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_ 요한복음 9장 35-41절
(보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죄인과 본다고 주장하는 의인)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한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
날씨가 많이 풀려서 두꺼운 코트를 벗을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가향교우 여러분께서 사순절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서 우리에게 부정적 감정,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신론자가 되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영적 방어벽을 잘 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야만적인 세력의 난폭한 공격 앞에서 금방 신앙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피터 포사이스 라는 사람이 <영혼의 기도>라는 책에서 한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야만적인 힘 앞에서 쉽게 마음이 냉담해져버린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야만적이고 세상의 많은 쓰레기 같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번 주 채플을 했는데 <넬라 판타지아>라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들려줬습니다. 그 노래는 <미션>이라는 영화에서 가브리엘 오보에가 만든 기악곡이었는데 이 곡을 사라 브라이트만이 작곡가에게 요청해서 가사를 붙여달라고 요청해서 우리가 아는 <넬라 판타지아>가 됐습니다. 3연으로 돼 있습니다. 나는 환상 속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봅니다, 뼛속까지 심장까지 파괴해도 충만한 영혼들을 봅니다, 나는 환상 속에서 구름처럼 떠도는 자유를 봅니다, 윤구형제가 어제 우리 집에서 하는 운영위원회에 와야 하는데 야만적인 직속상관에게 징집을 당해서 오지 못했습니다. 메일을 썼는데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시편 142편과 62편을 읽으면 위로가 될 겁니다. 만일 거기서 안 되면 109편을 가지고 저주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게 안 되면 저주기도 전문가인 제가 하겠습니다. 벌써 142편을 읽고 은혜를 받았는지 그 뒤에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야만적인 힘 앞에서 우리 마음이 쉽게 냉담해지고 캄캄해진다면 우리가 영적인 개안을 더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죠. 요한복음 9장은 길고 지루했던 논쟁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길고 지루했던 단락의 첫 장면은 간단한 사건이었죠? 태어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거지가 예수님 치료의 능력을 받아서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이건 성경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기 때문에 복음서의 독자들은 별 감동 없이 또 한 건 했구나, 하면서 지나가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태생소경거지가 그냥 거지가 아니라 창세기부터 성경 토라를 듣고 아는 거지입니다. 창세 이후로 눈을 뜬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절망했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눈이 뜨여질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 끝에 세상을 창조한 이래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 뜬 이야기는 없다는 거죠. 너무 슬픈 이야기죠? 가능성이 제로입니다. 우리 한국 장로신문에 실로암 병원 원장이었던 김선태 목사님의 수기가 실려 있습니다. 최근에 숭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코넬대학교 내에 있는 학원 채플 목사였던 전위원 목사, 이 두 분은 7살 정도에 실수로 실명했습니다. 전위원 목사는 7살 때 친구가 실수로 눈을 찔러서 실명을 했고요. 김선태 목사님은 놀다가 파편이 터져서 눈을 잃었습니다. 이분들은 밝은 세상을 본 분들입니다. 김선태 목사가 쓴 수기에 보면 맹인이 되자마자 집안에서 얼마나 구박을 했는지, 맹인이 집에서 나오면 재수 없다, 우리 집의 복을 쫓아낸다 하면서 핍박을 했습니다. 김선태 목사의 이야기는 태생소경거지 안에도 엄청나게 이글거리는, 자기 운명의 반전을 꿈꾸는 영혼이 이글거리듯이 눈을 가졌다가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사무치게 밝은 세상을 보기 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할머니가 있었는데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매일 저주했습니다. 아이고 죽어라, 왜 눈 먼 것이 우리 집에 태어났냐? 죽어버려라, 그리고 때렸습니다. 고모가 또 핍박을 했습니다. 그럴수록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나님 우리 할머니 빨리 죽게 해주세요, 교회를 다닌다고 불교를 믿었던 할머니가 때린 겁니다. 몰래 친구 따라서 교회를 갔는데 교회에서는 유일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눈 먼 소년 김선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선태 왔네, 성경요절 잘 외웠네, 칭찬을 해줬습니다. 교회는 따뜻한 사랑을, 할머니와 고모는 매질을 저주를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래서 김선태 소년이 할머니가 죽기를 두 번 심각하게 기도했는데 1년 만에 돌아가셨어요. 그 이야기를 썼습니다. 자기가 기도해서 할머니가 죽은 이야기를 썼어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소년 소경이 얼마나 자기 운명의 대반전을 기대했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눈물이 납니다. <장로신문>은 그 기사 외에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데 제가 지금 그 <장로신문>의 논설위원입니다. 참 문제입니다. 기독공무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신문의 논설위원입니다. 한겨레신문이나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인 게 아니라 그런 형편없는 신문의 논설위원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신문>에서 김선태를 치면 나와요. 이 분이 실로암 안과 병원을 세워놓고 10만 명의 개안수술을 했습니다. 자기 눈은 못 고쳤는데, 그래서 아시아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막사이상, 필리핀 초대대통령 막사이상의 수상자입니다. 대단한 분입니다. 설교를 너무 잘하고, 전위원 목사도 숭실대 영문과 출신인데 목회를 정말 잘할 뿐 아니라 등산도 합니다. 안 보이는데 등산을 합니다. 그리고 저더러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합니다. 이 분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 이유는 자기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장면이 다 떠오른다는 겁니다.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런데 이 두 분 다 설교를 정말 잘 합니다. 특히 전위원 목사는 영어를 너무 잘해서 영국 낭만파 시인들 시를 다 외웁니다. 눈을 감았기 때문에 일단 다 외웁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기 때문에 대담합니다. 요한복음 9장 주인공도 눈에 보이는 게 없기 때문에 산헤드린, 쉽게 말해서 로마 교황청 신학자 대표들과 논쟁을 벌여서 그들을 이깁니다. 태생 소경 거지나 눈을 보지 못한 거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질긴 영혼, 자기 운명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 한 방,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전위원 목사와 김선태 목사는 그런 걸 포기하고 눈을 감은 채로 일생 하나님과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더라고요. 그런데 태생 소경 거지였던 이분은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띄워준 기록은 없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이사야 35장에 보면 소경이 눈을 뜰 때가 딱 한 번 나옵니다. 메시아가 와서 세계를 새로 창조할 때만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관점으로 말하면 자기가 눈을 뜨면 두 번째 창세기가 시작되는 것이고, 세계가 다시 한 번 재창조되는 것이고 나를 눈 뜨게 한 분은 메시아일 수밖에 없다는 일종의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 겁니다. 요한복음 9장의 진행에서 깨닫는 것은 태생소경 거지였던 이 사람은 단순히 거지가 아니라 자기 운명의 반전을 사무치게 기다렸던 영혼입니다. 두 번째로 창세 이후로 눈 뜨게 해 준 일은 없지만, 만일 자기가 눈을 뜬다면 그건 창세기가 다시 한 번 방불케 한 창세기 재현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두 번째 창조사건이다, 그걸 의미한다고 깨달은 겁니다. 세 번째 태생소경거지는 마태복음 23장 16절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이사야 6장 9절, 이사야 43장 등에 의하면 이 사람은 집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개인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누적된 불순종으로 영적 시점과 시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맹인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맹인이 됩니까? 누적된 불순종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확신을 잃어버리면 맹인이 됩니다. 세 번째 뜻으로 역할을 부각시켜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하나님의 동선을 포착하지 못하여 자기 삶의 권력에 욕정에 자기 삶의 주관심사에 매몰돼 버린 사람이 바로 눈 먼 자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식으로 해석하면 우리 이야기가 됩니다. 눈 먼 자는 어떤 사람이냐? 눈 먼 자는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부분만 보다가 전체를 망실한 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눈 먼 자는 부분만 보다가 전체를 보지 못한다, 돈에 눈 먼 자는 돈 때문에 다른 것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인기에 눈 먼 자는 인기 때문에 다른 걸 못 보는 거죠. 성공에 눈 먼 자는 성공하려다 나머지 모든 가치를 잃고, 돈에 눈 먼 자는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권력에 눈 먼 자, 수양대군은 권력에 눈이 멀어 조카를 죽이죠. 하나를 너무 집착하여 쳐다보다가 나머지 전체를 보지 못한 자가 눈 먼 자이니까 이런 의미의 눈 먼 자가 바로 우리 이야기가 되는 거죠.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자기 종교권력과 기득권 또는 자기 학식의 과도한 확신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에 오랫동안 불순종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동선이 안 보이는 사람, 하나님이 나 인생을 통치하는 게 안 보이고 하나님께서 세계를 돌보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맹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억납니까?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갔죠? 누굴 찾아갔습니까? 산헤드린 대표적 스승이, 유명한 박사님이 밤에 갈릴리 방랑예언자 예수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 진영에서 안식일을 범한 자로 죄인으로 비난받고 정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부조화 이런 논리적인 불일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누가 맹인입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 다시 말해서 맹인은 부분논리에 갇혀서 전체를 보지 못한 사람, 하나만 집착하여 보다가 나머지 귀중한 모든 걸 보지 못하는 사람, 피조물의 야만성 피조물의 영광에 매몰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럼 이 맹인은 누구입니까? 자기 권력에 도취된 사람도 맹인이지만 이 세상의 야만적인 힘 앞에서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도 맹인이라는 겁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그런 위대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느냐? 그 위대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네가 당하는 잠시간의 압제경험 부조리함 불평경험과 억울한 일을 너무 침소봉대하지 않느냐? 맹인은 자기 삶에 일어나는 비극과 불행을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9장은 보편적인 적용점을 갖게 되고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본문이 됩니다. 똑같이 아우슈비츠 출신입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출신인데 죽기 직전에 살아났습니다. 그 죽음의 야만적인 폭력 앞에서 무작위로 아무 사람이나 뽑아갑니다. 1번 4번 5번 다 가스실로 들어가 죽습니다. 가스실에서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그걸 보고도 이 사람은 유리조각을 가지고 면도를 했습니다. 내가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시위합니다. 나는 너희가 함부로 손댈 수 없어, 생명의 의지가 왕성하다고 면도하면서 자기의 생명력을 과시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출신 화학 선생님이었던 프리모 레비는 똑같은 시기의 아우슈비츠 출신입니다. 그는 신앙의 이름으로 생명력을 과시함으로 야만적인 힘과 정신적인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프리모 레비는 마지막에 우발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고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을 썼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로고 테라피, 어떤 야만적인 힘 앞에서도 의미를 가지고 고난을 이겨내면 정신적 우울함과 자기황폐화로부터 건짐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로고테라피라는 정신요법입니다. 군대 가면 로고 테라피를 합니다. 내가 왜 전두환 밑에서 이러고 있지? 하면 안 되고 나는 전두환의 후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후계자고, 나는 연개소문의 부하다, 나는 계백장군 부하다, 자기를 계백장군 밑에 있는 병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나요? 기억이 안 납니다. 군대 가기 전에 계백장군 혼 일종의 빙의를 받기 위해서 나는 지금 전두환 밑에 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노태우 전두환 싫지만 군대 간다, 1983년 8월 20일, 일찌감치 머리감고 백제 황산벌 밭에서 2박 3일 동안 백제 사적지를 돌면서 군대 갈 마음을 다졌습니다. 마지막 계백장군 이야기를 읽고 나는 지금 계백장군과 함께 연부대로 달려간다, 훌라훌라 하면서 갔습니다. 나는 정신적으로 계백장군 밑으로 들어갔어요. 전두환이 그때는 대통령이었지만, 나는 모든 군가를 계백장군에 맞춰서 불렀습니다. 나당연합군을 물리치자, 마지막 낙화암에서 묵념을 드리고 논산훈련소에 들어갔습니다. 굉장히 강건하게 군대생활을 해서 사람들로부터 장기복무 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도 군대생활을 명랑하게 하니까 상까지 받았습니다. 훈련에 열심히 하니까 상도 받고, 네가 군대체질이다, 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야만적인 힘 앞에서도 명랑 쾌활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굉장한 자기 격려가 필요한데 프리모 레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살아나 자기가 쓴 책을 읽고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문학상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만족이 없었습니다. 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자기가 아우슈비츠에서 경험했던 참혹한 절망적 야수적 시간을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살했습니다. 문학적 성공의 정점에서 자살했습니다. 왜? 의사소통불가능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눈멀게 만드는 외부적 세력도 있고 우리를 눈멀게 만드는 내부적 세력도 있습니다. 우리는 내부적 세력은 없습니다. 돈에 눈 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단 돈 자체가 없으니까 돈에 눈 멀 수가 없고 우리는 권력에 눈 멀 수가 없습니다. 왜? 권력이 없잖아요. 쾌락에 눈 먼 사람도 없습니다. 쾌락에 눈 멀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외부적인 세력에 의해서 눈멉니다. 프리모 레비처럼 빅터 플랭클처럼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없다고 믿게 만드는 무신론을 강요하는 부조리한 세상에 공격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 먼 자가 될 수 있고 태생소경 거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동선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 세상을 알지 못하고 부분만 보면서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 된다면, 우리가 야만적 힘 앞에서 신앙을 금방 잃어버리는 불순종자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의도적으로 불순종하지 않지만 이 세상의 야만적 환경 앞에서 신앙을 조금씩 철수하고 하나님 믿는 신앙고백,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면서 대항적 자기고백을 하지 않으면 맹인이 되는 겁니다. 영적 냉담자가 되는 겁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확신이 들지 않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돌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안 생겨요. 하나님이 우리 한국교회를 돌보고 있다는 믿음이 안 생겨요. 그러면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맹인이 돼요. 한 가지 고백해야 할 것은, 하나님 저는 무신론을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목사님들에 대한 믿음은 거두어들일 생각입니다, 동료기독교인들에 대한 믿음도 거두어들이고 싶습니다, 가향도 알고 보니 제 대안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아무 데도 속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도 하나님은 부피와 질량이 있는 물리적 공간에서 그 통치흔적이 안 보일지라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습니다, 라고 일단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영토가 보입니다. 선제적으로 신앙고백 해야 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시고 한 때 개인기를 많이 보여주신 하나님, 그러나 지금은 종적도 사라진 하나님 나는 당신을 저주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전능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미디안의 압제 밑에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고 약탈해버리는 승자독식의 문명 앞 수레바퀴 아래서 나는 죽어갑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내가 맹인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전체를 보지 못함, 내가 하나님의 동선을 충분히 맛보지 못함, 우리의 예배가 충분히 은혜롭지 못함을 고백하고 한국교회가 충분히 하나님의 현존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맛보게 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이 내가 보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 저는 부분밖에 모릅니다, 제가 경험한 야만적 경험의 폭력성 앞에서 몸서리치는 사이에 하나님 영광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보지 못한다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 눈을 열어주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 눈을 열어주시고 하나님 통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피하여 사라지게 하고, 하나님 살아 계신가 보다, 믿게 만드는 사람들을 보여주시고 환경을 보여주시고 사태를 보여주시고 그런 환경을 조성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눈을 뜨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눈 뜨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통치의 동선을 맛보게 만들어주시는 겁니다. 무신론적 상황에 태어난 우리는 태생소경거지라 말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암흑천지에 태어난 우리는 태생소경 거지의 운명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김선태 목사님은 모진 할머니와 고모 밑에서 매 맞으면서 학대를 당하면서 태생소경거지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교회에서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 최초의 선생님 사랑, 선태야 성경요절 참 잘 외워온다, 우리 선태 참 좋다, 라고 해준 그 작은 친절이 그에게 하나님의 터치였습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신학교 막 졸업하고 사역을 갔는데 굉장히 미남이고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미국 사람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청소년부를 맡자마자 사람 수가 줄어들었습니다. 내가 무얼 잘못했나 했는데 청소를 하다가 자기가 가르친 학생의 종이가 떨어져 꾸깃꾸깃한 걸 봅니다. 맥 전도사님이 즉시 사임하지 않으면 남아 있는 청소년이 다 흩어지고 말걸? 유명한 고든 맥도날드 이야기입니다. 그런 참혹하고 자기를 저주하는, 내가 사임하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사람이 다 사라진다는 무서운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절망을 했습니다. 정말 자기가 목회에 적합하지 않은지를 묻기 위해서 숱한 멘토를 찾아갔습니다. 엄청난 사람을 찾아갔는데 대부분 긴가민가한 이야기를 하고 나이 많은 한 사람만이 자네가 지금 애송이 목회자로써 연단을 받고 있는 것이지 소명을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면서 다시 목사가 되도록 소명을 재심화시켜줬습니다. 우리가 가끔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내가 이 분야에 적합한 사람이고 이 분야의 대단해질 사람인데 지금 나에게 종이쪽지 같은 것, 내 재능을 의심하게 만들고 이쪽 분야의 내 적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 자기에게 독한 회의를 품게 만드는 현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태생소경 거지처럼 암흑이 가득 찬 집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태어나보니 엄마아빠가 심하게 싸우는 집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말은 아버지 숟가락 집어던지는 소리밖에 없었다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손댈 수 없는 암흑천지 세상입니다. 내가 태어났더니 박정희의 독재가 있을 수 있고 내가 태어났더니 전두환의 야만이 있을 수 있고 내가 태어났더니 9.11 테러 같은 사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맨해튼에서 태어난 아이는 바로 암흑천지에 태어난 겁니다. 우리 대부분이 내가 손도 쓸 수 없는 사이에 내가 눈 떠 보니 암흑천지에 태어났다면 이 말은 하나님을 영원히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객관적으로 구조적으로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이 태생소경 거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태생소경 거지와 다름없는 무신론이 너무 당연해 보이는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태생소경 거지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을 믿는 게 너무 힘듭니다. 오늘날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이 불가능할 만큼 영적 시야는 흐려져 있고 이 세상은 암흑천지에 빠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고등학생들이 대구에서 천안에서 입시제도 싫다, 저 수족관에 있는 붕어보다도 더 비참하다, 하면서 죽었던 천안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맛보는 세상은 하나님의 자애로운 돌봄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제가 <넬라 판타지아>라는 음악을 계속 우리 아이들에게 들려줬습니다. 우리 학교는 7호선 근방에 있는 아이들이 많이 옵니다. 숭실대학교는 7호선이 살린 학교입니다. 경기도 부천, 소득이 3천만 원 - 5천만 원 정도 되는 사람들이 주로 사는 곳입니다. 그런데 청담 갈 때부터는 소득이 확 차이가 납니다만, 청담가기 전까지는 대개 소득이 5천만 원 이하입니다. 이 아이들이 숭실대 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성적을 보니까 문과는 상위 7~12%입니다. 제일 낮은 커트라인이 88%입니다. 그러니까 12% 상위인 아이들만 들어왔어요. 평균 점수니까 굉장히 공부 잘한 아이들이 온 겁니다. 빠릿빠릿하고 그냥 한 번 A학점 받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숭실에 들어와서 연대를 생각하는 불쌍한 여러분, 재수 한 번만 하면 연대는 능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꿈을 좌절당한 7호선 연변의 아이 여러분, 여러분이 있게 된 것은 여러분 부모 때문이고 여러분 부모님이 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러분 부모님이 족집게 강사를 붙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모든 것은 다 잊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 잘 믿고 채플 잘 들으면 5% 이상의 탁월한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약간 선동을 합니다. 이거 한 번 들으면 애들이 점점 좋아집니다. 1학기 때는 채플 들으면 자세가 전혀 안 나옵니다. 기분 나빠하면서 거제도수용소 같습니다. 그런데 3년 듣고 있으면 뭔가 오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만족도가 점점 높아집니다. 3학년 만족도가 제일 높습니다. 매우 좋았어요, 좋았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1학년 때 채플 들으면 뭐야 이거, 교목실장은 30분 설교 해놓고 우리 기독교인 만들려는 거야, 하면서 반발합니다. 3학년이 되면 파김치가 돼서 수용소생활 끝났나? 이렇게 됩니다. 사실은 한국의 교육제도 안에 소속된 것도 빛이 없는 세상에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에요. 사실은 암흑은 아니죠.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도 상대평가, 대한민국 사회는 경쟁으로 행복을 강제로 배분하는 사회입니다. 반드시 50명 중에서 14명은 C학점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하냐? 한국교육과학부에서 A학점을 많이 주는 건 있을 수 없다, 반드시 14명, B학점을 12명 이상 해야 한다, 왜 교육과학부는 A학점을 많이 주는 대학에 지원금을 안 줄까요? 경쟁을 통해서 행복을 강제로 배분해도 된다고 믿는 악한 세상 때문입니다. A학점을 많이 주는 대학은 교과부 점수가 빠져서 30억 원 정도의 돈을 못 받기 때문에 모든 중위권 대학들은 반드시 A학점을 다 못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50명의 학생들 중에서 every body A학점을 받기를 기도했지만 교육과학부 때문에 오늘부터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무리 잘해도 C-를 받는 참혹한 운명소유자가 받아들이게 해주시고 저주 받은 경쟁사회에 적응하게 해주소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을 뒤집기를 원합니다. 교직원 채플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힘을 합해주십시오, 이 한국을 뒤집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힘을 모아줄 마음이 없습니다. 교수들은 이미 자기가 왕노릇 하기 때문에 교수들만의 보수적인 게 있습니다. 교수들은 대부분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기 때문에 대학자체는 고전적인 대학이 없습니다. 보편타당한 진리에 대한 탐구가 없고 돈 받는대로 말을 써주는 지적 기생충 하청업체들입니다. 실제로 대학과 기업의 결탁, 국가와 대학의 결탁은 지식 자체가 불가능한 세상이 됐습니다. 진짜 보편타당하여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게 설득력을 갖는 지식은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저는 신학자로서 목사로서 너무나 문제시합니다. 중앙일보가 대학평가를 이렇게 했습니다. 중앙일보는 고분고분하게 회사에 많이 취직하는 사람에게 점수를 많이 줍니다. 그래서 내가 중앙일보에 전화했습니다. 당신은 한경직 목사 같은 사람이 배출된 대학에 점수를 하나도 못 주겠네? 한경직 목사는 의료보험도 안 되는 교회에 취직했고 그분은 일생동안 고아원 세우려고 고분고분하게 회사에 취직도 못했고, 김선태 목사님 같은 사람들은 한 번도 당신들 평가에서 안 되겠네? 당신들은 사회적 평판에서 좋다는데 부정축재 한 번 나올 때마다 10점씩 깍아라, 우리 숭실대는 아무도 부정축재자가 나오지 않았다, 일단 장관후보감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서울대 연대 고대는 다 깎아라, 이 나쁜 놈들이 그 평판을 그렇게 해쳤는데 왜 안 깎느냐? 이렇게 제가 전화를 했습니다. 그 전화 받은 놈은 분명히 데스크 국장에게 전화 안 했을 겁니다. 제가 바쁘죠? 이런 것까지 다합니다. 저는 정의감에 넘쳐서 모든 일을 하는데, 양화 진성지 공원이라고 하는 버스정거장 음성 때문에 절두산 성지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런 참혹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2200버스 합정로에 양화진 성지를 양화 진성지라고 부르는데 고치게 해달라고, 신부님이 듣고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합니다. 양화진 성지를 양화 진성지라고 발음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이런 일상적인 불의, 한국사회에서 대학과 기업과 국가의 모든 결탁 때문에 경쟁을 통해서 행복을 강제로 배분하려고 하는 이 시스템이 고등학생의 자살과 관련됐다고 믿거든요.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세상이 바로 <넬라 판타지아>가 말한 세상입니다. 그게 바로 사라 브라이트만이 불렀던, 환상 속에서 나는 꿈처럼 구름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봅니다, 뼛속깊이 심장 깊이 박애로 가득 찬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가능합니다, 나는 고상한 영혼들이 춤추는 세상을 꿈꿉니다. 그게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꿈꾸는 눈을 뜬 사람들의 세상이고, 주님에 의해서 second touch, 계시의 눈망울을 뜬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마무리 짓습니다. 우리 주님이 저의 눈을 씻어주었을 때는 저는 정말 용감무쌍한 사람이 되었고 과감한 사람이 되어습니다. 옛날에 암흑천지 세상에 살때는 저도 프리모 레비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미를 찾지 못했고 야만적인 세상에 대해서 야만적으로 살 생각이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눈을 열어주셨을 때 주님이 이 부조리한 세상에 통치의 동선을 철수시키지 않고 이 세상을 꼭 붙들고 계셔서 의로운 사람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해서 우리 눈을 열어주셔서 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될 것이고 우리 하나님 나라가 반드시 완성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셨기기 때문에 저는 프리모 레비 같은 절망을 이겼습니다. 주님의 자비로운 동선을 맛보게 해주는 사람들을 봅니다. 박애로 충만한 사람들, 구름처럼 떠도는 자애로운 영혼들을 보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되겠구나,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겠구나, 이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게 바로 주님에 의해서 눈 뜬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인자되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인자되신 예수님을 믿고, 종말에 마지막에 하나님 백성들을 친히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야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인자는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채울 백성을 모으는 분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메우는 사람이 인자입니다. 인자께 절하는 것, 그 인자는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 죄를 대속하여 이 부조리한 세상의 모든 쓰레기 같은 경험들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걸 반전시켜서 죄사함의 복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자기를 억울하게 찌른 로마의 창, 자기를 파는 배반의 경험, 자기의 제자가 배반해서 로마군의 재판에 넘겨 준 이 모든 부당한 경험들, 쓰레기 경험들을 합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십자가 경험으로 대반전 시켰습니다. 나쁜 경험을 많이 한 예수님은 오히려 그 처참한 십자가 죽음으로 세계 만민을 구원하는 구원의 죽음을 바꿨습니다. 김선태 목사가 그렇습니다. 뺨맞고 모욕당하고 저주 받았던 그 인생을 가지고 태생소경 거지, 비참한사람들을 살리는 실로암 안과 병원을 세워서 끊임없는 사랑의 인술을 전파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 속에서 쓰라린 야만적 경험을 하고도 그 야만적 경험에 굴복하지 않고, 악마적인 힘 앞에서 위협당하지만 굴복하지 않고 선하신 예수님 본받아서 박애로 충만한 영혼이 되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꿈을 두텁게 키워가는 사람들이 우리한테도 있고 우리 주변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 보면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격려할 만큼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향은 내가 믿습니다 절하는, 누구한테 절합니까? 종말에 하나님 백성을 세워서 야만이 가득 찬 세상을 박애가 충만한 세상으로, 각축과 경쟁이 지배하여 일련의 사람들을 자살로 몰아넣는 엄청난 폭력적 세상을 똑같이 생존하려는 마음을 먹으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세상, 50명 중 14명의 C-를 강요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저는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바르셀로나 근처에 있는 바세트족 모두 라고 하는 협동조합 공동체를 만들어서 12만 명을 고용하고 360억불의 수익을 남기는 거대한 협동조합 공동체, 몬드라곤 공동체,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사랑의 공동체, 신문에 나지 않지만 박애로 충만한 사람들이 일궈가는 작은 마을 단위의 모든 공동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데가 정말 많습니다. 우리가 신문에 나거나 불신앙을 막 자극하는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기사에만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은닉되고 숨어 있는 좋은 목사님이 많고 은닉적으로 숨어 있는 좋은 교인이 많고 은닉적으로 숨어 있는 많은 미담들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악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악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만 악은 세상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악이 승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선이 승리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악은 영원히 실패합니다. 선은 승리하고 하나님은 승리하고 박애로 충만한 사람들이 가득 찬 세상은 반드시 이 야만적인 세상을 대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게 바로 인자되신 예수님께 고백하는 겁니다. 인자 되신 예수님을 고백하는 순간 우리 눈은 더 밝아지고 그분에게 경배하는 순간 우리는 을지로와 충무로와 세종로에서 당했던 야만적인 무신론을 강요하는 쓰라림 경험들, 부정적 경험들을 해소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산헤드린 대표처럼 빛을 본 태생소경 거지의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는 악한 자들, 우릴 쫓아내려고 하는 악한 종교권력자들을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보십시오. 빛을 증언하니까 쫓겨나죠? 축출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쫓겨난 자들이 세운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 대안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이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어떤 기득권적 혜택도 받지 말고 쫓겨남을 당하여 추방을 당하여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여 하나님 나라 진지를 구축하는 일에 쓰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안공동체 대조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단물을 빨아 먹고 이 세상에 깊숙이 참여하지 말고 이 세상으로부터 보이콧 당하고 쫓겨남을 당하여 인자되신 예수님께 절하는 비밀결사조직이 돼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가향에서 인자되신 예수님께 절 한 번 할수록 눈이 맑아지고 영안이 맑아지고 하나님의 통치동선이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이 세상에서 환히 보여서 눈뜬 자의 감격을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에게 암흑천지를 강요하는 세상, 우리에게 야수적 경쟁 야만적 경쟁, 초라하고도 알량한 점수를 가지고 청소년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 악한 세상,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무신론적 야욕 앞에 눈을 떠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며 영광의 통치를 보게 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가 부분에 매몰되지 않게 하시고 전체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통치 동선을 굳게 붙들고 이 암흑천지 같은 세상에 눈 뜬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 인자에게 절하는 공동체, 고백하는 공동체로 대안공동체로 모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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