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1부 예배-요한복음 8:21-30
(하나님 아버지의 도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그가 말하기를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그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
도제라는 말은 apprentice, 직접 master 장인의 기술을 같이 살면서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도제는 master, maestro 장인, 거장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치는 학생시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당당함, 예수님의 기탄없음이 어디서 나왔을까? 집안 분위기가 예수님을 가르쳐서 이렇게 되진 않았겠죠? 육체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예수님에게는 보통 제도권 교육이 줄 수 없는 당당함과 품위와 존엄함이 있습니다. 그 비밀이 무엇이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굉장히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예언자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예언자들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내가 그로부터 듣고 보고 배운 것을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이렇게 듣고 보고 배웠을까요? 예수님께서 듣고 보고 배웠다는 것은 육체노동자 목수 시절의 어떤 특수한 경험일까요? 아니면 수도원 같은 어떤 암자에 들어가서 상당기간 하나님으로부터 수련을 받았다는 말일까요? 무엇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현장일까요? 수도원에서 칩거하면서 특수한 seclusion, 은둔을 하는 경험 또는 고행이나 수도하는 경험 또는 신비주의적인 경험에 들어가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신비를 많이 경험하는 것, 보통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할 때는 세 가지입니다. 신비적 은둔경험 또는 놀라운 기적과 함께 하신 하나님 경험, 아니면 고행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경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이 세 가지가 전부 다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투명할 정도로 삶이 공개되었고, 대부분 그는 적어도 18년간 육체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말은 일상생활에서 함께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고 봐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함께 했을까? 예수님의 메시아적 토라 study, 예수님께서 아침마다 어떻게 성경말씀을 배웠겠는가를 암시하는 구절이 이사야 50장 4-6절입니다. 메시아의 종의 노래 네 개 중 하나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은 이사야 53장 7-8절에 나오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께서 고독을 당하면서 모욕과 수욕을 당하는 장면은 이사야 53장 4-7절 말씀인데, 그렇게 된 이유, 그런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아침마다 귀를 열어서 하나님 말씀을 직접 가르치는 것,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토라의 두루마리 말씀을 삼키고 묵상하고 소화하면서 토라의 두루마리를 순종이라는 이름으로 읽어 내렸기 때문에 아침마다 귀를 열어주시지 않았겠는가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라는 말을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귀를 깨우치시고 귀를 열어주시고 하나님 말씀의 이치를 터득하게 하는 이 경험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라는 겁니다. 은둔수도 고행신비 등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축복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인데,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셔서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시고 말로 곤핍한 영혼을 어떻게 위로할 줄 알게 하시며 진리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는 그 일을 묵묵히 견디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학자처럼 알아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순종을 철회하기 위해서 뒤로 물러가지도 않았습니다. 전진하는 순종의 전향적 화신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입니다. 아침마다 예수님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위하여 한 걸음씩 전진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토라를 읽고 한걸음 순종하기 위하여 말씀을 읽는 사람에게 아침에 길을 열어 주시고, 깨우쳐주시고 말로 곤핍한 영혼을 위로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도제적학습, 가내수공업적인 모방학습이 너무 중요합니다. 신앙은 가내수공업적인 모방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절대로 책을 통해서는 할 수 없습니다. 직접 믿음 좋은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이 믿음을 배우는 겁니다. 너무 놀라운 일이죠? 믿음 좋은 사람들과 도제적 관계 속에서 믿음의 거장으로부터 믿음을 배운다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홍해를 건널 때 도제적 학습을 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그 장면에서 모세와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강물을 걸었습니다. 죽음의 물결을 밟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 똑같은 사건을 여호수아가 요단강 앞에서 합니다. 제사장과 함께 출렁이는 요단강물결을 밟았습니다.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도제적 학습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아침에 하나님으로부터 배운 학습의 결과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한 번 배울 때마다 한 번 당당해집니다. 우리가 전향적 순종을 배울 때마다 뒤로 물러나서 내 수염을 벗고, 수염을 벗는다는 말은 곤욕과 심문에 처한 사람들, 하나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나를 모욕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모욕 때문에 내가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박해하고 모욕하는 사람들 때문에 증오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당하는 고난과 처절한 고통 때문에 복수심으로 뭉쳐져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제적 학습을 통하여 일상생활에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갔습니다. 어느 새 우리도 예수님 같은 면모가 드러납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한 걸음씩 순종하고 전향적으로 순종하고 우리의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다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태산과 같은 평화가 생기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피조물의 한계 안에서 복받치는 풍랑에 조금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토라를 열고 한걸음 순종하는 그 순종의 발걸음이 수염을 뽑고 내 등짝을 치는 자들 앞으로 가는 발걸음이라 할지라도 뒤로 물러가서 후퇴하지 않는 전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내내 ‘나를 보내신 이가’ ‘나를 보내신 이의 뜻’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 나를 파송하신 분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피파송의식으로 가득 찬 상태를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했죠?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표현을 신화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기 위하여 목숨까지 걸 정도의 뜻으로 썼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을 보세요.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서 하나님 말씀의 힘 앞에 자기를 복종시키면 하늘에서 난 자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나를 보내신 뜻에 감미로운 순종을 일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했을 때 하늘이라는 말은 순종의 극한치를 수행하신 분, 하나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하겠다는 결심을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늘에서 났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성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아들을 향한 말씀이 맞죠? 이론적으로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이 들었던 모든 말씀 옆에 누가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고 개별적으로 부서지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 위에 누가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할 독생성자 예수가 그 모든 말씀을 다 들었단 말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만회할 만큼 종말에 완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 동안 일으켰던 모든 불순종이 독생성자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순종자가 돼버린 겁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 아들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말씀이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아버지께 입양된 아들이지만 이스라엘 백성 위에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반과 같은 독생성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는 모든 순간마다 항상 덮고 순종하고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한 번 보세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했다가 불순종했다가 사이클이 엎치락뒤치락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불순종을 순종한 것처럼 여기게 만들어줄 위대한 순종을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가 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완벽하게 상쇄할만한 완전한 순종을 바칠 아들이 자신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언어를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과 상관없이 들으면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사명과 관련시켜서 예수님 말을 들을 때 너무 기가 막힙니다. 이사야 42장 1절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이방의 빛’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죠?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이사야 42장 49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너는 열방의 빛이라는 그 말이라고 했죠? 이사야 42장 1절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그렇게 말씀했죠. 6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라는 말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세상 사람들, 어둠 속에 빠진 사람들에게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전광석화처럼 깨닫는 사람이 누구냐? 자기가 살고 있는 인생이 너무 처절한 어둠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이 크게 들려요. 자기가 살고 있는 인생이 어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 그런 영적 지각이 깊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언어가 비껴가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 정도 나이가 되면 20대나 30대 정도가 되면 예수님 말씀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말씀 하나하나가 너무나 절실하게 내 심장을 두드리는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건 정확하게 이사야 42장 6절이죠.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입양한 아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성자로써 아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주시는 모든 말씀의 현장에 이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던 거죠. 이스라엘 백성이 육만 번 불순종했다고 하면 예수님은 육만 번 순종을 해서 내가 항상 그의 일을 기뻐하면서 순종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육만 번의 불순종은 온 인류의 불순종을 대표하는 집약적 불순종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온 인류가 저지른 불순종의 집약적 불순종을 이스라엘 백성이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불순종하는 모든 순간에, 아담 인류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고 쓰러져서 죄짓고 망가지는 그 모든 순간에 독생성자 예수님은 듣고 행하고 보고 그대로 하나님 아버지 뜻을 행했다는 겁니다. 독생성자를 정의합니다. 입양된 이스라엘 백성이 말씀을 듣고 매순간 쓰러지고 넘어지는 그 자리에 똑같은 말씀을 듣고 기쁨 가운데 행하는 아들이 독생자다, 왜?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는 아버지 품속에서 아버지 마음속에 말씀의 논리를 완벽하게 납득하고 이해하고 아버지 뜻을 행하기 때문에 독생자입니다. 교회 안에도 독생성자급 교인들이 광야에 있는 불순종의 이스라엘 백성급 불순종 교인들을 끌고 갑니다. 교회 안에도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들과 순결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가면서 아우성치는 백성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여전히 교회다운 이유는 아버지께 독생자급 순종을 바치는 사람들이 교회에 종신구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 도덕적 개차반 같은 사람이 많이 와도 교회는 여전히 친절이 녹아 있고 순결이 있고 용서가 있는 곳이 됩니다. 참 신기합니다. 세상에서 교회조직이라는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아니면 민간인을 모아놓고 2천 년간 이런 일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면 2천 년간 민간인을 모아 놓고 계속 일생 동안 헌금하게 만들고 무료로 노동착취 비슷하게 만들고, 아무 일에나 나서서 임금도 요구하지 않는 이런 조직을 끌어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교회만이 모든 수고를 돈 받지 않고 기쁨으로 합니다. 그건 예수님의 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시퍼렇게 주체성과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개성과 주체성을 가진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부려먹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철두철미하게 독생자 의식이 나타난 부분은 어디입니까? 1장 3장 5장 7장 8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독생자의식이 잘 나타납니다. 독생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던 모든 순간마다 순종으로 이스라엘 불순종을 만회해버린 분,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인류를 대표이기 때문에, 아담자손의 대표이기 때문에 인류전체에 제 갈길로 가는 죄의 역사를 뒤집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돼서 세상의 모든 불순종의 결과를 자기 혼자 뒤집어쓰고 가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은 독생자 의식이란 무엇일까? 이런 겁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큰 단위로 보면 전 세계 만민 중에서 어떤 민족이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까? 전 세계 만민 중에서 민족적 단위로 보면, 모든 민족이 우상을 섬길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 민족은 하나밖에 없죠?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만이 집단적으로 세계만민과 비교해볼 때 하나님의 어린 양이죠? 그런데 이 세계에 우상을 숭배한다고 바벨론 포로생활을 70년 한 민족은 누구밖에 없어요? 이스라엘 밖에 없죠. 인류전체를 상대로 민족단위로 할 때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이스라엘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을 상대로 할 때 이스라엘 민족 중 참 누가 이스라엘 민족입니까?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이때 우리는 세계 만민입니다. 세계만민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이스라엘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입니다. 일차적으로 이사야 53장의 어린양은 이스라엘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죄를 뒤집어쓰고 가는, 괴로울 때도 입을 열지 않고 세상 만민들의 죄를 자기 영혼의 속건 제물로 세계만민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뜻을 전하는 어린 양입니다. 이사야 53장 10-11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많은 사람의 죄를 친히 담당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은 요한복음 1장 29절, 36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 독생자, 다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독생자가 세상 죄를 지고 갔음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결국은 어떻게 우리 죄가 용서됐는가 내적논리와 구조를 설명해주는 게 오늘 본문입니다. 다시 세상과 어린양의 차이입니다. 21절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왜? 너희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갈길로 가는 겁니다. 세상 만민이 다 부동산 투기하더라도 죄를 짓더라도 부동산 투기하지 않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모두 다 커닝하고 장학금 받더라도 커닝하지 않고 순결하게 자기 실력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어린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 뇌물 받고 공무원사회를 부패와 타락으로 몰아가지만 뇌물 받지 않고 자기 월급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가난케 된 깨끗한 경찰공무원과 깨끗한 검사님과 깨끗한 판사님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신문기사를 정직하게 쓰기 때문에 촌지를 받지도 않거니와 촌지를 주는 사람도 없는 무교병 같은 상태가 된 사람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 자비 은총 광선을 계속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죄 가운데 죽으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가는 순종의 길을 가지 못합니다. 왜? 로마서 8장 7-8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이 오해합니다. ‘그가 자결하려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이 말은 죄의 욕망에 충동되는 자로, 죄의 욕망, 죄의 법아래 지배를 많이 받는 상태에서 났고, 나는 하나님 말씀에 추동과 하나님 말씀의 감화 감동 속에 태어났기 때문에 나와 너는 길이 다르다,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 요한일서 2장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나는 이것에 매이지 않는다, 참 놀라워요. 이 세상에서 모든 성공한 사람의 몸에는 경박함이 있어요. 어딘지 모르게 부러움을 자아내지만 자기도취적 경박함이 있습니다. 참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성공한 사람이 갖는 경박함과 자기도취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 예수님에게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포기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노력할 필요 없이 겸손한 분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메시아가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몰래 돌로 떡을 만들어 드시면 진짜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 자식들 돌로 떡을 만들지, 왜 못 먹어?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됩니다. 빵을 달라고 하자, 왜 빵만 먹으려고 그래? 고기를 먹어야지, 이렇게 말하며 단두대에 갔던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공감하지 못하는 메시아가 됩니다. 이 논쟁을 보세요.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이런 말들은 세상과 독생자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아담인류,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죄를 짓다가 죄 가운데 죽습니다. 왜?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이 세 가지를 하다 보면 죽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독생자다,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이 표현은 많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제가 아까 이사야 50장에서 아침마다 귀를 열어주셔서 들었다고 했죠? 이 말은 하나님께 순종을 누적시킨 사람, 하나님께 많이 순종한 사람은 영적인 능력이 매우 커집니다. 순종만이 능력을 크게 합니다. 여러분 능력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께 아침마다 귀를 열고 순종하면 치료의 능력도 감화력도 인격의 힘도 세상의 모든 실력도 다 늘어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아침에 귀를 열고 누적된 순종을 드리는 사람들은 세상일에서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영적인 감화력이 지극히 커집니다. 머리가 좋아지는 건 말할 것도 없죠. 아침에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주시는데 우리의 총명을 흐리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총명을 맑게 하십니다. 모략과 지혜와 총명의 신이지, 아둔과 망각과 흐트러짐의 영이 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학원 다니지 마시고 기도하셔서 영어하시기 바랍니다. 학원 다니면 시간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돈도 많이 들고, 아침에 기도 많이 하셔서 방언의 은사가 터지도록 기도하세요. 나는 왜 그렇게 도전해 보지 않는지 이상합니다. 아침마다 귀를 여셔서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하면 모략과 재능의 신이 임하여서 능력이 축적됩니다. 순종이 능력을 축적시킵니다. 순종이 영적감수성을 심화시킵니다. 순종이 영적지각력과 말씀을 깨닫는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거침이 없었습니다. 당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당당함과 거침없음은 순종에서 나왔습니다. 피터모린, 이세종, 이현필, 우리가 존경하는 순종하는 사람들 위인들은 순종을 아침마다 바친 사람들입니다. 아침마다 순종을 바친 그 사람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에게 감화력을 미치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몰래 범죄한 목사들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전혀 그들은 능력이 없습니다. 범죄한 성직자들은 능력이 없습니다. 관료질서 안에서 높은 벼슬을 차지한 종교권력자들은 하나도 능력 없습니다. 누가 능력 있습니까? 아침마다 일상적 순종을 바친, 독생자급 순종을 바치고 도제처럼 아침마다 듣고 배우는 사람이 능력있는 겁니다. 이 말을 실감있게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세 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세상 죄를 지고가는 순간에 내가 하나님 뜻을 대행하기 위해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독생성자가 되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임을 깨닫게 된다, 인자를 든다는 겁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인자를 번쩍 들어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키는 겁니다. 셋째 부활 승천시키셔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히는 걸 인자를 든다고 말합니다. 이런 세 가지 일을 경험할 때야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인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이 세가지를 다 경험하시고 오순절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정체를 알려주시고, 바울도 똑같이 오순절성령께서 눈을 여셔서 그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가 하나님 아들 독생자인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고린도전서 15장 3-5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처절한 저주의 죽음인 걸 알았지만 그 저주받은 죽음이 독생자의 사명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독생성자의 저주받은 죽음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만회한 순종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자마자 다시 의로워집니다. 예수님을 믿자마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의 동아리에서 독생성자의 동아리로 옮겨가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순간 순종의 동아리로 옮겨갑니다. 순종의 동아리는 충분히 순종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의롭다는 말을 듣고 후에, 먼저 돈을 받고 뒤에 은행에 가서 돈을 갚는 식입니다. 먼저 의롭다함을 받고 의로움을 채우는 방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의로움을 채워서 의롭다는 칭호를 받기 원합니다. 의로운 행동을 많이 해서 너는 의로운 백성이다, 라는 말을 듣는 것이 유대인의 공로주의 신학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겁니다. 먼저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남은 일생 동안 의로움을 채워가도록 돕는 것이 예수님의 신학입니다. ‘인자를 든 후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임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언제? 성령 받고 나서, 성령받고나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죽음이 저주 받은 죽음임긴 하지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저주받은 자의 죽음이고, 대속적인 죽음인 걸 알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아 죽으신 게 아닙니다. 29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이 말은 독생자입니다. 그 독생자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함께 계셨고 음부에 내려가서 삼일동안 음부에 갇힌 그 순간에도 함께 하셨고 부활하시는 순간에도 함께 계셨고 부활승천할 때도 함께 하셨다, 그런 독생성자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었고 그런 일련의 모든 진실을 인자를 든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이 예수님 정체를 들리신 인자, 십자가에 수치스럽게 죽은 인자, 부활하신 인자, 승천하신 인자, 세 가지 들리신 인자를 아는 것은 이미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여러분 삼중적으로 들리신 인자를 영접했다, 그건 하나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되면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 반열에서 순종한 독생성자의 반열로 나라 소속이 옮겨집니다. 우리는 독생성자급 하나님 아버지의 도제급 학생이 되었습니다. 아침마다 귀를 여셔서 여러분 귀를 깨우칩니다. 여러분이 분명 하나님 자녀라면 아침에 반드시 말씀을 주십니다. 자녀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안 주실 리가 없습니다. 한 번 깨어보세요. 말씀을 펼쳤는데 아무런 느낌이 안 온다, 먹먹하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오늘 일상생활에서, 여러분 직장의 현장에서 소소한 일상의 현장에서 그의 기쁘신 일을 행하여, 듣고 배우고 깨우친 것을 행하여 순종을 누적시켜 독생성자급 죄를 지고 가는, 이 세상 죄를 무효화시키는 준대속적인 어린양 같은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상이 오지 못하는 길입니다. 어린 양이 가는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 어머니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친척도 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이해 못합니다. 친한 친구도 제 인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은 오지 못하는 길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을 진실하게 쫓아가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마무리합니다. 독생성자는 첫째 아침마다 귀를 깨우쳐주셔서 듣는 사람, 배우는 사람, 듣고 배운대로 행하는 사람, 일상의 현장에서 누적시켜서 마침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이 세상에 만연한 대한민국의 중심죄악들을 없애버리는, 중심죄악들을 지고 가는 어린양과 같은 순종의 삶을 사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독생성자가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고 인류가 불순종한 그 자리에 억만 번의 불순종을 만회시키기 위해서 수억만 번 더 많은 순종을 바쳤습니다. 다 양같이 제 갈길로 가는 저희의 인생, 어린양 예수님이 세상죄를 지고 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들리신 후에야 그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사소한 일상생활에서 아침마다 귀를 열어주시고 순종의 발걸음을 걸어가는 저희 되게 도와주시고, 저희도 세상죄를 지고 가는 독생자의 반열에 서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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