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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녹취 11

by 【고동엽】 2022. 2. 1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행하실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명하셨던 말씀의 본질을 회복하시려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율법의 형식에 많이 집착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 법, 그러면 안식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39가지의 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그 안식일 법으로 옭아 매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십니까? 사람들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거다 라고 하면서 이 안식일의 본질을 회복하시려 하셨습니다. 형식에 집착했던 종교 지도자들과 본질을 강조했던 예수님은 계속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예수에게 호응을 보이고 예수에게 몰려들게 되니까 종교 지도자들은 계속 예수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3가지 방식으로 공격하는데 첫째가 바알세불에 지폈다, 여기 바알세불이라고 하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겼던 파리의 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과 블레셋 사람들은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들처럼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 이방 귀신의 도움을 받아서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전형적인 색깔론입니다. 바알세불에 지펴서 에수가 사역하고 있다고 공격하니까 친인척들이 예수 사역을 방해하려 합니다. 예수 사역을 중단시키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무나 단호하게 말씀하시죠.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다 라고 하면서 친인척들이 예수 사역을 중단시키려 할 때 굉장히 단호하게 대응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공격했던 가장 핵심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가 뭐냐면 당시 유대인들이 상상했던 또는 기대했던 경건한 모습과 예수는 너무 멀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교인들과도 이것이 조금 안 맞습니다. 뭐가 안 맞냐면 누가복음 7장 33~34절을 보시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내렸던 평가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어떤 사람이냐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취미가 금식이고 특기가 단식입니다. 세례 요한은 거의 안 먹습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세례 요한은 인간이 아니야, 초인적인 존재야 이렇게 세례 요한을 우러러 보는 사람도 있고 세례 요한을 약간 비하하는 사람은 뭐라고 하냐면 저거는 귀신 들린거야 하면서 세례 요한을 비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경건의 모습이 180도 다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뭐라고 얘기하냐면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 별명이 그겁니다.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인들과 조금 안 맞습니다. 한국 교회는 청교도적인 신앙 생활이 강한 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술 마시지 않는 금주, 담배 피지 않는 금연, 춤을 추지 않고 오락을 즐기지 않는 이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편인데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은 사람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많이 누리십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잔치를 많이 누리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로 사람들을 초대하신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고 하나님 나라로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곳인가 라는 것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그동안 쌓인 담들이 허물어지는 자리가 잔치 아닙니까, 알지 못하는 나그네에게도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는 것이 잔치 아닙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고 유쾌한 곳인가를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 잔치를 누리심을 통하여서 사람들에게 경험하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실제 예수님의 이적 가운데도 상당수가 먹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라든가, 칠병이어 기적이라든가 이런 것도 다 먹는 기적입니다. 여기 먹고 마심이라는 것은 하나됨, 잔치, 막힌 담이 허물어짐, 서로에게 환대함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경건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겁니다. 먹기를 탐하고 마시기를 즐겼던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경건한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당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경건하다고 생각합니까? 세례 요한 같은 사람이 경건한 겁니다. 이런 것 때문에 예수님은 뭔가 경건한 것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다, 안식일 법도 위반하고 정결법도 위반하고 성전도 존중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예수에 대해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지난 번에 그런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4개의 주요한 종교 그룹이 있다, 이 종교 그룹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 그룹임과 동시에 정치 정당이라고 했습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열심당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사역했던 사람들이고 제사장 중심입니다. 제사장과 귀족들이 주로 사두개파를 형성했습니다. 제사장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그룹이 에세네파입니다. 에세네파는 제사장들인데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에 대해서 분노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해 근처로 가서 자신들만의 거룩한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의 삶을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이 바로 에세네파입니다.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의 공통점은 뭐죠? 제사장 중심이라는 겁니다. 이들과는 달리 레위인이 아니었던 평신도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어딥니까? 바리새파입니다. 사두개인들이 성전을 중심으로 사역했다면 바리새파는 지방의 회당을 중심으로 사역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직업을 가지고 시간을 내어서 율법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사람들에게 열심히 가르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그 율법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가 열심당입니다. 열심당은 무장 독립운동을 통해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젤롯당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 4개의 그룹 사두개파, 에세네파, 바리새파, 열심당 이 4개의 그룹은 좋아하는 성경 본문이나 주장하는 교리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재밌는 것은 이 4개의 그룹이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하나가 됩니다. 4개의 그룹을 하나로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공통 분모가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사두개파나 에세네파나 바리새파나 열심당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은 거룩한 삶이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여기서 4개의 종교 그룹은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본문이 구약의 레위기입니다. 이스라엘 부모들은 자녀가 태어나게 되었을 때 만 5세가 되면 자녀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읽게 하는 성경 본문이 레위기입니다. 왜 레위기를 가장 먼저 읽게 합니까? 레위기는 1장부터 16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것인가, 오늘날 얘기하자면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인가, 이것이 1장부터 16장에 나오고 레위기 17장부터 27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은 무엇인가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레위기 17장부터 27장입니다. 왜 이스라엘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먼저 레위기를 읽히는 거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그것을 레위기를 통해서 배우도록 만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었던 4개의 종교 정파는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거룩함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것은 뭡니까? 구별되었다는 겁니다. 무엇으로부터 구별되는 겁니까? 이방으로부터 구별되는 겁니다. 이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이라는 것은 단절과 분리의 거룩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은 병든 사람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은 부정한 사람과 구분되어야 합니다. 이런 단절과 분리를 통해 나의 거룩함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의 4개의 종교 정파는 가장 중요하게 붙잡은 말씀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으셨냐면 자비로움에서 찾으십니다. 누가복음 6장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존재했던 4개의 종교 그룹과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 당시의 일반적인 종교 그룹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다움이라는 것은 거룩함이다, 거룩함은 무엇이냐, 부정하고 병든 모든 것들로부터의 단절과 분리이다 라고 주장을 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자비로움에서 찾은 겁니다. 자비로움이라는 것은 뭡니까? 나보다 연약한 자에 대해서 긍휼을 베푸는 것이 자비로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자비로움에서 찾았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있던 4개의 종교 정파는 거룩함에서 찾은 겁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끊임없는 충돌이 나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원래 하시딤이라는 그룹에서 나왔습니다. 하시딤은 마카베 항쟁 때 마카베 집안을 열심히 도왔던 그룹입니다. 그 하시딤이 하스몬 왕조의 타락과 부패에 대해 분노하면서 에세네파와 바리새파로 나뉘었습니다. 바리새파는 뭘 한겁니까? 지방으로 흩어져서 지방에 회당을 세우고 열심히 율법을 공부해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도록 만든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 주전 8세기 앗수르부터 시작해서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이 5대 제국에 의해서 700년 이상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5대 제국에 의해서 70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점점 해방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쳤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현실을 보니까 자기들의 힘으로는 이 거대한 제국과 맞서 싸워서 해방과 독립을 맛 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점점 이스라엘은 어떤 소망을 갖게 되냐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주시게 되면 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될 수 있을텐데 라는 간절한 열망을 품게 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한 메시아상이 뭐죠? 정치 군사적인 메시아입니다. 그런데 그런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에 보내주셔야 하는데 이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100이라고 했을 때 지금 이스라엘은 40도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율법을 일상 속에서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좀 더 순종하게 되면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평균 순종점수가 60점이 넘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공동체에 메시아를 보내실텐데, 그리고 메시아가 오시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될 수 있을텐데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현실은 40점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뭘 한 겁니까? 평균 순종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열심히 율법을 가르치고 율법에 순종하도록 만들고 율법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평균 순종 점수가 50점 까지 올라간 겁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부족한 겁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선택한 것이 뭐냐면 평균 점수를 지나치게 깎아 먹는 사람들을 이스라엘 공동체 바깥으로 내어 쫓은 겁니다. 거기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냐면 세리와 창기입니다. 세리와 창기 같은 사람들은 회당 출입도 금지시키고 그들의 헌금도 받지 않았습니다. 무슨 얘기냐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예전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때 일제고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제고사라는 것은 전국의 모든 초중고가 같은 날 동일한 시험을 치르는 겁니다. 그래서 일제고사를 앞두고 학교마다 비상이 걸렸습니다. 왜 비상이 걸리냐면 전국의 모든 학교가 동일한 날에 동일한 시험을 치르면 며칠 지나고 나면 학교별 평균 점수가 나오겠죠. 그러면 바로 뭐가 나오겠습니까. 전국 학교 순위가 나오는 겁니다. 평균이 가장 높은 학교가 1등이 되겠고 가장 낮은 학교가 꼴등이 되는 겁니다. 실제로 뉴스에 그런 사건이 나왔는데 시험을 앞두고 선생님들이 반에서 평균을 많이 깎아 먹는 학생들에게 뭐라고 얘기했냐면 “내일 시험볼 때 학교 안 와도 된다”고 얘기한 겁니다. 학생들이 교실에 앉아서 시험지에 자기 이름 쓰는 순간 이 학생도 평균 점수에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평균에 포함이 되지 않습니다. 학교마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 학교의 순위를 높이기 위해서 내린 처방 가운데 하나가 평균 점수를 지나치게 깎아 먹는 학생들은 오지 말라고 한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선택했던 방식이 바로 그런 겁니다. 평균 점수를 지나치게 깎아먹는 사람들을 바리새인들은 공동체 바깥으로 내어 쫓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내일 안 와도 된다고 해서 그 학생들이 집에 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사역이 어떤 거냐면, 집에 있는 그 학생들 집을 스타렉스를 몰고 쭉 도시면서 타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다 차에 태웁니다. 그리고 학교까지 운전하셔서 각 반에 그 학생들을 들여보내면서 너도 시험 보라고 얘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예수님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평균 점수를 깎아먹어서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내어쫓김을 당한 사람들을 예수님은 다시 재활복구를 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에게 다시 자비로운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이런 것들을 바리새인들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보실 때 가장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것이 뭐냐면, 당시 이스라엘에 존재하던 4개의 종교 그룹과 예수님 사이에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 안의 4개 종교 그룹인 사두개파, 에세네파, 바리새파, 열심당을 하나되게 만들었던 공통 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의 가장 중요한 것을 거룩에서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은 부정하고 병든 모든 것들로부터의 단절과 분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다움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자비로움에서 찾았고 이스라엘 공동체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활 복구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의 중요한 핵심적 내용입니다. 그것이 계속 바리새인과 충돌을 일으켰던 중요한 지점이라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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