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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일(목) 52강
본문: 로마서 14:13-23
제목: 하나님=성령 안에서 의, 평가, 희락 향유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과 놀랍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제 본문은 로마서 14장 1절로 12절 말씀은 이방 신전에 바쳐진 육류, 고기를, 봉헌된 고기를 구매해서 마음껏 먹는 사람들, 이 마음껏 먹는 사람들을 약간 옹호하고 이방 신전에 바치는 음식을 먹지 못하여 채소만 먹으면서 그 이방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막 먹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유대인 출신 신자들을 약간 꼬집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용은 반대입니다. 오늘 내용은 ‘이방인 신자들의 그 거리낌 없는 자유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대원리, 어떤 원리를 훼손한다면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집이 다 떨어져 살았는데 음식을 먹는 것을 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러니까 A라는 유대인 출신 신자가 B라는 이방인 출신 신자가 고기를 먹는지 어떻게 알았냐고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문제는 제가 전에 말씀 드렸듯이 로마 교회는 로마의 유력자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건물 예배당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라는 말은 뭐죠? 고린도 재무장관 가이오의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뭐죠? 에베소에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말은 뭐죠? 요즘 말로 하면 한 150평정도, 200평정도 되는 집터에, 집안에 주인이 사는 집이 있고, 손님이 사는 집, 약간 객사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옛날 유력자의 집은 항상 공간이 구획돼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란 말은 예배당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유력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뜻이거든요. 유력자의 집에서 모인 모임을 교회라고 그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식사를 같이 했거든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요즘 말하면 파트락(potluck),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가지고 먹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방 신자들은 로마의 시장에 있는 이방 신전 봉헌물인 고기를 명백하게 사서 애찬의 식사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포도주도 많이 가져오고요. 그런데 가난한 신자들은 포도주도 충분히 준비 못하고, 음식도 준비 못했는데 문제는 이 가난한 신자들이 대개 유대인 출신, 난민 출신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육류 고기를 살 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유대인의 그 정결예법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만찬 비슷하게 애찬을 하는데 저쪽 구역에서는 고기를 열심히 먹는 육식 클럽이 있고, 이쪽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가난한 채식 클럽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은근히 정죄하는 이 수군거림이 이 채식 클럽 구역에서 나오니까 바울이 고기를 먹지 않는 그룹과 고기를 먹는 그룹이 나누어지니까 바울이 이제 개입을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서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깊숙하게 개입할까요? 자기가 개척한 교회도 아닌데, 그러니까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편지에 요청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고린도후서를 보면은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교회를 개척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막 명령을 하고, 권면하고 좀 압박을 하거든요. 그런데 로마서 14장은 고린도전후서에 비하면 굉장히 신사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만 약간 말하고 있는 이런 셈이라는 거죠. 신사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누가 고기를 먹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주의 날에 모일 때마다 애찬을 했는데 그 유력자의 집안에 있는 교회 객사에서, 회당에서 모였던 예배당에 훤하게 보이는 데에서 식사를 서로 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들과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유대인 출신 신자들로 나뉘어졌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벌써 약간의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고기만 먹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약간 믿음 없다고 깔보거나 고기를 먹지 않고 일부러 채소만 먹는 사람들이 저기 이방 신자들의 그 어떤 야생적 날것 냄새를 내는 이런 약간 덜 기독교인 된 이런 사람으로 은근히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어제 본문은 “이방인의 신전에 바쳐진 음식이라도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정한 음식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 이렇게 해가지고 이방 출신 신자들의 그 육류 소비를 비난하는 유대인 출신 신자들을 은근히 꼬집었다면 오늘은 반대입니다. 오늘은 뭐냐 하냐면은 “주 안에서 무슨 음식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그런데 내가 이 음식을 먹는다고 음식을 먹지 못하고, 이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 일부의 사람들이 자꾸 넘어지고 양심이 불편해진다면 먹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 참, 이렇게 권면하면 굉장히 스트레스 받을 것 같습니다. 고기를 매일 먹어야 되는 사람들은. 그래서 너희 선한 일 즉 16절입니다. 로마 신전에 바쳐지는 고기라도 양심껏 먹을 수 있다는 이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왜냐 하면은 하나님 나라는 비본질적인 것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들은 본질적인 것들을 위해서 양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로마 교회의 핵심은 뭡니까?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먹어야지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이 문제 때문에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내 자유가, 내 양심의 자유가 형제, 자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은 억제하고 자기 부인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했습니다. 캘빈의 기독교 강요 제3권 20장에는 기독교인 됨의 가장 중요한 어떤 미덕을 ‘자기 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타자에 대한 배려’ ‘형제에 대한 배려’ ‘자기 부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논리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내가 이방 신전에 바쳐진 육류를 사서 먹어도 내 신앙에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는 것,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육류 소비를 거리낌 없이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저기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수군거림을 일으키고 뭔가 양심에 불편이 있다면 내가 일정량 그들이 나를 이해할 때까지 참아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유대인 출신 중에서 마음씨가 착한 신자가 있었습니다. 어제 제가 예를 들었던 프란체스코처럼 그러니까 사순절날 금식을, 육류 금식을 어긴 형제를 돕기 위하여 프란체스코와 그 나머지 형제들 모두도 사순절날 고기를 먹어버린, 그 수도사의 비참한 그런 죄책감에 동참하기 위해서 프란체스코가 우리도 고기를 먹자 해서 고기를 먹었던 것과 똑같이 유대인 출신 신자이지만 “어, 이방인들이 저렇게 먹는데 나 때문에 저들이 참 불편하면 어떻게 하지?” 하면서 자기는 이게 정한 음식이 아니고 이것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이방 음식 먹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좀 미봉적으로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하나 되기 위하여 고기를 막 먹는 겁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먹지 않고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 일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도모하기 위해서 자기 양심을 자꾸 억누르면서 먹는 것, 이것도 옳지 않다. 이렇게 어설픈 평화주의 옳지 않다. 진심으로 네가 이방 음식을 먹어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양심의 화해가 왔을 때 먹고 이방인 신자들과 하나 되는 것이 옳겠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이방 신전에 바쳐진 물건이 일단 우리 시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본질적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의 계절에는 특정 후보를 계속 찬양하는 유튜버나 댓글을 계속 이렇게 다른 구역 식구들에게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이 이단으로 보이는, 이단으로 보이는 사람의 동영상을 자꾸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 있었던 일인데 지금 이단 또는 사이비 혐의가 짙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영상을 계속 자기 구역원 식구들한테 보내서 구교준 목사님과 제가 약간 절제를 시켰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볼 때 특정 대선 후보에 관하여 호감도를 진하게 표현해서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양심의 부담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방인 신자들의 육류 소비와 채소만 먹는 사람들 정치적인 호불호, 정당간의 이런 갈등은 선악의 갈등이 아니거든요. 아주 선악의 갈등이 아니라 상대적인, 매우 상대적인 갈등인데 이는 히틀러 같은 악당이 나타나지 않는 한 모든 지상의 정치적 싸움들은 선악 갈등이 아니라 악악 갈등이라고 봐야 되거든요. 이 악과 저 악의 갈등,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너무 지나치게 자기가 믿고 있는 특정, 그래서 저는 제 제자 중에 한 명이 노사모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네가 목사인 한 노사모 활동은 옳지 않다” 그래서 제가 탈퇴를 좀 하라고 권면 했는데 그런데 이 친구는 자기 설교도 보내면서 노무현, 노사모 클럽에 나오는 좋은 글도 계속 퍼다 나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것은 네 복음 사역에 치명상을 입히는 일 같다. 너를 목사라고 바라보지 않고…….” 그래서 제가 볼 때 지금 목사님들 중에서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훼손을 했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전파자가 되어야 될 사람이 자기 신분을 그 신적 중립성의 신분을 다 훼손한 거죠.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때때로, 어떤 후보를,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 네 믿음은 너만 가지고 있어라 절대로 네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말라. 네 믿음은 너만 가지고 있어라 오늘 본문 보십시오.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공개하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양심의 부담을 주지 마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호불호, 정당에 대한 지지와 반지지 이런 모든 것은 혼자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절대로 교회 안에서는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친한 구역원끼리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구역은 반말을 막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니, 오빠, 형님으로 통하고 어떤 구역은 존댓말을 씁니다. 교회 내에서 반말 구역과 존댓말 구역이 있습니다. 이것도 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반말 쓰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한테는, 존댓말 쓰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이 반말 쓰는 사람 때문에 반말 클럽에 들어가지 못하여 소외감을 느낄 때는 반말 쓰는 사람들도 아무리 반말이 편해도 반말 쓰면 안 되지요. 이런 것이 바로 내가 반말을 쓸 정도로 친밀한 이 친해 감정을 억제하고 감추어 우리 모두 서로 각각 낯선 사람인 것처럼 대화함으로 이제 막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의 낯선 분위기를 이해하려는 게 참 중요하죠. 그런데 미성숙한 교회의 특징은 낯선 교회에 들어가면은 벌써 반말 클럽이 한 3/1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그래서 아주아주, 이런 것들이 결국 교회 안에서 나옵니다. 또 하나, 교회 안에서는 부동산 재테크를 일삼는 사람 구역들과 그것들을 매우 매우 단죄하는 구역들이 있습니다. 자, 요것은 약간 다릅니다. 부동산 재테크 클럽으로 돈을 번 사람들의 담론이 교회 안에서도 굉장히 많이 퍼집니다. 어떤 구역에 가면 누가 얼마를 벌었는가가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누가 얼마 벌었는가가 공공연한 비밀이고 “한 턱 내라, 한 턱 내라!” 이런 말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서초동에 가면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데 이것은 좀, 요 문제랑 다릅니다. 사회정의를 훼손하는 범죄 또는 범죄에 준하는 이런 탈법과 위법을 범하면서 부를 축재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요 문제와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내 신앙의 자유가 아직까지 내 신앙 양식 또는 내가 하는 이 거리낌 없는 행동까지 이르지 못한 형제가 불편하거나 넘어질 것 같으면 즉시 내가 해도 되는 착한 일마저도 내가 해도 되는 그 선한 일마저도 가끔은 억제를 해야 된다. 문제는 선한 일도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면은 자제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오늘 원리입니다. 이것이 참 웃기지요? 가하는 일이고, 옳은 일이고 괜찮은데 형제, 자매가 약간 이것을 이해를 못한다면 절제하는 것, 여러분 제가 만일에, 서양에 가면은 목사님들이 담배를 다 피웁니다. 서양의 신부님들은 담배를 다 피워요. 그리고 미국 청교도 목사님만 담배를 안 피웁니다. 여러분 폰 라드, 칼 바르트 전부 다 담배를 피웠고, 김수환 추기경도 담배를 하루에 4갑, 5갑씩 피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여러분 만일에 담배를 딱 예배 마치고 나서 피우고 있으면 저하고 이상민장로랑 맞담배를 하면서 피우고 있으면은 이것을 보고 우리 교우들이 기겁을 한다면은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되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가 청교도 선교사들에게 전도를 받았기 때문에 담배와 술을 우리 한국 교우들이 목사님에게 기대하는 그 정도가 만일 이 정도라면 목사님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님이 골프 치는 것도 꼭 그런 원리입니다. 목사님이 좋은 차를 타는 것도 그런 원리입니다. “나는 차 있어. 우리 아버지가 상속했기 때문에 나는 7000만 원짜리 벤츠탈 수 있어” 하면서 아버지가 준 상속 재산으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은 그런데 교우들이 이것을 이해를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면은 차를 타지 말아야 되죠. 우리 모두가 이런 관점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 신앙의 자유가 참 발휘되면 좋겠다, 이것이 오늘 바울의 논리입니다. 오늘 기도할 때요, 제가 마치고 기도할 때 이극준 형제님 아버님이 폐암 2기 판정을 받으시고 수술을 하는데 이 수술 이후의 후유증까지 굉장히 폐암이 아프잖아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김윤진 자매님은 내년 7월에 출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김윤진 자매님은 환자 클럽에서 탈퇴했고 순산 희망 클럽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김윤진 자매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요한복음 16장 21절로 기도해 주시고 이제 환우 명단에는 빼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연우 형제님 부모님은 아직까지 많이 엎치락뒤치락한다고 약간 다시 그런 소강 상태에 빠졌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신앙의 자유가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해치지 않을 만큼 자제되게 도와주시옵시고 성숙하게 사용되게 도와주옵소서. 이극준 사랑하는 교우의 아버지 그 고통스런 폐암 2기 수술을 받고, 그 수술을 받는 과정부터 수술을 견디는 과정, 수술 이후의 항암치료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 아버지 끝내 치료로 유종지미를 거둘 수 있도록 간섭하여 주시고 수술하는 의사와 간호하는 간호사님들 그들의 손길에 치유의 권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윤진 자매님 내년 7월까지 온 몸을 지켜주시옵시고 아버지 하나님 살아온 신생아가 고고지성을 지르고 태어날 때까지 하나님 천군, 천사로 그 딸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로마서 14:13-23
제목: 하나님=성령 안에서 의, 평가, 희락 향유
오늘 본문은 어제 본문과 놀랍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제 본문은 로마서 14장 1절로 12절 말씀은 이방 신전에 바쳐진 육류, 고기를, 봉헌된 고기를 구매해서 마음껏 먹는 사람들, 이 마음껏 먹는 사람들을 약간 옹호하고 이방 신전에 바치는 음식을 먹지 못하여 채소만 먹으면서 그 이방 신전에 바쳐진 고기를 막 먹는 사람들을 단죄하는 유대인 출신 신자들을 약간 꼬집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용은 반대입니다. 오늘 내용은 ‘이방인 신자들의 그 거리낌 없는 자유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대원리, 어떤 원리를 훼손한다면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게 집이 다 떨어져 살았는데 음식을 먹는 것을 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러니까 A라는 유대인 출신 신자가 B라는 이방인 출신 신자가 고기를 먹는지 어떻게 알았냐고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문제는 제가 전에 말씀 드렸듯이 로마 교회는 로마의 유력자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건물 예배당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라는 말은 뭐죠? 고린도 재무장관 가이오의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뭐죠? 에베소에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말은 뭐죠? 요즘 말로 하면 한 150평정도, 200평정도 되는 집터에, 집안에 주인이 사는 집이 있고, 손님이 사는 집, 약간 객사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옛날 유력자의 집은 항상 공간이 구획돼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란 말은 예배당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유력자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뜻이거든요. 유력자의 집에서 모인 모임을 교회라고 그랬단 말이죠.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식사를 같이 했거든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 식사를 할 때 요즘 말하면 파트락(potluck), 자기가 가져온 음식을 가지고 먹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방 신자들은 로마의 시장에 있는 이방 신전 봉헌물인 고기를 명백하게 사서 애찬의 식사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포도주도 많이 가져오고요. 그런데 가난한 신자들은 포도주도 충분히 준비 못하고, 음식도 준비 못했는데 문제는 이 가난한 신자들이 대개 유대인 출신, 난민 출신 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육류 고기를 살 돈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유대인의 그 정결예법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성만찬 비슷하게 애찬을 하는데 저쪽 구역에서는 고기를 열심히 먹는 육식 클럽이 있고, 이쪽은 고기를 먹지 못하는 가난한 채식 클럽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은근히 정죄하는 이 수군거림이 이 채식 클럽 구역에서 나오니까 바울이 고기를 먹지 않는 그룹과 고기를 먹는 그룹이 나누어지니까 바울이 이제 개입을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바울은 로마에서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깊숙하게 개입할까요? 자기가 개척한 교회도 아닌데, 그러니까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서 편지에 요청을 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 고린도후서를 보면은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교회를 개척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막 명령을 하고, 권면하고 좀 압박을 하거든요. 그런데 로마서 14장은 고린도전후서에 비하면 굉장히 신사적이고 일반적인 원칙만 약간 말하고 있는 이런 셈이라는 거죠. 신사적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누가 고기를 먹는지 어떻게 알았을까? 주의 날에 모일 때마다 애찬을 했는데 그 유력자의 집안에 있는 교회 객사에서, 회당에서 모였던 예배당에 훤하게 보이는 데에서 식사를 서로 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고기를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들과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연히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유대인 출신 신자들로 나뉘어졌다는 거죠. 그래서 이것이 벌써 약간의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고기만 먹는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약간 믿음 없다고 깔보거나 고기를 먹지 않고 일부러 채소만 먹는 사람들이 저기 이방 신자들의 그 어떤 야생적 날것 냄새를 내는 이런 약간 덜 기독교인 된 이런 사람으로 은근히 바라보는 그런 시선이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어제 본문은 “이방인의 신전에 바쳐진 음식이라도 모든 음식은 하나님이 정한 음식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먹어도 된다” 이렇게 해가지고 이방 출신 신자들의 그 육류 소비를 비난하는 유대인 출신 신자들을 은근히 꼬집었다면 오늘은 반대입니다. 오늘은 뭐냐 하냐면은 “주 안에서 무슨 음식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그런데 내가 이 음식을 먹는다고 음식을 먹지 못하고, 이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 일부의 사람들이 자꾸 넘어지고 양심이 불편해진다면 먹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것 참, 이렇게 권면하면 굉장히 스트레스 받을 것 같습니다. 고기를 매일 먹어야 되는 사람들은. 그래서 너희 선한 일 즉 16절입니다. 로마 신전에 바쳐지는 고기라도 양심껏 먹을 수 있다는 이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왜냐 하면은 하나님 나라는 비본질적인 것은,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들은 본질적인 것들을 위해서 양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로마 교회의 핵심은 뭡니까?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먹어야지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이 문제 때문에 서로 갈라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내 자유가, 내 양심의 자유가 형제, 자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은 억제하고 자기 부인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했습니다. 캘빈의 기독교 강요 제3권 20장에는 기독교인 됨의 가장 중요한 어떤 미덕을 ‘자기 부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타자에 대한 배려’ ‘형제에 대한 배려’ ‘자기 부인’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논리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내가 이방 신전에 바쳐진 육류를 사서 먹어도 내 신앙에 아무런 손상을 주지 않는 것,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육류 소비를 거리낌 없이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저기 유대인 출신 신자들이 수군거림을 일으키고 뭔가 양심에 불편이 있다면 내가 일정량 그들이 나를 이해할 때까지 참아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유대인 출신 중에서 마음씨가 착한 신자가 있었습니다. 어제 제가 예를 들었던 프란체스코처럼 그러니까 사순절날 금식을, 육류 금식을 어긴 형제를 돕기 위하여 프란체스코와 그 나머지 형제들 모두도 사순절날 고기를 먹어버린, 그 수도사의 비참한 그런 죄책감에 동참하기 위해서 프란체스코가 우리도 고기를 먹자 해서 고기를 먹었던 것과 똑같이 유대인 출신 신자이지만 “어, 이방인들이 저렇게 먹는데 나 때문에 저들이 참 불편하면 어떻게 하지?” 하면서 자기는 이게 정한 음식이 아니고 이것 잘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이방 음식 먹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근히 좀 미봉적으로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하나 되기 위하여 고기를 막 먹는 겁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먹지 않고 자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 일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도모하기 위해서 자기 양심을 자꾸 억누르면서 먹는 것, 이것도 옳지 않다. 이렇게 어설픈 평화주의 옳지 않다. 진심으로 네가 이방 음식을 먹어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양심의 화해가 왔을 때 먹고 이방인 신자들과 하나 되는 것이 옳겠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이방 신전에 바쳐진 물건이 일단 우리 시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본질적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만드는 것을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의 계절에는 특정 후보를 계속 찬양하는 유튜버나 댓글을 계속 이렇게 다른 구역 식구들에게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사람이 이단으로 보이는, 이단으로 보이는 사람의 동영상을 자꾸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있었던 일입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에 있었던 일인데 지금 이단 또는 사이비 혐의가 짙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 영상을 계속 자기 구역원 식구들한테 보내서 구교준 목사님과 제가 약간 절제를 시켰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볼 때 특정 대선 후보에 관하여 호감도를 진하게 표현해서 그 사람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양심의 부담을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굉장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방인 신자들의 육류 소비와 채소만 먹는 사람들 정치적인 호불호, 정당간의 이런 갈등은 선악의 갈등이 아니거든요. 아주 선악의 갈등이 아니라 상대적인, 매우 상대적인 갈등인데 이는 히틀러 같은 악당이 나타나지 않는 한 모든 지상의 정치적 싸움들은 선악 갈등이 아니라 악악 갈등이라고 봐야 되거든요. 이 악과 저 악의 갈등,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너무 지나치게 자기가 믿고 있는 특정, 그래서 저는 제 제자 중에 한 명이 노사모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네가 목사인 한 노사모 활동은 옳지 않다” 그래서 제가 탈퇴를 좀 하라고 권면 했는데 그런데 이 친구는 자기 설교도 보내면서 노무현, 노사모 클럽에 나오는 좋은 글도 계속 퍼다 나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것은 네 복음 사역에 치명상을 입히는 일 같다. 너를 목사라고 바라보지 않고…….” 그래서 제가 볼 때 지금 목사님들 중에서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어떤 훼손을 했냐 하면은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전파자가 되어야 될 사람이 자기 신분을 그 신적 중립성의 신분을 다 훼손한 거죠.
마무리 하겠습니다. 내가 때때로, 어떤 후보를, 어떤 정당을 지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 네 믿음은 너만 가지고 있어라 절대로 네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말라. 네 믿음은 너만 가지고 있어라 오늘 본문 보십시오.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공개하면서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양심의 부담을 주지 마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호불호, 정당에 대한 지지와 반지지 이런 모든 것은 혼자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절대로 교회 안에서는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친한 구역원끼리도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구역은 반말을 막 씁니다. 어떤 사람들은 언니, 오빠, 형님으로 통하고 어떤 구역은 존댓말을 씁니다. 교회 내에서 반말 구역과 존댓말 구역이 있습니다. 이것도 참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서 반말 쓰는 것이 불편한 사람들한테는, 존댓말 쓰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이 반말 쓰는 사람 때문에 반말 클럽에 들어가지 못하여 소외감을 느낄 때는 반말 쓰는 사람들도 아무리 반말이 편해도 반말 쓰면 안 되지요. 이런 것이 바로 내가 반말을 쓸 정도로 친밀한 이 친해 감정을 억제하고 감추어 우리 모두 서로 각각 낯선 사람인 것처럼 대화함으로 이제 막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의 낯선 분위기를 이해하려는 게 참 중요하죠. 그런데 미성숙한 교회의 특징은 낯선 교회에 들어가면은 벌써 반말 클럽이 한 3/1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그래서 아주아주, 이런 것들이 결국 교회 안에서 나옵니다. 또 하나, 교회 안에서는 부동산 재테크를 일삼는 사람 구역들과 그것들을 매우 매우 단죄하는 구역들이 있습니다. 자, 요것은 약간 다릅니다. 부동산 재테크 클럽으로 돈을 번 사람들의 담론이 교회 안에서도 굉장히 많이 퍼집니다. 어떤 구역에 가면 누가 얼마를 벌었는가가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누가 얼마 벌었는가가 공공연한 비밀이고 “한 턱 내라, 한 턱 내라!” 이런 말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서초동에 가면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데 이것은 좀, 요 문제랑 다릅니다. 사회정의를 훼손하는 범죄 또는 범죄에 준하는 이런 탈법과 위법을 범하면서 부를 축재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요 문제와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내 신앙의 자유가 아직까지 내 신앙 양식 또는 내가 하는 이 거리낌 없는 행동까지 이르지 못한 형제가 불편하거나 넘어질 것 같으면 즉시 내가 해도 되는 착한 일마저도 내가 해도 되는 그 선한 일마저도 가끔은 억제를 해야 된다. 문제는 선한 일도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면은 자제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 오늘 원리입니다. 이것이 참 웃기지요? 가하는 일이고, 옳은 일이고 괜찮은데 형제, 자매가 약간 이것을 이해를 못한다면 절제하는 것, 여러분 제가 만일에, 서양에 가면은 목사님들이 담배를 다 피웁니다. 서양의 신부님들은 담배를 다 피워요. 그리고 미국 청교도 목사님만 담배를 안 피웁니다. 여러분 폰 라드, 칼 바르트 전부 다 담배를 피웠고, 김수환 추기경도 담배를 하루에 4갑, 5갑씩 피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여러분 만일에 담배를 딱 예배 마치고 나서 피우고 있으면 저하고 이상민장로랑 맞담배를 하면서 피우고 있으면은 이것을 보고 우리 교우들이 기겁을 한다면은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되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가 청교도 선교사들에게 전도를 받았기 때문에 담배와 술을 우리 한국 교우들이 목사님에게 기대하는 그 정도가 만일 이 정도라면 목사님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사님이 골프 치는 것도 꼭 그런 원리입니다. 목사님이 좋은 차를 타는 것도 그런 원리입니다. “나는 차 있어. 우리 아버지가 상속했기 때문에 나는 7000만 원짜리 벤츠탈 수 있어” 하면서 아버지가 준 상속 재산으로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은 그런데 교우들이 이것을 이해를 못하고 납득하지 못하면은 차를 타지 말아야 되죠. 우리 모두가 이런 관점에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우리 신앙의 자유가 참 발휘되면 좋겠다, 이것이 오늘 바울의 논리입니다. 오늘 기도할 때요, 제가 마치고 기도할 때 이극준 형제님 아버님이 폐암 2기 판정을 받으시고 수술을 하는데 이 수술 이후의 후유증까지 굉장히 폐암이 아프잖아요.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김윤진 자매님은 내년 7월에 출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김윤진 자매님은 환자 클럽에서 탈퇴했고 순산 희망 클럽으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김윤진 자매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요한복음 16장 21절로 기도해 주시고 이제 환우 명단에는 빼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연우 형제님 부모님은 아직까지 많이 엎치락뒤치락한다고 약간 다시 그런 소강 상태에 빠졌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신앙의 자유가 우리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해치지 않을 만큼 자제되게 도와주시옵시고 성숙하게 사용되게 도와주옵소서. 이극준 사랑하는 교우의 아버지 그 고통스런 폐암 2기 수술을 받고, 그 수술을 받는 과정부터 수술을 견디는 과정, 수술 이후의 항암치료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 아버지 끝내 치료로 유종지미를 거둘 수 있도록 간섭하여 주시고 수술하는 의사와 간호하는 간호사님들 그들의 손길에 치유의 권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윤진 자매님 내년 7월까지 온 몸을 지켜주시옵시고 아버지 하나님 살아온 신생아가 고고지성을 지르고 태어날 때까지 하나님 천군, 천사로 그 딸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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