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주일설교 2부 _ 요한복음 11장 37-44 (나사로야 나아오라)
신문 방송 보셔서 아시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이란 노래를 지만원이라는 사람이 TV조선에서 이것이 김일성을 위한 행진곡이라고 하는 바람에 굉장히 많은 논란이 됐습니다. 안 들어보셨으면 한 번 들어보십시오. 안치환이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과 팝페라 가수 임태경이 불렀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이런 주제들은 정확하게 30년 전에 이 땅에 분출했던 민주화운동, 또는 민주항쟁을 서정적 가사에 담은 가사입니다. 지만원 같은 사람이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있습니다. 최일남이라는 사람이 쓴 <흐르는 북>이라는 단편소설에 보면, 신민주주의, 1980년대 등장했던 민족주의 세력과 독립항일세력과 일종의 쌍생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최일남의 <흐르는 북> 할아버지 세대, 손자세대가 공감을 하고 아버지 세대가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단절과 소통을 이야기하는 소설이거든요. 그 소설이름이 <흐르는 북>입니다. 지만원 같은 사람을 증오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대의명분을 위해 죽었던 사람을 우리가 부활신앙으로 해석하지 못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신앙이 되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부활을 말하는 구절이 가장 명명백백하게는 다니엘서 12장 3절입니다. 다니엘서 12장 1-3절은 마카베오 독립전쟁 항쟁에 참여했던 순교자들을 기리는 구절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옳은 대로 이끌기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니엘서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서 7-11장은 부활이 어떤 맥락에서 기대되고 믿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다니엘서 7-11장은 선한세력들 의로운 세력들의 절대수세 절대열세를 말합니다. 다니엘 1-6장은 믿음의 영웅들이 굉장히 패기 있게 악한 세력들에게 개인적 단위로 생존합니다. 다니엘 1-6장은 믿음의 영웅들이 악한 체제 내에서 개인적 단위로 생존하고 믿음의 승리를 거두지만 7-11장에 오면 사태가 달라집니다. 다니엘 1-6장까지는 몽환적일 정도로 기가 막힌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구원을 맛보는 이야기라면 7-11장은 집단 대 집단의 세력에서는 100번 의로운 세력이 집니다. 악한 체제 내에서 소수 의로운 개인의 승리는 역사 안에서 경험할 수 있지만 안식일을 어기고 헬레니즘의 생활습관을 받아들여서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다 포기하고 로마제국세력과 그리스제국 사람들과 한 패거리가 돼서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과 의롭지만 가난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싸우는 사람들의 싸움에서는 집단 대 집단의 싸움에서는 반드시 악이 승리합니다. 그래서 다니엘 7-11장까지는 선학세력과 악인세력 싸움에서 적어도 선한세력이 승리하여 역사 안에서 악을 일망타진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선한세력의 일망타진이야말로 기대되는 현실이다, 다니엘 7-11장까지 영화로 말하면 선한사람과 악한 사람이 전쟁을 벌이는데,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선한 사람이 계속 수세에 몰리고 당합니다. 그런데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선한 사람이 이깁니다. 선한 사람은 총도 맞지 않고 맞아도 결국은 병원에서 싱긋이 웃으면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책은 선한 사람이 한 사람도 살지 못하고 다 죽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캄캄해지면서 악인들의 개가와 잔치 소리로 영화가 끝나버립니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이 굉장히 비감에 사로잡히고 뭐 이래 이거, 극장을 뜨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캄캄한 화면에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나왔던 모든 죽어간 사람들의 빛나는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새로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 바로 다니엘 12장 3절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선한 세력의 집단적 공동체적 패배를 이 역사 안에서는 만회할 수 없지만 역사 너머에까지 이어지는 부활의 영역에 가서는 만회할 수 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부활입니다. 기독교인들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철두철미하게 역사의 부활입니다. 철두철미하게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이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특권이 되는 겁니다. 부활신앙의 핵심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말했듯이 역사의 옳은 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신앙은 죽어도 살겠다는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은 옳은 일에 목숨을 바칠만한 용기입니다. 부활신앙은 하나님 나라 대의에 한 번 밖에 없는 내 목숨을 걸 수 있는 대담함, 용기, 양심의 청결입니다. 그래서 진짜 기독교적 부활신앙이 대한민국 사회에 퍼지면 악한 사람이 주도권을 쥐지 못합니다. 악은 소멸되지 않지만 대체로 모든 공동체나 인간 조직의 선한 사람이 대개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건 이겁니다. 악인이 도무지 없는 세상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주도권을 쥐지 못한 채 선한 세력에 의하여 교화당하거나 주변으로 밀려 당하는 정도의 세상만 원합니다. 산자여 따르라, 선한 일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 안중근, 유관순, 김구, 독립 운동가들의 삶이 테러리스트라고, 지만원 같은 사람들은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합니다. 윤봉길도 테러리스트라고 합니다. 지만원과 한국논단,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선한 논리를 개발해서 그분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북한도 증오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되고 북한만큼이나 극우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도 증오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공부해서 하나하나 살펴서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삶으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구도 테러리스트, 윤봉길도 테러리스트, 유관순은 운동권의 원조, 이렇게 하면 친일파, 송병준 이완용 등등이 결국은 옳았다는 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 안에서 대의명분을 위해서 희생한 모든 사람들을 능멸하고, 그들이 쪽박을 차게 만들고, 인천 경기도 땅 대부분을 가진 송병준, 조선총독부에서 한일합방에 협조해줘서 연금혜택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노론세력의 대신들입니다. 70%가 노론출신의 대신들이 돈을 받았는데 그 명단이 역사책에 나옵니다. 이런 분들이 옳다고 한다면 송병준 이완용 박태순, 이런 사람들이 옳다고 하면 우리가 나라를 지키는 것, 군대 가서 목숨을 바치는 게 의미가 없습니다. 탈영하는 게 낫고 탈세가 낫습니다. 그런데 깨끗하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 의사, 판사, 변호사 등등 우리 변호사들은 고수익이 아니기 때문에 비가향교회 변호사들 등등은 고수익을 가지고 이분들이 만일 세금을 그대로 내면 안중근적 정결이고 진짜 힘든 삶입니다. 오늘날 고소득자가 세금을 그대로 내는 것은 독립운동가 윤봉길 폭탄투척보다 더 무서운 자기희생입니다. 왜? 세금을 낼 때 명예를 주지 않기 때문에, 세금을 낼 때 나만 바보라고 멍청한 사람이라고 도덕적 능멸을 주기 때문에 세금을 못 냅니다. 세금을 왕창 냈을 때 국가가 정직하게 세금 낸 사람을 표창하고 서울시청에 이름을 내야 합니다. 이분은 의사입니다, 이번에 이분이 낸 세금은 287억 4천만 원입니다, 박수, 세금을 많이 낸 사람은 박수를 쳐주고 보훈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금을 안내고 빼먹고 하이난 섬에 가서 골프 치고, sensual 한 life를 사는 사람들이 재밌다, 카톡 날리고 세금 떼먹고 나니 정말 좋더라, 방콕의 뱀탕 맛있었지, 이런 삶 대부분이 용납되고 정직하게 세금 낸 사람들을 능멸한다면, 기독교가 만일 이런 자들과 한편이 된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부활을 믿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진짜 부활을 믿으면 옳은 일에 투신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자기 개인은 부활을 믿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의 역사를 뒤엎고 부활할 것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대의명분이 이 땅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이 부활신앙은 나쁜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의 확실성을 예정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반드시 부활할 것이다, 그걸 예정하는 사건이 바로 나사로의 부활입니다. 여러분 역사의 대의명분 때문에 희생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보훈처에서 돌봐주십니다. 그걸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 4장 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은 누가 다 챙깁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의명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먼지처럼 소멸된 사람은 누가 챙깁니까? 다니엘 12장 1-3절에 챙깁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의로운 일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우리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시고 감찰하신다는 것, 그런 엄청난 가치를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부활교리입니다. 기독교 부활교리는, 죽여 버려, 너 돈 없으면 죽어, 이런 걸 맛보지 않으면 죽어, 즉 죽음같은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너 돈 없으면 죽어, 사람 취급 못 받아, 너 아파트 없으면 죽어, 사람 취급 못 받아, 너 아파트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결혼하려고 그래? 넌 영원히 수도사처럼 총각으로 살아야 해, 이런 협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협박을 받느냐? 너희 성적 나쁘면 비정규직이야, 협박입니다. 너 좋은 대학 들어가지 못하면 용인 아래... 사람 아니야, 대학 다니면 안 돼, 그건 취직도 안 돼, 이런 식의 협박입니다. 원래 기업가들이 직장을 만들어놓고 젊은 사람을 고용해야 합니다. 기업가가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업가는 전혀 시설투자도 고용기회도 늘리지 않고 교육과학기술부와 정부가 짜서 상대평가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A학점 많이 주는 대학은 소문 퍼트린다고 합니다. 동국대학이 A학점 많이 주는 대학입니다. 동국대학 학점은 인플레래요, 하면서 소문 퍼트립니다. 숭실대는 동국대랑 같은 이름에 들까 너무 걱정을 하고 A학점 적게 주는 대학명단에 이름을 올리려고 계속 A학점 많이 주면 경고가 들어옵니다. 우리 대학이 모대학처럼 됩니다, 과장급 팀장급 인사담당자가 어느 대학이 A학점을 남발하는지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A학점 많이 주는 데가 서울대학입니다. 그야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서울대학은 A학점을 제일 많이 줍니다. 70%가 A학점입니다. 이건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뜻입니다. 기업체는 버진아일랜드나 스위스 등에 비자금을 숨겨놓고 기업에 투자 하지 않고 고용을 늘리지 않습니다. 정부는 대학과 한 편이 돼서 대학을 쥐어짜면서 개인적으로 너희가 이렇게 불행을 경험하는 건 성적이 나쁘기 때문이야,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야, 좋은 학과를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야, 라고 하면서 개인에게 불행을 다 전가시킵니다. 이게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불행은 개인에게, 모든 공로는 시장을 개척했던 글로벌 다국적 기업에게, 국가는 글로벌 다국적 기업을 위한 폭력적인 일종의 충견 똥개 같은 역할입니다. 개인은 국가와 대기업의 이중적 압제에 시달리는 불쌍한 난민들입니다. 모든 국민은 난민적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이게 신자유주의입니다. 모든 국가의 국민들은 난민적 상황의 엄숙함과 삶의 엄혹함을 느끼면서 각개격파하면서 이 난국을 돌파하도록 두려움과 불확실성이 가득 차게 만듭니다. 이때 교회가 잘 됩니다. 교회야말로 이렇게 불확실한 사람이 많을수록 거짓된 종교흥행이 성행합니다. 천국 갑니다, 세상 살기 힘들죠? 우리 뒤져서 천국 갑시다, 결국 내세의 천국을 많이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개인의 삶을 압제하는 세상체제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걸 부활과 쇄신으로 새롭게 재구성하려고 하는 기개보다는 이런 험한 세상에서 내 개인의 운명만 펴면 되지, 하면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도록 다그치는 것이 죽음의 세력입니다. 오늘 본문 나사로의 부활은 개인의 부활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나사로를 부활시키셔서 죽음 자체가 인생의 최종승부처가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독교는 부활을 믿고 부활을 경험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어서 맛보는 부활만 부활입니까? 지금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악취가 나는 필멸의 가치, 반드시 소멸될 가치에 시달림을 당하면서 소멸될 가치, 없어질 가치에 온 몸이 동여매임을 당해서 꼼짝달싹 못하는 압제적 상태에 있는 사람,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 무가치한 일에 온 목숨을 바치도록 속박된 자가 죽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죽은 자를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부른 나사로,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개척할 능력을 상실한 채 썩어가고 부패하는 일에 속박된 삶, 이것이 바로 죽은 것입니다.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게 하시고 자유롭게 걸어 다니게 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그리스도인에게 선사되는 부활이죠. 기독교적 부활이 진짜 온 세상에 퍼지면 선한 사람이 대체로 주도권을 쥐게 되고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악을 범하기 매우 힘들어지는 세상이 됩니다. 악을 범하기 매우 힘들어진 세상, 이것이 도로시 데이라는 사람과 피터모린이라는 사람이 1932년에 가톨릭 노동자라는 신문을 발행하면서 표방했던 가치죠. 1929년에 미국 대공황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피터 모린이라는 농부철학자의 지도를 받았던 젊은 여자, 도로시 데이가 구호 난민소를 만들면서 2분의 1페니, 50센트짜리 신문을 만들어서 뿌렸습니다. 그게 유명한 가톨릭 노동자신문>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톨릭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 모토가 선한 일을 하기 쉽고 악한 일을 하기 매우 어렵게 만드는 세상을 만들자, 이것이 지상에서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주장을 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악을 행하기가 쉽고 선하기가 매우 힘든 세상이죠. 기독교 신앙은 죽여 버리겠어, 우리 생명을 앗아가겠다고 협박 공갈하는 모든 하나님 아닌 세력들의 무서운 명령, No, 거부하는 게 부활신앙입니다. 안중근 김구 유관순의 삶이 부활의 가치에 대한 신봉이 없다면 실제로 불가능한 삶입니다. 오늘날 깨끗하게 세금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운동권보다 더 무서운 투신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운동권 투신은 한 번 사고치고 감옥가면 그 뒤부터 영웅적 반열에 올라가지만 감옥에도 안 집어넣고 계속 정직하게 살도록 하고 속상해서 서서히 죽어가도록 우리를 방치하는 비영웅적 순교, 아무도 안 봐주는데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것, 도처에 100만불짜리도 있고 50만불짜리도 있는데 그걸 줍지 않고 홀로 가야 하는 것, 손만 뻗으면 100만불이 있는데, 매일 아침 내가 내 직책을 이용해 조금만 눈감고 양심에 비닐만 씌우면 금방 상당한 돈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걸 안 받고 직분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 이게 얼마나 어려워요. 윤봉길보다 더 어려워요. 그런 사람들이 대체로 힘을 발휘하고 그런 사람의 담론이 우리 사회의 담론이 되는 것,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그런 사람이 많으려면 교회 자체가 의로운 일에 투신해야 하는데, 교회 자체가 의로운 일에 투신하지 않고 요새 교회는 네덜란드 항공사와 같아요. 네덜란드 항공사가 7개월 동안 우주선을 타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 네 사람을 모집했는데 1만 명이 지원했습니다. 화성에서 산소캡슐 안에서 살 사람 네사람을 모집했는데 만 명이 지원했습니다. 교회가 똑같아요. 죄 많은 이 세상 버리고 천당 갈 사람 오십시오, 투자자 모집하니까 천당 아파트 몇 층 공사하니까 돈 내세요, 천당 아파트 공사하는 것과 거의 같은 이미지로 천국에 갈 사람을 모으고 있거든요.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게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죽음이 대체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에서 너 죽여 버리겠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비신화화 시키고 죽음 자체를 가지고 우리 양심을 오염시키는 모든 체제를 비신화화 시키고 무효화시키고 약하게 만드는 게 지금 현재 우리가 만드는 부활신앙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그런 부활신앙을 우리에게 원했어요. 나사로에게 나오라는 말은 필멸의 가치, 반드시 소멸될 가치에 둘러 싸여서 수족이 매인 채로 절대적 무기력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순간 직립보행자가 돼 뚜벅뚜벅 걸어 다니는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신앙이란 말이죠. 이런 부활신앙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너 죽여 버리겠어, 이렇게 살면 힘듭니다 목사님, 잘리고 싶어요? 예! 잘리고 싶습니다, 하면서 양심을 사수하는 것, 이것이 너무 옳은 거라는 거죠. 내부고발자, 악한 관료체제, 악한 지시명령체제가 오작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거 안 받으면 잘라 버리겠어, 자르세요, <직장의 신> 같은 사람이 몇 사람 있어야 합니다. 모든 관료체제에는 틀렸으면 틀렸다고 소리 지르면서 더 이상 나쁜 명령체제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겁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어딘가에 있는데 그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대세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의 세력이 포괄적으로 장악하는 세계가 되는 거죠. 여러분 인생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나쁜 공기가 가득 찬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탓이 아닙니다. 여러분 얼굴이 못나서도 아니고 엄마 아빠가 가난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자체가 우리의 행복을 근원적으로 박탈하는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필멸의 가치, 반드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가치와 여러 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수족이 묶인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뚜벅뚜벅 걸어 나가 걷게 만들고, 자유롭게 걷는 사람, 주체성이 가득 찬 사람, 자유가 가득 찬 사람, 하나님의 존엄에 가득 찬 사람,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로 가게 하기 위하여 결단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를 고유명사로 부르셨습니다. 나오너라, 저도 79년 11월 17일까지는 완전히 썩은 냄새 가득 찬 나사로처럼 살았습니다. 성령이 제 안에 없었기 때문에, 줄담배를 피우고 탱고탱고 클럽에 가자고 하면 클럽 가고, 영화를 보자고 하면 영화를 보고, 제가 너무 원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밤 11시에 대한극장까지 그 추운 겨울에 친구 따라 갔습니다. 내가 볼 때 아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아바 그룹이 와서 춤을 추는데 저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자 4명이 춤을 추는데 시끄러워 죽겠고, 제가 하도 많이 우울해하니까 친구가 미안하다고 식권 2장 위자료를 줬습니다. 79학번 정인태라는 친구가, 클럽에 가서 소주먹고 낙성대 신림6동에 가고 부르면 다 갔습니다. 왜? 인생의 뚜렷한 목적이 없고 척추가 없었기 때문에, 예배당에 오면 1부 때는 괜찮은데 2부 때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이승장 목사님이 설교하러 오시는데 저에게 최초로 성경을 가르쳤던 분입니다. 이분이 설교할 때 설교를 들을 때는 좋지만 마치고나면 공포의 2부 순서입니다. 둘러앉아서 형제자매님 어떻게 일주일 보냈습니까? 악수하고 간절히 기도했을 때 이물감이 너무나 들었습니다. 기도합니다. 저를 위해서 늘 기도합니다. 제 인생은 제가 책임집니다, 절대로 저를 위해서 기도하지 마십시오, 나는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2부가 그렇게 공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자마자 생명의 나라로 옮기지 마자 그 낯설어보였던 사람들이 이해가 됐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나사로입니다. 베로 수족을 동인 채로 썩어가는 존재입니다. 생명의 성령이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지 않으면 썩어가는 속도가 갱생되는 속도보다 빠른 죽음의 속도보다 빠른 존재입니다. 나이가 생물학적으로 젊다고 냄새 안 납니까? 아닙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없다면 썩어가는 냄새가 생명의 냄새가 악취를 더 많이 풍깁니다.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처럼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으시고 베로 수족을 동인 채로, 죽어 없어질 가치들에 속박된 인생을 깨치고 나와서 뚜벅뚜벅 주체성을 가지고 걸어 다니는 부활의 사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사세요. 깨끗하게 사시다가 가난하게 되면 큰 복입니다. 의롭게 되고 가난케 되다가 드디어 굶어죽은 사람, 얼마나 감사해요. 김회권 목사, 정직과 가난을 일삼다가 드디어 굶어죽었다, 저는 그런 영광 오기를 바랍니다. 깨끗해도 굶어죽지 않는데 우리는 과장합니다. 그러면 나더러 굶어죽으라고? 그러나 일단 안 죽습니다. 좀 깨끗하게 살자고 하면 김회권 목사 나더러 뭐 먹고 살라고? 제가 강남에 가서 설교를 했더니 그렇게 말하는 목사님은 얼마나 깨끗하게 살아요? 문자가 왔습니다.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그랬더니 어떤 분이 제 대신 답변을 했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사십니다, 나중에 이 사람에게서 회개하는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을 인터넷에서 searching 해서 찾아보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다음부터 많이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약간만 생명의 길을 강조하면, 당신은 어떻게 사는데? 이렇게 반발합니다. 나는 뭐 먹고 살라고? 당신 건축 해봤어? 건축해봤냐고? 건축은 75% 남겨야 사는 거야, 목사가 건축해봤다고 commission, rebate 이런 말을 해? 이런 반발이 금방 옵니다. 실제로 나도 건축을 좀 해볼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 내가 현실의 탈구가 일어나요, 명동 압구정동에 예쁘게 차려 입고 다니는 생기 넘치는 사람들은 뭐에요? 부활한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건 좀비들입니다. 강시입니다. 진짜 부활한 사람은 그렇게 옷 입고 다니지 않습니다. 진짜 부활한 사람은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살기어린 생명을 띠고 다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을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런데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작은 무리에 소속되는 것, 매우 안전한 일입니다. 저도 많은 반발을 사고 많은 미움을 받을 수 있는데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외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정직하다가 죽는 수가 있다, 우리 모두 의롭게 살다가 죽여 버리겠다는 소리를 들을지라도 의로움과 정직함과 모든 기독교적 덕목의 최고봉을 지향하여 살면 반드시 선한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는 날이 오게 됩니다. 의인의 회중이 생기게 됩니다. 의인은 단독자 고립자가 되면 안 되고 의인들도 모여서 의인의 회중에 들어야 합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안보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여러분 자신을 불러내는 하나님의 아들 음성을 들으시기 바라고 이 주일에 부활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필멸의 가치에 온 몸이 수족이 동여 싸여서 절대적 무기력 상태에 있는 이 삶을 깨치고 주님과 함께 좁은길 생명의 길로 질주하는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분이셨지만 우리가 대표하는 주님은 아름답지 못하고 기독교인들의 옹렬하고 옹졸하고 탐욕적이고 속세적인 우리 모습과 예수님이 거의 등치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버려주셔서 저희를 포기하셔서라도 주님의 명예를 드높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어쩌면 저희는 절망적일 정도로 회복 불능의 오염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희망이 있다면 저희의 고유명사 이름을 불러내주셔서 저희를 불러내주시길 바랍니다. 주님 저희가 희망이 있다면 되살려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한국교회 희망의 길을 가는 회중들을 일으켜주시길 원합니다. 주님 너무나 마음이 아픈 5월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기력한 5월입니다. 힘을 쏟고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들이 많은 5월입니다. 주님이여 도와주셔서 우리 각자의 무덤에 오셔서 우리를 이름으로 불러내셔서 은혜의 직립보행자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힘들고 고단한 직장에서 벌어들인 소득을 감격과 감사속에 바친 아들딸들을 축복하여 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교회에 다니지만 교회 바깥사람까지 생각하는 큰 마음 품게 도와주시고, 하나님 믿고 싶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서 이 냉정하고 무자비하고 가혹한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무신론자로 살아가도록 내몰린 자들을 우리가 긍휼히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 귀한 헌물이 하나님 백성 살리는데 쓰임받기 원하고 교회 바깥까지 흘러넘칠 수 있는 하나님 자비가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부활소생케 하신 역사가 오늘 머리숙여 예배드린 형제자매들 위에 그들의 일터와 자녀들 위에 앞으로 이교회에 와서 예수 믿고 영생을 누릴 모든 미래신자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길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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