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1부 예배-요한복음 6:52-59
(인자의 표적 떡을 먹는긱독교와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기독교의 차이)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
요한복음에서 독특하게 쓰고 있는 단어가 영생이라는 단어입니다. 영생이라는 단어는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만 참된 이해를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고, 영생의 1차적 의미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화롭고 의롭고 아무런 위협없이 사는 공동체 생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영생은 공동체 생활이다, 어디서? peaceful and landed life, 평화롭고 땅에 사는 공동체 생활이 영생인데,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의 맥락은 영적인 신령하다의 영, 육과 반대되는 영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뜻, 길 영(永)자를 쓴다, 길이 보존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 영생이다, 다시 말해서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 영원히 지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다, 영원히 지속될 만한 삶은 무엇이냐? 전심으로 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10장 25-27절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한 부자가 예수께 와서 시험하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이 클레로 도메오입니다. 영어로 claim이 클레로에서 나온 겁니다. 클레로 도메오는 땅을 상속하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을 썼어요. 이 말은 영생 자체가 공동체 생활을 어떻게 상속할 수 있겠습니까? 형제자매가 우애롭게 사는 그 삶에 어떻게 내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똑같은 말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과 상속한다는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과 땅을 상속한다는 말은 똑같습니다. 땅에서 사는 형제자매들 사이에 우애로운 공동체 생활이 영생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본문이 시편 113편 3절이다, 시편 133편을 뒷받침하는 구절이 많은데, 시편과 신명기에 두루 흩어져 있는데, 신명기 30장 11-14절, 19절 등에 영생 또는 생명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러분 여기서 네 하나님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체질화된 삶 자체가 영생입니다. 그 사람이 따로 받는 상이 아니라 네 하나님과 네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삶 자체가 영생이기 때문에, 영생을 상속한다는 말에는 논리적으로 동의반복이 있습니다. 토톨로지가 있어요. 똑같은 논리를 한 번 더 구사하는 겁니다. 영생은 무엇입니까? 영생은 하나님을 나누어지지 않는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겁니다. 이런 삶은 인간의 이성과 도덕적 수양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성령에 감화감동 받은 사람만이 이런 삶을 살기 때문에, 영생은 이차적으로 spiritual life, 신령한 삶, 영과 육 할 때 영입니다. 영적인 삶이라는 성령의 감화감동만으로 존속가능한 삶, 성령의 부단한 감동으로만 가능한 삶이 영생이다, 이차적으로 영생은 로마서 8장 11-14절에 나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 성령으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씨를 조금씩 억제해가면서 삶, 이것이 영생이다, 영생은 지금 현재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체질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생을 상속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영생자체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체질화되고 단련된 사람만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내 이웃이 누군가를 자세히 아는 사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사람만이 영생을 상속하는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영생을 상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인자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인자는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인자는 가장 사전적인 의미로 사람의 아들입니다. 두 번째로 예언자입니다. 세 번째로 인자는 죽기까지 복종한 순종의 화신으로써 메시아를 가리키는 별칭이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하나님께 완벽하게 순종한 순종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모방하고 그 명령을 따르다보면 힘이 난다, 이런 뜻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처럼 살다보면 힘이 난다, 예수님처럼 살다보면 인생의 장구한 여정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의 독특한 성만찬 경험이 이 본문 안에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만찬에서 엄청난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만찬에서 떡을 뗄 때 진짜 그 떡을 예수님 몸으로 먹고 마셨습니다.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게 초대교회 경험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초대교회처럼 기독교가 진짜 목숨을 내어놓고 믿는 사람들의 지극히 작은 소수 마이너리티 공동체라면 성만찬 자체가 매우 감격적일 것이고, 지금도 만일에 예수 믿는 일이 마이너리티 중의 마이너리티요, 정말로 성령에 감동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지금도 성만찬 때 떡을 떼자마자 예수님 몸을 먹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날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왜? 오늘날은 종교권력, 다시 말해서 자기 직업이 되어버린 너무 많은 성직자들이 대표하는 기독교는 절대로 인류의 보편적 유익을 위한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파하는 일을 일생동안 전심으로 했지만 사도들은 재산을 모으고 안정된 자리를 세습하기 위하여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아들 딸 세습 했습니까? 못했습니다. 사도요한 아들 딸 세습했습니까? 못했습니다. 베드로 아들 딸 족보에도 없습니다. 그냥 1세대에서 장렬하게 끝났습니다. 그들은 온 생명을 바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지만 안정된 직장을 위해서 생계유지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하면서 거대한 종교기관이라는 제도권 교회가 너무 방대한 조직이 됐기 때문에 이것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너무 돈이 많이 듭니다. 여러분, 우리도 생각해볼까요? 여러분께서 낯설게 들리시겠지만 우리가 만약 가향교회에서 안 모입니다. 안 모이고 청계천 제1구역에서 한 달 모이다가 2구역에서 한 달 모이고, 여의도 광장에서 한 달 모이고, 그렇게 모여서 게릴라식으로 예배를 드리면 돈 들겠습니까? 안 듭니다. 우리 300만원 들죠? 300만원씩 듭니다. 혹시 감동이 되면 우리 건물을 없애버립시다. 어디서 만나면 돼요? 여의도공원에서 만나면 됩니다. 아니면 북한산에서 만나면 되고, 청계산에서 만나면 됩니다. 지난번에 한국교회 희년 50주년 행사를 했는데 시청광장에서 만났는데 50만 명이 모였다고 선전했는데, 그때 재정을 결산하는 자리가 롯데호텔 20층에서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그 자리에 가서 얼마나 썼는가 봤더니, 54억이 쓰였습니다. 숭실대 총장은 성경봉독 1번에 500만원 냈습니다. 내라고 부탁을 했는데 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총장과 성경봉독하면서 따라갔다가 그 끔찍한 광경을 봤습니다. 이게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닙니까? 54억 예산에 쓰기는 27억을 썼다는데, 27억도 돈이 얼마나 많은 거예요. 하루 행사에, 여의도 순복음교회 할머니들이 원인 모르게 체포된 채 인질로 와서 앉아 있다 갔는데, 문제는 전혀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고, 여기가 무슨 장소인지 모릅니다. 여기가 뭐하는 데요? 꾸역꾸역 버스를 40, 50대 태웠는데, 그리고 그 날 설교내용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한자도 필기할 내용이 없는, 거기에 그 돈이 들었습니다. 서울여대 총장은 신약성경을 봉독하고 숭실대 총장은 구약성경을 봉독했습니다. 봉독할 때 500만원씩 헌금하라고 했는데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개신교 교단 72개 교단 교단장이 다 왔는데 한 60명이 왔더라고요. 표정이 한결같이 정신 나간 표정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제가 너무 실망했습니다. 이게 모든 제도권교회 성직자의 총화라면, 그게 기독교입니다. 덩치가 큰 기독교, 바티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계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권력과 돈이 오고 가는 고체덩어리 같은 기독교 종교권력은 절대로 인류의 운명에 이바지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술주정뱅이를 술 끊게 만드는 정도의 역할을 합니다. 교회는 게으른 사람에게 상을 목표로 줘서 야심이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그런 의미의 구원을 해줍니다. 부부 사이가 나빠졌던 사람들을 건져주고 부부가 좋게 만들어주는 것을 교회가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작은 면에서 하루살이 같은 걸 전부 다 건져냅니다. 그런데 가장 큰 결정적인 자기부인의 진리가 빛나야 그 순간에는 낙타를 삼켜버리는, 큰 진리 실천에서는 다 배교하고 작은 진리실천에서 는 성공하는 제도권 교회, 제도권종교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영생은 예수님과 사도바울과 같은 분들의 언어에서 나오는 말일 때만 진실합니다. 성경 이후에 나온 어떤 교역자들과 성직자의 문서보다 성경이 더 옳은 이유는 성경은 자기 목숨을 가지고 어떤 기득권도 누리지 않았던 사도들이 기록한 문서이기 때문에 맞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다른 종교들, 심지어 우리가 쓴 어떤 책도 사도적 정결성과 사도적 사심 없음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영생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추동된 삶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화 감동 없이는 안 됩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2장 34-38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만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격과 거리유지가 가능해집니다. 이 세상을 강한 비판정신으로 거리를 둬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고 놀라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놀라는 그 장면을 예수님께서 바로 지적했습니다. 이런 성전을 보고 놀라면 안 됩니다. 돌 위에 돌멩이 하나 남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파괴될 것이다, 예수의 몸, 인자가 성전이다, 예수님이 성전이라는 겁니다. 그걸 깨달으라고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다그치셨습니다. 여러분 그럼 어떻게 성령을 받습니까?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를 믿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 다시 말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자기를 철두철미하게 비운 그 분이 대표하는 기독교, 그 분이 대표하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 예수님이 대표하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이 모든 종교를 심판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공기처럼 가벼워집니다. 주 예수를 믿으면 부피와 질량의 감소를 자발적으로 감수하여 우리가 능히 쓸 수 있는 만큼 쓰지 않고 보편적인 이웃 사랑에 전진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한꺼번에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을지라도 서서히 조금씩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불편감수와 우리의 고난감수와 고난상속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우리를 이웃 사랑에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영생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단련된 사람들이 나누는 공동체 생활이므로, 그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왜 양식이냐?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뜯을 때마다 마실 때마다 힘이 났고 눈이 밝아졌고 예수 믿고 살아갈 용기를 고취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새 포도주를 요한복음 2장에서 무엇이라 했습니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죠? 요한복음 2장에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면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여자여 라는 말을 했던 대표적인 두 장면은 요한복음 19장과 2장입니다. 2장에서 포도주를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달라는 그 말을 십자가상에서 옆구리로부터피를 내려준 그 시점으로 내려준 해석하고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했던 마리아가 했던 그 우발적인 언어를 이스라엘 구원역사의 판도 안에서 해석하여, 이스라엘의 포도주가 동이 나버린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이스라엘 구원의 감격이 사라졌던 유대교를 갱신시킬 때가 왔는데, 아직은 내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을 때가 아니라고 말함으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선문답 같은 대화는 요한복음 19장 33-34절에서 나갑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게 중요합니다. 이 물과 피가 바로 누가복음 22장 19-20절에 나오는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런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때마다 즉 성만찬의 떡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포도주처럼 마시는 그 순간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모방하는 행위, 예수님의 생명복제에 참여하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는 이게 가능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만찬에 참여하기까지 삶의 한 복판에서 예수를 모방하고 구현하고 체현하기 위해서 온갖 분투를 다 일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만찬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실 때마다 강력한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았습니다. 초대교우들한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한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은 너무 쉬운 말이었습니다. 왜? 성만찬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식사였기 때문에,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 뜻 자체가 너무나 낯선 시대에 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너무나 엄청나게 불순종하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뜻, 즉 성만찬의 원초적 감격을 재생할 길이 없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은 있습니다. 한 가지 작은 기억은 누가복음 24장 27-31절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예수님인지 알아보지 못했죠.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하면서 여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집행하면서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음식을 먹고 포도당이 들어가면 눈이 밝아집니다. 당분이 들어가면 눈이 밝아지죠.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음식을 먹었다는 말이고 새 힘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똑같은 본문이 사무엘상 14장 29-31절에 나옵니다. 요나단이 아말렉과 전쟁하면서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꿀을 찍어서 먹었습니다. 꿀을 찍어 먹자마자 눈이 밝아져 원기가 회복됐습니다. 31절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새 힘을 공급 받았다, 예수님의 성만찬에 참여하면 눈이 밝아져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사명의 땅으로 돌아갈, 사명을 수행할 땅으로 돌아갈 힘을 공급받는다는 말이거든요.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은 성만찬의 밀도 높은 순종동아리에 참여한다, 밀도 높은 순종의 사람들 사이에 가면 내가 그들과 함께 하는 그 식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서 새 힘을 공급받으면서 다음 6일 동안 또 걸어갈 수 있고 다시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 길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예수님과 함께 가는 그 길은 예수님이 주시는 살과 예수님이 주는 음료를 마심으로 성만찬의 밀도 높은 교제의 결속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외롭지 않고 유혹받지 않고 죄 짓지 않고 내가 정의를 수행할 수 있고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참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이 만든 표적의 떡을 먹는 기독교는 왜 기독교가 아니냐? 예수님이 주는 구원을 마치 부동산 주는 것과 똑같은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얼마나 잘못된 개념인가를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주는 구원 자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단련된 사람만이 구원이라고 느낄 수 있는 구원인데, 지금 내가 예수님처럼 살지 않고 막 살았는데 믿었더니 구원을 받았다, 그때 구원은 마치 이 지상에 산 삶과 상관없이 나한테 특권으로 주어진 그런 구원, 그런 구원을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어요.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가 통합 측 이단시비가 붙어서 이단대책위원회가 쓴 보고서에 보면, 변승우 목사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잘못됐다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변승우 목사님을 옹호하는 사람이 쓴 책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들도 믿음 플러스 행위를 동시에 강조했다면서 김세윤 박사와 권연경 교수를 인용해놨습니다. 우리나라에 믿음 플러스 행위를 강조하는 말을 하면 바로 이단이라고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엄청나게 일탈되고 왜곡됐습니다. 지금도 목사님들은 지식으로 못가요, 돈으로도 못가요,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는 것은 주일학교 때 우리도 많이 배웠죠. 이것이 얼마나 큰 미신이냐면, 그 믿음이 행동과 다른 믿음이 아닌데, 행동으로도 못 가요, 선행으로도 못 가요, 이렇게 잘못된 흑백논리를 가르치면서 믿는 일 자체가 공로가 돼서, 그냥 믿기만 하면 즉 지성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고분고분하게 잘 믿으면 천국 간다고 믿기 때문에 실제로 교회에서 목사님께 고분고분한 사람들 중에서 천국 대부분 못 갈 것 같습니다. 일단 그 사람들 대부분은 미신을 믿고 있죠. 그다음 목사님의 비리 같은 것을 아무리 봐도 우리 목사님은 훌륭하다, 우리 목사님이 36억 떼어 먹은 게 무슨 큰 대수냐, 또 헌금하면 되지, 목동에 있는 어떤 목사님 교회에서 30억 해 먹어서 징역 5년 사는데 옹호하는 교인이 한 말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목회하다 단란주점에 가서 30몇 억 썼으면 그게 무슨 큰일이냐, 또 헌금하면 되지,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지, 이렇게 하면서 옹호합니다. 이게 소위 믿음 좋은 사람들의 행태입니다. 이건 차마 아니거든요. 안드로메다 성단만큼이나 진리에서 멀어요. 너무 멀어요. 그런 것들이 표적의 떡, 예수님이 주는 특권을 먹고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니에요. 만일에 예수님이 주는 표적의 떡, 남들은 먹지 않았는데 나만 먹었던 돌로 만든 떡을 먹고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특권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구원을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특권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납득이 되는 하나의 보편적인 행동원리입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먹는 기독교는 무엇입니까? 이성을 가지고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가를 금방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보편적인 호소력이 있는 진리입니다. 이런 겁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단련되고 체질화된 그 사람이 상속하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런 삶만이 우리 하나님과 영원히 공존 가능한 삶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누구도 반박이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원천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과 공존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분해하고 자기를 해체하는 삶에 연단된 사람만이 하나님과 공존하는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휴머니스트들도 어떤 도덕주의자들도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고 마신다는 말은 57절에 가장 정확하게 들어 있습니다. 6장 57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는 것 같이’에 동그라미, 여기에 괄호해서 써 넣으세요. 요한복음 4장 34절, 요한복음 6장 57절에는 요한복음 4장 34절이 끼어들어가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의 뜻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원기왕성하게 음식을 먹은 것처럼 느껴 ‘사는 것 같이’ 내가 보낸 일을 수행하는 그 사람들은 내가 보낸 일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원기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역설입니다. 보통 일을 하면 에너지가 빠지죠? 그런데 우리 하나님 일을 하면 할수록 에너지가 공급되는 paradox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의 보내신 뜻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음식을 먹었다 함과 같이, 요한복음 4장 34절입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나는 아버지의 뜻을 수행할 때마다 큰 음식을 먹은 것과 똑같다, 이런 뜻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의 뜻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주신 음식을 먹어서 사는 것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주는 계명, 하나님의 전적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준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바로 나를 먹는 것이다, 나를 먹는다는 말은 내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나를 모방하는 것이고 추종하는 것이다, 나를 추종하고 모방하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원기를 공급받을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해본 사람들은 이 말뜻을 압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집념하고 집착할수록 이웃 사랑할 기회가 많아집니다. 이 계명에 순종할수록, 하나님 전폭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준행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회가 구체적으로 제공됩니다. 그걸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번도 이 계명에 착념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개명은 너무 포괄적이어서 수행불가능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한다는 말만 하루 종일 묵상하자마자 하나님을 경배하듯이 내가 내 삶을 경배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금방 나옵니다. 내가 돈을 경배하네, 내가 골프를 경배하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 하나님 이 말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십시오, 기도하는 순간 바로 사랑해야 할 이웃이 떡 하니 나타납니다. 그렇게 쉽고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영생을 누릴 수 있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너무 멀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능한 일이고 한 번 할 때마다 원기가 가득 찬 음식을 먹는 경험과 같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말은 그런 실천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이 성만찬의 원초적 용어가 너무 낯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준행한 그 장면마다 신적에너지를 공급받았듯이 예수님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마다 우리가 에너지가 넘치는 것을, 마치 음식을 먹은 것과 똑같이 마치 눈이 밝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다음 일주일 동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질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맥락을 주시고 경우 주시고 상황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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