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2부 예배-요한복음 7:10-24 (순종과 실천=진리확신의 시금석)
요한복음 7장 23-2절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사건은 5장에 있는 사건이죠. 6장의 엄청 긴 말씀, 71절에 해당되는 말씀이 5장과 7장 사이를 가로막고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독자들이 읽을 때는 5장 사건을 염두에 두고 7장을 읽어야 한단 말이죠.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17절로 말미암아, 17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아버지와 자기를 같은 동일선상에 놓았고, 자기가 하는 행동은 아버지의 행동을 모방하는 거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내가 하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도제적인 견습의 결과, 아버지로부터 가내수공업적인 제자양성의 결과 내가 아버지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사람을 건전케 하는 일을 아버지께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회복시킨 것은 예수님의 개인기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 일입니까? 안식일에 사람을 건전케 한 일은 하나님아버지께서 하신 일이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그 일에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빌려주신 거죠. 내 아버지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 독생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준행하도록 예정된 존재이기 때문에 나도 안식일에 일한다, 즉 불가항력적인 힘에 이끌려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을 고친 그 사건마저도 벌써 안식일을 범한 사건이라서 유대인의 격분을 샀는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 사건이 이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종의 사건이죠.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 죄와 죽음과 저주 안에 갇힌 사람을 회복시켜서 그것이 결국 누가 위태롭게 된 사건이 되었어요? 38년 동안 죽음과 저주 안에 갇힌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착한 일을 하신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은 어떻게 됐어요? 38년 동안 저주 안에 있던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38년 된 사람의 저주를 뒤집어 쓴 것이 된 거죠. 우리가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율법의 저주를 대신 가져가신 것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창녀와 세리와 사회적으로 평판이 매우 나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사회적 부랑아들, 사회적 종교적 경계선 굴러 떨어진 자들을 식탁에 초대해 밥을 먹었습니다. 이 밥을 먹는 행위는 종교적 경계선 바깥에 굴러 떨어진 자들을 종교적으로 복권시키는 행위이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밥을 먹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이 받았던 모든 오명과 비난은 예수님이 받는 거죠. 예수님의 식탁자체가 십자가의 죽음이죠. 예수님의 사랑의 애찬식탁자체가 저주를 대신 뒤집어쓰신 것이고, 종교적 부랑아들의 오명과 저주어린 운명을 대신 짐지는 것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진 거예요? 저주아래 죽은 자들의 운명과 자기가 하나가될 때 십자가에 진 거예요? 사실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진 일은 예수님께서 3년 내내 한 일의 완성이고 종합인 거죠.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친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됐어요. 38년 동안 누워 있었으니까 하루 더 누워 있어달라는 거죠. 예수님을 보호하려면 38년 된 병자가 38년 만에 일어나려는 감격을 꾹 눌러야겠죠. 하루 더 누워있자, 예수님께서 위험하다, 내일 일어나자, 하루 더 못 참겠나? 이렇게 하면서 참을 수 있었죠.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고 번쩍 무거운 침상을 들고 갔기 때문에 1.2km이상 걸어버린 거죠. 그 무거운 침상을 들고 1.2km 이상 걸어버렸기 때문에 이 사람은 안식일에 노동을 한 겁니다. 그도 안식일을 범한 거죠. 예수님만 안식일을 범한 게 아니죠.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일한 것도 안식일을 범한 것, 두 번째로 그 사람이 무거운 침상을 들고 멀리 걸어가서 안식일 노동금지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안식일 금지를 어긴 사람을 또 양산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걸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힘으로 했다고 하지 않고, 내 개인기로 했다고 하면 어떻게 돼요? 두 번째 비난은 없어지겠죠. 이건 사실 내 힘으로 한 거다, 내 차력쇼 보여줄까?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나에게 하신 일이다, 이러신 바람에 더 치명적인 위험이 예수님께 도래한 겁니다. 하나님을 자기와 동등으로 삼은 사건, 6장을 잊어버리고 바로 7장으로 갑니다. 7장 23절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 왜 안식일이 이렇게 집착할 만큼 중요한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일사불란하게 계명에 순종하는 고분고분한 상태를 매우 좋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독재자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독재자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천상의 독재자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한결같이 안식일에 일도 하지 않고 불빛도 연기도 피우지 않고, 조용하게 수동적으로 토라만 읽으면서 할렐루야만 외치면서, 일사불란한 행동의 규율성, 획일성을 하나님께서 좋아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안에는 이런 냉혹한 전체주의가 있습니다. 너무 웃긴 겁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런 게 전혀 아닙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도무지 일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노예와 종을 소유한 사람들이 안식일에 땅을 경작하여 매매하여 물건을 사고팔아서 돈을 버는 일에 안식일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원래 안식일 금지 계명의 뜻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0절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생산성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학우들께서 월요일에 시험인데, 금요일부터 몸이 아팠어요. 금요일 토요일 내내 몸져누워 있었어요. 시험은 다가와요. 공부는 안 했어요. 셰익스피어 오셀로 시험을 다 봐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공부를 못했어요. 그래서 F를 맞았어요. 이건 안식일 금지 계명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도 안식일을 지킬 수 없었어요. 예배드리고 집에 가서 시험공부를 해야 해요. 그래서 영광을 돌려야 해요. 안식일 금지계명은 노예를 소유하고 종을 소유한 사람의 극단적 생산성 신화를 깨부수는 것이었고,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지, 개개인이 자기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어서 일하는 것,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도 박탈당한 사람, 풀빵 장수가 숙대 앞에 가서 풀빵을 구워서 간신히 3만원 벌어가는 것, 이것은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십니다. 이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박탈당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금요일 다친 사람은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안식일을 못 지킨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안식일을 어긴 것 아닙니다. 손봉호 교수님이 신앙 간증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경주고등학교 나왔던 이 분이 서울대학교 수험표를 받아 가야 하는데 그날 주일이었습니다. 고신출신교회라서 성수주일 하려고 시험 수험표를 안 받으러 갑니다. 수험표를 안 받으면 떨어지는 겁니다. 자기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안 갑니다. 예수 안 믿는 사촌을 보냅니다. 이 사람은 안식일을 어기게 만들어서 자기는 안식일을 지켜요. 그 정성은 갸륵하지만 그것은 out of point입니다. 받으러 가도 됩니다. 그건 안식일 계명을 어기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성서해석의 피해자입니다. 손봉호 교수의 정성이 아니라 교단이 안 좋은 데 속하면 매우 힘들다는 뜻이지, 당연히 받으러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안식일을 어기게 만들면 안 되죠. 제가 목회할 때 롯데제과에 다니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롯데호텔에 있는 롯데제과니까 호텔은 365일 내내 돌아가니까 이 자매는 주일날도 일하러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분은 안식일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매번 휴가를 내는데, 동료친구들한테 안식일에 일하게 하고 자기는 빠져서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료들이 양보를 안 해줘서 주일날 못나오게 됐습니다. 저한테 너무 죄책감에 빠져서 안식일을 성수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제가 그랬습니다. 자매님 공평하게 예수 믿지 않는 그 친구들도 일요일은 데이트도 하게 해줘야 하고 공평하게 혜택이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매님이 주일날 못 나오면 수요일에 나오면 되는 것이고, 수요일에 못 나오면 구역예배에 나오면 되는 것이고, 만일 그것도 안 되면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기 때문에 그냥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자매님께서 기독교인이라고 빨간 날은 전부 다 나와 버리고 예수 안 믿는 친구는 영원히 데이트도 못하고 군대면회도 못가고 노처녀로 늙어죽으면 안 됩니다, 그 친구도 안식일에 호숫가에도 가야하고 서로 나눠야 합니다, 이것이 참 정신입니다, 이렇게 가르쳐줬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이 거의 없죠. 무조건 나오게 하니까 결국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하루 종일 안식일 내내 롯데제과에 나가서 일해야 합니다. 그 자매는 룰루랄라 안식일 지키러 나오고 다른 친구들은 주일날 한 번도 휴가를 갖지 못하면 안 되죠. 우리 하나님은 전체주의적인 폭군이 아닙니다.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동정심이 많은 분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의 탄식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시지, 안식일에 무조건 숯불 연기 피우면 안 돼, 안식일은 엄숙하게 토라만 읽으면서 엄숙하게 있어야 해, 아닙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회복하는 날이고, 6일 동안 노동으로부터 마모됐던 인간성을 회복하는 날이고 몸과 육체가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식물인간 무능력 상태에서 직립보행하면서 은혜의 직립 보행하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안식일이에요. 우리 하나님이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세요. 이런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아들도 따라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38년 된 병자를 고친 사건을 아버지가 하신 사건이라고 돌립니다. 안식일은 아버지가 일으켜주시는 날이에요. 안식일은 38년 동안 죄책감의 납덩이같은 침상에서 속박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날이에요. 안식일은 일어나서 직립보행자가 되는 날이고, 주체적인 각성한 개인이 돼서 노동의 세계에 들어가서 일할 만큼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안식일이에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나를 죽이려 하느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겠죠? 하나님은 절대로 전체주의적인 폭군도 아니고, 인간의 개별적 상황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율법의 계명을 기계적으로 지키려고 요구하는 분이 절대로 아닙니다. 유월절이 원래 1월 14일입니다. 1월 14일에 유월절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 달 후 2월 14일에 유월절 지키게 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아들만 땅을 상속받게 하던 그런 하나님이어지만 그러나 아들이 없던 슬로보앗의 딸들은, 딸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들 상속이 불가능할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어 딸도 상속받게 해달라고 하니까 금방 답이 왔어요. 저 아이들 말이 맞다, 딸도 상속받는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개별적 상황도 다 고려하셔서 율법을 제정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금지가 안식일 계명의 핵심이 아닙니다. 생명회복과 치유가 안식일 계명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영화 본다고, 26일째 아내와 남편이 냉전 상태였어요. 맞벌이부부였기 때문에 안식일 주일날 외에는 둘 다 시간이 없었어요. 예배드리고 나서 안식일에 두 분이 가서 본 레거시라는 영화를 같이 봤어요. 보다가 무서운 장면이 있어서 아내가 몸을 뒤척이다가 남편의 가슴에 푹 처박았어요. 그래서 꼭 껴안아줬어요. 그러면 안식일에 회복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영화를 봤다, 돈을 썼다, 큰일 났다,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돈만 쓰면 안식일을 범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교단의 해석은 너무 가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엉터리 설교 듣는 것보다 영화 보는 게 나을 때가 있어요. 엉터리 설교 안 듣는 것 자체가 더 좋을 때가 있어요. 그렇게 이단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양심을 억압받는 것보다 산에 가고, 호숫가에 개구리가 노는 것을 보고 더 기뻐할 수 있는 거예요. 안식일은 전신을 건전케 하는 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는 날,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날, 안식일은 생명을 회복하는 날, 우리 하나님은 안식일마다 사람을 회복시켜요. 노동으로 마모된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감수성을 회복시켜주세요. 그게 안식일에요. 우리 예수님은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어요.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명절에 올라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명절에 세상에 정체를 드러내라고 압박하는 친구들, 자기 형제들 앞에 나는 가지 않는다, 내가 내 정체를 환희 드러낼 때가 오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7장 12절 '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미혹한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quotation mark를 쓰세요. 인용부호를 써야 합니다. 이 말은 신명기 13장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신명기 13장 1-10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돌로 쳐죽이라'고 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면서 미혹하는 거짓선지자의 이름으로, 신명기 13장 1-10절에 의거하여 귀신들린 자, 즉 다른 신을 섬기는 귀신들린 자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참 안 풀립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셔도, 38년 된 병자를 못 고치면 무능력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고, 고쳐도 표적과 기사를 가지고 미혹케 한다고 주장하니까 얼마나 힘들어요.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정체를 드러내긴 드러내야 하는데, 이렇게 표적과 기사를 쓰기만 해도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을 받으니까 너무 고독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좋게 말한 사람들을 보복하는 매우 무서운 전체주의적인 분위기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명절 첫 날부터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즉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명절 중 4일 정도 되는 중간에 올라갔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다시 한 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님의 프로파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고 목수 출신이고 정규학교 출신이 아닌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 과감하게 대담하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니 놀랬습니다. 어떻게 안 배운 사람이 성경을 잘 가르치냐고 놀랐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스스로 고안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착안한 것도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내 입속에 넣어주신 것이고, 내 귓전을 때려주신 것이고, 내 심장을 흔들어서 토해내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근원적으로 죄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고대선지자들이 다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대 선지자들은 누구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교훈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고대 선지자들은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나를 통해서 일어나는 이 일, 마태복음 11장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이다, 지금 나 나사렛 예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여러분 가운데 걸어 다니는 내가 바로 하나님 나라다, 이런 교훈은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이 교훈은 갈릴리에서 불만에 가득 찬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다, 갈릴리의 토양과 아우성에 바탕을 두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진동시켜서 내가 이 말을 외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거룩하게 충동하고 영감을 주셔서 하는 말이다, 여러분은 내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시켜서 하는 말이다, 이런 말입니다. 이 세상에 공자나 마호메트나 석가모니나 모두 오랫동안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교육을 오랫동안 받은 사람이 교육의 결과 내뱉는 말도 힘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모든 종교적 성인과 철학자와 다릅니다. 교육자체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정규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정규학교를 안 다녔는데 성경을 통달하셨습니다. 이사야 50장 4-5절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교육방법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수성을 죽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리 호이나키라는 사람이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쓴 책이 있습니다. 영어로 하면 stumbling to walk justice, stumbling이라는 게 비틀거리는 거거든요. 비틀거리면서 간신히 몸을 지탱해가면서 정의를 향해서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게 보이콧의 철학입니다. 무정부주의 철학입니다. 대학교육에 대해서 전면적 폐기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배후에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드시 저를 이해하려면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반 일리치는 <탈학교의 사회>를 썼습니다. 모든 80년대 운동권 아이들의 최초의 독서가 <탈학교의 사회>입니다. Peacefully society, 볼리비아의 오랫동안 선교사로 계셨던 예수회 사제인데, 너무나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인데, 너무 기도도 많이 하신 분이고 깨어 있는 분입니다. 미국의 운명을 예레미야처럼 탄식하신 분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사람을 소개한다면 이반 일리치를 소개합니다. 이반 일리치를 쉽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오늘 날 예레미야와 이사야 같은 분입니다. 물론 돌아가셨습니다.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네이버나 구글에서 이반 일리치를 치면 혹이 달려 있는 사진이 나와요. 혹은 암인데, 이분이 치료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도 이반 일리치의 영향을 받아서 나온 잡지입니다. 그다음 이반 일리치의 영향을 받은 리 호이나키가 쓴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이 자본주의체제, 소비를 많이 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반생태적 세상에 대해서 거부합니다. <오래된 미래> 나다크, 티벳, 이것도 전부 이런 사상입니다. 이분은 기독교적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 깊은데, 전면적인 삶의 재구성과 재조정을 원하는 삶입니다. 너무 절실한 책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림자도둑>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림자도둑은 주부노동입니다. 돈으로 값으로 환산되지 않지만 너무나 귀한 노동입니다. 숭실대에도 이 사람 책이 16권 정도 있습니다. 서울대에도 아마 있을 거예요. 리 호이나키나 이반 일리치 같은 사람, 오늘 날 제도권교육에서 잘못 상실되고 파괴돼버린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니고 배우는 과정은 타락해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이것을 약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이는 이해 못하고 약간 이해하는데, 우리가 정보와 지식을 많이 모으는 것은 절대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습니다. 우리 감수성을 고양시키는 격조 높은 책들을 읽어야 우리가 배움의 의미가 있지, 예수님처럼 하나님 말씀에 준하는 책, 하나님 말씀처럼 우리 양심을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 있게 만드는 책을 읽어야 우리가 예수님처럼 됩니다. 예수님이 공부를 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랍비스쿨, 제도권 잘못된 교육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배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공부를 하지 않은 분이 아니라 장로의 유전을 가르치고 가야바와 안나스 같은 타락한 성직자들의 모범을 강요하는 신학교를 안 다닌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온 겁니다. 우리가 잘못된 신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우리의 감수성 파괴입니다. 잘못된 학교를 오랫동안 다니는 것 자체가 우리 감수성을 훼손하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운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면서 순종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파송하여 충동질하는 말만 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왜 무섭냐? 순종과 실천을 꾸준히 해온 사람의 말이 무섭습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모이게 만들고 투신하게 만들고 변화시킵니다. 순종과 실천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말이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의 말을 대신하면, 보내신 자 하나님과 보냄 받은 사람 사이에 강력한 영적 인격적 유대가 있는 경우에 이 말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저는 지금도 설교를 믿고 있고 교육을 믿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 반생태적이고 각축과 경쟁을 불가피하게 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문제 삼지 않는 교육을 저는 문제 삼습니다. 저는 이 세상이 너무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오늘 날 이렇게 잘못된 세상을 문제제기 하지 않는 제도권 종교권력을 완전히 해체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힘이 없습니다. 저는 이 세상을 뒤집는 게 목적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못 뒤집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있는 급진성은 어디서 왔습니까? 저는 순전히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서 급진성이 생겼습니다. 제가 세상에 절대로 적응하지 않게 된 이유는 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너무 믿고 줄 치고 감동을 받다가 이렇게 된 겁니다. 이 세상에 우리가 적응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전복하고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전까지 우리가 이 세상의 행위를 악하다고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이 세상이 악하다고 말하니까 나를 미워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진짜 악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모두 다 인간성을 훼손해가면서 존립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를 악하게 만들어야만 간신히 존립하는 세상, 이건 그 자체가 악한 겁니다.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을 쉽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이 말은 도로시데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 나오는 피터 모린이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피터 모린 이라는 사람을 꼭 읽어보세요. 피터모린을 영어 구글에 치면 위키피디아에 나올 겁니다. 농부철학자, 프랑스 인격주의에 영향을 받은 사람, 도로시데이 영향을 끼쳐서 1932년부터 10년 동안 대공황에 처한 미국노동자들의 목자가 된 사람, 이렇게 나올 겁니다. 그런데 피터모린은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노동과 순종과 실천만 했는데 그 확신의 굵기가 주교나 보좌신부나 교황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분을 오랫동안 따랐던 사람이 도로시 데이인데, 이 도로시데이는 오랫동안 가톨릭 노동자운동을 했습니다. 도로시데이가 쓴 책이 <고백>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 제가 긴 해설을 붙여놓은 것을 봤을 겁니다. 도로시데이의 책을 왜 읽어야하는지 아주 긴 글을 써놨습니다. 복있는 사람에서 내라고 하면서 긴 글을 써줬습니다. 그 책에 보면 농부철학자 피터모린, 순종과 실천을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 말씀임을 확신한 사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급진적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신하는 이 사람은 이 세계를 근원적으로 창조적 부정을 하면서 착하게 사는 일이, 즉 형제자매처럼 우애롭게 사는 일이 세상에 가능할 때까지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피터모린입니다. 형제자매처럼 각축과 경쟁과 서로 적개심 없이 사는 일이 가능해질 때까지 세상을 바꾸려 하는 사람입니다. 이 분이 하는 말이, 우리가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착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쉬워지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미국 가톨릭 노동자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계몽운동을 했는데 엄청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분이 신부님 집의 머슴살이를 했는데, 머슴살이를 하면서 신부님이 얼마나 월급을 줄까, 했더니, 저에게 월급을 주지 마시고 신부님 서재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신부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권한이 그 사람 월급이었습니다. 신부님이 읽지 않는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그 사람이 도로시데이라는 자매를 감화시켜서 숱한 미국 가톨릭 노동자를 감화시켜서 오늘 날 미국 가톨릭을 만들어냈는데, 가톨릭 안에 있는 위대한 사회봉사의 능력은 피터모린의 영적감화력에서 나왔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교육을 많이 받지 않아도 박사학위 안 받아도 정말로 하나님 말씀을 확신하고 믿고 그대로 순종하고 10년 만 실천하면 추종자가 생깁니다. 우리 양목사님도 많은 제자들이 동역자들이 생겼잖아요. 사실 박사학위 안 받아도 돼요. 물론 받겠지만, 양목사님은 지금 저를 도와주기 위해서 박사학위 논문을 씁니다. 숭실대 강의를 대신해주려고, 저는 혼자 하다가 일찍 죽으려고 하면 안 써도 됩니다. 제가 혼자 하는 걸 힘드니까 박사학위 받아 강의 좀 해달라고, 박사학위 안 받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웃 사랑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 분은 박사학위 안 받아도 순종과 실천을 일삼는 분은 어느새 영적인 마그네틱 파워가 생겨서 사람을 감화시킵니다. 진실의 힘이고 순종의 힘이고 실천의 힘입니다. 우리가 피터모린 처럼 살면 영적지도자입니다. 피터모린은 주교와 교황 보좌신부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래서 20세기의 프란체스코라는 평판을 받습니다. 피터모린의 삶은 너무 지속적입니다. 지속적으로 부단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선을 행하는 것이 쉬운 세상을 만들때까지 나는 지치지 않고 이 세상을 계몽시킬 것이고 가르칠 것이다, 도로시데이는 피터모린을 만나기 전까지 야생소녀였습니다. 완전히 사회주의자였고 낙태도 2번 했고 엉망으로 인생을 살던 자매님이었는데, 워싱턴에 데모하러 갔다가 14일 동안 감옥에 갇혀서 단식투쟁을 했는데, 배가 고파서 못 살겠다, 모든 걸 때려치고 평범하게 살겠다 하면서 성마리아 수태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너무 멀리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모양을 갖춘 사람 중에 제 스승이 될 사람을 한 사람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고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 더 이상 사회투쟁하지 않고 데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갑니다. 바로 앞에 피터모린 농부 철학자가 야생소녀 같은 도로시데이 자매님을 잡아 감화를 시키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부터 기독교사상 예언자 아모스 이사야를 퍼부어버립니다. 완전히 사회주의자 무신론자였던 이 자매님이 피터모린을 만나서 완전히 바뀌어버립니다. 그 좋은 멋진 이야기가 도로시데이 <고백>이라는 책에 나옵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진리를 확신하는 길은 누적된 실천과 일상의 순종입니다. 안식일 계명, 하나님을 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이런 계명 하나를 줄창 순종하고 애를 쓰다보면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십계명을 실천하려고 애를 쓰다 보면 이 계명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만이 주실 수 있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면 이런 말을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런 말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아니면 회개해야 할 대상도 없고 회개해야 할 초점도 없습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우리 하나님만이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에 근접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방향전환하라고 하는 것이 회개하는 거거든요. 회개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겁니다. 나날이 조금씩 실천하면 됩니다. 너무 급작스럽게 성인이 될 필요 없어요. 조금씩 조금씩 옆 사람을 모방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잘 읽으면 잘 읽는 사람을 모방하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앞에 안 나타주면 하나님 약간 닮은 사람 옆에서 그와 보조를 맞추면서 따라가는 것, 너무 가내수공업적인 모방의 교육이라고 봅니다. 글을 많이 읽는 사람, 운동을 잘 하는 사람, 음악을 잘 하는 사람, 내 모든 스승들입니다. 모든 분야에 하나님이 보내주신 스승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 같은 분이 우리 주변에도 우리 영혼을 각성시켜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시고 우리의 순종과 실험을 끊임없이 격려할 분이 반드시 계실 거라 믿습니다. 이런 분을 따라가면 우리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요. 이 세상에 어떻게 예수님 같은 분이 귀신 들린 자라는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이것은 우리 앞에 있는 진실, 우리가 만일 거짓에 속하고 우리가 만일 악에 기울어졌다면 우리 하나님을 우리는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상대성이론입니다. 우리가 악하면 선한 사람이 악해 보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야만 악한 사람이 악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에게 확실하게 소속돼야만 이 세상이 악한 것 때문에 눈물이 나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의로운 질서에 즐거이 동참해야만 이 세상을 뒤집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이 세상을 고치려고 애를 쓰게 되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분명한 가담, 분명한 전향, 이것이 우리는 모자랍니다. 우리 주님은 귀신 들렸다는 말을 들으면서 이 착한 일,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귀신 들린 일이라고 말하는 종교권력자들, 이 무던한 이들을 절망합니다. 전 이 세상에서 제일 절망하는 것이 종교권력입니다. 만일 저와 양목사가 둘이 하는 이야기를 어떤 큰교회에 가서 한다, 바로 아마 귀신들린 자라는 말을 저한테 할 겁니다. 저는 오래 살기 위해서 지금 다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저는 바로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바로 논란에 빠지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품고 있는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말하면 엄청난 혼란을 일으킵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 세계교회가 너무나 잘못된 종교권력자들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제도권교회, 완전히 공기와 바람처럼 물처럼 기독교적 사랑을 실천하기엔 너무나 큰 장애물입니다. 목사 한 명은 착합니다. 목사 한명은 착하기 쉽지만 목사 100명이 모인 노회는 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목사 5천명 모이는 총회는 절대로 착하지 않은 결정을 내립니다. 목사 한 명은 성령으로 쉽게 감동받지만 목사 100명은 동시다발적으로 성령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사는 수가 모일수록 악해집니다. 그런종교집단, 이게 종교권력자입니다. 그런 종교권력자들이 자기 권력을 담합하여 서로 카르텔조직으로 모든 종교시장을 평등하게 균점하기 위해서 나오는 말이 종교다원론입니다. 종교다원론은 정말 악합니다. 모든 종교가 다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된 주장입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어떤 종교도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물과 같은 분이라고 분명히 말했고 공기 같은 분 산소 같은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부피를 차지 하지 않고, 사랑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종교기구 없이 얼마든지 하나님은 현존하실 수 있습니다. 엄청난 큰 교회 건물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우리 하나님 사랑은 보여줄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성전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증언합니다. 왜 종교권력이 필요합니까? 저는 조계종도 매우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남묘호랑교도 비판하고, 그러나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도 절망적일 정도로 너무나 비대하고 불필요한 조직이 커졌다고 믿는 바입니다. 이게 다 없어져야 합니다. 물처럼 공기처럼, 우리 하나님복음은 물과 공기처럼 돼야 합니다. 부피와 질량 없이도 부피를 차지하지 않고도 스며들고 존재를 드러내면서, 꽃향기가 색깔 있습니까? 목련꽃이 나 향기다, 피하라고 합니까? 목련꽃 향기는 아무런 부피를 차지하지 않고도 우리를 매혹시키고 우리를 감화시키지 않습니까? 왜 기독교는 목련꽃 같은 기독교가 될 수 없단 말입니까? 할 수 있습니다. 종교권력을 해체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은데 할 기회가 있는데 가면 하지 못합니다. 두려워서 떨고 옵니다. 제가 너무 웃깁니다.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하니 조폭 같은 사람의 전화가 왔습니다. 김회권 목사입니까? 엄청 쫄았습니다. 나 누구누구 장로인데, 예 장로님, 웬일이십니까? 김회권 목사가 쓴 신문의 글을 읽어봤는데, 너무 긴장이 됐습니다. 너무 감동을 받았어, 한국장로신문에 편집장 장로인데, 제가 매주 숭대신문에 칼럼을 씁니다. 신문이 2만부 읽힌대요. 모든 해외에 있는 독자한테까지 반응이 와요. 글이 너무 좋다고, 너무 참신하다고,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왜 유명하지 않냐고,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이, 왜 이렇게 책을 안 쓰냐? 왜 유명하지 않느냐? 왜 이제 나타났느냐? 이 장로님이 하는 말이, 완전히 깡패 같은 분인데, 연고도 없는데 장로신문에 논설위원이 돼 달라는 겁니다. 제가 숭대신문에 싣는 글들이 장로신문에 실려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이런 글이 많이 실려야 한다고, 제가 너무 깜짝 놀랐는데, 저는 신문 읽었다고 전화 오면 큰일 납니다. 김회권 이단이 되려나? 강의 동영상을 촬영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가 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냥 바로 귀신 들린 자로 낚아 채일 것 같아서입니다. 우리가 물과 공기 같은 면적도 부피도 없이 자기를 완전히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할 때 딱 두 가지 맥락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종교권력을 산산조각 내시려는, 무서운 기세로 해체시키려는 dismantling 하는, 이 세상을 해체시켜려는 마음으로 주장을 했습니다. 두 번째로 이 일을 위해서 내가 권력을 추구하고 사익을 추구하지 않고 내가 나를 다그치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감수하기 위한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호소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름으로 호소할 때는 딱 두 가지입니다. 책임을 지려고 할 때, 희생하려고 할 때, 그때만 하나님 아버지만 들먹여요. 그때가 아닐 때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남묘호랑교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 이름을 언제 호소해야 해요? 범죄자가 돼서 감옥에 갇힐 때 하면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다고 해야 해요. 내가 범죄자가 돼서 감옥에 갇힐 때는 무신론자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할 때는 죽으려고 할 때, 내가 왜 희생해야 합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격려하시고 내가 십자가를 지도록 무한히 격려해주셔서 저는 이 길을 갑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가슴이 저려오는 비난입니다. 사랑의 원천이시고 정의의 화신이신 우리 예수님이 거대한 종교권력자들 틈바구니에서 진리를 가르치시려고 할 때 거센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많이 안 배우셨고 정규학교를 안 나오셨지만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육체노동하시면서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시고 깨우침 받으면서 서기관과 달리 엄청난 권세를 발하는 가르침을 주셔서 파문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귀를 열고 배워서 이 세상을 거룩하게 전복하고 변화시키는 데 저희도 또한 쓰임 받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할 때는 우리가 특권을 포기할 때 언급하게 하시고, 우리가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서 사적이익을 포기할 때만 아버지 하나님을 언급하게 하여 주소서. 특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엮지 않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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