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주는 기쁨 (3)
빌립보서 4:8-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
라,
인간에게는 한 가지 염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하려고 하는 의지입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워지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을 칩니다. 부함으로 행복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 성공함으로 행복하려고 애를 쓰기도 합니다. 높이 올라가고 성공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깨닫게 됩니다. 그때에는 이미 시간이 다 지나가고 기회를 잃어버린 후입니다. 행복의 조건은 당장은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은 아름다움과 많이 소유함과 높이 올라가는 것이 행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시간을 두고 보면 그것은 잘못 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열심과 부지런함이 다가 아닙니다. 자본과 기술과 젊음이 다가 아닙니다. 정말 진정한 복과 행복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진정한 복이고 행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밤새워 고기를 잡았어도 빈 그물이었습니다. 거기에 열심과 수고가 있었고 제자들은 그 밤에 정말 수고를 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빈 그물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그물이면 뭘 합니까. 또 밤새 내가 성을 지키면 뭘 합니까. 도적이 마음만 먹으면 다 털리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진정한 복을 주셔야 그것이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과 은혜는 하늘이 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무엇인가 공적을 세워 성공해 보려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습니다. 교회를 진멸하려고 살기등등하여 핍박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만난 후 바울은 자신이 추구하는 일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태도를 바꿔 이번에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가르치고 본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이 무엇인가 하면 8절 내용입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이 말씀 속에 세 가지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진정한 은혜와 복이 무엇인가 말씀하는 메시지입니다.
듣고 보고 배운 것을 앎의 생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들이 예수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참 감사한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도행전22장1절 부터 보면 사도바울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 설교에서 자신이 유대교에서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3장7~8절에서 “나는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다 버리노라, 왜냐하면 내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미처 몰라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였고 예수를 부정하였고 부활은 허탄한 신화라고 믿었던 것이 두고두고 죄송해서 “나는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사도바울이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를 알게 해 주려고 동분서주 하며 전도자로 살아갔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알고 살아가는 삶이 최고의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보통의 은혜가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가운데 채필근이라는 비교종교론 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철저하게 유교를 신봉했던 분인데 마침내 기독교로 개종하여 비교종교론 학자가 되었습니다. 이 분이 어느 날 비교종교론 책을 쓰면서 서문에 두 가지 사과의 글부터 썼습니다. 하나는 독자에게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책을 써서 미안하다는 사과였고 두 번째는 공자님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을 썼습니다. 공자님에게 미안하다는 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본래 유교를 숭상하는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또 소년시절에 유교의 경전을 적지 않게 읽었던 관계로 공자를 지금까지 숭상하는 성인가운데 한사람입니다. 제가 14세 되던 1898년에 아버지가 어느 날 유교를 떠나 기독교로 개종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를 이단에 빼앗겼다는 깊은 슬픔에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름 있는 한학자로 유교서적 5-600권을 책방에 쌓아 놓고 읽으셨습니다. 저는 그 방에 들어가서 유교경전을 골라 한곳에 쌓아 놓고 그 앞에 엎드려 공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공자님, 제 아버지는 기독교를 알아야 기독교를 공격하고 유교를 옹호하는 글을 쓰시겠다고 하면서 성경을 보시더니 그만 불행하게도 이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공자님의 도를 저버리지 않기로 맹세합니다.’ 이런 의미의 하소연을 공자님 앞에 아뢰고 바로 일 년 후의 일입니다. 출타하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나를 불러놓고 내일은 주일이니 너는 나와 같이 예배당에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의복이 없다. 몸이 아프다 하고 별 핑계를 다 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단호한 명령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눈앞이 캄캄해 졌습니다. 그러나 피할 길이 없어 울면서 ‘정 가자하시면 가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가 잠깐 나가신 뒤 다시 책방에 들어가 유교경전을 쌓아 놓고 공자님께 아뢰었습니다. ‘공자님, 나이 어린 제가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지 못하여 내일은 이교인 예배당에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결코 공자님의 도를 아주 배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별세하신 후 틀림없이 공자님께로 돌아오겠습니다’ 이렇게 공자님께 아뢰느라고 하소연 한 것이 지금부터 꼭 60년 전의 일입니다. 내 아버지는 기독교를 열심히 믿고 봉사하시다가 별세하셨는데 별세하신지 벌써 38년이 되었습니다. 내가 반드시 공자님께로 돌아오겠다고 맹세하였던 것을 지킬 수 없어서 공자님께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공자님이 계시다면 기독교에 반드시 귀의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지금에 와서 내가 유교와 공자님께 대하여 건방지게 이러니저러니 비평하듯이 말하는 것도 죄송하기는 하지만 기독교를 위하여 하는 말인 만큼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시며 만사의 스승이시고 만성의 성자이시니 공자님이나 소크라테스나 석가나 같은 성인들이라도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얼른 보면 이것이 독선주의와 같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알고 살아갈 때 힘과 용기와 의식과 동기가 분명하게 주어집니다.
1984년 겨울 미국 미네소타주에 영하 34도까지 내려갔습니다. 주일날 교회에는 평소의 절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88세 된 골디 슈리버 할머니는 직접 운전하고 100세 된 애나 해밀턴 할아버지의 집에 가서 데리고 또 94세 된 프랜 스파코스 할아버지 집에 가서 동승시켜 모시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담임목사는 감동하였고 또 한편 염려되어 인사했을 때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작은 십자가 진 것 밖에 없습니다, 아직 목숨 바칠 충성은 못됩니다.” 이 용기와 동기는 깊은 진리를 알기 때문에 나오는 힘이고 용기이고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만 춥고 비만 와도 웅크리기 쉽고 게을러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의 삶
본문은 “듣고 알고 본대로 행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부모도 곁에 함께 있으면 힘이 됩니다. 부모의 자리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그 자리가 비워지게 되면 비로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심” 이것은 참 엄청난 힘이고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 하나님을 떠나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그 신뢰하는 마음을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이 신앙고백입니다.
독일 퀼른지방에 2차 대전 때 독일군 감옥으로 사용하던 비밀 지하 동굴이 발굴되었습니다. 그 동굴에 유대인들이 수용되어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채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극한 상황에서 버티고 살았습니다. 그 동굴이 나중에 발굴되었을 때 동굴 벽에는 낙서 흔적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낙서 중에는 이런 문구들이 있었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더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진정 하나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 이 고백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는 긍정의 세계입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의 핵심은 소망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셔서 부활시키시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를 죽이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속량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이 지금도 내 곁에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마음이 곧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믿음이 곧 행복인 것입니다.
듣고 보고 배운 것 행하는 삶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듣고 받고 본 바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삶의 대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듣고 보고 가르침 받은 것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실행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봉사하는 삶”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봉사의 삶을 살아갈 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어지는 행복은 돈을 벌 때 보다 더 강렬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행복감은 하늘이 부여하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서해안에 기름이 유출되었을 때 100만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서해안으로 달려갔습니다. 그중 70% 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참 건강성을 지닌 민족입니다. 외환위기를 만났을 때 모두 반지를 빼들고 줄지어 선 모습을 보고, 기름 유출로 재앙을 만났을 때 모두 서해안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세계가 놀랐습니다. 봉사의 삶은 성경이 가르치는 삶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둘째는 “나눔의 삶”입니다. 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삶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마음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수고와 땀을 흘리는 일도 있습니다. 시간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너무 시간 주기를 꺼려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혼자의 시대입니다. 함께 더불어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독한 시대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힘든 것이 가난보다 고독한 것입니다. 그래서 소외된 노인들끼리 모여 먼 산만 쳐다보고 앉아있습니다. 물질을 나누는 일도 있습니다. 내게 물질이 넉넉한데 주위에는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내게 나누라고 많이 주신 것입니다. 물질은 나눌 때 그 효과가 배가 됩니다. 물질은 나눌 때 향기와 효과와 영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물질을 쌓아놓음에 대해서 엄중 경합니다.
골프선수 최경주는 작열하는 햇빛 아래서 경기할 때는 피가 마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번 돈과 각종 상금을 모아 100억 원대의 재단을 설립하였습니다. 지난해 11월에는 이천냉동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인부들이 불에 타 죽었을 때 그 가족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3억 원을 쾌히 기부했습니다. 어떤 기부자는 모교에 막대한 금액을 장학금으로 보냈는데 수혜자들 중 한사람도 감사전화를 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 실망되어서 중단했다고 합니다. 감사전화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만큼 주는 일이 힘든 일인데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중단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척 피니라는 사람은 56세인데 지난 25년 동안 4조원을 이름도 밝히지 않고 기부했습니다. 자신은 15달러짜리 시계를 차고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막대한 금액을 기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생전에 남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하도록 부추기기 위해서 라고 합니다. 이 나눔의 삶이 은혜의 삶이고 행복한 삶을 줍니다.
세 번째는 “전하는 삶”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를 알고 사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성인의 죄”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면서도 가르쳐주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죄입니다. 앞에 함정이 있음을 내가 미리 알았다면 마땅히 뒤에 오는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내가 위험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있으면 그것이 알고 있는 사람의 죄라는 것입니다. 이기적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 받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이기적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강조합니다. 내가 은혜 입음도 축복입니다. 구원받음도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복은 그 복을 나누고 알게 해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한 것이 이 섬김의 삶입니다. 사마리아인 비유를 보면 “너도 이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가정을 잘 가꾸는 일도 섬기는 일입니다.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일도 섬김의 일입니다. 직분을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것도 섬기는 일입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도 섬기는 일입니다. 전도하는 일도 최상의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내가 은혜를 입게 되고 너에게 감동을 주게 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지가 미국의 수천 명의 대리모를 소개하면서 그 상당수가 군인가족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대리모를 자청한 군인의 아내들은 돈보다는 자긍심 때문에 대리모가 되었다고 소개했습니다. 물론 생계를 유지하지 위해서도 대리모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뜻있는 분들이 불임부부의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그 부부들을 돕고 싶어 미국의 중류층 부인들이 또 군인가족들이 아이를 낳아주려고 스스로 대리모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 대리모들은 임신 중에 예비 부모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체적 고통을 참고 오히려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서양인들이 한국의 고아들을 입양해 가고 그 중에서도 버려진 기형아나 장애아들을 입양해 갑니다. 인생 후반을 그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에 삶의 이유를 두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 저변에는 이 섬김의 정신이 깔려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 대원칙을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듣고 보고 앎의 생활”입니다. 마땅히 알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또 “듣고 보고 배운 것을 행하는 삶”입니다. 그 결과로 행복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 대원칙의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삶이고 가르침 받은 것을 행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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