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주일설교 2부 _ 요한복음 11장 17-27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5월 3일자 일간지에 경북 경산시에서 아파트 13층에서 뛰어내린 사건을 간략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 보도 내용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던 한 부부가 병을 앓고 있다가 남편이 먼저 13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남편의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내 되는 53세 여인이 친척과 친구들을 찾아가 장례식 비용을 빌리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빌리지 못해서 53세 아주머니도 같이 투신자살을 한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갖는 손쉬운 해결책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장례식도 할 수 없을 만큼 존엄이 파괴되고 모욕당하는 경험을 견디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마땅히 기대할만한 자기 고귀함, 인간은 마땅히 이 정도는 대우 받고 살아야 한다는 한계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간만 자살하는데 인간에게는 충족되지 않은 존엄성 때문에 자기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고도의 자기결정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극곰은 굶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서서히 죽습니다. 왼쪽 다리를 다친 사자는 사냥을 하지 못해서 죽음을 경험합니다. 사자가 이를 다쳐도 죽게 됩니다. 그 무서운 사자가 뒷다리가 장애가 생겨 죽어가는 장면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통해서 봤는데 참 비참합니다. 그 거대한 사자가 속도가 약간 늦어질 만큼 다리장애가 생기니 어떤 작은 동물도 사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자가 서서히 죽어가는 장면을 봤는데 끔찍할 정도로 사자의 존엄에 대한 큰 손상이 있는 거죠. 인간은 자기 존엄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때 목숨을 끊는 존재입니다. 죽음은 이런 사람에게 가장 손쉬운 해결책인 동시에 살아있는 우리가 어느 정도 기대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오늘 나사로 친구의 죽음이라는 사태 앞에서 예수님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 주에 볼 본문에서는 매우 인간적인 태도를 보여주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굉장히 냉정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80km 떨어진 먼 곳에서 이틀에 거쳐 걸어오셨습니다. 친구의 부음을 듣고 와보니 죽은 지 나흘이 됐습니다. 임종의 지경까지 가는 치명적인 고통 앞에서 이틀 더 연장했기 때문에 와보니 죽어 있었습니다. 벌써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됐었습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좀 더 긴 기간 머물렀을 수 있고 지체했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죽은 지 나흘 됐습니다. 그 기간에 왔습니다. 보통 나흘 동안 무덤에 들어간 경우는 인간의 임사경험 체험상 소생가능성이 없습니다. 숱한 소생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하버드 대학교 의사가 자기 임사경험을 입증하는 책을 썼습니다. 자기 뇌도 stop되고 심장도 끝났는데 의식은 살아 있는 경험을 쓰면서 인간은 육체 너머에 의식이 있는 존재, 영혼이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글을 쓴 겁니다. 그런데 나흘 된 사람들은 소생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보통 72시간 만에 돌아온 경우는 굉장히 많습니다. 중국에도 많고 우리나라 <전설 따라 삼천리>에도 흔히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72시간 만에 일어난 이야기는 관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든지 냉동실에서 깬 이야기 숱하게 많은데 나흘 된 이야기, 즉 죽고 나서 72시간이 경과한 이때는 보통 민속적인 소생경험도 넘는 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흘 됐을 때 도착했는데 보니까 장례식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숱한 유대인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장례식은 일주일 정도 계속됐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장례식에 숱한 손님이 오고가기 때문에 상주는 파뿌리가 될 만큼 지칩니다. 마르다라는 자매님은 오빠가 죽었는데도 슬픔에 짓눌려 끝나고 주저앉은 게 아니라 예수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뛰어나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로고스 중심의 이성적인 대화를 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은 슬픔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냥 위문 조문하러 온 사람을 맞는 태도가 아닙니다. 약간의 토론을 유도하는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이 말을 건 이유가 22절에 본심이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오빠의 죽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은 겁니다. 약간의 불평이 있는 겁니다. 즉시 제가 전갈을 보낸 그날 오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오빠가 죽었습니다, 22절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르다와 예수님관계는 사랑했다는 말에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본래 마르다를 사랑했다는 표현을 씁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경결한 우정과 인격적으로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굉장히 밀접한 관련의 사람, 하나님 아버지와 굉장한 신뢰 속에서 사는 사람인 걸 알았습니다.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반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반전은 지금 당장 살려내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믿음을 상당히 놀랍게 판단하시고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라고 하십니다. 이 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랬더니 마르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기대를 이렇게 합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사는 것이 나의 관심입니다, 마지막 날은 살겠지만 지금 당장 나의 오빠를 황천길 저승길로 보내는 것은 너무나 때 이른 죽음입니다, 오빠와 나는 이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습니다, 지금 사무치는 죽음으로 오빠를 다시 보길 원합니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죽은 사람 앞에 이런 사무치는 애달픈 하소연을 갖는 사람, 있죠. 호상을 통하여 오랫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해서는 자녀가 아마 이렇게 아무도 안 할 겁니다. 우리 엄마 아빠 살려 달라, 겉으론 할지 몰라도 속으로는 안 할 겁니다. 자연적인 호상, 길게 오래 장수하다 돌아가신 건 안식입니다. 85세 할머니, 96세 할아버지, 이런 분들은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건 안식입니다. 97세, 100세, 긴 인생을 사신 분들, 가픈 숨을 몰아쉬는 아픈 상태가 있는 것보다는 돌아가시는 게 그분에게는 안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때 이른 죽음, 한창 인생의 전성기 때 돌아가면 다시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려는 요구가 보편적으로 다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오르페우스 전설에 보면 오르페우스가 자기 아내를 찾으러 스올, 음부로 내려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 아내를 되찾기 위하여 음부까지 내려가는 이야기가 오르페우스 전설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는 이 요구는 모든 때 이른 죽음, 죽지 않아야 할 죽음을 경험하는 모든 가족들의 요구라고 할 수 있죠. 예수님께 마지막 날 부활한다는 건 내가 알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해달라는 요구를 드러냅니다. 25절의 이 대화가 그런 식으로 열렸습니다. 마르다의 요구, 지금 당장 살아나는 정도가 내가 기대하는 겁니다, 이런 뉘앙스로 들으니까 예수님께서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지금 내가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믿느냐? 이 말이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일련의 내용, 예수님 자신을 부활이라고 말하는 이 내용은 예수님 전체의 맥락에서 구약성경 에스겔 37장 10-14절을 매우 참조하는 말이고 암시하는 말이고 되울리는 말입니다. 지난번 요한복음 10장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 야기는 에스겔 34장을 되울리는 말이라고 했죠? 에스겔 34장에 보면 거짓목자와 참목자의 생생한 대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그 참 목자라는 말로 말했습니다. 이번에 말씀하신 것은 나는 에스겔 37장이 말한 그 부활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언어가 얼마나 큰 울림이 있는가를 알려면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구절이 자기를 가리키며 자기 때에 성취될 것을 기대하면서 선포됐다는 전제를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4절에 보면,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을 향하여 가리킨다는 말은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예수라는 겁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언어가 궁극적으로 도착할 답지할 장소가 예수님의 귀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약속과 명령들이 예수님께 와야만 도착하는 겁니다. 예수님께 와야만 말씀한 의도가 성취되는 겁니다. 모세의 글과 시편과 예언자에게 한 모든 말은 나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다, 내게 순종을 기대하고 있고 내가 응답할 것을 기대하고 선포된 말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응답하겠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성경읽기죠. 구약성경의 모든 말을 한 마디로 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갱생과 부활입니다. 구약성경 모세의 글 시편 예언서를 전부 다 합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계약은 파기될 수 없고 끊어질 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한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선택을 철회하실 수 없고 취소할 수 없고 끊어내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죄보다 더 큰 사랑과 인애로 죄를 극복하신다는 겁니다. 굳이 말하면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잡는 손은 이것밖에 안 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은 원래 쌍무로 둘 다 이렇게 잡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잡다가 힘이 빠져 놓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기의 죄와 도덕적 실패와 파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오른손이 붙들어주기 때문에 이 계약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참백성으로 갱생하는 것, 이것이 모세의 글 예언자의 글 시편의 글입니다. 모세의 글과 시편과 예언서의 글이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 부활과 소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을 하자마자 당대의 청중 가슴을 관통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선포한 말은 계속 공중을 뚫고 예수 안에 와서 도착할 때 말씀한 의도가 완성됐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 한 말이 됩니다. 모든 구약의 예언들은 당대 청중의 귀를 뚫고 심장을 뚫고 다 갔죠? 결국 모든 구약성경의 약속과 명령은 예수에게 와서 stop됐기 때문에 예수를 가리켜 한 말이 됩니다. 나를 가리켜 한 말, 그 말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과 갱생입니다. 마가복음 8장 31절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고린도전서 15장 3-4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어디 있는가?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본문을 찾으려고 애를 썼고 또 메시아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 구체적 구절이 있어야 이 말이 맞습니다. 그런 데 한 줄로 된 본문이 없는 겁니다. 모세의 글과 시편과 예언서의 글을 읽어보니까 삼일 만에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깨끗해지고 회복되고 일어나고 삼일 만에 요단강이 갈리고 삼일 만에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나타나고 옷을 빤지 삼일 만에 하나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삼일만이라고 하는 것은 어둠이 빛을 삼킨 짧은 시간 동안, 매우 짧은 기간의 고난을 거친 후에,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의 소망과 기다림 속에서, 삼일이라는 말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의 서스펜스와 불확실성에 있다가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그때가 삼일만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틀을 통째로 인용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을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자기에게 맡긴 겁니다. 내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정확하게 이런 뜻입니다. 약간 문자적이기도 하면서 상징적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아무리 죽음의 세력이 맹위를 떨쳐도 삼일간만 맹위를 떨칠 수 있고 삼일 후에는 안식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 죽었다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음부에 갇힙니다. 우리가 낙원에 가요. 캄캄한 낙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에 수면상태, 영적 동면으로 빠집니다. 영적 동면으로 빠질 때 우리 옛날 육신의 몸이 다 없어집니다. 없어지고 새로운 몸이 우리한테 명령으로 우리를 가득 채웁니다.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옷을 다 갈아입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우리가 가향교회를 다닌 사건,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기도한 것, 누구를 사랑한 것, 우리가 애를 쓴 것, 이 모든 기억들은 파괴가 안 됩니다. 이건 파괴될 수 없는 겁니다. 내 사지는 파괴될 수 있지만 내가 누구를 사랑한 이 사건은 절대로 파괴 안 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눈물을 흘린 인간의 주체성을 갖고 한 모든 활동들은 전부 다 영구보존 됩니다. 영구 보존된 기억의 총체에다 새 몸이 덧입혀져 부활을 합니다. 부활하기 전까지 우리는 낙원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 영적동면 모드를 끝내고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낼 상태에 죽음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절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이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부활할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겁니다. 이건 구약성경의 약속을 믿은 믿음이기도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네가 죽음에 삼킨바 되지만 내가 너에게 암시한 바처럼 네 안에 넘치는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너는 영원히 썩을 수 없는 존재다, 네가 썩더라도 삼일간만 음부에 있게 될 것이다, 내적확신을 또한 받았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어떻게 확신했느냐? 첫째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갱생과 부활이 삼일 만에 있을 것을 암시하는 본문이 당신 자신에게 비로소 성취될 것을 100%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구약성경 외에도 하나님 앞에서 숱한 이적과 표적과 기도응답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 안에 넘치는 생명력은 절대로 썩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 되돌아갈 것을 확신했습니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가 부활할 것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을 확신했기는 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할 것은 믿지만 죽는 것은 여전히 괴롭죠. 지금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죽는 것이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저도 부활을 믿지만 지금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으라고 하면 지금 부활하기 싫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을 확신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에게 얼어버린 죽음의 공포가 아무 것도 아닌가? 그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우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에스겔 37장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적과 기적과 기도응답을 통해서 맛보았던 확신을 생각하면서, 돌연히 강하게 예기치 않게 나는 에스겔 37장 11-14절이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을 대표하는 부활의 능력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죽음의 능력을 극복한 생명이다, 나는 그냥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이긴 생명이다, 예수님 자신을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짓눌려 있는 이때에 할 말은 생명이라는 말이 안 됩니다. 죽음을 이긴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해야만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말인 겁니다. 예수님은 나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총론적으로 말하지 않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한 말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죽은 자를 살려내는 능력의 화신이요, 죽은 자 까지도 돌보는 생명의 주요, 죽은 자에게도 내 음성을 들리게 하여 일어나게 만들 수 있는 주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런 말을 한 겁니다. 너무 중요하죠? 우리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보지 않으면 이건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장례식비용을 찾아봤더니 2011년 기준으로 793만원이 나왔습니다. 이분은 120만원 받았기 때문에 793만원은 아마 계명대학교 장례식비용입니다. 서울대병원은 더 넘습니다. 서울대 병원은 천만 원이 훨씬 넘습니다. 삼성병원 아산병원은 아마 1500만원이 넘을 겁니다. 드러누워 냉동실에 몇 시간 있는 것도 계산이 됩니다. 수의는 말할 것도 없이, 이렇게 비싼 장례식, 죽음 자체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 됐습니다. 죽음의 폭력성 앞에서 몸서리치는 사람을 가장 완벽하게 도울 수 있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마지막에 부활시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지금 당장 이 시간에 죽음의 권세에 떠는 사람에게 이 말을 했다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오늘날 기독교가 부활교리를 믿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지금 죽음의 공포에 떠는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알려줘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그게 정말 중요합니다. 지금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예수님을 알려줘야지, 결국 죽고 나서 억겁의 세월이 지난후에 마지막에 일어날 부활을 약속한 분으로 희미하게 소개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사실 선언이 아닙니다. 그런 부활의 능력을 지금 교회는 맛보게 해주는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말을 함으로써 단순히 내가 누군지 정보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교회는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에게 부활이시오 생명이신 주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런 당위를 우리에게서 이끌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가 장례식을 초대교회처럼 해줄 수 없는가? 초대교회가 가장 전도를 많이 한 것은 장례식입니다. 초대교회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끌어 모았나? 장례식을 무료로 해준 겁니다. 너무 어처구니없죠. 초대교회가 사영리로 전도한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가 세제를 주면서 빨아주면서, 양말 주면서, 스타킹 주면서 전도한 게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장례식을 다 해주었어요. 일본기독교가 들어갈 때 장례식 염을 다 했어요. 일본 목사님들은 다 염을 할 줄 알아요. 왜? 염을 해줘야만 일본 불교도가 마음을 열어요. 니시다 겐꼬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목사님은 염 전문가입니다. 하천풍이라는 일본의 유명한 모든 기독교 사상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의 모든 기독교 선각자들은 염을 기본적으로 했고, 장례식 전문가입니다. 오늘날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회가 서양의 funeral hall처럼 무료로 장례식을 해주면 좋겠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영생을 약속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장례식을 가지고 영생을 약속할 필요는 없고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모른 채 목숨을 끊는, 죽음의 신학적 의미를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는 일종의 선교 현장으로써 장례현장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너무 비쌉니다. 서울대병원 가보니까 중간 관 값이 397만원입니다. 2년 전에 보니까 수의도 비싸고요. 오늘날 죽음의 권세 앞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지 말라고 소리치는 상식과 애정도 말라버린 이때에, 죽음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주신 죄에 대한 무서운 징벌인가도 생각도 하기 전에,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과 반추도 하기 전에 미친 듯이 지나가는 틀을 끊어야 합니다. 죽는 게 얼마나 슬픈가도 음미하는 장례식, 죽음의 공포에 떠는 서스펜스도 느끼면서 죽음의 공포도 이기게 만드는 신앙의 위력도 동시에 맛보게 하는 나사로적 장례식, 이게 가능하지 않겠나? 교회가 해야 할 일중 하나가 그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기도원 수도원 지어서 일 년에 6-7억씩 듭니다. 기도원 지은 교회는 일 년에 6-7억씩 드는데 그걸 만일 도시근교에 funeral hall을 지었다, 그럼 제가 볼 때는 시설만 갖고도 다 해결됩니다. 사업적인 비전을 밝힌 것은 아니고요. 6-7억 써서 산에 가서 기도해서 은혜 받지 못합니다. 왜? 엉터리 부흥사들이 다 오기 때문에 진정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돈이 만일 이 큰 교회에서 멋진 장례문화를 기독교가 초대교회처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는 겁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말함으로써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근원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주님은 해결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게 대답입니다. 모든 장례식의 대답, 주님을 믿고 죽어도 사는 경지로 나가는 이것이 해결책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징벌적 효과보다 죽음의 안식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원래 징벌입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죽으면 안식이 되고 위로가 되고 신앙을 퇴적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여러분 죽음의 무서운 요소는 주 안에서 경험하면 징벌의 효과도 있지만 위로의 요소도 큽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 제 13권 26-28장에서 성도의 죽음은 징벌이 아니라 상급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썼습니다. 그렇게 죽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우리 옛 자아가 매일 죽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상급을 받게 됩니다. 우리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매일 조금씩 미분적으로 우리의 옛 자아를 죽어가면서 불편을 감수하면서 죽으면 면류관을 받습니다. 주 안에서의 죽음은 안식이 되며 면류관을 받는 상급의 통로가 되며, 주 안에서의 죽음은 우리 신앙의 위대한 상급, 우리 신앙의 위대한 응답을 받는 날이 될 수 있습니다. 답은 무엇입니까? 주를 믿고 죽는 겁니다. 둘째로 살아서 믿음으로 재림주님과 함께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 성도가 독특히 맛보는 특권인데, 오늘날 우리가 주를 믿어서 확신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참다운 내세신앙이 없기 때문에 나사로 같은 거지를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는 겁니다. 참다운 내세신앙의 핵심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큰 부자가 연회를 베풀면서도 자기 문 앞에 있는 거지를 돌보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천국 갈 기회를 영원히 잃습니다. 그런데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네가 네 집 문 앞에서 상처를 입고 의료보험도 안 돼서 죽어가는 행려병자 나사로를 품었다면 너는 천국 가는 게 분명하다, 나사로와 너 사이에 엄청난 빙하의 계곡이 있듯이 나사로가 안겨 있는 아브라함 품과 네가 있는 지옥은 빙하의 계곡이 있다, 네가 나사로를 품는 순간 너는 나사로와 함께 천국 가는 것이다, 이런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진짜 부활신앙을 믿으면 사회복지적인 혜택이 엄청 확장되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엄청 증가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믿는 교회는 그 교회 대문 앞에 와 있는 나사로들을 100% 구원하고 나사로의 운명과 더불어 아브라함 품으로 건너갈 수 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여러분 부활신앙은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능력으로 지금 내 삶, 쾌락과 욕망과 더러운 이기적인 마음에 사로잡힌 내 마음이 나사로 같은 비참한 사람들에 무장해제 돼서 사랑을 쉴 새 없이 순환시키는 사람, 이것이 바로 이미 시작된 부활권능이자 살아서 맛보는 부활권능입니다. 이게 바로 네흘류도프 백작, 톨스토이가 말한 <부활>입니다. 톨스토이가 말한 <부활>은 악덕지주, 사납고 배타적이고 음란하고 음탕했던 귀족이 농노들에게 다 땅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문호였던 톨스토이가 그 책의 저작권을 전부 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게 부활이죠. 지금 시작된 부활은 사회정의를 의미하게 되고, 동정심의 강을 의미하고, 나사로와 부자 사이에 있는 엄청난 빙하의 계곡을 메우는 화해의 역사가 된다, 지금 시작된 부활이 중요하다, 지금 이 부활을 믿느냐? 믿는다면 나사로를 네 열두 대문 바깥에, 네 구중궁궐 대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사로의 상한 몸을 보듬어라, 이렇게 말한 겁니다. 오늘 내가 부활이라는 것은 그런 뜻이에요. 네가 죽어서 마지막 날 부활하는 걸 믿느냐? 그 부활로 확실하지 않다, 지금 부활을 믿는다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껴안고 그를 영접하는 것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겠다는 윤동주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톨스토이가 말한 부활은 사회정의, 동정심의 무한한 확장, 공산주의 핏빛 혁명을 부를 수 있는 무시무시한 양극화를 해결하는 평화의 언덕 만들기, 평화의 마을 만들기입니다. 주님이 이미 우리에게 심어주시는 부활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이런 부활이 우리 모두에게 이번주 내내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은 부활이고 생명이라서 썩어 문드러지는 우리에게도 들리는 음성으로 우리를 깨워 주십니다. 이기심에 동인 채 악취를 품으면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존재가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소생되어 뚜벅뚜벅 걸어 다니면 우리 집 문 앞에 거지들을 돌보는 동정심의 화신이 되게 도와주시고 탐욕이 죽어서 레 미제라블을 돌보는 사회복지적인 실천의 화신이 되게 도와주시고, 배타심이 죽어서 연대심으로 부활하게 도와주시고, 음탕한 귀족이 죽어서 보편적인 사랑의 성자로 부활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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