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주일 야외예배 _ 요한복음 11장 28-35절 (예수께서 우셨다)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 오늘 야외예배오신 교우들을 환영합니다. 특히 5월에 야외예배를 하는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1,2부로 나눠져 온 교우들을 한꺼번에 한 동선에서 인사하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꺼번에 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여섯 사람정도 모르는 분의 성함을 암송하고 돌아가길 바랍니다. 수첩을 내서 이름을 적고, 저는 다 알지만 대부분 교우들은 저만큼 모릅니다. 저는 제 일이기 때문에 직업적인 프로의식으로 사람이름을 외우는데 여러분은 수당도 없고 이름 외워봤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제 수당이 여러분의 수당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기꺼이 쓰려고 합니다. 우리 제적이 88명입니다. 제가 세어보니까 91명까지 우리교회에 나왔습니다. 매주일 출석결석을 저 혼자 체크하고 안 온 분들에게 메일을 보냅니다. 문자로, 허미진 자매님 왜 안 왔습니까? 그러면 허미진 자매 깜짝 놀라서, 아이고 내가 안 온 거 아네, 우리 숭실대 교수님들 수요가족예배가 한 120명 참석하는데 안 오면 그 다음날 바로 전화합니다. 그래서 저를 슬슬 피합니다. 왜 우리가 와야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당신의 양떼들을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함으로써 양들 개개인의 영적복지를 테스트하고 선한 목자가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선한목자님은 서로의 이름에 대해서, 영적 복지에 대해서 무제한적 관심을 가집니다. 오지 않은 사람들은 반드시 왜 안 왔는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저는 결석한 사람들을 그다음 반장에게 바로 문자를 보내서 지금 살아 있는지 일단 확인을 시킵니다. 아가서 2장 14절을 읽으면서 왜 우리가 출결상태를 확인해야 하는가? 집에 가서 확인해야 하는가? 왜 우리 교우들이 매주일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궁금증을 왜 가져야 하는가를 아가서 2장 14절이 말합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교차 대조구조로 돼 있어요. 얼굴과 목소리를 동시에 들려주는 것이 교회에 오는 겁니다. 오늘 특별히 김종원 형제입니다. 전지율 자매님, 어디 계세요? 이지원, 이우영, 뱃속에 있는 아이 이름은 이기쁨입니다. 차혜주 일어나세요. 매주일 저에게 큐티노트를 검사 맡고 A+를 검사받고 있습니다. 띄어쓰기가 약간 안 됩니다. 내용은 아주 좋습니다. 차혜주의 큐티는 익살과 유머가 작렬합니다. 전혀 우리와 성경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은혜 받지 못한 부분에 은혜를 받고, 예수님은 약속을 지키는 분이다, 나도 약속을 지켜야지, 예수님의 부활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차혜윤, 둘째 딸입니다. 차혜인, 이 세 명의 딸들이 앞으로 우리가향교회의 장래를 맡을 아이들입니다. 여섯 분 이상의 이름을 외워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시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울음을 보고, 유대조문객들의 울음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예수님의 울음은 수동적 충동된 울음이었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공감된 울음이었습니다. 오늘날 장례식에 가서 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기업이 매우 관료적으로 영업이익일환으로 하는, 죽음자체의 의미를 완전히 다시 한 번 죽여 버리는 나쁜 장례식이기 때문입니다. 장례식에 가서 울지 않기 때문에 카타르시스가 없고 우리가 보내는 유한한 시간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없습니다. 장례식을 병원에서 하면 한 번 더 해야 합니다. 장례식은 상여를 타고 마지막에 죽어야 합니다. 상여를 타고 갈 때 종부장이가 북망산천을 떠돌면서 슬픈 조가를 부르는데 그때 우는 겁니다. 저는 장례식 때 하도 많이 울었는데, 동네 어르신이 죽으면 우리가 다 울며 따라갑니다. 우리 친척이 아닙니다. 우리 집 할머니가 죽어도 따라가 울었습니다. 맹자가 어렸을 때 처음 받았던 교육이 장례식 교육입니다. 맹자는 측은지심을 배우기 위해서 우는 사람들 옆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맹모삼천지교 할 때 가장 먼저 장례식 교육을 받은 겁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한 공감을 피력하는 것, 이것은 사람의 기본입니다. 타락하지않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물에 의해서 자기 눈물이 터져 나옵니다. 순결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마땅히 느끼는 공감의 능력을 같이 느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가장 극단적인 악인,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인육을 먹는 살인마를 사이코패스라고 말합니다. 사이코패스는 모든 공감능력이 철저하게 초토화되고 파괴된 사람입니다. 악인의 가장 극단에 사이코패스가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는 모든 공감능력의 박탈, 사이코패스의 가장 오른쪽 순결극단에 예수님 같은, 타락하기 전의 원초적 인간성을 보존한 사람들의 눈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원초적 타락성을 극복하면서 다른 사람과 세포적 연합을 할 수 있습니다. 세포적 연합, 우리와 우리 사이가 세포적으로 연합됐다는 말은 하나의 세포가 병들 때 다른 옆자리 세포가 아픈 것입니다. 우리 세포적 연합 상태가 우리 몸을 이룹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가락 밑에 가시가 찔려도 온 몸이 아픕니다. 왜? 작은 몸 지체 안에 일어난 사건이 내 뇌에게 통각을 느끼게 합니다. 이게 바로 건강한 사회의 특징입니다. 한 마을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굴뚝을 볼 때 나머지 마을 사람이 아파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순결한 사람,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사람, 그 사람은 성령께서 회복한 인간성의 소유자입니다. 우리가 자연에 나오는 이유는 원초적 인간성을 보존하는 것이고, 모든 영적 수도사들은 전부 다 산과 자연 속에서 도를 닦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연자체가 우리에게 엄청난 교육효과 심성효과 영성수련효과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연 안에서만 인재가 나옵니다. 자연 속에서만 깊은 종교가 나옵니다. 자연 속에서만 시가 나오고 예술이 나옵니다. 지금 유투브에 들어가면, 제 아내가 미국에 가 있어서 혼자 잘 때 유투브에 들어가서 사무엘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드가 썼던 서정시들이 있습니다. 그 중 라는 시가 있습니다. 수선화 daffodil를 치면, 영국영어로 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해주는 낭송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걸 제가 수없이 들었습니다. 이걸 보면 자연을 오랫동안 응시하는 사람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가를 보여주는 기가 막힌 시입니다. Lake district 라고 하는 영국 한복판에 엄청나게 아름다운 호수지역이 있는데 이 지역에서 방갈로를 지어놓고 윌리엄 워즈워드, 키쳐, 쉐린, 콜린, 낭만파 시인들이 시를 썼습니다. 수선화가 그 호수에 피어있습니다. 호수가 피어있는 그림과 시가 낭송이 되는데, 자연이 갖는 영성함양효과가 엄청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반드시 자연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헤르만 헤세가 썼던 수레바퀴 아래서> 라는 작품이 있죠? <수레바퀴 아래서>는 중딩 고딩 부모들은 다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중딩 고딩 부모가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지 않고 자녀를 키우면 사이코패스가 나옵니다. 동정심을 가르치는 교육과 경쟁을 가르치는 교육 사이에서 수레바퀴 아래서 깔려죽는 이야기입니다. 한스 기벤라트라는 공부 잘하는 소년이 경쟁심을 돋우는 교육체제에서 좌절하다가 자기 고향 앞바다에서 빠져 죽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슬픕니다. 그 책 안에 자연에 관한 묘사가 굉장히 많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얼마나 자연을 아름답게 보았는가, 그 소설 안에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도록 돕는 프로그램이 저녁산보라는 게 있습니다. 반드시 산보를 시킴으로써 이 혹독한 경쟁프로그램 인간성을 상실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백신을 맞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혹독한 경쟁체제 안에서 저녁에 두 시간씩 산책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독일에서도 한스 기벤라트 같은, 수레바퀴 아래서 깔려 죽는 아이들이 나오는데,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숲속에서 산책하는 그런 게 없는데, 우리가 인간성이 안 나오면 시도 나오지 않고 예술도 안 나오고 경쟁하는 사람만 나오고 헛된 경쟁 와중에서 욕망을 말초적으로 쾌락적으로 충족시키는 저능 열등 인간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가득 채웁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만일 고급 예술인, 시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대작가 화가, 음악가, 인간의 심성을 공감의 능력으로 이끄는 예술이 만일 죽어버린다면 대한민국 5천만이 전부 다 열등한 인간으로 모든 걸 채워버리는 인간이 된다면 인구가 늘어나는 게 아무 도움이 안 돼요. GNP또는 GDP는 그런 경제발전을 해서 풍요로운 삶을 누릴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경제발전이 중요합니다. 취업자체도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취업 자체가 목적이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서울경찰청 마약과에 마약수사과에 마약수사견이 열 마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취직한 겁니다. 다 정규직입니다. 그런데 마약수사견들이 다 취직을 했고 정규직이지만 걔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나 정규직이다, 나 구원받았어, 마약수사견들은 그런 자아심이 없습니다. 마약수사견 같은 동물적 실존을 생명의 최고 가치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취업해본들 의미가 없습니다. 취업해서 바하를 듣고 수선화를 읽으면서 산보하면서, 고등한 영적피조물, 공감의 능력을 한껏 발휘할만한 그런 사람이 정규직에 취직한 게 의미가 있지, 취업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돼요. 오늘 길게 하면 안 돼요. 오늘 어차피 복습하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은 초상집에 조문하다가 울음, 슬픔을 주체하지 않고 통곡했다는 말이거든요. 이런 사소하고도 인간적인 장면이 우리에게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창조됐던 원래 형상에서 멀어졌는가를 성찰하기 위해서 자연에 나와야 하고, 어린 아이를 만나야 하고 나랑 처지가 다른 사람과 교제의 악수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착한 마음의 인적구조물이 아닐까요? 슬픔에 동참할 수 있고 눈물로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의 동아리가 천국 아니겠습니까? 우시는 예수님, 그 분이 우리가 만세를 부르면서 왕으로 맞이하신 예수님이 아닙니까? 이런 예수님이 우리에게 공감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슬픔을 기꺼이 피력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우 중 앞으로 돌아가실 분들은 전통장례식을 자원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전통장례식을 원합니다. 저는 죽었을 때 우리 아들이 상여를 꼭 태워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아이가 안 태워주면 어떨까 걱정합니다. 전통장례식을 하면 좋겠는데, 부탁합니다. 윤구형제 문상 올 거죠? 저는 돈은 필요 없습니다.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한 번은 격렬하고 한 번은 진지하고 한 번은 강렬하게 묵상하다가 살아 있는 나날을 의미 있게 보내고 착하게 보내는 영성함양의 순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눈물 슬픔에 아스라이 멀어지는 절망과 탄식에 공감을 피력하십니다. 그런 멋진 예수님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고 교회의 머리 주가 되시고 우주의 최고 통치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우리 인생이 다소 어렵게 풀리더라도 그런 주님이 우리 우주의 운명을 완전히 쥐고 계시고, 그렇게 착하시고 그렇게 순결하신 주님이 우주와 교회와 온 세계 만민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이것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다운, 우시는 예수님다운,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여러분 주변에 영생의 세포적 연합들이 확장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날 사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고달파서 우리는 가족과 부모 친지와 절친한 친구의 죽음에도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기계가 돼버린 인간입니다. 아버지 우리가 주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자연동산을 떠나서 도시의 황망한 거리를 쏘다니면서 인간성이 마멸되어 버렸습니다. 마모되어 버렸습니다. 남을 위해서 흘릴 눈물의 여지가 없고 남의 인생을 고요히 응시하면서 슬픔에 흐느낄 수 있는 시적 감수성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를 자연 속에 파송하셔서 숲속에서 새들을 바라보면서 미물들을 바라보면서 꽃과 나무들의 흔들리는 춤을 바라보면서 시인의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예술가적 감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성자다운 여유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 저희에게 쉼을 허락하시고 노동의 악마적 위력을 상쇄할 만한 아름다운 친교를 허락하여 주소서. 우시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슬퍼해야 할 순간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파괴적 감수성을 허락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가 자연을 더 사랑하며 산을 오르며 강을 타고 산들과 새들의 소리를 들으며 숲속을 뛰놀 수 있는 천진난만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야외예배가 도시생활이 주는 황망과 분주함을 잊어버리고 주님이 지으신 에덴동산과 낙원에서의 원초적 기억들을 회복하는 시적인 몽환의 세계로 돌아가는 시간되게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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