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죽음에 이르는 병과 하나님 영광을 나타낼 병-요한복음 11장 1-7절(

by 【고동엽】 2022. 2. 13.

4 21일 주일설교 2 _ 요한복음 11 1-7

(죽음에 이르는 병과 하나님 영광을 나타낼 병)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만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 트는 풀을 모두 뽑아 버렸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자연이 갖는 거대한 자가치유력, 문명의 황폐함이 아무리 자연을 침범하더라도 자연 안에 있는 거대한 자기 치유, 자기 복원 회복력을 반증합니다. 물론 우리는 봄을 자연이라고 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무 공로 없어도 봄을 선물로 주시듯 봄은 은총처럼 때때로 우리 인생에 찾아옵니다. 봄은 은총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찾아오고 하나님의 은혜는 은총의 이름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봄을 가져오기 위해서 태양의 기울기를 조절하거나 지구 공전과 지구자전의 각도를 조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선물로 봄은 오듯이 구원은 친구는 배우자는 봄처럼 선물로 옵니다. 이 선물이 우리 노동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노동으로 이룰 수 있는 것보다 압도적인 선물이 노동의 가치보다 훨씬 큽니다. 노동가치설의 세계에 살지 않고 선물가치설의 세계에 삽니다. 우리는 선물로 살아가는 존재고 노동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봄의 신비, 장엄함, 봄의 능력을 만끽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제 해발 197M 밖에 안 되는 심학산에 갔더니 진달래가 정말 많이 피었습니다. 심학산에도 그렇게 진달래가 그렇게 많이 핀 걸 보니 딴 산에는 엄청 났겠죠. 여러분께서 봄에는 꼭 산에 가셔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얼마나 넉넉히 이 땅을 돌보시는가를 잘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사는 파주 우리 집은 베네치아 같은 갈대밭이 있고 호수가 있고 물이 상당히 들어와 있습니다. 하얀 재두루미 두 마리가 늘 와서 아침에 먹이를 뜯습니다. 82세인 우리 어머니는 재두루미 두 마리가 오면 굉장히 기분이 좋아지십니다. 점점 노쇠해가는 노쇠함의 정점에 있는 저희 어머니는 항상 죽고 싶다고 합니다. 제가 천국에서도 필요한 사람 중심으로 데려가시지, 어머니 함부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죽는 것이 은총인데, ? 아무라도 죽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니까, 제가 놀리기도 합니다. 어머니 다음이 바로 제 차례입니다, 어머니 죽음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자기가 죽으면 화장을 어떻게 하고 관을 어떻게 하고 수의는 어떻게 하고, 그런 건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돌아가실 때는 신경 쓰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370만 원짜리 쓰면 안 되고 다 알아놨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죽음을 준비하는 노쇠한 어머니와의 대화, 우리 어머니가 잠깐 기분이 좋아지는 때가 두루미가 와서 우리 집 앞에서 뭔가를 파먹고 고개를 흔들 때 그걸 보고 한참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우리 존재를 위축시키고 살 소망을 꺾어놓는 모든 것은 병이라고 볼 수 있죠. 죽음, 자기 파괴적인 해체, 죽음 쪽으로 시그널을 주는 모든 징후를 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을 앗아가는 모든 부정적 기운 세력들이 병입니다. 4 17 <경향신문>에 여타 중앙일간지에 실리지 않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겨레신문> <경향신문>에만 실렸습니다. 현대 촉탁직원 한 명이 자살한 사건, 16면에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사무국장이 분신해서 죽은 겁니다. 굉장히 크게 실렸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다른 어떤 중앙일간지에도 그게 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향신문은 그게 굉장히 중요했기 때문에 크게 실렸습니다. 제가 학생 두 명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4 17일에 신문 8개를 비교해서 가져와라, 시간당 5천원 주고 너희 아르바이트를 시키겠다, 하도 공부를 안 해서 아르바이트를 시켰습니다. 아이들 중 언론인이 되기를 원하는 2명을 불렀습니다. 신문 4개씩 읽고 기사를 분석하는데, 김학수 노조 사무국장 죽은 사건과 현대 촉탁직원 죽은 사건을 크기로 보도한 순서를 정리하고 분석해 와라, 요즘 아이들이 신문을 안 읽기 때문에 제가 그런 식으로 장학금을 약간 걸어서 했습니다. 아직까지 신문기사가 오지 않아요. 통장 구좌번호만 오고 신문기사가 안 왔어요. 작업은 안 오고 왜 통장구좌만 오냐, 시간당 5천원 준다고 10시간 정도 걸릴 것을 예상하고 했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현대 촉탁직 직원과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조 사무국장은 죽음으로 가는 병을 오랫동안 앓다가 결단한 거거든요. 갑자기 죽은 게 아니거든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죽은 거거든요. 질병을 개인에게 맡겨진 쓰라린 운명의 부조리라고 보면 안 되거든요. 우리 인간의 개체는 세포적 연합 속에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이 만일 탐욕적으로 살면 B라는 사람이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이것이 암세포죠. A라는 세포가 만일 B라는 세포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더 많은 칼로리를 몰래 몰래 저장하면 그것이 암세포가 됩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보면 14장에 암세포의 발생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암세포는 어느 순간에 정상적인 통로로 영양분이 공급되지 않자 암세포가 될 영물스런 인텔리 같은 세포가 몰래 옛날에 섭취되던 영양분을 따로 섭취 받으려고 비밀통로를 만들어놓고 암세포가 됩니다. 암세포는 4배 정도의 영양분을 받기 때문에 다른 세포보다 훨씬 많이 자라서 A라는 세포가 암에 걸리면 B, C, D, E 세포가 전부 다 위축됩니다. 초스피드로 성장하는 암세포가, 초스피드로 많이 먹는 세포가, 초스피드로 많은 칼로리를 가져가는 그 세포가 암세포가 됩니다. 우리 인간은 세포적 연합 상태에 있습니다. A라는 세포가 너무 많은 걸 가져가면 B, C, D, E가 병에 걸립니다. 지금 경제민주화법이 설왕설래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경제민주화에서 공정거래법이 일감몰아주기, 암세포적 기업 활동을 막으려고 하는 최소한의 장치입니다. 그걸 이한구라는 대구 출신의 아주 기능주의적 무감각한 원내대표가 그걸 와해시키고 있습니다. 그게 새누리당입니다. 새누리당은 세포적 연합 상태보다는 일련의 불리한 여건 속에 있는 다수의 구성원이 존재해야만 기업이 돌아간다는 기능주의적 효율성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행복한 걸 원치 않습니다. 새누리당이 원치 않는 게 아니라 기업인들이 그걸 원치 않습니다. ? 모든 사람이 똑같이 행복하고 존엄성을 누리면 공장에서 써 먹을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공장 주인이라도 존재감이 매우 위축된 사람이 필요하지 시퍼렇게 살아서 데카르트의 책을 읽고, 하이데거를 읽고 다니는 사람은 일을 못 시킵니다. 여비서한테, 민희자매님 차 한잔 타주십시오, ?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는 사람에게 내가 사장이라고, 지금 뭐라고요? 시몬느 드 보봐르 <2의 성>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시켜요? 그런데 저는 모든 사람을 그렇게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을 한 번에 부려 먹지 못하는 강철자유인으로 만들려는 게 제 사명이고 기업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마디만 하면 금방 불리해서 줄줄이 순종 모드로 갈 다수가 필요한 겁니다. 그런 사람 17만 명이 삼성전자에 있는 겁니다. 일을 하다가 팔이 하나 잘리더라도 내 불운으로 알고 가는 사람을 원하지, 팔 잘렸다고 블로그에 알리고 온 세계 여론, ILO 국제노동기구가 등장해서 삼성을 규탄하게 만드는 이런 깨어 있는 지성인을 원치 않습니다. 모든 기업은 노동력을 원하지 인격을 원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인격이 있고 영혼이 있기 때문에 신학적 인간들, 신학자들은 모든 사람을 노동력으로 보는 이 생각을 반대하기 때문에 저는 기업인들과 항상 싸움을 합니다. 제가 CBMC라는 단체에서 초대를 많이 받았습니다. CBMC는 사람들을 주체적으로 부려먹지 않고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하는 기독교 기업인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한 번 초대하고 다시는 초대 안 합니다. 또 한군데 저를 초대했습니다. 제가 누군지 모르고, 안 가겠다고 했더니 담임목사까지 붙여서 계속 초대합니다. 내 책을 읽었냐고 했더니 안 읽었답니다. 아마 거기도 상당한 무덤이 나옵니다. 저는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세포적 연합 속에 있는 개인이 암세포적인 강력한 타자에 의해서 위축감을 강요당하거나 죽음을 강요당하거나 실망을 강요당하는 걸 막아야겠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여러분이 모르지만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오래 했는데 아무 표가 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실적이 없어요. 누군가는 해줘야 하는 일인데도 기업인과 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정치가도, 군인도, 국가와도 다릅니다. 사람은 국가 위에 있는 존재이고 절대로 국민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게 하나님과 언약 상태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인간,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국가도 개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태, 그런 의미에서 북한은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고 이미 국가가 아닙니다. 이런 세포적 연합 상태에 있는 인간이 자기 존엄성을 만끽하지 못하고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선물로 받지 못하는 사람 상태에 있는 것을 병들었다고 말합니다. 병든 사람의 특징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병은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존재의 소멸입니다. 이사야 38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죽고 나면 하나님 영광을 찬미할 수 없고 하나님께 감사도 못합니다, 죽음은 하나님과 영영한 이별입니다, 우리가 만일 존엄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지 못하고 혼도 없는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정도의 죽음이라면 애통함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을 때 매우 애통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나뭇잎과 다른, 하나님과 영영할 때 하나님 지으신 이 세계와 헤어질 때,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존재입니다. 이 멋있는 세상과 이별할 때 슬픔이 온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님과 이별할 때 오는 슬픔입니다. 이런 연합 상태,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배제되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게 죽음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기가 막힌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대반전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매력적인 분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버리기 전에 예수님 매력적인 분,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분, 우리 머리털로 발을 씻겨 드리고 싶은 분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의 죽음이 얼마나 엄청난 구원의 힘을 가졌는가를 알게 되지, 그분의 죽음 자체가 갖는 부조리성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면 그분의 죽음 자체가 죄를 속할 수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훌륭하시고 아름답고 위대하고 선하신 분이 그렇게 처절하게 죽었다는 죽음의 부조리성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님 죽음의 속죄효력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인생을 잘 사시려고 했던 분이지 그냥 죽어버리려고 했던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죽어버리시려고 한 게 아니라 예수님은 당대의 특수한 자기 삶을 매우 부지런하게 매우 성실하게 매우 알뜰하게 사셨던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셨던 곳, 예수님은 목수였다는 곳은 마가복음 6장에 나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목수의 아들이라는 말은 그가 아버지 업을 계승했다는 뜻입니다. 목수라는 말이 한 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셨던 현장은 친로마, 헤롯 안티파스 라고 하는 사람이 일으켰던 대토목 공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족들과 석수장이 조합들과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다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셨던 세포리스라는 헤롯 안티파스의 왕궁수도, 지금도 아직 남아 있는 티베리아 바닷가, 티베리아 로마 2대 황제를 기념하여 세운 산상도시, 벳세라, 고라신, 가버나움 스키드 폴리스라는 로마의 귀족들, 로마와 아주 친했던 히브리 귀족들이 살던 곳, 대 토목공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티베리아와 세포리스라는 도시는 거대한 신도시건설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예수님은 대부분 세포리스와 티베리아 두 군데에서 일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티베리우스는 가버나움 바로 옆이기 때문에 가버나움에 진지를 치면서 목수일을 하신 겁니다. 지금도 가보면 알지만 가버나움과 티베리아는 바로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티베리아 건너편 산 너머에 나사렛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적인 기가 막힌 자연, 아열대지방의 숲과 호수와 들판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넉넉한 사랑과 돌보심을 경험했습니다. 넉넉한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의 풍요를 만끽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농민 사이에서 움트는 사랑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경험했던 갈릴리적 아름다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신다는 넉넉한 확신이 어디서 무너지느냐? 탐욕적인 귀족들 지주들 분봉왕 등입니다. 예수님은 계층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 예수님 주변에 3년 내내 돈을 댄 사람은 헤롯의 재무부 장관 아내입니다.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던 그 사람 재무부장관 아내가 예수님께 대부분 돈을 댔습니다. 이건 학자들이 지금도 인정합니다. 누가복음 8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이 요안나가 바로 억대의 재산을 예수님께 드린 겁니다. 3년 내내 예수님께서는 이 요안나의 돈으로, 이 말은 그 당시 신문에 날 만한 일입니다. 국정원 원장 부인의 돈으로 예수님이 사역한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국정원장은 세례요한 장준하의 목을 쳤습니다. 그 국정원 사모님이 낸 헌금으로 산 겁니다. 쉽게 말해 의인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던 분봉왕 재무부장관 아내의 헌금으로 살았다, 또 더 있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얼마나 가까웠느냐? 세례요한마저도 헤롯가문과 굉장히 친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세례요한과 헤롯가문이 왜 친했느냐? 헤롯가문의 왕궁가족들이 에세네파, 세례요한의 종교를 굉장히 많이 받아들였고 세례요한에게 많은 존경을 보냈습니다. 마지막 마가복음 6장에서 헤롯안티파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이 <살로메>라는 작품에서 자기가 존경하는 의인의 목을 베는 괴로움을 잘 표현했습니다. 그게 역사적으로 다 맞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파스의 죄를 고발할 수 있는 것도 친구지간이기 때문입니다. 너 그러면 안 돼, 어렸을 때 같이 자랐던 친구가 죄를 지으니까 비난하다가 친구가 자기 예언자친구의 목을 벤 겁니다. 예수님이 헤롯안티파스 궁정에 또 어떤 영향을 끼쳤느냐?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교회의 마나엔이 나옵니다. 이 마나엔이 유명한 사도바울의 동역자인데 헤롯왕궁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이 계급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모든 계층의 지지자들을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끌어들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도 있죠. 니고데모도 있죠. 삭개오도 있죠. 예수님의 주변에는 전 계층을 포괄하는 개방성이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자기 특수한 인생을 성실하게 살다가 그 삶이 하나님께 만민의 구원의 표상이 되었지, 예수님 머릿속에 이런 게 없었습니다. 나는 만민을 위해서 왔다, 접근하지 마라, 나는 만민을 위한 구세주다, 이런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특수민들을 사랑하다 보니까 그 삶이 만민에게 구원이 된 삶이 된 것이지, 매우 특수한 삶에 충실한 분입니다. 나는 만민지향적이야, 나는 갈릴리를 이미 초월했어, 나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 한 가지밖에 사명이 없어, 이러지 마,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려고 하지 않았고 갈릴리 그 안에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루려고 했고 당신이 알고 있는 최소한의 사람에게 엄청난 사랑을 쏟으셨던 분이셨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눈물 나는 이유가 바로 갈릴리적 스토리의 처절한 좌절감 때문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아버지가 예정하셨잖아, 하나님 아버지가 예정하셨으니 돌아가셔야지, 아 때가 됐네, 가야지, 가야지, 간다, 받아주세요, 이런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영지주의적 해석입니다. 영지주의적 해석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모든 근원들을 그런 이념적으로 해석해버린 겁니다. 영지주의적 예수 이해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많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예수님 죽는 장면에 눈물을 안 흘립니다. ? 자기구원을 위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구원이 핵심이지 예수님의 아픔에 전혀 눈물이 안 납니다. 예수님의 아픔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게 구원 받은 거거든요. 현대 촉탁직 직원이 죽은 걸 보고 눈물이 나는 것이 구원 받은 성도요,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사무국장 김학수가 분신을 하고 죽는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이 나는 게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그런 도덕과 상관없이 마술적 공식으로 이해하니까 예수님은 내 구원을 위해서 죽은 분이지, 내가 그분의 휘몰아치는 격동하는 감정에 공감할 필요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게 한국교회는 많다는 말이에요. 이게 바로 영지주의적 이단입니다. 이단은 예수님의 눈물 예수님의 죽음에 공감이 안 됩니다. 이단이 아닌 정통은 예수님이 요단 저편에 돌로 치려는 사람들을 피하셔서 쫄아 있으시고, 이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 저편에 왜 가신 겁니까? 돌로 치려하니까 피하신 겁니다. 36계를 놓으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또 난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돌로 치려고하는 폭력의 사정권을 벗어나 요단 저편에 가서 자기를 지지해주고 격려를 줬던 세례요한과 그의 지지자들, 그의 제자들의 사랑을 받고 힘을 잠시 내고 있는 그 사이에 다시 유대로 가야 할 일이 발생했습니다. 베다니가 바로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홈그라운드입니다. 돌로 치려고 하는 곳으로 다시 가야 합니다.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은 방금 돌로 치려고 했던 곳으로 다시 가야 하는 고독한 처지에 내몰린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돌로 치려고 하는 곳으로 다시 가야 한다, 예수님은 생각했습니다. 나사로는 지금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나사로의 three sisters and brother, 세 오누이를 다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죽게 될 만큼 위기에 몰렸고 당신은 지금 죽음 저편에 몰려서 죽음을 피해서 도망갔습니다. 돌로 치려는 죽음을 피해 도망가서 위축돼 있는 예수님,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반발감과 저항감 때문에 마음이 위축돼 있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서 요단 저편으로 피신 가신 그분에게 다시 요단 이편으로 불러냅니다. 죽음을 피하여 도망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요단 이편에서 친구가 죽겠다고 소리친 거니까 예수님께서 여기서 이틀 동안 생각한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야 할까? 간다면 제자들에게 뭐라고 할까? 오만 가지 생각을 하다가 예수님께서 마침내, 가야한다,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 친구가 내가 사랑하는 사랑의 확실성 진실성 참됨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난다면 그건 참사랑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친구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모종의 사건,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자신에게 목회하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있는 걸 깨달은 겁니다.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통하여 모종의 격려를 주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반등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아신 겁니다. 그래서 가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틀 동안 예수님은 고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자기를 사납게 대적하는 사람들을 피하여 도망을 가셔야 할 만큼 연약한 인간이셨고 자기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서슬 퍼런 공세 앞에 후퇴를 일삼는 한 작은 사나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또 친구가 병들어죽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갈등하다가 마침내 죽음으로 치달을 수 있는 위중한 병을 고치러 가야 하는 안타까운 딜레마에 놓이셨습니다. 여러분 이걸 이해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요단 저편에서 피신해 있는 게 유리하지만 요단 이편에서 사랑을 완성해달라고 소리치는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고민하다가 사랑하는 친구의 병을 고치러 위험을 감수하는 이 멋진 모습, 이 작은 사랑의 모습이 합해져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작은 일상적인 친구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하여 위험한 곳까지 가는 일상적 발걸음의 완성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라는 거죠. 이렇게 해야만 예수님의 죽는 장면에서 눈물이 나요. <바흐수난곡> 78곡이 있죠? 3시간 동안, 56-78곡까지 마지막 빌라도와 갈등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 한 번 읽어보세요. 예수님의 격정이 막 나와요. 에 요한복음 11장을 가지고 유다와 예수님이 갈등하는 장면이 나오죠. 보셨어요? 그것도 한 번 보세요. <오페라의 유령> 만든 사람, 엔드라 위버, 예수님의 장면을 굉장히 고민해서 표현했습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이 빨리 돌아가셔야만 제 밥값을 한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안타깝고, 예수님의 죽음에 눈물을 안 흘리는 것, 예수님 죽음에 대해서 애통함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피해서 왔다가 친구의 곤경 앞에 다시 위험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 순간 그때 다시 돌아가기로 작정하는 상식적이고 원시적이고 아주 때 묻지 않은 사랑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몰아가신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가는 병이 아닌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의 병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의 병은 존재의 위축감으로 처절하게 끝나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극적으로 드러낼 연약함, 하나님 영광을 극적으로 계시할만한 병인 걸 알게 됐습니다. 이건 예수님의 논리적 확신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깊게 경험하는 사람들의 병, 하나님 사랑 속에 있는 사람들의 병은 절대로 죽음으로 끝나는 sad story가 아니다, 하나님 사랑을 만끽하고 하나님 사랑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위축시키고, 내 존재가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느낌을 주는 무서운 밤의 시간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지막은 죽음이 아니라, 영광과의 이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더 한껏 만끽하는 일로 끝날 것이다, 예수님의 논리적 확신이 나사로 죽음에 대한 해석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 거하지 아니하면 이런 논리적 확신이 안 생긴다는 게 괴로운 일이죠. 내가 벌 받나? 이러다 죽는 거 아냐?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암시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의 존재의 위축감, 또는 손상된 자존심, 이제 나는 생매장 당했다, 나는 무덤 속에 들어간다, 이제 망각의 땅으로 가는구나,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자에게 일어나는 경우는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나타낼 병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걸 강조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안 믿어져도 어쩔 수 없고 믿음 생기는 사람은 믿기를 바랍니다. 안 믿어지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무책임한 말이지만 어쩔 수 없는 말입니다. 제가 제일 달랠 수 없는 불안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여러분의 이 고통은 결국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말을 제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모두 세포적 연합 속에 있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죽음을 경험합니까? 83세 된 우리 어머니가 내뱉는 말도 굉장히 기분이 묘합니다. 아이고 죽고 싶다, 밥 안 먹을란다, 밥맛 없다, 이런 말만 들어도 기분이 확 상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든다는 게 아니라 진짜 밥맛이 없으면 저렇게 되는 구나, 우리 가까이 세포적 연합 속에 있는 사람이 그런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면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죽음이죠. 우리 모두 예수님의 심방, 예수님께 SOS를 쳐서 불러야 하지 않을 만큼 건강한 사람이 없죠. 우리 모두 예수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SOS를 치고 예수님의 발걸음을 내 인생의 누추한 삶의 자리로 초청해야 할 만큼 절박함 속에 산다는 말이죠. 저는 대한민국이 바로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 이웃이 너무 그렇습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발걸음을 재촉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예수님의 해석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4절 마지막 절에서 나사로 이 사건이 예수님이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들됨을 만천하에 예수님에게 엄청난 반전을 안겨주는 사건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하게 되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제자들과 예수님 모두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목회하는 현장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위축되었을 때 우리 존재를 순식간에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대사건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사르밧 과부의 집 사건입니다. 사르밧 과부집에 갔던 엘리야가 하숙하자마자 며칠 만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망명을 가서 두로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하숙하자마자 아들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엘리야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사르밧 과부의 인생도 괴롭게 하는 자구나, 나는 정말 살만한 가치가 없다, 죽자, 이런 자살지향적인 연약함에 빠졌습니다. 오히려 그 사르밧 과부의 아이 식어버린 몸 위에 가서 엘리야가 이 아이의 혼이 돌아오게 해달라고 소리쳤을 때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사르밧 과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엘리야를 복권시켜줍니다. 위축에 빠졌던 우리 예수님이 나사로 반등을 통하여 나사로 부활사건을 통하여 십자가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죽음의 공포랑 맞대결 합니다. 여러분의 존재를 심히 위축시켰던 사건, 하나님의 사랑과 영영 이별했다고 느끼는 부정적 사건이 여러분에게 하나님 사랑과 낮 12시에 대낮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반전의 사건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영광을 영영이 앗아갈 것 같은 죽음의 시간에 사로잡힌 우리들에게 오셔서 낮 12시와 같은 대낮같은 밝음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세포적 연합 속에 삽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죄 때문에 죽음을 맛보고 있고, 누군가가 쏟아내는 부정적 기운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맛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 사랑하는 자가 죽게 되었습니다, 소리를 쳐야 할 만큼 절박함에 있습니다. 하나님 누추한 우리 삶의 자리에 오셔서 죽게 된 우리를 돌아보셔서 하나님 저희를 불러내주시고 생명의 잔치에 우리를 초청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