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_ 요한복음 9장 1-3절 (어둠 속에 빛나는 하나님의 은총)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
요한복음 1장 4-5절에 보면 좀 더 근원적으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은 빛과 어둠을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본문인데 빛보다 어둠이 더 궁극적으로 시원적인 기원을 가진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빛과 어둠이 동시에 있지 않고 어둠이 먼저 있고 나서 빛이 있었다고 말하는 거죠. 창세기를 읽어봐도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나서야 창세기 1장 3절에 빛을 창조하십니다. 이 어둠이라는 것은 빅뱅이전에 있었던 거라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역사, 인간의 역사, 우주의 역사 말고 하나님 자신의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어둠에 대면하여 창조를 목적 지향적으로, 어둠을 격파하는 방식으로 어둠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어둠을 가지고 빛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지금 우리가 보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어둠 전체를 우리 삶의 경험 속에서 제거하거나 없애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빛과 같은 인생, 장사처럼 달리는 태양같이 강렬한 양의 기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을 잃어버린, 생명의 모든 요소들을 박탈당한 어둠의 경험이 이 세상에 많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행복한 가정에 장애아가 태어났다든지, 7년 동안 열애해서 결혼했는데 8년째 아내 눈이 먼다든지, 이런 것은 빛과 어둠의 대조지요. 어둠은 돌발적으로 돌출적으로 빛의 공동체를 넘보면서, 지금 너희가 누리고 있는 빛이야 말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의 능력이 작동하기 때문에 어둠속에 빛이 나온 것이다, 이걸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어둠이 빛보다 궁극적으로 더 시원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창세기와 요한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 안에 이글거리는 생명력이 빛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과 막힘없이 이루어지는 교제,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빛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두운 동굴인줄 모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보고나서야 상대적인 인식에서 내가 어둠속에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매우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타락하지 않은 원형적인 인간다운 하나님과의 교제를 실현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교제가 우리가 어둠인가 빛인가를 판단하는 기점이 되는 것이죠. 실제로 영적인 어둠속에 있는 우리를 일거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실제로 눈이 멀어버린, 물질적으로도 눈이 멀고 육체적으로 눈이 멀고 영적으로 눈이 멀어버린 한 맹인을 오늘 본문에 소개합니다. 날 때부터 맹인된 자, 인간이 처해있는 곤경을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인물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소경된 자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 가운데 태어난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없는, 빛이신 하나님을 보면서 대면하면서 교제할 수 없는 근원적 제한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릅니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사람들이 스무 살만 되면 자기 안에 있는 어둠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영적인 맹인이라는 것, 이정도의 메타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둠속에 있는 맹인은 인간 모두를 symbolic하게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눈이 먼 사람이 얼마나 빛과 광채를 보고 이 세상을 참배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지 앙드레 지드 가 쓴 <전원교향곡> 이라는 작품을 보면 나옵니다. <전원교향곡>이라는 작품에 눈먼 사람에게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기 위해서 음악적 기호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다 보니까 실제로 한때 소경된 사람, 실로암 병원에 있는 김선태 목사 같이 한국전쟁으로 9살 때 눈 먼 사람과는 다릅니다. 9살 때 까지 강렬한 빛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매우 총명합니다. 색채를 알아챕니다. 그런데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윤곽 안에서 경계지음 안에서 사물을 대체적으로 식별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히 그와 동일시되기는 힘듭니다. 아마 원시우주 같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캄캄한 겹겹이 쌓여 있는 어둠 그 자체였을 겁니다. 이 맹인은 창세기 1장 2절을 방불케 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했을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수면위에 불고 있었다, 이 사람은 창세기 1장 2절 상태를 인격 안에서 소화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럽의 지하 깊은 곳에서 빅뱅 실험을 하기 위해서 빅뱅 상태를 만들어놓고 최초의 빅뱅 순간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빅뱅을 시현하는 simulation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유럽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그것과 똑같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시현합니다. 캄캄한 원시 우주와 같은 그 맹인을 예수님께서 진흙을 그의 눈에 댑니다. 진흙을 발랐다는 말은 2장 7절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장면을 정확하게 방불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 2절 태초의 창조 장면을 시연합니다. 시연한다는 말은 demonstration 하는 거죠. 시연하듯이 또는 실연하듯이 창세기 1장 2절의 흑암이 겹겹이 쌓여 있는 원시우주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더니 그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더니, 이것이 외과적으로 흙과 침을 발라서 사람 눈에 대는 것은 chemical하거나 화학적 성분이 있어서 된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simulation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진흙을 빚으사 사람을 만들었던 그 장면을 생각나게 하는 방식으로 진흙을 빚어서 눈에다 댑니다. 창세기 9장 저자는 이 맹인과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캄캄한 원시우주가 identify 서로 동일시되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성경을 읽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둠이 누구의 죄라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쓰레기 같은 부정적 경험들, 선천적 장애 불구 저능아 정박아 또는 닉 부이치치 같은 손발이 없이 태어난 사람들, 머리가 너무 나쁘게 태어나서 IQ가 78이상 되지 않아 공부를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어둠입니다. 그런 선천적 장애와 불구, 거지로 살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의 자비에 호소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든 원천적 무능력자가 바로 어둠입니다. 그런데 그 원천적 무능력자, 다른 사람의 자비에 호소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 전체에 거룩한 부담을 안겨주는 원천적 무능력자가 누구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당시 랍비들은 반드시 자기 의견이 있었습니다. 권위 있게 이 사람은 자기 죄 때문이다, 이 사람은 자기 부모의 죄 때문이다, 욥의 친구들이 마치 욥에게 고아와 과부에게 네가 잘못한 것 때문에 이 엄청난 재난이 왔다, 너 또는 네 자손들이 고아와 과부의 임금을 체불했거나 그들을 억울하게 해서 그것이 신원되고 상달돼서 이제 네게 돌연스러운 재난이 왔다, 욥의 고난을 죄의 결과로 봤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인간의 불행을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어둠 자체는 창조질서 안에 본래적으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둠을 이 세상 안에 남겨두었다, 죄와 상관없는 어둠이 있다, 인과관계로 되지 않는 빈틈이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의 이항대립적인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계가 이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이나 현대물리학에서 프리초프 카프라 라는 사람이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라는 책을 썼죠. 이런 사람들은 지금 뉴턴의 기계론적 인과관계의 물리학으로는 이 세상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세계는 법칙적 정확성의 세계가 아니라 합물적 개연성의 세계라는 것이죠. 63층에서 떨어지면 반드시 죽는 것이 법칙적 정확성의 세계입니다. 합물적 개연성의 세계는 63층에서 떨어지면 대부분 죽겠지만 안 죽을 수도 있겠다고 보는 것이 현대 빈틈 물리학입니다. 빈틈물리학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물에서 걸어 다니는 것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매우 희귀한 일이 빈틈에서 일어난 겁니다. 대부분 물에 빠지지만 안 빠지는 빈틈에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다고 봅니다. 이것이 연세대학교 김중선 교수 입자물리학자, 우리나라의 유명한 국가가 인정한 과학자였죠. 일산두레교회, 지금 사랑누리교회 교우입니다. 그분의 주장입니다. 합물적 빈틈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죄와 벌로 환원할 수 없는 이 세상은 복잡계라는 겁니다. 이 세상의 불행은 죄와 벌이라는 이차방정식 또는 일차방정식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복잡 방정식이기 때문에 이 사람의 어둠과 불행, 선천적 무능력을 죄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너무나 잘못됐다고 보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기 또는 자기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봤어요. 왜? 자기 부모의 죄 때문이라는 것은 신명기 등 에스겔 18장 4절 등에 나오고,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은 로마서 5장 12-22절에 나오고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완곡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탓이야, 하나님께서 아직까지 창조를 완료하지 않은 진행 중인 창조일 뿐이야,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아직까지 완성되지 않아서 과도기 상태의 창조 현장일 뿐이야, 예수님께서 무슨 책을 보고 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예수님 말고는 누구도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어떤 랍비도 인간의 불행을, <반야심경(般若心經)> 바라밀타심경 그걸 읽다가 오늘 좀 늦게 왔는데, 불교는 이것을 복잡한 연기체계로 설명했습니다. 업과 과업 카르마, 너무 복잡했습니다. 한 20페이지 읽는데 시간이 엄청 갔고 불교에 비해서 우리 기독교는 정말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경 반야심경을 읽어서 내면의 죄를 설명하기는, 일곱 번 윤회 안에서 누군가의 죄 때문에 이 사람이 지금 맹인이 된 겁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 모든 욕망의 흐름은 일곱 번의 윤회가 계속되는 동안에 언젠가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서 부처님이 돼서 서방정토로 가지는 거죠. 반야심경이나 아함경이나 불경은 인간의 고난을 인과론적인 연기로 해석하는 겁니다. 누군가 원인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가지론입니다. 적어도 우리 인식론으로는 이 고난이 왜 왔는지, 이 죄가 왜 왔는지 설명할 수 없고, impossible 하다고 신비에 맡겨버리고 다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매우 애매모호하고 완곡하게 에둘러 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탓, 하나님 원인으로 설명해버립니다. 우리가 공부를 매우 못하는 사람, 아무리 암송해도 시험지만 보는 순간 블랙아웃 되는 사람, 옛날에는 그 사람들이 게을러서 그런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유학 가서 공부해보니 게을러서 그런 게 아닙니다. 3학년 2학기 때 셰익스피어 희곡을 듣는데, 운동권이 하도 극심해서 철야농성을 다니면서 온 시국을 책임지던 그런 때입니다. 오셀로라는 과목을 시험을 치는데, 밤새도록 한숨도 안자고 오셀로를 수없이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영어로 완전히 다 외워서 시험 칠 수 있는 상태가 돼서 갔습니다. 제 머리가 좋아서 암기는 잘 되어도 대개 제 시험지와 제 두뇌 사이에는 상호교열이 있어서 서로 춤추면서 도와줍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데세모네에게 손수건을 찾는 그 장면, 네가 정말 순결하다면 내가 네게 순결의 증표로 준 손수건을 내 놓아라, 디아구가 그 손수건을 빼앗아서 정부에게 넘겨주는 장면 두 줄을 주면서 이 전후맥락을 설명하라고 16절지 4장을 주는 겁니다. 갑자기 하나님이 역사했는지 사탄의 방해인지 모르겠는데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진짜 기억 다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그걸 쓰고 나왔는데요. 셰익스피어 C-를 받았습니다. 그전에 수업시간에 앞에 앉아 학습점수를 받았습니다. 나의 라이벌이었던 최모 양모 이런 애들은 전부 다 A+를 받아서 룰루랄라 나갔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공부 잘하는 반열에서 끝났습니다. 나는 한 번도 내 지성을 믿지 않게 되고 공부세계에서 죽은 자다, 이 성적을 보더니 지금도 서울 공대에 근무하는 미스유라는 아가씨가 아이고 회권씨 왜 공부를 못해요, 제가 4년 장학금 받고 들어간 우등생이었는데 이 성적으로 장학금을 못 받습니다. 제가 사실 공부 못하는 사람의 동정은 그때도 있었지만 유학 갔을 때도 있었고,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의 비애, 94년 9월 학기에 가서 박사과정 세미나를 듣는데 9명이 들어요. 저 혼자만 아시아에서 왔고 완전히 백인일색인 수업에서 자기들끼리 왁자지껄 하면서 너무 어려운 공부를 하는데, 아 집에 가고 싶다, 다만 한 가지 모순은 유학 간다고 소문내고 온 게 큰 문제다, 만일 소문내지 않았다면 집에 가서, 이 세상의 모든 무능력자, 내 속에 있는 내가 도망하고 싶은 근원적 존재론적 한계 취약성 이걸 죄라고만 생각하면 안 돼요. 내가 그렇게 밤을 새워서 공부했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무 것도 못썼잖아요. 그리고 제가 영어 토플 점수 매우 높았고 매우 공부 잘했지만 안 들려서 아무 말 못해요. 창세기 49장과 신명기 34장을 하는데 전혀 들리지 않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밖에 안 들었고, 정신이 멍하니까 오늘 저녁에 샐러드 먹는데 오라는 말을 못 알아듣고 밥 준대, 식사시간에 갔더니 아무도 안 왔습니다. 왜 밥을 안주냐고 하니까 밥 준다는 말이 아니라 샐러드 준다는 말이었다면서, 그 정도로 멍하니 지냈습니다. 사람이 무능력한 상태, 무능력하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사람의 기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해서 수업에서 중심토론 분위기에서 배제가 되면 인권이 뭔가 감소되는 느낌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을 벌지 못하면 내 자존심, 내 생명력이 만끽되게 100% 실현되지 못한 사람들은 일련의 어둠과 공정하는 거거든요. 다시 말해서 내가 정말 창조의 밝은 빛 아래 내 존재를 자랑스러워하면서 보무당당하게 걷는 사람들은 장사같이, 신방을 향해서 달리기 기뻐하는 태양 같은 사람입니다. 그건 좋습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세상을 밝게 합니다. 시편 19편 보세요.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그런 사람 좋죠. 그런데 시편 139편에 보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이제 나에게 있는 모든 빛은 어둠이 돼버렸다고 느낄 만큼 한숨이 절로 나오고 땅이 꺼질 것 같은 근원적 한계 모순 속에서, 다시 말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깊은 흑암 속으로 유폐된 것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 그들을 죄와 벌의 대립구도로 볼 수 없는 거거든요. 예수님께서 진짜 사람이 정말 멋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진짜 예수님 옆에는 하나님이 계셨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흙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모든 죄 때문이라는 연기론적 사상이나 인과응보론적 사상으로 인간의 불행을 짓이겨서 설명해버리는 도그마틱한 신앙, 냉혈한적 도그마로 가득 찬 신앙, 그 사람이 과연 인간 불행의 뿌리에 과연 접근할 수 있는가? 절대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해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한없는 동정심을 가졌습니다. 삭개오에 대해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 대해서, 다섯 명의 남편을 바꿔가면서 인생을 탕진했던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 예수님은 신적동정심, 다시 말해서 죄와 벌의 냉혈한적인 도그마로 접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삶이 어둠의 저편으로 자맥질 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연약함에 대해서 신적 긍휼함과 동정심을 가지고 봤다는 겁니다. 여기서 기독교가 인간 불행의 뿌리까지 붙들 수 있는 복음인데, 왜 우리가 이렇게 죄와 벌의 이항 대립적 구도, 죄와 벌이라는 두 가지 논리밖에 없는 단선적 논리로만 세상 사람들의 불행을 생각하지 못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근원적 불구성, 한계성, 자해성, 또는 무능력성, 이런 인간의 근원적 불행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곧 나타날 현장이라고 봄으로써 그 사람과 하나님을 연결시켰습니다.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여겨지던 원시우주 같은 맹인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곧 일을 하실 거라고 말을 하심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저는 쉽게 공감이 된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저는 너무 불행한 사람을 많이 보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연결시키는 것,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도 불행을 죄와 벌로 설명해버리려고 하는 종교적 환원주의, 논리적 환원주의적인 제자들과, 아니야 죄와 벌 사이에 설명할 수 없고 인과관계로 해명할 수 없는 복잡계, 복잡한 원리가 작동하고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신비가 여기에 있다, 심지어 하나님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불행은 하나님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이 불행에 대해서 창조주의 근원적 책임감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 이 요한복음은 정말로 인간에 대해서 우호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경스럽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7남 3녀를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까? 내가 왜 모든 재산을 다 잃었습니까? 내가 왜 사람이 절단 났습니까? 내가 왜 에이즈로, 피부암으로 이렇게 이용당했습니까? 욥이 하나님께 외쳤습니다. 나는 이 모든 불행을 유발할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나의 기소장을 받고 내려오십시오, 한 번 면대 면으로 계급장 떼고 재판을 해 봅시다, 욥의 기소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욥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를 정죄했습니다. 죄와 벌의 논리로 욥의 자백을 받아내려고 하는 남영동 서빙고 수사관 같은 욥의 세 친구들을 탄핵하시고, 욥 네가 말한 모든 것을 내가 수용한다, 하면서 욥을 무죄로 방면했습니다. 다만 욥은 말하는 매너에서 지적을 받았습니다.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은 경범죄도 아니고, 법정태도에 대해서지, 유죄판결을 받은 게 아닙니다.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욥의 세 친구들인데 논리자체가 결점이 있습니다. 욥은 건방지게 말을 했다, 이런 겁니다. 법관한테 말할 때 약간 교양 있게 하세요, 알았죠? 좋은 말할 때, 이런 식의 지적을 받은 것이지 욥의 논리는 흠이 있습니다, 라고 말한 게 아닙니다. 욥기 자체는 원죄설이 맞지 않습니다. 원죄설이 왜 문제냐? 모든 인간은 죄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근원적으로 기독교는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불운을 없애버리고 뉴턴적 기계론적 논리로 죄를 설명하기 때문에 청교도주의 같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청교도가 나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청교도, 자기에 대해서는 자학적이고 타자에 대해서는 억압적입니다. 죄를 너무 안 지으려는 이 청교도는 어떻게 하는 지 아십니까? 1800년대 초에 보스턴 글로버 전신인 신문에 청교도가 지배하는 나라에 이런 일이 나옵니다. 남자 여자는 휴가 갈 수 없습니다, 기도원에 갈 사람만 휴가갈 수 있습니다, 남자 여자는 절대로 데이트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근원적 매력, 20대 때 꽃피는 아름다움을 근원부정하고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 하거나 아니면 바이블스터디 할 사람만 가세요, 이런 식으로 합니다. 인간이 바이블스터디만 하나요. 바이블 스터디와 연애는 궤적이 약간 다릅니다. 연애할 때는 주로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아가서 모드로 가야지,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 감정도 죄가 있습니다, 우리말도 죄가 있습니다, 우리 언제 헤어질지 모릅니다, 아가서, 남자 여자의 육체적 아름다움, 심미적 찬미를 주고받으면서 정신없이 혼을 잃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데, 아가서를 젖혀놓고 원죄론적 관점, 자기 남편이 오지 않아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청교도의 분노는 원죄설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죄설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교육학과 관련된 겁니다. 애들을 때려서 아이들 안에 있는 죄성을 징벌을 하고자 매질을 합니다. 캘빈주의가 많은 스코틀랜드에서나 이런 데서 바로 식당에서 아이들 뺨을 때립니다. focus on the family 라는 방송을 제작한 사람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때려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다니엘학습법>이라는 책에 보면 엄마가 요절 안 외웠다고 뺨을 때리고 밥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렇게 배운 하나님, 인간의 죄성을 너무 강조하고 죄와 불행을 너무나 쉽게 등치시키는 신학이 저는 병들었다고 봅니다. 창조의 아름다움, 창조의 신비 아래 있는 굴절과 파장, 하나님 몫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성경 전체의 관점이 더 중요한데, 왜 원죄설만 강조합니까? 하나를 가지고 모든 걸 설명하려고 하는 모더니즘적 사고, 전일적 사고, 하나로 모든 걸 설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지적 설명, 파편적 설명, 부분적 설명으로 전체를 설명하려고 하는 설명 민주주의, 설명다원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불행을 고통을 죄와 벌로 생각하는데, 불행에 많이 처할수록 청교도 입장에서 볼때는 훨씬 죄가 많은 사람입니다. 죄가 훨씬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일단 잘 풀리는 인생입니다. 돈도 좀 있어야 하고 키도 커야 하고 머리도 파마가 제대로 돼야 하고, 골프 쳐도 얼굴에 기미도 안 생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근사한, 겉으로 볼 때 구원의 확신이 있는 그런 멋있는 사람이 신의 축복과 가까이 있다고 봅니다. 뭔가 곱사등이로 태어났거나 팔이 없이 태어났거나 공부를 너무 못할 정도로 머리가 안 좋게 태어났거나 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이 없고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져버린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날 때부터 원시우주적 맹인 상태로 태어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드러낼 근거가 되고 하나님의 창조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정말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녀가 맹인으로 태어나길 기도해서는 안 되고, 이런 상태로만 하나님 영광이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이런 극한적인 불행과 불구와 선천적 장애마저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지, 하나님 영광이 진정 불행한 상태가 돼야만 한다, 그 논리는 아닙니다. 제일 좋은 것은, 신방을 향해 달려가는 장사 같은 태양처럼 빛을 광채를 발휘하는 것도 하나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이런 원시우주 같은 캄캄하고 통로 없는 숨 막힐 것 같은 불행 속에서 남의 호의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 이 비참한 걸인도 하나님과 관련돼 있고 연결돼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역설적으로 내 안에 있는 어둠, 우리 가정에 있는 어둠, 나에게 이것이 없었다면 훨신 좋겠다고 느끼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행창조, 하나님 창조가 예비되고 있는 현장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어둠을 제거하려고만 생각하지 말고 어둠과 공존하는 법, 어둠과 함께 사는 법을 터득하는 게 더 신앙적인 태도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33장 1-3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잘 들으세요. 예레미야가 두번째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을 때는 석방해주실 줄 알았습니다. 풀어주실 줄 알았는데 안 풀어주시고 계속 가둬놓으시고 부르짖기만 하라, 예레미야가 부르짖지 않았으면 예레미야 30-33장에 나오는 기가 막힌 엄청난 위로의 복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가 30-33장에서 엄청나게 위로에 가득 찬 새 하늘의 복음, 시위대 뜰에 갇혔던 예레미야가 기도해서 받은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불구와 장애 또는 선천적 어둠 속에 있는 사람, 또는 후천적으로 내 죄 때문에 생긴 어둠이라 할지라도 그 어둠이 그냥 어둠으로 끝나지 않고 빛을, 하나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어둠이야말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가 지은 죄 마저도 미래진행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 어거스틴은 9년간 마니교에 빠졌습니다. 방탕했습니다.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우리 중에서 성 어거스틴처럼 9년 간 마니교에 빠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유는 참다운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 몰라서 은총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이건 조심해서 들어야 합니다. 죄를 좀 지어봐야 하나, 내가 죄를 몰라서 은총을 모르나, 아주 극단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왜? 은총의 광채를 극한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심연을 경험하고 어둠을 경험하고 죄를 깊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이 논리를 거꾸로 뒤집어서 은총을 많이 경험하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 한다는 논리는 틀렸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은총을 극한으로 경험하고 위대한 masterpiece를 남긴 사람들은 어둠의 경험도 깊더라는 겁니다. 어둠의 경험 안에서 그들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더라는 겁니다. 헨델의 <메시아>가 창조되는 과정을 보면, <광기의 오열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헨델이 그 위대한 불멸의 곡이 절망적으로 완전히 파산해서 죽기 직전에 몰린 헨델이 런던에서 남으로부터 받는 조롱, 음악계로부터 받는 ostracism 추방, 자기조롱, 죽음을 하루종일 생각하는 궁지에 몰린 헨델에게 무명시인이 시를 주면서 선생님이 이 노랫말에 곡을 붙여주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영락하고 몰락했기 때문에 자기를 조롱하는 사람의 객기라고 생각해 찢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약 21일 동안 그 무명시인이 쓴 노래를 보고, 죽음을 생각하던 완전히 파산해버린 음악가, 헨델은 엄청나게 난봉꾼입니다. 이수만 박진영 같은 사람이에요. 프로듀서로 연예인 기획사를 차려서 너무 호화롭게 살았어요. 바하 같은 사람은 굉장히 교회집사님처럼 라이프치니에서 청교도 생활을 하면서 좀뱅이처럼 생활했는데 헨델은 완전히 국제연예기획사를 차려서 엄청나게 자유분방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파산한 겁니다. 파산해서 죽음을 생각하던 사람, 헨델의 <메시아>가 21일 동안 창조됐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요한계시록 11장 15절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전능의 주가 다스리신다, 그 장면을 들어보면 아무리 무신론자가 되고 싶어도 무신론자가 안 됩니다. 그 음악은 모든 무신론자의 마음을 녹여버리는 음악입니다. 엄청난 합창을 들으면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둠속에서 나왔습니다. <실낙원>도 어둠 속에서 나왔습니다. 진짜 눈이 멀어버린, 크롬웰 비서로 왔던 존 밀턴이 청교도혁명의 실패 때문에 완전히 낙심해서 열이 너무 받아서 눈이 멀었습니다. 12권의 <실낙원>을 쓴 겁니다. 426년에 쓰여졌던 <하나님의 도성>은 411-413년에 로마가 서고트족 게르만족에게 쑥밭이 되는 처참한 고난을 보며서 413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해서 13년만에 완성되었습니다. 한을 가지고 절망에 맺혀서 쓴 책입니다. 53만 6천자로 된 사마천의 <사기>, 억울하게 남근 거세를 당하면서 황제와 맞섰던 장군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이 쓴 것입니다. 불멸의 작품입니다. 그 불멸의 작품은 정말 깊은 어둠이었어요. 제가 볼 때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책의 아니라 신학서적입니다. 그 안에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궤적을 자신도 모르게 썼습니다. 불멸의 작품이에요. 불멸의 작품은 이 이외에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하나님이 아직까지 빛이 있으라는 명령을 내리기 직전상태 원시우주상태의 어둠, 과도기적 어둠, 다시 말해서 빛의 창조와 함께 완성될 과도기 상태라고 볼 수 있는 눈, 그런 낙관주의적인 관점, 미래주의적인 관점, 하나님 중심의 관점, 그걸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안 되겠습니까? 그래야 우리가 우울증을 이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자신에게는 가진다 치고, 내 아이에게도 가져야겠죠? 이 놈이 무엇이 될지, 우리 집의 버릇 나쁜 개한테도 가져야 하겠고요. 나를 괴롭히는 직장상사한테도 가져야겠죠. 우리 모두가 지워버리고 싶고 도말해버리고 싶은 어둠, 창조의 한 부분에서 없애버려야 할 어둠을 하나님께서 어둠과 함께 공존하도록 빛과 어둠을 나누어주셨을 뿐 어둠을 없애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둠은 여전히 우리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가 됩니다. 어둠도 하나님의 지식을 전달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하나님 은총을 의심할 수 없어 눈만 뜨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밝은 태양 속에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어둠과 공존하면서 밤을 싸고 사는 사연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어둠, 원시 우주 같은 어둠, 전망이 보이지 않고 캄캄하고 황량한 불모지 같은 어둠의 경계선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침을 바르시고 우리에게 터치하시고 우리에게 접근하셔서 우리에게 마침내 빛을 만들어내시기 위해서 일정 시간을 두시고 기다리는 하나님을 영접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직까지 여러분에게 창조사역을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둠과 더불어 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어둠을 통하여 오히려 당신의 어둠을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도말하고 싶은 어둠이 있고 내 인생의 이적에서 지워버려야 할 어둠이 있고, 내 인생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어둠도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이 어둠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창조역사를 진행하신다는 것을 이 시간 배우고 확신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 삶 속에서 어둠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경험하게 도와주시고 희미하게나마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어둠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어둠과 공존하며 어둠을 창조의 빛 안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영적상상력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이 하실 일은 결국 사람을 통해서 일어날 일입니다. 날때부터 맹인된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들의 불행한 눈에 사랑의 터치를 나누게 해주시고, 손을 뻗어서 그들의 어둠을 나누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 한국교회가 엄청 마음씨가 좋은 교회가 되게 해주시고 엄청 이해력이 높고 바다같이 넓은 동정심의 공동체가 되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날때부터 맹인된 형제자매들은 사람의 자비를 기대하면서 거리에 나 앉습니다. 주님 거리에 나 앉아서 자비를 호소하는 날때부터 맹인 같은 불행한 동포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 우리가 그들의 슬픔이 거두어질 때까지 우리도 그들의 탄식에 동침하면서 귀한 물질 바쳤습니다. 이 귀한 눈물이 그들의 눈에 그들의 가슴에 닿는 사랑의 온기가 됩니다. 자발적으로 실업상태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일자리를 주시고 하나님 일자리에서 곤경을 당한 아들딸들에게 하나님의 용기를 주시고, 소득을 벌기 위해서 모든 모욕과 안타까움과 아니꼬움을 참아내면서 조직사회에 서바이벌하고 있는 아들딸들을 하나님의 한 없는 위로로 지탱시켜주시길 원합니다. 하루에 한 데나리온 벌기 위해 애쓰는 이 땅의 모든 억조창생들을 하나님의 하훼와 같은 사랑으로 돌보시며 살 소망을 얹어주소서. 교회 안 다니는 사람까지 은총의 햇빛으로 지탱시켜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축도) 지금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가향교회에 속한 모든 지체들과 그들의 사랑하는 가족들 위에, 오늘 예배드리는 모든 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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