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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5:1-13

by 【고동엽】 2022.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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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금) 53강

 

본문: 로마서 15:1-13

제목: 성경이 기록된 목적=교훈, 위로, 소망으로 지탱

 

로마서 15장 1절부터 13절은 14장의 주제를 이어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특한 것은 바울이 이방인을 다시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이 말은 코테이션 마크(“”)입니다. 이게 인용부호가 있어야 됩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소위 믿음이 강하다고 믿는 우리 이방인 출신 신자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강하다는 말이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이방 신전에 바쳐진 제물들을 기탄없이 먹는 사람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죠. 그러니까 이방 출신 신자들의 입장에서 지금 이제 말을 합니다. 바울이 입장을 약간씩 바꾸고 있죠? 제일 처음에는 이방인 신자들의 그 육식, 그 이방 신전에 바쳐진 육식을 비판하는 유대인들을 은근히 꼬집는, 그 이방인 출신들을 핍박하지 말라고 유대인 출신 신자들을 은근히 이렇게 비판했다가요. 어제는 유대인 신자들의 그 입장을 은근히 두둔했다가요, 또 오늘은 다시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 이렇게 말하면서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바울이 은근히 자기를 수사화법적으로 동일시합니다.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 믿음이 강한 우리, 이때 믿음이 강하다는 이 말에다가 인용부호를 써야 된다는 거죠. 진짜 바울이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너희 이방인 신자들 이런 뜻입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 이것도 코테이션 마크 인용부호 해야 됩니다. 요 말들은 바울이 이 말을 쓰기 전에 로마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이 설왕설래 했을 가능성이 많은 거죠. “믿음이 우리는 강해, 우리는 믿음이 약해” 뭐 이런 식으로 아마 했을 거예요. 그래서 믿음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자, 믿음 강한 사람의 특징은 진짜 믿음이 강하다면은 타자에 대한 배려가, 형제에 대한 배려가 강한 사람이죠. 그러니까 믿음이 강하다는 사람은 신념과 고집이 강하다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와 동정심과 역지사지의 마음이 강한 것이 믿음이 강한 거죠. 그러니까 우리 보통 믿음이 강하다 할 때 “어, 장로님 믿음 있습니까?” 하면은 “예, 저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번에 저기 서울시 마곡동에 땅을 사서 교회 이전하는 그것에 대한 믿음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대개 땅을 사서 이전하는 쪽에 장로님들이 5명 나오고, “아, 우리 교회가 지금 그렇게 크지도 않고 교우들의 헌금 부담이 커지니까 안 될 것 같습니다. 좀 가지 맙시다.” 이렇게 믿음이 약한 장로가 한 2명 그러니까 5:2로 대개 교회 건축을 앞두고는 항상 믿음이 강한 자가 항상 건축주의자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성도의 재정 부담을 걱정하는 소극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럴 때 믿음이 강하다는 말은 뭐죠? 고집이 세다는 말이죠. 여러분 그러니까 믿음이 강하다는 말뜻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심이 크고 유연성이 크다는 말이에요. 절대로 내 고집이 세다는 말이 아니고 그러니까 믿음 강한 사람, 그 사람은 타인에게 맞추는 자기 조정능력이 큰 사람이죠. 우리 믿음이 강한 자들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그 이방 신자들에 한 번 비튼다고 그럴까요? 우리 이방 신자들 믿음 좋다고 주장했는데 “그렇지 우리 믿음 좋은 사람들은 저 고기 먹지 못하는 믿음 약한 사람들 봐 줍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의 본받을 대상이 됩니다. 3절부터 5절은 예수님이 본받을 대상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고 오히려 그리스도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다가 비방을 받았습니다. “기록된바 비방하는 자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여기서 보면은 비방하는 자의 비방이라는 말이 시편 69편 9절인데, 요 시편 69편 9절 문맥을 바로 보지 않으면 요 말뜻을 이해하기 힘들거든요. 여러분 이런 경우는 인용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죠? 여러분 인용의 이유가 분명하지 않을 때는 69편을 찾아 보셔야 돼요. 여기 본문에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것 하고 주를 비방하는 자의 비방이 내게 미쳤다 언뜻 연결이 잘 안 되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69편 9절에 보면은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지금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할 때 제자들이 인용한 성경 구절이거든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고, 떼강도의 소굴로 만든 예루살렘 성전을 사정없이 척결하면서 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이 집은 세계 만민이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의 성전을 개방하기 위하여 비방을 초래한 분입니다. 주의 열성, 주님의 집에 대한 열성이 너무 강하여 즉 이방인을 영접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그 태도가 이방인을 영접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하는 이방인 허용접근 시대를 열기 위해서 성전을 청소했습니다. 유대주의적, 배타주의적, 선민사상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성전을 막 청소했습니다. 그 성전을 청소한 예수님의 사건을 보면서 제자들은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합니다. “주의 성전을 향한 열심이 나를 삼켰나이다.” 성전을 이렇게 만민 개방적인 성전으로 만들려고 했더니 아~ 예수님에 대한 그 성전 권력 엘리트들의 그런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예수님도 만민을 품기 위하여 성전을 척결하다가 비방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니까 나 아닌 자, 내가 아닌 타자, 만민 개방적인 이 태도가 예수님께 비방을 초래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만민 지향적인 예수님이기만 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할례 받는, 율법 아래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율법을 존중했습니다. 세계 만민을 품으려고 했던 우리 예수님은 조상들에게 주신 전례품, 전례 관습인 율법 전통을 존중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초극하신 분이고 율법을 초과 성취하여 율법을 문자적으로 안 지켜도 되는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또한 율법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그토록 유대인들이 강조했던 할례를 기꺼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만민에게 개방하기 위해서 비난을 초래했던 그 바로 그분이 또한 유대인들의 전통인 할례를 존중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이렇게 만민을 포용하려는 마음도 계셨고 유대인들의 전통을 존중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 이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됩니다.

 

5절입니다. 본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본받는 과정 안에, 우리는 본받는 과정 안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때는 구원이 만개한 때가 아닙니다. 4절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는 구원이 만개한 때가 아니라, 만개하고 완성된 구원을 기다릴 때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입니다. 이때 성경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교훈은 지금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허용은 뭡니까? 인내로, 성경의 위로로 장차 더 꽃 필, 장차 더 만개할 그 구원을, 그 구원을 소망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으면은 소망하는 능력이 강해집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절망에 쉽게 길들여지지 마십시오! 세상은 우리에게 절망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세상은요. 우리가 세상을 돌아볼 때 절망할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절망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참상, 이 실존적인 이런 추락을 지탱하고 막아주는 것이 성경의 백과사전적인 위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백과사전적인 사례별로, 용례별로, 위로로 우리를 지탱해 주고, 우리를 지지해 주고, 우리를 부축해 줍니다. 그래서 15장 13절과 15장 4절이 같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최대의 위로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절망할 때, 우리가 절망하고도, 절망해도 마땅한 만큼 처참하게 넘어졌을 때, 쓰러졌을 때 그때 일으켜 세우게 만드는 인내와 위로의 능력이 엄청 크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성경이 인내와 위로의 능력이 크기 때문에 이 성경의 내적논리의 함의는 내가 마음을 열고 나면은 성경 안에 넘치는 그 엄청난 인내와 위로의 힘이 나를 지탱하기 때문에 나를 지탱하는 성경의 인내와 위로가 내 정신을 부축하기 때문에 절망과 절망을 강요하는 이런 무지막지한 야생적인 현실 앞에서도 버티고 나아갈 수 있는 거죠.

 

그래서 13절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신실성 안에서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하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들에게 소망이 넘치길 원합니다. ‘아하~ 성령 충만하다는 말은 이것이구나! 소망을 굳게 붙드는 능력,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일에 대한 상상력을 불 지피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구나!’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5절입니다. 다시 5절입니다. 성경도 우리를 소망 가지게 만들고, 성령의 능력도 우리를 소망 가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 로마서 8장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로마서 8장에 보면은 소망이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아직도 몸의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몸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몸이 속량되기 전까지는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몸이 먹는, 먹고 마시는 문제 때문에 우리가 작은 분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 몸의 속량이 될 때까지, 그때까지 소망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읍시다.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이방인을 품기 위하여 동족에게 비난을 받았던 분입니다. 즉 타자를 품기 위하여 고난을 자초했던 분입니다. 그래서 서로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받으셨듯이 여러분, 이방 출신 신자 여러분, 유대인 출신 신자 여러분, 서로를 받으십시오. 서로를 환영하십시오. 서로를 영접하십시오. 그래서 5절입니다.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절입니다.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아하~ 우리 서로 대립하던 성도들이 서로 받으면, 대립하던 성도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면은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구나!’ 그렇게 깨닫는다는 거죠. 그래서 갈등하고 대립하던 교우들이 서로 한마음이 되면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7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 정말 원리가 분명하네요.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는 유대인 출신 신자들을 받고,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이방인 출신 신자들을 받으면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는 거죠. 이렇게 받으라. 이제 지금부터 성경을 6군데 인용합니다. 지금부터 성경을 6군데 인용합니다. 자,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본받는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청소하다가 만민에게 성전을 개방하기 위하여 성전을 청소하다가 비방을 초래했는데 그 그리스도께서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습니다.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할례 추종, 이 예수님의 율법 순종 이것의 결과 율법의 의를 100% 이룬 예수님 때문에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인들을 위한 성전이 되었고 족장들에게 왔던 그 구원의 복이 바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쳤다, 이 내적 논리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하게 붙들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하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할례의 그 율법을 다 지켰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임했다는 거죠. 이것이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관습, 율법을 지켰던 것이 끝내 이방인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유대교인들이, 유대교 신자들이 그렇게 조상들이 낸 관습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것들에 대한 약간 동정적인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이 끝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견고하게 하시고 심지어 할례까지 감수했는데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의 성전이 되고, 이방인들도 그 크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6개의 성경구절 인용됩니다. 시편 18편 49절입니다.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바로 이런 시대가 도래 했다. 다윗이 노래하던 시대가 도래 했다. 그 다음에 신명기 32장 43절입니다.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모세도 바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던 시대를 열어제쳤다. 그다음에 세 번째 또 인용 구절입니다.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17편 1절입니다. 자, 이것은 지금 열방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참여하고 있는 이 구원에 참여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열방들이 한 몸을 이루는 찬양공동체를 이루는 그 장면을 말합니다. 그다음에 드디어 이사야 11장 10절입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아하~ 열방이 두어야 할 소망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구나, 그래서 결국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이렇게 열방을 견인하고 향도하기 위하여 이렇게 분투했던 그 조상들의 후손이다, 결국은 “이방인 신자 여러분, 여러분들이 두어야 할 소망은 여러분이 지금 멸시하고 있는 이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조상들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1500년 동안 보관하고, 보양했다가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방인 여러분들의 소망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속했던 그 아브라함의 후손 공동체의 그 후손인 예수님이 여러분의 소망입니다. 열방 여러분, 여러분들이 두어야 할 소망은 이생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입니다.” 하면서 이렇게 쭉, 이제 약간 유대인 신자들을 약간 영적으로 격려한다 할까요? 그러니까 유대인 신자들을 함부로 멸시하고 무시하면 안 된다, 약간 뼈대 있는 집안 자손이다 뭐 이런 내용을 약간 말해주는 겁니다. 장로님? 장로님 15장 13절 읽어주십시오. 너무너무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여러분, 오늘 하루도 모든 희망을 빼앗아가는 불행한 사태 앞에 넘어지지 말고, 무너지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하는 능력이 가득 차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병들어가는 부모님을 볼 때 우리는 소망이 끊어지고, 점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는 자녀들을 볼 때 우리는 소망이 끊어집니다. 하나님, 이 소망이 끊어지는 시대에도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랄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 오늘 가득 차게 도와주시옵시고 우리 가향교회 앞날을 생각할 때 불안도 있고, 설렘도 있고, 기대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온갖 복잡한 생각이 가득 찬 우리 사랑하는 가향 교우들에게 소망의 능력이 가득 차게 도와 주시옵시고 끝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극준 형제 아버지를 기억해 주시옵시고, 우리 이선희 권사님 부모님을 기억해 주시옵시고, 우리 연우 형제 부모님을 기억해 주시옵시고, 우리 사랑하는 윤진 자매가 내년 7월에 아름다운 옥동자, 옥동녀를 출산하도록 도와주시옵시고, 우리 명헌 형제, 아버지 하나님 암을 이기고 산 노루처럼 뛰어가는 청년으로 부활되게 도와주시옵시고, 우리 계영 자매님 복사꽃처럼 피어나는 청년이 되게 도와주시옵시고 소망하는 청년들이 되게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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