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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요한복음 6:22-34

by 【고동엽】 2022. 2. 12.

주일2부 예배 - 요한복음 6:22-34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

 

요한복음에서 말한 영생을 제가 요한복음 3 16절을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은 보통 우리 한국교회 교우들이 말한 영생과는 다르다, 보통 한국교회는 영생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죽어서 영원토록 사는 것, 이 세상에서 사는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죽어서 영생을 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락왕생과 영생을 보통 같게 생각합니다. 극락왕생은 일단 죽어야만 시작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 극락왕생하소서, 합장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뜻으로 영생을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 아름다운 사회생활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생활, 공동체 생활을 영생이라고 하는데, 이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시편 133편과 신명기 30 14-19절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편 133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영생은 이겁니다.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 그런 형제자매들은 소득의 높낮이가 있고 금전적 차이가 있고, 형제들이 스스로 동의하고 서로 연합하여 동거하는 삶,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은 가장 극단적인 책임으로 매개되면서 하나되는 공동체 삶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헐몬산이 팔레스타인 갈릴리 북쪽에 있는 큰 산입니다. 그 산에 높은 지형성 강우, 높은 산 때문에 밤마다 이슬이 내리는데, 그 이슬이 twinkle down, 떨어져 내립니다. 높은 산에 있는 이슬이 시온의 들판을 적십니다. 높은 산에 있는 이슬이 저지대, 낮은 지대의 산들을 적시는 것과 똑같이 영생은 이겁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영생은 시온의 이슬이 표면을 적셔서 윤택하게 하듯이 하나님께서 위에서 부어주신 사랑이 형제자매를 윤택하게 만들어서 형제자매끼리 사랑과 우애가 가득차게 살아가는 삶이 영생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은 시편 133편이 말한 영생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생과 다른 영생은 일단 죽어서 가는, 오뉴월의 엿가락처럼 죽 늘어진 긴 시간, 이건 잘못된 영생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날 인도종교, 뉴에이지 종교인 인도종교가 말한 영생이 있습니다. 이건 각각 개인적인 사람들이 신과 개별적으로 접선하여서 공중에 붕 뜨듯이 아주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으로 도피하여 황홀한 상태에 빠지는 것, 아편 중독과 똑같은 상태에 빠지는 것, 몽환적인 정신적 황홀상태, 이건 영생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한 영생은 내가 개별적으로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내가 마치 credit card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영생의 핵심은 하나님에게 소유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생을 소유한다는 표현은 맞습니다. 영생을 소유한다는 말은 마치 분할 가능한 것처럼 소유하는 그런 개념의 소유는 아닙니다. 영생을 소유하는데 주변 사람이 다 비참하게 사는 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내가 영생을 소유한다는 말은 사랑과 평온에 가득 찬 공동체에 소유당하는 게 영생입니다. 이웃 사람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내가 개별적으로 들고 있는 것, 소유하는 것은 영생 아닙니다. 성경에 말한 영생은 이런 겁니다. 형제자매끼리, 사회구성원끼리 우애가 가득차고 사랑이 가득 찬 삶을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영생을 우리에게 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영생을 이해하면 예수님을 믿으면 아름다운 사회생활이 가능하고 공동체 생활이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효과가 죽어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공동체 생활에서 새로운 양상을 띠면서 영생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지 안 누리는지를 세상 사람들이 금방 알게 됩니다. ? 죽어서 영생을 누린다면 죽어서 영생을 받기까지 아무도 우리가 영생을 받은 줄 모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이 말한 영생은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자마자 예수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감동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끈끈한 사랑의 힘으로 결속되기 때문에 아마 저긴 영생이 지배하는 공동체구나,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로 영생을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이걸 많이 강조했는데 낯설 수도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3 16절에서 강조했고, 5 27절에서도 강조했습니다. 제가 또 한 번 강조한 게 이겁니다. 기억 안 나죠? 그래서 우리 목사는 여러분이 쉴 새 없이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냥 이 업을 유지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죠? 두 번째로 예수님이 영생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의미 있는 말이었다, 매우 실천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는 걸 제가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했던 영생이라는 말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전혀 다가오지 않고, 우리한테만 비로소 의미 있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말을 듣던 2천 년 전 그 사람들에게 영생은 이스라엘 민족을 집단적인 멸망으로 이끄는 무서운 정치적 위기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놓고 다섯 집단이 경합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집단은 로마제국 치하입니다. 절대강자였던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면서 로마제국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로마제국 사람처럼 옷을 입고 만찬을 즐기면서 로마제국 사람처럼 목욕탕에서 목욕하면서 로마제국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 이들이 로마주의자입니다. 이 로마주의자가 유대 상층부에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세포리스라는 도시에 가면, 지금도 산상도시, 산 위에 있는 도시에 거대한 마차경기장이 있습니다. 이 마차 경기장은 오늘날 F1 카레이스와 같습니다. 마차가 수십 바퀴 돌며 게임을 하는데, 산상도시에 마차경기장이 있다는 말은 친로마주의자가 꽤 많았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절대 지배를 받으면서 그냥 고분고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로마주의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차 경기를 즐기면서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면서 희극 연극계에 출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황제의 돈을 쓰면서 다녔습니다. 로마제국과 정반대의 사람들, 무력으로 로마제국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겠다는 열심당원입니다. 이 열심당원은 로마제국에 대해서 폭력과 무력으로 로마제국을 깨부수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자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폭력으로 깨부수는 것 자체가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답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로마제국을 깨부수어서 이스라엘을 구해본들 그 나라는 이미 이스라엘 나라가 아닙니다. 작은 또 하나의 로마제국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당시에 가장 힘을 가지고 있던 것은 이런 열심당원들입니다. 폭력으로 로마제국으로부터 나라를 건져내고자 하는 폭력적 혁명주의자입니다. 무장독립투쟁을 벌여서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 구해내려고 하는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생을 준다고 하면서, 그 영생 프로그램이 바로 로마제국과 전쟁을 불사하는 무장투쟁입니다. 이 두 극단 노선사이에 바리새인 에세네파 헤롯당 사두개파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에세네파 헤롯당 사두개파는 전부 다 이런 입장입니다. 로마제국에는 어쩔 수 없이 빌붙어야 해, 로마제국의 힘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어, 에잇 로마제국 기분 나빠, 은둔해야 되겠다, 잠적해야 되겠다, 우리 따로 살겠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입장을 달리합니다. 그 중에서 에세네파라는 그룹이 있습니다. 이 그룹은 로마제국을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길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합니다. 현실에 가서 전혀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계속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쿰란에 모였던 에세네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은 기분 나쁘지만 로마제국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상대적 의로움에 가득 찬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헤롯체제는 로마제국의 힘을 위시하여 그 힘을 섬기면서 로마제국의 권력을 위임 받아서 이스라엘 민족을 지배하는 중간 지배계층입니다. 이게 헤롯지배계층입니다. 세상은 오늘날도 이렇게 분화가 돼 있습니다. 절대 악한 강자가 있습니다. 절대 악한 강자에게 맞서는 무장 투쟁단이 있습니다. 절대 악한 강자 밑에 중간 지배계층에 해당하는 헤롯당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런 자들을 미워하면서 아예 광야로 빈들로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시와 장마당과 회당과 성문과 거리에서 사람들을 대인접촉하면서,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치료하면서 세상 한복판에서 로마제국을 압도할 수 있는 새롭고 신령한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 이게 예수님의 일입니다. 이게 바로 영생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짓부수거나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몰아내면서 더 무서운 폭력 국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구원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마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 평화의 공동체 우애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몰아내는 것보다 더 위대한 해방이라고 봤습니다. 예수님의 영생은 이겁니다. 예수님은 로마제국과 군사적 충돌을 통해서 민족전체가 전멸하는 길 대신에 로마제국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제압하여 로마제국 사람마저도 녹아버리는 사랑과 은혜와 평화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을 영생이라고 봤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때 영생이란 말이 정확하게 이런 말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면 민족적 전멸의 길을 걷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헤롯당, 사두개파처럼 살면 이미 로마제국 지배를 충분히 받으면서 생물학적으로 자기목숨을 부지하지만 이미 로마제국 사람과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건 멸망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로마제국에게 복종하면서 로마제국 사람 같은 삶을 살면서 생물학적으로 이스라엘 사람 피부를 가진 이스라엘 말을 쓴다고 그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건 로마인과 똑같잖아요. 로마제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하여 로마제국을 패배시켜서 또 하나의 군사적으로 강력한 나라를 만드는 것, 이것은 대안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처럼 사납게 군사위주의 국가가 돼 있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영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제국과 같은 군사폭력국가로 만들어지는 걸 영생이라고 보지 않고, 로마제국의 배타적 독점권 압제적 착취가 있는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사랑과 우애와 평화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야 말로 로마를 이기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영생은 바로 이겁니다. 로마제국을 이기는 길, 폭력적인 또 하나의 국가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로마제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척이 되는 이유를 알고 그 이유가 되는 삶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야말로 로마제국을 이기는 것이다, 이런 겁니다. 간디가 독립운동 할 때 한 번도 인도인종과 영국인종간의 갈등이 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도 사람 우리가 영국사람 당신을 피부색이 다르다고 배척하는 게 아닙니다, 영국의 총칼이 있고 배를 가지고 다른 종교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억압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러분을 배척하는 게 아닙니다,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배척하는 이유는 여러분의 힘을 믿고 약자를 괴롭히면서 압제하면서 인도민중의 노동을 강제로 착취하면서 압제적으로 착취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걸 배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무명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황토집에 살면서 하루에 두 끼만 먹고 검소하게 적게 쓰면서 우리와 천년만년 이 땅에 삽시다, 가지 마세요, 여러분이 가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도에 살면서 저처럼 사는 것이 참인도인 것입니다, 그 말 듣고 진짜 영국 사람이 무서워서 다 갔습니다. 간디와 살면 일단 하루에 두 끼만 먹어야겠다, 총독이 편지를 썼는데, 이런 간디와 같이 있는 것보다 우리가 철수하는 게 낫겠다, 하면서 급격하게 독립이 됐습니다. 우리가 일본을 왜 쓰러뜨려야만 합니까? 일본을 우리가 배척해야 하는 이유는 게다를 신고 와서 기모노를 입고 와서 일본말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본의 삶의 방식 자체가 너무나 진리에 맞지 않고 인류의 양심에 맞지 않고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에 안 맞습니다, 여러분은 드라큘라와 같습니다, 나의 목에다 빨대를 꽂아놓고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적 삶, 이건 죽어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척합니다, 일본 인종을 배척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로마의 백부장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은 인종 대 인종의 갈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계급 대 계급의 갈등으로 보지 않고, 거짓되고 착취적인 삶과 돕고 섬기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과의 갈등을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생을 준다고 할 때 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영생을 주면 내가 공동체와 화해하고 내 이웃과 영생 평화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에 내가 영생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의 영을 받고 예수님을 믿자마자 내 이웃에게 더 이상 특권적이고 배타적인 특권을 누리려는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웃과 하나 되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웃과 동거하고 연합하는 삶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생이 오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누린다는 그 논리를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미신적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 믿으면 천당 간대, 예수님 믿으면 영생을 얻는대, 라는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는 은총의 힘 때문에 나의 완악한 이기심과 고집스러움과 독점욕과 압제적인 배타적인 마음 등이 사라지기 때문에 형제와 자매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생을 누린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논리입니다. 오늘 본문 27절 보십시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건 오해받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세속 직업을 가진 사람들 이야기,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신학교 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잘 보세요. 썩을 양식은 그 양식을 쌓아놓고 나면 많이 비축할수록 실제로 썩어버리는 양식입니다. 지금 아프리카에 엄청난 기근이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시에라리온 북한 등에 기근이 있지만 세계 식량은 엄청난 재고물량이 남아서 초과 생산합니다. 세계 식량은 너무 많이 남아도는데 왜 아프리카나 북한 같은 데 식량이 왜 안 갈까요? 그다음 또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인들, 농기업인, 기업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양식을 태평양 바다에 버립니다. 버리면서 가나난 사람을 돕지 않습니다. 양식은 그냥 가만두면 진짜 썩어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양식, 굶주린 형제자매들에게 살이 될 때 낭비되는 양식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동거할 때 거룩하게 낭비되는 양식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그런데 내가 비축하여 내가 소비하지 못하고 이웃에게도 나눠주지 않는 양식은 썩어가는 양식입니다. 내가 과잉 축적된 나의 자본과 자산과 이 모든 재산 등이 거룩하게 낭비하여 이웃을 살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축척돼 있기만 한다면 그건 썩는 양식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내 안에 사랑의 분열성,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고 살면, 영원히 존속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드는 관계를 창조하는 데 드는 양식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느냐면, 오병이어는 1인분 양식을 가지고 5천명을 먹였죠? 예수님 자신의 생명은 1인분 인생입니다. 1인분 인생 자신의 삶을 통해서 5천명을 먹이는 이런 삶이야말로 참 영생이다,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겁니다. 맞습니다. 내 안에 있는 작은 생명의 불꽃이 다른 사람을 오천 명 먹이는데 쓰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을 누리는 거예요. 우리는 오천 인분의 양식을 혼자 먹어치우는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오천 명을 먹이는 인생을 살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겁니다. 여러분 사랑의 상대성을 경험한 사람만이 영생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영생을 믿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지 않으면 영생을 사모할 일도 없고 사모할 힘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정말로 사랑에 빠지면 이 관계가 영원히 존속되면 좋겠다는 비로소 소원을 하게 됩니다. 영생은 사랑과 평화 속에 형제자매들과 영원히 사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시간으로 영원한 게 아닙니다. 질적으로 영원히 존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시간적으로 무한히 늘어진 삶, 핵심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영원히 존속될만한 가치가 있는, 즉 이 생명을 창조한 목적에 부합하는 삶,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을 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사랑을 위하여 온 생애를 바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 실현되는 삶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뜻은 예수님처럼 순종하는 삶,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을 쳐다보면 힘이 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먹은 겁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 양식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힘이 진땅 빠져 있어요. 내가 믿는 기독교 신앙 안에서 사는 삶이 가능한가, 기독교 신앙 아닌가, 이런 독한 회의가 들 때 기독교 신앙으로 멋지게 살아가는 성도나 이웃을 볼 때 내가 갑자기 용기를 고취한 것처럼, 내가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것 같은 힘이 난다면 양식을 먹은 거거든요. 예수님을 가만히 보면 힘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모방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 이게 먹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먹는다는 말이 사랑하는 사이에 통속적으로 쓰입니다. 너무 사랑하면 먹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시적인 표현이며 통속적인 표현입니다. 잘못 쓰이면 큰일 납니다. 너를 먹었다, 서로가 서로를 먹었다고 할 만큼 강력한 유대와 일치감, 일종의 식인종적 표현을 쓰게 해서 신학적으로 cannibalism, holy cannibalism이라고 말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겁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가만히 묵상할 때 샘솟듯이 내가 예수님을 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성만찬 때 예수님 살과 피를 먹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나서 힘이 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삶을 볼 때 내가 힘 빠지지 않고, 고독한 신앙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왜 영생을 얻는지 논리적으로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사랑 넘치는 공동체 생활에 적합한 존재가 돼 갑니다. 왜 그럽니까? 예수님은 내가 이웃과 나 사이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서서히 녹여주시기 때문에, 이웃과 내가 하나 되는 것을 매개해주시는 성령의 은사가 내게 복받치는 내가 영생에 적합한 자가 돼서 영생을 소유합니다. 영생을 소유한다는 말은 처음 말했듯이 사랑의 공동체 안에 소유당하는 것이고, 사랑의 공동체 안에 전복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영생을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고 시간과 재능과 모든 것을 바치고 싶고 주고 싶을 때 영생의 공동체입니다. 가향교회가 주고 싶고 바치고 싶고 나누고 싶은 영생이 복받치는 공동체, 바로 영생 공동체, 비자금 은닉 장부도 아니고, 로마제국과 결사항쟁을 벌이는 무장투쟁집단도 아니고, 로마제국의 삶을 대하는 것처럼 빌붙어 사는 것도 아니고, 창조적 긴장을 가지고 로마제국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통치거점을 확보하고 하나님이 독점적으로 다스리는 공동체를 구축해 가는 것이 바로 영생의 길입니다. 가향교회가 영생을 믿는 공동체로서 자의식이 가득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미로운 순종이 가능한 사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항상 더 깊은 순종에 목이 마른 사람, 영생에 들어온 사람, 영생을 소유한 사람이고 영생의 공동체에 소유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대게 그렇기 때문에 교회 옵니다. 교회 오는 게 좋은 게 있습니까? 거룩하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배와 말씀과 찬양이 있기 때문에 좋은 겁니다. 영생을 누리는 공동체 형제자매들의 감미로운 특징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영생을 누리는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영생을 소유하면서 또한 영생을 누리는 공동체에 소유되고 전복되는 형제자매로써 사람다움을 만끽하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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