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_ 요한복음 9장 13-23 (증인의 힘)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
오늘 요한복음 9장에는 두 개의 삼단논법이 팽팽하게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삼단논법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킨다, 이것이 대전제입니다. 바리새인의 삼단논법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경건한 자녀들은 안식일을 잘 지킨다, 두 번째 중간전제,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결론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의 경건한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삼단논법입니다. 그에 비해서 거지 맹인의 삼단논법은 이겁니다. 모든 하나님의 기도응답은 경건한 사람의 기도만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사람들만 하나님께 기도응답을 받는다, 하나님의 사람들만 경건한 사람들만이 표적을 행할 수 있다, 이것이 대전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표적을 행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다, 이런 결론을 가지고 팽팽하게 긴장을 가집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처음에는 구석에 주목받지 못한 위치에 있다가 점점 화면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촬영기법이 있다면, 다시 말해서 애매모호한 역할을 받아서 별로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다가 점점 화면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사람처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요한복음 9장 1절에 볼 때 그는 자기 목소리가 없는 죽은 정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날 때부터 맹인된 거지인 겁니다. 그 날 때부터 맹인된 거지의 목소리 사연 학식 용기, 이런 것이 점점 요한복음 9장의 후반부를 지배합니다. 그는 단순히 맹인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의 상당부분을 훼손당하면서 구걸해 살던 사람이었지만 그 속 그 내면은 굉장히 하나님 지향적이었고 신학적 담론이 풍부하게 그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맹인이 보통 바리새인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유대인 종교최고기구에서 파견한 대표자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바리새인의 논쟁, 삼단논법 논쟁에 맞서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신앙지식 구약성경지식, 하나님 말씀에 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예수님이 최소한 선지자 또는 그 이상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볼 때 처음 무대에 등장했을 때는 매우 하찮은 역할을 할 것처럼 보였고 생명도 없고 무생물 취급됐던 것처럼 보였던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이렇게 완벽한 논리를 구사하고 바리새인과 조금도 꿀리지 않는 신학적 논쟁을 끌고 간다는 게 참 놀랍죠. 그 말은 우리가 죽은 정물처럼 보이는 사람들 마음속에도, 그들의 영혼 속에도 파란만장한 논쟁이 있고 주장이 있고 논리가 있고 목소리가 있다는 겁니다. 하루 종일 일하는 머슴, 하루 종일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나에게 멸시를 당하고, 우리 모두에게 멸시를 당하는 모든 사람들, 청소하는 미화원들, 우리 교수들이 볼 때 죽은 정물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마음에도 엄청난 논리가 있고 자기 존엄에 대한 끊임없는 분투가 있고 자기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는 겁니다. 창세 이후로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조사할 정도니까 자기 눈을 뜰 가능성을 한시도 놓지 않고 생각했다는 거잖아요.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 우리가 흔히 불행하고 밑바닥에 굴러 떨어진 그 사람들도 결코 자기 운명을 개선하는데 무관심한 것이 아닙니다. 노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신이 망가지고 산만하여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노숙자마저도, 그 가난한 사람들마저도 자기 인생의 개선에 대해서 자기 존엄의 회복에 대해서 무척 관심이 많다는 겁니다. 32절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그것을 이 사람은 조사했다는 겁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종점까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한 것에 대해서 조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 절망했다는 것입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예언자는 없었다는 겁니다. 엘리야 엘리사가 민중친화적인 예언자입니다. 엘리야 엘리사는 갈릴리에서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입니다. 그 민중친화적인 예언자 엘리야 엘리사가 많은 이적과 표적을 행했지만 이렇게 소경의 눈을 뜨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모세가 민족적 국제적 엄청나게 miracle maker였습니다. 이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소경의 눈을 개인적으로 접근해서 뜨게 해준 건 없습니다. 모세의 기적이라는 것은 전부 다 공동체 모두를 굽지르게 만들고 그의 카리스마 앞에 복종하게 만드는 기적이지, 개인적으로 개인의 운명을 재활복구 시켜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창세 이후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해준 사건을 곱씹고 있었고 그런 가능성을 성경과 구원사에서 찾았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시퍼렇게 이성이 살아 있고 지성이 살아 있고 신앙지식이 보통이 아닌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도 거지처럼 저렇게 굴러 떨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들을 엄청나게 괴롭혔던 괴팍한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침대를 정리하다가, 온 병원의 간호사들의 미움과 타박의 대상이었던 할머니, 짜증냈던 할머니,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던 할머니, 모두 다 돌아가시길 바랐던 할머니가 마침내 돌아가셨습니다. 그 침대 밑에 꼬깃꼬깃한 종이가 나왔습니다. 이건 부천에 있는 권태일 목사님의 <사랑과 편지>에 나온 기록입니다. 권태일 목사님께 연락하면 원문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얻어드릴 수 있습니다. 간호사들에게 주는 교훈인데, <괴팍한 할머니>라는 글입니다. 너희는 내가 밉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을 까면서, 나도 한 때는 꽃다운 청춘이 있었어, 자기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렇게 비참한 몰골로 너희의 동정과 타박을 받고 있는 내 인생도 사연이 많았고 너희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역사가 있는 사람이다, 너희가 하는 타박과 한 번씩 흘기는 눈으로 공격할 때마다 내 몸은 부서지고 있다, 이런 식의 글을 써 놓고 돌아가신 겁니다. 저는 우리 어머니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노인들을 볼 때 항상 말을 하고 싶은데 바쁜 아들딸들은 노인들의 말을 안 받아 줍니다. 어머니가 열 마디를 하면 대충 한두 마디로 그 말을 받아버립니다. 우리 어머니는 가만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말을 하고 싶은데 우리가 어머니 말을 받아줄 때는 10분도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지는 해처럼 석양처럼 인생의 기운이 빠져갈 때 사람이 당하는 존엄의 감소, 내가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것들, 불행한 사람들의 심장과 뇌수 속에 이런 시퍼런 논리가 살아 있고 자기 존엄이 훼손되고 무시당했을 때 갖는 쓰라린 마음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예수님은 쌓여 있는 좌절과 불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들이 걸어 왔던 눈물의 사연들을 예수님은 한 눈에 알아차렸고 바리새인들은 그걸 영원히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종교가 이성 이하의 종교가 될 때는 안 됩니다. 종교는 명백한 술주정뱅이나 노름꾼을 이성적 사람보다 약간 모자라지만 준정상인처럼 만드는데 실제로 큰 기여를 합니다. 그러나 정신이 말짱하고 이성적인 사람을 종교가 심하게 영향을 끼치면 몰이성적인 매우 냉혈한적인 인간이 돼버립니다. 종교에 영향을 많이 안 받아야합니다. 술 먹고 난봉피우고 나쁜 짓하는 사람들은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성이 약간 개선됩니다. 그러나 멀쩡한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냉혈한적인 종교논리에 들어가면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슬픔의 무게를 탐지하고 공감하고 예수님처럼 통찰해줄만한 상상력과 동정심이 말라버려요. 종교생활 오래한 사람일수록, 큰 교회 장로님을 보면 인간성이 거의 절망적이라고 보면 돼요. 큰 교회 장로님은 직장이 없고 거의 대부분 실업자입니다. 미래지향적인 기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좋은 의견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인생의 단물이 다 빠져서 여력이 빠져 있기 때문에 공감의 능력이 없어져요. 놀라는 능력도 없어지고 경탄에 가득 차서 바라보는 안목이 없습니다. 65세부터, 우리한국교회 20대 30대가 떠오르는 세상에서 늙은 사람들이 지배하는 것이 한국교회 구조입니다. 우리 오근재 장로님은 가향교회 다녀서 예외적인 분입니다. 저 분은 놀라는 능력이 있고, 우리 오장로님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오시는 분들은 놀라는 능력, 경탄에 가득 찬 눈, 보통 나이가 많은 생물학적으로 노쇠한 사람들에게는 없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순식간에 통찰할 수 있는 예수님 같은 인간성을 갖는 것, 이것은 종교에 덜 영향을 받을 때만 가능합니다. 여러분 너무 종교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냄새를 풍기지 마십시오. 그냥 신비감을 풍기되 내 종교가 무엇인지 눈치 채지 못하게 했다가 생의 마지막 순간 다시는 못 볼 그 순간에 헤어질 때, 당신 종교가 무엇입니까? 종교랄 것도 없죠, 예수님 한 분밖에 모릅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나 장로인데, 내가 예산을 얼마나 결재하는데, 절망적입니다. 종교는 인간을 절망적으로 피상적으로 만듭니다. 종교가 이성과 양심을 마비시키는 가장 현저한 길입니다. 종교인이 아니면 십자군에 수십만 명을 동원하지 못합니다. 종교인만이 그 어리석은 십자군 전쟁에 몇 만 명씩 가는 겁니다. 종교는 시퍼렇게 깨어있는 양심을 집단논리로 매몰시켜버립니다. 여러분 종교에 빠지면 안 됩니다. 우찌무라 간조, 그 싱싱하게 살아 있는 자유로운 독립적 지성인 그가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불어 닥친 군국주의 집단논리 때문에 순교당한 것 아닙니까? 군국주의가 잘못됐다고 말해서 일본 우익으로부터 엄청나게 살해 위협을 당한 사람이 우찌무라 간조입니다. 독립적 지성이 살아 있는 그 사람이 종교를 가져야만 집단논리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 수십 년 쌓인 불행의 무게를 관통하면서 알아차렸습니다. 이 사람 속에 엄청난 삼단논법이 있다는 걸 아신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날 때부터 소경된 그 비천한 거지가 이 삼단논법에 의해서 정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의 삼단논법은 아주 나쁜 삼단논법입니다. 이 땅의 모든 고난은 죄로부터 왔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된 고난을 겪고 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삼단논법입니다. 우리가 얼굴이 못 생기게 태어난 것, 머리가 나쁘게 태어난 것은 전부 다 가난과 관련된 것입니다. 가난한 곳에서 태어나면 얼굴이 못생겼을 가능성이 있고 머리가 나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산소의 70%만 공급받으면 저능아가 돼버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올더스 헉슬리가 썼던 <멋진 신세계>에 보면 이 세상에 육체노동자로 살게 만들 감마계급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산소의 70%만 주지 않습니까? 런던 인공부화소 34층 조건 반사 실험실에서 앞으로 육체노동만 하고 살 사람들에게 꽃과 책의 아름다움을 모르고,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미학적 감수성을 영원히 퇴화되게 만들려면 산소의 70%만 주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햄릿을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산소의 70%만 주면 머리가 나쁩니다. 머리가 나쁜 것은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은 겁니다. 모든 고난은 죄로 말미암아 왔다는 삼단논법에 따라 34절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네가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완전히 죄 때문이다, 이것 보십시오. 모든 억압종교의 특징은 죄로 인간의 양심을 도배질합니다. 죄로부터 하나님을 말하는 건 나쁜 겁니다. 죄와 고난으로부터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효과적일 지 몰라도 예수님의 방법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말하고 나서 하나님 아버지를 말합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함으로써 긍정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합니다. 죄와 고난,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함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천국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과 저주 중심으로 천국을 설명하기 때문에 소극적인 도피주의 천국관을 소개합니다. 죄, 목사가 평신도들에게 방망이 휘두를 때 쓰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죄가 문제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이것은 요한복음 9장 2절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이 질문을 되돌려주는 겁니다. 너무 안 좋죠? 우리 마음속에 인생이 굽이쳐 파도에 굴러 떨어져 너무 안 풀리는 사람들은 우리 마음속에 혹시 무슨 죄가 있지 않을까? 불구자가 태어나면 부모님이 성병에 태어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행하게 태어난 사람 또는 지금 공부를 못하고 얼굴이 흉물스럽게 생겼거나 이런 모든 것들을 죄와 고난, 죄와 벌의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매우 나쁜 종교입니다. 낸시 피어시 라는 사람이 <완전한 진리>라는 책을 썼죠? 프란시스 셰프의 제자였죠. <완전한 진리> 창조 부분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공부할 때 창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말하지 않고 죄부터 시작하면 매우 불행한 출발이다,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충분히 설명하고 결혼이 얼마나 좋은가 연애가 얼마나 좋은가 설명하고 혼전성교하면 안 된다고 해야지, 결혼과 연애가 얼마나 좋은지 충분히 안 가르치고 이성교제 하면 안 된다, 뽀뽀하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알코올중독이 나쁘지만 알코올이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술은 우리에게 어떤 긍정적 기능을 하는지, 식사할 때 와인한잔씩 하면 얼마나 좋은지, 음식이 얼마나 우리의 긴장을 완화하고 친교를 두텁게 하는지 설명하고 난 후 그런데 와인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멋진 창조, 그렇게 멋진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것이 얼마나 슬픈가를 가르쳐줘야지, 에덴동산이 얼마나 풍요로운가를 말해주지 않고 추방당한 것만 강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원래 있던 에덴동산이 얼마나 좋은가 알아야만 paradise regained 다시 낙원에 들어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낙원이 얼마나 좋은지도 모르는데 천국 가고 싶은 마음이 있겠어요? 죄와 벌로 종교생활의 대부분을 설명하는 사람들은 어떤 음모가 있느냐? 평신도를 기죽이려고 하거나 평신도를 목사중심의 구원론에 속박시키려고 하는 음모가 있다고 보면 대부분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예수님처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이것 보십시오. 죄와 벌의 세계가 아닙니다.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해보지 않은 천진난만한 독생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상상력입니다. 여러분, 아버지가 아들한테 어떤 때는 밥을 실컷 줬다가 어떤 때는 3일씩 굶기는 엉터리 짓하는 아버지 밑에 사는 아들하고, 아주 좋은 것만 주는 아버지의 항구의연한 진실성과 사랑을 경험하는 아들하고는 아버지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다르겠죠? 청소년이 된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아버지가 자기를 결박할 때 아버지의 결박을 참아내려면 이삭이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강해야겠어요? 아버지가 칼 들고 묶으러 옵니다. 이삭이 묶이는 그 순간에 도망갈 수도 있고 아버지를 밀칠 수도 있고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묶을 때까지 꾹 참고 완전히 묶일 수 있는 것은 한 번도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는 신뢰 관계가 끊어진 적이 없었던 겁니다. 아버지를 완벽하게 사랑하고 완벽하게 아버지를 믿었던 거죠. 예수님은 아버지의 결박을 받고도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은 이삭과 같은 믿음이 있었어요. 독생자의 믿음입니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 죄를 지으면 가장 불리한 것, 죄 가운데 살 때 가장 큰 벌은 하나님 아버지의 호의가 절실히 믿어져야 할 때 안 믿어지는 겁니다. 불신앙이 가장 큰 벌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향해서 정말 좋은 선물을 줬는데 그 선물을 믿지 못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신앙의 벌을 받게 됩니다. 안타깝죠. 예수님은 죄와 벌의 세계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 우리 하나님께서 불구와 장애의 현장을 보고도 우리 하나님은 창조를 덜 하셨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면 이 사람도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 이 땅의 모든 장애를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 땅의 모든 장애는 하나님 아버지의 하실 일, 종말에 모든 장애를 치료하실 그 소망을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장애는 하나님의 하실 일을 기다리고 있는 불구상태인 거죠. 송명희 시인이나 레나 마리아라든지 토니 멘렌데즈 같은 우리가 볼 때는 완전히 불쌍한 장애인들도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를 기다리고 있는 거죠. 이런 관점에서 사람의 불행을 관통하면서 이 사람 안에 무시무시하게 파괴돼 울 수밖에 없는 훼손할 존엄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사람을 그런 관점으로 보시고,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할 말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 하실 일을 언급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네가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 사명감을 주셨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하실 일이 이 현장에 있다고 믿는 그 사람이 그 일을 할 대행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거죠. 우리가 학교 현장 또는 법률 현장 정치현장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고 믿는 그 사람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모세가 자기 동족 히브리 백성이 애굽의 채찍에 죽어가면서 목숨이 사위어가면서 이집트 사람에게 멸절위기에 당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그것 때문에 괴로움이 많았던 모세가 그 현장에 부르심 받았죠. 그래서 청소년 때 신문을 읽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는 충격적인 경험이 그 사람을 그 현장으로 이끌어 가요. 대개 위대한 사명감은 때 묻지 않은 청년의 때에 강력하게 책임감을 느끼는 그 영역으로 대개 직장이 구해지고 소명이 구해집니다. 그게 놀라운 거예요. 저는 어떻게 청년운동가가 되었냐면 80년 5월 17일에 붙잡혀서 12시간 매 맞으면서 소명을 확인했습니다. 12시간 매 맞으면서 테러를 당하면서 내가 이 고문당하는 현장에서 살아나간다면 매 맞고 죽어가는 청년들의 목자가 되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한 겁니다. 80년 5월 18일 주일날 새벽, 개처럼 끌려나오면서, 12시간 갇혀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내 인생을 죽음을 당하는 청년들을 돌보는 목자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가 문제의식을 느끼는 그곳에 파송을 당한 겁니다. 그래서 83년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campus ministry에 인생을 바쳐버린 겁니다. 그리고 나서 12년 동안, 12년은 군대를 5번 6번 갔다 올 정도의 시간 아닙니까? 너무 긴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12년 있어봤기 때문에 이번에 교목실장 2년 더 하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충격을 안 받았습니다. 12년 동안 한 사람이 2년 동안 못하겠습니까? 그때는 12년이 나한테 별로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기약이 없기 때문에 언제 이 사역이 끝날지 모릅니다. 기약이 없는 겁니다. 만일에 제 후배 간사님이 저더러 유학가라고 자기가 하겠다고 모든 책임을 다 져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도 신림동 거기 있는 겁니다. 그건 번지점프보다 더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투신, 장기서원을 해 버린 겁니다. 우리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하나님의 일이 여기 필요하다고 느끼는 그 현장이 나의 소명의 현장이 되고 나의 직장의 현장이 된다는 사실이 매우 통계적으로 밝혀졌습니다. 가슴에 사무치는 문제의식을 느끼는 그 영역이 내 일터고 내 소명의 현장입니다. 거기서 내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룬트비, 페스탈로치, 모든 역사의 위대한 업적을 나긴 사람들은 이익을 쫓아서 결단한 직업영역이 아니라 소명을 쫓아서 결단한 영역에서 역사적으로 기릴 만한 업적이 나타났습니다. 이건 철칙입니다.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을 가지 말고 내 생명을 소진시켜가면서 해야 할 일터,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나타나야 할 현장, 거기로 파송당해야만 내 인생이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물론 빛나는 업적까지 안 남겨도 됩니다. 업적만 남겨도 됩니다. 저도 빛나는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니고 이제 약간 유명해지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것도 제가 아무리 유명해봤자 복음주의 청년 일단 천 명 정도 그 사람들에게 유리하지 도저히 성공했다고는, 성공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옛날에 비해 성공했다는 겁니다. 이번에 교목실에서 34년째 수련회 한 번도 오지 않은 여자 늙은 교수 세 사람이 간증을 하고 갑니다. 김회권 교목 실장 때문에 자기는 34년만에 수양회를 왔고 기독숭실 교직원회도 꾸준히 참석하겠다면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늙은 할머니 교수를 감동시킨 업적이 인정됐습니다. 제가 그 세 사람 때문에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화학과 12학번 한 형제는 2011년 3월 28일 채플 설교 듣고 성령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과 전체에 제 이름을 얼마나 퍼뜨렸는지, 이런 예기치 않은 곳에서 저에 대한 경배자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나타나야 한다고 피가 끓는 그 현장으로 파송되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일만이 불멸의 업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연루된 사람의 인생이 위대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에게 월급을 많이 주고 나에게 편리한 삶을 안겨주는 것을 좇아가면 다 사라지고 다 망하고 어떤 흔적 발자취도 남기지 못합니다. 그걸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하실 일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현장,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만지는 것,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을 만지는 그 일, 내가 만져야 할 내가 회복시켜줘야 할 그 현장이 바로 내 일터가 되고 나의 꿈의 현장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본인이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명감을 느끼신 겁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나타날 현장이라고 말하자마자 예수님에게서 벌써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서 진흙으로 창세기 2장 6-7절을 실현하는 창세기의 창조를 모방하는 simulation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나았습니다. 이건 내적 논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느끼는 그 순간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한 겁니다. 욕구가 임하고 지향성이 뚜렷해지면 그 일을 행할 능력이 겸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내적논리를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요새 학교에 그런 말이 들립니다. 어떻게 실장님은 그렇게 웃긴 말을 잘합니까? 설교를 두 시간 해달라고 합니다. 10분만 하면 되는데, 왜요? 실장님 설교는 정말 재밌어요. 공대 교수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옛날에는 안 웃기더니, 가만해생각해보니까 내가 그렇게 웃긴가? 답변을 요구합니다. 굳이 답변을 하자면 저도 옛날에 웃기는 사람이 아니었고 인생이 참 비관적인 사람이었는데, 관악구 안에서 복음화하면서 아무런 프레젠테이션도 없고 추천서도 없는 제가 평신도 사역인 제가 campus ministry에서 간신히 몇 사람을 전도해놓고 그다음 주에 이 사람들이 안 올까 두려움에 가득 차서 웃긴 말을 하려고 책을 읽다가, 교수만큼 유식하게 보이려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4시간씩 동방서점 이해찬 서점에 가서 책을 읽었습니다. 제 기도 제목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이 교만한 서울대생들에게 유식한 사람처럼 보이게 해주시고 교수 급으로 보이게 해주십시오, 학사출신인 제가 그렇게 기도한 겁니다. 이윤구 형제도 거기 있었는데 그때 84-93학번 사람들이 강의를 듣는데 그 사람들 회고에 의하면 제가 상당히 유식하게 보였답니다. 성공한 거죠. 유식하게 보이려고 웃긴 말도 하다가 이렇게 된 건데, 숭실대 교수들은 굉장히 제가 웃기는 사람이라고 강의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자주 들으면서 기독교계의 유재석이라는 말도 들어봤습니다. 유재석을 내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뚱뚱한 남자 데리고 번지점프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 말은 제가 좋아하는 일, 제가 하고 싶은 일, 제가 멋지게 보이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기약 없는 일, 경제적 보상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은 그 일을 12년 하다 보니까 제 장점이 극대화됐고 제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됐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 매 맞고 죽음으로 몰리는 젊은 지성인들을 건져내야 하기 때문에 그 욕구를 느끼고 기도하는 순간 그들을 돕는 능력도 조금씩 생겨났다, 저는 조금씩 생겨난 겁니다. 한꺼번에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뜨게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에 연루되지 않은 모든 직업적 성취는 소멸됩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에 연루된 사람의 직업적 성취나 소명감만 남습니다. 그건 정말 분명하죠.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삼단논법을 능히 논파하는 맹인에게 힘을 줍니다. 이 맹인이 이렇게 용감무쌍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눈을 뜨이게 해주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얼마나 사자같이 나갑니까? ‘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다시 한 번 창세기 2장 6-7절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눈을 떴습니다,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심지어 계속 물으니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렇게 조롱까지 합니다. 엄청 대담함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왜 이렇게 예수님을 미워합니까?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의료행위를 했다고 미워하는 겁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어떤 날이에요? 안식일은 일을 도무지 하지 않는 날이 아닙니다.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직업적으로 벌어지는 생계소득 이상의 소득, 과잉소득, 추가소득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지주가 농장 주인이 또는 고용주가 피고용인들을 마구 부려먹는 것을 금지하기 위하여 안식일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풀빵 팔러 가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키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키는 사람이 있고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이미 천억의 소득을 가지고 엄청난 과잉소득을 누리고 있는데 안식일에 문을 열어 모든 사원을 또 한 번 괴롭히면서 일을 시키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안식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해서 안식일에 일하러 가는 것, 이것은 안식일을 위반한 게 아니라 안식일을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히브리 노예들이 안식일을 위반했습니까? 안식일을 박탈당했습니까? 출애굽기 2장 18-20절에 보면 히브리 노예들이 애굽의 강제작업으로 인하여 고달파죽겠다고 소리칠 때 안식일을 위반했습니까? 안식일을 박탈당했습니까? 그래서 노예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듣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유산자계급, 지주들에게만 가져온 겁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고치는 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익을 사취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과잉소득을 창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어떤 안식일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랬습니다. 롯데제과에 근무하는 회사원이 안식일에 안 나오면 잘라 버린다는 말을 듣고 안식일에 나가는 것은 안식일을 위반하는 게 아닙니다. 안식일의 박탈입니다. 내가 월요일에 종합시험이 있는데 수목금토 아팠다, 병들었다, 그래서 안식일에 시험공부 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게 아닙니다. 아팠던 그 시간에 못했던 공부를 하는 겁니다. 이미 공부를 너무 잘하는 사람이나 이미 주일날 예배드리고도 일등하는 사람인데 초일등하려고 안식일에 빠지고 김밥 안 먹고 간다면 안식일을 범한 겁니다. 안식일을 못 지키는 사람은 병든 사람, 시험공부 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면 안 돼요. 오히려 내가 볼 때 시험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주일 지나고 01분부터 밤새도록 하다가 망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배드리고 오후에 가서 공부해도 됩니다. 절대로 안식일 범하는 게 아닙니다. 손봉호 교수와 이만열 교수가 서울대학교 입시하러 왔을 때 안식일에 수험표를 나눠줬습니다. 손봉호 교수는 안식일 범한다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촌형이 안식일을 범해서 그것을 가져왔습니다. 자신은 안식일을 범하지 않고 누구는 안식일을 범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담할 때 롯데제과에 근무하는 한 자매님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계속 휴가일정을 조절하는데 4명 중에서 예수 믿지 않는 3명이 계속 주일날 일하게 하고 자기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겁니다. 3명의 친구가 이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이 세 명은 결혼적령기가 됐는데 주일날 일해야 하니까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 겁니다. 얄미운 기독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나옵니다. 그러면 안 된다, 네 3명의 친구는 너 때문에 지금 데이트도 하지 못하고 결혼적령기가 점점 지나고 있다, 그건 정의에 맞지 않다, 너하고 4명이 한 번씩 교대로 주일날 나오고 너는 수요일에 나오면 된다, 그리고 너는 안식일을 범하는 게 아니고 안식일을 박탈당한 것이다, 안식일을 박탈당한 사람은 동정의 대상이지 진노의 대상이 절대로 아니다, 확신을 시켜줬는데 끝까지 가면서도 불안해서 혹시 하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교통사고 당할까 두려워합니다. 절대로 안식일을 범해서 교통사고 당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려면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하시니까 하나님은 우리 죄악을 따라 갚지 않는다, 사람들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할 때 도무지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는 모든 일은 전부 다 안식일에 해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님도 설교하니까 안식일을 범했겠네? 구약성경에 보면 성직자들 제사장의 안식일은 월요일입니다. 소방서 emergency 병원에 있는 의사들은 전부 다 안식일을 범한 것 아닙니다. 안식일을 양보하고 희생한 겁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데려 가는 엄마, 안식일을 범한 게 아닙니다. 생명가치를 드높이는 겁니다. 군인들, 생명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 총을 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안식일을 범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포괄적으로 해석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안식일을 해석한 것이 우리 멋진 예수님이십니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진짜 매력적인 분입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분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아름다운 사람이 돼야만 전도가 됩니다. 지금 확신에 넘치는 사람이 되면 안 되고 매력적인 사람이 돼야 합니다. 종교를 절대로 티내면 안 됩니다. 회사에 가서 신우회 조직하고 절대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해야 합니다.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절대로 말하면 안 되고 약간 불교도인 것처럼 말했다가 마지막에 회사 은퇴할 때쯤, 부장님 종교가 뭡니까? 알고 싶습니까? 정말로? 예수 믿습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바로 말하는 건 너무 어리석고, 불교도를 긴장시키고 각성하게 만드는 겁니다. 정당도 정치도 어떤 공적생활도 종교는 은닉성을 담보하고 콘텐츠를 가지고 승부해야 합니다. 우리 목사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끼리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을지로와 충무로 세종로,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종교를 은닉하여 다른 사람의 종교적 감정을 훼손하면 안 되고 삶의 내용으로써 은근한 향기와 매력을 뿜어내야 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최근 너무 우리가 아름답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사람, 죄와 벌의 이항 대립적 구도로 인생의 불행을 재단하는 냉혈한적 바리새인들로부터 건져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 존엄성의 파괴 안에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도 있게 될 것이라는 따뜻한 마음,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런 예수님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힘 있게 증언자의 자리에 들어서서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이렇게 말하면서 대담하게 나갔습니다. 그런데 부모를 보세요. 이 부모는 진리 안에서 출교를 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직접 자기 아들이 이렇게 감격적으로 회복됐는데 너무 냉담한 무생물처럼 말합니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아들이 날 때부터 소경됐지만 예수라는 선생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같이 믿읍시다, 이렇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비슷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냉담하게 말했습니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거짓과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정확한 진리의 소통을 막습니다. 진리의 소통을 막는 세상은 어둠의 세상 밤의 세상입니다. 밤의 세상 어둠의 세상에서 우리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을 일으키셔서 바리새인과 거룩한 삼단논법을 하게 하시고 바리새인의 논리를 논파해버립니다. 정말 멋진 신학적 소양을 가진 거지였습니다. 이 땅의 거지도 이렇게 기가 막힌 신학적 소양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톨스토이적인 반전입니다. 거리의 어수룩하게 앉아 있던 거지가 알고 보니 천사였다고 말하는 것이 톨스토이적인 반전의 상상력 아닙니까? 우리가 여기서 그런 것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한 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9장 17절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기도) 아버지 하나님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눈을 번쩍 뜬 사건은 예루살렘 온 도시가 기뻐해야 할 사건이고 축하해야 할 사건이지만 거짓종교권력자들의 아성 속에 빛이 회복된 사건은 묻히고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아성에 갇혀서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는 쓸쓸한 종교인이 되어갑니다. 냉혈한 종교인이 되어갑니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바리새적 교양으로 가득 찹니다. 하나님 저희를 무서운 바리새적 종교에 죄악된 삼단논법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여 모든 눈 감은 자를 눈 뜨게 하는 miracle 기적들이 안식일에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공동체가 정의의 힘으로 뭉쳐진 공동체가 되게 해주시고 내게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거룩한 안식일에 생명의 가치를 드높이게 하기 위해서 거지처럼 쓸쓸한 거리에 팽개쳐진 내 영혼을 붙들고 하나님께 왔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에게 용기를 주시고 새로운 관점의 안목을 열어주시고 내 불행을 재해석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내 고통과 불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을 허락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취업을 위해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기어코 문을 열어주시기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 벌 수 있는 일터를 허락하시고 모두 다 이 땅의 아버지 어머니들이 굴뚝에 연기를 피우면서 해 저문 저녁에는 자녀들과 도란도란 식사하는 평범한 이 기쁨을 돌려주시기 원합니다. 주님, 애굽의 십장처럼 감독장처럼 열다섯 시간 이상 히브리노예처럼 부려먹는 이 무섭고 돈에 미쳐버린 세상 앞에서 우리 모두 모세가 되어서 안식일을 되찾아주는 예수님 같은 역사를 일으키게 하여 주소서. 주님 저마다 돈 때문에 생계 때문에 인생을 저당 잡히고 존엄성을 파괴당하고 날 때부터 소경된 거지같은 이 영혼들을 건져내서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 일으켜 세우는 일에 교회들이 쓰임 받게 해주소서. 우리 한국교회 불쌍히 여겨 주소서. 귀한 헌물들을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선하게 써주셔서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 데 써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실로암 못에서 눈 씻고 새롭게 눈 뜬 가향의 모든 교우들과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앞으로 이 공동체를 통해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모든 태신자들과 미래 신자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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