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2부 예배-요한복음 8:1-11 (몸 구푸리신 예수)
요한복음은 특수한 개인들을 등장시켜서 요한복음의 신학적인 신앙의 이념들을 잘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양심적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보여준다면 4장은 모세오경밖에 없는, 다섯 남편으로 비유되는 모세오경만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참예배를 갈구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고립된 영성을 보여줍니다. 5장에는 38년 된 병자를 등장시킵니다. 38년 된 병자는 민수기에 나오는 38년 동안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체적 무기력 상태, 전진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는 이처럼 특수한 개인들을 등장시켜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내용은 구약시대의 모든 결핍과 불순종과 죄의 경험들을 예수님이 완전히 갱신시켜주시고 죄사해주시고 새롭게 창조해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8장은 호세아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을 간음한 여인으로 집약시켜서 말합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을 간음하다 붙잡힌 현행범으로 고발합니다. 오늘 본문은 호세아서가 말한 주제, 하나님께 간음죄를 범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로마서 7장 7-8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를 죄 짓게 만드는 독특함, 율법과 우리 죄 사이의 관계를 오늘 자매님이 보여줍니다. 이 자매님은 아마 붙잡혀 새벽에 끌려 나와서 광장에서 처형되기 직전으로 몰릴 때까지 자기 행동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충분합니다. 그냥 아름다운 로맨스였고 중년에 일어난 타오르는 불꽃이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심판에 밝은 빛 앞에 조명되었을 때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 앞에, 탐조등 앞에 노출되기 전까지는 괜찮은 정도의 행동, 심지어 우리를 즐겁게 하는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동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행동처럼 하나님 율법의 탐조등 앞에 서면 돌을 맞아야 마땅한 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진리의 빛 앞에 노출되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의 모든 행동들을 오늘 이 본문처럼, 탐조등처럼 하나님의 안목으로 우리 죄를 지적해보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같은 신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간음한 여인이라 보고 있는 호세아를 상기시키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현행범 여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가 그렇게 단죄하고 비난하던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도 갱생될 수 있고 정결한 주님의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은 호세아서가 일찍이 다루었던 주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구원, 또 그런 너저분한 넝마 같은 삶을 살았던 개인이 구원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53절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마가복음 11장 17절과 19절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오셨다가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누가복음 22장에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이런 본문이 나옵니다. 예수님 최후 마지막 수난주간에 예수님의 생활패턴입니다. 수난주간의 예수님의 마지막 생활은 감람산에서 노숙을 하시고 이른 아침 성전에 와서 가르치시고,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emergency, 예수님이 지금 정상적으로 생활하시는 게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수난주간에 돌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감람산으로 가셨다는 말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일으키나요? 예수님은 지금 감람산 기도하는 장소로 갔구나 라고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누가복음 22장의 감람산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예수님은 최후의 수난주간에 이 일을 겪으셨다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본문 외에도 시험하는 내용자체는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수난주간 화요일 또는 수요일에 나오는 대시험절이라는 날짜 그때 일어난 겁니다. 그때 사두개인도 시험했고 헤롯당도 시험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같이 물었습니다. 사두개인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그 둘째와 셋째가 그를 취하고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이런 식으로 물었습니다. 그때가 아마 수난주간 화요일 또는 수요일입니다. 아마 화요일에 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맥락에서 이것도 일어났다고 보여집니다. 이유를 보시면 왜 시험했다 돼 있습니까? 요한복음 8장 6절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시험하는 거죠. 시험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8장 2절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이 표현은 마태복음 5장 1절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이건 전형적으로 랍비가 하는 행동입니다. 랍비는 앉아서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그 시대 누가 보더라도 랍비행세를 했습니다.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이 말은 예수님이 이 질문을 들을만한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모든 랍비들, 앉아서 누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구약 중에서 무엇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항상 질문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저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까? 이건 랍비에게만 묻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앉아서 가르치신다는 풍모가 이런 질문을 받으실만한 분이라는 겁니다. 아니다를까 3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그러면서 하는 말,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디다스칼레라는 말을 썼습니다. 디다스칼로스의 호격,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이 사람은 이 여자가 간음하는 걸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백성들은 호 라오스 라는 말이 쓰입니다. 라오스라는 말이 영어로 레이피플, 레이가 라오스에서 나온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상당히 유력자 회중을 가리켜서 라오스라는 말을 씁니다. 이 라오스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무리라고 하는 오클라스 와는 좀 다릅니다. 라오스가 데려왔다는 말은 예루살렘에서 누가 간음하고 있는지 세세히 알고 있는 촌장급 원로급들이라는 뜻입니다. 촌장급 원로급들이 익숙히 간음하는 현장을 알고 덫을 놓아서 데려 왔습니다. 남자도 같이 와야 하는데 도망갔는지 오지 않았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레위기 20장 10절에 의하면,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러면 예수님께 오기 전에 자기들이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사회미풍양속을 해치는 공동법은 아무라도 먼저 발견하는 자들이 처단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개입하기 전에 바로 공동체가 개입해버립니다. 국가가 모든 형사소추를 대신하는 것은 매우 근대적 현상입니다. 옛날의 모든 법들은 개인친족이 복수하거나 공동체가 응징하거나 해서 국가나 사법기관이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사법기관이 개입하는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이 사람들은 보자마자 돌로 쳐도 마땅합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지 않고 예수님께 데려온 이유는 예수님이 로마총독의 법적관할 하에 있는 곳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로마법 조항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법을 어기게 만들거나 아니면 레위기 20장 10절에 그 법을 어기게 만드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어기게 만들어서 예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하여 예수가 율법을 어긴 자라는 소문을 퍼트려서 예수가 죽을 때 아무런 아우라, 후광이 없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예수가 율법을 어겨서 죽는구나, 하는 정도의 예수를 죽이려는 적개심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여인에게 곤경을 초래한 겁니다. 이때 예수님의 태도가 너무 기가 막힌 태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덧입어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도 배워야 합니다. 아주 격앙된, 분노가 극에 달했던 회중들을 예수님은 몸을 구푸려서 그들을 다운시킵니다. 이때 몸을 구푸린다는 쿱소라는 동사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세례요한이 하는 말입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이때 쿱사스라는 동분사가 쓰였습니다. 쿱사스 리사이,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모자랄만큼, 몸을 구푸리는 것은 종이 하는 행동입니다. 전형적으로 노예가 하는 행동이 쿱스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혔습니다. 이 상황이 매우 기가 막힙니다. 돌을 다 들고 있습니다. 돌을 들고 쳐 죽이려는 기세가 있고 여인은 수치스럽게 몸을 구푸리고 있었습니다. 몸을 뻣뻣하게 들지 못하니까 몸을 구푸린 그 상태에서 예수님이 몸을 구푸리니까 돌을 든 회중들이 너무나 돌발적으로 나오니까, 말도 하지 않고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건 절정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히 혼을 빼놓는 겁니다. 계속 씁니다. 아람어로 쓰니까 이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많은 서구학자들은 예수님이 글을 못 쓰신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이 본문 때문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라페인, 동사를 썼습니다. 계속 질문합니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아나 쿱소,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레위기 율법에 없는 말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건 전광석화처럼 예수님의 머릿속에서 터져 나온 건데, 어떻게 이 순간에 이런 말을 하실 수 있는지, 이런 장면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격앙된 회중들 또는 상대방을 다스릴 때는 방법이 일단 몸을 굽혀야 합니다. 차전놀이 하듯이 계속 싸워 올라가면 안 되고 한 사람이 소리를 높일 때는 반드시 소리를 낮춰야 합니다. 세계대전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소리를 낮춰야 하는데, 일단 몸을 낮추는 게 더 중요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싸울 때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한 사람이 무조건 몸을 낮춰야 합니다. 한 사람이 150mm 속사포를 쏠 때는 몸을 숨겨야 하고 굴에 엎드러져야 하지, 거기서 고개를 들고 그래 쏴봐라, 내가 죽나 보자, 제가 생각할 때는 친구와 친구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료와 동료사이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교수들도 항상 조교들한테 무언가 시킬 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교가 반발할 때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 문제 있다, 학생들이 반발할 때는 반드시 조교도 교수도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런데 교수가 삿대질하면 바로 사진 찍혀서 유투브에 올라버립니다. 실제로 사람이 격앙되고 적개심이 부글부글 끓을 때는 이성을 잃었을 때 이성을 찾게 만들려면 그을 쓰셔야 합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매우 기분 나쁜 상태를 당했을 때는 전화기를 들면 안 됩니다. 모든 하는 말들은 실수입니다. 글을 쓰셔야 합니다. 글을 쓰면 영적 침전효과가 일어나서 흙탕물이 가라앉습니다. 글을 쓰는 게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볼 때 글을 쓰는 건 자기를 다스리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수치심을 다스릴 때도 글을 써야 하고 당혹스러운 사태, 하나님께서 글을 쓸 때 지혜를 주십니다. 몸을 구푸렸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겸손하신 하나님, 교만한 사람을 이기는 것은 겸손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시험하려는 사이에 대적자가 우리에게 올무를 놓고 덫에 가두려고 할 때는 몸을 낮춰서 낮은 포복하는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제가 볼 때 삶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신학자는 격앙된 상대와 싸울 때 이기는 방법을 bending down theology, 몸 구푸림의 신학이라는 말을 써서 요한복음 8장을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조정하는 기가 막힌 방법이라고 일반화시켰습니다. 몸을 구푸리는 게 너무 중요합니다. 직속상관도 몸을 구푸려야 합니다. 이게 너무 중요합니다. 아버지도 자녀에게, 부모님도 자녀가 항의할 때는 거기에 일단 몸을 구푸려야 합니다. 몸을 굽힌 태도자체가 죄인과 하나 되시는 동일시의 방법, 정신적으로 수치심에 찌들어 있는 이 여인과 예수님이 자기 몸의 자태를 동일시함으로써 여인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한 번 보십시오. 그 자비로운 예수님이 자기처럼 몸을 구푸려서, 이 무릎 꿇다시피 한 이 여인처럼 몸을 구푸려서 바닥에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안심을 주었겠습니까? 참 매력적입니다. 너무 예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고 매력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러 오신 분, 십자가에 못 박힐 생각만 하는 염세주의자가 아니라, 언제 못 박히지? 빨리 박혀야 할 텐데, 이런 생각하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너무 아름다운 분입니다. 이 분이 죽으면 너무 슬퍼하게 될 그런 아름다운 분입니다. 아름다운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예수님, 이렇게 매력적인 예수님, 이렇게 겸손한 예수님, 자기 정돈에 전문가가 되신 예수님, 즉 분노하고 격앙하는 대적자들의 고함소리와 가시 돋친 언어들을 땅에 글을 쓰심으로 정돈하시고 침전시켜 가시는 예수님, 이런 예수님을 우리가 배워야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모신다할 때는 모방의 의무가 있는 거거든요. 이런 예수님은 실제로 모방해야 해요. 제가 살아가면서 이렇게 몸을 굽혀서 해결안 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몸을 굽혀야 합니다. 직속상관한테도 몸을 굽혀야 하고, 자기 부하한테도 몸을 굽혀야 하고,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몸을 굽히면서 글을 쓰는 모습은 지성인의 모습이고 메시아가 되기 전의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인간인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신 겁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아마 몸을 구푸려서 겸손하게 이 여인을 동정하고 싶은 마음과 율법을 깨고 싶지 않은 마음, 둘 다 완벽하게 예수님 앞에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한다는 마음이 돌을 든 회중의 분노입니다. 그런데 돌을 든 회중의 분노도 죄를 미워하고자 하는 레위기 20장 10절의 마음이라면, 저기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고 옷매무새가 엉망인 채로 짐승 같이 존엄이 파괴된 저 여인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저 죄를 짓고 죽음에 임박한 저 여인에게도 하나님의 마음이 가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는 마음도 하나님의 마음이고, 죄를 짓고 망연자실하게 인간의 존엄을 파괴당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벌레처럼 전락한 저 여인도 하나님의 동정심이 가 있는 마음,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이 두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개를 숙여서 돌을 든 회중과 몸을 구푸린 여인 사이에서 글을 쓰실 수밖에 없고 자기 정돈을 할 수밖에 없고 이걸 돌파할 수밖에 없는데, 율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이 여인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놀랍니다. 어떻게 이렇게 멋진 아이디어가 떠올랐을까?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말을 하셨을까?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한 번 더 몸을 굽히셔서 종과 같이 노예처럼 저자세를 취합니다. 사람이 저자세를 취할 때 양심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다음 본문이 참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강렬하고도 묵직하고도 자비가 가득차면서도 위엄이 가득 찬 지혜 앞에서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이 들어요. 이 유대인들도 보통이 아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는 어른,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아도, 양심의 가책만 느껴도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못 느낍니다. 정당인들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고 기업인들도 양심의 가책이 없습니다. 요즘 모든 악인들의 특징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적인
범죄자입니다. 정치가부터 시작해서 효자동에 있는 푸른 집에 사는 아저씨도 그렇고, 치킨집 알바생을 유린했던,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니까 자기가 한 걸 보고 통회하면서 잘못했다고 하고, 통전한 유감을 표현하거나 자기가 잘못했다고 죄를 고쳐보려는 마음이 없으니까 우리가 감동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마음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무슨 죄 없는 자?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생각한 것 같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간음죄 없는 자, 이런 뉘앙스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어른으로 시작하여’ 어른이 presbyterian 입니다. 장로가 presbyterian이죠? presbyterian은 노인입니다. 젊은이 아직까지 풋내기,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들.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어른은 죄가 많다는 말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빨리 느끼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젊은이까지 나가고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그 여자와 남았습니다. 예수님만 돌로 칠 수 있는데 예수님은 회중들이 버리고 간 돌을 가지고 예수님은 여인을 응징하지 않고 자기를 응징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에게 있어 무한자책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자책, 하나님은 무한책임, 하나님은 죄 있는 인간의 연약성을 자기책임으로 아시고 당신의 독생자에게 모든 책임을 다 전가시켜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이것이 기가 막힌 거죠. 예수님이 이 여인의 죄를 용서해준다는 말은 예수님이 이 여인의 죄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고 가는 사람만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오. 요한복음 1장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에 죄를 다시 짓지 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말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죄를 용서해주고 이 무거운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분도 없습니다. 여러분, 세계종교가 비슷해 보이지만 절대로 비슷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다릅니다. 이렇게 개인의 죄를 짐 지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이건 어떤 종교도 생각하지 못했던 표상입니다. 불교나 이슬람교 유교 등이 절대로 다릅니다. 전부 다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약속 하나만 주시고 죄를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성령 무한한 감화 감동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건지사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도록 하셨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죄를 한 번도 지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고 나서 죄를 짓지만 주님의 영토 안에서 짓는 죄, 골로새서 1장 13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것이 죄사함입니다. 주님의 권세 아래서 짓는 죄는 흑암의 권세 아래서 짓는 죄와 다릅니다. 우리가 흑암의 권세 안에서 짓는 죄는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지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었지만, 우리가 하나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왔을 때는 우리가 죄를 짓기는 짓지만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더 뼈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죄의 경험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 안에서 죄 용서받은 사람이 죄를 짓는 경우와 예수의 피 바깥에 보혈 이전에 죄악의 권세 아래, 골로새서 1장 13절이 말한 그 정세와 공중권세 잡은 자의 노예로 살 때 죄를 짓는 것의 차이, 예수 바깥에서 공중권세 잡은 자, 우리의 악령 안에서 죄를 짓는 것은 죄를 지을수록 자기 파괴적인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풀려나 하나님 사랑의 아들나라로 갔는데 영토가 바뀌었고 국경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우리가 죄를 짓습니다. 이 경우는 로마서 8장 23절의 몸의 속량을 간절히 기다리게 만드는 성화를 촉진시키는 죄입니다. 죄는 죄이지만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는 목마름을 가중시키는 죄이기 때문에 이런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이건 조심해야 합니다. 한 번 실험해볼까?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로마서 3장에 가면 그걸 실험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했다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노래방 수준이 아니다, 나는 단란주점 가보련다, 단란주점에 가도 성령 충만한가 보자,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자신도 모르게 흑암의 권세에서 간 단란주점 파들이 보혈로 구원받았을 때의 이야기지, 예수 보혈의 능력을 극한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단란주점 가서 은혜가 안 오니까 룸살롱 가자, 강남스타일로 한 번 살아보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강남스타일은 거의 구원을 못 받습니다. 오 섹시레이디를 그렇게 많이 외치면서 여자 사이에서 팔짱끼고 사는 놈이 구원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강남스타일은 천국에서 유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성적욕망을 극한까지 실험하려고 하는 강남스타일은 지옥 갑니다. 100% 지옥갑니다. 싸이가 지옥간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강남스타일의 세계관으로 살면,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겁니다. 우리 성감을 북돋는 환경에 자기를 무차별 노출시키면서 낮과 밤의 질서가 완전히 다르게 사는 것, <오페라의 유령>의 주제 아닙니까? <오페라의 유령>의 첫 장면을 보면 밤은 우리 모든 욕망을 불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뱀처럼 온 꽈배기를 틀면서 욕망을 극한으로 분출하게 합니다. 밤의 신앙입니다. 강남스타일 봐요. 낮과 밤이 다르다는 것 아닙니까? 머리를 풀고, 가사 후렴구가 너무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런 강남스타일을 많이 부르면 여성의 성 상품화가 일상적인 것이 되고 여성의 성 상품화가 범죄처럼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강남스타일을 부르는 모든 인간들은 여성의 성 상품화를 자연적으로 규범화시킵니다. 그래서 그 노래를 싫어하고 그건 금지곡이 돼선 안 되겠지만 그 노래를 부르는 순간 merchant sale 동맹에 간 놈들이기 때문에 저는 싫어합니다. 그거 부르면 지옥 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너무 단순해 보이나요? 그 가사를 잘 보세요. 비 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이건 불쌍해 보이기 때문에 성령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최은희 최성수가 불렀던 노래는 전부 다 성욕을 극한까지 가보자는 겁니다. 그거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흑암의 권세 아래서 풀려난 사람이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죄악 된 세상에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성화를 촉진시키는 죄의 경우로 로마서 8장 23절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 몸의 속량을 애타게 기다리는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죄의 경험입니다. 8장 22절, 우리가 몸의 속량을 받을 때까지는 완전히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에서 여전히 죄와 허물을 끊지 못하고 유혹을 받고 있는 이 상태를 총체적으로 고발함으로써 성령충만을 요청하는 아우성을 일으키는 것이 예수 안에서 짓는 죄의 특징입니다. 하나님 나라 영토 안에 왔는데도 죄를 짓는다? 그때마다 성령 충만을 달라고 소리치는 아우성으로 그 죄의 이름이 바뀌기 때문에 영토 안에 오는 사람에게 죄를 짓는 유혹이 점점 약해집니다. 사단이 하나님 나라 영토 안에 온 사람에게 죄를 짓게 만들면 죄를 짓게 만드는데 성공하지만 몸의 속량을 기다리면서 온 피조물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 영광의 자리에 이를 때까지 기도를 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한 번 만들어서 엄청 기도하게 만들면 엄청 손해입니다. 주님의 나라 영토 안에 온 사람들은 점점 유혹을 적게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저쪽 영토에 속한 사람은 착한 일을 하더라도 순식간에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힌 죄의 경험은 성화를 촉진시키는 경험이 아니라 죄책감, 내가 이렇게 더러워졌는데, 더 더러워지자, 이렇게 자기를 오염시키고 자기를 더럽히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강남스타일 대로 살아버리면 진짜 강남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 가사대로 살아버리면, 우리는 아무도 강남스타일 대로 살지 않습니다. 우린 전부 다 강북스타일 가향스타일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작품, 숭실대 도서관에서 이 책을 선정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도서관 직원에게 전화해서 이 책 읽어보고 선정했느냐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모든 대학생들이 필독서로 읽습니다. 타락의 미학화입니다. 모든 범죄적 타락경험이 결국은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는, 오디세이적 방랑, 오디세이적 타락, 니체적 욕망의 극한집, 이걸 전부 다 정당화하는 게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책입니다. 조르바는 60대가 넘은 영감인데 이 세상의 모든 죄는 다 범합니다. 살인 살상 강간 과부랑 동침하기, 온갖 죄를 다 범하는데 여전히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주인공을 깨우치는, 타락했지만 엄청 지혜로운 사람, 타락했지만 엄청 위엄을 유지하고 자비로운 사람, 타락했지만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이해할 듯한 엄청난 예지가 가득 찬 사람, 이게 <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그런데 그 소설의 가장 큰 허구는 그렇게 많은 죄를 짓고 나면 일단 60대가 되면 망가져서 미라보다도 더 나빠집니다. 살인 강간 방화 이렇게 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형형한 눈빛으로 20대 젊은이를 감동시킬 아우라가 있어요? 남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순간 아우라가 다 꺼져서 총체적인 일그러짐과 망가짐이 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니체의 철학을 아주 허구적으로 미학화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면 60대 때 인생이 완전 망가집니다. 지금 우리 50대 동기들을 보니 너무 슬픕니다. 강남스타일에 나오는 것처럼 말춤도 추면 안 되고 거기서 말춤을 추는 말 생각이 나는 순간 성령의 충만을 바라면서 아우성을 쳐야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아담후손의 근원적 속박에 있는 것을 불쌍해하시고 동정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가 이 죄로부터 풀려나기를 원하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상태가 되길 원하셔서 구원을 주셨습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1장 13절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냄을 당하여 하나님 사랑의 아들 나라로 가는 것, 국적이 바뀌는 것, 우리가 성도, 죄 많은 세상에서 그렇게 유혹받으면서 살지 않도록 거룩한 환경 동아리가 필요합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동아리고 공동체가 바로 그런 동아리입니다. 공동체에 살면 몸의 속량함을 받을 때까지 치는 아우성이 조금씩 줄어듭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우리를 죄용서해서 다시는 죄 짓지 않는 자유에 이르기까지 성령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셨다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보혜사 성령, 로마서 8장 1-4절,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다시는 죄와 사망의 법 즉 죄책감, 자기 파괴적 우울증, 극한적 그리스인 조르바적 실험, 싸이 강남스타일적 실험, 이런 것들을 하지 않게 하시고 점점 더 고귀하게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주님을 따라 순종하게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선물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우리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8장 4절,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성령의 감화감동, 성령의 감화감동이 우리에게 넘칠 때 교회는 이 세상의 자기 파괴적 욕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건져내어 하나님 사랑의 아들 나라로 우리를 건져내는데 쓰임 받는 구령의 기관이 될 줄로 믿습니다. 가향교우들은 로마서 7장 7절, 요한복음 8장 1-11절 복음에 정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적 비전을 많이 말하는 사람들이 오해받지 않습니다. 저도 너무 많은 오해를 받습니다. 제가 사회적 비전에 대한 글을 많이 쓰고 강연도 하니까 로마서 7장이나 요한복음 8장의 주 예수의 보혈의 복음을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더라고요. 제가 이런 설교를 하면, 김회권 목사가 복음을 아네, 이런 식으로 오해를 받더라고요. 너무 슬픈 일입니다. 진짜 보혈의 근본적인 복음에 정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죄를 다시는 짓지 않는 하나님 사랑의 아들 나라에서 거룩한 동아리를 이루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은 죄를 심판하고자 하는 공의의 마음도 가졌지만 죄를 짓고 부서져서 죽음에 내몰린 여인의 마음도 가졌습니다. 하나님 이 마음 가운데 십자가를 통하여 죄 문제를 해결해주셔서 우리가 다시는 죄 짓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향이 하나님 나라 사제의 복음 구령의 복음 널리 퍼지는 나팔이 되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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