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2부 예배 - 요한복음 7:1-9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았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문맥을 모르고 있을 때는 그 뜻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읽지 않으면 이 뜻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그 후에는 복음서 기자들이 그 장과 다음 장을 이을 때 쓰는 일종의 이음새입니다. ‘그 후에’는 앞의 말과 특별한 관계가 반드시 있는 게 아닙니다. 메타타우타라는 이 말은 항상 장과 장 사이를 이을 때 쓰는 말로써 반드시 전후 문맥에 인과관계를 밝힐 필요가 없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문제는 6장 자체가 갈릴리에서 일어난 일이거든요. 6장 59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가버나움 회당자체가 갈릴리인데,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말이 안 되죠? 그러니까 말이 되게 읽으려면, ‘그 후에’ 라는 메타타우타라는 헬라어는 장과 장을 연결하는 하나의 이음수사법이다,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6장에서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장면이 안 나왔단 말이에요. 6장에서 안 나오면 5장으로 가야되죠. 5장 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이것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예수님의 도발적 주장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은 어느 시대나 도발적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적입니다. 전세계 만민과 동등한 거리에 있는 분입니다. 동등한 거리에 있고 동등한 사랑을 베푸는데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만일 나타났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자기를 특권적 관계 안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는 거죠. 하나님과 자기를 일촌관계로 묶어버리는 이런 말들은 굉장히 도발적입니다. 이 도발적인 예수님 언어가 유대인 공동체 종교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 공동체 전체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집단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친아들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친아버지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자기를 바꿔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르면, 혈연적 일촌관계로 자기와 하나님을 관련시키는 주장을 하면 일단 제명대로 못삽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기존사회에 대해서 너무 강력한 도발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먼저 공격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유대인 사회를 향해서 먼저 도발했어요. 예수님은 가만히 있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굉장히 공세적으로 유대인 공동체 기초를 허물어뜨리기 위해서 이런 주장을 했어요.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주장을 한 사람이 능력이 없다면 괜찮아요. 능력이 없고 도덕적으로 선량하지 않으면 더더욱 괜찮아요. 도덕적으로 불량한 사람들이, 망우리에 있는 10만 명 모이는 어떤 교회목사가 자기를 하나님 친아들이라고 하는 건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이 분명 도덕적 파탄자인걸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의 혈연적 하나님과의 친연, 가족적 혈연관계를 주장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마음씨가 엄청 착하면서 심지어 능력을 베푸시고 개인기도 많으시면 문제가 많아요. 예를 들어 38년 된 병자도 고치시고 실컷 좋은 일 하시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도 않으시고 잠적도 하시고 바람처럼 나타나시고, 이렇게 하면 매우 헷갈리는 거예요.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주장했을 때 그 명제가 매우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친 아버지라 주장하는 사람이 비특권적인 삶을 살거나 매우 보편적인 인류의 양심에 호소력이 있거나 심지어 개인기가 있어서 능력을 베풀거나 이럴 때는 문제가 됩니다. 제가 서울시에 을지로나 충무로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제 아버지라 해도 아무도 시비를 안 해요. 왜냐하면 내가 그 주장을 해도 일단 개인기가 없으니까,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르면서 을지로에 거지들을 깨끗게 하고 나병환자들을 낫게 하고 동성연애자들을 고쳐주고 이렇게 하면 몰라요.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르는 말이 유독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기 때문에 중요해요.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의 독생자이기 때문에 자기를 친아버지라 불러요.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안 부르면 유대인들은 어떻게 불렀는가? 유대인의 대표적 기도문 18복 기도문에 보면, 아비노 아비누, 우리 하나님 아버지, in heaven, 아비누 인 샤마임이 가장 많은 말이에요. 헬라어 기도문에 아비누 어 샤마임, 주기도문도 그렇게 시작하죠? 어는 in 이란 말이고, 샤마임은 하늘이고, 아브는 아버지입니다. 아비누 하면 1인칭복수,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데, 주기도문도 똑같이 시작합니다.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면서 너무 친한 것처럼 말을 하고 다닌 것은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이건 모세에게도 나타나지 않은 현상이고 예레미야 엘리야 누구에게도 이런 독특한, 하나님과 아버지가 거리감이 전혀 없는, 우리가 만유인력 배울 때 보면 끌어당기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Mm / r² 이잖아요. 만일 분모가 0이 되면 무한대의 힘이 생기는 거죠.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거리가 하나도 없다, 거리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분모가 0이 되니까 무한대의 능력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은 M이고, 예수님은 m이에요. 분모가 0이 되니까 엄청난 큰 능력, 이것도 물리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얼굴도 광채가 나고, 모세가 얼굴에 광채가 났잖아요. 40일 동안 금식기도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얼굴이 하얗게 되시기도 하고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감이 없을수록 강력한 에너지가 나오는 건 분명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우리가 거리가 매우 가까울수록 능력이 나타나고 감화력이 나타나는 건 분명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마가복음 9장에서 귀신들린 사람 고칠 때, 물에도 빠지고 불에도 빠지는 이 귀신들린 이 아이는 기도 외에는 나을 길이 없다, 그런데 기도가 금식이라는 말이 있어요. 기도와 금식까지 하면 더 능력이 나타나죠. 여러분도 신학공부하지 않고 청계산에 올라가서 계속 기도하고 금식하면 상당한 능력을 얻고 내려옵니다. 이변이 없으면 무언가 달라집니다. 40일 동안 기도할 만큼 직장에 휴가내기도 어려우니까, 또 능력이 많으면 힘듭니다. 능력이 많으면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우리에게 만일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면 우리 일상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친척들이 계속 고쳐달라고 하면, 여러분이 40일 금식기도 하면 실제로 능력자가 되어 내려옵니다. 분명합니다. 이변이 없으면 분명히 능력자가 돼 내려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우리가 가깝게, 정말 거리의 분모가 작아지면 능력이 커집니다. 예수님은 진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 되고 하나님은 친 아버지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하자마자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손을 잡고 일으키자마자 능력이 나타나고, 문둥병자와 귀신들이 깨끗해지거나 정결케 됩니다. 아무도 이런 경지까지 간 사람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라든지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누구의 병을 고쳤다는 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건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받지 않고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모든 인류의 성인들은 20-30년 동안 긴 수도를 했거나 적어도 보리수 밑에서 구년도 하고 석가모니도 공부도 많이 하시고, 공자도 공부 엄청 많이 하셨습니다. 공자도 자기가 intensive하게 공부한 게 15년이라고 했습니다. 주역을 3천 번 읽어서 책이 너덜너덜해졌다고 했거든요. 주역이 너덜너덜해져 주역의 책 페이지를 세 번 고쳐 맸다고 했으니까 공자도 엄청 공부를 많이 했고, 소크라테스도 엄청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약간 감화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18년 12-30세까지 목수 일을 하시고 정식학교를 다녀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부도 안 한 사람이 말을 너무 잘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런 분이 갑자기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나오니까 정규적인 이성으로 건축된 자, 이성과 교육의 힘을 믿고 있는 보수적인 전통사회에서는 예수님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르는, 마가복음 1장 11절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라는 하나님 말을 듣고 독생자의식을 갖고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다른 모든 종교 교주들과의 차이는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언급할 때마다 절대적인 자기부인의 맥락에서만 언급합니다. 특권의 맥락에서 언급하지 않고 자기무한 비움, 자기부인, 순종의 절박함, 그때만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친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다른 교주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한국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는 특권의 이름으로 언급해서는 안 되고, 무한한 자기책임 자기 비움 희생을 위한 결단, 그 맥락에서만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해야 종교 갈등이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불교인들과 이슬람인들을 하나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하나님 이름으로 핍박을 하고 하나님 이름으로 그들의 권리를 빼앗았습니다. 타종교인들에게 하나님 이름을 들어서 특권적 행위를 했습니다. 크롬웰은 하나님 이름으로 구교도들을 다 죽였습니다. 프랑스 가톨릭은 하나님 이름으로 위그노들을 다 죽였습니다. 힌두교 과격분자는 비쉬누 신의 이름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을 다 죽였습니다. 가장 사악한 자들이 자기 악행을 정당화할 때 신과 자기의 천연과 가족적 일촌관계를 도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 이름으로 자기를 다그치시고 자기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게 하실 때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보통 모든 종교인들의 맥락과는 다른 맥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이건 너무 아름다우신 분이고 너무 매력적인 분입니다. 예수님은 묵상할수록 아름다운 분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가진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버릴 분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가만히 음미하시면 아름다워서 끌려갑니다. 예수님은 너무 아름다우셔서 매료되고 captivated 끌려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무한한 자기부인의 맥락에서 불렀습니다. 강남에서 오렌지족 같은 부잣집 아들이 잡혀서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검사 경찰 욕하면서 명패를 집어던지는 난봉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 하나님 이름을 거룩하게 부르기 위해서 자기를 다그치실 때 자기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실 때, 아버지의 뜻에 복종한다 해서 그 길을 가신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너무 우습습니다. 형제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핍박했다는 것, 예수님이 평소에 굉장히 허황된 말씀을 많이 하신 것 같아요. 형제들이 볼 때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했던 것 같아요.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해야 할 텐데,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quotation mark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 이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볼 때 뭔가 일을 하고 싶은 욕망은 꿈틀거리는데 갈릴리 일대를 주유하면서 안 나타나신단 말이에요. 세상에 단번에 나타나시려고, 갈릴리 일대, 마태복음 11장 4-5절, 사도행전 10장 38절이 말하는 엄청난 능력과 기적을 예루살렘과 유대에 가서 나타내서 자신의 정체를 단박에 명백하게 부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타내주소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형제들의 요구가 너무나 우리 종교인들의 요구와 똑같습니다. 제가 옛날에 전도를 할 때 제 동료가 이런 말을 합니다. 회권아 그렇게 니가 나를 예수님 믿게 하려면 이 손가락을 떨어지자마자 붙게 해줘, 이렇게 저를 조롱했습니다. 기숙사 가동 204호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제가 너무 간절하게 전도하니까 이 손가락이 끊어져서 붙으면 내가 믿을게, 이렇게 저를 조롱했습니다. 저보고 손가락을 끊어서 붙이라는 겁니다. 제가 참 그러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에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 전도를 못한다는 마음이 너무 많았습니다. 내가 능력만 많으면, 그런데 우리 마음에 능력으로 내가 하나님의 종임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무능력자가 됨으로 능력을 과시하고, 어리석은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변증법적으로 극적으로 반전의 방식으로 드러내는 그 방식보다 당장 모든 사람을 이성과 양심을 가진 사람을 일시에 굴복시키는 방법으로 능력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나한테도 있습니다. 숭실대 채플에서 990명 중에 70% 가 자는데 이들을 확실히 깨우는 유머를 장전시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9월 28일도 걱정됩니다. 또 12번 설교해야 합니다. 매학기 12번 설교하는데, 너무 기분 나쁜 모습으로 아이들이 나를 맞이할 때, 그리고 가끔 앉아 있는 신실한 아이들이 들어오지 않고 기분 나쁜 아이들이 들어오니까 첫 마디가 나오질 않습니다. 제가 아까 계속 보는 게 9월 28일 12번 설교하는 겁니다. 아직 본문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내 마음이 초조해집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말씀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놈들을 일시에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360도 송판 10판을 격파해서, 능력에 대한 갈망, 김회권이가 세상에 하나님 복음의 정체를 드러내는 능력,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말합니다. 아빠가 30년 동안 피터지게 싸우고 뭐가 바뀌었어? 좀 드러내봐, 내 아이들이 나를 도전합니다. 참 난감한 상황입니다. 우리가 세상에게 나를 알리는 방법이 능력으로 사람을 굽질려서 이성과 양심을 송두리째 포로로 잡아서 나를 믿게 하는 방법, 이것이 더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설교를 잘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게 만들만큼 구변을 구사해서 내가 하나님 종임을 입증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고, 내가 십자가를 져서 죽기까지 복종함으로 자기를 내어서 십자가에 기대서 나를 패배한 자가 된 것처럼 이기는 자가 된 것, 이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도 세상에서 나가 표적을 향해서 맥아더가 일본 왕을 항복시키는 방식으로 어쩔 수 없게 나를 믿는 방식으로 나를 믿는 것이 내 뜻이 아니다, 내 사랑의 진실을 믿고 나를 어떤 환경에서도 내가 무능력한 하나님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를 믿어주는 믿음을 원한다, 이게 하나님 마음인 것입니다. 제가 아까 1부에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자매님들은 결혼하게 되면 예식장도 다 예약해놓고 결혼을 확정해놨는데 3개월 전에 갑자기 결혼 안 하겠다고 나서는 자매들이 있어요. 형제들이 갑자기 안 믿어진다는 거예요. 그 분의 능력이 안 믿어지고, 형제들은 대게 무덤덤하게 운명인가보다 하고 결혼해요. 자매들은 마지막 순간에 흔들리면서 혹시 나에게 second chance가 있지 않을까, 자매들을 상담해보면 그 심리가 너무 이해가 되고 너무 동정이 돼요. 우리가 사람의 능력에 끌리는 경우에는 내 이성과 양심을 산 채로 포로로 잡아갈 만큼 휘황찬란한 능력으로 나를 감화시키는 경우와 사랑의 핏빛 진실로 내가 지금은 일어설 때도 나를 믿어줄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과 내 능력에 매료된 채 나랑 결혼하는 차이는 엄청 큽니다. 우리는 능력으로 사람을 굽질려서 매료시켜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꼼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지배해버릴 정도로 나를 감화시키는 그런 능력의 과시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돈이 많기를 원하고, 그렇게 좋은 차가 있기를 바라고, 세상의 모든 광고가 능력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능력자만이 저 렉서스를 탈 수 있다, 저 렉서스를 탄 자만이 치마 펄럭펄럭한 미인을 태우고 갈 수 있다, 지중해 그리스 해변을 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차 값은 얼마입니까? 5천 2백만 원입니다. 그런 광고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멋있는 남자가 나옵니다. 저쪽에 처녀가 나옵니다. 오면 열쇠를 줍니다. 열어서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 지중해 해변에, 그게 남자들에게 얼마나 능력에 대한 갈망을 안겨줍니까? 그 능력이 돈이고 집입니다. 능력으로 네 정체를 밝혀라, 이런 제자들의 요구가 너무 세속적인 요구이고, 우리 안에 있는 종교적 권력자의 요구이고,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내 진실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식으로 나를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 나의 참 정체이고, 이것이 독생자의 이름이고, 내가 아버지를 부를 때는 내가 절대복종할 마음으로 불렀다는, 그게 바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내 때는 굴욕적인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표적으로 사람들을 굽질러서 항복시키는 방식으로 내 정체를 알려주고 싶지 않다, 나는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이 넘어지는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무능력한 그 예수가 주가 된다는 걸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나의 정체를 알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너무 역설이죠? 우리 안에 있는 능력에 대한 끝없는 갈망, 해결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해결이 된 것 같지만 해결이 안 되고, 여기서 저는 예수님 제자들도 이해가 되면서 예수님이 6절에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독생자 예수님이 안고 있는 이 엄청난 비밀, 죽기까지 복종한 그 길에서 독생자의 위력을 드러내는 비밀을 예수님은 홀로 간직합니다.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올라가지 못하겠다, 예수님은 당신이 올라갔을 때 당신이 표적을 행해달라는 요구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맥아더가 일본 왕을 굴복시켜서 항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이 미국 사람의 핵무기 능력에 굴복했지, 일본 사람이 미국과 사람과 영적교류단계에 들어가서 영생의 교제를 한 겁니까? 아닙니다. 일본 사람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이 미국 사람입니다. 핵무기가 영원히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여러분, 능력이 많은 사람을 존경하지 말고, 진실이 가득차고 하나님께 많이 고개 숙인 사람을 존경해야 하고 그 사람과의 생명교제가 중요합니다. 유명한 사람과의 생명교제가 중요하지 않고, 일상의 삶에서 주님께 복종을 많이 하는 진실이 누적된 사람이 성인입니다. 그 사람과 밥 먹는 것을 영광스럽게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오늘 이걸 가지고 왔습니다. 김회권 목사님, 10월 5일 조찬에 VIP로 초청 드립니다, 제46차 정기조찬 지난 9년간 목사님의 사랑과 관심이 있기에 건강한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목사님을 꼭 10월 5일 조찬에서 뵙기를 원합니다, 33인의 교수진이 정책자원으로 참여하는 우리 미래포럼은 한국교회의 think tank입니다, 그렇게 제 이름을 크게 써서 매번 이걸 보냅니다. 그런데 이걸 매번 받고 거절하는 이유는 서울 장충동 그랜드 앰베스트 19층 오피드룸에서 만납니다. 식사가 최소한 5만원입니다. 그래서 안 갑니다. 여기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훨씬 덜 유명한 사람이 나의 명함을 찾고 훨씬 덜 유명한 나랑 어울릴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나를 알아줄 때 내가 기분이 좋은 것이지, 이미 제가 공부했고 박사학위 받았고 청년들에게 영향이 있기 때문에 나를 여기 끌어들이는데 나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한 선교단체에서 저에게 메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예전에 강의하시면서 혹시 교제 원하면 오라고 하셨죠? 이화여대 학생, 그래서 오라고 했으니까 오세요, 했더니 그 학생은 오지 않고 순전히 교제하려고 온다고 했는데 오지 않고 신문기자하고 회지 기자하고 엉뚱한 사람이 왔어요. 사무적으로, 온다고 했던 그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했더니 그런 뜻이 아니라 목사님 인터뷰하려고 하는 겁니다, 돌려보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름 없는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려고 오라고 한 것이지, 내가 어떤 선교단체에 크게 사진 찍어서 인터뷰해서 나를 알리려고, 그런 방식으로 하려고 했다면 정식으로 공문을 보내야 한다, 여러분이 나에게 스스럼없이 신앙을 토론하고 제가 믿는 하나님 나라 신학에 대한 친교를 할 줄 알고 내가 오라고 한 것이지, 나에게 지도자로써 권면을 듣고 인터뷰하려고 사진카메라 기자까지 데리고 서너 명 왔어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돌아가십시오,. 밥은 물로 사먹였어요. 나한테 최초로 연락한 그 사람이 나랑 인격적 교제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나는 없는 시간을 냈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겁니다, 내 인터뷰는 이미 여러 곳에 있습니다, 그걸 보면 됩니다, 여러분께서 사무적인 것을 나한테 하면, 사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7천 원짜리 밥 사먹여서 보냈는데 그 뒤에 연락이 안 옵니다. 너무 놀란 것 같아요. 제 말은 진짜 누가 성자인가? 유명한 사람이 성자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독생자의 궤적을 따르면서 그런 방식으로 자기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더 큰 능력이 아닐까? 더 큰 표적은 무엇일까? 자기 부인이 더 큰 표적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의 표적은 삼일동안 흑암의 물고기 뱃속에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표적입니다. 굴욕을 참는 표적입니다. 굴욕을 참는 게 표적입니다. 여러분이 기분 나빴는데 기분 나쁜 말을 형제들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고, 카카오톡에다 욕하면서 죽을래? 쓰는 게 아니라 그 모든 비난을 받고 3년 후에 4년 후에 진실이 마침내 밝혀지는 것, 그래서 다 화해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독생자급 순종이고 그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내가 세상에 나의 정체를 알리는 것, 예수님이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당신을 알리는 것을 원치 않았겠는가? 그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는 것, 요한복음은 굉장히 깊어요. 제가 깨달은 걸 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저는 흥분이 많이 됐지만 설교 때는 제가 깨달았던 흥분의 반도 안 되네요. 나는 혼자 많이 깨달았는데 항상 하고 나면 반도 못한 것 같아요. 요한복음 전체가 늘 깨달아지는데 설교하고 나면 반도 안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론적으로 조용기 목사님이 세상에 당신이 하나님 종임을 증명하는 것은 신유의 은사나 기적이 아니라 그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기부인을 해야 합니다. 즉 십자가에 자기 몸을 박고 옆구리의 물과 피를 쏟아내는 자기 산화, 자기 비움이 감화 가득한 능력이 아니겠는가,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세상에 교회를 알리고 기독교를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여러분과 제가 세상사람 모두를 동시에 항복시키는 능력이 많지 않을지라도 겸손한 능력, 친구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참아내는 능력, 악성댓글로 보복하지 않는 인내, 부부사이에도 그게 필요하지 않겠나, 부모와 자녀사이에도 필요하고 직장 동료사이에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세상에 여러분이 기독교임을 알리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능력으로, 여러분 직분으로, 내가 과장인데 사장인데, 이런 식으로 알리지 말고 사랑의 진실로 여러분이 하나님 자녀임을 알리는 방식으로 한주 승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너무 아름다우신 분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감히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를 친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특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자기의 온 생애를 바칠 생각만 했다니,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고 심지어 공감하기도 힘듭니다. 이런 예수님의 찬란한 사랑 앞에서 우리가 참 초라해집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일시에 굴복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내가 가졌으면, 실력을 가졌으면, 재산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능력을 가졌으면, 모든 사람을 만민을 동시에 굴복시키고 믿게 만드는 설교의 능력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저런 능력에 대한 갈증이 많습니다. 주님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입증하고 싶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걸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늘 어리석은 자처럼 살다가 지혜를 드러내길 원하시고 능력이 없는 자처럼 살다가 능력을 드러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 저희를 도와주소서. 저희들이 이 방식으로 살고 싶지만 이 교회 문을 나가면 또 살기가 힘듭니다. 하나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우리 형제자매들 일주일 동안 강건하게 붙들어주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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