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1부 예배 - 요한복음 7:1-9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한 번 올라가셔서 올라가신 그 해에 장렬하게 십자가에 처형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예수님을 3년 동안 사역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최소한 세 번 정도는 예루살렘 유월절에 가셨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2장 13절에 보면 처음으로 유월절 명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7장에 보면 초막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이 유대인의 명절에 관해서 이렇게 몇 번씩 이야기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1년 만에 끝난 것이 아니라 아마도 3년 정도 계속되었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6장 4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이라고 할 때, 2장 13절, 6장 4절, 그럼 벌써 두 번이죠? 그런데 만일 이 사건이 같은 사건이라면 한 번이죠? 그런데 문맥상 같은 사건처럼 보이지 않고 다른 사건처럼 보입니다. 6장 4절-7장 2절은 두 개의 유대인의 명절에 끼어 있습니다. 6장 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디베랴 바다 건너편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유월절에 안 올라가신 거죠. 한 번은 유월절에 올라가신 것, 한 번은 안 올라가신 것, 마지막에는 유월절에 올라가시죠? 최소한 세 번 간 거죠. 2장 13절 유월절 한 번, 6장 4절 유월절 한 번, 이때는 안 가셨어요.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유월절에 식사를 하셨기 때문에 적어도 복음서에서는 유월절을 세 번 지내신 거죠. 6장 4절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 말고, 유월절은 유대인 달력으로 1월 14일이거든요. 우리 달력으로 말하면 3월 중순 정도 됩니다. 3월 20일 경, 요즘 로마 줄리우스 시저의 태양력에 따르면 3월 중순 이후, 유대인 달력으로는 닛산 1월 14일입니다. 초막절은 우리나라 달력으로 10월 유대인 달력으로 7월입니다. 그러니까 6개월 내지 7개월 간격이 떨어져 있는 것이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느슨한 연대기 틀 안에 배치를 하기 때문에 유월절이나 초막절이란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6장 4절에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순식간에 상기시키는 오병이어의 기적, 즉 하늘의 만나를 먹는 사건을 일으켰죠. 이건 유월절 이야기의 연속이야기니까, 유대인의 명절에 유대인을 위해 올라가지 않은 그분께서는 이방인의 동네에서 이방인들을 상대로 유대인이 경험했던 출애굽과 같은 사건, 하늘의 만나를 먹는 사건을 일으켰어요. 그러면 이 기간 동안에 6장 4절에 나오는 그 유월절은 우리나라 줄리어스 시저 태양력으로 3월에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오늘 본문은 10월에 일어난 사건이에요. 7개월 동안 예수님은 어디 가셨을까요? 7개월 동안 예수님이 가셨을 법한 지역이 마가복음 7-9장에 나오는 갈릴리 북부 지역을 순회하는 사역이라고 보면 됩니다. 마가복음 7-9장에 보면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7장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이 본문이 번역이 약간 그래요. 예수께서 갈릴리를 주유천하하시고, 이렇게 해야 해요. 이 본문과 마가복음 7-9장에 나오는 갈릴리 북부사역,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민중과 떨어져서 이방인 지역까지 감히 진출하는 사역이 7장 1절에서 갈릴리를 주유천하 하셨다는 표현에서 커버가 되는 거죠. 요약하자면 예수님의 3년 공생에는 어디서 나온 이야기입니까? 마가복음 읽어보면 나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예수님께서는 최소한 두 번 유월절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한 번은 안 가셨습니다. 그래서 대체로 느슨한 연대기 안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한 게 요한복음이라는 것을 보시면 됩니다. 7장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괄호하고, 더 자세히 알기 원하는 사람들은 마가복음 7-9장을 보시오, 라는 각주가 붙어 있는 겁니다. 갈릴리를 주유천하 하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갈릴리 북부지역을 주유천하 하시면서 주로 이방인을 상대로 사역하신 까닭이 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언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까? 요한복음 5장 18절에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마지막 선언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읽은 본문 중에서는 5장 18절이 가장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 주장하고,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됨으로 여기는 것 때문에 죽이려 했다, 이 말은 진실이지만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진실입니다. 빌립보서 2장 6-7절을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라고 돼 있는데, 어쨌든 유대인들이 보면 이런 예수님의 화법이 너무나 도발적이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안식일 범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보통의 이유, 예수님을 죽이려는 더 긴급한 이유,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불렀느냐? 그 당시에 유대인 중에 아무도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 부른 사람이 없었어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뭐라 불렀을까? 아비누 엔 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Our father in heaven, 이것이 유대인들이 부른 방법이에요. Our father 라는 말은 우리 열조들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렀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할 때마다 아바 아버지라 불렀어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똑같은 관계성, 그럼 언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이런 독특한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돈독하고 신실한 결속이 생겼냐? 마가복음 1장 9-10절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절 오네 보거토스 엔테 에네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쉬 에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독특한 말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독생자 의식을 심어줬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식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일원으로 계시다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던 관계성이 심화되고 발전되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아버지가 특별히 사명을 주셔서 내가 어떤 특별사명을 수행할 때는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내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것이 가능하거든요? 예수님의 독생자 의식은 요단강 세례 받을 때 일어났다, 예수님의 독생자 의식은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마가복음 1장 11절에 나오는 그 선언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자기에게 구사할 때 특권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무한책임적인 사명수행, 하나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종의 자세를 강조할 때 그때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쓰더라도 우리를 심각하게 주목하지도 않고 우리를 죽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아들이라 주장해도 우리를 죽일 사람이 없어요.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런 개인기도 없고 사람을 고칠 능력도 없고 사람의 눈을 집중시킬 만한 어떤 spectacular한 이슈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독생자 의식을 가져도 세상은 우리를 방치해버려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했을 때 말만으로 이렇게 했다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사건을 일으키시고 기적을 일으키시고 유대인들의 종교적 토대를 허무는 엄청난 도발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이 말은 유대인들의 종교적 기초를 허무는 무서운 태풍 같은 말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한국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세상의 기초를 허물어뜨리는 거룩한 도발이 우리에게는 없거든요. 우리는 이 죄 많은 세상에게 어떤 위협적 존재가 안 돼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을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단순히 주장일 뿐만 아니라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고, 유대인의 종교적 기초, 유대인의 은총이 없고 율법의 강요만 통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을 보이라고 강요하는 무시무시한 솔제니친의 수용소적 압제적인 분위기와는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의 핏빛 사랑의 진실을 무차별적으로 개방하시고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건을 창조하시는 이런 주장이었어요. 그런 주장만이 예수님을 적개심으로 몰아가는 거거든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아들이라는 주장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한 공격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독생자, 독생자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산다, 이건 굉장히 이 세상 사람들에게 놀람을 안겨주는 사건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는 집단적 공동체적 자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그건 너무나 놀라운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날 그러지 못합니다. 5장 18절 그 말씀 때문입니다. 7장 2절을 굳이 논문 식으로 보면 이렇게 된 겁니다. 5장 18절 이후 보세요, 연결됩니다. 이렇게 돼 있어요. 5장 18절 이후 예수님을 죽이려 한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독특한 주장과 총체적인 도발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갈릴리 주유천하는 왜 일어났습니까?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자기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그 때를 위하여 자기가 죽을 때를 지금 조정하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뜻이었습니다.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7장 1절과 2절 사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7개월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7개월이 지난 후 또 다시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이때 3-5절까지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육친의 동생들 골육지친들이 예수님께 약간 자극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 자극적인 말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유대로 올라가서 승부를 던지십시오, 정면승부를 하십시오, 갈릴리로 피해가지 마십시오, 형 갈릴리로 잠적하지 마, 형은 분명 큰일을 하려고 하잖아, 큰일을 하려고 하는 형이 숨어 다니는 것은 옳지 않아, 갈릴리에서 더 이상 피하지 말고 유대 예루살렘 올라가서 정면승부를 던져봐, 근고1초의 승부수를 던져봐,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살든지 죽든지 유대인을 굴복시켜서 항복하여 예루살렘 일대를 장악하든지 말든지, 일종의 근고1초의 승부수를 던지라고 형제들이 말합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당신이 행하는 일’은 마태복음 11장 2-5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한 일을 요약합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 보겠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이 예수님이 한 일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종교특권을 가진 종교권력자와 로마제국 당국자에게 협조하는 시민들이 살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이 사역의 대상이 없었어요.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이사야 35장이 말한 그 모든 메시아 시대 때 기적이 다 일어났다고 봐야 해요. 이사야 35장이 그걸 예언하거든요. 메시아가 와서 이 땅에 사역을 펼치시면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가난한 사람이 좋은 정치사회가 온단 말이에요. 이것이 예수님이 한 일입니다. 이것과 똑같은 말을 사도행전 10장 38절에 고넬료 집에서 한 베드로 설교가 약간 다르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낸 사건은 여기에 포함돼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쫓아낸 사건도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보통 예수님이 한 일은 마태복음 11장 4-5절과 사도행전 10장 38절이 가장 핵심적이라고 본 거죠. 지금 당신이 한 이 일을 갈릴리 일대에서만 하지 말고 예루살렘과 정면승부를 피하지 말고 이 일을 예루살렘에 가서도 하소서, 그래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조금 있으면 유다가, 가롯 유다 아닌 유다가 또 예수님께 이걸 요구합니다. 14장 정도에 가면, 세상에 나타내 달라고 말한 것은 당신의 정체를 제자들에게만 소곤대듯이 말하지 말고 당신의 이런 능력을 예루살렘에 가서 다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서 이런 것을 행하면 사람들이 믿을까요? 이런 표적을 예수님의 적대자들 앞에 가서 행하면 적대자들이 고분고분하게 들어옵니까? 아닙니다. 적대자들은 이런 표적을 보고도 듣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찾아올 때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 요한복음 2장 23절에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그들의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표적 때문에 믿는 그걸 참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그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다, 말하거든요. 그 중에서 예루살렘에서 행한 표적을 보고 예수님께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 니고데모가 요한복음 3장 2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시는데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매우 호기심어린 표정 + 귀신 들린 자 반응 두 가지밖에 안 나왔습니다. 이건 너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이적을 행했더니 귀신 들린 자 또는 miracle maker, 예수님을 그들의 종교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자로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어요. 메시아로 믿을 만한 가장 근접한 사람이 니고데모였어요. 마태복음 11장 4-5절, 사도행전 10장 38절의 표적을 예루살렘에 가서 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이런 표적을 만인 앞에 가서 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예수님의 정체,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누가 믿겠느냐? 안 믿는다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세상이 나가서 더 공공연히 이런 표적을 행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표적을 보고 설복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사랑을 보고 표적 없이 믿는 믿음을 참 믿음으로 봤지, 표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네가 메시아인가 보다, 라고 믿는 믿음은 하나님 나라를 구성할 때 필요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 표적이 없으면 안 믿는 거 아닙니까?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항복이라고 봅니다. 맥아더가 일본 왕을 항복시켰죠? 맥아더가 일왕을 항복시킬 때 일본 사람의 항복은 미국의 원자탄 때문입니까, 미국의 선함 때문입니까? 미국 사람의 인격에 대한 복종이었어요? 원자탄에 대한 두려움이었어요? 우리가 표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으면 신적위력에 눌려서 믿는 거예요. 표적을 통한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통한 믿음,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을 통해서 믿는 믿음은 하나님 핏빛 사랑의 진실을 믿는 거예요. 십자가의 무능력 속에 나타난 하나님 사랑, 저렇게 자기를 보호하시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주신 무능력을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 사랑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거든요. 여러분 교제할 때 형제 또는 자매의 능력을 보고 믿으면 그 능력이 없어지면 믿음이 없어져요. 여러분, 능력은 최초에 관심을 유발할 때는 괜찮지만, 인격의 중심과 사랑의 중심에 비해서는 능력은 신뢰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물론 최초로 관심을 유발할 때는 괜찮아요. 능력 개인기 괜찮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과 개인기를 가지고는 신뢰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사랑의 진실입니다. 결혼할 때 보면 대개 형제들은 믿어버리면 끝까지 갑니다. 무감각하게 가는데 자매들은 마지막 한두 달 앞두고 극심하게 요동치며 작살 맞은 고래처럼 혼돈합니다. 어떻게 하나? 갑자기 불안에 빠지고, 결혼 한 두 달 앞두고 결혼 상담을 다시 해요. 이 결혼이 맞는지 모릅니다. 제가 며칠 전 그런 상담을 했는데, 그게 자매들 마음에 있어요. 저는 그게 나쁘지 않습니다. 정말 자매님들은 형제들보다 훨씬 더 결혼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요동치는 마지막의 창조적 불안, 저는 이해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능력을 통해서 일어난 능력,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일어난 지혜, 이것이 우리 이성으로는 순식간에 넘어지는 자리인데 우리가 이성적으로 넘어지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총의 계시인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진실을 보여준 거예요. 김회권 속지 마라, 저 무능력이 하나님 능력의 절정이고, 저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방법이 하나님 지혜의 절정이다, 김회권 절대로 혼돈하지 마라, 이렇게 격려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을 믿는 거거든요. 그런데 제자들은 믿지 않아요. 믿지 않는 사람 특징은 능력을 보고 믿으려는 사람이에요. 핏빛 사랑의 진실을 믿지 않고 무능력을 통해 드러난 사랑의 진실을 믿지 않고 어리석음을 통해 드러난 십자가의 지혜를 믿지 않고 지금 모든 세상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항복시키는 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을 항복시켜서 사람들을 지배하라고 주장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항복시키면 지배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감동시켜서 교제하는 것, 교제로서의 믿음과 항복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따라가는 것은 다른 거예요. 일본은 맥아더에게 항복했어요. 일본은 맥아더에게 항복을 했을 뿐이지 믿음의 교제를 한 게 아닙니다. 우리도 여기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면 믿어는 주겠는데 기분은 나쁘다, 이렇게 하면서 믿는 거예요. 그건 표적을 항복을 통해서 접수되는 것이고, 내가 전인격적으로 교제를 통해서 믿는 게 아니란 거예요. 예수님은 내 때, 능력을 보여서 사람을 항복시킬 때가 임한 게 아니라 내 무능력을 통한 십자가의 어리석은 패배와 죽음을 통하여 내 하나님 사랑의 진실을 드러낼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바로 올라가서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 적개심이 고조된 때에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되기 때문에 안 간다고 하신 거예요. 참 희한해요. 분명히 안 간다고 하셨죠? 예수님이 분명 안 간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강력하게 충동해서 가게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 예수님 동생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인상비평을 한 거예요. 제자 동생들이 항상 이렇게 한 것 같아요. 예루살렘 일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 끌고 가야 할 텐데, 이런 엄청난 비전에 사로잡혀 있는 걸 보고, 숨어서 갈릴리에서 하고 있어요. quotation mark 하세요.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 예수님에 대한 동생들의 평가입니다. 예수님의 인상이 굉장히 나타나기를 열망해서 뭔가 큰 비전에 사로잡혀서 말씀도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왜? 제자들이 이걸 아는 것을 보면, 그런데 그때마다 제자들은 약간 빈정대요. 동생들도 빈정댄 것 같아요. 이렇게 큰 웅대한 비전을 말하면서 왜 묻혀서 일하냐고,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 구한다는 말은 열망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열망하면서도 묻혀서 일하는 사람인데,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세상에 나타나서 당신이 베풀었던 엄청난 이적으로 굴복 시키소서, 맥아더가 일본 왕을 항복시키듯이 항복시켜서 그들을 무찔러서 그들을 지배하소서, 맞습니다. 능력은 항복지배입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항복시키고 지배합니다. 너무 능력차이가 많은 사람과 결혼하면 안 됩니다. 지배당할 가능성이 높아요. 너무 가난한 사람이 부자와 결혼하면 굉장히 지배받기 쉽습니다. 소득 차이가 약간 나야지, 능력으로 감동되면 지배받기 때문에 능력에 지배받지 말고 상호매부, 간단간단한 무정부 상태의 교제를 유지해야만 존경을 유지하는 겁니다. 남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나타내소서’ 능력으로 당신의 적대자들까지 감화감동시켜서 굴복시켜서 당신이 지배하소서, 이런 뜻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5절에 각주가 들어갔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가 하나님 독생자임을 믿지 않았다,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성자, 종의 모양을 갖춰서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 뜻을 행하는 그 독생자임을 그들은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독생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능력이 많아야 하나님 일을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합니다. 핏빛 진실로, 진실이 가득 찬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합니까? 끝까지 진실한 사람입니다. 직분과 직책의 고하에 상관없이 삶이 진실하고 인격이 진실한 사람이 결국은 능력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가 파송한 독생자임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장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이 능력자임을 믿는 것,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엄청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찬송할 때 잘 보세요. 그때 저는 안 하고 있어요. 그런 가사는 제가 찬송 안 합니다. 온누리 찬양 중에서 많은 경우가 예수님의 능력이 많은,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을 포함해서 능력이 많은 분으로 찬양하는데, 그건 미국 사람과 매우 맞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군사적 무력이 충만한 분이 아닙니다. 사랑이 충만한 분이고 진실이 충만한 분이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충만한 분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진실이 가득 차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다는 독생성자 의식이 가득 차서,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독생성자일까요? 마가복음 1장 10-12절, 세상 모든 죄를 자기가 뒤집어쓰고, 이 죄를 자기가 뒤집어쓰겠다고 결단하고 이 시대의 죄 문제를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독생성자급 의식을 가진 사람이거든요. 왜 우리 한국 사람이 부자들을 존경 안 합니까? 부자들 중에서 모든 기업들 갑부들 그들의 죄를 대속하는 참 부자, 그들의 모든 잘못을 십자가에 산화하는 멋진 부자가 나와야만, 부자들의 죄를 대속하는 독생성자급 부자가 나와야 하고, 독생성자급 목사님이 나와야 하고, 독생성자급 교수가 나와야 하고, 독생성자급 교사가 나와서 직분에 있는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쓸만한 거룩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야만 부자에 대한 존경심이 회복되고, 교수에 대한 존경심이 회복되고, 사장님에 대한 존경심이 회복된단 말이에요. 목사님도 독생성자급 목사님이 나와야 한단 말이죠.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어떤 때? 죽기까지 복종하는 때, 내 옆구리에서 붉은 포도주를 쏟아낼 때, 요한복음 2장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와 똑같은 본문이 요한복음 19장 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물과 피를 요한1서 5장에서는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새 포도주를 쏟을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내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은 내가 밝히 내 정체를 드러낼 때가 오지 않았다, 언제 내 정체가 밝히 드러나는가? 표적을 행할 때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순종을 완성할 때가, 내 순종을 통해서만 하나님 자녀임을 증명한 것이다, 이런 깊은 뜻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 우리가 불교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관직을 차지하고 기독교인들이 훨씬 국회의원이 많이 되는 겁니까? 기독교인 축구선수들이 훨씬 골을 많이 넣는 것이 하나님 능력을 드러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훨씬 손해를 많이 감수하고 우리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낼 만큼 더 많은 진리에 복종하는 그때가 우리 참다운 정신을 세상에 알리는 때거든요. 우리 기독교임을 언제 세상에 알려요? 우리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달릴 때, 우리가 무능력의 십자가를 질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가서 이 세상의 부조리를 짊어지고 가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붉은 피를 흘리는 우리 삶이 장렬하게 산화할 때, 김회권이 언제 참 목사임을 입증합니까? 김회권의 능력입니까? 감회권이 십자가에서 옆구리 피를 쏟을 때, 그때 김회권이 참 인간이고 참 목수이고 참 그리스도임을 입증합니다.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술 취한 사람에게 수 만 명의 사람에게 감동적인 설교를 해서 사람을 놀래게 만드는 것은 내 때가 아닙니다. 우리 때는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성자임을 입증하는 때는 언제입니까? 요한복음 19장 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3장 1절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요한복음 2장 4절, 이때는 무엇입니까? 내가 진짜 내 정체를 세상에 드러낼 때, 언제? 내가 진짜 조용기 목사가 진짜 하나님의 종임을 입증하는 때는 신유은사를 베풀 때가 아니라 조용기 목사님이 자기의 모두 가진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물과 피를 쏟을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독생성자급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진실이 누적된 삶, 진실로 가득 찬 삶, 진실로 순종한 사람이 제일 마지막에 쏟을 물과 피가 있습니다. 여러분 월급으로 진실한 삶을 살고 나면 제일 마지막에 진짜 후손에게 넘겨줄 거룩한 보혈을 흘리면서 이 세상을 끝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옆구리에서 예수님과 같은 물과 피가 쏟아져 그때 비로소 하나님 자녀임을 입증하는 그런 때를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우리를 드러낼 때가 언제입니까? 능력의 과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1장 4-5절이 아닙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게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서론입니다. 결론은 십자가에 못이 박힐 때입니다. 김회권의 모든 주장, 김회권이 쓴 모든 글과 모든 설교도 능력도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 자녀임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제가 죽을 때입니다. 제가 죽을 때 세상에 저를 드러내고 그때서야 하나님 자녀임이 입증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말한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엄청난 부담감, 예수님이 당신의 능력을 십자가에서 찾았다는 것, 즉 굴욕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것이야말로 큰 능력이고 당신의 정체를 일시에 세상에 알리는 것인 것을 알았다는 것, 너무나 깊은 뜻입니다. 저는 생각할수록 예수님이 너무 멋진 분이고 너무 아름다운 분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결론 맺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자녀임을 입증할 때는 개인기나 능력을 과시할 때입니까? 여러분이 감춰둔 진실을 드러낼 때입니까? 여러분이 억울한 말을 참으면서까지 형제를 끌어안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여러분의 정체를 드러냅니까? 막 다니면서 모든 걸 증명하고 당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면서 따지는 무시무시한 힘의 과시입니까? 아닙니다. 형제자매의 죄를 뒤집어쓰고 형제자매가 나한테 했던 모든 억울한 말들도 감수하면서 마침내 내가 그걸 삼키고 있을 때 어느 순간에 나에게 진실이 드러날 때 무능력을 통해 능력이 드러남, 진실을 통하여 드러남,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우리를 알리는 방법입니다. 세상에 기독교임을 알리는 방법이 무엇이죠? 십자가를 질 때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과 부족한 종이 많은 주장을 하고 많은 선전을 합니다. 저는 많은 책을 씁니다. 이 모든 주장과 행사가 우리가 하나님 자녀인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 우리 주님은 당신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십자가의 무능력의 순간, 굴욕의 순간까지 참고 참고 참으셨습니다. 주님 우리도 무능력의 십자가 굴욕의 십자가 자기비움의 십자가를 지는 그 순간에 우리 정체를 세상에 알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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