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로마서 4:1-8
제목: 이신칭의의 산 증인:아브라함과 다윗
굉장히 압축적인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이수원 형제님께서 창세기 26장을 좀 읽어주십시오.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려면 창세기 26장을 읽어야 됩니다. 창세기 26장 5절을 한 번 읽어주십시오. 아브라함이 결코 율법을 행한 사람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아무래도 율법대로 살지 않고 엉망으로 살았는가? 그런 말 아닙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온 율법의 행위란 말은 정확하게 할례를 가리킵니다. 할례. 자, 26장 5절 읽어주십시오.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이 율법을 안 지켰고, 율법대로 살지 않았다 라는 말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나서 그 언약대로 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언약에 초청하셔서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이 장면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이 의로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의로 여겼다” 할 때 그 의는 율법을 잘 지켜서 얻은 업적과 공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동받아, 하나님이 믿어져버리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신실한 사람, 믿음직스러운 사람을 오랫동안 보면은 뭐가 생깁니까? 믿음이 생기죠? ‘하나님이 나를 절대로 내버려 두실 리가 없다! 하나님은 내가 이 무명오지에서 이렇게 고생해도 반드시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아신다.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나를 아무도 세상 사람들은 몰라줘도, 우리 하나님은 이 억울한 사정을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믿음직스러움을 믿는 걸 본문에서는 ‘믿음’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서에서 나오는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직스러움에 감화 감동받아서 그 사람도 믿음직스러워지는 상태를 믿음이라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말하는 모든 믿음은 하나님의 압도적이고, 시범적인 신실하심 때문에 파생되는 신실함 그걸 가리키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 창세기 15장 6절을 로마서 4장 3절이 이렇게 인용합니다.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것이 지금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것은 인용부호를 붙이세요.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거 인용부호 붙이세요. 이것은 바울의 적대자들인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 출신 기독교인들은 “이방인 신자들도 먼저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왜? 할례라 하면 ‘모세오경에 나오는 613 가지의 율법 조항을 다 지키겠습니다’라고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하는 몸의 표증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대인들과 유대교 신자,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례를 강조하면 안 된다. 예수의 신실하심에 그 마음이 붙들려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요구하는 대로 살게 되면은 율법의 요구대로 살 능력이 생기기 때문에 즉 마음의 할례를 받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성령 받고 마음의 할례를 맛보기 때문에 유대교가 강조하는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바울의 입장이었고, 갈라디아에서 바울과 논쟁을 벌였던 기독교인들 즉 보수파 기독교인들, 유대교 출신 신자들은 ‘그래도 할례 해야 한다’라고 주장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로마서는 갈라디아서를 읽고 읽어야 됩니다. 갈라디아서에서의 논쟁을 이어 쓰는 글이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서를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걸 전제하고 갑자기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에서에서 이미 아브라함 이야기를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연속된 글인 걸 늘 기억해야 됩니다. 이 갈라디아서에 관한 좋은 책은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죠. 권연경 교수님이 쓴 ‘갈라디아서 산책’이란 얇은 책이 있는데 그거 옛날에 자매 성경공부에서 공부했죠. 이 책이 참 잘 정리됐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율법의 행위는 할례를 받는 걸 가리키지 아브라함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이런 행위를 가리키는 것 아닙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율법을 잘 지키려고 애쓰는 걸 비난하거나 무가치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는 것은 ‘할례를 받으면, 율법을 지키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있어! 할례로 율법 준수 의무를 퉁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비판하는 거예요. 바울은.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는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믿음으로 의롭게 여긴다’ 이 원리가 할례의 원리보다 앞섭니까? 뒤섭니까? 어떤 게 더 우선적입니까? 여러분, 논리적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훨씬 더 원초적인 논리이죠?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 원리는 할례의 원리가 폐지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에서 한 말이거든요. 갈라디아서에서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그걸 다시 이어 받습니다. 그런즉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나? 그렇지 않다. 이때 행위로써라는 말은 뭐죠? 율법을 지켜서 또는 할례를 행하므로 율법적으로 완전무결한 자가 되어서 의롭다 함을 얻었냐? 그렇지가 않다는 거죠. 먼저 ‘의롭다’ 하시는 선언을 받고 나서 그 의로움을 채워 간 거죠. 이것이 역설적입니다. 이게 역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먼저 ‘선제적 선언’을 받고 그 콘텐츠를 채워가는 존재라는 말이에요. 하나님도 우리를 의롭다고 할 때 하나님도 굉장히 서스펜스가 있는 거죠. 저에게 성령을 주시고 저를 의롭다 하셨는데 김회권의 남은 인생이 어떻게 될지 항상 하나님은 서스펜스가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의롭다 하신 존재에게 성령을 주셔서 시시때때로 우리가 영적으로 일탈하고 오류에 빠질 때 그걸 건져주세요.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는 ‘의롭다’는 선언을 먼저 듣고 의로움을 일생동안 채워가는 존재예요. 바로 그게 누구입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의롭다’ 하심을 먼저 선언 받고 나서 율법의 요구를 점점점점 준행해서 창세기 26장 5절 수원 형제님 한 번 만 더 읽어주십시오. 그리고 김은자 집사님 신명기 6장 25절 좀 읽어 주십시오. 그다음에 강보선 형제님 로마서 2장 13절 좀 읽어주십시오.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네, 와~ 아브라함은 먼저 창세기 15장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나서 의로움을 채워갔단 말이죠. 자 그래서 이때 아브라함이 이런 율법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뭐라 그러죠? 믿음직스러움 즉 이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이라 함은 최초에는 하나님이 죽은 몸과 같이 경수가 끊어진 사라 아내의 몸을 가지고 아들을 낳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 최초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 이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직스러운 성품에 대해서 감동받아서 아브라함도 갑자기 믿어진 겁니다. 믿음직스러우니까요. 제가 우리 교우들을 지금 믿고 있습니다. 왜 교우들을 믿고 있냐면은 믿음직스러운 교우님들을 지금 10년째 오랫동안 보니까 ‘이분들은 절대로, 절대로 이렇게 잘 못 될 분이 아니다’라고 제가 믿음이 생깁니다. 지금. 제가 10년 동안 본 교우들, 20년 동안 본 교우들에 대한 저의 믿음은 제가 상상한 믿음이 아니라 그분들의 신실한 삶이 제게 각인시켜 준 파생시킨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아브라함이 믿고 아브라함도 신실한 자가 되었다 라는 말의 의미가 뭐죠? 아브라함이 믿으니, 아브라함도 신실한 자가 되니, 이 신실한 믿음직스러운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은 의로 여겼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창세기 15장 6절이, 그것이 오늘 로마서 4장 3절입니다. 그래서 먼저 창세기 26장 5절에서 아브라함이 신명기적 기준에서 율례와 법도를 지키는 완전히 모범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시범자가 됐습니다. 그러니까 율법 준수, 하나님께 율법대로 신실하게 살아간 삶에 모범입니다. 모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만 강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창세기 26장 5절만 강조하고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부터 강조합니다. 바울과 바울의 적대자들의 가장 큰 차이는 바리새인 출신 신자들은 창세기 26장 5절을 보면서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로 신실함을 얻은, 의롭다 여김을 받은 원조라 보고,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는 창세기 17장에 나오고,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는 말은 창세기 26장에 나온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온다. 15장에 나오는 이것이 창세기 17장을 이끌고 가고 창세기 26장을 이끌어 가는 것이지, ‘의롭다’는 선언을 받고 아브라함의 의로운 삶이 되어가는 것이지 어떻게 의로운 삶을 완성해서 ‘의롭다’는 선언은 받느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방인이 일련의 의로운 삶을, 콘텐츠를 다 채운 후에야 이방인 신자들에게 ‘의롭다’라고 말해 주자는 것은 옳지 않다. 아브라함의 순서도 그렇지 않았다”라고 지금 말을 하는 거예요. 좀 어렵죠? 미안합니다. 제가 지금 칠판에 써가면서 하면 훨씬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텐데 제가 생각해도 지금 이게 너무 어렵습니다. 미안한데, 아 미안합니다. 그런데 이게 저는 지금 깨달음이 오는데 여러분 깨달음 갑니까? 신명기 6장 25절 좀 읽어 주십시오.
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아! 바로 이 의로움! 바로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대로 사는 것을 기대하시지 절대로 기대하지 않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그래서 이렇게 지키면 의로운 자가 되죠. 지금 정확하게 바울의 적대자들이 쓰고 있는 무기는 두 구절입니다. 이 두 구절 창세기 26장 5절과 신명기 6장 25절을 가지고 지금 바울을 흔들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바울도 인정합니다. 로마서 2장 13절 읽어 주십시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니리
예, 이것 전부 다 바울이 인정합니다. 바울이 다 인정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그의 적대자들이 다른 점은 뭐냐 하면은 바울은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나서야 우리가 의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기대하신다. 즉 우리가 먼저 의로운 사람이라는 그 말을 들은 후에 그 기대대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서 마침내 의로운 사람,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어간다 라고 지금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의롭다’는 선언을 듣기 전에 아브라함이 하는 행동은 뭐죠? 호구지책 때문에 아내를 팔기도 하고 이런 일을 했잖아요. 아브라함이 완전무결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심 중에서 발버둥 치는 믿음이었고, 의심과 믿음을 왔다 갔다 한 그런 결함 있는 믿음이었죠! 아브라함이 아내를 팔고, 약속의 땅에서 기근이 오니까 이집트로 내려가고 이런 모든 과정은 아브라함이 정처 없이 방황을 했다는 뜻이지 그냥 초지일관 완벽한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따라갔다는 말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게 전혀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그런데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100세 된 아브라함의 몸, 90세 된 사라의 몸에서 자녀가 태어날 걸 약속을 하니까 하나님이 하늘의 숱한 별들을 보여주며 약속을 하니까 왈칵 믿었단 말이에요. 이 왈칵 믿었을 때 아브라함에게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보다 훨씬 하나님의 선제적인 의의 선언이 앞선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는 선언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제적인 의의 선언을 듣고 나서 의로운 삶이 일어나고 의로운 삶의 콘텐츠를 채워간다, 이것이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다음 본문에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심지어 밧세바를 범하고 나서 십계명의 네 계명을 범하고 나서 완전히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엉망진창이 됐는데, 그 엉망진창이 된 다윗이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경우는 더 극단적입니다. 이렇게 원색적인 죄를 짓고 재기불능의 파산을 맞았는데도 하나님은 다윗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의 가리우심을 받고, 즉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죄를 응시하지만 그 다윗의 죄 때문에 다윗을 절단 내지 않고 다시 의롭다고 선언하셔서 하나님에 대한 언약적 신실함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그 죄를 이겨가도록 끝내 도와주셨습니다. 다윗의 경우는 극단적이죠. 우리가 이렇게 불법을 범하고 재기불능의 파산을 맞아도 마땅한 우리가 하나님의 ‘의롭다’는 선언을 듣자마자 죄를 이겨가는 사람이 된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논리가 너무 정교합니다. 여러분 로마서의 논리를 알고 나면은 절대로,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성령충만을 경험합니다. 로마서 하나에 모든 신구약 66권이 엑기스로 모여 있습니다. 로마서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아버지 하나님
로마서가 창세기부터 시작되는 1500년 구원사를 고도로 압축하면서 정교한 논리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 새벽 성도들에게 로마서의 원색적 복음, 십자가의 피복음이 전달되게 하시옵시고, 보혈의 공로가 그들의 인생을 지탱시켜 주시옵시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그들을 풀어주시고, 저를 풀어주시고, 우리 가향을 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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