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주일설교 1부_ 요한복음 11장 1-7절
(죽음에 이르는 병과 하나님 영광을 나타낼 병)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
30, 40분 먼저 오는 것도 긴장이 되죠? 11시 예배보다는, 9시 50분 예배가 아마 긴장을 일으키고, 토요일에 주무실 때 옛날 11시에 드릴 때는 푹 자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1부 예배를 마치신 분들은 그런 안식이 약간 손상될 것 같습니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만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 트는 풀을 모두 뽑아 버렸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렸어도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소설들은 성경주석서라고 보면 됩니다. 그걸 그냥 문학이라고 보면 안 되고 성경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소설적으로 아주 기가 막히게 형상화한 작품이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읽으면 성경이 얼마나 위대한 책이고,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인가를 찬미하게 됩니다. 우리가 거대한 바실리카, 엄청나게 아름다운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듯이 위대한 언어와 사상의 축조물인 문학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압도되고, 우리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움 앞에 매료됩니다. 예배는 매료되는 경험이고 사로잡히는 경험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많이 부각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 돌아가시려고, 어떤 수를 쓰더라도 십자가에 못이 박히려고, 인류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오롯이 살려고 오신 분이고 갈릴리적 토양에서 이스라엘 맥락 안에서 충실하게 살려고 애를 썼던 분입니다. 그걸 먼저 알아야 구원론의 한 방편으로 예수님을 추상화시켜버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장면도 감격과 눈물과 애통함이 일어나지 않고 하나의 주술적인 구원의 효력만 발생시키는 구원의 통로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가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죽음이 얼마나 애절하고 아름답고 장엄하고 분통터지고 부조리한 이야기인지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거든요. 10장 40절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요단강 저편은 예루살렘 바로 밑에 80km정도 내려가면 사해가 있고 그 사해 건너편이거든요. 요단 저편은 지금 요르단입니다. 빌라도 또는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범위입니다. 상대적으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많이 있었던 곳입니다. 39절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그런데 39절 맥락과 11장 8절을 비교해보면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고대인들 중에서 돌로 쳐 죽여서 그를 절단 내는 것은 거짓선지자입니다. 예수님을 거짓선지자로 취급한 걸 알 수 있습니다.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요단저편으로 긴급 피신을 간 겁니다.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종교공권력이 살아 있는 예루살렘에서 요단 저편으로 피신한 겁니다. 쉽게 말해서 도망가신 겁니다. 40-42절에 예수님이 왜 가셨는지 알 수 있는 본문이 나옵니다. '거기 거하시니' 얼마나 거했는지 모릅니다. 요단저편에서 거했는데, 그다음에 나오는 41-42절이 예수님의 곤고한 마음을 위로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예수님이 요단저편으로 가니까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요한과 예수님이 같이 사역을 시작하는 이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말했는데, 그 내용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나사렛 예수는 신랑이다, 나는 들러리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이렇게 점점 자기보다 늦게 사역을 시작했던 예수를 크게 띄우고 자기가 점점 사그라지는 그런 말들, 요한복음 3장 30절, He must increase I must decrease,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세례요한이 표적을 행하지 못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했지만 그 증언 자체가 진실한 증언, 참된 증언이었습니다. 오늘날 표적을 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굴복시켜서 인기를 얻거나 신뢰를 얻으려는 사람들은 사탄적 마음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악하고 음란한 사람만이 표적을 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제가 표적을 행하면 여러분은 저를 사랑으로 신뢰하지 않고 지배당합니다. 제가 표적을 행하면 표적하는 담임목사님한테 지배를 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표적을 행하지 못하는 진실한 인격자, 기형도 시인이 말한 <우리동네 목사님>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한다' 기형도 시인이 썼던 <우리동네 목사님>도 그런 일련의 메시지, 오늘날은 사람이 많이 오게 만드는 것이 표적입니다. 재정규모가 커지는 것도 표적이고 유명한 사람이 몰려와서 그런 사람 옆에서 배우려고 하는 인맥을 자랑하는 것도 표적입니다. 표적은 전부 다 사탄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진리로 설복시키려고 하지 않고 힘으로 설복시키려 하는 모든 자가 사탄적인 것입니다. 진리로 설복시키는 하나님, 진리가 아닌 힘으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하는 전부 다 사탄적인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 중에 폭력이 있습니다. 탱크의 힘이 있습니다. 표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미모가 있습니다. 인맥이 있습니다. 재산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사람을 굴복시킵니다. 우리도 돈이 많은 사람이 나타나면, 사업가가 나타나면 사립 대학교 총장들은 벌벌 떨면서 이 사람이 혹시 학교에 학교발전기금을 내지 않을까, 학교 당국자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많은 교회 목사님들, 돈과 관련돼 아쉬움이 많은 사람들은 전부 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신적 아우라를 뒤집어씌웁니다. 세례요한은 표적보다 더 중요한 진리의 증언자로써 살았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증언자가 얼마나 많은 효력이 있는지 볼까요?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요한 때문에 다시 한 번 예수를 믿는,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요한의 권위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이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가지고 안식일마다 표적을 일으키니까 종교당국자들이 귀신이 들려서 표적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가지고 안식일마다 논쟁을 불러일으킨 논쟁요법보다 표적을 행하지 않은 세례요한의 증언 밑으로 자신을 피신시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겸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18년 된 아브라함의 딸, 고창병 든 여인을 안식일에 고쳤습니다. 마가복음 3장에 한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쳤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태생 소경된 거지를 안식일에 고쳤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습니다. 예수님은 전부 다 안식일에 고침으로 그 당시 안식일법이 얼마나 민중들에게 억압적인 법인가, 즉 안식일 계명이 얼마나 먹고 살기 고달픈 사람들이 일하는 것들을 억압하고,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호구지책 때문에 들판에 나가서 이삭을 주어야 하는 그 비참한 사람들을 동정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안식일은 금지하는 날이 아니라 죽은 생명을 살리는 날이고, 18년 동안 마비된 등을 펴주는 날이고 눈 먼 자를 열어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안식일에 일어나야 할 적극적인 일인데, 유대종교는 안식일에 생명을 고양시키고 생명을 창조시키고 생명의 은혜를 나누는 그 일에 몰두하지 않고 모든 일들을 금지하게 만듭니다. 활동금지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처럼 거짓된 안식일을 신성화함으로써 안식일의 참 정신을 박제하는 잘못된 안식일 계명을 지키니까 예수님은 그걸 깨기 위해서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동물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 동물보다 더 귀한 18년째 등이 굽어 있는 사탄에게 속박된 이 딸을 구한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안식일 도발, 안식일에 의도적이고 집요한 도발이 그들에게 귀신들렸다는 말,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작전상 후퇴한 겁니다. 예수님도 매우 전략적으로 기획적으로 도피를 한 겁니다. 예수님도 아마 여기서부터 표적을 가지고 이들을 설복시키는데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지 않는 세례요한의 증언에 자기를 위탁하면서, 세례요한의 증언을 순식간에 기억나게 만들면서, 세례요한의 증언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증언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 아들로써 부르심 받았다는 그 소명감, 흔들리는 소명감을 다잡기 위해서 요단 저편으로 가신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피곤하실 수 있는 분이고 흔들리실 수 있는 분이고, 자기의 사역의 방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실 수 있는 분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42절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세례요한의 제자공동체가 거기 안에 존재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이 세례 줬던 장소에 가서 덩그러니 머물렀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의 지지자가 있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아직도 활동 중인 동아리에 가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은 위로를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믿지 않는,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교구에서 피신해서, 이 말은 우리가 가끔은 적대자들과 일촉즉발의 대치정국을 만들지 말고, 가끔은 지지자들 격려와 신의와 달달한 사랑이 있는 공동체로 피신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적대자들과 너무 예리하고 날카로운 대립을 하는 인생을 살지 말고 가끔은 요단 저편에 가서 우리 소명감을 새롭게 해주고, 작전상 후퇴처럼 보이지만 소명감을 갱신케 하고 우리의 원초적 소명감을 되새기는 피정이 필요하다, 이걸 우리는 피정이라고 말합니다. retreat, 피정, 소란한 곳을 떠나 정숙한 곳으로 잠적함, 요단저편은 action oriented 삶에서 non action oriented 삶으로 가는 겁니다. 활동위주의 삶에서 활동 중지 모드로 가서 거기서 신적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 시편 27편 5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시편 57편 1절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굴속으로 들어감, 또는 비밀한 초막 속으로 잠적함이 필요하다, 주일날 또는 가족 또는 신령한 소그룹 구역 같은 모임은 요단 저편스러운 강력한 원초적 소명감, 하나님과의 소속감, 이런 것을 감미롭게 향유하는 장소가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님이 참 많이도 영혼이 피폐해졌겠다 싶습니다. 왜냐하면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자기를 에워싸고 있을 때 그들과 말을 다박다박 이어갔을 때 예수님이 느꼈을 모멸감, 귀신 들린 자라는 말들, 이런 것들이 예수님에게 얼마나 피폐를 가져왔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해서 표적을 행하지 않을 생각으로 간 겁니다. 왜? 표적을 너무 많이 행해서 표적을 행하지 않는 진리의 증언으로 가려고 했는데 11장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만일 이 베다니가, 예루살렘은 계곡 위에 있는 도시입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 기드론 골짜기, 중앙골짜기 세 계곡이 에워싸고 있는 높은 원추형 땅입니다. 케이크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층층이 쌓인 케이크와 같습니다. 그 밑에는 기드론 계곡, 힌놈의 아들골짜기, 중앙 골짜기는 닫혀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계곡에 물이 흐릅니다. 그게 바로 기드론 골짜기입니다. 농사를 지을 만큼 큰 퇴적물이 쌓인 곳입니다. 거기에 예루살렘이 높이 서 있기 때문에 베다니는 높은 마을입니다. 베다니는 감람산에서 가까운 마을인데 베다니에서 힌놈의 아들골짜기를 지났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멀지 않은 곳입니다. 2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바깥에서 살 때에는 항상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있죠? 고대인들이 사랑한다는 말은 지금처럼 감정의 교류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거처를 내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5절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는 말을 쓰죠? 이것이 식사와 잠자리를 주고받는 사이라는 뜻입니다.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1절 '우리 친구 나사로' 이것 보세요. 예수님과 나사로 사이에는 강력한 계약적 우애, 이 말이 중요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계약적 우애입니다. 이 당시 내가 누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는 내 사랑하는 친구입니다, 하면 이 친구와 나는 먹고 사는 모든 문제가 교환되는 사이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나사로 사이에 이런 표현들을 볼 때 나사로는 예수님께 거처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고, 12장에 가면 나사로의 여동생이라 불리는 마리아가 나드향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인 것을 볼 때 굉장히 가까운 사이입니다. 예수님께서 5절에 보면 보통 이상과 달리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보통 마리아를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마르다를 돌출적으로 써요. 사랑한다는 아가파라는 동사의 돌출적 타동목적어는 마르다에요. 이 본문 가지고는 마르다가 여동생인지 마리아가 여동생인지 몰라요. 마르다를 사랑했다는 말은 마르다가 예수님과의 공식적 관계를 대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언니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마르다가 가장 큰 누나였을 수도 있어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세 사람 다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우리 친구라는 말, 사랑했다는 말의 특수한 맥락을 볼 때 예수님과 이들 사이에는 굉장히 견결하고도 지속적이고도 동기적 우애가 있는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유대 땅에 있습니다. 다시 폭력과 무서운 종교권력의 폭력 사정권 내에 베다니 이 마을이 있습니다. 전갈을 보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어디 계신지 금방 알죠. 금방 아는 걸 볼 때 서로 내통하는 사이라는 말입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이게 그 다음 12장에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독자들은 마리아가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 발을 씻은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자들에게 쓴 거예요. 그러니까 순서가 뒤바뀌어도 괜찮은 겁니다. 12장에 나오는 것을 11장에서 미리 말하는 것은 이걸 순서대로 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여성의 극진적 심리학적 결단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남자 주석가들이 쓴 것을 보면 엄청나게 극단적인 순수함이라고 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경지가 돼야 이렇게 머리털로 급진적인, 이것은 굉장한 경지가 아닐까? 여성이 모성애적 연인적인, 모든 걸 총동원해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사랑을 많이 쏟고 싶을 때 행동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향유를 발에 붓는 것은 원래 왕에게 주는 겁니다. 원래 파라오의 발은 항상 향유로 닦임을 당했어요. 중국 황제들도 항상 향유로 발을 닦았어요. 동방박사들이 향유로 발을 닦았다고 했을 때 이 향유가 장례식을 예비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동방박사가 몰약과 황금과 향유, 이때 향유 몰약은 장례식 물건이거든요. 동방박사가 예수님께 가져온 선물, 전 세계를 구원할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왔습니까? 그 왕은 향유와 몰약을 가지고 장례식을 치를 장례용품을 가지고 위대한 왕을 찾아왔다는 말, 예수님의 위대한 왕이 되는 방법은 독특한 죽음을 통해서 된다는 암시를 주는 본문이에요. 동방박사이야기에 벌써 십자가에 나와요. 요한복음에서는 몰약 향유가 기호학적인 고도한 대화가 이뤄졌다고 보면 돼요.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여기서 4절에 극적 반전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 받는 영광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 자가 잘 될 때, 그 자가 영광스러울 때 하나님도 영광을 받습니다. 폭군과 하나님의 뜻을 어겨가면서까지 권력을 잡은 사람이 드러내는 영광으로 하나님은 영광 받지 않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영화롭게 하려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훌륭한 삶을 살아야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설교 잘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과 결속감이 강한 그 순종의 화신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서 영광을 받는 그 순간만 영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 그렇지만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게 아닙니다. 죽음은 창세기 3장 15-20절을 보세요. 죽음은 저주입니다. 저주를 조금씩 완성하는 게 병입니다. 병의 적분체가 무엇이죠? 병의 적분은 죽음이고 죽음의 미분은 질병입니다. 병들 때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병이 들면 죽음 시그널이 딱 떠오릅니다. 죽고 싶다, 병은 벌써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이정표입니다. 병은 절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게 아닙니다. 이사야 38장 보세요. 중년에 암에 걸렸던 히스기야가 병을 정의하는 것을 보세요. 병 걸린 사람, 음부로 내려간 사람, 영광의 빛을 잃는 사람은 하나님께 찬양 돌릴 수도 없고 하나님 얼굴을 뵈옵지도 못합니다. 죽으면 다시는 하나님 얼굴을 뵙지 못하는 영영한 이별입니다. 그래서 나는 죽기가 힘듭니다. 질병은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질병은 하나님 영광의 광채를 영영 볼 수 없는 아쉬움으로 떨어지는 것이고, 질병은 저주요, 비하나님 적인 것이고 하나님 통치의 부정적 여백입니다. 그래서 질병에 걸린 사람, 병든 사람, 그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미학적인 게 없습니다. 병 걸린 사람 자체가 매력적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병에 걸리면 매력이 사랍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도 죽고 나면 시신이 되어 식어버립니다. 죽음 질병은 하나님 영광과 정반대입니다. 반하나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이 말은 죽음 저편까지 가는 죽음과 그 너머까지 가는 동력을 가진 병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는 병이 아니라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하나님의 반전의 능력을 드러내는 그런 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이것을 순식간에 깨닫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탐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표적 때문에 유대인과 소진되는, 영혼을 피폐케 하는 갈등에 빠졌다가 표적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는, 세례요한의 진리에 참된 증언에 대해서 많은 위력을 맛보던 예수님이 다시 한 번 반전적인 발언을 한다는 것은 놀라운 겁니다. 이 표적이 이제 마지막 표적입니다. 이 때 이후로 다시 표적을 행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3장 15-20절에서 말한 그 병이 아니라 저주의 해면체로써의 병이 아니고 죽음으로 가는 시그널로써의 병이 아니라, 죽음에서 멈추는 병이 아니라, 죽음에서 멈춰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만드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환희 드러내는 병이 된다, 이것은 성령 안에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사는 사람만이 이런 기막힌 상상력을 복원시킬 수 있습니다. 이건 관점입니다. 아무라도 이렇게 말할 수 없고 아무 병에도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사로의 병에 대해서는 이 아들의 병, 내 친구의 병은 죽음 저 편까지 스토리를 가진 병이다, Never ending story를 가진 병이다, 하나님 영광을 가릴 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아들이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들됨을 만천하에 입증하는 사건으로써의 병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굉장히 반전으로 순식간에 예수님의 논리가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놓고 이틀 더 유하십니다. 이틀 더 유하시면서 나사로가 온전히 죽음을 경험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님께서는 몰래 귀띔을 듣고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고 있다가 제자들에게는 이틀 후에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을 호들갑스럽게 말씀하셔서 나사로가 병들었단다, 하지 않으시고 정보를 단계적으로 누설하셔서 나름대로 그걸 해석하셔서 온전히 그걸 장악한 후에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방금 유대에서 떠나왔는데, 유대 괄호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폭력적인 공안들이 설치는 곳으로 다시 가자, 이렇게 말하니까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10장 39절 상태를 말합니다. 9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이게 원래 낮 열두시간이 아니라, 낮은 모두 열두 시간으로 돼 있지 않느냐? 내가 지금 다니는 시간은 열두 시간으로 구성된 낮 시간이다, 낮 시간에 다니면 길을 흩뜨리지 않는다, 나와 함께 가면 어둠의 시간도 대낮처럼 밝아진다, 종교당국자들이 아무리 나를 돌로 치려할지라도 내가 있는 한 이 역사의 시점은 열두 시간 해가 비치는 낮 시간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공공연히 드러날 때는 낮입니다. 예수님 능력이 감춰져 있고 예수님이 내 삶에 함께 한다는 표적이 사라질 때는 밤입니다. 예수님은 대낮같은 밝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낼 겁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돌로 쳐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공안 당국자들의 죽음의 공포를 예수님도 극복하는 사건이 될 것이고, 또한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위태로운 사태에서 제자들 또한 죽음의 공포를 이겨야 하기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은 예수님 자신에게 하는 목회요, 제자들에게 하는 목회요, 그리고 예수님을 죽여 없앨 수 있다고 죽음의 절대적 힘을 믿는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시도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시간으로 예수님의 역동적 임재,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표적이 사방에 환히 비칠 때는 낮입니다. 그때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한다는 확신이 없거나 증거가 모자랄 때는 밤입니다. 그때는 실족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하는 질병,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경험하는 질병, 예수님의 사랑이 머무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병은 죽음에서 멈추는 병이 아니라 죽음 너머까지 가는, 죽음을 transcend 하는 초월하는 영광을 위한 병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에스겔 37장 12-14절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로마서 1장 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됨은 부활로 입증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됨을 입증하려면 우리가 부활해야 합니다. 우리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 죄를 뉘우치고 우리 죄를 정결케하시는 그 손길을 영접하고 우리가 손해보고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 때 부활하는 겁니다. 한국교회가 부활하려면 돈에 미쳐버린, 종교권력에 미쳐버린, 이 세상의 물질문명,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더러운 문화에 속박되어 사는 삶을 깨치고,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재미있는 드라마 같은 삶을 연출해주는 것이 부활입니다. <무한도전>보다 더 재미있는 수업시간, 교회공동체 오락이 필요합니다. 우리 숭실대 아이들이 강의평가에서 가끔 그런 걸 씁니다. 무한도전 보다 더 재미있는 수업시간, 20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게 참 행복합니다. 그런데 강의가 그래야 할 게 아니라 삶이 그래야 합니다. 우리 삶 전체가 남들이 만든 인위적인 가공된 이야기를 보고 맥이 빠지지 말고 우리 발자국 자체가 드라마 영화 속 주인공 같은 행동이어야 하고, 극적의미를 가진 매순간 의미로 가득 찬 삶을 사는 것이 부활하는 겁니다. 오늘날 부활은 풍성한 삶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만 풍성한 삶에 대한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풍성하지 않고 의로운 삶만 살면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풍성하지 않고 옳은 삶만 추구하면 절망감만 심어줍니다. 김회권 너는 그렇게 살아라, 절망감을 안겨주면 안 되고 풍성한 삶을 살면서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 의로운 삶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그래 너희는 지옥 가, 나는 의로운 삶을 살래, 약간 바리새인적 우월감으로 세상과 맞대결하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성령 충만한 삶은 고립된 삶도 아니고 따돌림 당하는 삶도 아니고 메마른 무교병을 씹어 먹는 것 같은 삶도 아니고 풍성한 게 있고 이 세상도 어떤 동아리에서 맛보지 못하는 재미가 있고 사람다운 삶이 느끼는 모든 건전한 욕구가 충족되는 공동체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가 있다는 걸 보여주지 못하는 한 진짜 우리 기독교가 인간 사회 모두를 신령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신앙인가를 믿게 만드는 데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공동체적 삶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날 죽음에서 멈추지 않는 우리 연약함, 질병은 요단 저편스러운 신령한 교제권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공동체 안에 강력하게 소속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일어나는 질병 파산 불행은 그 자체가 죽음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질병이다, 여기서 전제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계약적 결속감이 중요합니다. 계약적 결속감 자체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 안에 있는 자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것이 하나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의 결속 안에 있는 자에게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미신적인 두려움이 너무 많이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을 잘못하면 불행이 닥쳐올 때 두려운 겁니다. 예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의 질병을 보면서, 내 사랑과 죽음으로 가는 질병은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어, 그는 나의 사랑을 받고 있어, 하나님 아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 자가 병을 당했어, 논리적으로 생각해볼까? 하나님 사랑을 받고 있는 자가 병에 걸렸다면 논리적으로 이 병은 내 사랑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병이거나 내 사랑의 힘을 위력적으로 한층 더 크게 입증하는 병, 둘 중 하나겠죠? 예수님은 언제 이 병이 죽음으로 가는 병이 아님을 확신했습니까? 사랑의 불멸성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예수님과 나사로의 사랑이 너무 확고부동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나사로의 질병은 하나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질병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더 극적으로 증거하는 질병이 될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런 논리적인 확신이 나오는 겁니다. 성경을 풀 때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한 예수, 자기가 나사로에 대한 사랑의 진실성을 확신한 예수는 내 사랑하는 친구에게 일어난 이 불행은 절대로 저주가 아니고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런 내적 논리가 나왔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의 내적 논리, 확신은 갑자기 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밀접하게 신앙생활 하는 게 너무 중요하고 이런 반전의 확신을 창조하는 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평소에 기도생활을 해야 하고 평소에 하나님과 밀접한 동행을 해야 합니다. 가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성도에게 어떤 재난이 닥쳤을 때 목사인 저마저도 혹시 저 양반이, 제가 만일 사랑의 확신이 없거나 그분이 하나님과 견결한 사랑 속에 산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이 불행함을 당할 때 바리새인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닐까? 저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게 심판이 아닐까? 그런데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왜 예수님이 이렇게 확신했는가 알겠죠? 왜 이 병이 죽음으로 가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건지 알겠죠? 사랑의 진실성, 사랑의 확실성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왜 그럼 이틀 동안 유했습니까? 제자들에게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온전히 죽고 나서 고치는 것이 죽기 전에 고치는 것보다 능력을 변증법적으로 더 극적으로 완전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고쳐주는 것과 죽고 나서 살려주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위력적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로마 군병이 창으로 찌를 때 힘을 딱 주었더니 창이 부서지는 만화적인 승리가 났습니까, 삼일 만에 살아나는 게 더 낫습니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어야 하죠? 왜 우리가 죽어야 합니까? 우리가 죽음을 통과했을 때 내가 죽은 자처럼 방불된 상태에서 살아나는 것이 내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은 지 사흘 되고 죽은 지 나흘 된 그 극저점에 떨어지더라도 우리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무덤에 드러누워 있는 것처럼 식물인간 상태, 철두철미한 무기력 상태, 철두철미한 자기 모멸감, 이게 질병입니다. 질병에 걸리면 존재가 위축됩니다.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병, 총체적 존엄의 손상 위축입니다. 죽음만 생각하는 부조리한 경황, 내 자신이 죽은 자 처럼 느껴지는 식물인간적 무기력 상태, 굴러 떨어진 상태에 전락한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사랑을 기대할 수 있고 우리 하나님의 능력이 100% 구현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반전의 상상력은 다만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라는 전제조건이 될 때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존재의 위축감, 여러분 존엄성의 파괴 속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를 바라고,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반열 안에 여러분이 들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나사로 안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치명적인 저주를 보지 않고 하나님 영광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하나님 사랑이 너무 진실했고 정직했고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에 견결하게 속박되어 어떤 질병과 어떤 죄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 용기를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안식일 주일날 주님의 평화의 능력을 맛보는 축제의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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