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2부 예배-요한복음 8:31-40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의 독특한 주제는 예수님의 거침없는 언동입니다. 가장 요한복음을 뜨겁게 달구는 주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너무 구별되게 하나님과 너무 가깝다는, 하나님과 너무 독특한 관계에 있다는 주장을 일삼은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독생자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독생성자라는 주장은 이스라엘 역사상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에 정통이거나 이단이거나 둘 중 하나님입니다. 모세나 사무엘 예레미야 이사야 예언자 중 누구도 하나님의 친아들이라고 자기를 주장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는 일인칭 단수로 표현한 것은 쿰란문서에도 없고, 랍비문서에도 없고, 어떤 예언자들의 비망록에도 없고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독특한 언동,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를 친아들과 아버지 관계로 묶는 이런 독특한 언동이 예수님을 위험에 빠뜨리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내고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이 언동은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느냐?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맏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계승하는 아들이거든요. 맏아들은 계승자입니다.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아들이 맏아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매개하고 구현할 아들이 이스라엘 민족 맏아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맏아들 의식은 예수님 혼자 가졌습니다.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가져야 할 집단의식으로서의 맏아들 의식을 예수 개인이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부피와 질량이 똑같은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와 예수님이 똑같아요. 의식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맏아들 의식을 가졌어요. 그다음 예수님 혼자 맏아들의식을 가졌어요. 예수님은 혼자 맏아들 의식을 가졌으니까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계약적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우두머리, 예수님은 계약적 대표자,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예수님은 영어로 말하면 co-extensive에요. 부피도 같고 용적도 같고 질량도 같고 무게도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순종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순종으로 봐주는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 전체 불순종과 독생성자의 불순종은 같은 거예요. 여기서 어떤 수학적 등식이 나가느냐? 레위기 16장에 보면 대제사장이 범죄 했을 때 바치는 제물과 회중 모두가 다 한결같이 범죄 했을 때, 회중 모두가 범죄자입니다. 만 명의 회중이 범죄 했을 때 바치는 제물과 대제사장 한 명이 범죄 했을 때 바치는 제물이 똑같습니다. 큰 황소입니다. 이 말은 대제사장과 회중은 영적질량과 부피와 용적이 똑같다, 하나님께는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대제사장은 계약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계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계약의 대표자입니다. 이완용과 박제순이 을사늑약에 이토 히로부미와 계약을 맺을 때, 2천만 조선동포 모두가 서명하지 않았잖아요. 2천만 동포의 대표자인 고종이 사인을 한 거죠. 물론 그것도 날조됐다는 것을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밝혀냈습니다. 날조됐어요. 다시 말해서 이완용이 도장을 날조해서 찍은 거예요. 일제 강점기 때 모든 법률행위는 무효에요. 그 당시는 나라를 양도했다는 것과 강제로 빼앗았다는 건 굉장히 국제법상 차이가 납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 같은 경우는 서로 협약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고종황제는 2천2백만의 우두머리입니다. 고종황제의 계약이 2천2백만의 계약과 같은 겁니다. 계약의 대표자가 갖는 법적유효성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계약 대표자라는 의식, 이게 맏아들 의식이에요. 독생자 의식이에요. 그런데 맏아들 의식과 독생자 의식이 실제로 차이가 나느냐?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인구가 1억이라고 치면, 1억 모두와 예수님은 똑같아요. 1억 모두는 하나님께 범죄 했고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어요. 그런데 독생성자 예수님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약 1억 명 정도가 된다고 우리가 예상할 때 1억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갔던 불순종의 길을 만회하려는 순종을 하려는 마음으로 자기를 독생자라고 한 거예요. 예수님 안에는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1천 5백년의 역사가 꿈틀거리기 때문에, 예수님 언어가 어려운 이유, 요한복음이 왜 어려워요? 구약을 몰라서 어려운 거예요. 요한복음은 구약을 알아야만 해요. 요한복음의 모든 단어는 울려요. 구약적 내용을 아는 사람의 가슴만 울리고, 구약을 도통 모르면 전혀 울리지 않아요. 요한복음을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요한복음은 너무나 깊은 메시지여서에요. 쩌렁쩌렁 울리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상 태초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하나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걸 이해시키고 하나님은 그걸 염두에 두면서 말하는 거예요. 중간 요약하면, 예수님은 독생자 의식을 가졌다, 독생자의식은 이스라엘 백성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왔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을 만회하려는 순종을 드릴 아들로 자기를 자임했다, 이걸 제가 반복하긴 했지만 예수님의 독생자 의식은 요한복음 1장 18절에 의하면 '아버지 품 속에 있는' 아들 의식입니다. 이 말은 한 번도 불순종을 범해보지 않은 아들, 죄를 짓지 않는 아들이 독생자의식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실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독생자의 순종이 제거하는 식으로 하나님이 죄를 없애가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더러운 물을 정수장 취수장에 모아서 깨끗하게 하듯이 인간의 모든 죄가 예수에게 가면 우리 죄 지은 것이, 나의 죄악된 삶이 예수 안에 가서 비춰보면, 아이고 눈물 흘리면서 순종할 마음으로 바뀌는 도구가 돼요. 어거스틴의 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죄가 예수 안에 갔더니 그들을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반동의 힘으로 역사해요. 죄 지은 만큼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가는 힘이 커요. 그래서 어거스틴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중세 성자입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예수회를 만들었어요. 1546년에 예수회를 만들었어요. 너무 기가 막힌 사람이에요. 이 사람은 젊은 날에 인신매매단에 관여했던 참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19세에 여자관계가 매우 복잡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너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 엄청난 죄의 역사가 예수의 독생자의 삶에 딱 비추니까 죄가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엄청난 에너지, 조심해야 합니다. 죄가 엄청 은혜가 크다는 말인데. 내가 하나님께 돌아갈 힘이 없는 건 죄를 안 지어서 그렇구나, 맞습니다. 약간 그런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랍비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아담은 아마 죄를 짓지 않았다는 헛된 영광에 빠져서 타락했을 것이다, 아담이 타락해서 죄인이 됐는데 아담이 만약 죄를 짓지 않고 유혹을 견뎠다? 영어로 vain glory, 헛된 영광에 빠졌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할 만큼 죄가 창조적 역할이 있어요. 하나님께 돌이키는 반동의 힘이 있어요. 조심해야 해요. 잘 들어야 해요. 죄를 안 지어서 내가 하나님께 돌이키는 반동의 힘이 없구나, 반은 사실이에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안 맞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보다 안 돌아온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해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모두 다 예수님처럼, 요한복음 8장처럼 해결되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돌에 맞아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가 독생성자에게 전가돼서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하는 순간 독생성자의 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는 협약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맺어졌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또 세계만민을 대표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말은 세계만민의 죄도 용서받을 가능성이 되는 거죠. 그래서 1979년에 저에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쳤던 것은 바로 이 원리 때문이거든요. 저는 이스라엘에 가본적도 없고 그때는 구약도 다 읽어보지도 못했던 때입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영접하자마자 죄 사함을 받고 내 안에 있는 엄청난 천지개벽이 일어났거든요.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 사람이 되는 힘이 용솟음쳤단 말이에요. 그 죄사함이 높이 들린 놋뱀을 쳐다보는 순간 저에게 임했단 말이에요. 그건 너무 불가항력적이었어요. 사람들 7,80여명이 제가 죄사함 받는 장면을 봤어요. 제가 눈물을 막 흘리면서 통곡을 하면서 회개하는 장면을 봤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거듭났다는 말을 했어요. 그게 어떤 원리로 왔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독생성자였기 때문에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실제 이스라엘 사람들 개개인의 죄가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표했던 온 인류의 죄도 예수 안에서 용서가 된 거예요. 예수를 바라본 순간 배달자손의 아들이었던 저는 놋뱀처럼 쳐들린 예수를 보자 구원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차원에서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와 독특한 관계임을 내세웠어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독특한 관계, 즉 자기를 독생자라고 했을 때는 자기가 놋뱀처럼 쳐들려 죽을 것에 대한 암시였지,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 아들 됨은 적어도 예수에게는 죄를 용서해주는 사죄의 대권, 높이 들린 인자가 돼서 저를 쳐다보는 사람마다 죄로부터 용서해주는 용서의 대권을 드러내려고 자기가 하나님 아들 됨을 주장한 거예요. 요한복음 3장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한복음 12장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한복음 8장 29절 '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전부 다 똑같은 말이에요. 들린다, 들려야 한다, 예수 자신이 맏아들 의식을 가지고 독생자 의식을 가지고 뚜벅뚜벅 순종의 길을 걸어갔을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죄를 대속했어요.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 안에서 3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대표적인 죄를 표상하는 죄인들을 고쳤습니다. 예를 들어 38년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고쳤습니다. 잘 보세요. 매우 중요합니다. 38년 된 병자는 38년간 방황했던, 직립인간으로 살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 불순종을 상징한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 날 때부터 40년 동안 소경된 자 있죠. 40년 간 이스라엘 민족의 방황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다음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있죠? 호세아서라는 성경에 보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누구를 가리켜요?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런 식으로 예수님이 만나 고친 사람은 전부 다 누구에요?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 죄를 대신하는 죄인들을 고쳤단 말이에요.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 12년간 살다가 죽은 야이로의 딸, 12는 이스라엘 민족이 일정한 기간 동안 죄와 불순종 가운데 묶여 있는 기간이에요.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했어요. 또 38년 방황했고, 사사기에서는 40년 동안 압제를 당해요. 예수님께서는 40년 동안의 광야 방황을 40일 동안 집약적으로 경험했죠? 예수님께서 요단강을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추후 체험하기 위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죠? 예수님 안에 가장 많이 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치료, 기적, 이적, 귀신을 내어 쫓음, 하나님을 보여주심, 이것은 예수님에게 왜 이렇게 많이 집적되고 집중됐느냐? 예수님이 독특한 하나님 아들이라는 거죠.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속할만한, 이스라엘 역사 안에 일어났던 모든 죄, 아브라함부터 모세 세례요한까지 이르렀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치명적으로 경험했던 저주를 대신 만회하고 회복 시켜가는 과정을 3년 안에 다 보여주신 거예요. 6장 63절에서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광야생활을 했던 것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사는 것처럼 이제 하나님 주신 말씀으로 생명의 떡을 먹고 살아야 한다, 다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일어난 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안에 대표적으로 경험된 모든 저주를 만회하는 죄사함의 역사가 있어요. 이게 바로 독생자, 들린 인자, 이런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의 해방은 언제 일어나게 돼 있느냐? 원래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순간에 경험돼야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확신하신 하나님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십자가에 저주의 효력을 먼저 베풀어주셨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야 해요. 왜? 그 능력을 앞당겨 썼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예수님께서 인자가 죄를 지상에서 사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말한다, 네가 죄 사함 받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쉽냐?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걸 입증하기 위해서 나는 말한다, 너는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감으로 내 말이 정말 진실인 것을 입증해라, 이렇게 말하는 게 힘드냐? 후자가 훨씬 힘듭니다. 예수님은 힘든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죄와 저주를 법적으로 언제 해결했느냐? 실제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순간에, 저주와 죄를 뒤집어 쓴 그 순간에 원래 치유가 일어났어야 해요. 그런데 시차적으로는 그렇지만 예수님의 말 안에 벌써 십자가에 저주어린 죽음을 완료한 사건처럼 앞당겨 그 효력을 썼단 말이에요. 시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제일 마지막이었어요. 그런데 논리적으로 십자가에 먼저 박힌 거예요. 시간적으로는 늦게 박혔어요. 예수님의 모든 말은 어디서 나와요? 골고다에서 나온 거예요. 인자가 들린 후에서부터 예수님 언어의 힘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우리가 가진 언어는 우리의 진실에서 나온단 말이에요. 우리 존재의 진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그곳에서 능력의 말이 나오고, 치료의 말이 나온단 말이에요. 지금 앞부분을 길게 설명했는데 다시 요약하면, 예수님은 랍비나 예언자들과 달리 너무 독특한 언동을 하셔서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 언동의 핵심은 독생자 의식이었다, 그 독생자의식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집단불순종을 당신 자신이 만회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불순종과 불신앙의 죄를 대속함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집중적인 치료와 회복이 나타나도록 순종을 드렸다, 예수 안에 거하면 예수님 말을 듣고 그걸 믿으면 이런 치료를 경험하는 거예요.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걸 경험합니다. 원시적인 죄악된 충동으로부터 해방돼요. 요한복음이 얼마나 깊은 책이냐면 요한복음 1장 1절은 벌써 창세기 1장 1절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어둠가운데 빛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정확하게 같은 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 아닙니까?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완전히 창세기에요. 요한복음 저자는 나는 구약성경을 압축적으로 다시 쓴다, 예수 안에서 구약성경은 성취됐다, 이런 관점으로 요한복음을 쓰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왜 어려워요? 구약을 몰라서라고 할 수 있죠. 요한복음은 구약을 열심히 읽은 사람에게는 천둥소리처럼 쩌렁쩌렁 하게 들려요. 그래서 너무나 깊은 감동이 있습니다. 혹시 시간 있으면 요한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에서 고쳐진 38년 된 병자, 날 때부터 40년째 소경된 사람, 다섯 명의 남편 플러스 한 명의 기둥서방과 사는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오경 등, 다섯 권의 책만 들고 온갖 목숨을 다 거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그 여자가 대표하는 거예요. 다섯 명의 남편이라는 말은 사마리아 오경을 하나 들고 사는 이스라엘의 궁핍과 불순종, 사마리아 사람들을 해결해주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한 마디로 무엇이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무덤에서 불러낸다는 것, 에스겔 37장 11-13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그걸 정확하게 나사로가 체험을 한 거예요. 예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모든 죄와 죽음과 질병을 다 고칠 수 있는 독생성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런 예수님이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구약성경을 터득하여 예수님 말의 논리를 납득한 사람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어떤 말입니까? 순종을 통해서 입증된 가르침에 거하면, 거한다는 말은 지속적으로 순종한다, 지속적으로 그 말씀의 논리를 납득한다, 그 말씀이 살아 있음을 확신한다, 이게 거한다는 겁니다. 사제관계가 성립하려면 지속적인 거함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사제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김세윤 박사를 통해서 신약성경을 읽었고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김세윤 박사님님의 글을 다 읽었습니다. 왜? 그는 내가 학부 때 만난 스승이었기 때문에, 김세윤 박사 글을 다 읽었기 때문에 그의 글을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이제 김세윤 박사님이 제 글을 읽고 자기의 것이 계승되는 걸 기뻐합니다. 제자는 스승의 글을 열심히 읽어주는 게 너무 좋습니다. 옛날에 장신대에서 논물을 쓰는데 성유리 아빠 성종현 교수가 자기 논물을 지도하는데 학생들이 아무도 자기 글을 인용하지 않으니까 논문을 집어 던지면서 너희가 내 제자 맞느냐면서 어떻게 스승의 글을, 물론 인용할 글이 별로 없었긴 했습니다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스승이 자기 제자의 논문에 인용이 안 되면 저렇게 성을 내는구나, 그분이 나쁜 학자는 아닌데 저는 신약선배들이 혼나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많이 놀랐습니다. 저 순한 분이 자기 글을 인용하지 않으니까 저렇게 화를 내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듯이 사는 거거든요. 예수님의 하는 말씀의 논리를 납득하고 이해하고 지속적으로 의지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거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4절 '내 안에 거하라' 거한다는 말은 신뢰에 가득 찬 순종입니다. 이건 진짜 해봐야 압니다. 이건 대면해봐야 알고 경험해봐야 압니다. 예수님처럼 대면하고 경험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을 했죠. 누가복음 12장 8-10절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이건 처음 입사한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내 연봉이 왜 이리 적지? 불평하면 말석으로 내려가는데, 이것도 감사합니다, 하고 약간의 굴욕을 경험하면서 존엄성의 일부를 훼손당하면서 하면 상석으로 올라가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 것은 경험해봐야 압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것도 예수님이 한 말이죠. 우리가 형제자매와 화해하지 못하고 제단에 가서 아무리 예물을 바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을 미워하면서 제단에 나갔습니다. 예수님 말에 거하면 예수님 안에서 제자가 됩니다. 참 힘든 겁니다. 제자라는 말은 전문용어로써 어떤 일이 있어도 상당히 스승과 함께 있는 사람, 마가복음 3장 13절입니다. 제자라 함은 스승과 함께 동선을 같이 함, 스승 말의 논리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현실을 가지고 스승의 말 논리를 해석하지 않고 스승의 말을 가지고 현실을 재해석 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말을 텍스트 삼고 현실을 context 삼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제자가 아닌 사람들은 스승의 말을 자기의 경험, 다른 선생, 귀를 가렵게 하는 선생의 말을 가지고 재해석하는 겁니다. 그건 제자가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말은 지속적인 인격적 투신관계에 들어가면 진리를 안다, 이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진리를 안다는 말은 추상적인, 그리스철학에서 말하는 문장으로 된 진리를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진실 되심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람어 히브리어로 한 말이기 때문에 아람어에는 진리라는 알레테이아라는 그리스철학에서 말한 플라톤이 말한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을 들으면 정확하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서 진실하신 분이고, 이스라엘 민족과 파괴될 수 없는 계약적 신실성을 유지하는 분인 걸 알게 되고, 이스라엘 민족과 파괴될 수 없는 언약이 있다면 온 인류와 파괴될 수 없는 언약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거죠. 예수님을 통해서, 저는 정확하게 이걸 깨달았습니다. 20대 때는 깨닫지 못하고 50대 때 깨달았습니다. 저는 20대 때는 이걸 이해를 못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안 돼요. 20대 때 깨닫지 못했던 말을 50대 때 깨달았는데, 이제 막 깨닫는 것이 무엇이냐면 이 진리가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성인 것을, 즉 이스라엘 민족의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여전히 사랑하신 다는 것을 예수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예수가 와서 그렇게 이스라엘 갈릴리 일대를 은혜와 진리의 폭풍으로 감화시키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우리 하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폭포수 같은 은혜를 보면서, 하나님이 죽음의 그늘에 앉은 사람을 버리지 않았구나, 그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실성을 알았단 말이에요. 스불론과 납달리의 땅, 죽음의 그늘진 곳에 앉아서 운명과 신세를 한탄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인생을 우리 하나님이 여전히 붙들고 계심을 알게 됐다는 말이에요. 진리를 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성, 믿음직스러운 불변성을 안다, 그게 진리를 안다는 겁니다. 예수님 말을 보아야만 진리를 아는 겁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을 보아야만 하나님이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면서, 예수님과 10시간 보내고 악당과 2시간 보내세요. 그럼 악당의 영향력이 예수님의 영향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악당과 8시간 보내고 예수님과 30분 보내면 악당지향성이 우리 몸에 가득 차게 됩니다. 악당의 말에 논리, 나를 저주하는 사람의 말을 묵상해야 할까요, 나를 격려하는 사람의 말을 묵상해야 할까요? 아주 먼 옛날, 79년에 289번 버스를 타는데 서울대에서 타면 지금 289번 종점, 돈을 안 내고 탔습니다. 차장이 있었을 땐데, 기숙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돈을 안 냈습니다. 그냥 무료로 타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우리가 탔는데 차장이 우리 욕을 하는 겁니다. 개두자 쓰면서, 그때부터 우리가 돈을 냈습니다. 그때 그걸 들으면서 나는 개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그 차장 아가씨 저주의 말이 성경보다 오래 박히는 거죠. 하루 종일 묵상이 됩니다. 저주의 말은 참 오랫동안 묵상이 됩니다. 하나님의 격려의 말은 나에게 오지 않지만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논평들은 굉장히 오래,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력을 많이 받지 않고 세상 사람들과 바로 대면하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직장생활 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식간에 직장상사가 한 마디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이 퉁퉁부었네, 얼굴이 찐빵 같네, 다리가 완전히 잘 익은 무 같구만, 이런 말도 할 수 있고, 몸이 터진다, 터져,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고, 온갖 남성적인 여성비하 언어가 넘치는 직장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걸 글이라고 써왔어? 집어던지는 교수를 만날 수 있고, 까다로운 직장상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신적격려와 위로로 가득찬 말씀을 아침에 경험하지 못하면, 그러고 맨정신으로 세상에 나가면 너무 큰일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알지니, 세상 사람의 진실하지 못함에도 파괴될 수 없는 격려를 받게 될지니,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진실하심을 알게 될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자유라는 말은 죄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저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했고 죄를 짓고 싶은 원시적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 거하면 예수님 제자가 되고, 즉 흔들릴 수 없는 신분을 획득하여 내가 약간 이탈하더라도 빼앗길 수 없는 것이 제자됨입니다. 한 번 제자되기만 하면 책망 받을지언정 제자됨의 신분을 박탈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에 지속적으로 거하면 제자대접을 받고, 제자대접을 받는 순간 하나님의 신실성을 만끽하는 내면의 이너서클에 들어오게 되고, 그 내부자그룹에 들어오게 되면, 이 세상의 어떤 부정적인 언어 저주의 사건 경험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돼서 해방된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되는데 예수 말에 거하고 예수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연대되고 결속되기 때문에 원시적인 죄의 충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입니다.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신비주의 랍비들은 지금도 죄의 충동을 이기기 위해서 하인에게 가서 채찍을 때려달라고 합니다. 랍비 중에는 자기를 채찍질하는 하인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유명한 랍비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랍비 중에 엘리멜렉 비저넥이라는 민스크 우크라이나 출신의 유명한 랍비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시딤 운동의 지도자입니다. 이 사람은 마부를 데리고 깊은 숲속에 갑니다.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큰 채찍을 주면서 우리 악마를 몰아내자고 합니다.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서 종을 데리고 갑니다.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서 채찍을 들고가니까 악마가 나타날 줄 알았는데, 랍비님 어디 악마가 있습니까? 악마 아직도 못 봤어? 이 안에 있다며 자기 몸을 내리치게 만듭니다. 하인이 얻어 맞으면서 불순종하는데, 몸을 쳐서 피가 철철 흐르는데 자기 안에 있는 죄의 충동을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매를 쳤습니다. 지금 힌두교도도 그렇게 하죠? 불교스님들도 그렇게 합니다. 잠을 안 잡니다. 왜? 수욕 수마, 잠자는 마귀, 잠이 바로 마귀라고 생각해서 잠을 안 자요. 성철스님도 자기가 9년 동안 안 잤다고 하는데 그건 약간 뻥 친것 같고요. 면벽수행, 9년동안 꼿꼿하게 서 있었다는 거거든요. 그게 몸에 석회질이 쌓여서 나중에 사리가 됩니다. 죄랑 싸우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성철스님처럼 또는 엘리멜렉이라고 하는 랍비처럼 하지 않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도록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산속에 깊이 들어가지 않고도 원시적 죄의 충동을 이기도록 길을 여셔서 지금 일상생활 안에서 죄의 충동을 압도해갈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이 주는 자유입니다. 만일 아들이 주는 자유를 주지 못하면 두려움으로 가득 찬 종의 노예생활과 같은 종교생활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종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한 율법 노예적 순종,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지지 않기 위한 설득되지도 않고 납득되지도 않은 일을 계속하는 것이 노예의 삶입니다. 종의 삶입니다. 그런데 종은 영원히 거하지 못합니다. 아들만 집에 거합니다. 로마서 8장 15-16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믿지 않습니다. 자유 때문에, 예수님 말에 거하면 무엇이 좋아요? 하나님의 인격적 신실함에 대한 지울 수 없는 확신이 생겨서 좋고요. 하나님과 인격적 연합과 결속을 하면 이 세상의 어떤 부정적인 어둠의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건짐을 받기 때문에 자유합니다. 저주로부터 가난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원시적 죄의 충동으로부터 예수 안에서 압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됩니다. 이런 자유가 이번 주 내내 여러분을 가득 지배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기도의 자유, 양자의 영을 받은 자유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저는 아침마다 새벽마다 너무 은혜를 많이 받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생각보다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하루 종일 하나님만 생각해도 내 맘이 좋거든, 그런 느낌이 들만큼 너무 위대하신 하나님, 너무 멋진 하나님, 너무나 마음씨가 좋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좋은 마음씨를 가진 하나님의 제자가 되는 것, 그분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말씀을 믿고, 납득하고, 일상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여러분을 자유인으로 만들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납득하고 일상생활에 실천하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아서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우리의 값어치를 파괴하는 이 세상의 모든 체제로부터 강구한 안보를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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