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2부 예배-요한복음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니)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일인칭 자기 계시선언이 있습니다.'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 '나는 세상의 빛이니', 이런 건 전부 다 요한복음에만 있는 예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헬라어 문장으로 에고 에이미, 라고 돼 있습니다. 에고는 영어에서 ego라고 하는 자아라는 단어로 바뀌었지만 헬라어에서는 1인칭 대명사입니다. 에고 에이미 포스 코스모,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이런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이런 뜻입니다. 에고라는 1인칭대명사가 돌출적으로 사용됐다는 말은 에이미만 해도 I am이 됩니다. 에이미는 be동사에 1인칭단수 서술어가 되는 것이죠. 에이미 해도 되는데, 에고 에이미,라는 말을 쓰는 것은 강력한 대조용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야말로, 나야말로 선한 목자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은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거짓목자들, 자칭 선한목자를 가장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을 삯꾼목자 선한목자로 구분해놨는데, 예수님께서 에고 에이미 라는 말을 쓸 때 내가 바로 그 선한 목자다, 이렇게 말할 때 그 선한목자는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바로 그 선한목자입니다. 양 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선한 목자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 '나는 참포도나무요' 이 말은 예레미야 2장과 이사야 5장에 나오는 들포도나무를 상대로 한 말씀입니다. 구약이 말하는 울림을 가지고 하는 거죠. '나는 참포도나무요' 할 때 나는 예레미야 2장과 이사야 5장이 말하는 그 참 포도나무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구약성경에 나오는 불순종하는 이스라엘과는 달리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적분체다, 나는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이상적인 순종을 바쳤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집결자, 이런 뜻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다, 이 말은 참포도 열매를 맺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참포도 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런 식으로 전부 다 구약적 울림이 있는 말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을 철두철미하게 아는 사람들한테는 천둥소리 같은 감동을 주지만 구약성경을 도통 모르는 사람들한테 깨달음이 거의 오지 않고 선문답 같은 말이 많습니다. 8장 12절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이때 세상의 빛이니 이사야 42장 1-6절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사야 42장 1-6절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은 매우 심각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42장 6절은 이스라엘을 열방의 빛, 세상의 빛이라고 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주신 빛, 세상 만민의 영적무지몽매상태를 들추어내시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하는 동아리로써 이스라엘 백성이거든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라는 말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이 말과 같은데,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이상적으로 순종했을 때 바로 그 공동체의 대표다, 이 말은 약간 설명이 필요한데요. 나는 원래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그 사명을 100% 수행하는 아들이다, 독생자라는 말을 제가 처음 설명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모든 실패를 만회하는 순종의 아들, 100% 순종하는 아들, 그런 뜻으로 독생자라는 말을 썼다고 했죠? 이 세상의 많은 아들들이 잘못한 모든 길들을 저마다 제 길을 가는 양떼와 같은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과 같은 독생자가 와서 세상 죄를 뒤집어썼죠? 이사야 53장 1-7절, 요한복음 1장 29절, 36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사야 53장 1-12절이 생각나야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구약의 모든 메시지를 증폭시키는 메시지가 요한복음이라고 할 수 있죠. 누가복음 24장 27-44절에 보면 약 두 차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이 말뜻이 무엇인가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그 말씀이 천명되고 엄명되고 선포될 때 이것을 이상적으로 순종할 한 아들을 생각하면서 준 말씀이거든요.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 대다수는 불순종하고 극히 적은 사람만 순종했죠? 예수님은 순종하던 모든 개개인들의 총 적분체에요. 예수님은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 아벨, 에녹, 에노스, 노아, 므두셀라,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모든 순종하는 이스라엘 지체들의 순종을 적분하세요. 시그마 1부터 무한대까지 적분하면 누가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미분하면 모든 개별적 신자들의 순종이 나오는 거예요. 너무 어렵나? 순종, 미분 적분은 지금 세대들은 못 배운가? 수리 가에 안 나와요? 우리는 워낙 이걸 잘 배워서, 저는 수학시간에 미분적분이 너무 재밌어서 어떻게 이런 공부가 있나,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적분 미분은 나에게 하나의 큰 행복, 문제를 풀면 딱딱 나오기 때문에, 놀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공부가 원래 재미있는 겁니다. 이변이 없으면 공부는 원래 재미있고 time consuming 합니다. 시간이 금방 지나갑니다. 헬라어문장 한 줄만 하면 두 시간 금방 지나갑니다. 공부가 원래 재미있는 겁니다. 잘 하는 게 없는 사람이 공부하는 겁니다. 특별히 오라는 데 없는 사람, 아무도 안 불러줄 때면 도서관에 가서 홀로 방치된 채 한 7년 썩으면 박사학위 나옵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사람, 신문사도 안 불러주고 광고사도 안 불러줘요. 도서관에 가서 7년만 도를 닦으면 턱하니 박사학위 받고 옵니다. 제가 지금 수학적분 이야기를 하려는데 공부가 재미있다는 말은 오늘 본문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상적인 순종, 하나님께서 최초에 말씀을 엄포하시고 선포하실 때 이 말씀을 지켜줄 아들을 생각하면서 주는 거거든요. 그 이상적인 하나님 아들의 진짜 이상적 구현자가 예수님입니다. 그걸 요한복음에서는 독생자라고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모든 말씀은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이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한 완벽한 순종의 아들, 독생자를 가리키는 거죠. 모세와 시편의 글에서 전부 다 예수님은 자기를 가리킨다고 해요. 내가 순종하여 할 말씀, 내가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인류의 실패를 만회할 자로 자임한 거죠. 예수님이 너무 아름다운 분이에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죄, 예수님은 인류를 대속하기 전에 이스라엘을 대속한 거예요. 왜? 이스라엘 민족은 인류를 대속할 백성인데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대속한다면 인류를 대속할 길이 열리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만민 가운데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선택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 만민을 이끌어가는 제사장 나라로 선택받았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장 나라 사명, 하나님께 온 세계만민을 끌어가는 사명이 실패하면, 이스라엘 나라 사명이 실패하면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히는 거죠? 오늘 날 교회가 타락하면 하나님께 가는 길이 막히는 것과 똑같습니다. 담임목사님 집의 문을 열자마자 7억 돈다발이 떨어지면 온 교인들이 실족하는 거예요. 열방의 빛이 돼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면 열방이 하나님께 가는 길을 종잡지 못하게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이면서, 열방의 빛이면서, 거룩한 백성이면서 세계만민을 하나님께 영적으로 흡인하면서 하나님과 이방인을 만나게 해줘야 할 중보자 백성인데, 중보자가 실패했을 때 독생성자인 예수님께서 오셔서 종말에 오셔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만회하고 상쇄하니까 인류의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인류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이 맞죠?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죄를 대속할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나님께 가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하셨어요. 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건 죄거든요. 죄를 극복하신 예수님만이 모든 종교 고등사상에 노출돼 있는 인류를 이끄는 유일한 길인 겁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에요. 이건 기독교만 유일한 길이라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역사적 기독교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많이 타락해서 세상의 지탄거리가 됐습니다. 기독교인이 올바로 대표하도록 예정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없더라도 당신을 얼마든지 계시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같이 예배당 다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당신을 계시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만민을 하나님께 이끄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 더 중요합니다. 기독교라든지 교회라든지 그건 매우 부차적이고 본질적이 아닙니다. 원래 순종하는 교회, 예수님을 대표하는 교회는 예수님과 똑같이 하나님께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빛이라고 했을 때는 이사야 42장 1-6절을 가리키는 즉 열방을 하나님께 이끌어가는 열방의 영적 무지몽매 상태를 들추어낼 뿐만 아니라 열방을 하나님께로 이끌어가는 제사장의 사명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는 간음하다 붙잡혀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여인을 가리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이 자매님은 어둠에 다니다가 붙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은 돌에 맞아 죽을 뻔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죄를 극복하고 생명의 공동체인 요한복음 공동체에 들어왔습니다. 이 자매님은 요한복음 공동체에 들어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긴 간증을 남겼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미완료시제로 돼 있습니다. 나를 따랐던 자, 과거시제가 아닙니다. 나를 따를 자, 미래시제도 아닙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계속 따르는 자, 나를 계속 쉴 새 없이 부단히 따르는 그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어둠에 다닌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장 1-12절에 어둠에 다닌다는 말뜻이 나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둠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의 삶 중에서 스펙트럼이 쭉 있습니다. 가장 처참한 어둠이 있고 가장 기만적인 어둠이 있습니다. 처참한 어둠은 세리와 창녀의 삶입니다. 세리와 창녀처럼 처참하게 어둠에 사는 사람들은 어둠의 자각 증세 때문에 빛을 갈구하는 능력이 엄청 많아집니다. 세리와 창녀는 어둠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어두운 곳이기 때문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는 말을 받을 때 금방 귀가 열립니다. 그런데 가장 기만적인 어둠은 점점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고, 심지어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처참한 어둠을 먹이 삼아서 기생하는 종교인들이 가장 기만적인 어둠입니다. 기만적인 어둠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으로 대표되는 종교인데, 이 종교의 특징은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도덕적 실패자들을 먹이 삼아서 종교적 위계질서를 튼튼히 만들어 이 세상에서 흥행을 하는 자들입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생계의 속박에 몰린 자들, 즉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없고 정결케 될 수 없는 직업적인 불결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을 먹이 삼아서 거룩한 종교의 위계를 만들어놓고 왕노릇 하는 자들, 즉 자기가 빛을 참칭하는 자들입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빛을 참칭하는 짝퉁 빛으로써 유사모조품 빛으로써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들을 돌로 때려 죽여서 종교를 유지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부 5장 대심문관에 나오는 14세기 세르비아에서 예수님을 가둬놓았던 대심문관 같은 종교입니다. 지금 많은 제도적 종교권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서기관 바리새인 수준입니다. 예수님의 빛에 노출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종교의 특징은 세 가지만 지키면 구원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술 담배 하지 않는 음식법을 잘 지키는 사람, 주일날 나와서 헌금 꼬박꼬박 하는 사람, 세례와 같은 할례를 하는 것, 오늘 날 한국교회 목사님은 이 세 가지 외에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썩어가도 헌금만 하면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무지몽매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저는 목사의 일원으로써 만일 목사님들 모두를 심판한다면 저도 붙들려 심판을 받는 게 마땅합니다. 목사로써 많은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얼마나 사랑을 많이 받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목사님들은 김장을 다 갖다 줍니다. 물론 예수님께 갖다 주는 김장을 제가 가로채는 겁니다. 목사님에게 양복을 사다준다는 것은 실제로는 예수님께 사주고 싶은 그 마음으로 목사님께 갖다 주면서 예수님이 입었다고 믿어 버리는 겁니다. 목회자들은 너무 사랑을 많이 받고 대접을 많이 받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 진심과 순종을 다 가로챕니다. 저도 이번에 우리 학생한테 선물을 받았는데, 교수도 선물을 엄청 많이 받습니다. 물론 불편한 선물이 많습니다. 루왁 커피를 선물을 했는데, 조그만 항아리의 루왁커피, 저는 그게 가루인줄 알고 받았습니다. 뇌물과 선물의 중간상태인데, 받을 때 좀 애매했습니다. 펴보니까 한 줌 되는 루왁커피가 있어요. 루왁커피는 발리에 있는 이상한 야생고양이 응아에서 나온 걸 씻어서 만든 겁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설교의 큰 주제는 아닙니다. 학생이 그걸 줄때는 자기를 잘 봐달라고 주는 게 분명합니다. 그 학생을 잘 봐줄 마음이 없어서 안 받아야 하는데 어쨌든 받았습니다. 루왁커피를 받아서 처음 보는 커피니까 익은 커피인줄 알고 갈아 달라고 이마트에 가져갔습니다. 몇 군데 갔더니 안 갈아줍니다. 한 군데서 갔더니 이거 생두에요, 갈면 큰일 나요, 집에서 가세요, 이렇게 불편한 선물을 받아서, 이걸 하루 종일 찧어서 수업시간에 그 학생 가져다주렵니다. 뇌물 안 받겠다고요. 우리 양목사도 드실 수 있는데, 교수나 교사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선물을 받습니다. 이게 바로 유사 빛 집단, 빛이 아닌데 빛으로 대접받는 인간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예수님의 빛에 노출될수록 목사님들은 겸손합니다. 예수님 빛에 노출된 목사님들은 자기를 낮춰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의 반열로 들어가는데, 예수님의 빛을 맛보지 못한 목사님들은 권력의 첨탑에 서서 모든 호사를 누리며 모든 걸 다 얻어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모두가 심판 받을 때 루왁커피 받은 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걸 갖다 주고 청산하려고 합니다. 목요일에 다 갈아서 갖다 주려고, 하루 종일 찧어야 되겠죠? 찧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요. 아무도 갈아주지 않으니까요. 제가 받은 후 너무 많이 후회했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유사 모조품 빛이기 때문에 세 가지만 하지 않으면 구원을 보장하는 한국교회는 미신의 극치라고 말하면 됩니다. 첫째 안식일을 지키고 헌금을 하고 세례를 받고 술 담배만 하지 않으면 마치 기독교의 신비에 도달한 것처럼 말하는 제도권 기독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종교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간음하다 붙잡힌 어둠의 가장 처참한 단계에 와 있는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해서 빛을 가장하고 빛을 참칭합니다. 예수님은 나야말로 세상의 빛이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니라 죄를 증취하고 심판하기만 하고 이 여인을 죄로부터 건져줄 능력이 없는 바리새인과 달리 나야 말로 세상의 빛이니 간음하다 붙잡힌 자매님을 재생시키고 복구시키고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힌 자매님 형제님들을 재활 복구시켜서 생명의 빛을 얻게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본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진짜 좋은 교회고, 이런 교회의 값어치는 천문학적으로 귀한 값어치입니다.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자는 어둠에 포획되지 않고, 유사짝퉁 모조품 영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어둠은 하나님을 등져서 자기만족적인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20대 때는 20대의 어둠이 있고, 30대 때는 30대의 어둠이 있습니다. 지금 이 본문의 어둠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어둠과 이 자매님의 어둠으로 양극단의 어둠입니다. 바리새인의 어둠은 자기만족적인 의에 사는, 일종의 유사영생에 속아 사는 인간이고, 간음하다 붙잡힌 자매님은 처참한 자기욕망을 통제하지 못하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이루려고 애쓰는 즉 불가능에 도전하는 욕망의 화신입니다. 이 모두가 다 어둠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스펙트럼이 옅고 굵고 진한 것에 상관없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은 첫째, anybody in christ, he or she is new creation,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장 17절처럼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영생, 거듭나는 것, 새로운 품성을 얻는 것이 생명의 빛을 얻는 겁니다. 둘째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은 에베소서 5장 7-13절에 있는 것처럼 빛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의로움과 착함과 진실함을 추구하는 동아리에 들어가는 것이 생명의 빛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의로움과 착함과 진실함에 참여함,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공동체에 가면 삶이 투명하기 때문에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는 은밀하게 참여하지 못합니다. 소규모 공동체에 들어가면 은밀한 곳에서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참여하지 못하지만 그 인간성의 본성 안에 참여 안 해도 될 만큼 완전히 성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빛의 공동체에 참여하지만 어둠을 사모하는 잔여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힘듭니다. 그래서 1861년 빅토르 위고가 쓴 <레 미제라블> 소설 마지막에 장발장이 피난 가는 수녀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 수녀원은 1년에 한 명씩 미쳐 나오는 수녀가 있는 곳인데, 5명의 수녀가 최근에 미쳐갔다, 그 말을 하면서 수녀원이 순결한 소녀들 영혼의 공동체인데 그걸 감당을 못합니다. 밤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이 그 방에 찾아와 주길, 환상 가운데 성적연합을 기대한다는 이야기 나옵니다. 헨리 나우웬이 쓴 <제네스 일기>를 보면 수도사들의 암투가 나옵니다. 수도사들은 모든 걸 잊고 26년 동안 세 번만 외출하기로 하고 트라페스 수도원 사람들은 비장한 결단을 하고 왔습니다. 비장한 결단으로 와서 영적인 격앙과 고조기에 들어왔는데, 실제로 수도원에 살아보니까 보직이 나쁘니까 기분이 안 좋아서 짜증도 나고 질투도 납니다. 그래서 장작 패는 수도사는 사사 수도사를 매우 미워합니다. 저 놈은 얼마나 보직이 좋냐? 로렌스가 쓴 <하나님의 임재연습>을 보니까 깍두기 수도사는 깍두기 써는 보직을 받자마자 칼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로렌스 형제가 수도원에서 제일 나쁜 보직을 받고 깍두기를 썰면서, 내가 이걸 하려고 들어온 건 아닌데, 하면서도 자기를 부인해가면서 하나님 임재를 깍두기 썰 때마저도 경험하는 단계까지 가버립니다. 극한적인 경험이죠. 수도원 안에 들어가도, 빛의 공동체 안에 들어갔는데도 아직 어둠이 잔존하기 때문에 수도원도 해결책이 못 됩니다.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한다고 해서 어둠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들어오면 은밀한 죄를 범하지 못하지만 몸의 속량을 받지 못한 우리는 또 다시 다른 싸움과 직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공동체생활을 하면 남을 정죄를 잘 하게 됩니다. 공동체생활을 하지 않을 때는 정죄를 하지 않고, 남 결점 발견하는 눈이 0.1밖에 안 됐는데, 공동체생활을 하면 시력이 1.5가 됩니다. 남의 죄가 그렇게 잘 드러납니다. 정진호 평양과기대 설립부총장 <떡의 전쟁>이라는 책을 보니까 서울대 공대실험실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해놨습니다. 주로 청소시간에 몰래 빠지는 친구, 장학금을 이중으로 받기 위해서 서류를 약간 꾸미는 친구, 자기가 미워하던 H가 후배 형제에요. 기독교인이에요. 자기는 교회 안 다니면서 술과 여자와 도박에 빠져 20대를 엉망으로 보냈는데, 이 기독교인 친구들은 생글생글 웃고 다니면서 너무 웃고 다니면서 싫다고 했는데, H라는 후배가 자기가 하바드 MIT로 가니까 공항에 왔더라는 겁니다. 나는 그 친구를 이미 매우 나쁜 점수로 매기고 있었다, 실험실 청소할 때마다 빠지고 이중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 서류를 꾸몄다, 정진호 교수가 본 실험실 내에서의 내면성은 실험실 들어가기 전까지는 실제로 안 보이는 거거든요. 그래서 부부관계가 매우 위험한 관계입니다.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지뢰밭입니다. 너무 약점이 드러나기 때문에, 50대까지 일단 살고나면 그래도 안정감이 듭니다. 이제 우리는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처음에 살고나면 많이 힘듭니다. 너무 나쁜 습관들도 나타나고 우리가 빛 가운데 와서 각각의 빛의 동아리를 이루었지만, 빛 80 어둠 20을 가진 아이들 100명이 모이면 100명만큼의 빛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빛의 공동체가 모이면 또 여전히 그 안에서 다른 어둠이 나옵니다. 그래서 빛의 동아리에 간 사람들도 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고백하는 공동체, 투명한 공동체는 많은 어둠을 이겨내게 만듭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몸의 속량을 받을 때까지 잔여 어둠을 싸울 때까지는 분투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의 빛을 얻는 것은 이 세상 죄를 들추어내는 선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죄를 들추어내고 이 세상의 사람들을 바른 길을 인도하는 지도하는 선교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일 마지막에 우리가 진짜 죽어서 육신의 생명이 끝나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종국적인 생명의 빛입니다. 이 생명의 빛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꺼져갈 때마다 위력을 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월이 갈수록 죽음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생명의 빛을 실제로 얻는, 가장 정의롭게 온전한 의미로 생명의 빛을 얻는 것은 우리 생명의 빛이 꺼져갈 때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둠에 사로잡히기를 잘하는 본성인 것을 아시고 이렇게 위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가득 찬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해서 진일보하고 싶은 사람이면 반드시 신앙생활 도와줄 사람이 나타납니다. 반드시 말씀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뚜렷한 의지적 지향이 중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어둠의 세력을 이기기를 원합니다.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습니다. 빛의 자녀들의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강력한 의지와 지향을 지속적으로 가지면 반드시 영적환경이 열립니다. 말씀의 종이 나타나고 신앙동아리가 나타나고 친구들이 나타나고 거룩한 교제권이 나타납니다. 제가 공동체 생활을 한 횟수가 1979년부터 94년까지, 약 16년간 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투명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삶의 궤적이 다 훤하게 아는, 제가 속한 공동체는40~50명밖에 안 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돈 씀씀이 활동거지 내가 어디 가는 모든 동선들이 자명하게 열리는, 자주 형제들과 같이 잠을 잤기 때문에, 그런데 해보고 제가 느낀 점은, 제가 노출되었을 때 가장 큰 약점은 형제자매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제 인격이 성숙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같이 살 때 형제자매들이 처음 저한테 받았던 감동이 점점 줄어듭니다. 형과 내가 한 달만 살면 내가 너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가 두 달 만에 뛰쳐나갑니다. 설거지도 하라고 하니까, 옛날에 형이 공동체 바깥에 있을 때는 설거지하란 말도 안 하더니 왜 자꾸 시키냐고, 그래서 도망간 사람이 최은상 목사입니다. 지금도 만나면 회개합니다. 창세기 6장, 7장까지만 하고 도망간 사람이 김명구 라는 아이입니다. 공동체 생활하면서 청소하라고, 옛날에는 제가 청소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항상 좋은 사람이었는데 공동체생활하면서 일을 시키니까, 형이 나를 부려먹나? 최은상 목사는 지금은 회개하고 다니지만 한동안 자기 입으로 회개를 안 했습니다. 또 한 형제는 잘 때 고등학교 때 지었던 죄를 너무 많이 고백합니다. 이게 고역입니다. 제가 자취하는 누나 방에 들어가서 불을 껐어요, 이런 말을 하면 기분이 너무 안 좋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행동, 자기가 정학 받은 이야기, 이런 걸 하면 목자의 마음에 그런 이야기를 밤에 불끄고 들으면 그 다음날 꿈에 나타납니다. 그 형제가 그 고백을 할 때는 죄가 격양되어서 자기는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들은 저는 너무 괴롭습니다. 비밀이 없이 너무나 삶이 투명하게 교제가 되니까 너무 고달팠습니다. 요즘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말, 목사님 시간 있습니까? 의논할 일 있습니다, 이게 제일 무서운 말입니다. 제발 의논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데 이 말은 저를 매우 힘들게 합니다. 웬만하면 이메일로 하면 안 될까요? 그런데 이메일이 잔뜩 오면 그걸 또 읽어야 하니까 그게 또 힘듭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교회 안에서 투명하게 삶의 동선이 공개된 삶을 살면 매우 많은 죄를 극복하게 되지만 또 다시 우리가 성장하지 않으면 공동체의 자주 만나고 투명하게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의 권태로움을 이길 신비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회퍼가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공동체 생활하는 사람은 반드시 홀로 있는 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합니다. 핀케발덴에서 본회퍼가 지하신학교를 하면서 공동체생활을 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니까 본회퍼 공동체에도 벌써 많은 균열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 공동체를 하면서 용서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벌어지니까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부부생활은 490번 용서해야 하는 사이이고,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친한 가족끼리도 갈등이 일어날 수 있고 형제간에도 갈등이 일어날 수 있고, 우리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투명성이 고조되고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이 격조높아갈수록 성장해야 하고 또다시 신비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출애굽기 19장과 24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보세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밝은 빛으로 자기를 보여주셨지만 모세에게 보여주지 않는 신비가 있죠? 계시의 연봉에 올라갈수록 하나님이 완전히 포착되지 않고 또다시 저만큼 높아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의 공동체 안에 살면서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여전히 신비감을 자아낼 만큼 영적고도가 조금씩 높아가지 않으면 같은 공동체생활 하면서 함께 지내는 것이 매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저의 제일 큰 분투는 이겁니다. 저를 알고 지낸 사람 사이에서 부단히 성장해야 하니까 부단한 성장의 부담이 크고, 목사님들한테 힘들고 삶이 투명하게 공개된 사람한테 힘든 겁니다. 우리 모두다 공동체생활을 한다고 영적인 이완을 하면 안 되고 부단히 성장하여 내가 또다시 성장한 모습을 서로 보여줄 수 있는 자유함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너무 정죄하지 마시고 나는 성장해야 할 텐데 안 하면 살만한 가치가 없어, 이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성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저는 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너무 절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이 모양밖에 안 되는 모습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자신과 화해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게 최고야 더 이상 성장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냉소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한계 안에 머물지만 한계를 조금씩 넘으려는 빛의 공동체가 우리에게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헌금함 앞에서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2장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마지막 수난주간에 하신 말씀,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관찰하셨던 예수님이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공동체는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는 사명이 있고, 지속적으로 따르는 사명을 우리가 수행하다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풍성한 생명력을 누리는 공동체로 화할 줄 믿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밝다, 생명의 빛을 얻기 때문에, 이 밝음은 어둠이 없는 밝음이 아니라 어둠과 함께 하는 밝음이고 어둠을 품는 밝음이고 어둠을 어루만지는 밝음이기 때문에 전혀 명랑쾌활하기만 한 게 아니라 우울함과 함께 있는 밝음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의 빛은 어둠과 함께 하는 빛, 어둠을 이겨가는 빛, 어둠을 거룩하게 성화시키는 빛입니다. 이런 생명의 빛을 만끽하고 누리는 한 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지속적으로 따르면서 어둠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를 원합니다. 남몰래 나를 죄 짓게 만드는 어둠의 힘, 그것의 완력과 지배력을 빛 가운데 참여함으로 와해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우리가 투명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면서 우리의 약점이 드러나고 우리가 원하는 만큼 빨리 성장하지 못하여 참으로 답답할 때 있지만 낙망하지 않게 하시고,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게 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예수 안에 머물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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