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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인자의 표적 - 요한복음 6:52-59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2부 예배-요한복음 6:52-59

(인자의 표적 - 떡을 먹는 기독교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기독교의 차이)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

 

요한복음에서 계속 반복되었던 단어를 사전적으로 정의했습니다. 영생, 인자, 이런 단어를 제가 정의했죠? 영생은 신령한 영적인 삶이란 뜻이 아니라, 즉 육신이 배제된 삶, 다시 말해서 기도하는 것, 찬송하는 것, 성경 공부하는 것, 이런 것을 우리는 신령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다음에 직장에 나가서 돈 버는 일은 육신에 속하는 일, 이렇게 이분법으로 많이 배웠죠? 그래서 신령한 일은 주로 기도하는 일, 이게 영적인 삶이다,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대중화시킨 하나의 논법입니다. 육신은 정신에 비해서 열등하기 때문에 영혼과 관련된 일을 하는 성직자는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육체로 일하는 노동자들 또는 농민들은 영과 똑같은 수준의 일이 아니라 그보다 열등한 일이다, 그래서 육신적인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런 이분법을 퍼트려서 가톨릭에서는 항상 성직자가 더 영적입니다. 왜냐하면 성직자는 항상 기도하고 말씀보고 찬양하기 때문에, 광부나 농부 식모는 전부 다 하급 열등한 일을 합니다. 마틴 루터가 이걸 뒤집었습니다. 하녀나 농부도 똑같이 신령한 일을 할 수 있다, 광부가 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고 신부가 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걸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영적인 삶이라고 하면 주로 노동하지 않고 찬양만 하고 거문고만 타면서 다니는 것을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은 그게 아닙니다. 일단 영생의 영은 길영 자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삶, 영원히 존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뜻이 영생입니다. 영생이 무엇인가? 영생은 영원히 존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인데 그 구조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네 몸을 돌보는 만큼 이웃도 돌보라는 뜻입니다. 이웃이 마치 네 몸의 일부인 것처럼 대하라는 뜻입니다. 이게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고 이웃을 적대자처럼 대하지 않는 것이 이웃 사랑하는 겁니다. 이웃 사랑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에게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것, 이웃에게 쓰임직스러운 존재가 되고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기는 힘듭니다. 이웃에게 전심으로 내 모든 것을 다 주기는 힘들지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 어렵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0 25절에 젊은 부자가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때 영생이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이때 영원히 지속되는 삶, 이런 뜻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상속할 수 있습니까? 상속한다는 말을 썼습니다. 차지한다는 말도 있는데, 클레로 노메오, 영어로 claim 주장하다 할 때 같은 말이에요. 클레로 노메오, 상속한다는 말입니다. 영생을 상속하다는 동사가 마태복음 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말도 똑같은 말입니다. 땅을 상속한다는 말과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이 같으니까 영생은 땅에서 사는 공동체 생활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사는 공동체 생활은 평화롭고 의롭고 적대관계가 해소된 공동체 생활,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의 구조를 보면 하나님을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네 온 마음으로 지성으로 힘으로, 네 마음과 지성을 다하여, 마지막으로 네 지성을 다하여, your intelligence 머리를 써서, 이런 말입니다. 머리를 써서 전문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 마음과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과 나누어지지 않는 힘과, 그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반심으로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주일 날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일단 6일 동안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속한 모든 생산수단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노동당하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에게 영향 받기 위하여 하나님만 하루 종일 생각하는 것, 안식일 하나님 사랑하는 표지입니다. 물론 그 마음이 아주 미세하게 요동쳐도 일단 육체가 교회 오는 것, 육체가 쉬는 것, 이건 일단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축에 들어갑니다. 분초단위로 네 정신의 초점이 잡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는데 혹시 나를 의롭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갖다 붙이는 것, 하나님은 내 진실을 아신다, 하나님만 나를 아신다, 이렇게 말하면 죄를 지었는데도 죄 좀 안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순간적으로는, 다시 말해서 거짓된 맹세를 할 때 하나님 이름을 가지고 쓸 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다, 헛되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할 수 없는 쪽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다, 하나님이 대답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개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을 헛되이 부른다, 망령되이 부른다, 하나님의 형상을 황소로 만들어놓고 황소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즉 돈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면 안 됩니다. 돈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가깝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가깝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즉 특정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이 네 가지를 하지 않는 것, 십계명의 1계명 2계명 3계명 4계명을 어기지 않으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지니라 간음하지 말지니라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이 다섯 가지를 하지 않으면 이웃 사랑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님께 용돈 드리면 해결됩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 기혼 남자에게 하는 2인칭 남성 단수입니다. 기혼 남자가 자기 아내 소박 맞히기 위하여 딴 사람 쳐다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아내랑 사이가 좋으면 대부분 딴 사람을 보지 않기 때문에 됩니다. 그러나 미혼 남녀들은 서로 쳐다봐야 합니다. 음욕을 품고 기혼남자가 쳐다보면 안 되지만 미혼 남녀는 음욕을 품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누가 매력적인가 막 쳐다봐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발생합니다. 자기가 아직까지 결혼도 안 한 주제에 처녀 보기를 돌 같이 보면 안 됩니다. 처녀를 처녀로 봐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서로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저하고 양 목사는 쳐다보면 안 돼요.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는 인신납치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인신납치, 노동력을 징발하기 위해서 사람을 납치하는 것은 고대에 엄청난 범죄였습니다.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이거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십계명을 분할하여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영생을 상속한다고 했습니다. 이걸 지키면 영생을 상속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지키는 것 자체가 영생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단련된 삶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영생을 또 다시 상속한다는 말을 논리학에서 동어반복이라고 합니다. tautology,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영생을 상속합니까?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영생을 상속합니다. 이 말 안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이미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 체질화돼 있고 습관화돼 있는 그 사람은 이미 영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영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영생을 상속한다는 것이니까 동어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절망적일 정도로 불가능하지 않고 너무 쉬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진짜 알기를 원하고 기도를 1주일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찬스를 줍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서, 하나님 소말리아 시에라리온 저들이 다 내 이웃입니까? 이렇게 빈정대면서 기도하면 이웃이 안 나타납니다. 그런데 진짜 이웃사랑이 무엇인지 하나님 저에게 기회를 한 번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면 순식간에 이웃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절대로 이 두 계명은 impractical 하지 않습니다. 비실재적이지 않고 너무 실재적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만 하나님 제가 이웃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연습하게끔 제게 이웃 주십시오, 하면 반드시 이웃이 나타납니다. 그때는 전화도 열어 놓고 핸드폰도 열어 놓고 이메일도 열어놓아야 합니다. 반드시 이웃이 나타나서 내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내 삶의 바쁜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도록 신호가 반드시 들려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할 사람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전혀 안타나난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 자녀가 아닙니다. 이 계명을 보고 빈정대면 벌써 그건 안 됩니다. 진짜 하나님이 실현 가능한 명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실현 가능하고 귀납적이고 누적적이고 일상적으로 가능한 계명이라고 믿으면 이 계명을 지킬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한 번도 이 계명이 나에게 비실재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웃 사랑할 찬스가 정말 많습니다. 학생이 제 이웃입니다. 학생은 불안의 신음소리를 내는 20대입니다. 이들은 정말 도와야 할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미국 코스타에 갔을 때 7 1-6일까지 한 시도 쉬지를 못했습니다. 1200명의 대학생이 왔는데 아침 일찍부터 밤 11 40분까지 어떤 날은 1 15분까지 계속 학생들이 몰려옵니다. 온갖 문제를 가지고 몰려오는데 그 이슈가 14가지 이슈입니다. 계모 계부부터 시작해서 적어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아침에 비행기 타는 순간까지 약속을 하고 만났는데 끝이 없습니다. 우리 50대 정도의 어른이 되면 20대가 봤을 때는 뭔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느낌을 줍니다. 그 사람이 목사이기도 하고 교수이기도 하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설교까지 잘하면, 그래서 만일 그런 사람이 제 설교에 은혜 받아서 계속 몰려오기 때문에 이웃 사랑을 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졸지 않아야 하고 수첩에 이름을 적어가면서, 저는 이웃 사랑을 하기 위해서 수첩에 이름을 빽빽이 적어왔습니다. 저는 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만일에 한 30만원의 돈이 갑자기, 아주 옛날에 썼던 원고에요. 거기서 원고료를 주는지도 모르고 썼는데 갑자기 30만원이 왔습니다. 그다음 어떻게 쓸까 고민하면 하루 있다가 인천장애인협회에서 돈 도와달라고 연락이 옵니다. 그러면 이건 바로 그쪽에 가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보내버립니다. 그런 식의 시간 재능 물질 숱하게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 이렇게 연단되고 체질화된 사람이 누리는 게 영생이에요. 이런 사람이 죽어서까지도 그런 삶을 확장하는 걸 천당 간다, 이렇게 말합니다. 천당은 분당과 완전히 다른 겁니다. 너무 멋있는 사람들과 영원히 교제권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천당입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이 이런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을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하는데, 이런 삶을 살려면 우리의 도덕적 수양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즉 내 결심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을 받아서 영의 감동으로만 가능하니까 2차적으로 영생은 성령에 의해서 가능한 삶, 영생의 두 번째 정의는 성령에 의하여 추진되는 삶, 첫 번째 영생은 영원히 지속가능한 삶, 하나님을 전폭 사랑하고 이웃을 몸처럼 사랑하는 것, 두 번째 영생은 성령으로 추진가능한 삶, 성령으로 실현가능한 삶, 이게 영생입니다. 이때 영은 성령입니다. 첫 번째 영생의 예는 시편 133편에 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두 번째 영생의 개념은 신령한 영적 감화력으로 실현 가능한 삶, 이 영생의 본문은 로마서 8 11-14절에 나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죽을 몸, 덧없는 가치에 매여 있는 몸, 이런 뜻입니다. 덧없는 가치에 매여 있는 몸이란 말은 영원히 존속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에 온 힘을 쏟는 그 죽을 몸을 살려서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 있는 그 삶에 내 삶을 재조정하는 것, 이게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합니다. 제 밑에 동생이 있습니다. 똑같은 부모의 자식인데 성령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 다니는데 성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늘 부부문제가 힘듭니다. 내가 진주까지 내려가서 상담을 하고 와야 합니다. 갑자기 제수씨한테 전화가 옵니다. 동생이 죽인다 그랬다, 그래서 너 죽일 마음 있냐? 문자를 보냈습니다. 앞으로 한 번 만 더 그런 말이 나오면 그건 우리 사이에 심각한 형제간의 우애에 파국을 가져올 것이다, 각별히 조심해라, 너도 나이가 50 다 되어가지 않냐? 이 문자를 보냈더니 너무 기분이 안 좋아서 연락도 안 합니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성령 받지 않으면 저렇게 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경주김씨 진골 성골 후예라고 자랑하던, 저희 아버지가 그렇게 자랑하시던, 경주김씨 집안에 알지 64대손이라고 자랑하던, 예수 안 믿으면 바로 그런 사람이 나인데, 나는 예수 믿고 나서 성령 받고 나서 그렇게 살지 않을 자유가 생겼단 말이에요.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나는 내 아우의 아직까지 구원 받지 못한 흔들리는 삶을 볼 때 성령이 아니고는 경주김씨 김알지 우랄알타이어 계통의 황금 면류관을 썼다고 하는 자랑, 그런 인간의 핏줄로는 도저히 안 되는 새로운 예수 보혈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예수 보혈의 공로 아니면 자기를 부인할 수 없고 자기 아내와 자기 자녀를 사랑하는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지난 수요일 밤 목요일 아침에 엄청 비가 왔습니다. 제가 이번에 양진일 목사에게 돈 빌리고 은행에 간신히 돈 빌려서 드디어 2.2km 걸어서 차 타던 삶을 청산하고, 150미터만 걸어가도 되는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비가 지하실에 다 덮쳤습니다. 신문에 나던 수재가 바로 우리 집에 난 겁니다. 바로 갔더니 1층에 둥둥, 저는 부산에 어머니 병문안을 가기로 돼 있는데 엄청나게 비가 오는 겁니다. 하수구가 팍팍 오르는데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셋방살이가 비참한 거구나, 제 아이들 딸들이 깨기 전에 물을 퍼내려고 엄청 미친 듯이 물을 펐는데 아이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안 돼서 아이들을 깨웠습니다. 물이 너무 많이 차서 어제 와서 사진 찍고 손해배상 해준다고, 농협 NH공사가 우리 집 단지 하수구 펌프를 막았습니다. 자기 공사한다고, 그래서 물이 다 덮친 겁니다. 그런데 우리 가구가 2002년에 산 제일 안 좋은 가구입니다. 제일 나쁜 가구 오래된 가구가 지하수 물에 침수가 됐고 우리 옆방 1009호는 홈바라고 하는 좋은 호화가구가 물에 찼는데, 거기는 비싼 가구가 물에 차고 우리는 아주 값싼 가구가 물에 찼습니다. 이런 겁니다. 세상에서 불편을 감수하면서, 저도 2.2km 걸어가면서 별로 불편한 걸 전혀 못 느꼈습니다. 저도 학교 다니면서 교통을 다섯 번 갈아탑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어떻게 다섯 번씩 갈아타고 학교를 가요? 내가 <임꺽정> 소설을 보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걸어 다니더라, 내가 파주에서 숭실대까지 걸어가려면 39km인데, 거길 걸어가야 하는데 내가 버스타고 전철타고 가니까 1시간 10분 만에 가는데, 얼마나 감사하냐? 나는 조선 명종시대를 생각하면서 산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다섯 번 타는 게 몸에 배어 있고 사람은 차를 갈아타는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습니다. 한 번에 가는 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다섯 번 정도를 갈아타고 전철도 타고 계단도 걷고 그리고 기다려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다, 내 몸에 그렇게 딱 배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살기 위한 것은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가르쳐준 사랑의 방식 때문에, 내가 그분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 분을 닮다가 생긴 버릇입니다. 제가 만일 예수님을 닮지 않고 우랄알타이어 경주김씨 그걸 생각했으면 아마 이렇게 안 살았을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만날 수 없을 것이고, 이웃 사랑한다는 것, 11시까지 자지 못하고 청년에게 붙들리는 것, 메일 써 주는 것, 다 모든 것은 에너지가 되는 것이고 사랑이 되는 것이고 생명력의 소진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는 것, 아침에도 제가 심학산에 5 20분 새벽에 산에 올라갔습니다. 5 20분이면 해가 멀리 떠서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산에 올라가는 도중에 또 소나기가 와서 비를 맞으면서 내려왔는데 심학산에 올라가서 아침에 기도하는 것, 너무 감미롭습니다. 아침에 해 뜨기 전에 새벽기도 하는 것 찬양하는 것 아침에 큐티하는 것 너무 감미로운 일입니다. 빼앗길 수 없는 일입니다. 형제자매들과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신령한 교제에 신앙의 승리 신앙의 분투를 듣는 것, 눈물 나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이 영생입니다. 이보다 더 나은 삶을 저는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이보다 더 좋은 삶을 바라지 않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지금 영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선물인 성령의 부단한 감동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부당한 감동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적으로 더렵혀져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려는 단호함보다 성령이 나에게 주는 감동이 더 크기 때문에. 우린 조금씩 거룩해지고 조금 더 나아지고 조금 더 개선됩니다. 저는 이걸 느낍니다. 제 안에 있는 성령께서 저로 하여금 헛된 욕심들을 품지 않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하고, 저를 소박한 꿈으로 단련시켜 주셔서 감사하고, 더 많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걸 안타깝게 만들어주셔서 저는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앞에 연단된 삶이고 여러분과 제가 사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영생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데, 이 말은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경험을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경험으로 다 했습니다. 초대교인한테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살을 먹는다, 예수님 피를 마신다, 아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 초대교회는 매우 적은 소수의 무리가 모여서 다락방에 문 걸어 잠가놓고, 베드로 사도님 제가 오늘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지붕 아래서 간신히 살았기 때문에 떡을 떼는 순간마다 예수님 임재를 느끼고 예수님을 먹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런 기록이 누가복음 24장에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이 떡을 떼서 주신 그 떡을 먹자마자 눈이 밝아집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말은 원기가 회복됐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상 14 27-29절에 보면 요나단이 아말렉 족속과 전쟁하다가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그래서 꿀을 찍어서 먹자마자 눈이 밝아졌다, 14 29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총체적 기진맥진 상태에 빠져서 더 이상 걸어갈 힘이 없었을 때, 예수님이 누가복음 22 19-20절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라고 하는 그 성만찬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떡을 먹자마자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 옆에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만찬의 떡을 뗄 때마다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주님 자신을 먹는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 우리는 너무나 불순종한, 기독교 진리가 너무나 잘못된 자들에 의해서 대표되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힘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뜻 자체가 매우 낯설고 생소한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만찬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고 추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복제예수가 된다는 말이죠. 예수 피를 마신다는 말은 내가 복제예수가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니까 예수님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면 에너지가 넘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다보면 신적인 nutrition, 신적인 자양분이 섭취돼서 원기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원기가 넘칩니까? 부동산 투기를 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원기가 넘치고, 부당한 방식으로 이익을 누리고 쾌락을 누리는 자들이 더 원기가 넘치고,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원기가 더 빠져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왜 이렇게 부당한가라고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더 아픕니다. 이번에도 3.54% CD 금리 때문에, 시중은행 금리가 엉망진창으로 낮아졌는데, 양도성 예금증서, CD금리가 3.54% 시중금리를 반영하지 않는 높은 고율을 유지하니까 공정거래위원회가 한 증권사의 자백을 받았습니다. 은행하고 증권사 10개가 담합을 해서 CD금리 양도성 예금증서를 3.54%로 해놓기로 했습니다. 1년에 3150억의 이익을 받고 5년 동안 1조원 이상의 이익을 누리는 나쁜 금리를 담합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정거래위원회 김동수 위원장이 고발을 해서 조사를 했더니 김석동 금융감독원장이 국회에서 담합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건 굉장히 경향신문에서 자세히 났습니다. 어제 경향신문을 자세히 보세요.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경향신문을 보면 CD 양도성예금 고정환율제 제도가 뭔지 자세히 나왔어요. 이건 고도의 지식을 가진 금융공학적인 엘리트가 벌이는 죽음의 난장판입니다. 그럴 때 집을 사기 위해서 92만 세대, 490만 명 정도가 한 달에 126만원, 310만원의 이자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집 두 채를 가지고 재테크를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평균 부채가 5억 정도 됩니다. 이런 건 정책이 잘못됐기 때문에 서민이 죽는 거거든요. 이웃 사랑하기에 얼마나 고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입니다. 감성적으로 최일도 목사처럼 저기 최노인한테 가서 라면 끓여주는 것만이 이웃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이웃을 사랑하려면 환경 생태 핵문제 국제무역 양도성예금증서 주택문제 토지문제 복잡한 문제를 완전히 꿰뚫고 있어야만 이웃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젊기 때문에 이웃 사랑을 방법론적으로 하려면 이 세상의 작동원리를 해박하게 파악하고 정통으로 숙지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갖추지 않으면 이웃 사랑 못합니다. 저는 신학자인데도 이런 문제를 남들이 안 하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안 하니까 이것저것 다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 전문경제학자들과 교양학자들이 안 하니까 제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안 합니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서 기능적으로 관료적으로 명령을 수행 받았던 아돌프 아이만 같은 관료적 성실성으로 무장된 중간 관리자들이 너무 태만하고 너무나 무자비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금융감독원의 한 두 사람이 양심만 있어도 검찰의 한 두 사람만 바른 검사만 있어도 이런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악이 성공하려면 총통부터 마지막 공무원까지 약 10단계의 관료적 모든 중간관리자가 전부 다 순종해줘야만 악이 성공합니다. 10단계의 지시체계 중에 한 단계만 거부해도 악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악이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그런데 10단계의 관료적 체계에서 과장급 실장급 국장급 중 누군가 한명만 양심이 가득 차도, 새벽기도 가서 성령 받아도 악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게 돼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악이 이렇게 신실하게 성공하는 이유는 10단계의 관료적 모든 계층의 관료들이 전부 다 동시다발적으로 악 안에서 삼위일체 연합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나쁜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신문과 뉴스를 보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나라가 타락한 지식인과 타락한 관료 타락한 정치가들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구매력이 있는 시민이 안 나온다, 이건 무언가 잘못된 겁니다. 우리나라가 ILO 기준으로 주당 56-60시간 일한다고 합니다. 노동시간 최장입니다. 노동시간이 최장이니까 출산율이 낮습니다. 노동 때문에 애를 낳을 힘이 없어서, 침실에서 다정할 시간이 없어서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인구증가율이 1.3%입니다. 지금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인구증가율이 제일 높은 데와 낮은 데가 통계로 돼 있던데, 인구증가율이 없다면 국민연금 파탄 납니다. 2017년에 올해 73만 명이었던 대학수험예비 학생이 47만 명으로 줄어듭니다. 평균적으로 나이 1살에 80만 명입니다. 16살짜리 80만 명 13살짜리 80만 명, 앞으로 17만 명이 줄어듭니다. 이렇게 되면 젊은 사람들이 일 실컷 하고도 노인들 연금 대느라 시간을 다 보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이 왜 생겼습니까? 아이 낳고 싶지 않은 세상을 만든 우리 책임입니다. 우리 처녀총각들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안 일어나고 아이 낳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 책임입니다. 이런 잘못된 삶이 이렇게 되는데도 우리가 막지 못하는 건 우리가 이웃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은 복제인간 예수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6 57절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명령을 수행하다가 원기충천해진 예수님처럼 이웃 사랑하다가 원기충천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 34, 로마 군병이 예수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물과 피가 쏟아졌습니다. 이 물과 피는 바로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마시는 사람, 그게 바로 예수님을 마시는 겁니다. 성령 충만하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만찬에 가면 성령의 새 포도주를 마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새 포도주를 마실 때 복제인간 예수처럼 살 수 있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일상생활에서 을지로와 충무로와 테헤란로에서 예수님처럼 살 수 있고, 이렇게 잘못되고 나쁜 불의한 정치경제 시스템 때문에 아무리 일해도 가난한 사람을 건져 내는 게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하려면 고도의 전문지식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책임감 많이 가지셔야 해요. 저는 책임감이 너무 많다보니까 저는 대통령도 아니고 시장도 아닙니다. 유엔 사무총장도 아닌데 엄청 많이 알잖아요. 저는 위원회 아무 것도 없지만 국제 정세 모르는 것 없습니다. 다 압니다. ? 저는 책임감 때문에 압니다. 제가 서울시장 아닙니다. 경기도지사 아닙니다. 경기도 현안문제 다 압니다. 왜냐하면 신문을 읽고 기도하기 때문에, 그런데 제 지식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걸 다 못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고도의 전문지식과 무한한 책임감, 목자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 문제를 바라보면서 이웃 사랑에 돌입하십시오.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그런 영생을 살려면 성령의 부단한 감화 감동에 영향권 내에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영생을 누리고 예수 살과 피를 먹는, 신령한 음료와 신령한 떡을 먹는 공동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가향 형제자매들이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만찬 공동체 되게 도와주시고,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이 실현 가능한 명제임을 깨닫게 해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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