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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몸 구푸리신 예수-요한복음 8:1-11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 1부 예배-요한복음 8:1-11 (몸 구푸리신 예수)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에 나온 개인들은 가만 보면 대표 단수성격의 개인들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에 나온 개인들은 이스라엘 역사를 반추하게 만들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났던 하나님 백성들의 불순종을 집적적으로 또는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로써,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양심적 바리새인들의 집단적 영적 갈증을 가리킵니다. 니고데모 같은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는 거죠. 예수님에 대해서 우호적이었지만 밤에 와서 질문을 합니다. 우호적 바리새인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행하는 표적의 능력과 예수님의 거침없는 율법위반을 조화롭게 해석하지 못하는 겁니다.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영적갈증에 극심하게 시달리고 있는, 즉 참된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갈증에 시달리는, 다섯 남편을 찾아봤지만 여전히 갈증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모세오경을 열심히 읽었지만, 야곱의 성인 세겜 땅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나가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모세오경을 가지고, 즉 다섯 남편을 끼고 돌면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고자 분투했던 사마리아 공동체를 대표한다 볼 수 있죠. 5장은 38년 동안 민수기에 보면 광야에서 방황을 하죠? 38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식물인간처럼 한 치도 전진하지 못하고 전진과 후퇴를 계속하다가, 식물인간적 무기력 상태에 있다가 가나안 땅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솔로몬의 다섯 행각, 심지어 이렇게 북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이런 해석을 한 사람이 알렉산더 클레멘트 오리겐 같은 사람입니다. 처음에 교부들은 이것을 우리보다 훨씬 allegorical 하게 생각했습니다. 이걸 개인의 어떤 기구한 삶이라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불순종하는 역사를 만회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본 것이죠. 그런 해석이 맞습니다. 물론 맞다 하더라도 여기 있는 개인을 주목하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에서 그 무리들은 만나를 먹고 간신히 살아가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합니다. 8장의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이 간음하다 붙잡힌 현행범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정확하게 호세아의 드라마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개인이 나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호세아가 말한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은 간음하다 붙잡힌 현행범으로써 바로 사형을 시켜도 마땅한 간음녀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호세아적 맥락에서 볼 때 이 여인은 개인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집적 누적적으로 집약한 사람이고, 그 개인의 삶도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는 중심점에 있습니다. 이런 본문을 보고 전부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오리겐 같이 allegorical한 해석을 지나치게 하면, 예수님 생애에 없던 사람들이다, 이건 신학적인 이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동원된 날조된 주인공이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교부들은 날조됐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allegorical한 해석을 많이 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우리가 가진 성경 중심사본, 그리스사본, 웨스트알렉산드리아 사본이라고 하는, 가장 필사가 잘된 사본에는 이게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 책에 보면 요한복음 8장은 원래 성경이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데 그렇게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이라고 하는 것은 주후 397년 아타나시우스가 만든 결집된 성경인데, 그 전에 이미 요한복음 8장이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만일 요한복음 8 1-11절이 5세기 때 발견된 사본에 처음 등장했다? 4세기까지 사본에는 이게 없었다, 아타나시우스가 만든 성경 컬렉션 다음에 이게 나왔다, 그러면 5세기 때 경건한 사람이 이걸 삽입했구나 알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중심사본에 이것이 없다 하더라도 이것이 성경이 아닌 건 아니죠.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 1 29절과 35절의 구절을 정확하게 illustration 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한다는 것,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것, 즉 십자가를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이건 분사구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간 상태이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는 구조, 익숙하죠?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직전인 월요일부터, 마지막 수난주간에 했던 행태입니다. 마가복음 11장에 예수께서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출현하시고 성전을 둘러보시고 다시 성전 밖으로 나가시고, 11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이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주간에 감람산에 베이스캠프를 치시고 성전에 오르셨다가 다시 감람산에 가시고 이걸 반복하신 거예요. 5일 동안 반복하셨는데 내용 자체가 마지막 수난주간에 있었던 일인 것을 암시하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 자체가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시험하는 수요일, 수난주간 수요일 또는 화요일, 모릅니다. 대시험일날이라는 것, the last great trial days, 이라고 신학적으로 말합니다. 바리새인 시험하죠. 사두개인 시험하죠. 사두개인은 형사취수제도를 이용합니다. 어떤 여인이 있었습니다, 형과 결혼했습니다, 그 형이 죽었습니다,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동생이 죽었습니다, 또 동생이 있었습니다, 이다음 부활한다면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겁니까? 이렇게 묻는 게 사두개인입니다. 부활신앙의 어리석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사두개인이 그렇게 했죠.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좋습니까? 헤롯당들이 한 겁니다. 시험하는 것이 마가복음 11장에 나오죠? 대시험일 주간에 시험했을 거라 본 겁니다. 로마의 시민법을 예수가 어기는가 보자, 로마의 시민법을 어긴다면 예수는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시민 외에도 로마의 행정통치권이 미치는 모든 나라에는 로마법을 시행했는데, 로마법에는 재판 없이 사형을 시키면 법에 저촉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종교법에는 재판 없이 돌로 쳐 죽이는 게 가능한 몇 가지 범죄가 있는데 그게 바로 이 범죄입니다. 이 범죄는 재판 없이 바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법입니다.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법은 모든 랍비들이 묵수하고 있고 지키는 법입니다. 예수는 랍비입니다. 예수는 당시에 랍비처럼 보였기 때문에 종교당국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을 묵수하면서 돌로 쳐 죽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소하려고 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8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로마총독의 법질서를 지키는 자인 것처럼 해서 예수를 고발하려고 해요. 어떻게 이것이 진퇴양난이 됩니까? 예수가 로마법을 따라서 이 사람을 죽이지 말라 하면, 레위기 1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붙잡힌 현행범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오래된 율법을 거부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모세를 배척하는 셈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면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관할에 있는 사건을 자기 마음대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로마 총독은 예수를 입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딜레마입니다. 예수님이 이 딜레마에서 어떻게 했느냐? 너무 기가 막합니다. 카타 쿱소, 아주 중요합니다. 쿱소라는 헬라어가 몸을 구푸린다, 아나 쿱소, 하면 구푸렸던 몸을 다시 올린다, 아나 하면 위로, 카타는 아래로, 카타 쿱소 아나 쿱소가 몇 번 나옵니다. 몸을 구푸린다는 말이 두 번 나오고 몸을 펴는 게 한 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놀랍도록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만 배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도 감사해야 하지만 진퇴양난의 위기를 돌파하는 생활지혜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기가 막힙니다. 사람을 돌로 쳐 죽이려고 돌을 들고 왔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을 동시에 노려보고 있습니다. 돌을 쳐 든 군중과 여인 사이에 예수님이 딱 끼어 있습니다. 돌을 쳐 든 군중은 율법을 집행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신적정의를 상징합니다. 신적정의를 상징하는 군중의 돌과 하나님 계명을 지키지 못하여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성을 대표하는 여인 사이에 예수님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도 집행하셔야 하는 하나님 아들임과 동시에 로마서 7장이 말하는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모자라서 항상 잘못되게 행동하는 인간의 연약성을 대표합니다. 그 사이에 예수가 끼어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이 기독교를 다 설명한다고 봅니다. 돌로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은 가정의 신성성을 보호하려고 하는 극단적 열정입니다. 간음죄는 우리나라에선 친고죄죠? 우리나라 간음죄가 친고죄로 되어 있어서 심판을 못하는데 무조건 간음은 사회적 범죄로 다스려야 한다, 이게 지금 양성태 대법원장 입장이에요. 가정의 신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녀 둘 다 쳤는데 남자는 도망가 버렸는지 없었습니다. 새벽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동침하는 현장에서 붙잡힌 겁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존엄을 파괴당한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진노를 촉발하기 때문에 모든 범죄, 선을 넘는 범죄, 하나님의 계명을 넘는 순간 우리는 진노를 초래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감으로 내재된 모든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노합니다. 그건 일종의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제가 물건을 훔치죠? 제가 물건을 훔치는 순간 주인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예를 들어서 현대백화점 보석상에 가서 망치로 두드려서 양진일 목사도 나눠주고 나눠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와서 저에게 돌을 던지는 겁니다. 제가 수사를 받습니다. 너는 왜 보석을 훔쳤냐? 저는 보석에 대한 끊임없는 탐이 있어요, 보석만 보면 소유의식이 없어지고 만민 평등사상이 생겨요, 내 것 니 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심리 분석에 들어갑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냐? 네 살 때부터 일어났습니다, 정말 그렇나 실험을 해보자, 해보게 됩니다. 남의 아내 남의 남자와 잠을 자는 이 범죄는 굉장히 찰나적이긴 하지만 보상감이 큽니다. 성범죄의 특징은 찰나적이지만 가장 심리적 보상이 큽니다. 이 자매님과 남자는 어떤 사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illegal sexual relationship을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무언가 그 경계선 상에서 갈등하다 마침내 잠을 자 버린 겁니다. 우리 인간의 죄는 이런 식으로 일어납니다. 죄는 하나님이 금지한 것을 어기고 싶은 총체적 욕망입니다. 우리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완벽하게 만드셨다고 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성경은 다짜고짜로 욕망의 범람을 경험하면서 쓰러지는 인간을 보여주고, 그 인간을 다짜고짜로 동정하는 하나님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창조비밀 아래 부서지기 쉬운 내적취약성, 하나님의 계명을 보고 양성반응하지 못하고 음성반응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내적요인이 마치 우리한테 있었던 것처럼 바로 하나님은 죄짓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 계명을 따라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200도에서 구우면 질그릇이 되고 800도에서 구우면 상감청자가 됩니다. 200도에서 구워내진 질그릇 같은 우리를 에덴동산의 숱한 모든 열매는 따 먹어도 되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따먹지 말라, 만 가지는 따 먹되 한 가지는 따 먹지 말라는 그 계명도 아담이 못 지킵니다. 바로 그 하나, 만 가지를 따 먹으라는 자유보다는 한 가지를 따 먹지 말라는 금지가 마음에 걸려서 기어코 따 먹고 마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계명을 범하고자 하는 욕망에 시달리는 존재입니다. 아담이 그랬고, 아담 외에 모든 인류가 아담 후손이 그랬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3장에서 벌써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같은 현행범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옵니다. 바로 창세기 3장에서 첫 금지 열매를 따 먹고 두려워서 피하여 숨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의 죄를 다루시는 방법을 보면, 왜 이런 죄를 지었어, 죽여 버릴래, 너 같은 놈 없는 놈 취급하지, 너 죽고 나 죽자, 이런 식이 아니라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죄를 덮어 주십니다. 죄를 징벌하셔야 하는 분노도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 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간당간당한 경계선에 있다가 안 지키는 쪽으로 결단하여 인생을 자기 파괴적인 쪽으로 살아버리는 연약한 아담 후손의 총체적 취약성 연약성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시는것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딱 중간에 섭니다.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bending down,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께서 땅에 쓴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글을 아신다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글을 아신다는 분이다, 예수님께서 말을 하시는 분은 맞는데 글을 아실 분이 아니다, 이런 논쟁이 있었는데, 이 본문 때문에 예수님께서 글을 쓰시는 분이다, 땅에 뭔가를 그렸다고 하지 않고 쓰셨다고 돼 있거든요. 땅에 썼다는 것은 글을 썼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람어로 쓰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장면을 보세요. 돌을 들고 쳐 죽이려고 격앙된, 출렁이는 적개심이 있는 순간에 예수님이 몸을 숙이니까, 분위기가 갑자기 차분해졌겠죠. 몸을 굽히시니까 궁금해졌겠죠? 예수님께서 호기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글을 썼겠죠. 아람어로 쓰시니까 몰랐겠죠? 그렇게 한 번 하고 나니까 동물적 적개심이 약간 진정됐겠죠. 그래도 예수님이 계속 글을 쓰고, 두 줄 세 줄 쓰면서 안 일어나시니까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아나 쿱소,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이 말은 구약성경에 없거든요.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칠 수 있다는 말이 없어요. 집단적 응징에는 집단이 범죄한 사람보다 의롭다는 전제가 되기 때문에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돌로 칠 때는 집단적 공의가 그 개별적인 사람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아도 돼요. 돌을 든 집단이 응징할 만한 의로움이 상대적으로 커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없는 그 부분에 대해, 돌로 쳐라, 그런데 순서를 정해줄게, 간음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부터 던져봐라, 여기 간음죄라는 말은 없습니다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때 간음죄 함축돼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왜 그걸 알 수 있느냐?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데 어른부터 느끼는 걸 보니 간음죄인 게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말한 간음죄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쳐다보는 겁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 당시 랍비들이 보장해준 법에 보면 자기 아내보다 더 sexually attractive 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쳐다보다가 자기 아내를 소박 맞힐 권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한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남자들이 얼마나 악했느냐? 유력한 돈이 많은 사람들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똑같이, 간음한 연고 외에는 아무도 자기 아내를 divorce 이혼시킬 수 없는데 아내에 대한 양육책임을 포기하기 위해서 이혼시켜버리고 새 여자를 얻었어요. 일부다처제가 아니에요. 일부다처제는 지금도 굉장히 양심적인 사람만 하는 거예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부다처를 하면 성자라고 말해요. ? 서너 명의 아내를 양육하면서 똑같이 사랑을 베푸는 것은 엄청 하기 힘든 거예요.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런 남자들이 아니라 자기 아내를 타이어 교체하듯이 교체해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간음한다는 것을 그렇게 정의했을 때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무도 이 범죄를 벗어날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 멀쩡한 아내를 제쳐놓고 새로운 여인을 향해서 음욕을 품고 가만히 쳐다보다가 intensive looking 관찰을 하다가 어느 날 자기 아내를 버리고 새 여자를 데려오면 간음한 것이다, 이런 범죄에 연루되지 않은 사람만이 돌로 쳐라고 했더니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step by step, one by one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간음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밖에 없네요.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오직 예수님만 칠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대변하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인간의 죄와 연약성을 체휼해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돌로 자기 머리를 치신 거예요. 자기 머리를 치심으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일종의 self cursing, 자기를 저주의 내어줌으로써 하나님 공의도 만족시키시고 여인의 죄도 용서해주신 거예요. 이게 십자가에요. 갈라디아서 3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군중들이 버리고 간 돌로 자기무한책임인 것처럼 자기를 징벌하는 일은 자기를 십자가에 매다는 죽음에 거는 이 결단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의 죄와 연약성을 무한책임적으로 해결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자기 책임으로 돌렸음을 암시했어요. 하나님은 아담 인류의 죄를 당신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 당신의 독생자가 자기 저주에 해당되는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여인의 죄를 지고 갔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예수님의 이 행동 때문에, 예수님이 몸을 구푸린 행위가 그 여인의 죄책과 동일시되는 행위인 것이고, 예수님이 침묵하면서 돌을 든 군중 틈 사이에서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이한 것 자체가 죄인과 동일시되시고 죄인의 구세주가 되기로 하셔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 사랑의 진수죠. 이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처참한 내 죄악된 몸에 쏟아질 진노의 돌을 당신의 몸으로 전가시켜서 당신이 십자가에서 저주받아 죽어주신 겁니다. 그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인류에게 예수님이 전해져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죄 안에서 하나가 됐습니다. 종교문제 중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건 기독교와 똑같아요. 그런데 예수님 외에는 아무래도 해결이 안 돼요. 불교나 이슬람교 누구도 죄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해 준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우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마음씨 좋은 구세주와 주가 계시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대로 전파되기만 하면 모든 인류에게 복음이 됩니다. 이런 훌륭하고 감동을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겁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용서해주셨죠? 삭개오를 용서해주는 것이 처음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이완용을 용서한 것과 똑같습니다. 이완용을 용서한 게 기분 나빠서 모든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을 실족시켰지만 회개한 이완용이, 구원받은 이완용이 독립군 앞잡이가 돼서 새로운 갱생을 산다는 전제가 붙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죄 용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죄 용서는 지금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주장하는 죄 용서와 너무 달랐습니다. 죄용서는 죄를 다시 정죄하지 않는 삶으로 귀결됐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현행범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볼 때 현행범과 같습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계명, 탐심을 하지 말라는 그 계명에 탐심을 부림으로써 저항했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간음함으로 저항했고, 우리는 숱한 순간에 죄를 범했습니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했던 아마존 강에 있는 사대부족들, 그들은 죄가 없었겠습니까? 인류학자들은 매우 순진합니다. <슬픈 열대>라는 책을 썼던 레비스트로스 같은 인류학자들, 원숭이 연구가 제인 구달 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수렵채집 경제의 원시부족들은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티벳 라다크도 서구인들이 볼 때는 목가적으로 보이지만 아닙니다. 1730년대 미국 뉴저지 클램베리 펜실베니아주, 뉴욕주에는 아메리카 원주민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그 원주민 말로 전도했던 사람이 29살에 죽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사위가 될 뻔했던 데이비드 브래너드입니다. 그 순수하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부족에게 가서 로마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 말로 죄를 그렇게 많이 회개합니다. 그 원시인들에게도 문명이 쌓아왔던 모든 죄가 다 나타났습니다. 간음죄가 나타났고 살인죄가 나타났고 거짓말한 죄가 나타났습니다. 인류에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구해주는 그분이 우리 왕이 되셔야 하고 그분이 우리 주가 되셔야 하고 그분이 우리 구세주가 돼야 마땅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대에서 이렇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에서 고개를 숙이고 천사의 저주를 받을 직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나타나셔서 우리의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성을 동정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셔서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희망을 주시고 갱생을 주시고 재생을 주시고 재창조해주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 자매님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경험 안에서 하나가 됐습니다. 예수 안에서 정확하게 죄 사함의 경험이 우리를 하나로 묶이는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게 없다면, 예수가 바라는 이상사회에 대한 공동체 때문에 우리가 뭉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혈의 공로, 결정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원초적 감격 희락이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들고 교회되게 만듭니다. 우리처럼 사회성이 강한 종교인들은 십자가의 피 복음을 많이 강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래요. 저는 십자가의 피 복음을 안 믿는 사람으로 알더라고요. 하도 사회문제에 대해 글을 쓰니까, 목사님도 십자가의 피 복음을 믿습니까? 나한테 그렇게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하나님 나라 운동만 하고 사회운동만 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한다는 걸 모르고, 김회권 목사도 복음 믿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교단의 목사님들은 우리를 오해해요. 제가 엄청 오해를 받더라고요. 강경민 목사님이 그런 욕을 얻어먹고 왔더라고요. 그런 김회권과 어울린다고, 우리가 이걸 많이 강조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 복음을 강조하고, 양목사와 우리는 특별히 예수의 보혈 밖에 없다는 찬송을 많이 불러야 오해를 안 받습니다. 여기에서 제 인생이 출발했고 시작했는데 너무 사회문제에 대해 한국교회가 발언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발언하다가 십자가의 피 복음을 모르는 사람으로 오해받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요한복음 8장이 제 영적호적에 보면 여기가 본적입니다. 십자가의 피 복음, 우리 저주를 대신 받으신 주님의 십자가 죄 용서의 감격으로, anybody in christ,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he or she new creature, 그와 또 그 여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운 피조물의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오늘 그래서 210장 한국 전통교회가 너무 좋아하는 찬송을 골랐습니다. 모든 한국교회에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찬송을 많이 부른다는 걸, 보혈을 엄청 찬양한다는 걸,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저주를 걷어 가셨습니다. 주님은 군중이 들었던 돌로 자기 저주적 십자가의 죽음을 채택함으로 간음하다 붙잡혀 온 현행범 여인을 용서하시고, 자기는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주님 이 여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고 우리가 수치스러워서 몸을 들 수 없는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구푸린 자리에 오셔서 몸을 구푸리셔서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주님 다시는 죄 짓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임 받는 인재가 되길 원하고 신자가 되길 원하고 백성이 되길 원하니 주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주님 우리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많이 할수록 사람들이 우리를 오해합니다. 주 예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본주의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특별히 한국교회를 실족시키지 않게 하시고, 더욱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에 의지하여 하나님 나라 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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