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1부 예배-요한복음 8:31-40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예수님과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논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독특한 친밀성을 과시하다가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는 독특한 친밀성은 유대인 랍비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 앞에서 하나님의 이 영광의 광채 앞에서 두려워 떨던 모세적 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발적으로 들렸습니다. 유대인 랍비나 예언자들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와 이렇게 독특한 관계성을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친밀성의 주장은 주장일 뿐만 아니라 이적과 표적을 통한 능력으로 입증됐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자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신학적 틀 안에서 용납될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이스라엘 백성사이에 집단적인 친권관계, 집단적 친자관계가 있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맏아들이라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처럼 한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자기가 맏아들 의식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한 가지일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가 이스라엘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모든 이스라엘의 적분자,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계약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할 때만 유일하게 통용되는 납득되는 주장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 동안 계속된 모든 이스라엘의 계약적 대표자라는 생각을 할 때만 예수님의 맏아들 의식, 독생자 의식이 가능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모든 구약성경의 하나님 말씀들은 위대한 순종을 바칠, 하나님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순종을 바칠 자녀들에게 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실 때는 순종을 기대하면서 한 말이고, 실제로 역사상 나타났던 민족들이 순종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더라도 결국 누구를 향해서 한 말씀이십니까? 이 모든 것을 순종하실 아들을 향해서 한 말이죠. 누가복음 24장 35-44절에 세 번 반복됐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모든 불순종을 만회할만한 순종을 바칠, 이스라엘 백성 모든 개개인이 행한 불순종을 상쇄하고도 남을 순종을 바칠 독생자, 독생자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불순종,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1500년의 불순종을 만회할 완전한 순종자 아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불순종하던 실제아들과 불순종하는 실제아들의 불순종을 만회할 독생성자의 교체와 대립의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시대 때는 누가 예수님을 가리키는 존재에요? 아브라함이죠. 너무 쉽죠? 노아시대 때, 사무엘시대 때, 다니엘 시대 때는 다니엘이 위대한 순종을 바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죠. 하나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장을 향해 가다가 중간에 떨어진 미사일과 같아요. 예수님이 올 때까지는, 예수님이 왔을 때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모든 말씀이 누구에게 집적됐죠? concentrated 되고, confine 되고, accumulate 됐어요. 전부 다 모아졌어요. 모든 순종, 한 마디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 죽기까지 복종하여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이 예수님 안에 일어났으니 예수는 독생자 맞죠? 이 이스라엘 1500년 역사를 고도로 압축하는 독생자 의식을 가진 예수의 언동이 요한복음 주제에요. 독특한 언동, 그 당시 랍비적 평범한 유대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언어와 행동이 요한복음의 주제에요. 그런 생각에서 예수를 보면 아브라함 논쟁이 왜 벌어지는지 알겠죠? 요한복음 8장 마지막까지 아브라함 논쟁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오는 모든 실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품에서 바로 떨어져 나온 예수, 예수님은 일종의 아브라함과 실제 이스라엘 백성의 복원 프로그램과 같은 거예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오는 실제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바이러스 먹은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아요. 이 모든 것을 reformat 하시기 위해서 독생성자 예수님이 오셨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 역사를 열어주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요한복음은 참 어려운 것이 구약역사,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속 말씀해 오신 역사를 잘 알고 있어야만 이해가 돼요. 8장 38절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이게 바로 독생자의식이죠? 요한복음 1장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언동은 교만하고 건방지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도발적이에요. 하나님 아버지와의 독특한 관계성,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독특한 관계성을 주장할 때마다 특권을 내세웠습니까? 자기 복무적이었습니까? self serving 했습니까? 아니면 self sacrificing했습니까? 자기희생적이었고 자기 해체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성을 내세워 모든 사이비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내세워서 모든 종교권력가들은 어떻게 합니까? 구원을 세일하고 종교권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돈을 가로채고 몸과 영혼을 노략질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출연했던 모든 종교권력자들은 하나님과 자기의 친근성을 강조하여 친밀적인 관계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양심을 도둑질합니다. 최근의 한 목사가 아주 타락한 목사입니다. 여의도 근처에 사는 목사인데 자기가 환상을 보니까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도덕적으로 만신창이가 돼 있고 누가 보더라도 구원받기 힘든 사람입니다. 다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끝가지 속입니다. 자기가 환상을 보니까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이건 벌써 구원 못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이름이 없더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도덕적으로 만신창이가 돼 있고, 도덕적 영적으로 파산한 자입니다. 그 사람의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직도 헌금하는 사람이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의 종교적 거짓된 아우라를 믿게 만들어서 권력을 모으려고 하는 거거든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종교권력을 가지고 정치적 권력을 삼지 않습니다. 자기의 영적권위로 얻은 사람들을 특정한 사람에게 투표하게 만드는 것은 사이비입니다.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설교 자료를 통해서 강요하거나 유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주장하는 모든 종들, 예를 들어서 40일 금식기도 5번실시, 이런 것이 보통 부흥사들 플랜카드에 뭍은 문구입니다. 이건 매우 위험한 겁니다. 40일 금식기도 5번을 한 것보다 밥을 정상적으로 먹은 사람이 영이 더 맑습니다. 우리 동기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지방 신학교 나온 사람인데 아주 허황된 친구입니다. 처음부터 허황된 친구라서 제가 조심했는데, 이 친구가 서초동에 엄청난 빚을 내서 교회를 지었고, 그 빚더미에 올라앉고 나서 동기들한테 계속 도와달라고 메일을 보냅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 친구가 사기꾼 기질이 다분해서 조심했는데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이번에 7번째 40일 금식기도 들어갑니다, 쫙 뿌립니다. 순진하게 아이들은 돈을 보내줍니다. 그런데 열매가 안 좋습니다. 7번째 40일 금식기도 들어가면 벌써 교회가 빚을 갚고 하나님과 무언가 결판이 나야 하는데, 그만하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내가 볼 때는 엄청 책망할 것 같습니다. 교우들에게 그렇게 재정적으로 부담을 주고 서초동에 땅을 사서 형편없는 설교를 하고 교회를 지으면 혼나고 불벼락을 맞고 올 것 같은데 무슨 말을 들었는지 40일 금식기도 하러 또 올라갑니다. 문제는 종교적 협착꾼들이 가장 많이 진 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일까요? 조폭은 아닌데, 조폭 바로 위에 있는 단계의 도덕적 슬럼, 이런 곳입니다. 여기는 사기꾼이 와서 진을 쳐도 분별할 수 없고 법적으로 강제를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 자고 어떤 특권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말해놓고 바리새인처럼 돈을 밝히지도 않았고 이적을 행해놓고 돈을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적을 행하자마자 들어가 버렸습니다. 숨어버렸습니다. 표적을 행하자마자 숨어버렸고, 40년 된 소경을 고치자마자 숨어버렸기 때문에 자기가 병 고침을 받고도 누가 고쳐주었는지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철두철미한 은닉성, 자기 해체주의적 태도, 이것만이 진짜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간 모든 사람은 자기를 감춥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본 사람일수록 자기를 감추고 자기의 누추한 의를 감춥니다. 잘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무치는 진실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주장하다가 오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 독특합니다. 예수님은 독생자라는 진실 때문에 오해를 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종의 화신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번제로 바쳐집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거한다는 말은 지속적으로 일정한 기간 동안 순종한다, 거한다는 말은 첫째 납득한다, 이해한다, 둘째 실천해본다, 실험적 순종을 해본다, 입니다. ‘내 말에 거하면’은 순종하고 실험적 순종을 해보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요한복음 15장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열매를 맺기 위해서 보통 얼마나 걸려요? 4-6개월 동안 있어야 열매가 열립니다. 모든 나무를 보세요. 꽃 풀들은 짧지만, 나무는 대개 4-6개월입니다. 밤꽃이 4월에 피었다가 10월에 밤이 열리지 않습니까? 대개 4-6개월 걸립니다. 곡식도 4개월 걸립니다. 6월에 모내기를 하면 10월에 추수를 합니다. 이 말은 생장주기에 걸쳐서 볼 때 일정한 기간 동안 예수님 말씀을 지적으로 납득하고 이해하고 실험적 임상적 순종을 해보고 실천을 해보면, 이런 뜻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를 안다는 말은 매우 헬라적 표현이나 그리스철학 표현이 아닙니다. 그리스철학에서는 진리를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입니다. 히브리 아람어, 추상적 문장으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때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실된 성품을 알지니, 라는 뜻입니다. 이때 진리는 하나님의 초지일관성을 알지니, 하나님의 계약적 불변성을 알지니, 하나님의 통전 인격적 신실함의 극치를 알지니,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 것이며,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인류와 맺은 언약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아시며, 인류를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알지니, 범죄한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져가는 운명으로 자기 파멸적 운명으로 질주하는 것을 막아주실 하나님을 알지니,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예수님께서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이 영 내치지 않으셨음을 아신다, 즉 하나님의 인격적 계약적 신실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님 때 왜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어요? 예수님 때 38년 된 병자가 왜 일어났어요? 38년, 40년 이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 기간을 대표하는 것을 알죠? 그런 모든 일은 기호학적 의미가 있어요. 미디안에 보면 몇 십 년 걸려요? 한 세대가 40년간 종살이하잖아요. 광야에서 40년, 다른 버전으로 하면 광야생활이 38년이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죠?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40년 된 앉은뱅이가 일어나죠? 12년, 12년도 매우중요해요. 12년 된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죠? 혈루병 걸린 여인이 12년 만에 고침 받습니다. 70년 12년 전부 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장주기고난, 단주기 고난, 하나님의 백성의 장주기 단주기,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풀어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예수님 때 구약에서 불순종 압제 또는 종살이 표상으로 된 숫자는 38년 된 병자, 40년 만에 일어난 사람, 이런 등등이 왜 예수님 때 집중적으로 일어났느냐? 어떤 랍비에게도 일어나지 않고, 이사야 예레미야 그때도 일어나지 않았던 엄청난 보물 같은 구원이 왜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독생자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저주를 풀어주시는 분인 것을 집중적으로 환하게 밝히는 것, 이런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가장 맑은 빛이 1등성이었어요? 비너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이 비추었던 밝기보다 밝은 태양이 오신 거예요. 태양이 오셔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모든 예언자들이 비추었던 밝기를 환하게 드러내셨어요. 예수님 당시에 일어난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이적과 표적, 하나님 나라라고 단도직입적인 명료한 계시들, 특수한 숫자에 막혀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저주받은 개인들의 총체적 구원과 해방, 이것이 전부 다 예수님이 독생자임을, 하나님의 독특한 전권위임을 받은 아들임을, 즉 이스라엘 민족이 받았던 저주를 상쇄시키는 분임을, 그 모든 것의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신 거예요. 십자가에 달렸다는 말은 이제 예수님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재편한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집단갱생 프로젝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 28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인자를 든 후에' 광야에서 놋뱀을 쳐 든 것처럼 십자가에 그를 죽게 한 후에야, 이 인자가 광야에서 들렸던 모세의 놋뱀과 같구나,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죽음의 행렬에서 풀어주는 저주의 해결자구나, 그걸 깨닫게 된 거란 말이에요. 그걸 깨닫게 된 사람이 바울과 사도들이었어요. 바울과 사도들은 예수가 광야에서 쳐들린 놋뱀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게 바로 독생성자입니다. 요한은 독생성자 또는 놋뱀이라 표현했고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이라 표현했고, 바울은 화목제물이라고 표현했어요. 똑같은 말입니다. 하나 하나 다 연결됐어요. 진리를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언약적 불변성을 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저주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알게 됐단 말이에요. 예수님 말 듣다가, 예수님 안에 머물다가 김회권의 인생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됐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비추시는 은총의 햇살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그게 바로 진리였어요. 이때 진리라는 말은 하나님 성품의 특징입니다. 절대로 명제 아니에요. 지구는 둥글다, 이거 아닙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불변하신 사랑을 알지니, 둘째 이스라엘 민족이 대표하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약적 사랑을 알지니, 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죠. 그런데 어떻게 저는 제 인생을 알았나요? 79년에 하나님께서 계시로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오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제 인생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 역사 안에 내 인생이 들려 있는 걸 순식간에 알게 되었습니다. 깨닫게 되었습니다. 불과 같은 전광석화 같은 계시가 임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죄가 대속된 것을 저주 받은 예수를 통해서 분명히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됐습니다. 어떤 진리인가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약적 사랑이 예수를 통하여 드러났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대표하는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약적 사랑이 여전히 유효함을 알게 됐습니다. 진리를 알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의 일관성을 알았다, 하나님의 계약적사랑, 우리 인간의 죄보다 훨씬 크고 영원하신 신실성을 알게 됐다, 그 신실성이야 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했다, 죄를 짓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자유케 했다, 이때 자유라는 말은 억압의 구제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외적억압의 구제가 아니라 내적억압의 구제입니다. 외적억압도 매우 무서운 겁니다. 조직폭력배에 들어가면 외적억압에 의해 죄를 지어야 합니다. 조직폭력배가 외적억압을 상징한다면 우리 안에 내면화돼 있는 죄악을 짓고 싶은, 유혹에 빠져서 자기파멸적 인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살아버리고 싶은 죽음충동, 프로이드는 죽음충동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안에 자기를 파괴시키는 죽음충동이 있다, 이게 바로 원죄입니다. 프로이드는 그걸 타나토스라고 해서 죽음충동입니다. 자기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아버리고 싶은 무서운 충동을 헬라어로 Thanatos, 그게 바로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허무로 자기 인생을 마쳐버리고 싶은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원죄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서운 죄의 충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해준다는 말은 정확하게 이 말입니다. 무서움, 아담의 원죄 같은 죄악 충동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약적 신실성을 알고 나면 내 인생이 너무 고귀한 인생이라는 걸 알게 되기 때문에 자기 파괴적인 허무한 인생으로 살고 싶어 하는 이상한 충동에 시달리지 않게 되고, 제 인생에 대한 고귀한 자기 기대를 회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고상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이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을 저는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그냥 1인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허무하긴 했지만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쟁에서 진 사람과 이긴 사람이 불공평하지만 그렇게 굴러가구나, 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구원받고 나니까 이 세계 만민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약적 책임감을 보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사명자가 돼 버렸습니다. 예수 믿고 나서, 사명자가 되자마자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옛날에는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했습니다. 그야말로 죄악된 억압과 부자유였습니다. 하기 싫었습니다. 화학 지구과학 생물 기술 정말 싫었습니다. 기술시간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루에 벽돌을 몇 장 쌓나요? 사람마다 다르다, 이게 답인데 예비고사에 시험으로 나왔습니다. 사람은 하루에 벽돌을 몇 장 쌓나요? 사람마다 다르다가 제 답인데 객관식은 4개밖에 없고, 15-20장 쌓는다, 이게 답입니다. 예비고사에서도 틀렸고 실제 고등학교 시험에서도 틀렸습니다. 저는 그 따위 문제가 너무 싫었습니다. 다음 중 가장 아름다운 민주적 고발정신은 무엇입니까? 이것 틀렸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게 싫었습니다. 어떻게 조지훈의 <승무>를 읽고 나서, 파르라니 깎은 머리, 이건 무엇을 가리킵니까? 깎은 머리를 가리킵니다, 아닙니다, 또 다른 답이 나옵니다. 등심불 김동리 시도 나오고, 산유화도 나오고, 엉터리 답을 하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이 모든 걸 다 뒤집고 싶었습니다. 이건 답이 아닌데 그걸 답이라고 우기는 교사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의 을씨년스러운 제 청소년 시기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모든 행동발달사항에서 '나'를 받았습니다. 왜? 매 수업시간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선생님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국어시간에, 어떻게 그게 그렇게 됩니까? 이건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혼난다, 혼난다, 혼나더니 전부 다 '나'를 줬어요. 제가 말을 할 수 없는 건 우리 하나님 앞에서 저는 학자가 되리라는 걸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공부가 싫었고 그냥 바둑 두는 게 가장 좋았습니다. 취미생활에 몰두하고 낚시도 하고 운동도 하고 등산도 하고 되는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바둑을 두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 가장 먼저 산 책은 <임해봉 바둑 9단> 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을 사서 바둑 기본을 보면서 세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바둑 한판을 두고 나면, 너무 재밌습니다. 눈만 감으면 바둑판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바둑을 그만뒀습니다. 서예를 그만뒀습니다. 저는 서예 하는 것, 붓글씨 쓰는 걸 좋아했습니다. 시호 착 날리면서, 그 시간이 얼마나 걸려요. 먹 가는데, 그 모든 걸 다 포기했습니다. 그다음 환상적인 연애도 포기했습니다. <러브스토리>를 보면 얼마나 연애가 아름다워요. 20대 때 한 번 해볼 만하죠. 하나님 앞에서 정신을 차려 나아갔고, 원시적인 죄악충동으로부터 제가 해방되니까 내 인생이 너무 자유로워지니까 하나님과 강력한 계약적 결속감이 생기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나의 주체성을 바로 세운다는 것을 아니까 자유함이 왔습니다. 그때부터 자유함이 왔습니다. 이게 바로 아들이 자유롭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종은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종은 죄사함 받지 못하고 이 세상의 유행과 통속적 기대에 따라 사는 사람이 종입니다. 유행 따라 사는 사람이 종입니다. 유행 따라 쇼핑하는 사람은 종입니다. 결혼할 때 비용이 1억 이상 드는 사람은 종입니다. 좋은 집에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건 종입니다. 정신이 자유롭고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 정말로 하나님의 진실함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이세상의 죄악충동으로부터 시달리지 않습니다. 로마서 7장 14-19절을 보면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게 바로 죄의 종입니다. 이런 상태로부터 성령 안에서 해방되는 것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청년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가장 좋은 것은 숭고한 주체성을 향유하는 것, 자유를 향유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가장 좋은 것은 자유를 향유하는 것입니다. 자유는 세상물정과 모든 기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오늘 날 가장 많은 통속적 소비주의로부터 자유입니다. 동료들과의 비교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동료가 좋은 옷을 입으니까 나도 좋은 옷을 입고, 동료가 좋은 집에 사니까, 이런 모든 거짓된 소비행태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내가 해보지 않았지만 이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해보지 않은 경험에 대한 무한한 동경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저는 해보지 않은 게 많지만 별로 해보고 싶지 않습니다. 골프장 걸어가는 것 얼마나 좋을까? 별로 해보고 싶지 않습니다. 룸살롱 같은 데 가서 남자들이 술 먹으면서 대접받는 것, 전혀 좋지 않습니다. 좋은 옷 입고 다니는 것도 전혀 좋지 않습니다. 이마트에 가서도 좋은 것 많습니다. 사람이 좋아야 합니다. 5만 원짜리 옷을 입어도 인격이 고상해야지, 500만 원짜리 쳐 걸치고 있어도 도덕적 슬럼상태이면 뭐가 좋습니까? 옷이 중요합니까? 내 몸을, 인격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차를 꼭 좋은 것을 사려고 합니다. 미친놈입니다. 보통 교수들이 4500만 원짜리를 사려고 하는데 나는 이놈들이 미친놈이 아닌가 속으로 생각합니다. 대개 4500만 원짜리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거예요. 나는 만일 돈이 있다면 인적인, 우정과 형제자매의 사랑을 구축하는데 연대와 우정을 구축하는데 모든 돈을 다 쓰고 싶어요. 그런데 공부하는 것은 지지합니다. 민창기 형제처럼 포르투갈에서 좋은 사진 찍는 것은 지지합니다. 너무 좋은 옷을 사 입고, 음식값 1천만 원, 식당의 음식 값을 다 고쳐야합니다. 학교 행사 때 가보면 2만 5천 원짜리 정식을 주는데 3분의 1도 못 먹습니다. 그걸 다 먹으면 4000kcal 됩니다. 사람을 죽이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한정식하고 우리나라 병원이 검은 음모를 맺고 있다고 봅니다. 나쁜 음식을 먹여서 암 걸리게 해서 연대병원과 서울대병원에 가는, 그래서 저는 모든 식당과 호텔과 병원은 한통속이고 조폭과 다 한통속이라고 봅니다. 먹고 정신을 잃게 해서 술집에 넣어서 술 먹게 만들고 드디어 가정을 파탄 내는 것, 그리고 심리지원 정신과 병원, 전부 다 죄악 대문에 성업하는 업입니다. 세브란스 병원 돌출부에 보면 엄청나게 암 걸려라, 책임져 줄게, 이런 식입니다. 서울대도 병원이 너무 많습니다. 노인 병원, 아이병원, 죄악된 인간들의 삶 때문에 성업하는 것은 전부 다 악한 것들입니다. 그걸 거부해야 합니다. 이런 죄악된 시스템에 대한 보이콧, 거부정신, 리 호이나키처럼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스콧 니어링, 데이빗 스로우처럼 정신적 자유를 느낀 사람들은 이 죄악된 세상에 비협조함으로써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를 붕괴시키는 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마무리합니다. 오늘 날 예수 믿은 자유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죄악된 시스템이 그냥 존재하도록 내버려둬야 할까요? 기초가 허물어지게 해야 할까요? 비협조 해야 할까요? 뇌물의 통로를 비협조해야 합니다. 뇌물이 김회권한테 가다가 멈춰서야 합니다. 뇌물이 양진일한테 가다가 멈춰서야 하고, 이 세상의 모든 뇌물 구조, 이 세상의 모든 부정한 돈들의 흐름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 올 때 stop 명령체계가 작동, 중지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는 뭘까요? 보이콧이다, 죄악된 시스템, 죄를 짓는 원시적 죄악충동으로부터 유지되는 세상을 보이콧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자유다, 그럼 이 자유는 누가 담보해줍니까? 예수님 말에 거하는 삶,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더불어 친밀한 동역을 하는 삶이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이런 자유로운 삶이 많으면 이 세상의 부당한 명령은 더 이상 작동되는 통로를 찾지 못하여 악은 유지되기 힘듭니다. 악 자체를 범하기가, 그때는 악인들은 40일 금식기도 해야만 악을 행할 수 있습니다. 왜? 주체성 있는 개개인의 자유인들이 요소요소에 박혀 있으면 이 세상은 악할 수가 없습니다. 검사 중에서도 정신 나간 검사 말고 제대로 정신 박힌 검사가 몇 명만 있어도 내부 고발자 때문에 하지도 못합니다. 청와대 각료 중에서 한 명만 정신 차린 장관이 한 명만 있어도 사대강 못합니다. 이 세상의 거대한 죄악된 권력구조 안에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제자가 있기만 하다면 희망이 있단 말입니다. 세상에 악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선이 성공할 가능성도 높지 않지만 악이 성공할 가능성은 더 높지 않아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사람이 요소요소에 박혀 있으면 악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이 세상을 거부할 수 있는 참된 자유인의 영성을 갖길 바랍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결혼할 때 돈 들지 마세요. 결혼할 때 돈 드는 건 어리석은 겁니다. 그 돈으로 차라리 책을 사고 여행을 하세요. 여행하는 건 OK입니다. 결혼식도 다 참여시키지 말고 몇 사람만 참여시키고 밥도 많이 준비시키지 말고, 그렇게 해서 한 50명 정도만 참석하면 됩니다. 뭐 하러 그렇게 쓸데없는 사람이 많이 옵니까? 여러분 과감하게 하세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모두 이 세상 우리를 유행으로 통속으로 세상 본받게 만들려는 압력과 거룩하게 맞대결함으로 자유인의 공동체가 되길 바라고, 서로 이 자유를 격려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예수 안에 자유롭게 된 자, 성령으로 자유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의 기초를 허물어버리게 도와주시고, 이 자본주의적 물신숭배적 소비주의적 악한 문화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악의 제국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악의 제국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거룩한 훼방꾼들이 되게 저희를 격려해주소서. 예수의 영으로 가득 찬 저희가 주체성 가득 찬 하나님의 사람 되어서 하나님 나라 완성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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