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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0장 34-42절

by 【고동엽】 2022. 2. 13.

4 14일 주일설교 2_요한복음 10 34-42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

 

핵심구절은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3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하는 말꼬투리를 잡고 종교권력자들이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부르는 말투, 당당함, 이런 것들이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걸 아시고 적극 변호하십니다.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은 사도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로마서 8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유대교와 종교권력자들과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는 하나님은 두려워하면서 무서워하는 종처럼 행동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무서워하는 겁니다. 누가 심리적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히느냐? 이 세상에 상속자 또는 아버지로부터 험악한 대우를 많이 받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한 번도 자기를 긍정해주는 말을 듣지 못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사나움이 드러납니다. 금요일밤 제 아내와 오랜만에 사순절이 끝나 석 달 정도 돼서 영화를 봤습니다. 보지 않으려고 하는 아내를 설득해서 영화를 봤습니다. 원래 제목은 <울버린> SF 영화, 지구의 운명에 대해서 걱정이 많은 그 영화를 보려고 했습니다. 하여튼 좀 더 빨리 시작한 영화가 <파파로티>였습니다. <파파로티>를 보면서 예기치 않게 눈물을 흘렸는데 영화구조가 신문에서 읽었던 것과 전혀 다른 감동이 있었습니다. 대구에 조폭으로 살아가는 한 고아, 예술적 성악에 특이한 재능을 가진 이 고아가 김천예고에 한 선생님을 만나 거듭난 이야기입니다. 제가 철철 눈물이 흘렀는데 원래 눈물을 흘리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정호 너는 잘 될 거야, 너는 파파로티가 아니라 이정호가 될 거야, 이정호다운 음성으로 이정호다운 성악가가 될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제가 할머니랑 살았는데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아무도 오지 않더라고요, 저를 살려준 사람은 상수형 중간보스였고, 그 중간보스 형 도움으로 대구 조폭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조폭이란 말은 안 씁니다. 형님들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수습해준 곳은 그곳밖에 없었대요.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곳, 이게 우석훈이 말한 <88만원세대>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지금 20대를 따뜻하게 맞아주는 곳은 조직폭력배와 다단계 판매업체 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늘 날 20대를 지금 너무 냉혹하게 대우합니다. 고용할 수 있음에도 고용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비자금을 가지고도 고용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특혜와 국민이 만든 국채은행급 금융으로 엄청난 부를 늘린 대기업, 지금은 다국적 기업이 됐습니다. 국민기업이 아닙니다. 아무리 삼성이 돈을 많이 벌어도 우리에게 오는 trickle down effect, 낙숫물 떨어지는 효과가 없습니다. ? 다국적 기업이 됐으므로, 그 기업들은 전부 다 우리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만든 은행으로 큰 겁니다. 그들은 11%의 고용을 책임지면서 88%의 고용을 책임지는 중소기업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냉혹함입니다. 이런 냉혹함을 많이 경험하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나워지고 조폭스러운 야만성으로 자기를 단련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자신 안에 두려움의 영이 가득 찬 사람은 폭군적인 하나님과 폭군적인 아버지와 폭군적인 목사 밑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겁니다. 폭군은 상급에는 인색하고 징벌에는 풍부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 번도 절대적 자기 긍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파괴적인 코멘트를 끊임없이 듣고 자라면 내 마음에 작은 조폭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이 인정에 굶주린 사람은 조직폭력배지만 사람취급을 유일하게 해 주는 그 조직에 몸을 담게 되고 칼로 사람을 찌르는 일을 하게 됩니다. 너무 역설적입니다. 냉혹한 운명의 질서에는 인정머리가 하나도 없고 야만의 질서에는 인정이 살아 있는 엄청난 역설이 이 영화에 나옵니다. 저는 처음에 영화배우가 노래를 부르는 줄 알고 갔다 와서 계속 <네순 도르마>를 찾아서 들었는데 보니까 강요셉이 불렀던 거고, 실제 영화주인공은 한양대 성악과 김호중이라는 성악가입니다. 두려움의 영, 종교 감정에 아주 열악한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분으로 여기지 않고 아바 아버지, 너무 다정한 아버지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엄마 아빠가 얼마나 놀라운 가정교육을 시켰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집안 전체가 엄청난 사랑을 경험할 만큼 물질적 조건이 저는 탁월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돈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상하심 사랑을 경험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예수님은 갈릴리의 풍부한 곡창지대에서 컸습니다. 예수님이 컸던 갈릴리는 땅이 척박하지 않습니다. 가장 비옥한 땅입니다. 갈릴리는 지형이 아열대지형입니다. 아열대 갈릴리는 온갖 옥토와 야생의 숲들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새들이 평화롭게 정답게 공중을 나는 것을 보았고, 새들에 관한 오랜 신학적 신앙적 묵상이 있었습니다. 그다음 갈릴리 농민들의 친절을 오랫동안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가 성령 받으면 우주적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한 사랑을 마치 도스토예프스키가 러시아의 농민들에게서 기독교의 원형을 본 것과 똑같습니다. 갈릴리적인 농민들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랑을 엄청 경험하신 겁니다. 이건 그동안 신학자들이 주목하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저항성에 많은 초점을 뒀는데 지금은 다행히 예수님이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 된 이유는 갈릴리 농민들의 토착적 자생사랑능력이 있었을 거라 봅니다. 저는 이 후자 쪽에 많은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갈릴리에서 축제를 벌이고 음식을 나눠먹는 걸 어렸을 때 경험하지 못했었다면 그가 그렇게 잔치 분위기를 내면서 먹고 마시는 즐거운 축제를 멋있게 이끌 능력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렸을 때 음식을 먹고 나누는 것이 몸에 밴, 갈릴리적 이스라엘 자유농민 안에서 넘쳐났던 자애를 많이 경험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예수님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꿈꿀 수 있는 겁니다. 성 어거스틴이 밀라노에서 이집트 수도사들의 공동생활을 먼저 봤습니다.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집트 수도사들의 공동생활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암브로시우스의 신령하고 감화력 넘치는 설교에 충격을 받았고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생각났고 요한복음이 생각났고 플라톤의 철학들의 철학 등이 자기에게 총합적인 영향을 끼쳐서 하나님을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 밀라노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거룩한 수도사들의 삶에 대해서 충격이 있었어요. 우리가 한 번은 준이상적인 공동체를 경험해야만 실제로 신학적 상상력이 꽃이 핀다는 겁니다. 저는 ESF라는 작은 선교단체에서 50명도 안 되는 데서 12년간 공동체를 경험했어요. 형제들과 같이 잠을 잡니다. 제 제자들과 함께 자취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 소박한 생활을 장가가기 전까지 많이 했고 결혼하고 나서도 많은 식구들을 우리 집에 불러다 보통 20, 30명씩 밥을 먹었습니다. 제 아내가 증인입니다. 87년부터 밥을 하기 시작해서 나는 밥을 하러 태어났다, 돈도 없이 밥을 엄청 했습니다. 제 아내가 별로 고생스런 표정이 없기 때문에 고생을 안 한 걸로 아는데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항상 사람이 넘쳤습니다. 잔치입니다. 운동을 같이 했고 등산을 같이 했고 지리산을 같이 올랐고 치악산을 같이 올랐습니다. 농구를 같이 했고 탁구를 같이 했습니다. 이게 공동체 생활입니다. 일주일에 나흘 이상 같이 다녔습니다. 공동체생활을 한 번 하고 나니까 이게 대안이라는 생각이 약간 들었습니다. 그다음 제가 일산두레교회를 개척하면서 공동체가 좋은 걸 경험했습니다. 예배가 살아있는 공동체를 경험하고 예배 때마다 제가 은혜를 받아요. 성도들의 기도를 듣는 순간 설교를 하러 올라가는 순간 제 마음이 뜨거워져서 올라갑니다. 4년 내내 일산두레교회 목회할 때마다 저 뒤에서 기도를 듣는 순간 제 마음이 뜨거워져서 올라가니까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후임자를 구하지 못해서 학교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후임목사를 못 구해서 내가 목회해야 하니까 숭실대학교에 사표를 던졌습니다. 극적으로 또 어떤 분이 안 하겠다는 분이 목사님을 하겠다고 와서 제가 학교에 다시 돌아가게 됐습니다. 공동체에 대한 선량한 경험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선량한 이해를 증가시키는데 나쁜 공동체를 많이 경험하면 마음에 쓴 뿌리가 생겨서 가시 돋친 냉소쟁이가 돼 버립니다. 좋은 교회에 오래 다니지 않은 사람과 사귀면 크게 좌우됩니다. 하는 말마다 두려운 말을 터트리기 때문에, 나쁜 교회를 오래 다니면 내가 심판의 세월을 경험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쁜 교회 목사 경험은 내가 심판 아래 있다, 나쁜 성도들과 인생이 엮었다면 심판 받는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교회를 다닌다, 내가 은총을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너무 따뜻한 놀라운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자생적이고 내재적인 상상력이 자라서 그리고 영감을 받은 겁니다. 그게 예수님입니다. 내가 좋은 마을에서 살아야 하고 좋은 교회에서 살아야 하고 경치가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집도 없는 사람이, 저는 셋방살이지만 집은 항상 좋은 데서 삽니다. 그것이 제 신학과 신앙, 하나님에 대한 찬미를 북돋아오기 때문입니다. 한강하구에서 새떼를 보면서 출근하는 것을 누가 나한테서 빼앗는다면 저는 아마 황폐해질 겁니다. 북한 장사정포가 저를 노려보는 걸 압니다. 북한 대포동 군부대가 다 보입니다. 대포동군부대에서 장사정포가 제 머리를 겨냥한다 할지라도 임진강과 조항에서 37km 행주대교까지 한강수교와 생태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정말 아름다워요. 너무 멋있는 곳, 남한강 구리에서 덕소에서 춘천까지 가는 엄청난 멋진 도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전 세계에서 제가 다녀본 나라 중에서 의암 춘천까지 가는 그 멋진 도로, 세계에서 이런 멋진 도로가 있을까? 너무 환상적입니다. 물론 사찰단 간판이 빠져야 합니다. 이게 빠져야 자연의 은총을 완성됩니다. 이것 때문에 다 손상됐습니다. 제가 북한산에 대해서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북한산은 다 철거됐습니다. 북한산의 사찰단 간판 다 보상받고 자연 회복됐습니다. 우리에게 자생적인 아름다움, 하나님이 주신 물리 토착적 환경에서 아름다움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 천국도 경험하고 천국도 꿈꿀 수 있습니다. 이건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스위스에 살면서 꿈꿨던 천국관과 똑같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에서 시인이 나오고 강렬한 햇빛에서 화가가 나오고 멋있는 숲의 바람 속에서 음악이 나와요. 게르만의 음악은 숲의 바람에서 나온 것이고 스페인의 모딜리아니 피카소는 강렬한 햇빛에서 나왔어요. 영국 사람들이 모든 잡기를 만들어냈죠. 영국이 왜 축구나 크리켓을 만들어냈을까요? 낮에 해가 밤 10시까지 해가 떠 있어 지루하니까 연극을 만들었어요. 낮 시간 4시간 동안의 긴 연극은 바로 영국의 연극입니다. 모든 스포츠 영국에서 나온 겁니다. 물론 영국은 국가 전체가 골프장입니다. 막대기만 들면 전부 다 골프장이 돼요. 낮은 구릉지, 우리가 자연 물리 토착적 환경이 아름답지 못하면 천국에 대한 꿈도 안 생기고 하나님의 자애로움도 경험하지 못하고, 아열대지방 따뜻한 갈릴리 호수를 보면서 그렇게 멋진 아름다운 생애를 보낸 예수님이 천국을 꿈꾸고 양자의 영을 받고 부르짖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는 그걸 기억해야 해요. 예수님은 부정적인 역사만 경험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권력자들은 왜 두려움에 사로잡혔느냐? 하나님이 우리가 충분히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국민 모두가 거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의 평균점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를 혼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국민전체의 거룩감성, 거룩지수를 떨어뜨리는 사람들을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창녀와 세리가 메시아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암적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워합니다. 신학적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세리와 창녀만큼 더러운 자가 없었다면 벌써 메시아가 오셨을 텐데, 이것이 유대인의 신학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애로움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고 메시아가 우리를 진노한다는 두려운 감정 때문에 자기를 옥죄는 강압적인 가학성 심리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을 때는 천인무공의 신뢰와 연합 속에서 불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거리는 0입니다. 거리가 0일 경우 큰 질량과 작은 질량이 합해질 경우 엄청난 무한대의 에너지가 나옵니다. 거리가 없다는 말은 엄청난 영향, 우리가 거리가 없고 성령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면 공동체는 엄청난 힘을 갖는 강력한 에너지원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거리가 0이었던, 분모가 0이었던 무한대의 에너지를 직접 경험하고 받기도 하고 당신의 뜻을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기도 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기를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독생자적 자기의식을 가진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종교권력자들에게 도전을 받습니다. 첫째 신성 모독죄다, 예수님은 세 가지 관점에서 당신이 하나님 아들됨을 입증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할 때는 세 가지 맥락에서 그 하나님 아들 됨이라는 말 자체를 변호합니다. 첫째 구약역사에서는 하나님 말씀 맡은 이를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구약역사에서 엘로힘들은 숱하게 등장했고 심지어 신이라고 불르기도 했는데 내가 신의 아들, 그 엘로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신성모독이 아니다, 시편 82 6절을 봐라, 구약역사는 하나님 말씀 맡은 이를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신이라고 하지 않고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무엇이 잘못됐느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약역사가 말씀 맡은 이를 신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건 정말 중요합니다. 왜 중요하느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발설할 때마다 불순종을 기대하지 않고 순종을 기대하고 말씀하십니다. 자녀에게 말할 때 불순종을 기대하면서 말합니까? 순종을 기대하면서 말합니까? 모든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는 말, 좋은 아버지 정상적인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순종을 기대하면서 말합니다. 그런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의 말씀을 맡은 예언자들은 예언자 자체가 불순종하거나 예언자에게 중계 받은 백성들이 불순종해서 실제로는 얼룩진 순종, 얼룩진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실제 역사는 불순종으로 얼룩지고 불경청으로 얼룩졌습니다. 불신앙 불순종 불경청, 말씀 맡은 예언자는 순종했는데, 순종을 O라고 합시다. obedience, 불손종을 disobedience, D라고 합시다. 예언자는 O, 예언자의 말을 들었던 청중 일반백성은 D, 두 번째로 예언자도 불순종하고 백성도 불순종할 수 있어요. 그다음 예언자는 불순종했지만 백성은 순종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 세 가지, 예언자는 순종하고 백성은 불순종하는 경우가 있어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도할 때 그런 경우입니다. 그다음 예언자는 순종했지만 백성들은 불순종한 경우가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경우입니다. 예언자도 불순종하고 백성도 불순종한 경우는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거짓예언자 400명입니다. 이 거짓 예언자 400명은 길르앗 라못이라는 영토를 침략하러 가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달라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 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그들이 이르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이 대답은 죽음을 재촉하는 대답입니다. 일단 길르앗 라못에 가면 강력한 아람 군대에게 대패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길르앗 라못이라는 땅을 정복하려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즉 그 땅에 대한 탐욕적 소유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갖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한 만큼 하나님은 답을 그대로 줬습니다. 그래? 그 땅 가져, 내가 너무 잘못된 욕망을 가지고 간절한 기도를 하면 응답이 와요. 우리의 멸망을 완성하는 기도응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멸망을 완성하는 기도응답은 열왕기상 22장에 아합왕이 길르앗 라못 땅을 정복하러 갈 때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청중도 불순종하고 예언자도 불순종하는 역사, 대체로 말하면 10% 정도는 순종했지만 90%는 불순종한 역사가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언자, 말씀 맡은 자들의 역사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들은 불순종한 역사가 많았지만 10% 정도의 말씀에 순종한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지탱해왔습니다. 10% 정도 순종을 이어왔던 예언자들이 바로 말씀 맡은 이들인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을 할 때 말씀을 맡아왔던 예언자적 인물들의 사명의식을 적분하신 것, 완성하신 것, 그걸 총합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따라서 내가 독특한 의미의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는 정확하게 불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을 배경으로 한 말이고 불완전하게 순종한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순종을 배경으로 한 것이고, 나는 100% 순종하는 당신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90% 불순종하고 예언자들이 대부분 불순종할 때 그걸 똑같이 들었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100% 그걸 순종하고 완성했기 때문에 불순종하던 이스라엘 역사를 저주의 역사에서 구원의 역사, 용서받은 역사로 만드실 수 있을 만큼 큰 순종을 바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독생자라는 말 자체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 예언자를 연속적으로 기획적으로 목적 지향적으로 지속적으로 파송해주신 그 역사 안에서만 독생자 의식이 나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실패했건 성공했건 1500년간 하나님 아들 의식, 또는 하나님 말씀 맡은 엘로힘 의식을 가진 자들이 있는 곳에서 나오는 분이 나는 독생자라는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독생자라는 말 자체는 특수한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을 맡겨서 순종을 기대했던 역사, 여기서 한 가지, 이스라엘 민족의 얼룩진 순종과 불순종을 말없이 교체할 때 예수님은 목적지향적으로 일관성 있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런 아들을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은 구약 예언자들의 역사를 볼 때 낯선 것이 아니다, 예언자들도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들이었고 나는 다른 특수한 뜻으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 나는 얼룩진 순종과 불순종을 불완전하게 교대한 인간 예언자가 아니라 나는 100% 순종하고 이스라엘 1500년 불순종 역사를 완전히 만회하고 재생할 수 있는, 복구할 수 있는 순종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둘째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쓸 때 신성모독죄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쓸 때는 특수한 맥락 즉 순종의 무한부담을 질 때만 그렇다, 아들이라는 말을 써서 나는 절대로 특권을 내세우지 않는다, 참 중요합니다. 요새 그런 말이 있대요. 돈 많은 아들 장로님 아들, 빚 많은 아들 내 아들, 조롱하는 그런 말이 있대요. 제가 인상적인 것은 아버지가 한 말 같아요. 돈 많은 아들은 장로님 아들이고 빚 많은 아들은 내 아들이다, 아마 돈이 많은 아들은 장로님과 사이가 좋은 모양이죠. 아들이라는 말을 쓸 때, 삼성 이건희 아들, 벌써 사람들이 질투심과 적개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아들은 특권의 자연 상속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싫어합니다. 아들이라고 할 때 특권의 자연 상속을 의미 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는 전혀 그런 말이 아니라 죽기까지 복종하시겠다는 말, 아버지 하나님 뜻에 100% 순종하겠다는 무한다짐을 하는 말, 그때만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쓰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꼬리를 잡고 분노하면 안 된다, 셋 째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는 공허한 주장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나님의 일은 사도행전 10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태복음 11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런 기가 막힌 사역들, 그 선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들됨의 증명이지, 절대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공허한 주장을 가지고 절대로 혼선시키지 않았다, 이런 것을 효용론적인 하나님 아들 주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선한 일중에 로마서 8 16-17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난을 상속한다는 의미로 예수님은 아들됨을 의미했단 말이에요.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 자녀라는 말을 하죠. 하나님 자녀라는 말 안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을 맡아서 우리시대에 쓰시려고 하는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대언하겠다는 무한책임감, 예언자적 비파송의식, 이게 하나님 아들입니다. 하나님 자녀라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맡았다는 강력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 시대의 중심죄악을 정조준하면서 선포됩니다. 이게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개인이 받지만 그 개인에게 임한 말씀은 반드시 공공적 지향성을 갖습니다. 저한테 하나님 말씀이 임하지만 제가 받은 하나님 말씀은 우리 시대의 중심죄악을 탄핵하고 규탄하고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쟁점을 건드리는 말씀을 하나님이 저한테 맡기거든요. 그게 하나님 자녀라는 책임감은 바로 그런 겁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중심죄악 양극화문제 청년실업문제 환경파괴문제 남북분단문제 탐욕적인 투기와 불법의 문제를 정조준하는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 말씀을 맡은 아들인 거예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아들이 없을 때 하나님이 안 계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맡은 이, 하나님 자녀라는 사람이 한 시대의 중심죄악을 논하지 않고 비껴간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사로운 부르주아 개인 갈망에 응답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시대의 중요한 공공의 쟁점을 말씀으로 회복하시고 그것을 정조준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이 임한다는 말은 얼마나 두려운 말인지 1부에서는 말했습니다. 드바라 아도나이 하야 엘 에샤아우벤 아모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하나님 말씀이 임했을 때 주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시대의 중심죄악을 규탄하는 말을 나를 통해서 하신다, 이런 뜻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임했다는 말은 공공성이 아주 강한 메시지가 임했다는 뜻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면서 공공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여러분 개인에게 맞춤형 복지형 점괘 같은 설교를 한다면 저는 거짓예언자입니다. 이런 특수한 개인의 마음에 위로를 주려고 하는 멘토링 같은 대화, 이것은 거짓 예언자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개인에게 임하지만 그 지향점은 공공의 거리와 광장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에요. 기독교인이 하나님 자녀라고 할 때 공공의 관심, 우리 모두의 문제도 아니고 아무 문제도 아닌 그 일이 바로 우리 문제입니다. 한강에 물이 더러워지는 것, 우리 월급 다 나와요. 숭실대 교수 월급 나와요. 그런데 한강에 물이 더러워지면 큰일 납니까? 아무 일도 아닌 공공의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런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이런 공공성이 안전히 소멸되고 사라졌다, 그건 거짓예언자입니다. 오늘날 시민단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교회가 해야 합니다. 심지어 국회 재무부 보건복지부 등 국가관료들에게 맡겨진 일마저도 교회의 관심사가 돼야 합니다. 그것이 왕 같은 제사장의 마땅한 책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성령이 증거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런 공공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아야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정확하게 시대에 중심문제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래서 공공성이 많아집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증거하는 방법은 우리가 특수한 맥락, 자기를 비우고 십자가에 못이 박힐 정도의 고난을 감수하는 의연한 태도가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자녀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선한 일에 투신되고 몰두되고 그 일에 참여할 때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효용론적으로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을 때 무신론이 일어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과 1980년대까지 전도 집회를 다녔던 찰스 템플이 <하나님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쓰면서 무신론자로 전향했습니다. 그 이유가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을 하나님이 돌보지 않기 때문에, 너무 유치한 생각입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은 하나님이 돌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된 말씀 맡은 이가 도와야 합니다. 말씀 맡은 우리가 불신앙하고 불순종하고 불실천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효용론적 무신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효능감이 없어 무신론이 되었기 때문에 효용론적 무신론이라고 말합니다. 볼테르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모든 작가들은 전부 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이유를 이런 애매모호하고 죄 없는 자들이 너무 비참해도 방치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돌보신다는 말을 한 겁니다. 무신론이 더 정직한 신학적 응답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선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거짓말로 믿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두려워하는 무서운 영이 임했기 때문에, 누가 더 정직합니까? 철학자들이 더 정직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소리치는 것이 더 옳은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 말씀을 맡은 우리가 하나님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의 선한 일이 마땅히 기대되는 그 여백을 우리가 채우는 것이 바로 참다운 의미의 하나님 자녀됨입니다. 그런데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가 진짜 할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피곤하셔서 어디로 갔느냐, 요단강으로 가서 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지쳤습니다. 하나님 독생자 의식을 너무 공격하니까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편으로 갔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은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에 의해서 박해 받고 피해 받은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요단강 건너편에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갔을까요? 여기 거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증명했던 초창기 증언공동체입니다. 본문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아무 표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그분이 했던 가장 위대했던 업적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한 것, 요한이 남긴 최고의 업적은 표적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이라고 인정하고 공표한 것, 예수님은 왜 이곳으로 갔습니까? 당신 자신도 하나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곤비하고 지쳤기 때문에 다시 세례요한의 증언의 힘을 듣고 세례요한의 제자들로부터 다시 서포트를 받기 위해서 여기 가서 쉬고 계신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도 피로하신 겁니다. 예수님도 낙심한 겁니다. 이 말은 우리 또한 신적격려를 할 동역자가 필요하고 우리 소명감을 원천적으로 재갱신할 수 있는 동역자 그룹, 요단 저 건너편의 피난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요단건너편의 피난처, 우리를 격려해주고 우리 앞길에 확신이 있다고 말해주는 피정과 같은 처소가 필요합니다. 요단의 건너편이 필요하고, 요단 이편에서 우리의 소명감을 소진시키고 우리를 적대하고 우리 앞길에 심각한 의심의 먹구름을 끌어 오는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떡해야 합니까? 요단 건너편에 가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입증해주고 공표해주었던 동역자들이 있는 곳, 그런 아우성이 우리를 다시 불러내는 곳에 가야 합니다. 나쁜 사람과 오래 있지 말자, 요단 이편에서 맹수에게 오래 잡히지 말고 요단 저편에 가서 천사랑 같이 놀자, 이런 뜻입니다. 일주일에 나쁜 사람을 하루 이상 만나지 말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나 인간성을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나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인간성이 피폐해집니다. 요단 저편은 나의 소명감을 긍정해주는 곳, 나를 지지해준 세례요한의 정신적 아우라가 남아 있는 곳, 강력한 나의 신적 격려자가 있는 곳입니다. 생업의 고단한 현장에서 일주일 내내 시달리다가 가향교회에 와서 가향교회가 여러분에게 요단 저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히 너무 큰 꿈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님도 지쳐서 피곤하셔서 요단 저편으로 불러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그 말을 꼬투리 잡아서 적개심 넘치게 응대해오는 종교권력자들과 싸우면서 영혼이 고갈되고 영혼이 피폐해지면서 주님도 쉬러 가셨습니다. 주님 우리가 일주일 내내 악한 세력들을 묵상하다가 지쳐서 피곤할 때, 대결하다가 지쳐서 피곤할 때 우리가 우리의 소명을 긍정하고 우리의 앞길에 올바름이 있고 확신이 있음을 알려주는 요단 저편에 사람들과 만나게 하여 주소서. 가향교회가 요단저편 공동체가 되게 도와주시고 사명의 길을 강력하게 헌신하는 동역자 동아리가 되게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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