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독생자의 고난_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하나-요한복음 7:25-36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2부 예배-요한복음 7:25-36

(독생자의 고난_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하나)

 

제가 요한복음 강의를 처음 시작했을 때 독생자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독생자는 그리스 헬라어로 모노 게네스 히오스, 모노 게네스가 한 단어입니다. 모노는 unique 란 뜻입니다. 모노는 하나, 모놀로그하면 대화잖아요. 단독으로 하는 대화, 독백, 모노게네스 히오스 이기 때문에 독생,자 라고 읽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이라는 말은 자를 꾸미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외아들이라고 하면 안 되고, 독생, 독특한 의미로 아들이 되신 분,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독생자라고 한 뜻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어겨본 적 없는 천인무봉한 신뢰와 연합 속에 있는 아들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이 얼마나 독특한 가를 알려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을 쓰는 용례를 보면 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집단명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욥기 1, 창세기 6 1-3절 등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군천사 중에서 하나님에게 특별히 속한 천사를 말합니다. 모든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집단명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킬 때 하나님의 맏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에게 아들이었습니다. 개인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용례가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 말씀의 기법과 분위기가 너무 도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직접 파송했다고 했고 자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났다고 했고, 심지어 6 41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니까 요한복음 6 4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독생자라는 말뜻을 자세히 설명해놓은 것이 요한복음 3-7, 14-17장까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많이 읽으면 삼위일체론자가 됩니다. 또 성령 충만에 이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태복음을 많이 읽으면 율법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태복음은 행위와 율법을 강조하기 때문에 마태복음을 많이 읽은 장로님은 서무주임처럼 얼굴이 약간 굳어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많이 읽은 분들은 삼위일체론적인 영적인 소통의 세계, 영적감흥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많이 읽은 장로님 옆에 있는 게 낫습니다. 요한복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연합과 완전한 신뢰와 파송과 피파송 양도와 위임 관계를 통해서 구원역사를 일구어갑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독생자라고 하는데 이건 다른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표현입니다. 모노게네스 히오스라는 말은 절대로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많이 연구하면 삼위일체신학이 발달하고 성령론이 발달합니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시가 주후 2세기 3세기 때 성령론의 총 본산지였고, 삼위일체신학의 총본산지였습니다. 그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가 오리겐이라는 사람과 클레멘토 입니다. 이 두 사람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의 신학이고, 그런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있습니다. 성령론이 발달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사람들이죠. 동방교회가 알렉산드리아 전통을 이어 받아서 요한복음의 중심교회입니다. 마태복음과 로마서 중심의 교회가 서방로마교회입니다. Orthodox church, 시리아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그리스정교회 전부 다 요한복음적인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적인 교회 특징은 삼위일체론적입니다. 독생자 예수님은 독생자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3-7, 14-17장까지 자세히 말했는데, 네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 품속에서 태어나신 분으로써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와 의가 상한 적이 없는 완벽한 연합과 순종 속에 있는 아들입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위하여 복종하는 순종의 화신을 가리킵니다. 저 사람이 독생자다, 그러면 순종의 화신을 가리킵니다. 우리 자녀 중에는 독생자가 없습니다. 제가 우리 아버지에게 독생자가 아니었고, 독생자에 준하기는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저를 매우 기대를 많이 했고 거의 독생자급 아들이 맞았습니다만, 그러나 독생자가 아닙니다. 또 제 아들 소원이가 독생자가 아닙니다. 독생자가 되기에는 우린 너무 다릅니다. 양진일 목사님이 어머니에 대하여 독생자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하늘이가 양진일 목사에게 약간 독생자 같죠? 하루 종일 성경만 읽으니까, 독생자는 아버지의 뜻을 감미롭게 자발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무한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셋째 독생자는 피파송의식, 내가 파송 받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 파송되어 세상의 죄를 자기가 짊어지겠다는 책임감의 화신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서 독생자급 책임의식을 가져라고 말하죠? 그 말은 대한민국의 모든 문제를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생자는 죽음을 겪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아들입니다. 아버지께 돌아가 성령을 보내주신 아들이 독생자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뜻이 요한복음 3-7, 14-17장까지인데, 요한복음 17장까지 가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진도가 안 나갑니다. 그런 독생자란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이 나오셨는데, 예수님 말씀은 항상 너무 도발적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기탄이 없으십니다. 한 번 보십시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누가 더 정상적입니까?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정상적입니까?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수군거리는 사람이 정상적입니까? 수군거리는 사람이 정상이고, 갈릴리 농민인 그분께서 나는 산 떡이라, 나를 먹으라고 하니까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공격하십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공격했지, 바리새인이 선제공격을 한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을 선제공격하시고 도발하시고 그들의 기초를 해체시켰습니다. 바리새인과 종교권력자들은 예수님의 공격을 받고 당한 나머지 실수를 한 겁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정조준해서 예루살렘 종교의 기초를 허물어뜨렸습니다. 대표적으로 한 말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나의 피를 먹지 않은 사람 나의 살을 먹지 않은 사람은 재미없다,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제일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말,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이런 말들은 종교당국자들 즉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지상대리자라고 자기의 역할을 자임했던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도 그 대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오늘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신 후에 한참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왜 예루살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합니까? 당국자들이 왜 죽이려고 합니까? 당국자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였습니다. 예수가 주장하는 것은 율법적인 누적적 순종, 세세한 순종과 율법준수들 필요 없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종교당국자들의 말은 쓸데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니까 죽이려고 했습니다. 종교는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중세 때 후스라든지 위클리프, 이런 사람들을 전부 다 화형을 시켰는데, 왜 종교문제가 죽고 사는 문제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종교는 결코 논리와 이론의 싸움이 아닙니다. 종교는 거대한 권력과 경제력과 지상의 모든 것들이 종교를 중심으로 다 모입니다. 종교는 단순히 천국에 관한 형이상학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종교, 성전종교는 성전에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줍니다. 유월절에 양 100만 마리가 도살당했습니다. 100만 마리를 유월절에 예루살렘 제사장 목장에서 독점공급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도살되는 양들은 전부 다 예루살렘 대제사장들의 하수인들이 기르는 목장에서 온 겁니다. 매우 비싼 폭리를 받고, 원래 양 한 마리에 100달러인데 유월절에 1천 달러입니다. 네 사람이 그 양을 도살하는데, 원래 25불짜리 양이 유월절에 250불짜리로 부담하는 겁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종교는 경제와 권력과 호화로운 삶을 보장해주는 종교이기 때문에 죽여야만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종교적 문제로 사람을 죽이는 걸 동의할 수 없지만 이해는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나 한국조계종이나 한국 가톨릭이나 한국 장로교가 공격을 하면 우리가 죽을 수 있는 이유가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영락교회 앞에 가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시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전부 가짜입니다, 지금 여기 보니 구원 받은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헌금을 낼수록 손해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꼬박꼬박 오는 것은 바보 멍청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은총만 너무 강조하고 교회 다니는 것을 같잖게 여기는 발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경범죄 이상, 복수심과 증오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종교는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당국자들도 이 사람을 잡지 않는 것을 보니 그리스도라고 영접했는가? 반쯤은 믿어버렸는가?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니다, 그리스도가 될 리가 없다, ?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그리스도는 초월적 신적기원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이 사람이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걸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삼단논법을 가지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부터 신적 초월적 기원을 가지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출생을 통해서 왔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중력법칙을 무시하면서 내려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출생을 통해서 왔고 갈릴리 토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걸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메시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바로 이겁니다. 고대사회에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나면, 너 어제까지 분명히 빨래하던 사람 아니야? 나무 목동 아니야? 막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시돈땅에 가서,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나사렛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나사렛 사람에게 배척받은 이유는 엘리야가 마치 이방 땅 과부에게 가서 인정받은 것과 똑같다고 말함으로써 나사렛 사람들을 격분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답답했습니다.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28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에 크락센입니다. 자동차에서 크락숀이라고 하죠? 크락숀이라는 말이 cry out 이라는 뜻입니다. 외치다, Jesus cry out, 엄청나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 너무 답답했기 때문에,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뜻은 구름 타고 왔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을 100% 순종하기 위해서 나를 일생동안 비우고 산다는 뜻이다, 그게 바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이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뜻을 기하학적 공간이동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내 온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다, 이사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사야 55 10-11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나간 자지만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분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말은 완벽한 순종의 화신, 완벽하게 순종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약의 언어들을 형이상학적 언어, 신화적 언어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을 100% 수행하는 이사야 55 10-11절에 나오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이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뜻이다, 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그걸 외쳐서 말했습니다. 외쳤습니다.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여러분도 일생 동안 외치는 기회가 몇 번 있겠죠? 지난 한 주 동안 외쳐서 말해야 할 만큼 답답한 적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답답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참 힘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안다, 모른다, 굉장한 겁니다. 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내가 하늘에서부터 왔다는 말뜻은 이것이다, 나를 보내셔서 완벽하게 순종하게 하시는 그 일이 바로 내가 하나님께로 났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말은 요한복음 3 7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이건 니고데모에게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거듭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다는 뜻은 거듭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Anothen,입니다. 이건 위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게네세스 다이 아노센, 위로부터 거듭난다는 말은 하늘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겁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우리가 감화감동 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새 능력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 자녀가 됐습니다. 로마서 8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을 증거 하는데, 8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하늘로부터 태어났느냐? 제가 1979 11월 모날 모처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내가 성령을 받자 경주김씨 김알지 64대손에서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버지께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너무 깜짝 놀랐습니다. 그럼 너는 경구 김가가 아니라는 말이냐? 호적파라, 아버지와 그런 가시 돋친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호적을 팔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께서 제게 기대한 삶이 제게서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제 인생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도 되실 수 있습니다, 이놈 봐라, 좋다, 네가 정신력이 약해져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은 인정한다,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면서 정신력이 약해질 때는 종교도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심각하게 빠지지 마라 임마, 특별히 목사는 되지 마라, 저희 아버지가 그때 그 말씀을 하시던 때가 저보다 더 젊은 날입니다. 제 아버지가 50대 때 그런 말을 해주신 겁니다. 제가 지금 우리 아들을 키우면서 우리 아버지 마음을 뜻밖에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아들딸 하나님의 은혜를 붙여, ‘자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너무나 홍대에 자주 출몰합니다. 홍대 인디밴드를 너무 좋아합니다. 왜 무슨 미친놈처럼 소리 지르는 걸 그렇게 좋아합니까? 저는 인디밴드가 싫습니다. 벌써 아버지와 아들이 다르잖아요. 그리고 저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데 우리 아들은 새벽에 늦잠을 잡니다. 일생 동안 모범을 보였는데 우리 아들은 저를 따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인생이 얼마나 고단한가를 설명하면 인터넷에서 찾아옵니다. 새벽에 늦게 일어난 사람 중에 잘 된 사람을 다 찾아옵니다. 주로 전희예술가 소설가 작가들입니다. 네가 그 진영으로 빠지겠단 말이냐? 점점 사랑스럽지만 낯설어집니다. 우리 아들과 아버지 사이, 내가 아버지 하나님께 났다는 말 자체가 아버지 뜻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그 뜻에 일생을 결박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독생자라는 말을 할 때마다 매여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순간 특권에 대한 호소를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센 분이니까 너 알아서 기어,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가 센 분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가 이런 성스러운 사명감을 주셨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독생자에요.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는 순간 하늘로부터 난 자가 되는 것이고, 하늘로부터 난 자가 된 그 순간 우리는 하늘에서 온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김알지 64대손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 자녀가 됐습니다. 하늘로부터 난 그날입니다. 제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남 정씨에서 큰딸, 아주 음울한 비관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큰 제 아내가 거듭난 후에 하늘로부터 거듭나서 명랑 쾌활한 소녀가 됐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결혼도 했고, 수녀원에 가겠다던 사람이 아이도 두 명 낳고 거듭났습니다. 하늘로부터 난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하늘로부터 난 자가 된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늘에서 온 자가 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예수님은 마가복음 1 11절에서 요단강에서 올라올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라는 말을 들었고, 그게 바로 하늘에서 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생물학적 출생은 BC 4, 예수님이 실제로 하늘로부터 거듭난 것은 마가복음 1장에 의하면 30세 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거듭나서 아들이 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할 때는 요단강에서 세례 받은 그 장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기가 출생한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도 여러분 일생 동안 무얼 해야 할지를 결정적으로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그 순간이 올 때 그게 바로 태어나는 겁니다. 제 개인적인 경우에는 하나님 말씀을 행하는 것이 가장 보람 있다는 것을 요한1 2 16-17절에서 깨닫게 되었으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길을 따르는 길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기가 막힌 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길을 따라 아버지께서 내가 하라고 하신 일이 지성인 복음화역사였습니다. 지성인 복음화역사, 젊은 대학생들을 예수님 제자 만들라는 그 일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지체 없이 졸업하자마자 대학생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자그마한 단체에 간사가 됐습니다. 그 당시는 그게 몇 년에 끝나는지 기약도 없는 알 수도 없는 임기도 없는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12년이 지났습니다. 12년 동안 저는 그 일에 몰두했고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22-36세까지 그 일을 집요하게 했는데, 12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하나님 주신 일에 몰두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만일에 이강학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목사님 제가 간사를 할 테니 좋은 말 할 때 가 주십시오, 라고 말을 안 했으면 지금까지 하는 겁니다. 지금 저랑 같이 시작했던 분이 전주에 임성근 목사님이 계십니다. 지금 78학번인데 지금도 간사생활을 합니다. 나가라고 해준 사람이 없어서 계속하는 겁니다. 저는 서울공대 84학번 한 형제가, 목사님 설교 1200번 들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길로 가겠습니다, 하면서 저보고 유학가라고 밀어냈습니다. 그 분도 12년 하다 보니까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어쨌든 그 분도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만,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사명을 가지고 파송하는 것이 하늘로부터 거듭나는 것이고,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급 순종으로 따라가는 겁니다. 저는 그렇게 인생을 살고 나니까 아무런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지금도 두렵지 않고 돈을 얼마나 모을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 전화번호만 몇 개 알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돈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고 있으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금 돈 많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내가 모른다 하더라도 문제없습니다. 한 번도 내가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지 않았고 내 진실이 모자라서, 내 처절한 진실과 사랑이 모자라서 일을 못한 적이 있지만 돈이 모자라서 일을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반드시 돈 많은 사람이 옆에 오게 돼 있습니다. 뜻은 고결한데 돈이 없다? 그럼 반드시 동서남북으로부터 돈 많은 사람이 오게 돼 있습니다. 그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뜻이 고결해야 합니다. 나는 뜻이 고결하지 못한 게 문제였지, 내가 처절하게 진실하지 못한 게 문제였지, 돈이 없어서 한 번도 문제 된 적이 없습니다. 은행에 돈이 얼마나 많아요? 다 돈입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가 처절한 진실, 사람을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진실이 없는 게 항상 나에게 문제였습니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돈 때문에 일을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에 갈 수도 있고 타일랜드에 갈 수 있고, 세계선교도 할 수 있고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습니다. 다만 독생자급 순종, 지고지순한 순종, 하나님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인생을 하나님 아버지께 결박시키는 고결한 순종, 자발적인 복종, 이것이 우리한테 없는 겁니다. 이게 모자랍니다. 저한테 모자란 것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독생자급 순종을 하고 수십 년 인생을 살았는데도 미완성감 미완료감 미성취감 밖에 없습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의 일을 시원하게 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이 마르고 하나님께 죄송하면서도 외롭고 아직 내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히 순종하고 더 절실히 순종하고 독생자의 진실을 가지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진력해야겠다는 결심을 매일 매순간 합니다. 예수님은 너무 답답해서 에 크락센 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나는 압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표적 때문에 믿었습니다.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님의 개인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능력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능력 때문에 믿어줄 수 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능력 때문에 높은 뜻 숭의교회를 할 때 돈을 30억 들였습니다. 능력 때문에, 김동호 목사님이 모이면 5천 명 정도 모인다고 했기 때문에 신한은행에서 빌려줬습니다. 처음에 안 빌려줬는데, 김동호 목사가 은행 지점장을 찾아가서 설득했습니다. 내가 설교를 얼마나 잘하는데 그래? 너 내가 하는 교회 안 와봤지? 한 번 와봐, 능력을 보여줘서, 일종의 표적을 보여줘서 30억을 빌렸습니다. 불행히도 저하고 양진일 목사는 이 숫자 가지고 은행지점장도 설득하지 못하고, 새마을금고 주인도 설득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모자랍니다. 그러나 표적을 가지고 설득하는 것을 예수님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표적 때문에 믿는 사람은 별로 마음을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 23-24절에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예수님은 독생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진한 고독과 외로움과 버림받음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독생자급 순종에 모방자가 되면 우리 또한 어느 순간에 이런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명랑쾌활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밝은 태양과 같은 일이 온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둔 날도 오고 밤도 오고 외로움도 오고 따돌림 당하는 고독도 오고 배척도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아는 마음이 배척의 세계를 알고 따돌림 당하는 세계도 알고 죽여 버리고 싶다는 증오심에 직면하는 걸 아는 것, 이 모든 것을 다 커버하는 것이 성령 충만이지, 이런 것은 모르고 항상 명랑쾌활하고 밝고 좋은 것만 경험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온전한 의미의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교훈을 주는 게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세 가지 뽑아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아무 교훈을 못 뽑아냅니다. 죽음을 당하자고 할 수도 없는 거고 소리를 높이 외치자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는 암시적입니다. 독생자급 순종을 죽어가는 사람은 독생자를 모르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고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데, 그런 줄 알고 있어라, 이 정도가 교훈입니다. 설교 치고는 헌금하고 싶지 않은, 이런 정도의 설교를 듣고 누가 헌금하고 싶겠습니까? 너무나 이건 사람을 업 시켜주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이걸 왜곡해서 약간 기복적으로 조장한다 하더라도 일단 본문자체가 실마리가 안 나옵니다. 결국 잘되었다든지 돌 맞을 뻔하다가 큰 대박이 터졌다든지 치료비를 받았다, 보험회사에서 큰돈을 받았다, 이게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밝은 교훈이 안 나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독생자급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하늘로부터 거듭났다고 주장하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나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진하게 하고, 처절하게 진실할수록 우리는 배척당할 수 있고 외로워질 수 있고 이해당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 그 정도가 오늘 설교의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 사람들을 웃기면서 명랑쾌활하게 할 수 없다, 우리 하나님은 때때로 울기도 하셨고 우리 하나님은 좌절도 하셨고, 이런 밤의 세계, 어두운 세게, 골짜기의 세계까지 아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오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났다는 주장을 하면서 시종일관 공격당하고 수세에 몰리고 죽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주장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지상의 질서에 적응이 안 되고 이 세상의 질서를 도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된 종교권력자들이 장악한 세상의 질서에 우리가 독생자의 진실을 가지고 나갈 때 외면과 배척을 당할지라도 기를 꺾이지 않도록 하나님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오늘도 을지로와 충무로와 세종로에서 예수 믿고 살아가다가 독생자의 진실로 한 번 이 세상을 바르게 살아보려다가 박해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하나님 위로해주시고 그들을 보살펴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