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주일설교1부_요한복음 11장 8-16절 (우리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지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요단 저편은 아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동아리였을 것입니다.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특정한 무인지경의 광야에 가서 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동아리, 공동체에서 거했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느냐?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왜냐하면 그곳은 옛날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공식으로 데뷔시켰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례요한의 증거의 힘이 효력을 끼치는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요단 이편에는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세력이 맹위를 떨치는 곳이고, 요단 저편에는 세례요한의 증거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요단 이편과 저편을 왕래하면서 삽니다. 가향공동체는 요단 저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직장생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아무도 기독교신앙을 지지해주지 않는, 기독교 신앙을 냉소하고 기독교 신앙 스스로를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작태들,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 즉 종교권력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곳에서, 실제로 예수님의 본원적 가치를 살해하려고 하는 종교권력자들, 예수님을 살해한다는 말, 누가 감히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그 시도는 영구적으로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은 살해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나님과 일반 무지한 민중 사이를 가로채면서 민중의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이용하여 거짓된 사술로 제도적 종교를 유지하는 사람들, 종교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전모를 드러내면서 제사장 계급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계시의 태양이신 예수님을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여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요단 저편에서는 세례요한의 증거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고, 요단 이편에서는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절하고 배척하여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고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고 똑같은 영적위도선상에 있거든요. 요단 저편은 예루살렘과 지도를 보면 위도가 똑같아요. 어떻게 똑같은 동시대의 시간적 위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요단이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홈그라운드에서 일어나지 않고 예루살렘 종교 당국자들과 5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베다니입니다. 베다니, 예루살렘 유대종교권력 당국자들이 맹위를 떨치는 곳에 있는 예수님의 해방구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의 세력 한복판에 있는 빛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사로 같은 사람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요단 이편에서도 요단 저편과 호흡 가능한 영적인 진지가 필요합니다. 가정이 기독교 복음의 전파에 가장 핵심적인 진지입니다. 왜? 가정은 기독교 진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환대가 있고 사랑이 있고 무조건적 포용이 있습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먹여주는 영육 간에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일이 가정의 일입니다. 공장은 사람을 살리지 않고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지만 가정은 무조건 환대가 있고 포용이 있고 먹여 살리는 일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집안은 바로 요단 저편과 내통하는 요단 이편의 공동체입니다. 이걸 우리는 아가페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가향교회나 모든 교회는 요단 이편에 있는 나사로 집안처럼 환대 공동체, 지지공동체, 하나님 나라 열망을 되살리는 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우리 지난번에 장로님 가정이 나사로 집안 역할을 했죠. 우리 권사님은 잠도 한숨 못 주무시고 그날 설교 시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졸았습니다. 제 설교는 숭실대학생만 졸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권사님까지 졸게 하는 설교입니다. 얼마나 설교가 힘들었으면 졸까요? 그런데 우리 권사님을 그렇게 지치게 한 게 사랑의 환대입니다. 그 사랑의 환대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스스로 사랑의 환대, 하나님께 감응되어서 한 겁니다. 권사님의 집에 쇄도하여 유린한 27명의 젊은이들은 나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의 악당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악당들입니다. 이들은 잘못된 게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 지금 더 큰 사랑의 난적께서 계시기 때문에 당분간 초청하지 못합니다. 6월 2일에 초청하려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우리 집안을 사단의 난적으로 힘을 다 빼놓습니다. 27명의 청년보다 더 힘이 듭니다. 83세노인 한 명은 블랙홀입니다. 모든 며느리의 죽음이고, 우리 어머니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머니 자존심 센 여자입니다. 절대로 며느리에게 폐 안 끼치게 도와주소서, 아멘, 합니다. 기도 세게 하면 좀 나아집니다. 요단 저편과 이편 사이에 똑같은 영적 latitude, 위도에 있지만 나사로 집안이 왜 중요한가? 재속성도집안, 세속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 진지가 되는 가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집도 83-94년은 정말 해방구였습니다.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출입했고 우리집안 전체가 서울대 지성인들의 아지트처럼 늘 모여서 식사했습니다. 우리가 프린스턴 유학 가서 7년 내내 그렇게 했습니다. 유학생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석사를 마친 사람 중에서 하은이 엄마한테 식사를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게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걸 즐기기도 했지만 기독교적 사랑의 열정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순식간에 경험하는 아가페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 하나가 바로 서면 하나님 나라 영토가 굉장히 넓어집니다. 그런데 나사로 집안이 바로 그런 집안입니다. 요단강 이편에 있는 사랑의 진지의 총책임자가 죽은 겁니다. 예수님은 제도권 종교권력자, 예수님을 죽여 버리려고 했던, 하나님을 일시에 전모를 드러내서 세상 사람들의 무지몽매를 깨뜨려서 거짓된 종교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만드는 태양 같은 계시의 아들 예수님이 이쪽으로 오면 어둠이 빛을 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빛은 요단 저편으로 가서 휴식을 했습니다. 정확하게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성지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친구가 죽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단 이편에 있는 진지가 무너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제자들이 부활의 능력을 맛보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너무나 날카로운 충돌을 예상했기 때문에 지체했을 수도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돌아가야 할 이유를 암시하는 본문이 나옵니다. 9절은 언뜻 보면 별 것처럼 안 보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실제로 예루살렘, 이스라엘 전체가 빛이 없으면 캄캄해서 걷지를 못합니다. 실족한다는 말은 높낮이가 아주 심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실족하기 좋은 곳입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 드러내는 표적과 이적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환히 드러내는 표적의 시간,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당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시간이 낮 열두시간입니다. 낮 12시간 안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듯이 예수님 자신이 강력한 태양의 계시처럼 표적을 통하여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일시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능력발출의 시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됨을 믿는 일에서 넘어지지 않고 실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계시의 태양이신 예수님이 무능력자가 되고 전능의 포기자가 되고 속수무책인 변신을 거듭하면 실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가서 매를 맞고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을 때 실족했습니다. 이번 나사로의 죽음사건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아들됨의 계시를 가장 강력하게 계시할, 초일등성 계시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를 받고 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지금부터 가장 강렬한 낮의 사건에서 어둠의 시간으로 교체되는 과도기 입구 사건, 가장 강렬한 낮에서 어둠이 슬슬 시작되는 정점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계시라고 봐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 제도권 종교권력과 날카로운 충돌을 감내해야 할 순간은 분명은 위기의 순간이고 죽음의 순간이지만, 돌로 치려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위험한 시간이지만 또한 동시에 밝게 계시처럼 빛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받았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돌아갑니다. 11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문맥을 잘 보세요. 예수님 자신이 계시가 밝게 빛나는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받고 친구를 깨우러 가기로 결단을 합니다. 이 결단이 왜 중요한 결단인지 제자들에게 하는 말을 보면 압니다. 16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 분위기가 이번에 돌아가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8절과 16절 두 구절을 종합해볼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죽음의 땅으로 스스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어떤 역설적인 병치가 일어납니까? 죽음이 일어난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죽음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사건을 계시의 태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7가지 표적 중에서 6가지 표적을 행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7가지의 표적이 나옵니다. 7가지 표적 중에서 6가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표적은 계시의 태양, 낮 시간에서 밤 시간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 표적을 행하고 나면 다시는 계시의 밝은 태양은 없는 시점에 이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이 당신이 행했던 6가지 표적을 완성시키는 표적의 완성, 일곱 째 표적임을 암시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이게 너무 복잡한가요? 저는 이렇게 해석하면서 상당히 감동을 받았어요. 옛날에는 제가 이렇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약간 억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굉장히 논리적으로 맞는데, 이렇게 하면 굉장히 신선하고 놀랍기 때문에 이게 뭔가 억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여러 번 이걸 설교를 할까 말까, 그런데 해도 된다는 계시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지금 옛날에는 깨닫지 못했던 걸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요한복음 강해가 지금까지 했던 강해보다 제일 좋은 강해입니다. 5-6년 전에도 저기 교회에서도 했는데 이렇게 만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8절과 16절을 연계시키지 못했습니다. 돌로 치려하고 죽으러 가자고 하는 상황에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종교적 살해위협의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강하고 단호한 확신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강하고 단호한 확신은 죽음의 권세에 시달렸던 예수님 자기에게 목회를 하기 위해서, 내 자신이 죽음의 공포를 피하여 요단 저편으로 피신했던, 내 자신이 움츠렸던 생명보존에 대한 위협감을 극복하려고 하는 자신에게 하는 목회입니다. 두 번째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제자들에 대한 목회, 실제로 물리적 죽음과 영적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는 진지가 허물어진 요단 이편에 사랑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목회, 세 가지가 다 있습니다. 네 번째 예루살렘 종교당국자에 대한 목회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죽일 수 있고 내가 여러분에게 죽임당해 죽은 지 나흘 될 수 있지만 죽음이 내 복음을 막지 못한다, 죽음이 하나님 나라를 막을 수 없다, 예루살렘 당국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당국자들 배후에 있는 죽음의 권세, 죽여 버려, 죽음이 끝이야, 죽음 자체로 인간의 모든 선을 삼키려 하는 악마 사탄 죄, 이런 궁극적 우주적 세력들에 대한 하나의 목회가 됩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있어? 아니 하나님 사랑은 죽음도 사단도 마귀도 끊을 수 없어, 하나님 사랑은 난공불패야, 하나님 사랑은 죽자마자 부활하는 거야, 왜? 하나님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한 목회, 제자들에 대한 목회, 예루살렘 당국자들에 대한 목회, 악마적 죽음의 권세 자체에 대한 목회, 네 가지가 다 있는 발걸음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우리친구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범하게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곤경을 도와주려고, 죽은 친구를 살려주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젊은이였다, 친구를 살리려 죽음의 땅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평범하고 매력적인 인간 예수를 봐야 합니다. 친구라는 말은 예수님이 썼던 말 중에서 여기가 유일할 겁니다. 우리 친구라는 말은 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가 공적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제자공동체 모두와 나사로가 동맹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친구는 언약관계 또는 동맹관계입니다. 언약관계 또는 동맹관계라는 말은 신실하게 예수님을 도와줬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개인적인 호불호의 감정 때문에 예수님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속적으로 재정적으로 도왔고, 사랑의 환대를 베풀었고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그 집에서 잤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런 환대문화, 가정을 방문하면서 2박 3일씩 교제하는 문화가 회복돼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런데 아파트 구조에서는 이것이 힘듭니다. 아침에도 오면서 말했습니다. 모든 부자 교우들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합니다. 장로님부터 집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서 장로님이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그다음 윤구 형제가 나은 것 같고요. 집을 지어야 환대를 하는데, 화장실 하나 쓰는 아파트에서는, 전쟁통 정도 되면 그것도 괜찮습니다만, 일상생활에서는 화장실 쓸 때 줄서면서 힘들어 합니다. 굉장히 공동체적 결속이 아니면 헤쳐 나갈 수 없는 파국적 문명위기감이 올 때는 그런 것도 괜찮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방이 있는 옛날 구조가 정말 좋았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도 안채가 있고 사랑채가 있었습니다. 그 사랑채는 기와집으로 돼 있고 안채는 초가집으로 돼 있는데, 사랑방은 아버지 집과 머슴방과 손님내방객, 세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항상 어린 시절 손님들이 와 있었습니다. 제가 어머니 심부름으로 밥상을 들고 막걸리를 엄청 사다 날랐습니다. 사랑에 온 손님들 때문에요. 그것이 1960년대 70년대까지 가능했습니다. 행상객들이 그렇게 우리 집을 찾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제일 많이 한 것이 그들에 대한 환대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가 성직자된 것을, 그때 내가 거지들을 많이 먹인 것 때문에 그런가? 혼자 이렇게 민중 신학적인 착상을 하십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일 잘 한 것은 숱한 밥을 했다는 것,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도보행상들에 굉장히 자비로웠습니다. 저도 머슴 아저씨들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쉬웠습니다. 집이 그렇게 되면 가능한데 아파트 20, 30평 가지고는 힘듭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가 여인숙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농토를 가져야 하고 교회가 일종의 숙소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공동체적 친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 우리 가정과 교제했던 아주 유명한 크리스천 지질학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집에 항상 예수님의 침대를 놓았습니다. 지층에 침대가 하나 있고, 보스턴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옥성득이라는 친구를 소개했습니다. 제 친구가 그 침대에서 잤습니다. 이분들은 서로 오면 여인숙에 재우지 않고 친절하게 가정에 재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여호와증인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증인은 가정을 다 개방합니다. 삼육 안식일교회와 여호와증인은 지금도 집에서 잡니다. 호텔에서 안자고, 여호와증인 기록에 보면 한국 여호와증인들이 출장을 갔는데 프랑크푸르트 여호와증인들이 재워줘서 감동적인 간증을 하는 이야기가 회지에 실렸습니다. <파수대>에, 우리가 이단한테 배울게 많습니다. 안식교는 이단이 아닙니다. 고집이 좀 센 사람들입니다. 고집이 세면 이단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조심해야 합니다. 안식일교는 감사원 감사에서 기독교정신이 가장 완벽하게 살아 있는 대학입니다. 안식교 삼육대학의 직원들이 가장 존중받고 있다고 설문조사에서 대답했습니다. 청소미화원들이요. 제일 나쁜 데가 연대입니다. 실제로 깨닫는 것은 가정을 개방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지로 들이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그 사이에 싹텄던 그 친구,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오늘 날 친구의 죽음에서도 눈물로 통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친구가 한 명 죽어도 모여서 옛날 그 친구 이야기 하다가, 잘 지내? 골프 공 잘 들어가? 쓸 데 없는 통속적인 대화를 하다가 갑니다. 실제로 너무 억울하게 죽습니다.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죽음, 병원 냉동실에서 얼었다가 죽는 겁니다. 얼마나 불쌍해요? 울어주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삶과 죽음의 순간이 이렇게 종료되는 것은 너무 비종교적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친구를 깨우러 갔습니다. 여기서 참 예수님이 아름다운 분이다, 의리 있으시다, 죽음을 무릅쓰고 가셨던 상식적이고도 아주 감동적인 사랑의 사랑, 예수님께서 깨우러 간다니까 제자들이 가기 싫으니까 그럼 낫겠네요, 잠들었으면, 예수님이 약간 짜증이 나서, 야 죽었어, 긴장어린 대화가 되면서 바로 갑니다. 여기서 도마가 튀는 게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약간 선동적으로 바뀝니다. 여기가 굉장히 남자들 특유의 남자담론입니다. 안 가려고 빼다가 갑자기 극으로 튀는 겁니다. 도마, 베드로, 도마가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두 번이나 어색한 순간에 이렇게 합니다. 옆구리에 손 넣어 보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이 남자 도마 사는 법, 극으로 튐, 난 안 봤다, 옆구리 손 넣어주기 전에는 못 믿겠다, 넣으라고 하니까 아이고 내 주여, 도마의 익살 극단 남자 특유의 허세들 남자언어의 허세성,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모든 죽음의 공포를 곰삭으면서 치열하게 대결하는데 도마는 허풍의 언어를 정면대결하지 못하고 나중에 엄청 빨리 도망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슬슬 도망가는데 도마는 흔적 없이, 도마는 나중에 전설에 의하면 인도로 갑니다. 조 추첨을 하는데, 안드레 이런 사람들은 이쪽으로 빠지는데 도마는 인도에 가는 사람으로 뽑힙니다. 인도교회는 도마교회입니다. 그건 상당히 신빙성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단호한 결심입니다. 가는 일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숙고 끝에 갑시다, 우리 예수님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다가 많은 생각의 갈래가 헷갈리다가 단호하게 결정합니다. 숙고와 고뇌를 거친 결단의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도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다가 가기로 결단합니다. 이때 이 긴장스러운 분위기를 익살로 처리하는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는 무엇일까요? 친구를 살리러 죽음의 길로 가는 삶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친구 때문에 죽음의 땅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도마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주와 함께 죽으러 가는 것, 이것도 기독교죠. 익살과 해학이 뒤섞여 있는 이 본문에서 기독교는 죽음의 땅에 매여 있는 친구를 깨우러 가는 것이다, 해외 선교는 무엇일까? 요단 이편, 죽음의 세력에게 붙들려 있는 친구에게 부활의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과 정면으로 맞대결할 때 죽음의 검투사의 칼에 맞을 때 부활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격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의 땅으로 정면으로 조우하고 죽음을 돌파하고 가야합니까? 비껴가야 합니까? 돌파하고 가면서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기독교다, 무엇이 죽음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세력이 죽음입니다. 무엇이 부활일까요? 하나님 사랑의 불패성, 실패할 수 없음, 하나님 사랑의 영속성, 하나님 사랑의 영원성, 하나님 사랑의 전능성을 믿으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이 궁극적인 질서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이 죽음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음을 믿었기 때문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믿었습니다. 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확신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우리 모두 죽음의 땅에 붙들려 있는 친구를 깨우러 가는 선교 지향적 삶, 요단 이편의 영적인 편안함에서 요단 저편의 광풍으로 내려가는 삶, 이걸 우리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이 열두시간이며, 하나님 사랑의 불멸성 불패성을 믿어야만 죽음의 땅까지 걸어갈 수 있겠죠. 요단 저편에서는 하나님이 잘 믿어집니다. 요단 저편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많겠지만 요단 이편에서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적고 소수이며 성령의 내적 감동으로 추동된 발걸음을 띈 사람만이 요단 저편에서 이편으로 건너올 수 있다는 것, 그걸 믿으시길 바랍니다. 요단 저편에서 요단 이편으로 오는 선교지향적인 삶, 사랑의 공세성, 이걸 입증하는 삶을 우리 모두 다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제도나 이런 것보다 인위적이지 않은 사랑의 교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합니다. 대화하고 차 한 잔 마시고, 꿈이 무엇인지 말하고 눈물을 나누고 불안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나의 낭패감과 나의 열등감을 나눌 수 있는 hospitality, 이것이 바로 나사로의 집안이 아니었겠나? 나사로의 집은 궁지에 몰렸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끊임없이 인생을 소진했던 이 가정은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거죠. 우리 모두 우리 교회가 나사로의 집안처럼 되기를 바라고 나사로의 집안은 일시적으로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히지만 부활의 능력인 주님인 나사로의 집에 오셔서 생명의 권세를 더 한껏, 낮 열두시의 태양처럼 밝히 비추는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요단 저편과 이편을 왕래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는 공동체로 유배당하는 것 같은 세상을 삽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우리 친구가 죽음의 땅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친구를 살리러 위험한 땅으로 걸어가는 주님을 보면서 상식적이고 희귀한 사랑을 봅니다. 우리는 친구가 없는 시대에 삽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가줘야 할 친구가 없는 우정의 황무지에 살고 있습니다. 환대의 황무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지극히 소박한 사랑이 은근히 있는 교회가 되게 도와주시고 은근히 배려하고 은근히 존경하고 은근히 지원하는 나사로와 주님의 관계 언약적 우정의 관계가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기죽이고 위축되게 만드는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발도 못 붙이도록 냉정하고도 가혹한 각축의 현장에서, 자기 존엄성을 유지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주님을 여전히 믿을 수 있도록 용기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은 하나님 사랑의 불멸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죽음의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죽여 버린다는 말 한 마디에 해고 시켜버린다는 말 한마디에, 잘라 버린다는 말 한마디에 양심이 쪼그라들고 이성이 마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잠시 그들은 사형선고로 우리 양심을 마비시키고 우리 이성을 절단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 사랑은 패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의 능력은 죽음에 매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생명에 접붙인 바 되어 이 세상에서 자존심 유지하며 살게 도와주시고, 하나님 이 세상에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성취하여 살게 하여 주소서. 실업상태를 면치 못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문을 열어주시고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임을 확신시켜 주소서. 생업이 흔들리는 아들딸들을 건져주시고 내 사랑이 너를 붙들어주리라, 확신을 맛보게 도와주소서. 이 나라 이 민족 신앙도 없고 돈도 없고 인맥도 없고 아무런 살아갈 지지대가 없는 진짜 버림받은 무신론자가 많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누가 살립니까? 우리교회가 무조건적 환대로 집을 지어놓고 유리하는 빈민을 들이며, 농작지를 경작하며 먹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가향공동체가 기숙사를 농장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국교회 모두가 나그네를 집으로 들이는 환대의 집을 운영하게 하시고 농작지를 갖게 도와주셔서 이 종말 문명파괴의 때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지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예수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요단 저편은 아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동아리였을 것입니다. ‘다시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특정한 무인지경의 광야에 가서 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동아리, 공동체에서 거했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느냐?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왜냐하면 그곳은 옛날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공식으로 데뷔시켰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례요한의 증거의 힘이 효력을 끼치는 곳이었다는 뜻입니다. 요단 이편에는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세력이 맹위를 떨치는 곳이고, 요단 저편에는 세례요한의 증거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요단 이편과 저편을 왕래하면서 삽니다. 가향공동체는 요단 저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직장생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아무도 기독교신앙을 지지해주지 않는, 기독교 신앙을 냉소하고 기독교 신앙 스스로를 허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작태들,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 즉 종교권력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곳에서, 실제로 예수님의 본원적 가치를 살해하려고 하는 종교권력자들, 예수님을 살해한다는 말, 누가 감히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그 시도는 영구적으로 항상 현재진행형입니다. 예수님은 살해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나님과 일반 무지한 민중 사이를 가로채면서 민중의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이용하여 거짓된 사술로 제도적 종교를 유지하는 사람들, 종교권력자들은 하나님의 전모를 드러내면서 제사장 계급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계시의 태양이신 예수님을 죽여 버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죽여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요단 저편에서는 세례요한의 증거가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고, 요단 이편에서는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절하고 배척하여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고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고 똑같은 영적위도선상에 있거든요. 요단 저편은 예루살렘과 지도를 보면 위도가 똑같아요. 어떻게 똑같은 동시대의 시간적 위도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요단이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홈그라운드에서 일어나지 않고 예루살렘 종교 당국자들과 5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베다니입니다. 베다니, 예루살렘 유대종교권력 당국자들이 맹위를 떨치는 곳에 있는 예수님의 해방구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의 세력 한복판에 있는 빛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사로 같은 사람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요단 이편에서도 요단 저편과 호흡 가능한 영적인 진지가 필요합니다. 가정이 기독교 복음의 전파에 가장 핵심적인 진지입니다. 왜? 가정은 기독교 진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환대가 있고 사랑이 있고 무조건적 포용이 있습니다. 식사를 할 수 있는 먹여주는 영육 간에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일이 가정의 일입니다. 공장은 사람을 살리지 않고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지만 가정은 무조건 환대가 있고 포용이 있고 먹여 살리는 일이 있습니다. 나사로의 집안은 바로 요단 저편과 내통하는 요단 이편의 공동체입니다. 이걸 우리는 아가페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가향교회나 모든 교회는 요단 이편에 있는 나사로 집안처럼 환대 공동체, 지지공동체, 하나님 나라 열망을 되살리는 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우리 지난번에 장로님 가정이 나사로 집안 역할을 했죠. 우리 권사님은 잠도 한숨 못 주무시고 그날 설교 시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졸았습니다. 제 설교는 숭실대학생만 졸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권사님까지 졸게 하는 설교입니다. 얼마나 설교가 힘들었으면 졸까요? 그런데 우리 권사님을 그렇게 지치게 한 게 사랑의 환대입니다. 그 사랑의 환대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스스로 사랑의 환대, 하나님께 감응되어서 한 겁니다. 권사님의 집에 쇄도하여 유린한 27명의 젊은이들은 나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사랑의 악당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악당들입니다. 이들은 잘못된 게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 지금 더 큰 사랑의 난적께서 계시기 때문에 당분간 초청하지 못합니다. 6월 2일에 초청하려고 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우리 집안을 사단의 난적으로 힘을 다 빼놓습니다. 27명의 청년보다 더 힘이 듭니다. 83세노인 한 명은 블랙홀입니다. 모든 며느리의 죽음이고, 우리 어머니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어머니 자존심 센 여자입니다. 절대로 며느리에게 폐 안 끼치게 도와주소서, 아멘, 합니다. 기도 세게 하면 좀 나아집니다. 요단 저편과 이편 사이에 똑같은 영적 latitude, 위도에 있지만 나사로 집안이 왜 중요한가? 재속성도집안, 세속에 있지만 하나님 나라 진지가 되는 가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집도 83-94년은 정말 해방구였습니다. 너무 많은 젊은이들이 출입했고 우리집안 전체가 서울대 지성인들의 아지트처럼 늘 모여서 식사했습니다. 우리가 프린스턴 유학 가서 7년 내내 그렇게 했습니다. 유학생을 먹이고 재웠습니다. 프린스턴에서 석사를 마친 사람 중에서 하은이 엄마한테 식사를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대게 우리 집에 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걸 즐기기도 했지만 기독교적 사랑의 열정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순식간에 경험하는 아가페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정 하나가 바로 서면 하나님 나라 영토가 굉장히 넓어집니다. 그런데 나사로 집안이 바로 그런 집안입니다. 요단강 이편에 있는 사랑의 진지의 총책임자가 죽은 겁니다. 예수님은 제도권 종교권력자, 예수님을 죽여 버리려고 했던, 하나님을 일시에 전모를 드러내서 세상 사람들의 무지몽매를 깨뜨려서 거짓된 종교가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만드는 태양 같은 계시의 아들 예수님이 이쪽으로 오면 어둠이 빛을 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빛은 요단 저편으로 가서 휴식을 했습니다. 정확하게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성지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친구가 죽은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요단 이편에 있는 진지가 무너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제자들이 부활의 능력을 맛보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너무나 날카로운 충돌을 예상했기 때문에 지체했을 수도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돌아가야 할 이유를 암시하는 본문이 나옵니다. 9절은 언뜻 보면 별 것처럼 안 보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실제로 예루살렘, 이스라엘 전체가 빛이 없으면 캄캄해서 걷지를 못합니다. 실족한다는 말은 높낮이가 아주 심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실족하기 좋은 곳입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 드러내는 표적과 이적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임을 환히 드러내는 표적의 시간,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 당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시간이 낮 열두시간입니다. 낮 12시간 안에 다니면 실족하지 않듯이 예수님 자신이 강력한 태양의 계시처럼 표적을 통하여 모든 어둠의 세력들을 일시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능력발출의 시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됨을 믿는 일에서 넘어지지 않고 실족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계시의 태양이신 예수님이 무능력자가 되고 전능의 포기자가 되고 속수무책인 변신을 거듭하면 실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가서 매를 맞고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을 때 실족했습니다. 이번 나사로의 죽음사건은 예수님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아들됨의 계시를 가장 강력하게 계시할, 초일등성 계시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를 받고 돌아가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지금부터 가장 강렬한 낮의 사건에서 어둠의 시간으로 교체되는 과도기 입구 사건, 가장 강렬한 낮에서 어둠이 슬슬 시작되는 정점에 이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계시라고 봐야 합니다.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 제도권 종교권력과 날카로운 충돌을 감내해야 할 순간은 분명은 위기의 순간이고 죽음의 순간이지만, 돌로 치려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갈 위험한 시간이지만 또한 동시에 밝게 계시처럼 빛나는 사건이 일어날 것을 암시받았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돌아갑니다. 11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 문맥을 잘 보세요. 예수님 자신이 계시가 밝게 빛나는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받고 친구를 깨우러 가기로 결단을 합니다. 이 결단이 왜 중요한 결단인지 제자들에게 하는 말을 보면 압니다. 16절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 분위기가 이번에 돌아가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8절과 16절 두 구절을 종합해볼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죽음의 땅으로 스스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어떤 역설적인 병치가 일어납니까? 죽음이 일어난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죽음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사건을 계시의 태양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7가지 표적 중에서 6가지 표적을 행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7가지의 표적이 나옵니다. 7가지 표적 중에서 6가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 표적은 계시의 태양, 낮 시간에서 밤 시간으로 들어가는 입구, 이 표적을 행하고 나면 다시는 계시의 밝은 태양은 없는 시점에 이 사건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이 당신이 행했던 6가지 표적을 완성시키는 표적의 완성, 일곱 째 표적임을 암시받았다고 볼 수 있어요. 이게 너무 복잡한가요? 저는 이렇게 해석하면서 상당히 감동을 받았어요. 옛날에는 제가 이렇게 깨닫지 못했습니다. 약간 억지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굉장히 논리적으로 맞는데, 이렇게 하면 굉장히 신선하고 놀랍기 때문에 이게 뭔가 억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여러 번 이걸 설교를 할까 말까, 그런데 해도 된다는 계시의 태양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지금 옛날에는 깨닫지 못했던 걸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요한복음 강해가 지금까지 했던 강해보다 제일 좋은 강해입니다. 5-6년 전에도 저기 교회에서도 했는데 이렇게 만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8절과 16절을 연계시키지 못했습니다. 돌로 치려하고 죽으러 가자고 하는 상황에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에 종교적 살해위협의 현장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강하고 단호한 확신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강하고 단호한 확신은 죽음의 권세에 시달렸던 예수님 자기에게 목회를 하기 위해서, 내 자신이 죽음의 공포를 피하여 요단 저편으로 피신했던, 내 자신이 움츠렸던 생명보존에 대한 위협감을 극복하려고 하는 자신에게 하는 목회입니다. 두 번째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던 제자들에 대한 목회, 실제로 물리적 죽음과 영적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는 진지가 허물어진 요단 이편에 사랑공동체를 회복하려는 목회, 세 가지가 다 있습니다. 네 번째 예루살렘 종교당국자에 대한 목회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죽일 수 있고 내가 여러분에게 죽임당해 죽은 지 나흘 될 수 있지만 죽음이 내 복음을 막지 못한다, 죽음이 하나님 나라를 막을 수 없다, 예루살렘 당국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당국자들 배후에 있는 죽음의 권세, 죽여 버려, 죽음이 끝이야, 죽음 자체로 인간의 모든 선을 삼키려 하는 악마 사탄 죄, 이런 궁극적 우주적 세력들에 대한 하나의 목회가 됩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길 수 있어? 아니 하나님 사랑은 죽음도 사단도 마귀도 끊을 수 없어, 하나님 사랑은 난공불패야, 하나님 사랑은 죽자마자 부활하는 거야, 왜? 하나님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한 목회, 제자들에 대한 목회, 예루살렘 당국자들에 대한 목회, 악마적 죽음의 권세 자체에 대한 목회, 네 가지가 다 있는 발걸음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우리친구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범하게 예수님을 인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곤경을 도와주려고, 죽은 친구를 살려주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젊은이였다, 친구를 살리려 죽음의 땅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평범하고 매력적인 인간 예수를 봐야 합니다. 친구라는 말은 예수님이 썼던 말 중에서 여기가 유일할 겁니다. 우리 친구라는 말은 예수님과 나사로의 관계가 공적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제자공동체 모두와 나사로가 동맹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친구는 언약관계 또는 동맹관계입니다. 언약관계 또는 동맹관계라는 말은 신실하게 예수님을 도와줬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개인적인 호불호의 감정 때문에 예수님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지속적으로 재정적으로 도왔고, 사랑의 환대를 베풀었고 예루살렘에 올 때마다 그 집에서 잤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런 환대문화, 가정을 방문하면서 2박 3일씩 교제하는 문화가 회복돼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런데 아파트 구조에서는 이것이 힘듭니다. 아침에도 오면서 말했습니다. 모든 부자 교우들은 집을 짓고 살아야 합니다. 장로님부터 집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중에서 장로님이 우리 중에서 제일 나은 것 같습니다. 그다음 윤구 형제가 나은 것 같고요. 집을 지어야 환대를 하는데, 화장실 하나 쓰는 아파트에서는, 전쟁통 정도 되면 그것도 괜찮습니다만, 일상생활에서는 화장실 쓸 때 줄서면서 힘들어 합니다. 굉장히 공동체적 결속이 아니면 헤쳐 나갈 수 없는 파국적 문명위기감이 올 때는 그런 것도 괜찮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방이 있는 옛날 구조가 정말 좋았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도 안채가 있고 사랑채가 있었습니다. 그 사랑채는 기와집으로 돼 있고 안채는 초가집으로 돼 있는데, 사랑방은 아버지 집과 머슴방과 손님내방객, 세 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항상 어린 시절 손님들이 와 있었습니다. 제가 어머니 심부름으로 밥상을 들고 막걸리를 엄청 사다 날랐습니다. 사랑에 온 손님들 때문에요. 그것이 1960년대 70년대까지 가능했습니다. 행상객들이 그렇게 우리 집을 찾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제일 많이 한 것이 그들에 대한 환대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가 성직자된 것을, 그때 내가 거지들을 많이 먹인 것 때문에 그런가? 혼자 이렇게 민중 신학적인 착상을 하십니다. 저희 어머니가 제일 잘 한 것은 숱한 밥을 했다는 것, 저희 어머니 아버지가 도보행상들에 굉장히 자비로웠습니다. 저도 머슴 아저씨들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쉬웠습니다. 집이 그렇게 되면 가능한데 아파트 20, 30평 가지고는 힘듭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가 여인숙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가 농토를 가져야 하고 교회가 일종의 숙소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공동체적 친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교에 우리 가정과 교제했던 아주 유명한 크리스천 지질학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기 집에 항상 예수님의 침대를 놓았습니다. 지층에 침대가 하나 있고, 보스턴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옥성득이라는 친구를 소개했습니다. 제 친구가 그 침대에서 잤습니다. 이분들은 서로 오면 여인숙에 재우지 않고 친절하게 가정에 재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여호와증인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증인은 가정을 다 개방합니다. 삼육 안식일교회와 여호와증인은 지금도 집에서 잡니다. 호텔에서 안자고, 여호와증인 기록에 보면 한국 여호와증인들이 출장을 갔는데 프랑크푸르트 여호와증인들이 재워줘서 감동적인 간증을 하는 이야기가 회지에 실렸습니다. <파수대>에, 우리가 이단한테 배울게 많습니다. 안식교는 이단이 아닙니다. 고집이 좀 센 사람들입니다. 고집이 세면 이단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걸 조심해야 합니다. 안식일교는 감사원 감사에서 기독교정신이 가장 완벽하게 살아 있는 대학입니다. 안식교 삼육대학의 직원들이 가장 존중받고 있다고 설문조사에서 대답했습니다. 청소미화원들이요. 제일 나쁜 데가 연대입니다. 실제로 깨닫는 것은 가정을 개방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지로 들이는 것은 정말 중요하고 그 사이에 싹텄던 그 친구,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오늘 날 친구의 죽음에서도 눈물로 통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친구가 한 명 죽어도 모여서 옛날 그 친구 이야기 하다가, 잘 지내? 골프 공 잘 들어가? 쓸 데 없는 통속적인 대화를 하다가 갑니다. 실제로 너무 억울하게 죽습니다.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죽음, 병원 냉동실에서 얼었다가 죽는 겁니다. 얼마나 불쌍해요? 울어주기를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삶과 죽음의 순간이 이렇게 종료되는 것은 너무 비종교적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친구를 깨우러 갔습니다. 여기서 참 예수님이 아름다운 분이다, 의리 있으시다, 죽음을 무릅쓰고 가셨던 상식적이고도 아주 감동적인 사랑의 사랑, 예수님께서 깨우러 간다니까 제자들이 가기 싫으니까 그럼 낫겠네요, 잠들었으면, 예수님이 약간 짜증이 나서, 야 죽었어, 긴장어린 대화가 되면서 바로 갑니다. 여기서 도마가 튀는 게 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약간 선동적으로 바뀝니다. 여기가 굉장히 남자들 특유의 남자담론입니다. 안 가려고 빼다가 갑자기 극으로 튀는 겁니다. 도마, 베드로, 도마가 이렇게 요한복음에서 두 번이나 어색한 순간에 이렇게 합니다. 옆구리에 손 넣어 보겠다고 고집을 피우더니, 이 남자 도마 사는 법, 극으로 튐, 난 안 봤다, 옆구리 손 넣어주기 전에는 못 믿겠다, 넣으라고 하니까 아이고 내 주여, 도마의 익살 극단 남자 특유의 허세들 남자언어의 허세성,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모든 죽음의 공포를 곰삭으면서 치열하게 대결하는데 도마는 허풍의 언어를 정면대결하지 못하고 나중에 엄청 빨리 도망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슬슬 도망가는데 도마는 흔적 없이, 도마는 나중에 전설에 의하면 인도로 갑니다. 조 추첨을 하는데, 안드레 이런 사람들은 이쪽으로 빠지는데 도마는 인도에 가는 사람으로 뽑힙니다. 인도교회는 도마교회입니다. 그건 상당히 신빙성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단호한 결심입니다. 가는 일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숙고 끝에 갑시다, 우리 예수님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다가 많은 생각의 갈래가 헷갈리다가 단호하게 결정합니다. 숙고와 고뇌를 거친 결단의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도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하다가 가기로 결단합니다. 이때 이 긴장스러운 분위기를 익살로 처리하는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독교는 무엇일까요? 친구를 살리러 죽음의 길로 가는 삶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친구 때문에 죽음의 땅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도마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주와 함께 죽으러 가는 것, 이것도 기독교죠. 익살과 해학이 뒤섞여 있는 이 본문에서 기독교는 죽음의 땅에 매여 있는 친구를 깨우러 가는 것이다, 해외 선교는 무엇일까? 요단 이편, 죽음의 세력에게 붙들려 있는 친구에게 부활의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과 정면으로 맞대결할 때 죽음의 검투사의 칼에 맞을 때 부활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공격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의 땅으로 정면으로 조우하고 죽음을 돌파하고 가야합니까? 비껴가야 합니까? 돌파하고 가면서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기독교다, 무엇이 죽음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세력이 죽음입니다. 무엇이 부활일까요? 하나님 사랑의 불패성, 실패할 수 없음, 하나님 사랑의 영속성, 하나님 사랑의 영원성, 하나님 사랑의 전능성을 믿으면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이 궁극적인 질서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이 죽음에 의해서 파괴될 수 없음을 믿었기 때문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믿었습니다. 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의 확신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우리 모두 죽음의 땅에 붙들려 있는 친구를 깨우러 가는 선교 지향적 삶, 요단 이편의 영적인 편안함에서 요단 저편의 광풍으로 내려가는 삶, 이걸 우리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이 열두시간이며, 하나님 사랑의 불멸성 불패성을 믿어야만 죽음의 땅까지 걸어갈 수 있겠죠. 요단 저편에서는 하나님이 잘 믿어집니다. 요단 저편에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많겠지만 요단 이편에서는 하나님 믿는 사람이 적고 소수이며 성령의 내적 감동으로 추동된 발걸음을 띈 사람만이 요단 저편에서 이편으로 건너올 수 있다는 것, 그걸 믿으시길 바랍니다. 요단 저편에서 요단 이편으로 오는 선교지향적인 삶, 사랑의 공세성, 이걸 입증하는 삶을 우리 모두 다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제도나 이런 것보다 인위적이지 않은 사랑의 교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합니다. 대화하고 차 한 잔 마시고, 꿈이 무엇인지 말하고 눈물을 나누고 불안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나의 낭패감과 나의 열등감을 나눌 수 있는 hospitality, 이것이 바로 나사로의 집안이 아니었겠나? 나사로의 집은 궁지에 몰렸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끊임없이 인생을 소진했던 이 가정은 부활의 능력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거죠. 우리 모두 우리 교회가 나사로의 집안처럼 되기를 바라고 나사로의 집안은 일시적으로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히지만 부활의 능력인 주님인 나사로의 집에 오셔서 생명의 권세를 더 한껏, 낮 열두시의 태양처럼 밝히 비추는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요단 저편과 이편을 왕래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없는 공동체로 유배당하는 것 같은 세상을 삽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우리 친구가 죽음의 땅을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친구를 살리러 위험한 땅으로 걸어가는 주님을 보면서 상식적이고 희귀한 사랑을 봅니다. 우리는 친구가 없는 시대에 삽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가줘야 할 친구가 없는 우정의 황무지에 살고 있습니다. 환대의 황무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가 지극히 소박한 사랑이 은근히 있는 교회가 되게 도와주시고 은근히 배려하고 은근히 존경하고 은근히 지원하는 나사로와 주님의 관계 언약적 우정의 관계가 일어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봉헌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기죽이고 위축되게 만드는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발도 못 붙이도록 냉정하고도 가혹한 각축의 현장에서, 자기 존엄성을 유지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주님을 여전히 믿을 수 있도록 용기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세상은 하나님 사랑의 불멸성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야 할 텐데 죽음의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죽여 버린다는 말 한 마디에 해고 시켜버린다는 말 한마디에, 잘라 버린다는 말 한마디에 양심이 쪼그라들고 이성이 마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잠시 그들은 사형선고로 우리 양심을 마비시키고 우리 이성을 절단시킬 수 있지만 하나님 사랑은 패배할 수 없고 하나님의 위대한 생명의 능력은 죽음에 매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생명에 접붙인 바 되어 이 세상에서 자존심 유지하며 살게 도와주시고, 하나님 이 세상에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성취하여 살게 하여 주소서. 실업상태를 면치 못하면서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이 많습니다. 하나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에게 문을 열어주시고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임을 확신시켜 주소서. 생업이 흔들리는 아들딸들을 건져주시고 내 사랑이 너를 붙들어주리라, 확신을 맛보게 도와주소서. 이 나라 이 민족 신앙도 없고 돈도 없고 인맥도 없고 아무런 살아갈 지지대가 없는 진짜 버림받은 무신론자가 많습니다. 하나님 그들을 누가 살립니까? 우리교회가 무조건적 환대로 집을 지어놓고 유리하는 빈민을 들이며, 농작지를 경작하며 먹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가향공동체가 기숙사를 농장을 가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국교회 모두가 나그네를 집으로 들이는 환대의 집을 운영하게 하시고 농작지를 갖게 도와주셔서 이 종말 문명파괴의 때를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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