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2부 예배-요한복음 7:37-44
(나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인들 중에서 예수님이 구사하신 화법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자기 집중적이고 도발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인도 자기를 믿는 자가 생수의 강을 맛본다고 말한 자가 없습니다. 종교인, 어떤 각성된 천재도 자기를 명하여 이렇게 집중시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으로 너무 over inflated, 부풀려진 자의식 속에 사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진실로 예수님 안에서 이렇게까지 진실을 표현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그 안에 사셨는지의 차이가 가름이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그 행동거지로 볼 때 도발적이고 자기 집중적인 말을 통해서 이익을 하나도 얻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집중시키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만들어주고, 병든 자가 낫게 해주시고, 귀신을 축출해내는 능력을 발출했지, 자기에게 사람들을 집중시켜서 사특한 이익을 탐하지 않았습니다. 도를 넘는, 인간이 감히 할 수 없는 자기 집중적인 언어가 우리가 볼 때 거슬리긴 하지만, 배타적 진술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 내용을 볼 때 진실이 넘쳐서 나오는 주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집중시켜서 돈을 갈취했거나 권력을 누렸거나 부귀영화를 누렸거나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믿도록 사람들을 초청하여 생수의 강을 맛보도록 도우시기위해서 이렇게 처절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오늘본문은 초막절에 유대인식으로 말하면 추석입니다. 추석, 유대인식으로 말하면 민족해방의 절기를 일주일 동안 텐트 안에 살면서 이스라엘 광야 40년 기억을 단축해 경험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주택에서 나와서 예루살렘 근처 2km 근방에 텐트를 치고, 광야시대 때 텐트 생활하던 집단의식으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 텐트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을 광야에서 시시때때로 반석을 쳐서 또는 광야에 지하수 오아시스 샘 줄기를 찾아다 생수로 이스라엘 민족을 먹여주신 것을 영구적으로 기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생수를 콸콸 넘치게 공급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재현했습니다. 실로암 물가에 가서 물을 가득 떠다가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의식을 함으로써 생수를 가득 공급하시는 반석이신 하나님이 광야 생애 내내 그들을 따라 다니면서 계속 생수를 베풀어주신 것을 기념합니다. ‘명절 끝날’ 지금 생수를 떠다가 실로암 물가에서 생수를 들이키는 종교적 의식이 재현되는 그 순간에, 이런 뜻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예수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는 말은 두 번 나옵니다.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은 회중이 매우 많았다는 뜻입니다.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했더니 41절에서 벌써 사람들의 쟁론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인간적 기원, 갈릴리출신, 예수님의 육체노동자 가문의 태생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예수의 입에서 이런 도발적 언어들이 튀어나오니까 감당이 안 됐습니다. 참 감당이 안된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교육배경이 부실하고 소박한 가문에 태어난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은 종교전문가들을 젖혀놓고 자기를 향하여 이렇게 자기집중적인 언어를 구사한다면 누가 실족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태어나서 예수님의 이런 장면을 봤다면 우리도 이렇게 갈릴리 출신 예수가 어떻게 이렇게 도발적인 언어를 하는가? 하고 쟁론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가를 되새겨봅니다. 첫째 인생은 히브리노예들처럼 파라오 채찍 아래 살던 죄악된 노예생활에서 가나안 땅에 가서 스스로 노동하는, 스스로 자기책임 하에 살아가는 자유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긴 과도기 광야생활을 거쳐 갑니다. 광야생활은 자유인이 되는 도상의 연습장입니다.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 주체적 책임을 가지고 내가 선택한 길을 내 책임 하에 관할하여 훈련하는 연습입니다. 그런데 그 광야의 길은 물이 없습니다. 광야의 길은 목이 마릅니다. 목이 마르면 생수가 공급되지 못한 사람들은 조급하여 실수를 하게 되고, 죄를 짓게 되고 인간성이 황폐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회적 범죄는 생수를 공급받지 못한 인간의 자기파멸적 도피행위입니다. 우리가 을지로와 충무로와 세종로, 이렇게 죄악된 세상에 살면서 우리 인간성을 유지하고 살게 만들려면 끊임없이 우리 인간을 감화 감동시키는 생수가 필요합니다. 생수가 없이는 우리는 뱀파이어 모드로 살 수밖에 없고 살모사 모드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직장 생활한다? 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주부 생활 한다? 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아버지 노릇을 한다? 생수를 공급받지 못하고 자녀노릇을 한다? 제가 볼 때 불가능합니다. 우리 어머니가 지금 우리 집에 와 계시는데 불과 40일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 나는 밤도 길고 낮도 길다, 너무 슬픈 말입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순간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기 힘든 것이 웬만한 음식을 해도 맛있게 기대하는 눈초리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슴에 손을 얹고 감사만이 어머니의 살길이라고 가르쳐도 1분 지나면 다시 감사를 하지 않고 먹기 싫다, 안 먹으련다, 그러니까 제 아내는 지금 모든 종류의 죽을 다 실험해봅니다. 죽을 끓이면 드리면서 이것도 싫어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듭니다. 40일 동안 우리 어머니랑 사는 게 힘듭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자기가 그렇게 힘든 존재, 며느리의 살과 피를 마르게 하는 존재인 걸 모릅니다. 생수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며느리도, 이번에도 3천만 명이 갔지만 대부분 인질과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누가 친정에 가는 며느리를 누가 좋아합니까? 35세인 골드미스들이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는, 별로 관심도 없는 사돈의 팔촌 코멘트를 들어야 합니까? 그래서 35세 이상인 골드미스들은 워커힐 호텔과 신라호텔 패키지 상품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코멘트가 친척들 사이에 오고 갑니다. 사실 3천만 명이 기름을 쓰면서 너무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예수님의 영이 지배하는 추석이 아니라 공자의 죽은 영이 지배하는 추석입니다. 어리석은 추석입니다. 저는 이걸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이 시간 반대합니다. 왜 반대하느냐? 실제로 가족 간에 두터운 사랑을 나누기에 너무 지칩니다. 부모님 생신 때 형님생일 때 가서 두터운 가족 사랑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추석 때는 예수님의 영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 우리 이웃사촌끼리 축제를 해야 합니다. 저는 미국교회에서 목회할 때부터 그걸 가르쳤습니다. 만일 1천만 원씩만 예산을 낸다면 그 동 일대를 축제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추석 며칠간은, 우리는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추석이 올 때까지 이 연사 외쳐려고 합니다. 저는 공자 중심의 추석을 강력히 거부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웃 사촌, 뿌리가 뽑혀서 도시에 와서 이렇게 살인적인 노동시간에 인생을 저당잡힌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따뜻이 도와야 합니다. 이웃 사랑을 돌봐야만 범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웃이 따뜻한 사랑으로 서로를 지켜줘야만 범죄로부터 이웃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고 가는 범죄의 현장에서 나는 책임 없다는 식으로 보면 범죄가 그 사이에 끼어듭니다. 여러분 생수가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이 없으면 우리인생은 사는 순간 인간성이 마모되고 피폐화됩니다. 그래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성, 고귀한 양심과 이성과 동정심이 조금씩 감가상각을 경험하면서 점점 돌처럼 굳어져서 점점 동정심도 없어져버리는 그런 모드로 사람이 바뀌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없으면 광야 같은 인생살이가 불가능한 것을 아시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다시 말해서 인간성이 감가상각 당하여 짐승처럼 바뀌어져 가는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거는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말이 너무 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점점 어른이 될수록 느끼는 것은 나이 60이 될 때까지 좋은 표정을 유지하고 온화한 음성과 자애로운 품성을 유지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학교에서 총장선거가 있는데 61살 먹은 어떤 교수가 출마합니다. 이 사람은 품성이 특히 아름답지 않습니다. 약간 조폭 같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인데, 떡하니 저한테 문자가 왔습니다. 연락 바랍니다, 연락 전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연락하지 않았더니, 교수님 제가 평소에 잘못한 것 많죠? 너그럽게 저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꾸뻑, 절하는 표시 여섯 개를 보냈습니다. 절하는 표시가 4개만 되도 답장을 하고 싶지 않은데 너무 간절하게 절하는 표시를 보내서, 하나님께서 선히 인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답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60대 교수들 보면, 60대 중소기업 사장, 60대 대기업 사원들, 인간성이 모두 다 황폐해졌어요. 광야 같은 세상을 살다가 그렇게 돼 버린 겁니다. 어머니께 시달리는 고3자녀, 서로 가족관계가 상처를 줍니다. 공부 못한다고 닦달하는 부모님이 자녀에게는 인생의 광야입니다. 공부 못하는 것도 헌법이 보장한 행복추구권입니다. 사람이 조금 느릴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모든 것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학과는 전도사로 대개 취업을 하기 때문에 취업률이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전도사들은 사대보험을 해주지 않습니다. 왜? 사대보험을 들려면 납세신고를 해야 합니다. 납세신고를 하면 전도사님들이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받고 일하는 게 만천하에 폭로됩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들이 한 달에 1천만 원 이상 받는 것이 만천하에 폭로되는 게 싫어서 신학교 나온 사람과 기독교학과 나온 사람이 아무도 취업자플로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기독교학과는 취업률이 21%가 돼 있습니다. 이번에 숭실대 40여 학과 중에 꼴찌였습니다. 사회적으로 착한 선교사는 취업률에 반영 안 됩니다. 마음씨 착한 자원봉사자 취업 아닙니다. 주부도 취업률에 안 속합니다. 결혼도 사실 취업과 같은 건데, 그럼 무엇이 취업이냐? 4대 보험이 되는, taxable citizen이 되는 것이 취업입니다.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것, 순교자를 배출 하는 것, 남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마더 테레사처럼 사는 것은 취업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돈을 버는 일, 화폐로 환산되는 수입을 갖는 것만 취업이기 때문에, 기독교학과는 전혀 그런 걸 무시하고 가르치고 마더 테레사처럼 살라고 강조하고, 돈 없이 일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기독교학과적 가르침을 가지면 아무도 근본적으로 취업을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육과학기술부는 돈을 버는 취업만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 대학에 지원합니다.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 본회퍼 같은 사람, 순교자를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회퍼처럼 되라고 하고 마더 테레사처럼 되고 한비야처럼 되라고 하는데, 취업률이 안 되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하는 것은 taxable citizen, 세금 내는 일을 갖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살면서 이렇게 인간성을 훼손시켜서 유지하는 직장, 인간성을 야수처럼 짐승처럼 만들어가면서 유지하는 고연봉 직장들, 이런 것이 이 세상에 있단 말입니다. 젊은 변호사들이 큰 변호사 로펌에 가면 최소 두 달 지나면 월급 2200만 원 정도 한답니다. 보통 시민단체 간사가 1년 받는 연봉이 2천만 원이 안 됩니다. 김&장 같은 데 가면 월급이 2200만 원 정도 됩니다. 이 돈 가지고 젊은 변호사들이 죄악된 곳에 출입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30,40년 정도 살아버립니다.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책에 보면 자기가 영수증처리 없이 쓴 돈이 3억이었고,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자기는 거의 폐인이 되어버렸다, 삼성 법무팀장으로써 돈을 너무 많이 쓰고, 거의 모든 사람을 돈으로 매수해서 뇌물로 양심을 파괴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고액연봉 직장들, 낮 시간의 대부분을 포로로 잡혀 사는 생활은 인간성의 파괴이지, 직장생활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직장생활은 낮 시간의 일부를 가족과 보내는 직장입니다. 낮 시간의 행복한 우정을 나누고 친구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직장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직장이 없기 때문에 목이 마릅니다. 타들어 갑니다. 우리 하나님이 삶의 이유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인간성을 고양시키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형상을 발휘할 수 있는 직장이 아니면 그것은 죽는 겁니다. 생기가 아니라 살기를 띄는 죽음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인간처럼 살려다가 타는 목마름으로 죽어가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여 쉬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복잡한 논리가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가? 생수의 강이라는 말은 비유입니다. 39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맞습니다. 키워드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을 선물로 받는데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생수를 매 순간 공급받으면서, 인간성을 훼손해가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게 무엇인가? 예수님이 착하다는 걸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이 박히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 받아 죽었음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을 하나님이 부활로 응답하셔서 예수님을 우리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걸 믿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첫째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을 믿는 것,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삼일 만에 부활시켜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을 믿는 것,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런 겁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심사숙고 끝에 일탈된 내 인생이 예수님의 핏빛십자가의 고난으로 용서받았음을 믿는 겁니다. 내 죄, 나의 모든 일탈과 허물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는 순간에 해결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해결되었다고 믿는 그 순간에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하나님 편에서 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 편에서 승인코드를 주시고, 일종의 자기장처럼 전기시그널을 주십니다. 네 믿음이 나에게 승인되었기 때문에 네가 믿었다는 것을 네 자신의 신념만으로 보존하지 않고 내 편에서 네 믿음을 인정하는 사인을 보내겠다, 그게 바로 성령을 선물로 보내는 것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전기자기장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몸에 생화학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영적 물리적 현상입니다. 영적 물리적 현상이 성령이 오실 때의 동반현상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우리 동공이 확대되면서 심장박동수가 흥분이 일어나고, 우리 온 몸에 호르몬분비부터 시작해서 얼굴 혈색까지 전부 다 물리적 생화학적 화학적 요소가 성령 오실 때마다 진동하고 변동되기 때문에 성령은 생화학적 변동을 일으키는 물리적 영적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바람과 같고 물과 같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액체와 같고 기체와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자마자 내 죄가 용서받았음을 굳게 확신시켜주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확신을 갖고 새로운 시민권을 가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영혼이 고양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을 우리는 성령으로 인을 쳤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치는 사건, 소유권 이전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영적 물리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게 물리적 생화학적 반응을 일으켜서 우리 존재가 공중에 떠다니는 것 같은 부양된 의식으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 세상과의 분리의 아쉬움을 우리에게 뼈저리게 느끼게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이전됐고, 하나님 아버지께 강력하게 소속됐고, 정부도 국가도 유엔도 유엔사무처장도 미국 대통령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견고한 결속감을 아무도 해칠 수 없다는 고귀한 배타적 소속감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것 보세요.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에 대한민국 국가의 헌법도 막지 못하는 강력한 결속감이 생깁니다. 이것이 성령의 선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가 됐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은 생화학적 반응을 동반하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것은 일종의 물질적 변화를 동반합니다. 성령 충만은 미혼처녀에게는 남자 애인이 생긴 것처럼 보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연애하는 사람과 가장 분위기가 비슷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것은 하나님과 감미로운 결속감 속에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세력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성령의 인치는 계약적 결속감을 해치거나 손상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물입니다. 선물은 선물인데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아버지께 성령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이 성령의 선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 목이 말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뛰어가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능동적 분투를 필요로 하는 선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제가 이 인간성으로, 우리 아버지가 주는 DNA로, 대한민국의 국가 공교육이 주는 윤리의식으로는 도저히 제가 직장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제 인간성이 파괴되거나 저는 직장에서 해고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성령 충만하여 이 죄와 도적과 편법이 난무하는 직장에서 해고되지 않고 승리할 뿐만 아니라 직장문화를 바꿀 수 있는 거룩한 능력이 저를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세상과의 창조적 분리감, 이격감, 세상과 거룩한 구별은 되지만 세상 안에 계속 살면서도 인간성을 보존할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선물을 받지 않으면 우리가 도피주의가 되거나 세속주의가 됩니다. 성령 충만 받지 못하면 세속의 원리에 찰싹 달라붙어 세속과 이 세상 사이의 긴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세속영합주의가 되거나 아니면 세상을 다 부정하면서 세상은 별거 아니라고 하는 도피주의가 되면서 반사회적인 사이코패스가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가 죽음이 넘실거리고 잔혹함이 넘실거리고 짐승성이 넘실거리는 세상 한복판에 살면서도 내가 여전히 하나님 자녀다운 고귀한 품성을 유지하면서 능력 있게 세상살이를 할 수 있고, 오히려 세상에서 수세적으로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의 기초를 허물면서 demolition 하면서, 바꿔가면서 세상을 고쳐가면서 살 수 있는 거룩한 공격성, 거룩한 공세성이 드러납니다. 이게 바로 생수의 강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속영합주의적인 삶, 세상과 내 사이가 한편이 되어버려서 더 이상 내가 긴장감이 없는 것, 이것도 아닙니다. 구별하는 겁니다. 우리 딸이 처음 한국 왔을 때 중학교에서 가장 적응하지 못했던 게 엄청난 욕설이었습니다. 엄청난 욕설과 연예인에 대한 열광적 집착들, 이게 우리 딸이 한국 공교육에서 겪었던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욕을 너무 일삼기 때문에, 욕설이 너무 심해서 우리 딸이 귀를 덮고 욕설 앞에서 충격을 받고 심신이 상했는데, 이 아이가 단기간에 욕설의 파괴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하느냐? 자기도 욕설을 하니까 더 이상 세상이 괴롭히지 않아요. 이제 너는 한편이라고 해줘요. 자기도 욕설을 하니까 자기도 위압적인 행동을 하면서, 새끼 죽일란다, 이렇게 하니까 드디어 아이들이 너는 내 편이라고 했답니다. 우리 딸이 동화가 되어버리 겁니다. 너무 악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우리를 자기랑 닮게 만듭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영악하게 닳아진 폐타이어처럼 살거나 아니면 반대로 세상을 전부 다 대적하면서 세상의 것을 저주하면서 망하도록 기도하면서, 묵시록적인 기도만 하고, 빨리 망하게 해주시고, 리히터 9지진이 빨리 일어나게 해 주시고, 이렇게 세상 저주적인 도피주의자,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 선물로 주시면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광야의 황폐한 인간성 야수성으로부터 공격받지 않고 영향 받지 않고 동화되지 않고, 인간의 거룩한 존엄성을 향유하면서 세상을 바꿔가면서 짐승 같은 세상의 시간 안에 포착된 사람들을 잡아가면서,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가면서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겁니다. 이런 충만한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공세적이고 변혁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지금 제 나이 또래가 되니까 친구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본 변화는 한때 총명했던 친구들의 총명이 다 사라져버린 겁니다. 제가 지금 우리 동기들을 보면 예비고사만점 받고 경남수석하고 공부로 날고 길던 아이들입니다. 분명 뭔가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많은 아이들이 지금 보면 너무 영락해버렸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지배하지 않는 아이들은 다 인생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명이 제일 저랑 절친했던 친구가 국회에서 근무하는 친구인데, 친구야 추석 잘 쇠라, 이래서 가보면 목이 마른 게 분명합니다. 목은 마른데 달마대사 그림을 계속 믿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글자가 바뀌었더라고요. 얼마 전에 가보니까, 그런데 꼭 식사하자고 만나면 영적인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데 선뜻 예수 믿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나 무슨 절에 갔다 왔는데 빨간 글자, 스님이 지어준 이상한 호를 하나 받아왔다고 해요. 자기랑 전혀 안 어울리는 호를 받아와서 액자에 넣어놨어요. 저게 뭐냐고 했더니 이 액자를 14개월 연속으로 이 방에 붙여 놓으라고 했답니다. 그걸 믿고 있어요. 서울대 경제학과 나온 이 아이가, 그래도 그 아이는 덜 타락했습니다. 공무원이기 때문에, 나머지 아이들은 너무 타락했습니다. 만나면 술집에 간 간증밖에는 없습니다. 서초동 술집의 분위기, 만나면 자기들끼리 거론하는 것 보면 전부 다 술집 간증입니다. 여러분, 대한민국 세상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을 충만하게 공급받지 못한 사람들은 짐승이 돼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실제로 짐승모드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여기서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이 마른 것을 인정하면 됩니다. 인정하고 우리의 모든 길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께만 집중하면 됩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됩니다. 예수님께로 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득 찬 이야기, 성경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성경을 향하여 고도로 집중하여 묵상하고 읽으면 반드시 목마른 채로 성경을 향하여 성경 본문으로 집중하면, 목마름을 let him, let her come and drink, ‘내게로 와서 마시라’ 성경 안에 성수가 너무 많아서, 너무 성경구절이 많습니다. 그게 전부 다 예수님이 주는 생수입니다. 6만 7천 구절의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한 구절밖에 없습니다. 6만 7천 일 동안 매일 살 수 있는 구절이 성경 안에 있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김회권 교수 책 읽었다, 이런 말 하면 안 됩니다. 목마른 사람은 어려운 책도 읽어야 하고 쉬운 책도 읽어야 하고, 목마른 사람은 아무데도 펼쳐 읽으면 전부 다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수님께로 간다는 말은 예수님을 가리킨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가서 말씀에 집중한다, 제가 볼 때 한 5-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말씀을 읽으면 목마른 사람으로 공인을 해주십니다. 목마른 사람 맞아, 그럼 문이 열려요. 그런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읽고 한 열흘 동안 야동보고 이렇게 하면, 너는 목마른 사람이다 라는 진정한 인증이 절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볼 때 목마른 사람인가?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계속 읽으면 목마른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저는 대학 때 가동 기숙사에서 살면서 신림동에서 142번 버스를 타고 신촌 대현동 앞을 그렇게 많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제 아내도 정릉에서 신림동까지 그 먼 거리를 그렇게 많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아니면 못합니다. 제 아내는 대학원도 때려치우고 바로 성경만 읽었습니다. 저는 그 먼 거리를 일주일에 세 번씩 다니면서 깨알 같은 글씨를 쓰면서 하나님 말씀이 아니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절망감에 말씀을 읽고 6-7개월 동안 그렇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5월부터 시작해서 11월까지 계속 갔더니 하나님이 저에게 목마른 사람으로 공인을 해주시자마자 문을 열어주시는데 성령의 선물이 생수의 강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새사람 됐습니다. 어마어마했습니다. 79년 11월 진짜 어마어마했습니다. 제가 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면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한 말씀이 살아 역사하면서 운동을 하면서 저를 거대한 영적 에너지자원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제가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된 이유는 하나님 말씀의 영향권 내, 주님의 성령의 영토 내에 머물기 때문에 지금도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예수님께 말씀 안에 가는 것, 두 번째로 예수님을 닮은 교회 공동체로 가는 것, 그것 또한 목마른 사람에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행위를 모방하는 것, 예수님처럼 누적된 순종으로 일상생활을 사는 것도 예수님께 가는 겁니다. 기도와 찬양과 일상적 경건훈련에 참여하는 것도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온 것으로 봐주십니다. 만일 예수님이란 역사적 기독교가 없고 역사적 교회도 없고 선교사도 없다, 자기 동네에서는 상수리나무 밖에 없다, 그러면 상수리나무 앞에 가는 것도 하나님은 자기에게 오는 것이란 인정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세겜 땅에 가서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처소가 없을 때에 가나안 사람들이 믿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의 예배당,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 가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아메리카 원주민 중에서는 느티나무 밑에서 하나님 만난 사람이 많습니다. 기독교가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 중에서는, 이맘, 이슬람 이맘들, 이슬람 목사님들 중에서 3일 연속 예수님이 나타나서 개종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말은 누구든지 진심으로 목이 마르면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동역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전심으로 목이 말라야 합니다. 결론짓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선물로 주는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과 충만함 없이 이 세상을 인간성 유지하며 살 수 없음을 아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성령 충만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가 돼서 그 문을 두드릴 때 그 문을 열리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사는 삶이 한마디로 목마름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든가? 내가 목이 말랐음을 인정하시고 예수님께 나가서 drink 들이키시기 원합니다. 이사야 12장 2-3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매일 구원의 우물물을 길러내셔서 매일 인간성 유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생자 같은 성자다움을 유지하면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세속주의자도 되지 마시고 도피주의자도 되지 마시고,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을 거룩하게 해체해가면서 전복해가면서 거룩하고 충만한 경험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선물입니다. 인생은 성령을 받고 감미롭게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소풍이고 원족이고 순례입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이 삶이 40,50년만 계속되면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가서 의의 회중에 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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