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주일설교_요한복음 10장 11-18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
요즘 멘토링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될 만큼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버스를 타면서 김난도 교수가 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는 책 광고를 쭉 봤는데, 구약에 나오는 거짓예언자들의 약속 같은 약속이 놀랍게도 책 광고에 있었습니다. 구약에 있는 거짓예언자들은 백성들의 상처를 심상하게 여기며, 아직까지 치료가 임하지 않았는데 치료가 임했다, 샬롬이 임했다, 치유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멘토링 담화의 특징은 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선인데 그 사람이 하는 역할을 정의롭게 바꿔주거나 그 사람이 좀 더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멘토링입니다. 원래 멘토링 또는 훈육 격려 담화입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참여하고 나서 10년인가 집을 비웠습니다. 그의 친구 멘토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를 격려하고 훈육하면서 아비 없이 크는 그 아들을 대부가 돼서 아버지처럼 훈육 격려 담화를 했습니다. 그게 멘토로입니다. 멘토링이라는 말은 격려 훈육 담화, 훈육은 잘못된 것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멘토링은 멘토를 요청하는 멘티들에게 일단 정서적 지지를 보여주고 그 사람이 곤경에 처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지금 당장 그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멘토링은 거짓예언자들의 말,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여기며 치료가 임하지 않았을 때도 치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범상담주의적, 범멘토링주의적 대화, 이건 예수님의 대화와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자마자 듣는 사람들을 한 데 모아놓고 역할들을 전부 다 생각하면서 각자 다르게 듣도록 말씀하시는 1음성 다중경청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한 말씀을 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강도떼들이 느끼는 경악과 어린양들이 느끼는 위로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선한 목자 발언도 강도와 절도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없애버리고 싶은 격분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도떼들에게 뜯김 당하고 찢김을 당하는 어린 양들에게는 하나님이 나타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담화는 우리 모두를 공동체 전체의 역할과 권력관계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되돌아보도록 도와주는 성찰적 담화, 심지어 자기비판을 촉구하는 담화입니다. 오늘날 멘토들은 예수님 같은 공공성 넘치는 담화가 아니라 순전히 그 사람 개인에게만 약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그런 말을 합니다. MB에게도 멘토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 MB도 누구의 멘토가 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가 있는 보좌관 김기수, 네가 지은 죄는 그렇게 큰 죄는 아니야, 한 2년만 살고 나와, 악인들 사이에도 멘토와 멘티 관계가 성립되는 겁니다. 우리 사회 모두 다 복되게 만드는 예언자적 담화를 밀어냈기 때문에 예언자적 말을 하면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처럼 보이고, 저 사람 무슨 문제가 많기에 이 사회를 삐딱하게 보나, 오늘날 예수님처럼 말하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지도자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강도요, 이리떼다, 삯꾼 목자다, 이건 굉장히 격렬한 도전입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바로 격렬하게 공격했습니다. 이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실 때 나를 절대적 사적 공간에서 만나지 않고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오늘 선한 목자가 듣기에는 굉장히 목가적인 담화입니다. 그러나 목가적 담화가 아니라 무서운 담화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자체가 예수님이 이 말을 하고 나서 자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의심하게 만드는 본문입니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에고 에이미 호 코헤민 호 칼로스, 에고 에이미는 제가 말씀드렸듯이 1인칭 대명사가 쓰였기 때문에 차이보조사, 다른 사람과 자기의 차이를 부각시킬 때 쓰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이 화법은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볼 때 격렬하게 모욕을 느낄 수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이 바로 에고 에이미 호 코헤민 호 칼로스, 나는 선한 목자라, 정관사가 붙었기 때문에 에스겔 34장이 말한 선한 목자입니다. 여기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에스겔 34장이 말한 이리떼고 강도떼고 삯꾼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얼마나 예수님이 자기를 위협에 빠뜨리는 말입니까?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내 양의 곤경과 상처와 한을 알고 라는 말입니다. 내 양이 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위기를 안다는 뜻입니다. 굶어서 사흘 동안 방황하면서 나를 찾아다니는 핏기 없는 얼굴들의 정체를 안다, 안다는 말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수천 명의 무리를 광야에서 광야로, 산에서 산으로 끌고 다녔습니다. 수천 명의 무리가 사흘을 굶으면서 예수님을 쫓아다녔다는 것은 너무나 특이한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굶은 지 사흘 된 사람들이 예수님을 삼일씩 따라다니고 이 들판에서 저 들판으로,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이 멧부리에서 저 멧부리로 따라다닌다는 말은 그 사회가 너무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 언어 하나하나는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언어입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이때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에 quotation mark 인용부호가 붙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34장을 보세요.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사태를 더 보려면 예수님보다 20년 늦게 태어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쓴 책 중 <유대전쟁사>를 보면 됩니다. 앞부분을 보면 헤롯분봉왕의 지배체제, 로마제국의 유다 지배체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중간 말단 관리들이 세리와 군병입니다. 세리와 군병의 협조가 없으면 헤롯분봉왕 체제도 무너지는 것이고 아무도 세리가 되지 않으면 세금을 거둬들일 수 없는 것이죠. 아무도 분봉왕이 될 만큼 이스라엘을 통치하겠다는 통치용역업자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로마가 직접 지배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해야 하죠. 로마의 관리를 파견하면 로마가 히브리어를 알아야 하죠. 얼마나 복잡해요. 토착 왕조가 서서 대신 지배해주고 로마에게 약간만 바치면 되죠. 로마자체는 10분의 1을 요구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10분의 1 속주세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미 줄리어스 시저, 카이사르는 예루살렘의 독특한 반역성, 예루살렘 도시는 volatile 폭탄이 터지는 무서운 동네인 걸 알았기 때문에 줄리어스 시저,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예루살렘을 건들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총독이 관저를 설치하지 못했습니다. 총독의 관저는 해변도시 가이샤라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안토니오 요새라는 출장소, 작은 사무실이 있었고 총독이 예루살렘에 나타나면 예루살렘 제사장들이 바로 민중을 선동해서 위협을 가했습니다. 로마가 파견한 총독들이 갈릴리 일대와 유다 일대를 지배하는 과정을 자세히 말하면서 바로스 총독, 바로스 총독 때는 갈릴리 지방민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공물을 안 바치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금고를 부수어서 금고를 통째로 가져갔습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사람들이 유다에 대해서 AD 66년에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 됩니다. 그것을 쭉 밝힌 것이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입니다. 삯꾼 목자는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이리와 강도떼는 로마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리와 강도떼라는 말에서 로마제국을 가리키는 걸 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헤롯에 대해서는 여우라고 했습니다. 헤롯의 별명이 여우, 새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9장 58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나사렛에서 6km 떨어진 근방에 가면 헤롯 안티파스라는 아주 악하고 음란한 분봉왕의 수도가 있었습니다. 그 수도가 치포리입니다. 치포리는 새라는 뜻입니다. 새 모양처럼 보였기 때문에 지금도 가면 전차경기장과 로마 목욕탕 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거기에 공사를 다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수 일을 주로 했을 때는 치포리라는 도시, 분봉왕 도시에 토목건축에 예수님이 동원됐을 수 있습니다. 왜? 6km 떨어진 사람들이 일하러 갔거든요.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6km 떨어져 있는 치포리, 헤롯 안티파스 궁정에 일하러 다니셨던 일꾼이셨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 연극을 보셨을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위선자라는 말을 쓰시는데 위선자는 히브리어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 말은 헬라어인데, 위선자, hypocrite, 가면을 써서 연극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그리스적 연극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일 마치시고 저녁에 극장에서 그걸 보시고 퇴근하신 겁니다. 6km니까 거리를 걸어 보면 한 시간 반 만에 갈 수 있습니다. 지금도 치포리에 가보면 극장 목욕탕 로마전차경기장이 다 있습니다. 강도 삯꾼목자, 이런 말들은 굉장히 정치개입적 발언이고 정치 평론적 발언이고 시사 개입적 발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이 다스리는 통치형태를 두 가지 단어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카타 엑소시아주 카타 큐리우, 이 두 단어인데 이 말은 압제하다, 심하게 압제하다는 뜻입니다. 카타는 심하다는 뜻이고, 큐리우는 큐리오스, 주노릇하다, 심하게 주노릇하다, 과잉스럽게 인간이 견딜 수 없게 주노릇하다, 인간이 견딜 수 없을만큼 권력을 행사하다, 참혹한 권력남용을 카타 엑소시아주 라는 말을 썼고, 참혹한 주인 노릇하는 것을 카타 큐리오, 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건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에서 쓰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헤롯에 대해, 로마제국에 대해 너무나 통렬하고도 기가 막힌 농민적 시각을 가지고 그 사태를 분석했다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멘토 담화를 하는 게 아닙니다. 중립적인 누가 들어도 그렇고 그런 거짓 예언자 담화가 아니라 삯꾼 강도 이리떼 역할을 규정하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선한목자 담화에 있는 무서운 공격성입니다. 이 선한목자는 우리한테 선할지 몰라도 이 선한목자 담화를 듣는 삯꾼과 이리떼와 강도떼한테는 결코 선한 말이 아닙니다. 자기들한테는 선한목자가 아니라 완전히 악한 목자입니다. 선과 악의 규정은 인간이 하면 안 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 먹는 순간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선악의 판단은 하나님께 배타적으로 소속된 권리입니다. 그런데 선악의 판단을 무력, 힘을 가진 자가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는 순간 인간이 폭력의존적인 사회가 될 것을 아시고, 선악판단의 토대가 권력을 가진 자의 손안에서 용단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는 순간 인간이 타락했다고 믿은 이유는 인간 본성 안에 선악의 판단을 인간이 마음대로 해버리면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자율적인 인간이 되거든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내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선악을 용단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는 말을 썼지만 삯꾼과 강도와 이리떼한테는 선한목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선한목자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한 번 버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떼를 찾기 위해서 로마제국과 헤롯종교와 바리새인 성전종교가 포기해버렸던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재활복구시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은 겁니다. 예를 들어 날때부터 소경된 자는 바리새인과 성전의 신학에 따르면 날 때부터 죄가운데 태어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죄 때문에 불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우리 하나님의 두 번째 창조손길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 영광이 나타날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규정된 사람들을 예수님은 의인으로 규정하고 세리와 창녀 로마종교, 바리새인 종교가 쓰레기로 인간 말종들로 분류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본백성,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 여자들 어린 아이 이방인을 무차별로 하나님 나라에 초청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하나님 나라에 초청했습니다. 로마제국의 앞잡이였던 여리고의 세금청부업자 우두머리 삭개오를 품으시고 재활 복구시켰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 당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설정했던 구원의 판도를 다 바꾸었습니다. 선한목자는 그런 일들을 하여 점점 미움을 받다가 그 미움받음이 폭발하여 십자가에 못이 박혔습니다. 그 사람들을 한 사람씩 구해내는 과정이 미움을 촉발시키고 미움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선한목자의 고유과업인 찢기고 상한 심령 영혼을 도우려다가 고치려다가 치유하려다가 미움 받았으니까 자기목숨을 버린 거죠. 양을 찾으려다가 자기 목숨을 버린 거죠.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As I lay down my life, 내 목숨을 스스로 내어놓는다, 무얼 위해서? 어린 양떼들을 삯꾼과 이리떼와 강도떼들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 내가 조금씩 살기와 위협 안에 내 인생을 드러낸다, 나를 죽여버리려고 하는 강도떼들의 사정권 내에 내가 점점 들어간다, 그 강도떼들에게 빼앗긴 내 양떼들을 찾기 위해서, 강도떼가 물고 있는 그 양새끼를 빼내기 위해서 나는 강도의 이빨 사정권으로 들어간다, 사자와 곰의 이빨 사정권 내로 들어간다, 다윗이 그랬죠?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사울에게 말했습니다. 34-35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이게 바로 선한목자의 전형적인 예문입니다. 이게 선한 목자입니다. 지금 날때부터 소경된 사람들을 물어 뜯습니다. 저주 받은 사람, 혈루병 걸린 여인 성전에 오지 마, 유출병 걸린 여자, 이방인 오지 마, 여인 오면 안 돼, 창녀 오면 안 돼, 세리 민족반역자 오면 안 돼, 배제와 배타와 배척의 종교, 자신들을 특권적으로 유리하게 만드는 종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자기 생명을 살찌우는 드라큘라적 본성을 가진 악한 종교, 이 종교는 바로 삯꾼 목자 강도떼 이리떼입니다. 이 세계의 모든 종교 안에는 성도를 착취하려는 야만적 요소가 있습니다. 성도라는 구원받고 싶어하는 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돈과 생명을 빼앗아가는 거대한 착취 구조가 이 모든 제도권 종교 안에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제도권 종교는 그 자체가 구원 대상이 되지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가 종교를 가져야 하지만 제도권 종교가 되면 안 됩니다. 목사님이나 교황이나 주교가 생명을 소진해서 어린 양들을 살리는 종교가 아니라 어린 양들의 맹목적 충성을 이용해서 점점 차전놀이 하듯이 높아져서 드디어 교황도 되고 교황급 목사도 되고 당회장도 됩니다. 교황이 가난하게 살자고 했지만 교황청은 가난할 수 없는 천문학적 부자입니다. 교황이 아무리 빵모자 쓰고 다녀도 기본적으로 교황에게는 성령이 역사할 수 없어요. 교황이 경건한 이미지를 발산한다 하더라도 교황청 자체가 너무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교황이 그만 둔 것도 금융스캔들, 교황청의 돈, 성적타락, 성폭행, child molest, 끝이 없죠. 겉으로는 제일 거룩해보이는 게 가톨릭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 우리나라 200만 명이 옮겨갔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황청은 그렇지만 역설적이지만 썩은 교황청 고목에 가끔 연한 순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속습니다. 교황청 제도 자체는 타락했습니다. 그 교황청이 인사권 재정권 축복권 사제권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우리나라 목사들이 이걸 다 가지려고 합니다. 인사권 재정권 축복권 영혼구원 마지막 최종 심판권까지 목사님이 가지려니까 교황을 방불케하는 목사가 되는 겁니다. 새벽기도 축복기도 해주겠다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교황이 되려는 자입니다. 함부로 새벽기도 마치고 머리를 맡기면 안 됩니다. 잘못되면 악령을 받습니다. 실제로 기도원에 가서 목소리 이상한 사람, 눈 돌아간 사람, 안수받으면 귀신이 임합니다. 기도원은 꼭 둘씩 가야합니다. 혼자 가서 귀신 받아서 와서 쫓아내려고 하면 저도 지금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온 종교의 특징은 성직자, 가장 하나님께 가까운 사람들의 부단한 희생과 겸손입니다. 낮추어짐, 하나님과 접촉한 종교의 특징은 진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으면 부단한 겸손, 부단한 낮춤, 비특권화, 특권을 자꾸 없앱니다. 하나님의 영과 접촉하는 순간 편한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기를 성육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육신의 제한속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발을 씻으셨고 몸을 낮추셨습니다. 즉 생명력을 소진하는 쪽의 종교는 하나님과 잇닿아 있는 종교, 양떼들의 생명력을 착취하여 큰 건물을 짓거나 부동산 자산을 늘리거나 거대한 해외투자를 늘리거나 하는 모든 것은 교황청 주의자이고 바티칸주의자이고 삯꾼 강도주의자입니다. 이 종교의 분별은 영분별이 가능한 사람한테만 가능합니다. 멘토적담화를 듣기 위해서 교회가는 사람, 지금 당장 나한테 필요한 말이 필요하지, 세계구원 필요 없어, 전태일도 필요 없고 사대강도 필요 없어, 지금 나한테 위로가 될 멘토를 듣기 원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부르는 민중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 모두의 역할을 일깨워주는 메시지를 전할 겁니다. 물론 보편적 적용점은 있겠지만 우리 모두 각자에게 맞는 말씀을 하십니다. 군병 여러분은 민폐 끼치지 마십시오, 월급이 족한 줄 아시고 더 이상 착취와 압제를 그만하십시오, 세리 여러분, 정한 세 이상은 더 받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각각 자기 행위를 다 고쳐줍니다. 회칠한 무덤 여러분, 교만하신 서기관 여러분, 즉각 교만을 그치시고 더 이상 회를 칠하지 말아야 합니다. 카타 엑소시아주 카타 큐리우, 권력남용과 권력압제의 전문가가 된 총독여러분 분봉왕 여러분 좋은 말 할 때 빨리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도끼가 나무뿌리 위에 놓였습니다, 도끼가 지금 나무뿌리에 놓였는데 가지를 치면 뭐합니까? 도끼가 뿌리에 놓인 그 나무에 어떤 치장을 해도 도끼에 뿌리가 노출된 나무인 겁니다. 로마교황청이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아무리 화려하게 50만 명 모이고 100만 명이 모여도 도끼가 뿌리에 놓인 나무와 같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릇된 방법으로 성공해도 주님의 원칙과 다른 방법으로 성공해도 엄청난 성공, 그 많은 명함들, 그 많은 차들, 그 많은 높은 집들, 모두 도끼에 뿌리가 노출된 나무와 같습니다. 아무것도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선한목자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그분은 자기목숨을 버려서 양떼를 살리는 것, 하나님의 참된 모습,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자기의 피와 살을 나누는 방법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겁니다. 이 세상 창조자체가 하나님께는 살과 피를 나누는 생명 나눔의 잔치입니다. 하나님 혼자 계실 때와 이렇게 고등피조물인 영물이 세상을 돌아다닐 때를 비교하면 하나님 뜻대로 하기가 어떨 때 좋겠습니까? 하나님과 말 잘 듣는 가브리엘과 미가엘 천사들만 있다가 아브라함과 노아 같은 사람이 나왔어요. 하나님 편에서는 어떤 게 좋아요? 가브리엘 미가엘 라파엘 천사만 있다가 생각의 속도로 움직이는 천사들, 하나님이 물 하면 물을 떠오는, 생각의 속도로 움직이는 민첩한 천사들의 순종모드와 아담 가인 라멕 바벨탑 축조세대들 이런 자들과 같이 살면서 이 세상을 운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명소진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피, 자기 보혈을 흘려가면서 이것은 유지해야 하니까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 자체는 살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적인 대잔치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은 그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 편에서는 살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의 향연과 같은 것이다, 참 하나님은 사람들의 제물을 받아서 사람들의 부추김에 따라 흥건히 자아도취에 빠져서 어리석고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부단하게 가장 밑바닥 인간들과 접촉하면서 가장 밑바닥 고아와 과부의 입에서 하나님 살아계신다는 말 듣기를 좋아하십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 중에서 가장 밑바닥 사람 입에서 고백되는 하나님만 참고백입니다. 왕후와 장상과 대장군과 대사령관과 백작과 공작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고아와 과부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 살아계신다는 고백만 참고백입니다. 잃어버린 어린 양의 입에서 나오는, 찢긴 양의 입에서 나오는 참목자 고백만 참목자입니다. 찢긴 양떼들을 보듬어주는 목자만 참목자입니다. 이것은 큰교회라고 해서 못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큰교회가 이걸 못하는 이유는 교회가 크면 돈이 드는 일을 벌리게 되고, 돈이 드는 일을 많이 벌리는 순간 영혼의 무게보다 돈의 무게를 향해서 목사의 몸이 기울어지게 됩니다. 돈 많은 자가 갑자기 귀해보이고 돈 많은 자를 아리마대 요셉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은 없고 영적 갈급만만 진탕 가지고 옷을 헐벗고 온 사람에게 야고보서에 보면, 거기 앉으려면 앉고 말려면 마세요, 밍크코트를 입고 오면, 아이고 천 백만원 상표입고 왔네, 여기 오세요, 목사님 옆에, 그게 바로 야고보서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이 목회하던 때 있었던 일입니다. 타락한 교회에서 있던 일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 삼년 내내 양떼를 얻어냈고 그 결과 마침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한 번 못 박힘으로 죄를 사해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이미 예수님은 매 순간 십자가에 못 박힐 마음으로 어린 양떼들을 건져냈고 예수님이 삼년 간 하신 일을 극적으로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도저히 파괴할 수 없다, 이런 사랑은 uncorruptible 부패할 수 없다,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시켜주는 것이 부활입니다. 요한복음의 부활은 하나님 사람의 불멸성 불패성 불파괴성 이것을 입증합니다. 공관복음서의 부활은 빌라도가 로마최고법정이 내린 판결을 뒤엎어버린 더 큰 나라가 있다는 정치적 사건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로마총독의 빌라도가 사형 판결을 내린 판결을 무효화시켜서 로마제국의 판결을 지방자치단체수준의 판결로 무효화시키고, 진짜 최종법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정치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사건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세상의 가장 연약한 어린 양떼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불멸의 사랑, 사랑의 불멸성, 죽을 수 없음, 파괴불가능성, 부패불가능성,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부활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겁니다. 사랑은 절대로 죽지도 못하고 파괴도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다 죽잖아요. 내 몸은 산산조각 나더라도, 내가 누구를 사랑하다 전쟁터에서 죽을 수 있고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지만 사랑자체는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부활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10장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여기 보십시오. 양은 선한목자를 알아차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양은 타인의 음성과 목자의 음성을 구별해야 할 일종의 분별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사랑의 불멸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나처럼 사랑하다가 인생을 거룩하게 소진해가는 여러분을 만들고자 함이다, 여러분 모두 어린 양을 먹이는데 즉 여러분보다 가난한 사람, 여러분과 동료에 있는 사람, 여러분 이웃을 가족을 친지를 사랑하다가 죽으십시오, 사랑하다가 죽는 것만이 부활을 담보합니다, 나는 이 하나의 일반 원칙을 입증하기 위하여 내 스스로 목숨을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이 사랑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내 목숨을 돌려주십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유다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어린 양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에 감복했기 때문에 나도 어린 양을 사랑합니다, 내게 큰 마음을 주신, 어린 양을 보고 사랑하다가 죽겠다는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가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를 죽게 만드신 분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런 말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 뜻에 완벽하게 살아가다 보니까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사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는 신적인 불멸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시 생명을 얻을 권세를 주십니다, 이 계명은 아버지께서 주셨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원래 삼위일체는 수학공식으로 말하면 세 집합처럼 돼 있습니다. 우리가 한 번 사랑할수록 삼위일체적 연합에 분자처럼 들어갑니다. 결국 우리는 이 하나님 삼위일체 연합, 예수님 사랑을 알고 하나님 사랑을 알면 삼위일체연합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 사랑의 질량과 부피를 확장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함입니다. 이걸 아타나시우스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들었을까? 하나님처럼 되게 만들기 위해서 만드셨다, 이런 말을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야수적 일차적 욕망에 시달리는 존재이지만 우리 안에 전혀 다른 신적 성품이 예비돼 있고 우리 안에 사랑하다가 죽을 수 있는 삶이 불멸할 수밖에 없고 불파괴적이고 부패할 수 없다는 알려주는 것은 하나의 일반적인 사건입니다. 사랑이 이긴다는 것, 사랑이 최고라는 것, 자기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 자기 자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할수록 내 사랑은 확장성이 있고 개방적일 때 이 사랑이 바로 불패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내가 돈을 사랑하면 이 사랑은 돈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친구를 미워하게 되고 친척을 미워하게 되고, 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돈 없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니까 돈 사랑은 천국까지 가는 부활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불륜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애완견 사랑도 아닙니다. 수석사랑도 아닙니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참 많지만 천국에서 부활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물론 애완용 개 사랑은 모르겠습니다. 신학적으로 요새 한참 논쟁중입니다. 애완용 개가 부활할 것인지, 저는 부활한다고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0-21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있기 때문에 개나 좋은 고양이는 다 부활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고양이는 모르겠어요. 다만 제 말은 사랑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이때 어떤 사랑이 부활하느냐? 삼위일체적 사랑,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누군가를 배제할 때는 아닙니다. 엄마가 이기적으로 자기 자녀를 위해서 25조를 쓰는 사랑은 천국 못 가는 사랑입니다. 왜? 강남엄마가 자기 자녀를 대원외고 넣기 위해서 25조를 쓰는 순간 중랑고 아이들은 서울대 근처에도 못 가보고 다 굴러떨어져서 지방에 가다가 남해바다로 빠집니다. 강남 엄마들의 엄청난 돈 사랑, 자녀 사랑은 보편성이 없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일본 젊은이들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안 됩니다. 일본 사람이 자기 나라를 사랑해서 카미카제 비행기로 죽었죠. 이건 애국심이 맞지만 동남아시아에 전쟁을 일으킨 엄청난 참화같은 사랑, 김정일이 인민을 사랑하는 것도 안 됩니다. 보편성이 없습니다. 우리 남한을 불바다로 만듭니다. 그다음 이명박께서 자기 자녀들 부패한 측근들을 많이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도 안 됩니다. 왜? 이명박씨가 자기 측근을 사랑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불행해집니다. 어떤 사랑만 될까요? 내가 A라는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누구에게든 보편적 유익을 끼치는 사랑이 될 때만 부활하는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랑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삯꾼 강도떼들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이 남발되는 이 때, 요한복음의 사랑은 뭘까요? 우리가 한꺼번에 목숨 바칠 수 있을까요? 보편적 사랑을 조금씩 분할되게 사랑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극적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분활된 사랑을 살았는데 우리 엄마 아빠가 살았던 삶을 보니까 분할된 사랑을 합해보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었구나, 라고 그걸 순식간에 깨닫게 해주는 사랑, 그 엄마 아빠의 사랑으로 자녀가 잘 자라서 공익적인 인물이 되고 예언자적 인물이 되고 양식이 있는 인간이 돼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때 이 부모의 자식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 됩니다. 그런데 길렀는데 히틀러 같은 애를 길러서 온 세계를 죽음으로 몰아 넣으면 부모님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식 있는 시민, 에수님과 같은 착한 시민, 마음씨 좋은 시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시민, 그런 좋은 시민들을 길러내기 위한 부모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탐욕을 자아내고 특권을 영속화시키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찢기고 상한 심령으로 초장을 찾지 못하고 생수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양떼들을 당신의 넉넉한 품속으로 불러내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자마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것이 우리의 약속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한 번 박히신 게 아니라 삼년 내내 어린 양을 찾을 때마다 십자가에 박히셨습니다. 미움 받으셨고 오해받으셨고 위협받으셨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위험하다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렇게 고난 받는 일임을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정 예수님 같은 사랑을 별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일이 이렇게 위험한 일인 걸 미처 몰랐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다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모든 형제자매들을 위로해주시고, 정의를 사랑하다가 공의를 사랑하다가 병든 이웃을 사랑하다가 오해받고 엉터리 재판을 받고 구속된 이웃을 사랑하다가 벼랑 끝에 내몰린 이웃을 사랑하다가 오해받고 위협에 시달리는 모든 딸들을 부활시켜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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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한다고 고백하는 죄인과 본다고 주장하는 의인-요한복음 9장 35-41절 (0) | 2022.02.13 |
모세종교의 장막 뒤에 숨은 어둠의 자식들-요 9:24-34 ( (0) | 2022.0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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