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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요한복음 7:45-52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 1부 예배-요한복음 7:45-52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

 

오늘 본문은 종교지도자들, 종교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논리가 작동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교권력과 제도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갈릴리라고 하는 족보에 없는, 계보에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온다는 사실, 대반전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 만민이 다 추모하고 숭앙하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와야 한다, 다윗이 태어났던 베들레헴 출신의 태생이 돼야 한다, 모세적 아우라를 갖춘 즉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가지고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도저히 우리가 저항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진 자가 돼야 한다, 이런 두 가지 견해를 가졌습니다. 7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그 선지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 신명기 18 15-18절에 나오는 이야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모세와 똑같은, 아무도 다툴 수 없는 권위를 가졌던 모세적 권위, 초월적 권위를 가진 예언자가 와서, 하늘로부터 온 표적, 마태복음 12장에서 자꾸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달라고 하는 것은 모세와 예수를 자꾸 등치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표적은 출애굽기 7-12장에 나오는 10가지 재앙, 만나, 반석,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 등 누가 보더라도 다툴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온 표적, 적대자들마저도 놀라게 하는 적대자들마저도 굴복시킬 수 있는 표적을 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적 표적이었고 매우 국소적 표적이었고 예수를 믿는 자들 가운데 나타났던 표적이었습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었고 가버나움 신하의 아들이 나았고, 38년 된 병자가 솔로몬 행각에서 나았습니다. 이런 것은 혹세무민하는 순회종교지도자, 일종의 마술사급 흥행사, 이런 사람들이 몰래 표적을 행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표적, publically sign, 공적으로 증명된 표적만이 당신이 메시아인 것을 입증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기다리던 신명기 18 15-18절이 말한 그 선지자란 말인가?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그것도 그리스도와 같은 말입니다. 두 번째로 왕적 면모를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를 일신하여 새로운 나라를 시작할 그리스도란 말이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이 그리스도는 메시아입니다. 이상적인 왕 메시아는 미가 5 2절에 보니까 베들레헴에서 나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 논쟁에 대한 응답을 위해서 예수님이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긴 어린 시절 간증기사를 갖다 붙입니다. 이건 날조한 것인지, 논쟁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예수님이 그렇게 된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어쨌든 간에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도 더 이상 논쟁이 되지 못합니다. ? 마태복음에서 베들레헴 동방박사들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으면서 태어났기 때문에, 요한복음 7 43-44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를 어떻게 잡습니까? 바람을 잡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는 제도권 종교권력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제도권 권력종교들의 해체자이기 때문에 제도권 권력종교를 무력화시키는 예수의 영, 예수의 바람, 원시적 야성, 생명력을 잡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잡아오라고 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 같은 정신을 체포할 생각을 합니다. 32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45-46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He is out of reach,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자입니다, ? 그는 이 세상의 누구와도 다르게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예수님처럼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하나님이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사야 55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목마름만 있으면 된다, 갈증이 유일하게 네게 필요한 것이다, 네가 정직하게 갈증만 인정하면 영적인 갈증을 해결해주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사야가 일종의 간증화법, quotation mark를 가지고 도입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간증화법 quotation mark 빼버리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렇게 말하니까,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랫사람도 무언가 통계적 자료가 있었나요? 이때까지 이 사람들도 많이 잡으러 다녔던 모양이지요. 말하는 모습을 잘 봤겠죠?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아랫사람들도 그냥 보통보다는 수준 높은 아랫사람입니다. 불트만 같은 신학자는 이걸 dissimilarity criteria, criteria of dissimilarity, 비유사성의 원칙, 성경중에서도 하도 많은 자유주의자 신학자들이 이건 예수의 말이 아니야, 예수가 한 행동이 아니야, 전부 다 후대 제자들이 날조한 거야, 이렇게 자유주의자들이 공격을 하니까, 예수와 당시랍비, 예수와 세례요한, 예수와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 예수와 헬레니즘 사회에 있는 개인주의학파들, 소피스트 같은 철학자들과 비교를 해봅니다. 비교해보는데 누구하고도 일치하지 않은 특징이 비유사성의 원칙, 이것은 진짜 예수가 한 말이 맞다, 진짜 이건 예수의 언동과 행동이 맞다, 도저히 undeniable 부인할 수 없는 예수의 진짜 언행 행동거지, 그걸 구분할 때 비유사성의 원칙이라고 말합니다. criteria of dissimilarity, 이게 바로 비유사성의 원칙입니다. 불트만은 일찍이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랍비처럼 말하지도 않고, 헬레니즘 철학자 소피스트처럼 말하지도 않고, 스토아 철학자처럼 말하지 않고, 예수는 거침없이 말하면서 종교권력자들과 맞서면서 혈혈단신입니다. 그를 잡고자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렇게 하나님과 자기를 일치시켜버리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5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말 중에서 이런 말들이 가장 힘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삼으시는 대표적인 예가 마가복음 2장에서 가버나움에 있는 한 청소년이 중풍에 걸려왔습니다. 가버나움에 있는 소자가 중풍에 걸려 예수님께 왔을 때 예수님은 이런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 5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서기관들이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서기관들이 자기가 하나님인가, 한 분 하나님, 모노 데오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를 사할 분이 없는데, 수군거리는 그 서기관들 앞에 하는 말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면 제가 죄를 사했다는 능력, 죄를 용서하는 능력이 진짜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하여 나는 말합니다, 당신의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이건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죄가 사했다는 그 명제를 입증하기 위하여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건 진짜 어렵습니다,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죄 사했다는 말이 어렵습니까? 죄를 사했으니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이 더 어렵습니까? 나는 더 어려운 걸 선택합니다, 하면서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니까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겸손한 분이고 쉽게 접근해서 사인 받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어쨌든 매우 astute, 매우 엄숙하면서도 속으로 아주 부드러운, 표현하기가 좀 힘든데, 이렇게 말 함부로 하는 분한테 우리가 예수님 팬처럼 달려가서 할 수 없는 겁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네 죄를 사함 받았으니 침상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 이렇게 추가적인 명제를 포함하여 두 가지 다 명시하는 게 어렵냐? 나는 어려운 것을 말한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나는 하나님과 동등됨이라, 이렇게 선언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과 똑같은 말이 이사야 55, 에스겔 47장 등이 말하는 것처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 생물학적으로 노쇠해가는 과정이 더 빨리 일어납니다. 점점 늙어가서 몸과 정신이 감성을 잃어가는 그 속도보다 하나님께 감미롭게 순종하는 순종의 activity, 순종의 능동성, 순종의 역동성이 더 커져갈 때 우리는 생수의 강을 마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늙어갈 때 생수의 강을 마시지 않으면 늙어가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는 세월이 갈수록 영생수를 마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 친교가 점점 강해져서 하나님과 일치가 되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오욕칠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영적연합에 이를 수 있는 그런 감수성이 커져간다는 말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현재진행형이에요. 현재분사진행형이에요. 그런데 나를 믿는 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무차별적 개방입니다. 목만 마르면 됩니다. 산상수훈 마태복음 5 6절입니다. 마카리오이 호이 페이돈 테스 카이 딥손 테스 텐 디카이오시넨 호티 아우토이 호르타스 손 타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여, 이때 목마르다는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다는 뜻입니다. 그냥 콜라 마시고 해결될 수 있는 목마름이 아닙니다. 의에 주린 목마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 목마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목이 말라서 갈증이 나서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신뢰를 포기하게 만드는 더럽고 추악한 세상 안에서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만한 마음을 갖게 도와주니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거예요. 신앙심이 좋은 사람 옆에 있는 것이 생수의 강을 만든 겁니다. 좋은 신앙 공동체에 속하는 것, 순종을 도와주고 하나님을 향하여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도와주는 것, 예수님 쪽으로 나아가는 것,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목적, 목적이 어딥니까? 예수님께로 감, 왜 목이 마릅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여 목이 말라 타는 목마름으로 갈증이 일어나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예수님께 가는 자, 제가 79년 때 이런 상태였습니다. 너무 목이 말랐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서 예수님께 갔더니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생수의 강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지금도 항상 진리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예수님께로 가면, 하나님의 통치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하여 이 세상이 무신론적 저항으로 디밀어진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예수님을 쳐다보면 하나님 통치가 여전히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은밀하게 하나님 통치가 겸손한 예수님의 영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되고, 생수의 강이 우리 몸속을 관통함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세 사무엘 예레미야 아무도 이렇게 말 못했습니다. 크리쉬나 공자 마호메트 간디, 누구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종교지도자들이나 고상한 철학자들과 다릅니다. 우리가 고상한 철학자나 종교창시자에게 가서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의 생수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불교도도 석가모니에게 가자마자 영생의 생수를 준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건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경험이고 배타적 경험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가 예수님이 생수의 강을 부어준다는 명제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지금 홍재철처럼 행동하면 되고, 총신 사당동 교단의 종교지도자처럼 행동하면 예수님께 가서 생수를 얻는다는 그 명제는 영원히 묻혀버립니다. 우리가 성경에 있는 말들을 부인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성경에 있는 모든 말들을 믿을 수 없는, 사기성 농후한 거짓말로 가득 찬 책으로 믿게 만들려면 홍재철처럼 행동하면 되고, 총신 장신, 오늘날 제도 권력 종교인들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고전적인 말뜻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 <나꼼수> <뉴스앤조이> 사회비평적인 것을 너무 많이 보면 모든 것이 다 그렇고 그렇다는 냉소주의가 싹트기 쉽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 가면 지금도 생수의 강이 콸콸 흘러넘친다는 영적인, 누구도 배타적 은혜의 경험들이 계속 있는 상태에서 저항해야 하고, 이런 것이 충만한 가운데서 이 세상과 맞서야만 세상의 냉소주의, 완악한 패배주의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엉망이지만 여전히 순수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들이 계속 생산되어야 합니다. 성령을 마셔서, 결국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성령을 마신 자에게 일어납니다. 개혁당한 자만이 개혁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생수의 강을 마셔서 하나님께 포획된 그 사람,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힌 그 사람이 교회를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킬 수 있고, 성령에 의하여 개혁되고 쇄신된 그 사람만이 한국교회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교회갱신모임은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교회갱신단체가 참여연대처럼 성명서 내서 한국교회가 알아듣지 않습니다. 교회개혁연대가 총신대 사당동 개열의 사람들 비리 몇 개 고발해서, MBC 비리수첩 식으로 고발해서 한국교회가 나아지는 게 아닙니다. 한국교회를 진짜 갱신하고 싶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서 생수의 강을 들이켜야 하고, 생수의 강을 들이킨 그 사람이 자신은 의식도 하지 못한 그 가운데 생수의 강 물줄기를 한국교회 한복판으로 관통하게 해서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성령의 강, 생수의 강을 마시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우리가 사막의 물길이 돼야 해요. 자살을 강물로 만드는 물줄기가 돼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어떻게 물줄기가 됩니까? 성령 충만을 맛본 소수의 무리가 물줄기가 됩니다. 성령의 매질은 인간입니다. 성령은 저기 남산에서 불어오지 않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불어갑니다. 성령이 활동하는 동선의 공간은 우주에 충만한 게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사람, 예수께 나아가는 사람, 목이 마른 사람, 디 카이오시네, 목마른 사람이 일정량 존재해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성령을 생수처럼 들이키기 때문에 충만한 만족감이 동심원적 파문을 일으키면서 흘러넘치게 됩니다. 종교개혁이란 말은 쓰지 않아도 개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생수의 성령의 강을 마신 사람, ascetic, 진짜 참된 표준이 애매모호해졌습니다. 첫째 개인적인 단위의 순종이 밀도 있게 일어나고 심회되고 지속적으로 됩니다. 강을 마시기 때문에 순종이 쉬워집니다. 생수의 성령의 하나님과의 감미로운 접촉이 내 삶의 가장 큰 중심이 돼버립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삶을 살게 되면 에너지가 모이게 되고 리더십을 행사하게 됩니다. 리더십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생수의 강을 물줄기를 파가는, digging 하는,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도록 수로를 만드는 사역에 우리가 쓰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자랑할 수 없고 개혁하겠다고 나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성령을 너무 모르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개혁하겠다는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예수께 나아가서,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말뜻을 해명해야 합니다.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이 무엇일까?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께 나아간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나간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정당한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회되고 권징과 치리가 있는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이상적인 교회 공동체에 나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사람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동아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불어오는, 성령의 역사가 있는, 성령의 에너지 장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생수의 강을 공급받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자기는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체포합니까? 나는 체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반쯤은 미혹된 것 같습니다.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아마 이건 니고데모를 생각하고 한 것 같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이 율법은 일련의 종교권력자들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읽던 구약성경 플러스 구약 구전율법입니다. 장로유전이라고 알려진 구약 구전율법입니다. 적혀있는 율법보다 훨씬 양이 많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율법을 알지 못한다는 말은 지키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때 율법은 안식일 법, 손을 씻고 밥을 먹는 정결예식법 등을 지키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요한복음 3장에서 밤에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신명기 19장에 나오죠. 재판 받을 때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듣고 나서야 판단하지 않느냐? 복수증인의 원칙, 복수증인의 증언을 청취하지도 않고 사람을 단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사람은 지극히 상식적인,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대인의 상식에 호소했습니다.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오늘의 핵심은 갈릴리가 무엇이냐? 예수가 갈릴리에서 태어났다는 것,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됐습니다. 6 41-42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것이 핵심입니다. 메시아는 하늘에서 와야 합니다. 지역적인, 지구적 편파적 지역에서 오면 안 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메시아는 하늘에서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은 다니엘서 7 13절이라고 했죠?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하늘에서 왔다는 말을 쓰고 있죠.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하늘에서 왔다는 말의 개념을 독특한 피파송의식, 내가 아버지께 파송을 받아 왔다는 독특한 피파송의식,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왔다는 말뜻이라고 했죠? 다니엘서 7 13절을 일종의 신화적 형이상학적 영역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한 초보적, 비유적 언어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서 7 13절 때문에 지역적 특색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보편적인 메시아가 온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 하늘에서 온다는 말뜻은 하나님께 파송 당했다는 독특한 피파송의식, 이사야 55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그 말씀같이 나는 파송되어 왔어, 이게 바로 6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누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입니까? 하나님 보좌에 철두철미하게 100%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어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을 신학적인 하나의 메타포로 이용한 거예요. 다니엘서 7 13절을 내가 은근히 빗대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라고 말하니까 너희 offended가 됐지? 마음 상했지? 그런데 내가 말하는 뜻은 그게 아냐, 너희가 그런 초보적인 질문을 가지고 내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까 너 고향이 갈릴리 아니냐는 질문을 하면 안 돼,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뜻은 6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100% 순종하는 의지, 열정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야. 하늘에서 파송 받았다고 해서 내가 특권을 취했느냐? 내가 어떤 사악한 이익을 취했느냐? 종교권력을 취했느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순간마다 나는 나의 순종을 다그쳤고 자기 비움을 다그쳤지 않느냐? 그런데도 이해하지 못하고, 6 38-39절이 다니엘서 7 13절을 이해할 때 너무 중요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이해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늘에서 왔다는 뜻은 이사야 55 11절처럼 하나님께 독특하게 순종하여 피송의식으로 가득 차서 100% 순종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갈릴리에서 태어났다는 게 문제가 되느냐? 예수님 말입니다. 메시아가 지역적 특색 없이 편파적인 선택 없이 하늘에서 사뿐히 내려온다는 관념을 가졌다면 오산이다, 메시아가 갈릴리에서 와야 한다는 말, 이사야 9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2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 네제르, 네제르가 싹입니다. 예수님이 새싹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예수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11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새싹에서 나온 예수님이 새싹동네 나사렛 출신이 돼서 나사렛 출신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이렇게 정당화했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가 문제가 되느냐? 왜 갈릴리를 이렇게 미워하느냐? 요한복음 1 46절을 기억하십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갈릴리가 어떤 곳인가? 요세푸스란 사람이 쓴 <유대전쟁사1>에 갈릴리를 이렇게 묘사해놨습니다. 갈릴리에서 로마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거든요. 갈릴리가 왜 항쟁의 중심지가 됐는가? 갈릴리에 남자 인구가 너무 많았다, ? 갈릴리 일대가 전부 다 농토였기 때문에 남자 인구가 많아서 투쟁성과 호전성이 원래 강했다, 둘째 작은 마을과 도시로 인구가 1 5천명이 될 정도로 갈릴리는 물산이 부했다, 갈릴리는 물산이 풍부했고 남자인구가 많았고 전부 다 농민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단결이 유지되고 있었다, 갈릴리의 예수님 동네 나사렛은 소작인의 동네였습니다, 나사렛은 그 너머에 있는 이스르엘 평야의 소작인들이 살던 동네인데, 예수님이 비유를 할 때 소작쟁의 비유가 많습니다. 이런 비유 알죠? 어떤 사람이 소작권을 징수하러 왔는데 아들을 때리고, 이런 비유가 나오죠? 바로 정확하게 헤롯 분봉왕 치하에 일어났던 나사렛 소작쟁의을 보신 흔적들이 거기에 사회비평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소작쟁의를 많이 보셨다, 갈릴리 지주들의 가렴주구를 많이 보셨다, 둘째 갈릴리에서 친로마적인 도시문명을 맛보았다, 예수님게서 목수로 일했을 법한 가장 강력한 도시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6km걸어가면 세포리스라는 도시입니다. 세포리스라는 도시는 지금도 공동무역상이 있고 전차경기장이 있습니다. 신로마, 요새 말로 하면 강남입니다. 강남스타일, 세포리스 스타일은 신로마 지주들이 살던 도시, 예수님이 거기서 희랍연극을 보셨어요. 예수님이 위선자라는 말을 쓰죠? 위선자들은 희랍연극을 본 이스라엘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말이에요. 희랍연극을 안 봤다면? 히포크라티크, 가면을 쓰고 일하는 사람들, 그건 연극배우를 가리키는 거예요. 연극배우들의 연극을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언어를 예수님이 쓴 것을 볼때, 세포리스에 큰 연극장이 지금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갈릴리 농민들의 가렴주구를 봤습니다. 바루스라는 총독이 있었거든요. AD 66년에 갈릴리에서 엄청난 민중폭동이 일어납니다.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해서, 빌라도부터 바루스라는 총독까지 총독 6명이 다 악한 총독입니다. 가장 먼저 착취한 곳이 갈릴리입니다. 메시아가 하늘에서 오지 않고 갈릴리에서 왔다는 뜻은 땅의 질서가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가장 먼 지역에서 왔다,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심각하게 소외되고 왜곡된 갈릴리 역사의 아우성을 띠고 이땅에 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왔다는 뜻, 이사야 9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미디안의 압제, 쇠막대기의 멍에를 벗겨주기 위해서 갈릴리에서 왔다는 말이에요.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최초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을 이사야 9 1절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태어나야 하는 이유는 역사의 원칙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적 토양의 아우성을 먹고 자란 거예요. 갈릴리의 소작쟁의를 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돼서 예수님이 된 거예요. 가문의 태생도 중요하지만 어디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지리산 바닥에서 농민들의 아우성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정의감이 원래 좀 있었습니다. 소시민적으로 살긴 살았지만, 갈릴리에서 온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그냥 중립적으로 미워하는 게 아니라 갈릴리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은 갈릴리 이놈들은 저항의 아우성, 요셉, 말 안 듣는 녀석들, 남성성 호전성이 넘실거리는 곳, 그곳에서 누가 선지자가 나오느냐? 학식 있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중에서 갈릴리에서 산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함으로써 지극히 엘리트적 권력종교가다운 말을 합니다. 권력종교가들은 우리나라 지금 목사님들도 목사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목사님 아들 계보가 하나 형성됐어요. 삼성 못지않게 목사 아들 목사 층이 형성돼서 일종의 우리 한국교회도 아비아달 계열과 사독계열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모스계열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아모스 계열, 우리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올라가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입니다. 실제로는 사독계열의 제사장들이 많고, 목사 자녀들의 카르텔이 굉장합니다. 옛날 종합시험을 쳤을 때 장신대에 농민의 아들들이 많이 들어왔어요. 지금은 면접을 보기 때문에 목사자녀가 현격하게 많습니다. 장신대 교수들은 목사 자녀가 필기하고, 동영상 찍어서 아버지 갖다줘서 총회보고가 들어가고 바로 심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섭죠? 갈릴리에서 메시아가 태어난 것은 사필귀정입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섭리다, 우리 하나님은 갈릴리적 아우성, 갈릴리적 토양에서 메시아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갈릴리 흙에서 나온 음식을 먹고 자라게 함으로써 사망의 음침한 그늘에 앉은 사람들을 위한 메시아가 되게 하셨어요. 그들부터 돕는 메시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앉아 있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부터 충족시키는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 갈릴리에서 왔어요. 종교권력자들은 왜 갈릴리를 싫어하나요? 종교권력자들은 칼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민중의 아편 장사입니다. 그들은 지금 권력을 가진 자들이 신의 질서다, 이걸 헤겔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현실적인 것은 신적인 것이다, 범헤겔리즘, 헤겔은 지금 권력을 가진 자에게 어떤 이름으로도 신의 뜻이 관철된다고 믿습니다. 이건 매우 위험한 사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 왜곡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순종하는 백성들이 권력을 맡길만한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어서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종교권력을 흔들고 세계 권력을 흔드는 것이 현실이지, 그것이 신의 뜻이 아닙니다. 종교권력자들은 자유를 잡으려고 영혼을 잡으려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순종의지 100% 화신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종교지도자들은 갈릴리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사상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구원사의 긴 역사에서 보면 갈릴리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공동체에서 메시아가 나오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초청하는 메시아이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마땅히 나와야 하죠? 우리 한국교회에서 보면 갈릴리적 토양에서 신앙을 배운 사람들이 결국 이 땅에서 쓰임 받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결국 사독계열과 아비아달 계열의 화려한 종교권력, 영락교회 사랑의 교회 등등등, 종교권력가들이 많은 곳에서 인물이 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저는 갈릴리적 아우성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 메시아적 독생성자급 순종을 바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날 갈릴리에서 메시아가 나오는 사상을 믿지 못하는 종교권력가들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강남에 가서 키워서 8학군에서 키워서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양지바른 곳에서 자녀를 키우려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이너스 마이너스 마이너스 8학군 같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아우성을 들으면서, 농민의 메마른 현장을 보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갈증을 기억하신 예수께서 인류의 메시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청년이 독생성자급 나사렛 예수의 청년들로 거듭나게 도와주소서. 이 세계가 얼마나 갈릴리적인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깨닫는 젊은이들이 한국교회에 감히 나서서 한국교회를 거룩한 생수의 강이 흐르는 수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고, 가향의 젊은 지체들이 한국교회 이 자산을 강물로 만드는데 쓰임 받는 수로가 되게 하여 주시고 통로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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