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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과 실천-요한복음 7:10-24 (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1부 예배-요한복음 7:10-24 (순종과 실천=진리확신의 시금석)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명절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5 18-19절 말씀과 오늘 7장이 이어진다는 말씀을 지난시간에 드렸습니다. 6장은 삽입절인데, 유대인들이 7장에서 예수님을 죽여 없애려고 하는 누적된 적개심의 원천, 그 뿌리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기 위하여 5장에다 6장을 더했습니다. 사실 6장은 맥락상 5장과 7장 사이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구절입니다. 5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죽이고자 했습니다.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를 들어서 하나님과 자기를 동등됨으로 삼는 장면은 17절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아버지와 자기를 동일선상에 놓고 있는 거죠. 이런 주장들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룩한 도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그렇게 집착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유대인의 신학에 의하면 시간의 성전입니다. 공간의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죠? 시간의 성전은 안식일에 있습니다.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 24시간은 시간의 성전입니다. 그 안식일을 지켜야만 성전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성전 안에 들어간 사람이 하나님 음성을 듣는데, 하나님에게 사역을 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흡수하고 소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에게 어떤 작위적인 행동도 가하지 않는 겁니다. 이게 안식일입니다. 즉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 24시간 동안 허기진 상태로 하나님을 향하여 대기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성전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딴 곳에 살고 외국에 살고 지역에 흩어져 살아도 시간의 성전인 안식일에 만나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시간의 영토 안에서 항상 회중의 일체감을 가지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아이덴티티,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그건 너무 좋은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까지 벌였습니다. 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에게 안식일에 공격을 당했습니다. 7차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4차에서 유대인들이 졌습니다. 그 이유가 안식일에 공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전쟁마저도 쉬는 대담한 모험을 했습니다. 시간의 성전인 안식일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을 쉽게 비판하면 안 됩니다. 유대인을 비판하려면 예수님 정도 돼야 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을 비판하기는커녕 예수님에게 비판받는 유대인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 인류가 집단적으로 민족적으로 집요할 정도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 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시간의 성전 안에서, 시간의 영토 안에서 한 자리에 모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떤 이교도, 그리스, 라틴 누구도 유대인만큼 안식일을 완벽하게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안식일을 사수해서 오늘날 예수님을 만난 유대인, 유대인이 유대인이 된 것은 안식일 때문입니다. 또 유대인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출애굽 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채찍, 당신이 주는 가혹한 노동에서 3-4일 동안 휴가를 받아 하나님 산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리고자 합니다, 출애굽의 대의명분은 무엇이었죠? 출애굽기 3 4장에 보면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출애굽 하는 목적, 파라오의 채찍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산에 올라가 예배드리고자 함, 4 24절에 출애굽의 대장정을 이끌고 하나님 산으로 간 모세가 하나님께 노중에서 죽임을 당할 뻔 했습니다. ?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자녀는 할례하지 않고 출애굽의 대장정에 나서니까 출애굽의 대장정보다 네 자녀를 할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출애굽기 3, 4장에 의하면 안식일과 할례는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헌법입니다. 이 두 가지를 예수님은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그 자체가 파라오의 채찍질과 같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닦달하는 엄청난 유대종교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안식일을 덜 강조하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고 안식일에 치료를 해주고 안식일에 회복을 시킴으로써 참 안식일의 의미를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겁니다. 이런 예수님 사역이 요한복음 5장에,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줬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실로암 물가에 가서 씻어 안식일에 눈을 떴습니다. 안식일은 원래 뭐하는 날이에요?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는 게 안식일이고, 날 때부터 소경됐던 사람이 눈을 뜨는 게 원래 안식일이 돼야죠. 척추가 휘어지도록 가혹한 노동에서 비인간대우를 받던 히브리 노예가 안식일을 얻는 목적은 참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은 바로 모세의 출애굽기 3,4장에 나오는 안식일의 참 정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38년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안식일에 고쳤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 안식일에 38년 만에 일어난 환자를 유대인들은 하루 더 누워 있으라고 합니다. 이왕 누워 있던 김에 하루 더 누워 있으라, 38년째 일어나려고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일으킨 구원의 감격을 급격히 냉각시키는 말을 하는데, 지금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면 안 된다, 무거운 물건을 들고 이동하면 안 된다, 그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 십계명을 철두철미하게 지키기 위하여 613가지 시행세칙으로 만들어 지켰습니다. 613가지로 구분해도 안 되면 랍비에게 가서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이 느꼈던 겁니다. 7 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안식일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성경에서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은 노예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입니다. 노예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지 않고, 안식일을 박탈당했다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볼까요? 어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있는지 볼까요? 신명기 5장을 봐도 됩니다. 5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은 종과 노예며 가축을 소유한 유력 지주들 또는 지주급 부농들에게만 계명이 추가된 거란 말이에요. 신명기 5장에 가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내가 안식일 계명을 주는 참 목적은 종들에게 가축에게 하루를 쉬게 해주는 것이다, 안식일의 참 목적은 생산성을 극대화시키려고 하는, 노동생산성에 집착하는, 즉 경제적 부가가치 생산에 집착하는 주인의 탐욕을 억제함으로 그 밑에서 시달리는 가축과 남자와 여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법이었다, 사실은 인권법입니다. 안식일법은 노예인권법입니다. 1970 11 13일인가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하면서 전태일이 분신을 했던 이유는 그 당시 청계피복노동자 소녀들이 하루에 17,18시간 너무나 가혹한 노동을 하는데 안식일을 쉬지 못하는 겁니다. 또 하나 E 마트나 홈플러스 일하는 캐셔들은 화장실을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들 요도방광염에 걸린답니다. 이 엄청난 부조리, 그런 것이 안식일 박탈이에요. 내가 월요일에 시험이 있는데 금요일 토요일에 병이 들었어요. 병이 든 사람이 금요일 토요일에 하나도 공부 못했습니다. 월요일에 시험이 있는데,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시험공부를 하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험공부를 룰루랄라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만일 안식일을 지키려고 시험공부를 하지 않으면 무책임한 겁니다. 이런 건 안식일을 박탈당한 겁니다. 안식일을 범한 사람은 극단적인 생산성 비약, 손봉호 교수와 이만열 교수가 안식일에 수험표를 받으러 가지 않는 건 간증을 많이 듭니다. 손봉호 교수가 서울대 시험을 치러 갔는데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하여 수험표를 받으러 가는 그날이 안식일이라 안 갔습니다. 대신 누가 갔어요? 누군가는 안식일을 범해야 합니다. 본인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누군가는 안식일을 범해야 해요. 옛날 제가 목회할 때 한 자매님이 자기만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주일날 계속 휴가를 냅니다. 같은 로테이션의 다른 동료들은 이 사람 때문에 한 번도 일요일에 데이트를 못합니다. 이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모든 주일날 공평하게 안식을 가지고 당신이 주일날 못 오면 수요예배에 오는 것이 하나님 뜻이고, 안 되면 구역예배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다, 당신이 주일에 예배드리러 가기 위해서 당신 동료들이 만일 한 번도 주일에 나가서 군대 간 친구 면회도 못 가게 하면, 데이트도 안 되는 것이고 결혼도 안 되는 것이고, 창조의 명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안 된다, 그렇게 설득했습니다. 그분은 강박합니다. 그분은 성수주일하기 위해서 어찌됐든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주일에 나오려고 합니다. 안식일은 그런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안식일에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 이게 안식일의 핵심입니다. 가혹한 노동으로부터, 집착하는 생산성의 신화, 내가 공부 많이 해야, 내가 돈을 더 벌어야, 집착과 소유와 탐욕 생산성에 대한 극단적 신비화 절대화, 이런 것들을 막고 하나님을 향하여 굶주린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6일 동안 모든 목적이 안식일에 있음을, 노동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에게 바침, 이웃을 위하여 나눔, 바침과 나눔을 위하여 6일 노동이 필요했다, 이걸 알기 위해서 하루 쉬게 만든 겁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안식일의 참 정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른 것은 두 가지 맥락입니다. 첫째 유대종교의 모든 권력과 거짓된 권위체계를 일시에 초토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아버지와 밀착되게 말했을 때는 딱 한 가지입니다. 유대종교 모든 것들을 모세와 엘리야의 권위보다도 더 큰 권위로 이 모든 기초를 dismantling, 해체시켜버리려고 하나님 아버지께 호소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을 이렇게 떼어먹는 것처럼 보이는 이 행동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니까 나도 안식일에 생명 살리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모세까지 귀속되는 이 모든 권위를 dismantling, 두 번째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를 동일시할 때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순종하려고 하는 자기 다그침, 자기 비움의 결단을 강조할 때만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했습니다. 그 논쟁의 끝에 7장이 있습니다. 5장 사건의 충격이 7장에 나오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아직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친 충격이 유대군중을 두 패로 나눴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자기 정체를 드러낼 때가 안 됐다고 한 이유가 12절입니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a good man, 안스라포스 아나스로스, ‘좋은 사람 예수님은 한 좋은 사람 이상이잖아요. 예수님을 한 좋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은 불충분하지만 나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신명기 13장 읽은 사람은 금방 기억납니까? 무리를 미혹하게 하는 사람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거짓선지자입니다. 무리를 미혹하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영이 아닙니다. 귀신들린 자인 거짓 예언자입니다. 7 20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귀신이 들려 능력도 행하고 귀신이 들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우리를 이탈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이 가장 극한 논쟁입니다. 사실은 종교적인 논쟁은 가장 극한적인 비난과 욕설을 초래합니다. 이건 제가 한국교회로부터 금방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 제가 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하면, 지금 다하지 못합니다. 오래 살기 위해서, 제가 만약 양목사와 둘이 하는 이야기를 영락교회에 가서 해버리면 귀신 들렸단 말을 듣습니다. 저는 제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진실하게 털어놓지 모합니다. 사람들 봐가면서 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dismantling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교회를 de-construction, 해체해야 하고, dismantling 기초부터 흔들어야 합니다. 기초부터 흔드는 것이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 감동을 받을수록 저는 귀신들린 자로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아니라 양목사가 나중에 그러더라도 양목사가 귀신들린 자가 아닙니다. 왜 이런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입니다. 이게 상대적입니다. 악령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올 때 우리를 파괴하러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가버나움에 귀신들린 사람이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종교당국자에게는 멸망시키러 온 사람, 해체시키러 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구원하러 온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제로 종교의 교주가 되기 위해서 오신 게 아닙니다. 인류의 일부 무리 앞에 교주로 대접받고 카드 엄청 받고 케이크를 받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련의 종교권력자체를 dismantling 해체시키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곳에는 종교권력자체가 발생할 수가 없고, 오로지 순종과 실천만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영이 거하면 절대로, 예수님의 성령이 지금 막 역사하는데 어떻게 종교권력자에게 모든 걸 위탁합니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이 성령의 교통 안에 있는데 어떻게 모든 교리에 관한 판단을 종교권력자에게 위임하고 여러분은 그냥 멍하니 살겠어요? 총회장 뽑아놓고 주교 뽑아놓고 교황 뽑아놓고, 성령이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시대인데, 이게 바로 구원의 시대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해 120문도가 다 같이 성령 받고 더 이상 어떤 타율적 기구에 의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깊은 자발성으로부터 하나님께 순종을 일삼는 시대가 왔는데, 종교권력을 켜켜이 쌓아놓고 종교권력자들의 매개, 중보의 역할에만 의존하여 하나님 만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각성된 개인이 되고 각성된 자유인이 되어서 하나님께 직접 equal belong, 똑같은 소속감을 가지고 친밀감을 가지는 시대가 되었는데, 어떻게 종교권력이 역사에 오랫동안 지배를 하면 안 되잖아요. 저는 모든 종교권력이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대적자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종교권력의 한편에 속하면 내가 예수님의 시퍼런 진리를 어딘가를 훼손하면서 가담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시퍼런 진리는 예루살렘 가말리엘 신학교 출신의 랍비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기개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똑똑합니까? 역설적으로 학교 안 다녀서 똑똑합니다. 예수님 말하는 것 보세요. 너무 놀랍습니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엄청 놀랐다는 뜻입니다.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토라를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쉽게 말해 학교 안 다녀서 똑똑하다, 이런 뜻과 같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때 오는 예기치 못한 신적 상상력의 감수성이 꽃이 핍니다. 전 여기서 내가 학교를 너무 오래 다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기탄없이, 이렇게 명료하게 배운 것처럼 잘 가르치느냐?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5분 동안 무얼 가르치는 건 숨이 막혀서 못합니다. 일단 무리 앞에 서면 한껏 쫄아서 아무 것도 안 됩니다. 그 사람을 가르치고 시선을 끌어가면서 계속 5분 동안 10분 동안 집중시켜서 끌어가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 필요한 겁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어떻게 성경을 아느냐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직접 도제식으로 11로 양육 받았습니다. 이사야 50 4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하나님 메시아 1 1 양육스쿨, 예수님은 가내수공업적인 도제수업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직접 배우는 장면이 어떤 장면일까? 예수님은 하나님께 무얼 어떻게 배웠단 말인가? 인간 스승 없이 홀로 터득하고 깨우쳤단 말이거든요. 예수님의 엄청난 지혜와 지식이 인간교육의 산물이 아니거든요. 산상수훈을 보면 구약의 시편 예언서를 너무나 완벽하게 요약했습니다. 전 산상수훈을 보면서 어떻게 구약의 메시지를 이렇게 완벽하게 요약하셨나 할 만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런 예수님의 말씀들,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교훈입니다. 지금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 두 번째로 그러니 회개하고 하나님 아들 예수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통하여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 실재를 받아들여라, 지금 귀신들린 자를 쫓아내고 병든 자를 회복시키고 지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런 엄청난 태풍 같은 사태, 하나님의 나라를 입증하고 받아들이라, 이게 교훈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 나라 교훈입니다. 하나님 나라 교훈은 랍비스쿨에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전통과 계몽학적 차원, 서기관 스쿨에서 배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매일 학교교육으로부터 배제된 예수에게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졌던, 기도 중에서 깨우진 것이고 명상 중에 깨우친 것이고 일상생활과 순종 속에 깨우쳐주신 가르침들입니다. 하나님 나라 교훈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거거든요. 하나님 나라 교훈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즉 하나님이 예수님께 위탁한 메시지입니다. 전 이걸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어떻게 인간에게 전면적으로 회개를 요구하고 인간의 삶의 기초를 처음부터 재구성하시려고 하시는 엄청난 총체적 요구, 전면적 요구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어요? 석가모니나 공자의 요구, 공자의 요구는 너무나 불친절하고 매우 피상적입니다. 하나님 요구, 우리 모두가 제각기 길 잃은 양이다, 우리 모두 회개해야 한다, 모든 인류가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교훈의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입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조금씩 있었습니다. 마음을 닦아라, 각성하라, 네 영혼 속으로 들어가라, 범 브라만 사상, 힌두사상, 뉴 에이지 사상, 네 내면 속에 있는 신의 불꽃을 찾아라, 범 브라만 사상이고 인도사상입니다. 범 브라만 사상 인도사상 뉴에이지 사상에서 한 걸음 나간 것이, 네 안에 있는 욕망의 불꽃을 꺼라, 그러면 신성의 불꽃이 타오르리라, 이것이 석가모니입니다. 그럼 공자는 무엇입니까? 네 안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교육을 통하여 닦아내라, 극기복례 수기치인하여라, 너의 도덕적 자아를 완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수행하고 수도하여라, 이것은 공자와 이황과 이퇴계가 주장한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뭐라고 주장했습니까? 사유재산에 대한 집착을 포기해라, 사유재산에 대한 집착이 모든 인간 불평등에 대한 기원이 된다, 사유재산을 처분하고 인류의 몸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런 것이 칼 마르크스와 루소 같은 사람이 한 주장이죠. 아무도 하나님과 우리의 중심이 이탈돼서 이 모든 사태가 왔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중심이 이탈되고 우리 척추가 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직립 보행할 수 있는 척추가 부서졌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다고 말한 분이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원래 구약성경밖에 없었고 그 구약성경의 핵심을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실현했기 때문에 예수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죠. 예수님의 주장은 인간의 종교적 성인과 철학적 요구가 꿈도 꿀 수 없는 급진성이고 끊임없는 부단한 요구입니다. 이건 창조주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 교훈을 실천해보면 예수님 말씀을 순종해보면 그 요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걸 안답니다. 안식일 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 살인하지 말라,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런 계명을 순종하러 애를 쓰다 보면 그 순종의 결과를 맛보고 나면 정말로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준 계명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의 계명은 학교에서 배운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추동하신,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계명입니다. 제일 중요한 건 순종과 실천입니다. 순종과 실천해 본 사람의 지식이 자랍니다. 순종과 실천해본 사람의 성경확신이 더 강합니다. 순종과 실천을 통해서 획득되고 확신된 성경구절이 힘이 더 있는 겁니다. 누가 우리 스승입니까? 목사는 우리의 스승이 아닙니다. 많이 순종한 사람, 많이 실천한 사람이 우리 스승입니다. <긴 외로움 the long loneliness> 라는 책이 있습니다. 도로시데이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이 책은 복 있는 사람에서 <고백>이라고 번역됐습니다. 그 책을 보면 일상생활에서 순종을 일삼고 진리 실천을 위해서 너무나 굳은 확신으로 살아가게 된 위대한 농부철학자가 나옵니다. 피터 모린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순종과 실천을 통하여 교황과 주교보다도 누구보다도 강한 확신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농부철학자 피터모린은 하루 종일 신부님 집에서 일해주고 받은 월급이 신부님 서재출입권입니다. 신부님이 읽지 않는 엄청난 책들, 철학책부터 성경과 아모스 예언서, 신부님들은 들어보지 못했던 성경구절을 이분이 꿰뚫습니다. 이분이 일리노이아 대학교 중퇴했던 여기자 출신 도로시데이라는 자매를 만나서, 나이가 26살 차이가 납니다. 도로시데이라는 사람에게 강력한 영감을 줘서 1932년에 5 1일에 캐서린 노동자라고 하는 50센트짜리 신문을 만들어서 대공황기에 절망에 빠진 뉴욕시민들을 건져내기 시작합니다. 장엄합니다. 도로시데이, 마더 테레사보다 더 엄청난 일을 합니다. 이 도로시데이에게 끊임 없는 영감을 준 분이 피터모린입니다. 이세종 이현필 함석헌 유영모 , 이런 분들은 전부 다 실천해보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함석헌의 기독교, 원래 전래 토착기독교, 오랫동안 순종을 통해서 검증된 기독교입니다. 순종과 실천을 통하여 이 진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리라는 확신이 강하게 드는 사람들은 힘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절대로 허공중에 흩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끌어 모으는 힘이 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고, 사람으로 하여금 모방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저는 진실에 있다고 봅니다. 순종의 진실,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믿고 살아본 경험의 누적된 확신들, 이것이 저는 예수님을 서기관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자 같은 자, 권세 있는 새 교훈으로 예수님의 교훈을 불리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나님 타령하지 마라,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나타나려면 네 순종을 통하여만 하나님 전능이 일부 나타난다, 네가 많이 순종할수록 네가 많이 실천할수록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역사하는 힘이 커진다, 그걸 알려준 겁니다. 기독교 형이상학으로 변질될 수 있는 신학,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그야말로 형이상학적 수사학에 불과할 수 있는 언어들을 실재가 되게 만들어주죠, 순종함으로, 실천함으로,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이 마음씨가 좋은 분임을 알려줬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직접 맛보게 해줬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뜻을 행하여 보았습니다. 행하여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교훈이 예수님을 통하여 파생될 때 엄청난 힘을 발휘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설교집을 가지고 그대로 설교한 시골교회 목사님이 교우들한테 왜 그렇게 설교를 못하느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똑같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1955 -1967년 설교는 엄청난 설교입니다. 한경직 목사 설교 한 번 읽어보세요. 그 설교가 대단하다는 것은 단순히 원고에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원고도 좋습니다. 시골목사가 교우들한테 너무 설교 못한다는 말을 듣고, 이 설교는 한경직 목사 설교 원고를 그대로 한 건데요, 똑같은 설교를 가지고 한경직 목사님은 2만 명 3만 명에게 감화시켜서 엄청난 인재를 배출할 때 시골목사님은 왜 그랬을까요? 한경직 목사님 같은 진실과 순종의 누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말하니까 감화력이 전혀 없는 거죠.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정보를 많이 갖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정보를 많이 아는 지식은 쓸 데가 없어요. 많이 알수록 지식이 지식을 무효화시켜버립니다. 저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칭찬하지 않고 올바른 책, 읽어야 할 책을 읽는 것을 칭찬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깊이가 없고 경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읽어야 할 책을 깊이 읽고, 지식과 정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확신과 인격으로 변화된 확신이 많은 사람들이 감화력이 있는 거거든요. 민주주의 좋다는 것을 실천을 통하여 안 사람과 책을 통하여 안 사람과는 차이가 있거든요. 여러분 청년 때는 무얼 해야 할까요? 물론 청년 때만 해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신적권위를 확신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말씀대로 순종해 보는 연습이 너무 필요합니다. 순종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일상생활 전체가 말씀의 순종연습, 우리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을 거들먹거려서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고, 자기 특권과 이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독창적으로 말하는 자, 자기 사상인 것처럼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을 구합니다.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자기 영광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예수의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나를 보내신 이의 교훈이다, 나를 파송하신 이의 뜻이다, 라고만 했습니다. 자기 부인 자기 은닉 자기 감춤, 우리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이 완전히 성령에 사로잡힌 분이었다고 믿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 엄청난 겸손 때문에, 그래서 저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를 봅니다. 저는 예수님을 볼수록, 예수님을 높일수록 하나님 아버지를 봅니다. ?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를 인도했습니다.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내 스스로라는 말은 유대인 팔레스타인 농부 목수 예수, 마가복음 6장에서 말한 외모로 판단한 예수, 너 갈릴리 출신인데 부모 우리가 아는데, 너 목수지 않아? 형제가 두둑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외모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외모로 판단한 예수가 아니라 공의로 판단한 예수, 하나님 영에 사로잡힌 예수를 우리가 믿는 거죠. 저는 우리 모두가 일주일 내내 하나님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확신이 더 깊이 들수록 일생을 투신하는 힘이 커진다고 보거든요. 저는 청년 때 급진적 전향과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됨을 입증하는 순종의 실험, 실천의 실험에 여러분 모두 이바지하기를 원하고 동참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학교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과감한 영감, 말할 수 없는 확신을 가졌음을 부러워하고 사모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은 외모로 판단을 받으셨을 때는 사람들의 실망을 샀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가슴 가득 찬 진실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예수님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교훈이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교훈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하여 순종해보고 실천해보라고 권유했습니다. 주님 순종과 실천의 모험에 우리 일생을 바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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