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1부 예배 - 요한복음 6 :16-21 (두려워 말라)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
우리 인간의 자존감을 파괴하는 두려움, 우리를 으스러뜨리는 두려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가 유한한 피조물이기 때문에 생깁니다. 우리는 죄와 상관없이, 죄 가운데 사는 조건과 상관없이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피조물의 두려움은 바다 한복판에서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그건 죄와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수영을 잘 하는 사람도 바다 한복판에서 불어오는 광풍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 번째 우리의 두려움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행위, 우리가 범했던 죄악의 기억의 추격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판단한 그 사실, 우리가 잘못 판단한 행동의 결과가 우리를 추격합니다. 아담이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가인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가인은 자기가 만난 사람이 자기를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추격당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동산 무화과나무 숲 뒤에 숨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죄를 짓자마자 이 모든 세상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낙엽이 지는 소리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백주의 이 밝은 태양,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왔던 이 밝은 태양도 죄를 지은 사람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왜? 폭로와 노출의 의미가 됩니다. 세 번째, 우리가 두려워하는 까닭은 특별히 우리 삶의 조건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삼성 이건희 회장은 시장을 더 많이 지배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1조 재산을 가진 이맹희는 8조 재산을 가진 이건희와 소송을 벌였습니다. 이들의 두려움은 실체가 보편적으로 공감 안 되는 실체입니다. 재산을 더 많이 가질 것인가, 갖지 못할 것인가의 문제는 생존의 벼랑 끝에서 느끼는 두려움과는 다른 것입니다. 특수한 삶의 조건에서의 두려움, 이 두려움은 너무 달라서 보편적 공감대가 없는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는 보편적 공감대가 있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두려움, 특수한 삶의 조건에서 오는 두려움은 공감이 없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두려움입니다. 저마다의 물결과 싸우고 있습니다. 네 번째 두려움은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강력한 결속을 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 창조적으로 기획된 두려움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자녀와 하나님의 성도에게 주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영적 감수성을 각성시키는 두려움입니다. 이 네 번째 두려움은 택함 받은 자의 두려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한 사람에게만 주는 두려움이기 때문에 이 두려움은 고린도교우들이 사도바울의 편지를 받고 느꼈던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창조적 두려움으로써 평안을 느끼게 만드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과 죄 때문에 내가 당하는 곤경 사이에 많은 혼선이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을 만났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적으로 기획한 두려움이란 생각을 못하고 혹시 내가 범한 죄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가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네 가지 두려움을 다 취급하십니다. 이 네 가지 모든 두려움이 우리 하나님께서 취급하시고 도와주실 수 있는 두려움이고, 전부 다 우리 하나님이 해소시킬 수 있는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마지막, 모든 두려움의 끝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이 죽음은 지금 우리가 말하면 자존심의 파괴 손상 명예의 손상입니다. 그다음 생물학적인 멸절, 이것도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목숨이 죽는 것과 똑같이 사회적 명예의 손상에서, 내가 누렸던 사회적 명예 신용이 바닥날 때 사실상 사람은 죽습니다. 사실상 생물학적 멸절과 사회적 명예의 손상은 똑같은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한 마디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질병에 관한 두려움, 갑자기 우리가 실직할 것에 대한 두려움, 연애가 성사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전부 다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예후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없는 자처럼 대접 받는 겁니다. 내 존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대우 받는 것, 멸시 당하는 게 죽음입니다. 내 존재 자존감을 만끽하지 못하게 만드는 관계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 마디로 죽음의 공포다, 죽음의 두려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로가 다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에 너무 격앙돼 있습니다. 너무 흥분해 있습니다. 50명씩 100명씩 자리에 앉혀 놓고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서 떡을 먹였습니다. 예수님을 강력하게 억지로 왕 삼으려는 군중의 열기 앞에 예수님이 어찌 할 바를 모릅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군중의 열기 파도가 밀어닥쳤습니다. 떡 문제를 해결하면 왕이 되는 것, 이건 사회주의 실험, 인류 안에서 실험된 겁니다. 빵을 가지고 군중을 먹이면 왕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면서 아직까지 완료되지 않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혁명에서는 떡 문제 빵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인간의 자유를 박탈하지만 빵 문제를 해결하면 왕이 되었습니다. 6장 15절에 보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쇄도하여 몰려와서, 이런 뜻입니다.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예수님을 임금 삼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로마제국과 헤롯체제에 반기를 드는 항쟁하는 혁명군의 앞잡이로 삼으려는 걸 안다는 뜻입니다. 위험한 일이죠? 지금 왕이 있단 말이에요. 헤롯 안티파스라는 왕이 있고 또 그 위에 로마제국이 있단 말이에요. 예수님을 임금 삼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헤롯 체제와 로마제국 체제를 돌파하여 달라는 요구를 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시 혼자 산으로 갔습니다. 표적을 행하면 어떤 위험이 있어요? 표적을 행하면 우리가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표적을 행할 능력을 안 주시는 게 좋아요. 만일에 지나가다 제가 아픈 사람을 만지는데 낫는다, 이러면 미어터집니다. 그러면 설교 들려 달라고 하지 않고 만져달라고 합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게 아니라 김회권 목사가 한 번 만지기만 하면 낫는다더라, 이런 소문이 퍼지면 케리그마는 더 이상 전파되지 않습니다. 왕이 됩니다. 그보다 더 조약돌 5개를 가져오십시오, 바로 5kg짜리 육 고기가 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억지로 끌려서 임금이 됩니다. 표적을 행한 것이 예수님께 굉장히 정치적으로, 아주 위험한 상태를 초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든 거예요. 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를 즐겼던 사람은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격앙돼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파도에 춤을 춥니다. 예수님은 파도의 음모에 대해서 영혼이 크게 위태로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무리를 따돌리고 산으로 홀로 잠적해버립니다. 산에 가서 오랫동안 기도하는데, 이 시간이 아마 오후 6시 정도라고 생각합시다. 예수님께서 밤에 나타나신 시간은 새벽 4경입니다. 새벽 4경이라는 말은 3-6시 사이에 나타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약 몇 시간 동안 제자들과 떨어져 계신 겁니까? 약 10시간 9시간 떨어져 있었던 겁니다. 제자들은 10시간 9시간 동안 20km 밖에 되지 않는, 지금 이 장소에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인데, 디베랴 바다에서 직선거리로 20km 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개 사선으로 갑니다. 가버나움이 12시에 있고, 가버나움 12시 오른쪽에 벳새다가 있어요.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가려고 하는데 가버나움이 디베랴 호수, 왼쪽 같으면 시계 9시 방향에 있는 도시에요. 시계9시 방향에 있는 도시에서 가로질러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리가 매우 가까운 겁니다. 10km도 안 됩니다. 만일 시계 12시 방향에 있는 가버나움과 가장 먼 거리는 이론적으로 6시 방향에 있는데, 6시 방향에서 12시 방향까지 20km밖에 안 된단 말이에요. 9시간 동안 시속 2km만 가도 갈 수 있는 거리거든요. 갈릴리 바다에서 보면 헬몬산과 요르단 계곡에서 밤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면 배가 나가질 못합니다. 그 돌풍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가보면 갈릴리 바다가 매우 적습니다. 물 양이 줄어들었습니다. 아마 예수님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을 거라고 봅니다. 약 9-10시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이 떨어져 있고, 제자들은 가버나움으로 갑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집, 예수님의 베이스캠프로 가는 겁니다. 퇴근하는 겁니다. 퇴근하는데 대개 이변이 없으면 이렇게 늦은 밤까지 안 돼서 바로 가야 합니다. 바닷바람이 불기 전에 가야 합니다. 그러면 6시 정도 들어가서 7시 안에 식사를 해야 하는데, 제자들이 왜 안 갔는지를 모릅니다. 왜 제자들이 늦게 출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과거완료 분사가 쓰였습니다. 이미 어두웠는데 제자들이 안 간 겁니다.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 두 가지는 과거완료입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건 미완료시제입니다.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미완료시제입니다. 미완료시제라는 말은 점진적으로 상황이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가고 있는데 삽입구문이 두 개가 있습니다.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 말은 예수님과 같이 가려고,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가려고 안 간 겁니다. 그건 시제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과거 완료시제입니다. 과거완료 시제를 썼다는 말은 어둡기 전에 예수가 올 걸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에요.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 구문은 삽입구문으로 집어넣으세요.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는 그 예수님을 모시고 개선행렬, 멋진 기억을 말하면서 가려고 했던 겁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닙니다. 제자들이 열광적인 군중의 추종 열기에 감동 받아서 마음이 격앙돼 있는 걸 보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 냉각, cool down이 필요하다고 봤어요. 예수님은 같이 안 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있다는 말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시 말해서 왕으로 추대 받는 이 분위기는 제자들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겁니다. 오늘 날 종교지도자들과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금식기도를 몇 번 했는가를 적습니다. 금식기도 5번, 우리 동기 중에도 한 명 있는데, 아주 웃긴 사람입니다. 금식 기도 여섯 번째 들어갑니다, 라고 온 사람에게 사십일 금식기도 들어가는데, 아직까지 빚이 십 몇 억 있습니다. 금식기도를 여섯 번 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올 것 같지 않아요. 수많은 병을 고친 것을 라이선스처럼 하고, 오늘 집회가 있습니다, 오게 합니다. 예수님은 한 번의 표적을 행하고 감추기에 급급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 miracle maker, miracle performer로써의 자기 위상이 부각될수록 회개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데 방해되기 때문에 그걸 은닉하고 감췄습니다. 여러분, 제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자가 되는 게 좋겠습니까? 청계천 서울역에서 모든 사람을 고쳐서 miracle maker가 되는 게 좋겠습니까? miracle maker, 제가 한국사회에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손해입니다. 예수님이 왜 안 갔는지 알겠죠? 이렇게 추종하는 것은 요한복음 6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 때문에 이렇게 추종하는 겁니다. 6장 22-69절까지 무리들과 예수님 사이에 나오는 대화를 보면, 예수님이 표적을 행한 이유는 예수님 자신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예수님이 표적의 떡을 만들어 준 겁니다. 표적의 떡을 만든 이유는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표적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먹고 마시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만든 그 기적 쪼가리를 먹고 마시려고 한 겁니다. 이해가 됩니까? 예수님을 먹고 마시려는 기독교는 예수님을 모방하는 기독교, 예수님의 정신으로 가득 찬 기독교, 예수님의 실천과 순종으로 가득 찬 기독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이 만든 표적의 떡을 먹는 기독교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겨놓고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이니까 얼마나 다른 기독교에요.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해놓고 속으로는 자기 아젠다,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해서, <예수 우리 왕이여> 라는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 아닙니다. 순종 없이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이 자들은 예수님을 우상 숭배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우상 숭배하는 자는 예수님을 왕이라 해놓고, 그 예수 이름으로 자기의 저급하고 열등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기독교란 말이에요. 너무나 다른 겁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오병이어 표적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이 왕이 되고자 함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사람, 하늘의 은혜요 생명의 떡,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는 그 비법을 터득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말뜻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한 번 순종할 때마다 힘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순종을 많이 할수록 에너지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10년 순종한 사람은 하나님께 10년 불순종한 사람보다 엄청 에너지가 많은 겁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은 영권이 생깁니다. 악과 죄와 악령의 세계를 제압할 수 있는 영권이 누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힘내는 사람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겁니다. 이걸 가르치기 위해서 하늘의 생명 떡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이걸 원래 논문으로 쓰실 수 있는데 예수님은 논문을 쓰시지 않고 이렇게 보여주신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가려다 한참 기다렸다가 늦게 출발했습니다. 18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가 경주보문단지에 가서 부부 네 사람이 오리보트를 타고 갔습니다. 경주보문단지는 갈릴리 호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작은 저수지입니다. 한 번 보세요. 얼마나 위험한지, 그 저수지에 보트를 타고 호수를 보러 갔습니다. 날이 아주 쾌청했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검어지더니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바람이 부는데 아무리 저어도 가지 않습니다. 누가 건졌는지 압니까? 비상탈출배가 와서 건졌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저어도 바람 때문에 가지 않기 때문에, 그 작은 호수는 제가 헤엄쳐서 나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만, 못 나가게 하더라고요. 가만히 거기 계세요, 하면서 부대가 와서 우리를 체포해서 건졌습니다. 제가 한 번은 미국 브래들리 비취에 가서, 미국 대서양 연안 프린스턴에 서 쭉 배를 타고 60마일 가면 해변이 있습니다. 굉장히 좋은 해변인데 경포대 같은 해변입니다. 거기서 해수욕을 하는데 하은이 소은이가 어렸을 때입니다. 8살 9살 되던 때인데, 맑은 해변에 갑자기 엄청난 파도가 몰려오는데 아이들을 둘 다 데리고 바다로 가는 겁니다. 제가 아마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비된 날이 그날입니다. 제가 완전히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광풍과 싸우면서 아이들을 건져내는데 이 아이들이 2년 간 바다만 보면 너무너무 공포에 질려서,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엄청 무서웠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돌풍이 부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 좁은 바다에서 10시간 동안 배를 젓는데 간 거리는 3마일입니다. 3-4마일밖에 못 간 겁니다. 그렇게 10시간 사투를 벌였습니다. 바닷물이 엄청 무섭고 바람이 무서운 걸 알았겠죠. 그런데 더 무서운 걸 봤습니다. 19절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트리파토스, 트리파테, 바다 위를 뚜벅뚜벅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파도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렸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귀신이라고 소리쳤다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 이스라엘이랑 우리랑 똑같은 것 같아요. 바닷가에서 주로 하얀 옷 입고 나타나는 귀신이, 아마 제자들도 우리와 같은,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귀신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유령이라고 소리쳤는데, 유령이신 예수님을 보니 파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파도에 대한 두려움, 바람에 대한 두려움이 유령 같이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삼킨바 됐어요. 예수님이 이렇게 공포와 괴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나타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 지점이 너무 paradoxical 하고 역설적입니다. 이렇게 죽음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이게 전형적으로 성도의 두려움입니다. 앞에 제가 말했죠? 피조물일반이 겪는 두려움, 죄인이 겪는 두려움, 그다음 특수상황에서 겪는 두려움, 그것과 다릅니다. 성도가 하나님 뜻 가운데서 겪는 두려움은 반드시 극적 결말이나 해결이 있다는 겁니다. 이걸 여러분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 두려움의 정체를 분석해야 합니다. 피조물일반이 겪는 두려움인지, 내가 구체적으로 지었던 죄 때문에 겪는 두려움인지, 아니면 나에게만 있는 특수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cooling down, 영적으로 냉각시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적 감수성을 회복시켜서 예수님 자체에 몰두하도록, 예수님 자체가 내 인생의 항해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분이라는 걸 순식간에 깨닫게 하여서, 영적 감수성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이 위기와 두려움이 왔는지, 이걸 구분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경험이 가끔 있습니다. 예수님이 머리를 풀고 오신 것 같지는 않고, 두려워서 귀신이라는 말을 듣고 황당했겠지만, It's me! 귀신 아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하셔서 제자들을 안심시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숙고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짜 우리 경배를 받은 이유는 단순히 마음씨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단순히 자비로워서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신적능력의 사용자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사무치게 그리운 순간은 우리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 앞에 있을 때 예수님이 그 장애물을 딛고 그걸 정복하고 제압하고 우리의 배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온 이 장면이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여러분께서 선하신 예수님, 자비로우신 예수님도 많이 묵상하세요. 그러나 또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을 묵상하셔야 합니다.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배 안으로 오셔서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 두려움은 예수님께서 조장하신 두려움이고, 예수님께서 같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두려움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교육적으로 영성심화학습을 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두려움이기 때문에 그 두려움의 원천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 두려움의 실마리를 끊어내셔서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괴롭게 노를 젓고 있는 사태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공동체적으로 노를 젓습니까? 마태복음 14장 22-27절, 마가복음 6장 45-52절은 제자들이 괴롭게 노를 젓고 있다고 했습니다. 괴롭게 노를 젓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사태가 있습니까? 우리가 소리도 지를 수 없을 만큼 아무리 밤새도록 10시간 동안 노를 젓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고 소원의 항구까지 가지 못하는 이런 사태에 놓여 있는 사람, 이런 사태가 있다는 말은 반드시 예수님과 극적인, 가장 강력하게 극적인, 아니면 좀 덜 극적인 그러나 예수님이 답합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예수님이 반드시 우리 성도에게 우리 교우에게 하실 줄 믿습니다. 저는 이걸 믿습니다. 여러분께서 배 위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태가 반드시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 두려움의 정체를 정확하게 분석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영적 감수성이 둔해집니다. 언제 영적 감수성이 둔해지냐면 잘될 때 더 둔해집니다. 차라리 인생 자체가 안 풀릴 때는 그 자체가 영적이 됩니다. 인생이 안 풀리는데 어떻게 영적이 안 돼요? 그러나 영적인 영성이 확 줄어들고, 내가 피조물의 표면적인 성취와 사태에 만족할 때는 잘 풀릴 때입니다. 모든 게 잘 풀릴 때는 50명씩 100명씩 앉혀서 폼 잡으면서 제자 됨의 특권을 누리던 그런 때가 바로 영적 감수성이 회복돼야 할 때입니다. 파도와 바람에 시달리면서 예수님 자체를 목 놓아 기다릴 때 영적감수성이 회복됩니다. 예수님 자체, 예수님 자신이 우리 배에 타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직장의 배에 타셔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가정의 배에 타셔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내 학습, 내 대학생활, 내 생활의 배에 오셔야 합니다. 예수님 자체 구도로 몰입하셔야 해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야,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내 배 위에 오른 그 효과를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약간 격앙되어서 형통케 되어 간다는 느낌이 될 만큼 이제 내 인생이 이제 견고한 반석에 섰다는 느끼는 그 순간, 예수님이 여러분의 빈 배, 풍랑에 시달리는 그 배에 오지 않는 그 사태, 예수님의 부재사태를 문제 삼으면서, 예수님이 없기 때문에 내 인생항로가 전진이 안 되는구나, 그걸 뼈저리게 느끼셔야 해요. 예수님이 내 배위에 없다, 예수님이 내 인생의 배 위에 없다, 그래서 나 혼자 괴롭게 노를 젓고 있다, 이런 종합적 신앙적 분석을 할 때, 그렇게 사무칠 때 예수님이 새벽 4시에 도와주십니다. 시편 46편이 바로 이 신앙고백이라고, 저는 어젯밤에 읽으면서 은혜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돕는다는 말은 하루의 새 시작점, 새벽은 한 날의 끝이면서 하루의 시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는 말을 했죠? 우리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획하신 두려움,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조성하신 두려움, 예수님이 조성하신 풍랑, 예수님이 조성하신 바람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알겠죠? 이 바람은 원수의 바람이 아니고 원수가 보낸 파도가 아닙니다. 이 바람과 이 파도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내 위에 일어난 바람이다, 예수님은 이 풍랑과 파도를 돌파하셔서 내 배에 반드시 오실 것이다, 예수님을 향해서 사무치게 애타게 예수님을 찾는 마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획하시고 조성하신 두려움의 파도, 성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라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꼭 이 경험으로 두려움의 파도 두려움의 바람을 극복한 신앙 간증들이 차곡차곡 쌓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죄와 상관없이 살면서 영적감수성이 둔해지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애타는 목마름이 감소되고, 예수님에게 몰입되어 가기 보다는 사람에게 치이고 몰두하고 기대하고 사람을 믿었다가 상처받는 연약한 자입니다. 내 인생이 공중에 부양하는 것처럼 잘 풀리고 있는 그 순간이 주님이 만드신 풍랑과 바다에서 훈련받아야 할 때인 줄 믿습니다. 풍랑과 바다가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 밀어 넣을지라도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그 새벽에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이 기획하신 두려움, 주님이 조성하신 바람과 풍랑을 사탄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풍랑과 바람 배후에 계심을 믿고 이 환난을 이겨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다가오는 일주일 동안 우리 형제자매들 풍랑을 이겨가며 예수님을 배에 영접하여 힘찬 항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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