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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노라-요한복음 11장 8-16절

by 【고동엽】 2022. 2. 13.

4 28일 주일설교2_요한복음 11 8-16 (우리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노라)

 

요한복음 11 8-16절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 종교 당국자들을 피해서 약간 위축되셔서 요단저편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10 40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세례 베풀던 무인지경 강가에 가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터를 잡고 공동체를 존속시켰던 곳으로 갔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 뜻으로 봐야 하느냐?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출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한 편이 되어서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과 일종의 대결을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세가 현저하게 위축되고 예루살렘 종교권력 당국자들과의 논쟁에서 힘을 소진하셔서 피신하신 건데, 일종의 레슬링에서 tag match 하는 양상입니다. 세례요한의 공동체가 있는 곳, 세례요한의 스승의 증언을 기억하고 있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공식적으로 데뷔시켰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남아 있는 공동체에 가서 그들에게 힘을 공급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42절이 이해가 됩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세례요한의 증언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이 증언을 해주었던 세례요한의 증언을 상기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요단 저편은 예수를 믿는 친예수 동아리가 있는 곳, 요단 이편은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 예수를 죽여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 예수는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이 볼 때 죽일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모든 제도권 종교권력자들이 볼 때 위험한 인물입니다. 일종의 내부고발자입니다. 종교가 하나님의 무지를 바탕으로 형성하는 이원론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천당, 천국, 영원한 삶, 이건 잘 모릅니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종교입니다.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후 보험적 성격으로 고급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아는 분입니다. 진짜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그쪽 사정을 다 아는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은 거기 가보지도 않았고 거기서 파송되지도 않았고 그냥 참칭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전매독점, 독과점을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유가재산을 파는 겁니다. 면죄부이죠. 성전에 헌금하면 구원 받는다고 하니까, 모든 제도종교는 영원한 삶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존속합니다. 아무리 종교인들이 부패해도 종교가 망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 안에 있는 형이상학적 무지, 인간 안에 있는 무시무시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타락한 사람에 대한 환멸과 실망보다 큽니다. 종교가 잘못됐다고 망합니까? 안 망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구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증이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실망보다 훨씬 큽니다. 부등식으로 말하면, 타락한 사람이 거기 출입하는데 또 가야 합니다. 그 말도 안 되는 통일교도 장사가 되는 겁니다. 남묘호렌게교 되죠. 천리교 도죠. 천리교가 얼마나 돈이 많아요. 수원에 있는 로타리 천리교에서 만든 겁니다. 웬만한 중소도시에 있는 로타리는 천리교에서 만든 겁니다. 천리교가 지금 학교까지 세웠습니다. 통일중공업 돈은 일본 청소년들이 껌 팔아서 만든 돈입니다. 꽃을 팔고 껌을 파는 노숙자들을 다 통일교 조직으로 흡수한 겁니다. 통일교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 돈을 하나도 안 줍니다. 노숙자 가운데 가서 노숙자들의 구역장이 돼서 그들 가운데 왕국을 이루라고 특명을 내립니다. 그래서 일본 통일교가 잘 되는 이유, 일본은 옴진리교도 잘 되지만 통일교도 잘 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 성업하는 겁니다. 종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무지, 진짜 참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성업하는, 성황하는 일종의 사업이라고 봐도 됩니다. 요즘 그런 게 있죠. 화성에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여행프로젝트, 그것과 똑같습니다.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데 4명 뽑는데 1만 명이 지원했습니다. 7개월 20일 만에 가는 우주선을 타고 화성산소캡슐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기로 한 사람들이 가는데, 4명을 뽑는데 1만 명이 왔습니다. 우리가 그런 겁니다. 진짜 천국에 대해서 모르고 하나님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일 거라고 하는 거짓 매뉴얼을 가지고 투자자를 모집하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제도종교권력입니다. 삼성화재나 보험회사는 80세 때 되면 돈 주잖아요. 그런데 안 줍니다. 천국에서 일괄정산 하잖아요. 그런데 만일 천국이 없으면 낸 만큼 손해입니다. 그래서 저는 헌금을 함부로 하지 말고 고아원에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향교회는 교회 아닙니다. 자기가 낸 헌금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내는 사람은 잘못이죠. 일단 교회가 빚을 내려고 하는 게 잘못됐습니다. 어떤 명분을 해도 빚을 내서 건물을 짓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사람 살리기도 힘든데 빚을 내서, 300 400 500억 천 억, 그렇게 빚내는 것 자체가 벌써 거의 사탄이라고 보면 됩니다. 완전 사탄이 아니고, 왜냐하면 사탄만이 생명을 위축시킵니다. 하나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합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그런 프로젝트를 구상합니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도의 살림살이를 민감하게 동정하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프로젝트를 가동하지 않고, 작정하라고 불 꺼놓고 통성기도 안 시킵니다. 불 꺼놓고 북을 치면서 통성기도 할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때 영이 임합니다. 그때 막 작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수로 5백만 원 쓸 것을 5천만 원 써서 평생 고생합니다. 소송이 붙어야 하는데, 그때는 내 정신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쓴 건 실제로 5백만 원인데 실수로 5천만 원이 된 겁니다, 4 5백만 원 돌려받아야 합니다. 그런 게 혹시 있으면 제가 검신 거의 안 받고 상담해 드립니다. 잘못된 헌금 돌려받는 건 신학자가 해야 합니다. 실제로 형이상학적 무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거짓말에 잘 속습니다. 그 모든 걸 일시에 폭로하여 참 하나님을 보여줘서 이 모든 거짓된 종교의 기초를 흔들어버린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죽여야 합니다.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 모든 제도권 종교는 예수님을 살려두면 안 됩니다. 요단 저편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극소수의 무리들이 있고 요단 이편에는 예수님을 죽여 없애야만 존재가 성립되는 종교당국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요단 이편 영토에 예수님의 친구였던 나사로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을 죽여 버리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내부고발자입니다. 내부 이탈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종교 유대교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중요합니다. 우리 적대진영에도 레지스탕스, 내부 그룹이 필요합니다. 우리와 내통하는, 가장 안 좋은 조직, 조폭은 해당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 직장이 매우 정의롭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직장이나 그런 곳에서 우리 성도가 필요합니다. ?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견결한 동맹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유대의 양반, 유대의 지주 또는 부농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가 죽었을 때 엄청난 사람이 문상이 옵니다. 이건 이 사람이 그냥 허접한 사람이 아니라 굉장히 유력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력한 유대의 지주 또는 부농의 집에서 공경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청지가 구사의 아내 요안나로부터 돈을 받았고요. 예수님은 실제로 나사로로부터 지원 받았습니다. 이 말은 이 땅에 존립하는 나사로급 부자들, 나사로급 유력자들, 이 사람은 예수님의 동맹 친구가 됩니다. 이때 친구라는 말은 동맹이라는 말입니다. 그냥 사적 친구가 아닙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 할 때 우리와 하나님 나라의 대의명분으로 견고하게 결속된 친구라는 뜻입니다. 동기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친구가 사적친구가 아니라 이런 가치관을 공유하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유대종교권력자들의 교구 안에서 내통하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친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종교 권력자들의 교구 안에서도 당신의 친구를 가지고 동맹자를 가지고 동역자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했던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전부 다 예수님과 강력한 사랑의 결속을 경험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다수파의 어둠의 질서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요단 저편의 소수파가 대치하고 있는 정국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죽인다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깜짝 놀랄 겁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이느냐? 참되신 하나님 계시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그걸 내 마음속에서 지워버리면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예수님의 요구를 묵살하면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계속 쉼 없는 간단없는 멋진 계시를 주시고 내 삶을 재조정하시려고 나에게 회개를 요청했는데 그 음성을 못들은 체 하고 음성을 묵살하면 예수님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통째로 계시하면서 지금 빛의 천사처럼 가장하는 자들의 기초를 들추어 흔들어내는 내부 demolition, internal demolition, 안에서부터 토대를 붕괴시키는 예수님 같은 존재를 싫어합니다. 소크라테스도 그런 운명으로 죽었습니다. 삼성을 현대를 LG SK를 내부에서 건들면서 부장급 집사 한 명이 나와서 모든 비자금을 공개하고, 모든 기업체 회개합시다, 라고 하면 죽는 겁니다. 어떤 큰 교회, 영락교회나 순복음교회나 사랑의 교회나 소망교회 같은 집사님이 회개장부를 들고 벌벌 떨면서 교회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기자회견 하면 그야말로 예수님 같은 존재입니다. 대학가에서 교수 한 명이 논문 표절하는 걸 고발하면서 자기도 양심 고백하면서 우리 이렇게 가짜 박사를 만들면 되겠습니까? 회개하면 일종의 그것도 내부고발자입니다. 우리 모두 전부 다 자기가 있는 견고해 보이는 안정돼 보이는 구조와 토대를 뒤흔드는 진리의 영, 이것이 예수님이고, 그런 진리의 영과 정면으로 영접하여 굴복하지 않고 그걸 묵살하면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을 죽이는 자의 진영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이죠. 나사로는 예수님을 살리고 공궤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서포트하는 오아시스였습니다. 나사로의 가정이 참 중요합니다.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집이라는 것, 오늘날 우리는 집이라고 하면 아파트를 생각하죠. 25년짜리 날림공사, 25년짜리 시멘트 천막이 아파트입니다. 25년 부터는 부활을 확신해서 매일 천국에서 만날 생각을 하고 자야 하는 아파트, 그걸 가지고 팔고 구속하는 것이 소위 말해 주택경제입니다. 그 아파트에서는 외부 손님을 들일 수 없죠. 아파트 구조는 철두철미하게 손님 배재적입니다. 옛날에 제가 살던 집, 우리는 부농이 아니고 중농이었습니다. 논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냥 30마지기에서 40마지기, 땅 좀 있는, 사랑채가 크게 있었습니다. 안채가 있었고 사랑채가 있었는데 사랑채는 반드시 손님이 있었습니다. 시골에서는 도보장수가 많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재워줘야 하는데 아버지가 이장을 하셨기 꼭 우리 집에 옵니다. 모든 거지들도 우리 집에 오게 되고, 우리 어머니와 우리 가족 모두는 이 거지들과 식사를 하는데 머슴아저씨들과 거지는 거의 같은 급입니다. 저도 머슴아저씨들이 좋아해서, 그렇게 했던 이유가 시골에서는 여백의 공간이 일단 됩니다. 우리 안채에서 살지만 바깥에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충분히 충돌이 없습니다. 이런 구조를 가지면 나그네를 대접하는 게 정말 쉽습니다. 제가 유학을 했던 작은 도시에서도 어떤 프린스턴 대학교수가 방 하나를 아예 손님용으로 내어놓습니다. 지금도 자기 집을 한쪽은 비어놓는 집사람이 많답니다. 지금 서울에도, <파수대>라는 여호와증인의 소식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서울에 사는 여호와증인이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여호와증인 집에 가서 기숙하면서 엄청난 환대를 받고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게 여호와증인도 그렇고, 워치만 리 라고 하는 지방교회라고 하는 준이단 공동체도 그렇게 합니다. 초대교회는 당연히 그렇게 했고, 요한이서 요한삼서 히브리서 등등은 반드시 A라는 지역에서 B라는 지역에 갈 때 추천서를 가져가면 환대를 해주었습니다. 친절문화 환대문화 책임지는 문화, 이것이 집에서 하는 겁니다. 옛날에 경주 최부자, 최준혁, 경주 최부자 집안에 사랑채에 가장 많이 숙식을 했던 나그네가 200 300명입니다. 지주 한명 집에 200 300명 나그네가 무료로 먹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생원과 진사에 합격한 합격증만 있었으면 선비대접을 받고 노자를 받았습니다. 옛날 우리나라 지주들은 선비가 오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볼 때 조선 양반들이 이동할 때 반드시 추천서와 그리고 돈을 주었습니다. 이게 집입니다. 어떤 집에 간다는 말은 돈까지 여비를 받으면서 간다, 평양에 간다, 황해도 해주에서 양반집에 들렀다가 박연폭포 보고 서경덕도 만나고 가는 겁니다. 오늘날 집이라는 것이 나사로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런 집이 없는 이유는 아파트 때문입니다. 아파트는 왜? 투기 목적입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아름다운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일산 정발산 밑에 고급 주택이 있습니다. 외국에 가면 그런 주택이 보통 집입니다. 10억이 넘을 거예요. 그게 25만 불입니다. 제일 좋은 건 50만 유로입니다. 독일에서 보니까 일산 정발산 밑에서 보았던 엄청나게 큰 집에 50만 유로, 8억입니다. 일산 집보다 훨씬 좋은 것이 사과나무 너댓 그루가 있기 때문에 굉장히 넓습니다. 그런 멋진 정원을 걸어가면 남의 집이라도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이미 그 마을에 살면 남의 집이 아닙니다. 2009년에 그곳을 늘 다니면서 대학을 다닌 겁니다. 아침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부자가 좋은 집에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택이 아름다워야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항상 친구를 영접하고 오고가는 나그네와 선비를 영접하고 집을 비워놓고, 이런 걸 기독교인들이라도 해야 하는데, 기독교인마저도 아파트에 삽니다. 사고팔고 남는 돈으로 헌금하려고 하는 것인지, 뭐하려고 하는지 모르지만 아파트에 살면서 투기를 일삼는 것 자체가 벌써 도덕적으로 구린내가 나는 겁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형통하게 됐다 하더라도 저 할 수 있지만 안하잖아요. 저 돈은 많습니다. 왜 안합니까? 나까지 하면 세상이 너무 힘들어집니다. 실제로 우리 같은 사람이 왜 못하겠습니까? 3억 정도 빌려서 판교 밑에 하나 샀다가 2년 만에 5억 짜리 만듭니다. 물론 저는 하고 싶지만 제 아내가 반대합니다. 전부 다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안 하는 의로운 부자들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동물적인 맘모니즘에 빠지면 원래 가정을 이뤄야 할 기쁨 절정이 없어져 버립니다. 가정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는 겁니다. 제 어머니가 저더러 그럽니다. 제가 목사로 살면서 성자처럼 살려고 하니까, 네가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네가 왜 이렇게 살까? 집도 없으면서, 60이 다 돼 가는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마 어렸을 때 우리가 거지들에 밥을 많이 줬기 때문에 네가 목사가 된 것 같다, 이렇게 민중 신학적인 해석을 합니다.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진짜 많은 거지들과 도보장수들을 섬겼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장집이었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고 우리 마을의 문화였습니다. 토지 평사리 너머 악양이라는 곳이 있죠. 화개 평사리 악양이 다 붙어 있습니다. 조영남이 <화개장터>라는 노래를 불렀죠? 그 화개가 바로 영남과 호남이 만나는 곳입니다. 악양은 정말 인심이 좋아서 악양은 10년간 거지가 먹고 살 수 있다, ? 악양은 호남 영남의 평야지대라 먹을 게 많기 때문에 악양에 들어가면 모든 거지도 살아남는다,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환대의 문화가 나사로의 집입니다. 나사로의 집과 같은 교회, 예수님을 무조건 공궤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하면서 사랑을 먹고 나누는 멋진 나사로 같은 부자, 나사로 같은 유력자가 요단 이편에 필요하다는 겁니다. 요단 이편에 살면서 이 세상의 냉혹함에 대해서 너무 진절머리 치는 냉소에 안 빠지려면 사랑과 친절을 예기치 않게 순간순간 맛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자를 미워하지 않으려면 부자 중에서 가끔은 경주 최부자 같이 나사로처럼 욥처럼 예기치 않게 선한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돈의 궁극적인 운명은 사랑이었다는 걸 확신시켜줘야 합니다. 돈이 언제 부활합니까? 가난한 이웃의 굴뚝에 연기를 피우게 함으로 돈은 드디어 부활하여 천사가 됩니다. 그런데 탐욕과 쾌락과 독점과 배타의 손아귀에 돈이 들어가는 순간 돈은 악마가 됩니다. 돈은 천사가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나사로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요단 이편에서 종교권력자들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요단 저편에서 믿었던 세례요한의 그 믿음을 이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 친구를 깨우러 죽음의 땅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틀이나 유한 걸 보면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한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친구 동지의 죽음 앞에서 이틀 동안 유하면서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친구를 깨우러 가기로 결단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것 보십시오. 돌로 쳐 죽이려는 곳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주 상식적으로 위험한 일이지만 사랑의 불멸성, 하나님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하여,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친구의 죽음을 돌파하여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가려고 했던 겁니다. 아주 상식적인 선량한 사람의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틀 동안 숙고와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결단하는, 숙고와 결단이 함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위험한 길이라도 사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발을 내딛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험한 길이라는 걸 제자들도 눈치를 챘습니다. 16절을 보면 도마라는 사람이 돌발 발언을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가야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자 디두모라는 도마가 돌발 발언을 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얼마나 가기 싫었으면 허풍을 떨면서까지 자기를 다그칩니까? 이 말은 지금 시국이 매우 중대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겁니다. 중대한 단계에서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이 발언은 이 당시 예수님께서 가면 다시는 살아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겁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예수님이 왜 망설였을까? 첫째 예수님 자신이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죽음, 예수님이 아예 죽지 않으려고 죽지 않을 길을 생각했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손에 돌로 쳐 죽임 당하기를 원하지 않고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공개적 형벌을 받아 죽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로마총독 빌라도가 관여한 방법으로 죽기를 원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그냥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예언자의 죽음으로 본다면 억울한 예언자의 죽음이 되지만 로마제국이 예수님을 죽이면 로마제국의 폭력 앞에 죽어가는 피압박민족, 유대인 전체의 운명을 대신하여 죽은 것이 되기 때문에 즉 유대인의 왕으로 죽은 것이기 때문에 민족전체의 양심을 동시에 깨울 수 있는 죽음을 죽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하면 일종의 종교권력 자에 의해서 죽임당한 억울하게 죽은 예언자가 되지만 로마제국의 형틀에 갇혀 죽으면 객관적으로 힘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죽는 것을 두려워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죽음을 두려워해서 피한 겁니다. 죽음 자체에 대해서 공포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 아니고 지금 이 시점에서 죽는 방식을 걱정하셔서 피했습니다. 그래서 주눅이 들었습니다. 주눅이 들었을 때 세례요한의 제자들로부터 하나님 아들이라는 증언을 되받아 들으면서 확신이 들고, 예수님은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 그 열기로 예수님 자신도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또 다시 죽음의 땅을 향해서 정조준하면서 걸어갔다는 뜻입니다. 이틀 동안 머무는 사이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밝은 계시의 태양이 있는 때, 하나님의 아들임을 결정적으로 드러낼 시간이다, 내가 나사로의 죽음의 땅으로 걸어가는 이 발걸음은 밤의 시간이 아니라 실족하는 시간, 내가 잡히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아들임을 밝히 드러내는 역설적인 반전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낮 열두시의 시간임을 감지하면서 뚜벅뚜벅 죽음의 땅으로 걸어가는 거죠. 자기 자신이 정돈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두 번째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에 쌓여있기 때문에 죽음의 세력을 정면으로 공격해 죽음 자체를 분쇄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의 죽음공포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틀 동안 숙고를 거듭하고 제자들을 설득합니다. 세 번째로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에게 죽음 자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종말이 될 수 없고 죽음도 하나님의 사랑, 진리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죽음의 폭력 사정권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배후에 있으면서 진리를 죽이려고 하고 하나님 아들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정사와 권세, 어둠의 권세들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죽일 수 없어,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죽일 수 없어, 어떤 악마적인 권세도 하나님 자체의 말씀을 죽일 수는 없어, 그걸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땅으로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그래서 다음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극적고백이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복잡한 생각의 갈래를 정리하시고 유대 땅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우리 예수님은 친구를 깨우러 동지를 깨우러 위험을 무릅쓰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친구의 죽음 앞에서 우는 사람입니다. 죽음의 폭력성 앞에 위축되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살해와 적대의 위협 앞에 주눅이 들어 피했다가 사람들의 격려와 지지를 받아서 간신히 용기를 내시는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불확실성과 확신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생각의 갈래를 정리하기 위해서 숙고를 거듭한 후에 그는 마침내 결단에 이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제자들의 동요와 좌절감 실족을 걱정해서 이틀을 더 머물러 주시는 배려를 베풀어주시는 우정의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을 응시하면서 자기에게 죽음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여정을 친구 때문에 감히 걸어가는 아주 멋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곧 찾아올 밤의 실족을 걱정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낮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시는 때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음과 완판 맞대결을 피하지 않고 죽음의 심장을 향해 정조준하면서 달려가시는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선하신 주님을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를 수밖에 멋있는 분입니다. 주님 만세, 만세라고 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 사모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이십니다. 친구 때문에 위험한 땅까지 손해 보는 땅까지 기꺼이 되돌아갈 수 있는 계산을 초월하는 이해타산을 뛰어넘는 결단의 사람들이 넘치는 공동체 되기를, 저는 우리 교우들이 가정을 개방하고 은근하게 무제한적 포용과 사랑과 경청을 일삼는 나사로의 집안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동기적 결속감이 맺어진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단 이편에서 예루살렘의 냉혈한적인 종교권력자들이 호시탐탐 예수님을 살해하려고 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살리려고 예수님을 보듬으려고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예수님과 영적 교통을 하는 해방구 같은 우리 하나님의 공동체, 가정 공동체가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랑 속에 있던 사람의 죽음은 죽음이 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확신 속에 사랑의 불멸성 속에 붙들린 사람의 죽음은 반드시 부활로 응답받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영광에 이르는 죽음입니다. 죽음이 영광을 잉태하였습니다. 그런 죽음을 우리는 죽어야겠죠. 누가 이런 죽음을 죽습니까? 주님과 동기적 결속감에 있는 가정, 주님과 동기적 결속관계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죽음은 죽음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사건이 아니라 죽음의 무능력, 죽음의 한계를 드러내고 생명의 왕노릇 하는 죽음입니다. 우리 모두의 죽음이 생명의 왕노릇함을 입증하는 죽음, 생명이 죽음보다 더 세다는 걸 드러내는 죽음을 죽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친구가 병들었을 때 그런 친구가 죽었을 때 그런 친구의 죽음 앞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십니다. 에스겔 37 11-14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한즉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죽은 자를 깨우시는 그 음성이 바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이 올라간 그 자리, 여러분이 생매장 당한 그 자리, 여러분이 처참하게 굴러 떨어진 무덤 같은 음습한 좌절의 현장에 와서 불러주셔서 뚜벅뚜벅 여러분을 깨우러 오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깨우러 오십니다. 우리 식어버린 열정을 깨우러 오시고 우리의 냉담한 냉소주의를 깨우러 오시고 시체처럼 경직된 우리 사고를 깨우러 오셔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반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깨우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주님이 주일날 우리를 방문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깨우러 오신 걸 찬미하고 영접하는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은 요단 이편에서 죽음을 살고 있는 우리를 깨우러 위험한 길로 오십니다.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오십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모든 주일날 주님의 동기들이 일어나는, 나사로가 주님 앞에서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게 도와주시고, 죽은 지 나흘 된 친구들도 일어나서 뚜벅뚜벅 부활소생을 맛보는 날이 되게 도와주소서.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죽은 지 나흘 된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소생시키는 역사를 일으켜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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