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Άλλα σε προετοιμασία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1장 17-27절

by 【고동엽】 2022. 2. 13.

5 5일 주일설교 1 _ 요한복음 11 17-2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오지 않고 이틀을 지체하신 후에 오셨습니다. 80km 정도 떨어진 거리,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 28절에 보니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처음 세례를 주던 곳, 만일 그곳 80km 떨어진 곳이라면 이틀 걸린다고 볼 수 있죠. 만일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달한 날에 나사로가 죽었다면, 예수님이 도착한 이 시점이 죽은 지 나흘됐다는 말이 정확하게 맞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80km 떨어진 곳에 전갈을 받고 이틀을 유하시고 오는 기간 동안 하루 걸렸으니 나흘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나사로가 보통 통속적으로 세 시간, 삼일, 또는 인간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시점을 넘겨 버린 거죠. 요즘 하버드 대학교 교수 중에서 임사체험을 한 사람의 기록이 굉장히 히트를 치고 있죠. 이 사람 이야기의 핵심은 이겁니다. 뇌가 죽었지만 의식은 살아있다, 그래야만 내 임사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 장기는 다 끝났습니다. 심장도 멎고 뇌도 죽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또 살아 있었다는 거거든요. 이 말은 뇌와 신체장기로 표현되지 않는 생명이 있다는 거죠. 그걸 자기는 인간의 영혼 또는 의식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임사경험에서 다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워낙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의 논증이 새삼스러운 건 아닙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관습으로 말하면 삼일이 지나면 임사경험의 재생도 없는 거죠. 삼일을 지나고 나면 그런 통계도 없는 겁니다. 삼일 지난 사람에게는 그 일도 안 일어나는 거죠. 삼일 전에는 왜 시체를 바로 치우지 않았는가? 통계적으로 삼일 안에 살아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사경험이 소생으로 반전을 일으킬 수 있는 시점이 끝나버린 게 나흘 된 겁니다. 나흘 동안에 와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이 오라비는 유대인들 유력자인 것을 알 수 있고 이들이 바리새인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들이 바리새인이냐? 마지막 날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에스겔 37 11-14절을 믿는 거거든요. 이 이야기 때문에 실제로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전 동편문,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오직 메시야가 올 때만 열릴 수 있는 동쪽문, 스가랴에 보면 동쪽 문을 향해서 메시야가 들어간다는 구절이 있거든요. 메시야가 지나가는 행로, 베다니에서 계곡을 지나서 기드론 협곡을 지나서 예루살렘 성전 동쪽으로 가는 그 길목에 무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오면 부활할 것을 기대하고 엄청 유명한 사람들이 엄청 돈을 많이 낸 사람들만 묻힐 수 있는 평토장한 무덤이 있습니다. 평토장한 무덤은 그냥 묘비와 관만 있고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그 무덤이 지금도 가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스가랴와 에스겔 같은 말씀을 볼 때, 무덤에서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듣고 메시아와 함께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성전 동쪽 문을 향해서 들어가는 코스를 바라보고 있는 거죠. 물어보니까 여기에 묻힌 사람, 메시아가 지나가는 예루살렘 행로에 묻힌 사람들의 평균재정 기여가 10억이 훨씬 넘습니다. 유대 디아스포라 교포들이 거기 묻혀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도 많이 묻혀 있고요. 바리새인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날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을 믿는다는 것, 바리새인들이 부활을 믿었다는 것, 이 세상의 삶에 충분히 만족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심리 안에 내세신앙이 강하게 자리 잡습니다. 이 세상에서 온갖 쾌락을 다 누린 사람은 내세신앙이 약합니다. 이 세상에서 체르노빌 같은 비극적 삶의 현상에 내던져진 사람도 내세신앙이 없습니다. 누가 내세신앙이 있느냐? 이 세상을 긍정하지만 충분히 삶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중간계층 사람들이 내세신앙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내세신앙 중심의 기독교입니다. 천국과 지옥, 지금 지상에서 어떻든 간에 죽으면 모든 반전이 일어난다, 이 사상은 여의도순복음교회 다닌 사람들에게 굉장히 크게 어필했습니다. 많은 하층민들도 유일하게 기독교를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약간 병적이긴 하지만 죽고 나면 모든 게 다 바뀐다, 사후에 일어나는 계급 신분상의 대 반전과 반동, 이것 때문에 하층민들에게 내세신앙이 쉽게 유포가 됩니다. 이런 세상의 불만을 흡수해버리고 완화시켜주는 이 내세신앙이 모르핀 효과가 있습니다. 마약 효과가 있습니다. 아편 효과가 있습니다. 아편과 마약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완화시켜 줄 대는 아편과 마약이 최고입니다. 일생동안 아편과 마약을 먹고 사는 것 자체는 문제이지만 잠시간의 고통, 내가 화염병을 들고 우리 사장님 집에 가서 투척해서 너 죽고 나 죽자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잠시 부조리한 운명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아편과 모르핀 같은 마약이 많습니다. 그런데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칼 마르크스가 영국 군중들, 산업혁명 직후에 살인적이고 노예 같은 부조리한 삶을 살면서도 너무 고분고분 한 걸 보면서, 혁명의 대중으로 발전하지 않은 사람을 보면서 모르핀을 먹고 아편을 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종교 안에 이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굉장히 몽환적일 정도로 천국을 생각합니다. 그런 내세적인 신앙의 종교적 적합성이 잘 매치되는 계급이 중간계급입니다. 아주 극단적인 쾌락주의자에게는 내세신앙이 없고 지상에 있음이 상당부분 해소됩니다. 너무 극단적인 사람도 내세신앙이 별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중간층이 많이 모여 있는 강남에 기독교가 잘 들어간 이유가 있습니다. 강남 사람들에 왜 기독교가 잘 먹히나? 이 기독교의 구원론, 내세중심의 구원론과 천국관, 다시 말해서 아등바등 애를 쓰지만 아직까지 천국에 이르지 못한 상태, 이것이 강남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천문학적 자산을 가지고 분투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삶의 문제가 다 해결된 사람은 아등바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적수공분으로 시작했다가 무언가 구원의 유사경험을 했는데 완전한 구원이 아닌 상태, 그러다 병들어 죽는 상태, 이런 상태에 내세가 하나의 대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남에 들어온 기독교는 대체로 한국교회에 들어온 기독교와 같인 내세중심의 기독교고 이것은 모르핀을 먹는 효과와 같습니다. 실제로 모든 부조리한 운명들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은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괜찮다고 볼 수 있죠. 그러나 성경의 부활신앙, 예수님이 말한 부활신앙은 바리새인의 부활신앙과 다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지금 당장 부활의 능력을 맛보는 신앙실천을 요구한 겁니다.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다면 지금 이 땅의 삶을 과감하게 재구성하고, 부활할 하나님나라에 갈 그 시점의 행동으로 지금 살아야 한다,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게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온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모세를 믿고 부활을 믿고 내세를 믿는다면 지금 우리 집 대문에 와 있는 거지를 보살피는 것이 돼야 한다, 결국 예수님은 부활신앙을 누가복음 16장에 나온 부자가 진짜 부활을 믿고 모세를 믿고 내세를 믿는다면 참다운 내세신앙의 의미가 무엇이냐? 지금 너희 집 대문 앞에 와 있는 거지를 형제처럼 대우하고 빈민을 네 집에 들여라, 앞으로 장차 맛보게 될 부활의 능력이 지금 죄로 욕망으로 독점욕으로 배타적으로 아집으로 굳어지는 네 마음을 생명과 부활의 능력으로 재구성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짜 부활을 믿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친 거죠. 부활을 하나의 먼 미래에 있을 사건으로 보지 않고 부활을 믿자마자 지금 내 삶에 살아 있는 믿음으로 치환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은 너무 다른 겁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위문을 왔다는 걸 봤을 때 나사로가 상당한 유력자 바리새인인 걸 알 수 있고, 이렇게 애달프고 구슬픈 애도 분위기가 많이 나는 것을 볼 때 그가 사랑을 많이 받고 죽어서는 안 되는 안타까운 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장례식 문화에서는 없는 청승맞다고 할 만큼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르다는 강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와중에도 예수님에게 따질 건 따지는 여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던 마르다라는 말을 볼 때 예수님과 마르다가 굉장히 우정이 깊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대개 하지 않거든요. 돌아가신 분을 놓고 예수님과 신학 논쟁을 벌이면 안 되죠. 그런데 이 마르다는 간절한 못 다한 열불이 있는지 뛰어나가서 하는 말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이 여짜오되는 원래 묻는다는 말인데 함경도 사람들은 말하다는 것까지 같이 썼습니다. 지금 우리 남한 말에서는 여쭙다는 말이 묻다는 말이죠. 이때는 손윗사람에게 정중하게 말하는 것도 여쭙다는 말을 썼어요. 1938년 번역이거든요. 지금 아직도 번역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삼가면서 말하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건 옳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굴러 떨어지기 전에 손을 썼을 겁니다, 이런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손을 쓰셔서 안 죽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피력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치유 능력 때문입니다. 마르다가 수선을 떨면서 예수님이 집에 오기도 전에 뛰어나가서 선제적으로 질문공세를 퍼부었던 이유는 22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건 굉장히 큰 믿음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서 누리는 깊고도 독특한 신뢰관계를 포착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마르다의 영적통찰력이 너무 대단한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를 알면 기도가 그 만큼 대담해질 수 있다는 뜻이고 굉장히 수준 높은 질문이 가능하다는 뜻이죠.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게 예수님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건 이미 틀렸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라고 함으로써 예기치 않은 대 반전을 시도하도록 요구하는 겁니다. 너무나 큰 믿음이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의 큰 믿음에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마르다가 자기의 바리새적 교양을 드러냅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나는 뼛속 깊이 바리새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마지막 날 부활을 실현할 그 하나님 아들이라는 겁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은 네가 마지막 날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 부활을 지금 자체 실현해 볼 부활자체다, 나는 생명과 부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은 예수님도 죽음의 법칙 아래 속박된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은 생명과 부활이라고 말하지 않고 죽음을 이겨내서 생명의 능력을 드러낼 메시아다, 라는 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는 말을 먼저 함으로써 죽음의 처절한 절망에 갇힌 사람들을 강한 목회적 권면으로 돌보는 말씀을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죽은 자를 부활시킴으로써 참 생명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다, 나는 죽지 않게 만드는 생명이 아니라 나는 죽음을 거친 후에 다시 생명을 얻게 만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말한 겁니다. 이건 굉장히 말하는 표현 방법도 다르고 악센트가 다릅니다. 나는 단순히 어떤 사람을 죽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화타와 편작 같은 히포크라테스 같은 명의가 아니다, 나는 죽음을 철저하게 거친 사람마저도 살릴 수 있는 부활능력 그 자체다, 내가 오늘 부활의 능력을 드러낸다면 종말이 성큼 다가온 것이고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스라엘 민족을 무덤에서 불러내서 이스라엘 민족을 갱생시켜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재 회집시켜서 하나님 백성들을 일깨우는 이 일을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는 말을 한 겁니다. 이건 에스겔 37 10-14절 말씀을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겁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영적부활을 의미하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영적부활을 완전히 확신시키기 위하여 나는 삼일 만에 부활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부활은 연동돼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자기 부활을 확신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는 경결하고도 끊을 수 없는 신뢰와 연합 때문에 부활을 확신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파도에 침몰하겠지만 복원될 것을 다시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느끼는 순전히 인격적 확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대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죄가 있다고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이 끊어진다면 하나님의 인내는 이스라엘 죄 때문에 바닥을 드러낸 겁니다. 이 논리 보세요. 이스라엘 민족의 죄가 하나님의 인내를 바닥나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면 하나님 은총의 힘보다 이스라엘 죄가 힘이 더 큰 거죠. 그런데 모든 구약 예언서의 마지막 결론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가 아무리 패역하고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총의 결속을 끊을 수 없다는 거거든요. 모든 예언서의 결론은 죄가 은혜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약적 결속감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이긴다는 겁니다. 모든 예언서는 죄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크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예언서를 읽었다는 말은 희망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예언서를 읽어야 합니다. 예언서와 모세의 글과 시편의 특징은 나의 처참한 죄보다 찬란한 태양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 내 인생의 비참함보다, 우리 하나님의 재활복구능력이 크다, 내 인생의 비참함, 나의 졸렬함, 내 인생의 지리멸렬함, 내 인생보다 우리 하나님의 찬란한 은혜가 크다, 이렇게 읽는 것이 모세의 글과 예언서와 시편의 글을 읽는 거예요. 이걸 읽으면 난공불락 신앙의 요새로 거듭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의 매순간 맛보는 영적교제의 깊이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시켰겠지만 더 객관적인 증거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아무리 범죄해도 계약관계로부터 이탈하여 영구적으로 상실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부활하려면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자신이 먼저 부활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고 했죠? 이 말 때문에 구약성경에 입각한 부활을 확신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이 말은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앙양, 영적 변모, 영적 회복, 극적 구원경험이 전부 삼일 안에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부활이 삼일 만에 일어난다는 말은 없지만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정확하게 이스라엘 민족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없어요. 그런데 전체 모세의 글과 시편과 예언서의 글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매우 짧은 기간에, 죽은 지 삼일 만에, 멸망된 후 매우 짧은 기간에, 결정적인 D-day H hour에 우리 하나님의 예기치 않은 극적개입으로 갱생한다,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매우 짧은 죽음의 순간을 거친 후에, 매우 짧은 절망을 거친 후에, 우리의 모든 절망을 합치면 며칠간의 절망이에요? 20대가 겪는 절망, 5년 아닙니다. MB께서 들어섰던 5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근혜 할머니도 3년 아니고 3일이에요. 김정은도 3일입니다. 조지 W 부시도 3일입니다. 악이 이길 수 있는 최대치는 3일입니다. 악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최대치는 3일입니다.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우리 하나님께서 악의 승리를 3일만 허락하신다, 매우 짧은 기간만 어둠이 빛을 이기게 하신다, 매우 짧은 기간만 절망이 희망을 삼키게 하신다, 그런 구조와 논리가 구약의 도처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걸 압축하여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이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말은 내가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석한 거예요. 예수님의 성경읽기가 압축적이고 종합적이고 너무나 천재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성경해석의 천재와 달인입니다. 너무 깊다는 말은 하면 안 되죠. 예수님을 보고 깊다는 말을 하면 안 돼요. 표현할 수 없어요. 저도 성경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의 지혜와 성경인용은 권법으로 말하면 취권도 아니고 엄청난 권법이에요. 동작을 묘사할 수 없는 지혜와 명철로 가득 차 있어요. 예수님은 성경 읽을 때요. 예수님이 삼일 만에 부활했다, 삼일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께서 구약을 종합적으로 인용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이 삼일 만에 부활한다는 그 본문을 자기에게 적용했기 때문에 삼일 만에 부활을 확신했다는 겁니다. 그 부활이 지금 바로 자기에게 임한다는 거죠. 이스라엘민족이 그동안 이민족에게 핍박받고 박해받던 시기는 끝났어요. 자신과 함께 부활의 시기로 돌입했다는 말이에요. 그게 바로 '나는 부활이요' 에스겔 37 10-14절의 빛 안에서, 모세의 글과 예언자의 글 모두를 종합해볼 때 지금은 바로 부활의 때다, 이런 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나의 부활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갱생과 회복의 시대가 도래 했다, 그러니까 오순절 성령이 임하는 거예요. 오순절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예언자처럼 바뀌는 거예요. 모세급 예언자처럼 바뀌어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200년간 교회시대를 열었어요. 기가 막힙니다. 200년간 교회시대를 열 때 모든 영적지도자 영적백성 큰 뿌리, 원뿌리는 이스라엘 백성이죠. 이 세계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지금 전 세계 만민이 다 모여 들어서 거대한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습니까? 이게 우리 주님의 부활 때문에 그렇거든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는 그 부활이요. 앞에 , 에고 에이미 디, 아나시타시오 아나시타시스, 나는 다시 삽니다, 나는 에스겔 37 11-14절이 말하는 그 민족적 부활의 시발점 부활이다, 모세의 글과 시편과 예언서 모두가 종합적으로 말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두의 마지막 영적갱생 그것이 나의 부활이다, 그 부활을 지금 시범을 보여줄 텐데 나사로를 지금 불러냄으로써, 에스겔 37장 한 번 볼까요?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시뮬레이션 합니다. 37 11-14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러분 예전에 공부한 것 다시 복습합니다. 요한복음 5 25-2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요한복음 11 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부활을 먼저 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부활 괄호하고 생명입니다. and로 연결되는 등위접속사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and로 연결되는 카이가, namely, that is to say, 곧 부활 곧 생명이라는 뜻과 같아요. 부활과 생명을 두 개로 연결시킬 필요가 없어요. 나는 죽지 않게 만드는 생명이 아니라, 죽을병을 고쳐주는 생명이 아니라 죽을 병 너머에 죽음까지도 고쳐버리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표현이 amazing 하고, 예수님께 탄복을 거듭할 수밖에 없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은 제 직속선배이시기도 하고, 이 세계에서도 선배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예수님의 매력 앞에 사로잡혀요.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정말로 하루 종일 생각해도 그 뜻의 신비를 다 파헤칠 수가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죽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가 죽어도 예수님의 음성은 들려요. 예수님 음성은 무생물 바위에게도 들어가요. 예수님의 음성은 단세포 무생물 아메바의 심장까지도 들어가요. 아메바가 심장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은 돌 바위 모든 피조물, 무생물도 예수님에게는 무생물이 아니에요. 모든 만물은 하나님 앞에서 다 반응을 하는데 죽어버린 시체도 하나님 말씀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말이에요. 이 말은 우리에게 정말 위로가 되는 거예요. 죽을래? 너 죽여 버린다, 이런 말은 예수님께 아무 의미가 없어요. 죽음 저편까지도 하나님음성이 들려온단 말이에요. 여러분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게 사는 거예요. 하나님 음성을 들려주는 곳이 지금 너무 없어요. 하나님 음성을 들려주는 인자되는 예수님 같은 방불한 신령한 종들이 우리가 되어줘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친구의 무덤 앞에 가서, 절망하는 20대의 무덤 앞에 가서 이 음성을 들려줘야 해요. 얼마전에 숭실대에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목사 교인 예배도 다 싫어합니다, 우리 학교 교목실장 설교 듣고 다시 살 소망이 생겼습니다, 사회과학적 분석을 한 그것에 엄청 은혜를 받았더라고요. 이스라엘 자유농민이 어떻고 한 것에 은혜를 받아서 이렇게 좋다고,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목사도 싫고 다 싫은데 채플에서 들었던 그 말이 희망이 된다면서, 그때 제가 했던 정의로운 하나님, 뼛속깊이 박애로 가득 찬 정의로운 시민들의 공동체, 이게 하나님의 원래 뜻이고 이게 기독교라고 소리쳤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니라고, 명동과 을지로에 있는 가방이 참 가방이 아니고 짝퉁이듯이, 참 가방과 참 악어가방은 어딘가에 있습니다, 참기독교는 지금 명동과 을지로에 다니지 않습니다, 숭실기독교가 참 기독교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흥분했더니, 나는 기독교도 싫고 예배도 싫고 목사도 싫습니다, 하면서 설교원고를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런 사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한 가지 분명히 확신할 것은 우리 예수님의 음성, 죽은 사람에게까지도 들려오니까, 지금 죽은 지 나흘 된 사람에게도 들리니까, 무덤 저편에 던져진 사람에게까지도 말씀을 전해야 해요. 음성을 들려줘야 해요. 죽은 자를 살리는 음성, 시편과 모세와 예언자의 글,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들려주면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성경말씀으로 정통하여 성경말씀을 삶 속에 실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쩌렁쩌렁한 하나님 음성의 대변자가 될 지 생각한 번 해보시라고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일시적으로 죽을 수 있지만 둘째 사망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령한 육신을 입습니다. 어거스틴이 쓴 <하나님의 도성> 13권이 이 영생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가 신령한 육신을 입게 되는지 그런 것에 대한 긴, 자세한 논쟁들이 나옵니다. 나사로를 한 번 보세요. 나사로는 자기 몸을 에이는 고통으로부터 안식으로서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죽음 안에 있는 세 가지 요소, 안식의 요소, 폭력적 요소, 하나님의 능력을 위대하게 경험하는 스펙타클의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죽음을 죽습니다. 사실은 죽는 것이 나이가 들면 점점 자연스러워진답니다. 몸서리치는 고통보다는 죽는 게 낫습니다. 그래서 안락사가 나오는 것 아닙니까? 죽음에는 분명히 안식의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로에게 죽음이 갖는 안식의 품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죽음 안에는 안식이 있습니다. 성도의 죽음 안에는 안식이 있습니다. 둘째로 죽음 자체가 죄의 결과임을 일깨우는 폭력적이고 징벌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 자체를 미화하면 안 됩니다. 사의 찬미,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죽음자체를 미화하면서 자살 찬미적으로 가면 안 됩니다. 죽음은 몸서리 치는 고통으로부터의 안식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죽은 사람 자신은 모르지만 죽음이 남겨둔 미망인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폭력적 이별이기 때문에 울어야 하고, 또 죽음 때문에 죄를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원초적 생명력으로 되돌아갈 필요성을 느끼는 선교적, 일종의 설교적 경고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죽음에는 우는 요소가 없습니다. 슬픔의 요소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냉정한 대기업 병원들이 장례식을 도맡아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법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순전히 장례만 도맡아 해주는 장례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믿는 바입니다. 이 업을 한 번 해볼 마음이 있습니다. 진짜 잘 우는 사람, 슬픔을 자극하고 그 사람의 삶을 반추하는, 한 시간 만에 해치우는 장례식 말고 그런 장례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봅니다.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15분만에 다 타서 재가 돼서 뿌려버리는 것, 그리고 옛날처럼 상여도 없고 울어주지도 않고, 물론 죽은 사람이 안 울어준다고 짜증낼 일도 없습니다. 그래도 죽음이 갖는 폭력적 요소를 반추할 만한 시간이 전혀 없기 때문에 저는 오늘날 장례문화가 슬프다고 봅니다. 장례문화 자체가 장례가 돼야 합니다. 관 하나에 390만원, 수의 하나에 너무 비쌉니다. 59세 남편의 장례식을 치를 돈이 없는 53세 아주머니가 남편이 투신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었습니다. 이번 주에 일어난 일입니다. 59세 아저씨가 신병을 비관하여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치를 돈을 빌리러 다니다가 빌릴 곳이 없으니까 똑같은 장소에서, 우리 세대에서 죽는 것도 돈이 있어야 한다는 무시무시하고 야만적인 더럽고 추악한 사회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장례식을 도맡아해 준 것 알죠? 장례식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의 장례를 교회가 다 해주었습니다. 염을 다 해주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funeral hall 영길 공간을 만들어놓고, 대기업 병원이 도맡아하는 모든 장례식을 교회가 마땅히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기도원을 지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장례식을 통하여 어머니 아버지와 이별을 장엄하게 만들어주고 손자 손녀 모두에게 죽음의 폭력성과 다차원적인 의미를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반드시 만들어줘야 하는데, 장례식도 형식적이 되고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죽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기업 장례식, 장례식은 돈이 들면 안 되겠죠. 저는 장례식이 그분의 약력보고, 생애 동영상촬영, 슬라이드 상영, 친구들의 슬픈 조사 3-4, 자녀들과의 마지막 이별, 손자손녀들까지 다 오는, 그래서 죽음 자체에 참여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종교적 성사가 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가, 기독교가 그걸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는 장례식장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는 아니고, 가향교회는 힘들지만 웬만큼 큰 교회는 funeral hall 같은 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육관 같은 곳을 같이 쓸 수 있죠. 큰 냉장고가 필요하겠네요. 그러나 교회가 너무나 관 398만원, 수의 10만원, 이건 말이 안 되죠. 이건 설교의 핵심은 아닙니다. 돌아가실 분도 없는데 길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죽음 자체의 폭력성을 반추할, 죽음 자체가 갖는 비극적 요소를 되돌아보면서 죄가 죽음을 가져왔다는 걸 알고 기독교적 교리를 되돌아볼 찬스인데, 그런 찬스가 너무 없다는 것이 슬프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은 우리 하나님 능력이 법칙보다, 우리 하나님의 인격적인 힘이 죽음의 법칙보다 더 세다, 우리 하나님의 결정보다 우리 하나님 자신이 더 크다, 죄 때문에 죽음을 갖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정한 법칙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가 정한 죄와 벌의 법칙보다, 죄와 벌과 부활의 법칙을 만듦으로써 죄와 벌의 법칙 너머에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자유, 그것을 또한 맛보는 것이 죽음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죽음도 세 가지 요소가 다 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도 세 가지 요소가 다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성도와 우리 모두의 죽음, 마지막에 화룡정점이 있지 않나 봅니다. 우리 죽음은 죽음의 폭력성, 징벌적 요소도 경험하고 마지막 두려움이 엄습하는 죽음이 되겠죠. 두려움이 엄습하고 눈물을 자아내는 두려움이겠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대반전을 일으키셔서, 내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집니다, 하고 죽었는데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를 끌어안으십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산자의 땅에서 끊어진다면서 슬픔가운데 죽었을 겁니다. 그 슬픔 가운데 죽은 나사로를 우리 하나님은 품어주셨죠? 나사로가 죽었을 때 비참한 거지로 행려병자로 죽은 나사로가 내가 부활하겠다는 확신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아브라함의 품에 영접하셔서 그에게 대반전을 일으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바로 이 순간 하나님 음성을 쩌렁쩌렁하게 듣고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고 죽음과 방불한 경험 속에 있다 하더라도 죽음 저편까지 쩌렁쩌렁 들려오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무덤을 열고 뛰쳐나와서 여러분을 소생시킨 분이 하나님임을 신앙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을지로와 충무로와 세종로에서 부활하신 주님이시고 우리 무덤의 문턱까지 오셔서, 죽은 지 나흘 돼 악취가 진동하는 우리 삶의 현장까지 오셔서 우리를 여전히 불러내십니다. 무생물도 살려내시고 무생물도 하나님 음성에 복종합니다. 시신이 돼 버린 우리 자신도 하나님 음성에 아멘으로 응답하여 일어나게 하시고 무덤을 뛰쳐나가게 도와주셔서 지금 종말을 살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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