 내가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다는 말인데 ‘내가 남들은 교회 안 나가는데 내가 목사님의 전도를 믿고 교회 나가니까 나는 의로운 자가 됐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며 그래서 안 믿는 사람과 자기를 엄청 구별합니다. ‘저 사람은 안 믿고 저 사람은 불교를 믿는데 ‘나는 예수를 믿어! 예수의 이름을 믿어 나는 완전히 하나님 자녀가 되었어!’라고 자기 믿음을 지금 여기 집어넣습니다. 절대로 그거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은 내가 믿는 믿음은 하나의 공로가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하나님께 크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도구가 돼버립니다. 그런 말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율법의 행위”, 즉 할례 같은 그런 거냐?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신실함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 괄호하고 할례 같은 따위의 그런, 하나님 백성, 유대인의 신분을 얻기 위해서 치루는 입문식 같은 그런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다 준행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준행했다고 믿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본받아 살면은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의롭다하심을 얻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행했다는 것을 믿으면은 나에게 어떤 효과가 오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나를 전율시키고, 나를 압도하고, 나를 일생 동안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바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행할 능력은 구원받으려는 이기심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매력적이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게 구원받길 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길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들, 예수님 같은 분과 어울리기 위해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아마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좋은 사람 사이에 끼이면은 여러분 주변을 둘러싸는 사람이, 한 다섯 사람이 굉장히 성숙한 사람이라면은 여러분은 천국에 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이 감격 때문에 내가 하나님에게 신실하게 붙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파생되는 신실함이 생깁니다.
그 파생되는 신실함은 우리의 ‘믿음’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믿음직스러움이 우리를 믿게 만들었으니까 우리의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믿게 만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믿음직스러움이, 그것이 우리를 믿게 만들었으니까 우리의 믿음은 공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주목할 것은 여기 ‘하나님이 신실하시다. 의로우시다’란 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 동안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서 1500년 동안 지속된 약속을 끝내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사도 바울이 마침내 ‘의로우신 하나님’이란 결론을 내린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지탱하시고, 부축하시고, 언약 백성으로 심판도 하셨다가, 재활복구도 시켰다가, 다시 갱생시켰다가, 다시 심판하셨다가 이런 엎치락 뒤치락을 1500년 동안 했습니다. 이 1500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끝내 아브라함의 후손을 보내주셔서 아브라함에게 원래 주셨던 약속 ‘너와 네 후손이 세계 만민에게 복이 되리라’라는 그 약속을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1500년 만에 최종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고백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약속에 신실하시고,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압도적인 지탱하심과 부축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언약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대표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100% 순종했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순종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압도적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국 이스라엘의 언약적 의무실행도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해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압도적인, 일방적인 의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적 의무관계를 상호 100% 완수하게 하는 데 결정적이었죠.
그게 바로 25절 26절입니다. 25절 26절이 그래서 너무 중요합니다. 정선희 교우님 한 번 읽어 주십시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자주 범죄하고, 언약 관계에서 이탈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탈할 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심판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재활복구 시켰습니다. 언약 백성을 재활복구 시켜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세계 만민의 복이 되게 하겠다는 그 원초적 약속, 단 하나의 원초적 약속, 구약성경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원초적 약속,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세계 만민에게 복이 될 것이다, 즉 아담 인류가 가져온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세계 인류를 구해 낼 그 사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끝내 수행할 것이라는 그 약속을 하나님이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세계 만민에게 복이 되게 만들겠다는 그 언약 의무에 성실하게 다 했습니다. 무엇을 함으로써요? 화목제물을 보냄으로써.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화목제물을 왜 보냈을까? 화목제물은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보내는 게 화목제물이에요. 이것이 ‘힐라스테리온’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제 친구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하는 언동을 했다면은 그 친구는 제게 진노와 슬픔과 상실과 이런 당혹감에 빠져있겠죠? 그러면 그 친구에게 나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내가 내 친구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내 이익 때문에 내 친구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인정하고 내 친구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말을 하고, 나를 생매장시킬 정도로 나를 낮춰야 됩니다. “내가 친구의 명예를 손상시킨 이유는 제가 이번에 선거에 당선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선거에 당선되지 않아도 되고 내 친구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하고 공개적으로 친구를 명예롭게 해주고, 그다음 제가 친구에게 “저의 잘못에 대해 일생 동안 미안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물질적 보상을 하겠습니다” 할 때 그런 것을 화목제물이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화목제물을 원래 보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마음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화목제물은 순종하는 아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해 줄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보낼 화목제물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화목제물을 하나님이 보낸 거예요. 지금 보세요. 3장 25절 한 번 읽어보세요. 이거 정선희 교우님 한 번 더 읽어주십시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가 큰 문제입니다. 화목제물은 ‘힐라스테리온’은 가해자가, 죄를 지은 자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 입은 피해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야곱에게 화목제물을 보내야 됩니까? 야곱이 에서에게 화목제물을 보내야 됩니까? 창세기 31장에서 화목제물을 많이 보내서 형의 진노를 풀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이잖아요. 이게 화목제물이에요. 근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도대체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 파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른 의미로 책임감을 느끼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 관계가 파탄 난 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제한적 동정심으로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법의 논리대로 심판만 하지 않고, 인간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무한히 동정하심으로 창조주의 무한책임을 감수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른 의미로써 미안한 마음, 민망한 마음, 인간 존재의 연약함, 율법대로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고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는 저 인간에 대한 한없는 민망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미안한 마음, 민망한 마음, 하나님의 쓰라린 마음, 인간의 실패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하나님의 그 격렬한 안타까움,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화목제물을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화목제물을 보내고, 이스라엘도 화목제물을 보낸 거예요. 그래서 서로 언약적 의무를 다한 거예요. 그래서 언약 관계가 회복된 거예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마음도 대신하고, 이스라엘의 마음도 대신한 분이 디도서 2장에 나오는 ‘오직 중보자 한 분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래서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받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지체장애인에게 “일어나 걸어라” 그러면 걷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리스도가...
그래서 여러분, 아마 8장까지 계속 이런 내용이 반복이 될 겁니다. 나중에, 내일, 또 질문할 것이 있으면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하나님께 의로움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내 대신 십자가에 저주 받은 죽음을 죽었다고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걸 마음에 할례를 받았다고 그랬습니다. 마음의 할례. 다시 말해서 로마서 2장 28절과 29절은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은 이방인도 할례를 받지 않아도 순식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할례 받지 않고 79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나의 죄와 저주의 운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대신 죽어준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뚜렷이 기억납니다. 그때 성령이 임하자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제가 해방되고 지금처럼 명랑 쾌활한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저는 명랑 쾌활한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우울한 사람이었고, 인생에 대해서 비관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성실했지만 늘 불안에 사로잡혔고. 경쟁심에 가득 차 있었고, 뭔가 출세하려 했고, 내 존재감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제 마음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랑 쾌활함의 세계를 몰랐고, 세상을 거칠게 아주 어둡게만 봤습니다. 그런데 할례 받지 않은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우리 대신 징벌 받고, 우리 대신 부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는 사실, 그 사실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겁니다. 성령이 임한 겁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정선희 교우님 한 번 만 더 읽어주십시오. 로마서 4장 25절.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힌 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모습이 저의 옛자아입니다. 그때 저의 옛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저도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3절 4절 5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함께 매장되고, 함께 살아났느니라. 그래서 의롭게 됐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로마서의 깊고 깊은 신비, 1500년 동안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언약의 역사에 종착점인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이 신비를 순식간에 깨닫게 하시옵시고, 성령 받게 하시옵시고,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율법과 믿음의 상호지지와 견인
오늘 본문에 나오는 ‘믿음’이란 말은 전부 다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란 말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우리가 믿는 ‘믿음’ 아닙니다. 27절부터 31절의 모든 ‘믿음’은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라고 번역하면은 정확한 번역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이때 ‘행위로’라는 말은 할례라는 뜻입니다. 할례,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그 할례라는 행위, “그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신실함이란 말이 안 들어가면 ‘믿음’ 자체가 또한 ‘공로’ 가 돼버립니다. 큰일 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그 믿음을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가 아니라 ‘내가 믿음으로’ 이러한 뜻으로 풀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 교인들이 정확하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의 할례에 대한 맹목적 집착과 똑같습니다. 할례를 행하므로 내가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다는 말인데 ‘내가 남들은 교회 안 나가는데 내가 목사님의 전도를 믿고 교회 나가니까 나는 의로운 자가 됐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며 그래서 안 믿는 사람과 자기를 엄청 구별합니다. ‘저 사람은 안 믿고 저 사람은 불교를 믿는데 ‘나는 예수를 믿어! 예수의 이름을 믿어 나는 완전히 하나님 자녀가 되었어!’라고 자기 믿음을 지금 여기 집어넣습니다. 절대로 그거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은 내가 믿는 믿음은 하나의 공로가 되고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하나님께 크게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도구가 돼버립니다. 그런 말이 전혀 아닙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율법의 행위”, 즉 할례 같은 그런 거냐?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신실함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 괄호하고 할례 같은 따위의 그런, 하나님 백성, 유대인의 신분을 얻기 위해서 치루는 입문식 같은 그런 행위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말미암아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다 준행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율법의 요구를 준행했다고 믿고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본받아 살면은 율법의 요구를 행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의롭다하심을 얻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내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행했다는 것을 믿으면은 나에게 어떤 효과가 오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나를 전율시키고, 나를 압도하고, 나를 일생 동안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힌바 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행할 능력은 구원받으려는 이기심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럽고, 너무 매력적이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에게 구원받길 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길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들, 예수님 같은 분과 어울리기 위해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아마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 좋은 사람 사이에 끼이면은 여러분 주변을 둘러싸는 사람이, 한 다섯 사람이 굉장히 성숙한 사람이라면은 여러분은 천국에 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압도적 신실함이 나를 사로잡았다는 이 감격 때문에 내가 하나님에게 신실하게 붙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파생되는 신실함이 생깁니다.
그 파생되는 신실함은 우리의 ‘믿음’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믿음직스러움이 우리를 믿게 만들었으니까 우리의 믿음은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믿게 만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믿음직스러움이, 그것이 우리를 믿게 만들었으니까 우리의 믿음은 공로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주목할 것은 여기 ‘하나님이 신실하시다. 의로우시다’란 말은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 동안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 프로젝트를 통해서 1500년 동안 지속된 약속을 끝내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사도 바울이 마침내 ‘의로우신 하나님’이란 결론을 내린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지탱하시고, 부축하시고, 언약 백성으로 심판도 하셨다가, 재활복구도 시켰다가, 다시 갱생시켰다가, 다시 심판하셨다가 이런 엎치락 뒤치락을 1500년 동안 했습니다. 이 1500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끝내 아브라함의 후손을 보내주셔서 아브라함에게 원래 주셨던 약속 ‘너와 네 후손이 세계 만민에게 복이 되리라’라는 그 약속을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1500년 만에 최종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고백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약속에 신실하시고,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압도적인 지탱하심과 부축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언약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대표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100% 순종했기 때문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순종을 다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자연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의 압도적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국 이스라엘의 언약적 의무실행도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해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압도적인, 일방적인 의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적 의무관계를 상호 100% 완수하게 하는 데 결정적이었죠.
그게 바로 25절 26절입니다. 25절 26절이 그래서 너무 중요합니다. 정선희 교우님 한 번 읽어 주십시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자주 범죄하고, 언약 관계에서 이탈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탈할 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심판했습니다. 그렇지만 끝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재활복구 시켰습니다. 언약 백성을 재활복구 시켜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세계 만민의 복이 되게 하겠다는 그 원초적 약속, 단 하나의 원초적 약속, 구약성경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원초적 약속,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세계 만민에게 복이 될 것이다, 즉 아담 인류가 가져온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세계 인류를 구해 낼 그 사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끝내 수행할 것이라는 그 약속을 하나님이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 의로우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세계 만민에게 복이 되게 만들겠다는 그 언약 의무에 성실하게 다 했습니다. 무엇을 함으로써요? 화목제물을 보냄으로써.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화목제물을 왜 보냈을까? 화목제물은 잘못한 사람이 자기 잘못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보내는 게 화목제물이에요. 이것이 ‘힐라스테리온’이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제 친구의 명예를 심각하게 손상하는 언동을 했다면은 그 친구는 제게 진노와 슬픔과 상실과 이런 당혹감에 빠져있겠죠? 그러면 그 친구에게 나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내가 내 친구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내 이익 때문에 내 친구의 명예를 훼손했음을 인정하고 내 친구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말을 하고, 나를 생매장시킬 정도로 나를 낮춰야 됩니다. “내가 친구의 명예를 손상시킨 이유는 제가 이번에 선거에 당선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선거에 당선되지 않아도 되고 내 친구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여기겠습니다” 하고 공개적으로 친구를 명예롭게 해주고, 그다음 제가 친구에게 “저의 잘못에 대해 일생 동안 미안한 마음을 갖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물질적 보상을 하겠습니다” 할 때 그런 것을 화목제물이라고 말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화목제물을 원래 보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마음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가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화목제물은 순종하는 아들, 즉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해 줄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보낼 화목제물이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 화목제물을 하나님이 보낸 거예요. 지금 보세요. 3장 25절 한 번 읽어보세요. 이거 정선희 교우님 한 번 더 읽어주십시오.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가 큰 문제입니다. 화목제물은 ‘힐라스테리온’은 가해자가, 죄를 지은 자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피해 입은 피해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선물입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야곱에게 화목제물을 보내야 됩니까? 야곱이 에서에게 화목제물을 보내야 됩니까? 창세기 31장에서 화목제물을 많이 보내서 형의 진노를 풀려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이잖아요. 이게 화목제물이에요. 근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도대체 뭘 잘못했단 말입니까?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 파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른 의미로 책임감을 느끼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 관계가 파탄 난 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제한적 동정심으로 율법의 요구대로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법의 논리대로 심판만 하지 않고, 인간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무한히 동정하심으로 창조주의 무한책임을 감수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른 의미로써 미안한 마음, 민망한 마음, 인간 존재의 연약함, 율법대로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고 자주 넘어지고, 쓰러지는 저 인간에 대한 한없는 민망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미안한 마음, 민망한 마음, 하나님의 쓰라린 마음, 인간의 실패를 보고 어쩔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하나님의 그 격렬한 안타까움, 그걸 표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화목제물을 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화목제물을 보내고, 이스라엘도 화목제물을 보낸 거예요. 그래서 서로 언약적 의무를 다한 거예요. 그래서 언약 관계가 회복된 거예요.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마음도 대신하고, 이스라엘의 마음도 대신한 분이 디도서 2장에 나오는 ‘오직 중보자 한 분 예수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그래서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받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지체장애인에게 “일어나 걸어라” 그러면 걷는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리스도가...
그래서 여러분, 아마 8장까지 계속 이런 내용이 반복이 될 겁니다. 나중에, 내일, 또 질문할 것이 있으면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지금 강조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이 하나님께 의로움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고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내 대신 십자가에 저주 받은 죽음을 죽었다고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걸 마음에 할례를 받았다고 그랬습니다. 마음의 할례. 다시 말해서 로마서 2장 28절과 29절은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은 이방인도 할례를 받지 않아도 순식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할례 받지 않고 79년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나의 죄와 저주의 운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대신 죽어준 것이라는 것이 믿어지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뚜렷이 기억납니다. 그때 성령이 임하자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제가 해방되고 지금처럼 명랑 쾌활한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저는 명랑 쾌활한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우울한 사람이었고, 인생에 대해서 비관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성실했지만 늘 불안에 사로잡혔고. 경쟁심에 가득 차 있었고, 뭔가 출세하려 했고, 내 존재감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제 마음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명랑 쾌활함의 세계를 몰랐고, 세상을 거칠게 아주 어둡게만 봤습니다. 그런데 할례 받지 않은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우리 대신 징벌 받고, 우리 대신 부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살아나셨다는 사실, 그 사실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겁니다. 성령이 임한 겁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정선희 교우님 한 번 만 더 읽어주십시오. 로마서 4장 25절.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제가, 십자가에 못 박힌 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모습이 저의 옛자아입니다. 그때 저의 옛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저도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3절 4절 5절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함께 매장되고, 함께 살아났느니라. 그래서 의롭게 됐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로마서의 깊고 깊은 신비, 1500년 동안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언약의 역사에 종착점인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이 신비를 순식간에 깨닫게 하시옵시고, 성령 받게 하시옵시고, 성령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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