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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요한복음 6 :16-21

by 【고동엽】 2022. 2. 12.

주일2부 예배 - 요한복음 6 :16-21 (두려워 말라)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이 세상에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을 느낀다는 데서 하나가 됩니다. 두려움의 원인과 양상은 다 다르지만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삼성 같은 대기업의 CEO도 시장지배력이 지금보다 줄어들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습니다. 보통 은행의 지점장들은 자기 전임자에 비해서 은행에 매출 규모를 2배 이상 늘리지 못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고려대학교를 나왔던 한화은행 명동 지점장이 7-8년 전에 전임자에 비해서 실적을 굉장히 높였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원하는 만큼, 또 본점에서 자기를 지점장으로 파송했을 때 기대했던 목표치만큼 이루지 못하자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려대학교를 나왔고 탁월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살했습니다. 두려움, 몸무게가 조금만 늘어도 연예인들은 매니저로부터 엄청난 비난에 직면한다고 합니다. 몸 관리를 잘 못한다는 두려움, 이런 것들도 어린 연예인들의 두려움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학우들은 정규직으로 진입하지 못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규직은 인간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입니다. 정규직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일생동안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고단한 운명들이 두려움이 됩니다. 10대는 왕따에 대한 두려움, 유치원 아이들까지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 인간 모두를 파산내고 있는 감정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조건은 죄와 상관없이 근본적으로 두려움에 빠뜨리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려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천재지변은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당하는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두려움에 빠집니다. 우리가 한 번 잘못 행사한 자유는 나에게 채권자처럼 내 뒤를 따라다니면서 추심을 합니다. 내가 잘못했던 기억들이 나를 추격하며 추적하면서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죄악의 결과,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합니다. 세 번째는 죄악의 결과 피조물도 아닌데, 이 바깥세상, 죄악된 세상 자체가 우리를 두려움에 빠뜨립니다. 우리나라 대학교수들도 편해 보이지만 편하지 않습니다. 서울대학교나 카이스트의 교수가 되면 60%는 첫 진급에서 낙방됩니다. 이번 우리학교에서도 진급에 오르지 못한 교수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아주 좋은 조건으로 교수가 됐는데 4년 안의 논문 업적 강의 평가 모든 면에서 낙방을 했습니다. 이번에 해고돼야 합니다. 그런데 동정을 베풀어서 1년 더 기다려주기로 인문대에서 결정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볼 때는 교수입니다. 연봉이 6-7천만 원 되는 초임교수인데, 논문을 쓰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다가, 점점 벌레처럼 축소돼 가다가, 자신감이 없다보니까 강의도 못하게 됩니다. 강의평가도 나쁘게 나왔습니다. 우리는 멀쩡하게 생긴 그 사람이 그렇게 어려움을 겪고 살아가는지 몰랐습니다.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보면 자기만의 두려움과 혈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괴롭게 노를 젓지만 전진이 없는 그런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건 피조물 일반의 죄도 아니고 죄인자체도 아니고, 그냥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두려움에 빠져 삽니다. 네 번째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적으로 단련하기 위해서 영적감수성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두려운 상황으로 몰아가시고, 바람과 파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주권적인 자유 안에서 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이 오늘 본문의 두려움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려움은 제자들이 감정적으로 매우 격앙되고 자신감에 찼을 때 일어난 현상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제자들이 상당히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천 명의 무리를 100백 명씩 50명씩 앉히고 떡을 다 먹이고 굶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15절에 보니 그 굶주림을 채웠던 그들이 와서 예수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임금 삼는다는 말은 로마제국과 헤롯체제 안에서 반역자로 만들고 반란군의 앞잡이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이 운동을 대중적으로 지도한 것 같고, 아니면 유도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마가복음 6 52절에 보니까 표적을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인 사건 때문에 제자들이 영적으로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느낌을 주는 코멘트가 붙어 있습니다.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이 사태를 예수님은 위기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자기들이 임금 주변에 있는 신하가 되고 고관대작이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 어쨌든 이들은 이 사태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이 제자들을 영적인 감수성, 다시 한 번 흐려지지 않는 판단력의 중심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예수님은 위기를 조성하십니다. 그 위기는 제자들더러 먼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크지 않습니다. 남북 최장 길이가 20km밖에 되지 않습니다. 동서길이는 8km, 아무리 이들이 바다를 최장거리로 항해한다고 하더라도 20km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터로 가는 게 아니라 돛대의 바람을 이용해서 가는 배기 때문에 20km가 먼 거리인 것은 맞습니다. 보통 웬만한 배가 30km를 못 갑니다. 발동선이 있는 데도, 범선, 바람을 이용해서 노를 젓는 이 배가 가는 길은 큰 거리인건 맞습니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는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 말 안에 두 개의 과거분사 시제가 들어 있습니다.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 말은 삽입구문입니다. 삽입구문은 괄호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17절은 이렇게 가야 합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이렇게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건 시제가 완전히 다른 시제입니다. 시제가 완전히 다르다는 말은 이 시제는 이 사태가 일어나는 부대상황을 설명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이때 가고 있다 라는 동사와 파도가 일어나는 동사는 미완료시제라고 합니다. 미완료시제는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두워졌다, 예수가 아직 오지 않았다, 이 말은 과거 완료시제입니다. 과거완료시제는 왜 이런 사태가 왔는가, 왜 이들이 어두웠을 때 배를 타고 갔는가를 말해줍니다. 이들이 예수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기다리다가 늦었다는 뜻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제 때문에요. 이미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가기 위해 기다리다가 늦었습니다, 이런 뜻이 바로 오늘 두 개의 시제 사이에 있는 차이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는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이건 매우 위급한 상황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배를 타고 가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가는 위기를 실감을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지만 갈릴리 바다는 갈릴리에서 시리아 쪽으로 보면, 20km 정도 가지 않아서 만년설에 가려진 높은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이 헬몬산입니다. 헬몬산에서 나오는 물이 단 지방을 거쳐 갑니다. 단 지방은 이스라엘 땅에 있는 열대우림지역입니다. 단 지방에서 내려가는 강이 요르단입니다. 요르단이라는 말은 야라드 동사에서 단입니다. 요르는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단에서 내려가는 강이 요르단 강입니다. 요르단 강의 물줄기를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만년설이 대고 있습니다. 헬몬산은 높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로 세차게 불어 헤치는 지형성 바람을 일으킵니다. 밤에 큰 바람과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가버나움과 요르단 협곡의 지형성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낮에 가지 않고 밤에 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어두워진 것입니다. 이들은 가자마자 괴롭게 노를 저었지만 십리쯤 가다, 4km 정도를 가는데, 예수님 만난 지점이 몇 시간 걸렸는지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 14장과 마가복음 6장에 이 사건과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평행본문에는 4시쯤 왔다, 새벽 4경에 왔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건 굉장한 겁니다. 괴롭게 노를 저었는데, 9-10시간 동안 이들이 바다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공포 분위기가 컸겠죠? 큰 파도와 바람이 부는 10시간 동안 갈릴리 바다에서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새벽 3-4시경 예수가 왔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비해서 너무나 간략하게 처리했습니다. 유령소동 정도만 두려워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두려움은 10시간 동안 노를 저었지만 4km밖에 못 가는 가버나움으로 도저히 갈 수 없는 위급한 상태, 이것이 바로 이들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겁니다. 아무리 노를 젓지만 전진하지 않는, 아무리 열심히 애를 쓰지만 바람과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갈 수 없는 상태, 이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같습니다. 애를 아무리 써도 우리가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 우리가 전진하려고 하는 기독교적 삶의 가치, 기독교적인 영성의 가치를 부인하려고 하는, 우리의 움직임을 무효화하려고 하는, 쓸 데 없게 만드는 바람과 바다가 있다는 말이에요. 원래 노를 저으면 전진해야 하지 않습니까? 기도의 노를 젓고 말씀공부의 노를 젓고, 사도신경도 공부했는데도 반응이 없다? 우리가 노를 젓는다고 당연히 전진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바람과 바다가 마태복음 14장에 말한 것처럼 거슬러서 불어오면, 거슬러서 파도가 치면 우리가 전진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두려움입니다. 지금 우리가 일 많이 한다고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옛날에 그런 노래 불렀죠? 잘 살아 보세, 잘 살아보세, 새벽종이 울렸네, 이렇게 하면서 새마을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러분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는 열심히 일하면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열심히 일할 사람은 있지만 열심히 일할 곳이 없고, 열심히 일해도 넘쳐나는 비정규직 노동자 때문에 도저히 임금을 줄 수 없습니다. 박경철이라는 사람이 경향신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2 583호 기사입니다. <신소작농의 시대>입니다. 대학생 아르바이트생과 대기업이 짰습니다. 대기업이 대학생 아르바이트생을 써서 중소기업을 완전히 망쳤는데, 피자집 세탁소 미장원 애견용품 뻥튀기집, 다시 말해서 대기업이 대학생을 시급 5천원 알바생을 고용해서 자기 혼자 또는 가족노동으로 진행해가는 모든 산업을 싹쓸이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요.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해가는 순간 중소기업이 죽어가는 겁니다. 너무 슬프죠? 여러분이 대기업과 짬짜미를 해서 시급 4천원 5천원 받으면서 빵집 커피집을 전부 다 대기업이 접수해버린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일하면 가난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 시대입니다. working poor라고 말하는데, 일을 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겁니다. 일을 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태가 지금 괴롭게 노를 젓고 전진하려고 하지만 전진하지 못하는 상태가 제자들과 같은 상태입니다. 문제는 바람과 큰 파도입니다. 바람과 파도는 괴롭게 노젓고 있는 제자공동체에게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바람과 파도를 보고 괴롭게 노를 젓고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바람과 바다를 누르시고 정복하시고 그치게 하셨습니다. 이건 이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께서 조성하신 일종의 교육환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손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사물을 이해하는 건 굉장히 낙관적인 이야기입니다. 지금 오늘날 대학생과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문제, 오늘날 이 땅의 근로대중들이 겪고 있는 끊임없는 불안의 문제, 너무 삶을 척박하게 만들어놓고 그 척박한 삶의 조건에서 종교를 갖다 붙이는 것, 이건 악한 종교와 악한 사회구조가 얼마나 완벽하게 동맹관계에 있는가를 알겠죠? 목회자들이 좀 살게 돼서 목사님한테 비굴하게 손 안 내밀어되는 자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중산층이 탄생하는 것을 목회자들이 싫어합니다. 목회자들은 삶의 조건이 찌그러지고 함몰돼서 무엇인가 교회 바닥에 와서 막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교회가 잘못됐는데도, 스님들은 하루 종일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고 있는데도, 교회 수입이 줄어들지 않고 절 수입이 줄어들지 않아요. 성직자가 잘못됐지만 잘못된 성직자들보다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 훨씬 큰 거예요. 교회와 스님들은 불황을 맞지 않는 거예요. 스님과 성직자들이 잘못했지만 이 거친 파도에서 노를 젓고 있는 억조창생들의 삶의 조건이 너무 고달프니까 그 고달픈 삶을 뭔가 해소해보려고 문을 두드려보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은 거예요. 타락하여서 우리가 볼 때는 엉망진창이 돼버린 대한예수교 조계종, 대한예수교 조계종은 같은 거예요. 똑같은 놈들이에요. 구원의 여지가 없는 이런 데를 문을 두드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집에 가서 CTS TV를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앉았는지 보세요. 우리가 볼 때는 아닌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멘 소리 지르는 이유, 그들이 괴롭게 노를 저으면서 전진하려고 하지만 전진할 수 없는 근원적인 바람과 파도의 문제가 있는 거거든요. 바람과 파도는 하나님이 극복해주시면 되는데, 바람과 파도를 영구적인 환경으로 만들어놓고 계속 사람들을 교회에 오게 만드는 것이 일종의 종교인들의 큰 음모입니다. 너무 악한 음모이죠. 그래서 제가 어떤 항의를 받느냐면 김회권 목사님은 교회를 필요 없게 만든다, 제가 꿈꾸는 세상은 교회를 필요 없게 만든다고 목사님들이 비난합니다. 목사님은 마치 우리가 순종하면 이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누가 교회 오겠습니까? 이런 비난을 합니다. 너무 웃긴 건데, 이 사람들의 머릿속은 충분히 사회가 병들어야 하고, 충분히 사회가 삶의 조건에서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다수가 있어야만 교회가 잘 된다고 보는 겁니다. 정신이 썩어버린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교회가 잘되는 게 중요합니까? 바람과 바다를 돌파하고 소원의 항구로 진출하고 전진하는 게 더 중요합니까? 이게 더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기구적 교회가 존속하기 위해서 충분히 괴로운 사람들이 더 많아야져야 한다는 것, 이건 너무나 잘못됐죠? 사고가 병든 사람 아닌가요? 오늘 날 우리 하나님께서는 괴롭게 노를 젓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계시고, 전진하지 못하고 큰 바람과 파도에 막혀서 생의 여정을 좌절당하는 사람들을 우리 하나님은 지켜보십니다. 이건 죄와 상관없는 좌절입니다. 바람과 파도라는 외적 환경 때문에 일어나는 좌절입니다. 이 두려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두려움을 가지고 계속 교회에 오기를 원하십니까? 계속 목이 쉬도록 소리 지르기를 원하십니까? 이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고 멈추기를 원하십니까? 멈추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10시간 동안 혈투를 벌였던 제자공동체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왔을 때 제자들이 너무 놀랐습니다. 바람과 파도를 보고 공포에 떨었던 그 마음이 바다 위를 뚜벅뚜벅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더 큰 두려움을 보고 작은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제가 볼 때 실제로 그랬을 것 같습니다. 파도를 보고 놀랐는데 바다 위를 뚜벅뚜벅 걸어오는 예수님은 더 충격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도 아니고요.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라니까 파도를 보고 놀란 마음이 없어져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파도와 바람 자체에 시달려서 전진하지 못하여,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는 이 두려운 상태를 극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을 항상 갖고 살기를 원하지 않고 그 두려움을 없애주기를 원하십니다. 둘째 큰 바람과 파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잔잔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신앙의 신비입니다. 제가 교목실장을 하면서 온갖 상담을 다 받는데, 한 교수가 직원에게 시달림을 받는 사건입니다. 한 직원이 이 교수를 계속 음해합니다. 직원은 나이가 많고 교수는 나이가 어립니다. 직원은 남자고 교수는 여자입니다. 갖은 모욕을 하면서 계속 이 교수를 쫓아내려고 합니다. 이 직원은 뇌물을 좋아하는 직원입니다. 제가 어느 대학이라는 말 안 했죠? 그런데 이 교수는 뇌물을 싫어합니다. 뇌물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꼬장꼬장합니다. 이 직원은 굽실굽실하는 관료적 체제에서 30년 물이 든 사람이어서 이 사람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 교수가 너무나 지쳐서 골병 든 마음으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 수준의 사람을 보고 분노의 마음, 저주의 마음으로 하루 종일 잠들면 잠을 자고 난 순간 가슴이 답답해서 납을 마신 것 같은 효과가 든답니다. 그 사람이 그날 자기한테 퍼부었던 작은 부정적인 코멘트를 하루 종일 묵상하면 수업도 안 되고, 그 사람의 말이 하나님 말씀을 완전히 밀어내서 하나님 말씀은 전혀 안 들리고 그 사람 말만 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점점 싫어져서, 제가 시편 109편을 읽어보라 했습니다. 시편 109편을 보면 교수님이 하고 싶은 모든 저주의 언어가 다 있습니다. 이 말로 저주 기도를 한 달만 하면 일단 효과가 있을 거라 그랬습니다. 일단은 저주 기도를 해보라 그랬습니다. 두 주 지났습니다. 어제 문자가 왔습니다. 무언가 잠잠해졌습니다. 어떻게 잠잠해졌는지 알아봐야 하는데, 갑자기 자기를 비난하는 승진하지 못한 콤플렉스 많은 직원이 꼬리를 내리면서 뭔가 저자세가 되면서 부드러워졌다고 합니다. 이게 저주기도 때문인지 아직까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게 있는 지 봐야 하는데, 직장에서 공연히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 서울 메트로에 근무하는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공연히 직장상사가 미워하는 겁니다. 회식 가서도 미워하고 탁구 칠 때도 미워하고 항상 비난하는 직장상사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없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도 제가 저주 기도를 해보라 그랬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몸에 안 맞는 약을 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 단계까지 가면 안 되고, 원수 사랑하는 것은 마지막에 원수가 힘들 때 사랑하고, 원수가 나를 죽이려고 할 때는 저주 기도를 가지고 원수의 저주를 영으로 neutrality, 원수가 나한테 한 그 말을 중성화시키는 시편기도를 가지고 맞불 지르고 나서 원수가 비굴해지고 살려달라고 할 때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그 방법을 알려 드렸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우리 학우 중의 하나는 엄마 아버지가 무능력해서 일주일에 서른 시간 일하면서 공부하는 학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학우가 정말 죽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우가 지난학기 장학금을 받았더라고요. 자기가 장학금 받아서 아버지를 용서했더니 아버지가 직장을 다시 얻게 됐다면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들립니다. 대개 저를 만나려는 사람들은 전부 다 이렇게 무거운 이야기, 큰 바람과 파도와 싸우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려움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 하게 만들고 예수님을 배로 영접하여 바람과 파도를 진압하기 원하고 무효화시키길 원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알려줍니다. 여러분이 집중하셔야 합니다. 예수님 자체를 기독교 신앙 그 모든 번거로운 번뇌를 다 버리고, 예수님을 배로 영접한다는 말뜻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실 수 있는 예수의 말씀을 삼키자마자 바람과 바다가 잔잔케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님 말씀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말을 신뢰한다는 말은 지금 나에게 굴욕감을 안겨주고 전진을 앗아가 버리고 내 인생이 진도가 나가는 걸 방해하는 큰 역경과 같은 바람과 파도 같은 사람들의 사납고 흉흉한 마음을 주님께서 진정시켜주실 것을 믿고 그 믿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님 말씀을 영접한다는 거거든요. 다시 말해서 나에게 퍼부었던 저주의 언어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나를 격려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말씀을 삼켜버리란 말이에요. 그러면 나에게 퍼부어졌던 저주의 언어가 힘이 약해진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긍정의 말씀, 나를 향한 희망의 말씀, 나의 존엄성을 고취하는 말씀, 그 감미로운 말씀을 내가 영접하고 암송하고 내 인생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지금 내게 퍼부어졌던 온갖 악담과 저주들을 무효화시키고 취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죠. 그때 파도와 바람이 잠잠케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배에 올라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천 앞바다에서 하더라도 올라오시지 않을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말씀을 영접함으로 우리가 이 파도와 바람을 잔잔케 하도록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다 말할 수 없지만 여러분 마음속에는 괴롭게 노를 젓지만 전진과 진도가 나갔다는 느낌을 앗아가는 이슈가 있죠? 어떻게 할까요? 내가 원하는 방향을 가지 못하게 하고 내 앞길을 막는 역경이 있죠? 그 역경이 무엇인가 상관없이 그 역경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내가 시달리는 것을 우리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 그걸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내가 이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원한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이 두려움을 격파할 수 있고 돌파할 수 있고 초극할 수 있는 말씀이 이 안에 있는 걸 믿습니다. 말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영접하는 순간 배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나에게 사납게 뛰놀았던 엄청나고 위험한 원수의 악담들 저주언어 역경언어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질 줄 믿습니다. 시편 46편 볼까요? 시편 46편은 새벽시간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이것보세요.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씀, 여러분과 제가 바람과 물결을 거슬러 살기 때문에 이것 자체가 벌써 우리는 두려움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기독교 신앙으로 과연 직장생활이 가능할까? 진짜 직장생활에서 은밀한 의미로 기독교 신앙을 몇 % 관철하며 살 수 있을까? 두려움이 크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가 직장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 직장 생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분명히 있죠. ? 왜 우리는 힘들죠? 우리는 제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훈련 받는 노도광풍에 들려진 제자이기 때문에, 바람과 물결을 거슬러 가는 제자들처럼 우리는 이 시대의 풍조와 가치관을 거슬러서 전진해야 하는 우리의 고달픔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려움이 진지하게 신앙의 여지가 되고, 신앙의 영역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신앙은 진지해지고 이 두려움 때문에 기도는 간절해지고 이 두려움 때문에 동역자는 더 간절해집니다. 이 두려움은 좋은 겁니다. 이 두려움은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고, 영적 감수성을 갱신시키기 위한 하나의 소도구인 것입니다. 나쁜 게 아닙니다. 이 두려움은 진지하게 예수님을 소리쳐 내 인생의 배로 영접하게 만드는 이런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스릴 넘치는 두려움, 이런 두려움은 극적으로 멋지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두려움, 이런 두려움이 여러분에게 일상생활의 무료함과 권태를 파격으로 이끄는 놀라운 은혜의 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려움이 시작되자마자 두려움이 해소되기까지 잘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영적감수성을 회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시대의 물결과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노 젓는 제자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멀어져도 새벽 4시가 되기까지 우리의 배에 오르지 않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이 버려두고 간 빈 배라는 자의식 때문에 하나님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희망 없는 마이너리티에 속했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럴 때일수록 괴롭게 노 젓는 제자공동체의 두려움 가득 찬 삶의 조건에 하감하셔서 주님 새벽에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지쳐서 더 이상 노 저을 힘도 없는 그 순간에 우리의 배로 오셔서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고 멋진 항해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하여 주소서. 주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각각은 괴롭게 노 젓는 삶의 현장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 그들이 괴롭게 노 젓는 삶의 현장에 영적 통찰력을 보내주셔서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 말씀을 삼킴으로 말미암아 저주와 악담과 우리 존엄성을 파괴하는 모든 역경들을 돌파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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