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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요한복음 10장 1-10절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예배_ 요한복음 10 1-10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함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요한복음에서 구사하는 예수님의 언어는 구약성경 안에 있는 본문 말씀을 참조하거나 암시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말씀을 증거하시기 때문에, 구약성경 말씀에 이미 바탕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큰 울림으로 듣기 위해서는 구약성경에 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포도나무라는 말 앞에 나는 이라는 차이 보조사 는,이 들어가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야말로 라는 뜻으로, 에고 에이미라는 1인칭 대명사가 돌출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ego 는 영어에서는 자아라고 번역하죠. 에고가 인칭대명사 1인칭 단수입니다. I myself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야말로 참 포도나무다, 에고 라는 말을 썼는데, 원래 에고를 안 쓰고 에이미 만 써도 I am 이 됩니다. 옛날 언어들은 전부 다 동사의 격과 어미에 인칭이 드러나 있습니다. I 라는 인칭대명사를 따로 쓰면 다른 사람과 차이를 두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라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참 포도나무라는 말을 했을 때는 참 포도나무와 다른 들포도나무가 이미 있었을 때만 이렇게 쓰는 겁니다. 이사야 5, 예레미야 2장에 보면 들포도나무라는 말이 이미 나옵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포악과 압제를 맺었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들포도나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들포도나무를 이미 알고 있는 이사야 5 7절을 이미 알고 있는 예레미야 2장을 이미 알고 있는 청중에게 나는 참포도나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많이 알수록 예수님의 언어는 울림이 크고 공명이 크다고 말할 수 있죠. 모르면 모를수록 그냥 비유를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압축하여 개관하여 말한 겁니다. 이사야 5장과 예레미야 2, 영어로 하면 reference back to, 앞에 나왔던 본문을 참조하는 것을 back reference, 참조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정확하게 에스겔 34장을 reference 합니다. 에스겔 34장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만 큰 울림이 있습니다. 불행히도 에스겔 34장을 모르면 긴 설교를 들어야만 알게 되고 이 불행이 오늘 여러분에게 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읽으라고 한 이유는 사순절 영적긴장의 시간에만 뜻이 터득되고 정신이 산만한 6,7월에는 죽이려면 죽이고 말려면 말라, 막가는 심정이 되기 때문에 사순절 집중이 안 되기 때문에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사순절 봄의 문턱에서 뭔가 씨를 뿌리는 파종기 때만 고도의 영적집중력이 허락되고 그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십니다. 사순절에 은혜 받지 못하면 여름 내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고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을에는 거둘게 없는 거죠. 가을에 거둘 게 없으면 겨울 내내 시베리아 같은 삭풍을 맞게 되고 인생 전체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사순절에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겠고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일독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일이 되겠습니다. 이것을 오늘 처음 들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만 저는 벌써 일찍이 말해온 바입니다. 에스겔 34장에 보면 오늘 본문의 모든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목자라는 말은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삯꾼목자 이리떼 강도떼 양의 문, , 생명을 풍성히 얻는다, 전부 다 그대로 나옵니다. 오늘도 10 7절과 10절에 정확하게 인칭대명사 에고가 나왔습니다. 10 7절은 에고 에이미 헤 디라톤 프로바토, 프로바트손은 양이고, 디라 하면 문, 영어로 문은 door 이죠? 이게 디라에서 나온 겁니다. 헬라어는 dur입니다. 성경 많이 알면 영어도 저절로 터득이 됩니다. 에고 에이미 헤 디라톤 프로바토, 나는 양의 문이라’ 10 11, 에고 에이미, 호 호이멘 호 칼로스, 선한 목자라 할 때 정관사 the가 붙었습니다. 나는 그 선한 목자다, 이미 한 번 나온 목자를 가리킵니다. the 가 붙었으니까요. 정관사 the는 이미 나온 definite article입니다. 한정 정관사이기 때문에, 나는 에스겔 34장이 말한 그 선한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 선한 목자는 삯꾼과 강도와 이리떼 등과 달리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선한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 내용이 에스겔 34장에 나오기 때문에 오늘 에스겔 34장을 다 말할 순 없습니다. 여러분께서 좀 더 심화학습을 위해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보다 먼저 온 절도와 강도떼 같은 지도자들과 자신을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비교해버립니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이미 있는 지도자들과 자기를 비교할 때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절도요 강도라고 할 때는 엄청난 확신이 있을 때만 해야 합니다. 우린 누구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권력을 행사했던 종교권력자들과 그 밑에 기생했던 기생충과 같은 서기관, 바리새인과 같은 어용지식인들, 바리새인은 당시 일종의 청교도집단입니다. 청교도집단이었던 6천명의 바리새인들과 정규교육을 받았던 서기관들, 정규교육을 받고서 성전제사장들의 이익을 담보하는 해석을 계속하는 서기관 신학자들을 율법사라고 말합니다. 율법사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 모든 위에 실제 권력을 차지하고 경제권 상권 재판권 영권을 다 휘두르는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입니다. 이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은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쳤던 예수님을 핍박하기 위하여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뜬 사실 자체를 묻어버리려고 온갖 책동을 버립니다. 그런데 눈을 뜬 그 소경은 대담하게 내가 눈을 뜬 것은 사실이고 내 눈을 뜨게 한 사람은 예수고, 예수란 사람은 최소한 선지자 이상이다, 당신이 나를 위협하더라도 이 진실에서 한 발도 물러날 수 없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파문시켰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파문시키는 이것이 어둠의 세력들이고 바로 어둠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런 싸움이 지금 전개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험은 빛이 어둠을 이기지만 이기는 과정은 복잡하고도 감질나게 이기기 때문에 어둠에 대한 보편적 경험이 우리 영혼에 드리워져 있습니다. 우린 이 세상을 어둡게 경험합니다. 세상이 더럽다고 생각하고 정의가 이긴다는 말은 영화에서나 소설에서만 나오고, 실제로 정의가 이기지 못하고 60 40으로 항상 수세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이 싸우면 선의 세력이 악의 세력에게 수세에 몰린다는 현실주의적인 realist에 대해 인정을 합니다. 성경은 섣부른 낙관주의로 빛이 어둠을 손쉽게 이기는 경우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빛이 어둠에 왔으되 어둠이 빛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빛이 어둠을 압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참 중요합니다. 빛이 어둠에 왔으되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긴 했지만 빛이 어둠을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고난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닫힌 체계 안에서 종교권력자들이 누리는 특권, 그 밑에 기생하는 중간관리자들과 중간지배착취자들인 세리와 군병들, 로마제국과 권력을 결탁해 또 하나의 조국을 가지고 언제든지 로마제국으로 피신갈 수 있는, 자기 나름대로 구원의 처소가 마련된 자들과 이 땅에서 살아야 하고 이 땅의 기근과 이 땅의 굶주림을 내 굶주림으로 소화해야 하는 이 땅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과 운명은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미국 시민권을 갖지 못하고 그냥 공교육에 아이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인 땅에 맺혀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고 합니다. 양은 땅을 경작하는 자유농민입니다. 양은 그냥 metaphor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양이란 말,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백성이라는 말은 암입니다. 왕에게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 계약을 맺은 자유인들 암입니다. 암은 하나님과 직접 계약을 맺어서 어떤 전제군주에게도 지배받지 않아야 할 권리가 있는 하나님과 직접 계약 맺은 아담과 같은 농부입니다. 암 카도시, 하면 거룩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을 성경에서 양이라고 합니다. 양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 돌봄을 받는, 왕과 지배자들이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그런 백성을 암 또는 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양이라고 했을 때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양이 아닙니다. 훨씬 더 독특한 지혜를 누리는 이스라엘 자유농민입니다. 땅을 경작하는, 백성 또는 양은 각자 자기 땅에서 경작하여 소출을 갖고 자기가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암이 아니죠? 암이 아닌 사람은 게르라고 합니다. 게르는 자기 땅이 없어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 집에 와서 붙들려 사는 사람입니다. ger, 게르가 영어로 말하면 non resident alien 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주민등록증은 없지만 사는 이방인들을 non resident alien, 거류민은 암의 자비에 호소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산업연수단들이 ger입니다. <방가방가>에 나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ger입니다. 지금 자유농민들이 암이 됩니다. 그런데 암은 하나님께 직접 속해 있고 이스라엘 왕들에게 지배당하지 않도록 돼 있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절대로 암을 마음대로 못 데려갑니다. 지금처럼 대통령이 영을 내려서 우리 모두를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극히 19세기적 국가주의적 국가이지, 어떤 때도 일반 농민들을 절대 마음대로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로마제국 시대 때만 해도 전쟁 데려가려고 해도 돈이 얼마나 많이 드는지 모릅니다. 일반농민들을 전쟁에 포괄적으로 데려 가는 것은 너무나 폭압적인 요한계시록적 묵시록적인 국가에서만 가능하지, 전쟁을 절대로 못합니다. 특별히 국민개병제가 실시되면 상원의원과 대법원장 아들이 징집되면 전쟁을 절대로 못합니다. 한번 보세요. 전쟁은 누가 갑니까? 서민들의 아들딸만 갑니다. 지금 위장전입이라든지, 범 병역기피가 벌어지는 것은 이 나라가 삯꾼과 강도의 손 안에 들려 있다, 우리는 우리 집안 전체가 털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면 어떤 나은 정부가 있다고 봅니까? 저는 모든 정부가 똑같다고 봅니다. 저는 미셸 푸코주의자입니다. 국가는 감시와 처벌 폭압기구입니다. 모든 인간의 적은 국가입니다. 지금 국가가 어떤 나라건 국민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암, 백성다운 존엄한 하나님과 직접 계약한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국가입니다. 모든 나라의 시민들은 국가의 폭압성과 강제성과 군사동원령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미국 시민은 미국국가와 싸워야 하고, 중국국민은 중국국가와 싸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 받아서 폭압적 국가기관의 권력을 축소시켜야 하고, 물품세 10% 내는 것을 5%만 내야 합니다. 부가가치세가 너무 비싸요. 저는 부가가치세가 너무 비싼 걸 일찍이 알았던 예언자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세금을 10%씩 물리는 건 심합니다. 이건 미국 뉴욕주나 캘리포니아에서만 가능합니다. 대개 7%의 세금을 매깁니다. 뉴저지는 7%, 댈러스도 6%, 오늘날 국가가 우리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이 제도가 너무나 근대적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 정신을 바짝 차려서 법령 하나로 우리를 군대에 집어넣지 못하게 만들면 전쟁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나라가 함부로 전쟁을 하겠습니까? 모든 국민이 시퍼렇게 살아서 자기 나라의 폭압적 절도 같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게 하면 전쟁이 못 일어납니다. 하나님과 직접 계약을 맺었던 하나님의 어린 양들, , 백성들이 많아질수록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중들의 수는 줄어들고 주체적 시민의 수가 많아지면 세계평화가 이뤄집니다. 완전히 이뤄지지는 않겠지만 일단 전쟁은 못합니다. 우리가 대마도나 쓰시마 독도나 군도를 두고 전쟁을 한다, 그러면 일단 군인 징집에 응하지 않고 전부 다 감옥에 가면 됩니다. 일본은 일본사람들 청년들을 감옥에 집어넣으면 되고, 한국 중국의 감옥도 병역을 거부하는 자기나라 청년들로 가득 차야 합니다. 전쟁을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고 평화로운 길 외에는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국가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들, , 자유농민들을 국가가 지배하는 폭압적 강도떼와 같은 기구가 더 큰 문제라는 걸 알아야만 세계평화가 이뤄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전제군주 지배 밑에 휘둘리는 일반 백성을 하나님의 직접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삼고자 율법의 멍에를 지고 국가기관이 필요 없을 만큼 자율적인 시민이 되기 원했고, 어떤 형법과 민법 등의 강제조항에도 위촉되지 않을 만큼 늘상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도록 가르친 겁니다. 무엇이 풍성한 삶일까요? 우리가 성령 안에서 국가의 폭압적인 형법과 민법의 어떤 법령에 지배당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제도 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자율적인 공동체 생활을 이루면 풍성한 삶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하나님과의 직접 교통과 교제를 즐기게 하고 어떤 외적 침입자들로부터도 놀래지 않을 권리를 갖고 약탈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자기 땅을 경작해서 소출을 거두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삶을 ,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게 바로 에스겔 34장에 다 나옵니다. 저는 이틀 전까지 이걸 깨닫지 못해서 계속 고민했습니다. 옛날에 에스겔 34장을 읽었는데 옛날에도 34장을 설교했습니다만, 이번처럼 이렇게 은혜를 받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틀 전까지도 깨닫지 못해서 제 아내와 토론하면서 아내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부터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풍성한 삶은 국가와 절도나 강도떼 같은 지도자들 밑에서 휘둘리지 않을 권리, 자기가 경작한 땅에서 난 소출을 가지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권리, 착취당하지 않을 권리, 노략질당하지 않을 권리, 국가기관의 거짓선전에 넘어가서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을 권리인데 오늘 본문에 다 나옵니다. 다윗과 같은 선한 목자와 함께 하나님을 섬길 권리가 바로 풍성한 삶입니다. 그 풍성한 삶을 위해서 예수님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특정한 국가를 악으로 치부하고 특정한 국가를 선의 세력으로 나누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폭압적 국가권력자들을 강도와 절도 떼로 보게 만들 수밖에 없을 만큼 비무장, 철두철미하게 겸손한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 저는 세계는 스탈린 같은 자, 모택동 같은 자, 칭기즈칸 같은 자들이 힘을 휘두르는 각축장인 줄 알았습니다. 또 어렸을 때 도서관에 가면 영웅전에 칭기즈칸 히틀러가 다 나옵니다. 너무 헷갈렸습니다. 모택동은 대학 때 리영희라는 사람이 소개했지만 나폴레옹, 칭기즈칸, 한니발, 어렸을 때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대개 육군사관학교를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전부 다 장군입니다. 성웅 이순신도 장군입니다. 성웅 이순신은 다릅니다. 성웅 이순신은 섬기기만 하고 섬김 받지 못했습니다. 세계가 영웅호걸이라고 한 사람들은 강도와 절도 떼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어린 양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의 독특한 지위를 회복하여 하나님께 직접 통치를 받도록, 대한민국 형사소송법과 민법 등에 지배당하지 않을 만큼 높은 수준의 격조 높은 도덕과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을 암이라고 했고 그런 사람을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양들의 지위를 회복하여 절도와 강도떼들을 타인의 음성으로 듣도록 분별력을 심어주기 위해서 그랬다, 보십시오. 제가 만일 예수님을 몰랐다면 저도 국가주의에 매몰됐을 겁니다. 저는 너무나 쉽게 국가주의에 영향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난중일기> <삼국사기> <해동명장전>을 읽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아마 저도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제가 군대에 가서 6주 동안 훈련받고 수류탄까지 투척하고 나니까 전쟁이 나도 할만하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음악 틀어주니까 총 쏘는 것이 갑자기 재밌어지더라고요. 멋있는 군가를 틀어주고 행진도 재미있고 전우가 죽으면 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6주 동안만 훈련을 받아도 사람이 그렇게 바뀝니다. 기독교적 지성은 없는 겁니다. 감옥 같은 군대에서 있으면, 물론 감옥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 믿고 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은 국가가 보장해주는 삶이 될 수 없고, 예수님이 우리인간을 초국가적 자유와 존엄을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신 걸 알고 나서는 저는 무정부주의자가 됐습니다. 무정부주의가 나쁜 뜻 아닙니다. 이 세상의 폭압적 국가체제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 돼버린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폭압적, 감옥과 군대와 감시와 처벌 등 형법을 가지고, 국가 형벌소추권을 가지고 사람들을 다스리는 폭압적 국가체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놀라운 사람들의 동아리를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무정부주의자가 됐습니다. 무정부주의자의 강령은 로마서 13 8-10절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웃 사랑이라는 이 계명에 인간의 형법과 율법 등이 다 완성됩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그 세계는 사랑 외에는 다른 법이 필요 없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저는 무정부주의자가 됐습니다. 무정부주의자의 또 다른 신학적 근거는 예레미야 31 31-34절입니다. 여호와의 성령이 우리 각 형제자매 심령에 거하게 되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킬 능력이 샘솟게 되고 여호와의 율법을 실천하게 되면 강제로 우리 양심을 지배하는 감독자가 나타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또 무정부주의입니다. 무정부주의는 국가를 무조건 거부하고 징집을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무정부주의는 국가의 권력을 점점 축소하여 시민역량, 사랑역량, 봉사역량이 강제하는 것보다 많아지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라의 권력 행정력 폭압적인 강제성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사랑을 늘려가는 운동이 무정부의 운동이고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겁니다. 제가 지금 우리나라 법 안에서도 위험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건 누구든지 다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은 정확하게 율법체제를 통하여 인간을 지배하는 유대종교, 로마 가톨릭적 종교, 모든 국가들의 행정지배체제를 통틀어서 말합니다. ? 그들은 양을 알지 못합니다. 양을 알고 양도 아는, 예수님과 양은 상호교감하고 공지하고 공명하는 사이입니다. 예수님이 양들을 인격적으로 불러냅니다. 어떤 절도와 강도도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주민등록번호로 부르지 이름을 부르지 않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이름으로 부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양의 이름을 불러서 인도했던 팔레스타인 전형적인 목자처럼 이름으로 불러내고 그 특성을 압니다. 이름으로 불러낸다는 말은 특성을 중심으로 개별적 앎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양들을 몰아치면서 지배하고 약탈하며 감독할 대상으로 삼고 인격적 교감을 주지 않는다, 양들은 예수님을 듣고 압니다. 양들이 선한 목자의 음성은 듣고 알지만 절도와 강도와 삯꾼과 이리는 타인의 음성으로 압니다. 국가관이 기초로 안 된 사람, 병역을 거부한 사람, 법을 어긴 사람, 우리 국가의 기초를 흔드는 북한 공산간첩보다 더 국가의 헌법적 기초를 무너뜨린 자들, 타인의 음성을 가진 자들이 목자로 군립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음성, 북한에서 내려온 무장공비도 우리나라 헌법적 기초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으면서 군대 가지 않고 온갖 탈법을 일삼고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악한 일을 몰래 몰래 했던 그들이야 말로 우리나라의 헌법적 기초, 자유민주주의 기초를 진짜 파괴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타인의 음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양들은 타인의 음성을 알아차립니다. 그런데 양이 타락하면 타인의 음성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자유농민이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하면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받지 못하고 성령의 감화 감동을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된 참 백성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강도와 절도 떼에 넘겨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운명을 맡겨버립니다. 이게 바로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말한 파시스트, 히틀러의 파시즘 안에 자기 운명을 맡겨버린 독일민중의 운명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시민적 도덕성이 하한치를 구성하면, 시민적 도덕성이라는 말은 옳고 그름의 분별력, 국가가 하는 행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능력이 없는 경우는 지금 당장 자기에게 이익을 주는 자에게 모든 걸 맡겨버리는 도박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틀러가 1925년에 이미 쿠데타를 한 번 일으켰습니다. 뮌헨 맥주 집에서 쿠데타를 일으켜서 벌써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그 감옥에서 라는 책을 씁니다. 감옥에서 쓴 이 <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29-30년 초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히틀러 같은 사람이야말로 독일문제를 일시에 해결할 것이라고 하면서 1930년 독일 뮌헨베르크 전당대회에서 40만 명이 모입니다. 33년에 드디어 제1당이 돼버리고 총통이 돼버립니다. 7-8년 동안의 기간을 에리히 프롬이 자세히 기록합니다. 인간이 자유를 양도하고 가장 폭압적인 독재자 지배자에게 자기 주권을 맡겨버린 과정을 사회심리학적으로 정말로 분석을 잘했습니다. 그게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자유를 행사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오늘 날 큰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의 많은 경우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입니다. 지금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목사님이 정통인지 이단인지 그 수고를 하지 않고 대신 목사님이 하는 말을 다 믿어버리고 목사님이 나를 천국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우리 목사님이 죄를 좀 지어도 된다고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히틀러급 아주 나쁜 절도와 강도 같은 목사들과 노예근성에 찌든 교인들이 한 패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제가 이단인지 아닌지 매번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인정하는 목사님이 기분이 좋은 겁니다. 대중들, 노예근성에 찌든 사람들, 목사에게 집착하면서 성경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에 우리가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큰 교회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기가 직접 에스겔 예레미야를 찾아보지 않습니다. 목사님이 한 말을 믿고 아멘 해버립니다. 백지수표를 드미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헌금을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고, 100억의 헌금이 50억의 헌금으로 토막이 나도, 분당에 있는 교회는 100억을 high risk high return에 투자했다가 50억으로 반 토막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와 장로와 당회가 그대로 노회에서 옳다함을 인정받았습니다. 재테크 하다가 망할 수 있지, 그런데 그 100억을 가지고 투자한 것도 큰 죄거니와 만일 회사에서 50억을 손해 보면 법정 등기이사는 물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백성 헌금을 100억을 50억으로 만듭니까? 이런 걸로 치밀어 오르면 안 되는데 치밀어 오릅니다. 왜 그런 기사를 실었습니까? 그 기사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신문을 보는 것 아닙니다. <뉴스엔조이> <오마이뉴스>는 문자를 보냅니까? 저도 <조선일보> 애독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악한 당회와 목회자들과 노예근성으로 찌든 사람은 한 패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연속극을 보고 사순절에 성경을 안 봅니다. 사순절에 만일 에스겔 예레미야를 읽으면 우리 목사님이 지금 제정신인가 아닌가 금방 분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목회자의 영적건강성 신학적 건강성을 테스트해주지 않으면 잘못됩니다. 헌금을 했는데 하나님의 제단에 바친 헌금만 하나님께 갑니다. 보세요. 신명기 12 11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제단에 바친 헌금만 하나님께 갑니다. 우리 하나님 이름, 현존이 나타나지 않는 곳에 바쳐진 헌금은 강도떼한테 가고 마피아한테 갑니다. MMF 50억에 갑니다. 일단 교회가 그렇게 하면 죄악된 겁니다. 그건 오늘 다 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요. 절도와 강도떼는 타인의 음성을 가졌지만 타인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타락한 노예근성과 같은, 성경을 스스로 읽어서 진리를 말씀을 분별하려고 하는 개인적인 분투를 하지 않는 더럽고 추악하고 타락한 양떼는 절도와 강도떼와 한 패를 이룰 수 있다는 겁니다. 목동에 있는 한 교회는 유흥비로 50억을 썼다는 말이 있습니다. 재판에서 유죄로 4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목사는 참으로 청춘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결국은 무죄가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 법정에서 4년을 때려서 감옥에 갔는데 그 목사님은 감옥 안에서 옥중당회를 합니다. 주님도 이 모든 고난을 내게 주셔서 정금 같이 단련돼 나가겠습니다, 욥기 23 10절 믿고 꼭 참아주십시오, 아멘 합니다. 옥중에서 성경을 적어 보내면 아멘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건 병이 들어도 너무 든 겁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연속극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습니다. 구정물 하수구 시궁창 같은 TV를 너무 많이 봐서, 성경을 많이 보면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썩어빠진 사람들이 많은 나라에서 성경을 많이 보면 굉장히 까칠한 사람처럼 보이고, 저놈 대체 뭐가 불만이냐?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이게 너무나 고달픕니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갖춘 게 많은 사람이 왜 저렇게 사회에 불만이 많아, 실제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너무 슬픕니다. 하나님의 영이 격동시켜서 이렇게 설교를 하는데, 목사님 뭐가 대체 불만입니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불만이 없습니다. 거룩한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절도와 강도떼들과 타락한 양떼들이 죄 위에서 결탁해서 대교회를 이루고 그들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이 안타까운 세상이 저는 힘든 겁니다. 그럼 네가 큰 교회해봐, 이렇게 또 빈정거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 같은 사람에게 큰 교회를 하게 하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말씀을 맡겼지 많은 교인들을 맡겨주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으니까 별소리를 다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여러분은 믿지 않을 겁니다. 저도 500명되기 직전에 그만 둔 사람입니다. 매년 80명씩 성장했습니다. 4년 동안 수적 성장을 해본 사람입니다. 안 해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올 것 같아 두려워서 빨리 그만뒀습니다. 네가 큰 교회해서 해 보는 게 가장 빠르겠네, 김회권 네가 계속 설교 하지 말고, 말하지 말고 너도 만 명 교회해서 돈 제대로 써봐, 이건 양진일 목사와 저를 격동시키는 말입니다. 저는 그럴 마음이 없고 오해를 받으면서도 절도와 강도와 양떼들이 결탁해 이루는 거대한 mega church 현상 앞에 우리 교우들이 타인의 음성과 목자의 음성을 제대로 구별해주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저도 훌륭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시고 저는 항상 과대평가 받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워낙 타락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의로운 목사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나쁜 세상입니다. 그래서 한심한 것은 자꾸 설교해달라고 부탁할 때, 얼마나 대체 사람이 없으면 이렇게 나에게 찾아올까? 제가 참 괴로운 것은 타인의 음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양떼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목자의 음성을 구별해야 할 의무가 내재돼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돌봄을 받는 양 자유농민들, 자기 땅을 경작하면서 타인의 땅을 차지하지 않고 자기 노동의 성과로 먹고 사는 사람들, 지금은 이겁니다. 자유농민들, 착취하지 않고 이웃을 탐하지 않으면서 자기 땀과 수고를 통해서 먹고 사는 자유농민들 암,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을 알아차려야 하고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목자를 따라가는 양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춧돌이 되고 그들은 폭압적 국가 기능을 약화시키면서 점점 이 세상을 국가의 절도떼와 강도떼가 내리는 명령체계가 하달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악한 나라가 성공하지 못합니다. ? 한 사람만 악의 명령하달체계를 비토하면 됩니다. 그래서 악의 명령체계도 성공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빛이 압도하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이 빛이 왕국이 됐다고 느낄 만큼은 되지 못합니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어둠을 더 많이 경험합니다. 직장에 가보면 악인이 더 많아요? 착한 사람이 더 많아요? 보통 직장에 가면 게으른 사람이 많아요, 헌신한 사람이 많습니까? 항상 농땡이 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돈 떼먹는 사람이 많고, 노예근성에 찌든 사람이 많습니다. 아주 헌신적인 사람이 소수입니다. 그래서 어둠이 더 보편적인 겁니다. 어둠이 더 기득권을 가지고 우리마음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세력을 빛이신 예수님이 몰아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지만 빛도 어둠을 압도하지 못하는 이런 약간 빛이 수세에 몰린 무정부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분발해야 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심령을 지배하고 우리를 온전히 어둠의 세계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순진한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빛의 동아리를 심어줘야 합니다. 말씀의 빛을 밝혀 어그러지고 패역한 세대를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나눌 만큼 우리가 커야 합니다. 200-300명 정 도 되면 한 마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고양시 덕양구 화정1동에서 목회를 했을 때 약 1억이 모였습니다. 이때 예산으로 약 8천만 원하면 극빈자들에게 200만원씩 나눠줄 수 있습니다. 200 만원을 우리교회만 나눠줍니까? 다른 교회도 나눠줍니다. 그러면 빈민들에게 현금을 직접 나눠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200-300명 교회가 몇 개만 뭉치면 각 동에 있는 빈민을 국가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국가의 도움 없이 교회가 해결하자는 겁니다. 1억을 거기에 쏟지 말고, 가난한 사람에게 학원, 가난한 사람에게 도서관을 지어주고, 가난한 사람 집에는 도서관이 없습니다. 도서관을 지어주고 운동도 시켜주고 음악도 가르쳐주고 다 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풍성한 삶이 되고 하나님께 직접 배타적 소속감을 갖는 이 양떼, 이스라엘 자유농민, 즉 자기 땀을 흘려서 먹고 살아가는 착한 백성들이 주님과 하나 되면 이 양떼들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습니다. 요약합니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은 자기가 가진 땅에서 자기 땀을 흘려서 먹고 사는 삶, 두 번째 압도적인 외부세력들로부터 땅을 빼앗길 염려가 없이 사는 안전한 삶, 안식권이 보장된 삶, 타인의 음성을 가진 거짓된 지배자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권리가 있는 삶, 집에 일찍 퇴근하여 저녁식사들을 아이들과 먹을 권리가 있는 삶입니다. 노동의 성과를 자기가 갖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삶이 풍성한 삶입니다. 노동과 안식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 풍성한 삶이고, 하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되어 폭압적 강제적 폭력적인 국가적 기관 또는 국가기관보다 더 높은 기관에 휘둘리지 않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이것이 바로 풍성한 삶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이 풍성한 삶이 아니죠? 먹고 살기 위하여 관료적 위계질서 속에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삶, 내 양심은 A 쪽으로 가야하지만 회사의 명령은 B로 가라고 해서 할 수 없이 B를 할 수밖에 없는 삶, 이건 바로 착취와 압제에 시달리는 겁니다. 우리나라 국가공무원법에 보니까 직속상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법, 아돌프 하이히만이라는 아우슈비츠 학살자가 변명했던, 직속상관이 시키면 나는 할 수밖에 없다는 그 변명이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부당한 명령, 양심과 이성에 반하는,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해치는 명령을 직속상관이 하면 거부할 수 있는 법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법입니까? 이런 법이 있어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가 볼 때 단기간에는 직속상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그 회사에 손해를 끼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명령을 거부하는 것, 비자금 명부를 쓰라고 하는 것을 거부해서 회사에서 잘릴 수 있지만 그 회사가 인정하지 못해도 그런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하다가 잘리면 하나님이 지켜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생동안 직장이 안 생길 수 있어요. 후손들한테 잘 되고 자기 때는 안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지도 못하고 어둠도 빛을 이기지 못하는 약간 빛이 수세에 몰리는 무정부상태에 있는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그래서 우리가 사순절에 타인의 음성대신에 목자의 음성을 듣고 이 세상에 주님이 주시는 푸른 초장으로 나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음 일주일 동안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타인의 음성을 거부할 수 있는 담력과 패기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양의 문이 되셔서 우리를 어떤 이 세상의 폭압적 국가기관과 회사 조직 등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만드신 이 아름다운 초장을 마음껏 뛰놀면서 땀 흘려 수고한 열매를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삶의 사모함이 가득 차게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을 축복해주셔서 하나님께 직접 속하여 어떤 폭압적 강제적 지도자들로부터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받지 않는 참 자유의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고된 노동 때문에 안식을 잃어버리고 언제 내 직장을 잃을지 몰라서 불안에 시달리는 착취당한 양들의 운명을 거둬주시고 주님과 함께 주님의 땅에 살 수 있는 절대평안을 허락해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드립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많은 두려움과 위험이 도사리는 현장에서 일터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과 감사로 드렸습니다. 이 귀한 물질을 하나님 나라 백성을 살리는 데 써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써주시길 바랍니다. 주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이 있습니다. 진로의 문 취업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이 있습니다. 새로 대학에 들어가서 학문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이 있습니다. 또는 길을 잃고 방황하여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창조적 모색 중에 있는 아들딸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각각 이름으로 불러내셔서 주님의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이 나라 이 민족이 교회 바깥에 있는 양들, 교회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알 기회도 박탈당한 양들이 있습니다. 주님 이 억조창생이 주님의 양입니다. 그들도 우리가 권고하게 해주시고 책임지게 해주시길 주님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김형준 사랑하는 당신의 아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자라게 하시고 담을 넘는 가지가 되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좋은 선배들을 만나고 좋은 교수들을 만나게 도와주시고 이 세상에 쓰임직한 인재로 자라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삶의 현장에서 풍성한 꿀을 먹지 못하여 살아가는 일이 버거운 모든 아들딸들 위에, 이 교회 와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미래신자들 위에, 우리 교회에서 가장 연약한 아픈 교우들 위에, 어린 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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