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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다시 혼자 산으로 잠적하신 예수님-요 6:1-15

by 【고동엽】 2022. 2. 12.

마태복음 5 1절에 있는 메타파우타라는 말은 앞 문맥과 서로 상관없는 새로운 에피소드를 도입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장치입니다. restoring device입니다. 4장과 5장은 관계없다, 4장과 5장은 시공간적으로 일치하거나 연속하는 상황이 아니다, 그걸 말하기 위해서 그 후에 라는 말을 씁니다. 5장과 6장 사이에도 메타파우타로 시작됩니다. meta physics 할 때 메타입니다. 메타는 after, 파우타는 이것들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들 후에, 메타파우타, 4장과 5장 사이 5장과 6장 사이는 상관이 없는 독립된 에피소드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디베랴의 바다 갈릴리 바다, 원래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직역하면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가버나움에서 갔습니다. 가버나움은 시계 방향으로 보면 12시가 가버나움입니다. 디베랴는 9시에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위로 서있는 타원형이라 본다면 남북으로 20km 동서로 8km짜리입니다. 해수면 246미터 아래에 있습니다. 보통 해수면보다 246m 아래, ? 갈릴리는 요르단 협곡이라고 가라 앉아 있는 협곡지역의 땅이기 때문에 갈릴리 전체가 매우 낮은 저지대입니다. 지금도 침강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요르단과 갈릴리는 땅이 가라앉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낮은 땅이 요단지역의 가장 밑 요르단 지역 가장 밑인 사해입니다. 해저면 441미터, 보통바다 보다 441미터 아래 있는 거예요. 매우 낮죠. 사해는 염도가 27-30도입니다. 보통 바닷물이 2-7도인데, 그 물을 마시는 순간 성지순례고 뭐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구층 청천으로 올라갑니다. 가버나움에서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간다는 말은 12시 방향에서 9시 방향으로 갔단 말이에요. 바로 가로지른 건 아닙니다. 시계 4시 방향에 거라사 지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간 곳은 가버나움에서 디베랴를 갔거나 거라사를 간 겁니다. 6시 방향에는 도시가 없습니다. 12시 방향에는 가버나움이 있고 6시 방향에는 도시가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주로 자로 갔습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디베랴는 로마 제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도시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라는 사람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자기의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름을 붙였는데 그 디베랴는 친 로마적인 또는 그리스 사람 부자들이 사는 도시였습니다. 이 디베랴 지방과 가버나움과 벳세다와 고라신 등에는 친로마적인 또는 로마 사람들 또는 그리스 사람들 다수가 살고 있었고 그들 밑의 소작인들로 히브리인들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가버나움에 가지 않고 갈릴리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 머물고 계신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여러 명의 병자들에게 행했던 누적된 표적 때문에 엄청난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숱한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6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산상수훈대형으로 앉았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5 1절에 나옵니다. 산상수훈 대형으로 앉았다, 즉 산에서 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뭔가 가르치기 위하여 앉았다는 뜻입니다. 산상수훈 도입부분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이 나오지 않고,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산상수훈을 기대했던 그 자리에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눈을 들어도 현제 분사입니다. ‘오는 것을 보시고 현재분사, ‘이르시되 정동사, 두 개의 분사구문이 앞에 나와 있습니다. ‘눈을 들어 보는 상태가 계속 됐고, 계속 보았더니 보시고 후에 먹는 문제를 끌어낸 것을 볼 때 매우 굶주려 있는 것을 간파하셨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이 무리가 오랫동안 굶주렸음을 통찰하시고, 이런 뜻입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마가복음 8 1-4절에 나옵니다. 굶은 지 사흘 된 무리들을 보시고 칠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매우 굶주려있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빌립이 드디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특징은 베드로와 요한이 등장하지 않고 빌립과 안드레가 등장합니다. ? 베드로와 요한은 이름자체가, 베드로는 원래 이름이 시몬이죠? 시몬은 샤마라는 동사에서 나온 듣는다는 동사입니다. 잘 듣는다는 뜻입니다. 시몬이란 잘 듣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시몬은 순둥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구원동이 해방둥이, 예수님 당시에 가장 흔한 이름이 예수아입니다. 또 하나 이름이 요한은 히브리 동사 하라를 써서, 하라, 디 그라시아스, 매우 은혜로운 자, 매우 온유한 자가 요한입니다. 전부 다 히브리 이름입니다. 그런데 빌립과 안드레는 그리스 이름입니다. 이 두 사람은 요한복음 12장에 또 한 번 나옵니다. 헬라인이 찾아와 예수님을 면담하고자 할 때 또 빌립이 나갑니다. 이 말은 빌립이 헬라어를 매우 정통으로 구사한 사람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헬라어를 구사하셨습니다. ? 갈릴리에서 목수 일을 했다는 말은 헬라어를 기본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수님 고향에서 6km 떨어진 세포리스라는 도시에 가서 그리스 연극을 많이 관람하셨을 가능성이 학문적으로 제기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라는 말을 쓰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위선자, 히포크리토 라는 이 말은 가면을 쓰는 자들이라는 말인데, 그리스연극에서 나온 독특한 용어이고, 일반 히브리인들은 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도시적으로 매우 세련된 분이십니다. 연극을 보러 다니셨고, 일당 받으시고 벳산에 올라가 거기서 대중목욕탕에도 출입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목욕탕에 가셔서 목욕도 하셨을 것이고 연극도 보셨을 것이고 전차 마차 경주도 많이 보셨을 겁니다. 가이사랴에 가면 전차 마차 경주장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라는 이런 말을 쓴 걸 볼 때, 그리스 연극적 용어에 익숙한 걸 볼 때, 예수님께서는 매우 도시문명에도 익숙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목수로 일하실 때 이걸 이렇게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헬라어로 말할 때 그 말귀를 알아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님은 헬라어를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헬라어와 베드로 헬라어는 약간 broken english 수준이 아니었겠는가, 우리가 생각해봅니다. 문장 sentence가 완전하지 않고, 밥 먹겠다는 말을 food 이렇게 하는 수준이 아니었겠는가, 우리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broken 헬라어가 아니라 정통헬라어를 구사한 사람이 빌립과 안드레였을 것이라고 봐요. 이 두 사람이 등장하는 걸 볼 때, 추측입니다. 사도신경적 확실성은 없습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왜 주도적 역할을 하는가를 해명해보자는 뜻입니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이들이 굶주렸음을 알아차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보시고 나면 정확하게 그 사람의 필요를 통찰하십니다. 38년 된 병자가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2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본다는 말은 그 다음의 후속적인 구원행동 구원간섭을 일으키는 본다였습니다. 본다는 것은 이렇게 숭고합니다. 우리가 본다는 말은 우리의 선한 행동을 유발하는 행위가 됩니다. 본다는 인도주의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지각이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알아차리는 공감의 이해고,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존재가 되도록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그런 숭고한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을 뜨고 보기만 하면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보시고 그다음 immediate action, 그다음 따라오는 행동입니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떡이 아니라 빵입니다. 이렇게 물은 것을 볼 때 이들이 매우 굶주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굶주린 사람에 대한 동정심은 마가복음 8 3-4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굶어본 사람의 비애를 예수님께서 아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에게 수학적인 계량적인 양을 알아맞혀보라고 시험한 게 아닙니다. 빌립의 동정심을 시험한 겁니다. 빌립이 이때 이 사람들을 먹이고 싶은 상한 목자의 심정이 예수님처럼 있는가를 시험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예수님은 우리가 굶주린 무리를 보자마자 우리가 이들을 먹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시험한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선한 목자입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I lay down my life,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들을 어찌하든지 먹어야 한다는 간절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빌립 또한 이들을 먹이고 싶은 열망이 있는지 상한 목자의 심정이 있는지 시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상한 목자의 심령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계산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 먹이고 싶은 열망이 돈 계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먹이고 싶은 열망이 너무 간절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먹이고 싶은 열망보다 돈이 많이 들어 부족하다는 한탄을 하는 빌립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객관적인 상황분석으로 인해서 결핍감을 호소하는, 결핍에 대한 인지에 이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먹이고 싶은 열망이 가득 찬 상태입니다. 이 말씀은 먹이고 싶은 열망이 너무 가득하면 하나님께서 다섯 덩이의 떡과 두 마리 물고기를 가지고도 오천 명 먹이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은 육체노동자 7개월의 월급입니다. 많은 돈입니다. 빌립이 돈 계산에 머물고 있으면서 부족하리이다 이들이 조금씩 먹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모자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이백 데나리온인지 모르겠습니다. 계산을 빨리 했습니다. 오천 명 식사가 이백 데나리온에서 삼백 데나리온 정도 된다는 거죠. 그럼 얼마입니까? 그 당시 여관비가 31분의 1 데나리온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다친 사람을 도와달라고 여관에 가서 두 데나리온을 줬죠? 64일 입원비를 준 겁니다. 전치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은 거라고 본 거죠. 이백 데나리온 하니까 그 당시 식사비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어요.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조합으로는 매우 안 좋습니다. 떡하고 물고기가 식욕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아예 안 맞아요. 보리떡이면 뭐가 있어야 해요? 커피나 샐러드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샐러드도 없이 보리떡 드시고 바로 생선을 드셨어요. 약간 비린내 나는 생선을 떡과 함께 소스도 없이, 이 생선은 말린 훈제생선이거든요. 막달라 마리아 아버지가 훈제공장 사장이라고 보면 돼요. 막달라 마리아가 살던 막달라는 훈제탑을 가리키거든요. 훈제탑, 히브리말로 믹달라에요. 믹달라, 큰 탑이 있는 고을에 마리아, 믹달라 사람들은 전부 다 훈제업을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훈제업을 하던 사장님 딸이었을 거라고 봐요.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 동네로 자꾸 놀러 와서 예수님 친 제자가 됐던 분인데 귀신 들린 분이었죠? 훈제된 고기 두 마리, 간이 된 고기 두 마리하고 보리 떡 다섯 개가 식사인데 이걸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청소년이란 뜻입니다. 아이는 7-10살된 아이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말합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대답하기가 매우 힘드시니까 대답 안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파테마이 동사입니다. 앉다, 여러분 성경에 앉다는 말이 뭔지 보세요. 헬 이라고 써져 있죠? 지옥이란 뜻 아닙니다. 헬라어란 뜻입니다. 지옥에서, 이런 말 아니에요. , 기대어 눕게, 괄호하고 유대인이 음식 먹을 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라, 친밀한 감정이 느껴지는 대형으로 앉게 하라는 뜻입니다. 식사가 나오겠구나, 기대감을 고취하면서 믿음의 집중을 일으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장면은 너무 멋져요. 이 훈제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덩어리, 유대인 빵은 앙꼬가 없습니다. 소스에 찍어 먹어야 해요. 요즘의 뻥튀기 비슷한 거예요. 그걸 예수님께서 잡고서 하시는 말이, 어떤 전율이 왔는지, 이 굶주린 무리를 먹여달라고 기도했을 때 벌써 예수님이 그걸 잡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떤 영적 타전을 주셨느냐면 너는 이 무리를 먹일 수 있다, 타전이 왔어요. 확신이 왔습니다. 그 확신이 예수님께 전달되자마자 예수님은 식사대형으로 앉게 하라고 먼저 전혀 예상과 다른, 군중이 걸어오면서 쇄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 무질서를 의미하죠? 오천 명 군중 오는 거 봤어요? 무서워요. 오천 명 군중은 호전성의 화신이에요. 오천 명 군중이 식사대형으로 앉으면 친밀한 공동체가 돼요. 서서 몰려오는 공동체 오천 명과 앉아서 reclining at the table, 기대어 앉는, 유대인의 식사대형으로 앉는 무장해제된 청년, 남자 오천 명의 식사대형으로 앉는 오천 명은 공동체이지만 몰려오는 굶주린 오천 명은 공동체가 아니거든요. 예수님은 일단 군중을 진정시켜서 먹을 것이 나올 거라는 예감 기대감을 고취시킨 후에, 그 하나님이 주신 전광석화 같은 먹일 수 있다는 확신을 들고 기도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식사대형으로 앉아서 친밀한 감정이 수수되는 상태를 만드신 후에, 오천 명의 남자를 앉히신 후에, 진정시킨 후에, 식사를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을 고취시킨 후에, 오천 명이 느끼는 간절한 기갈이 예수님 온 몸을 관통하니까, 오천 명이 느꼈던 굶주림이 예수님을 순식간에 관통하니까 예수님의 마음속에 오천 명을 먹이고 싶다는 열망이 폭발하니까, 그게 하나님께 타전되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은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다는 능력과 확신과 사명감이 동시에 예수님을 감싸신 겁니다.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오천 명의 굶주림에 책임지는 마음 자체가 여러분을 위대하게 만들어요. 여러분에게 능력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죠. 너무 중요해요. 전 학교에서 선생을 하면서 학생들을 잘 가르치고자 하는 열망,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을 제 몸에 흡입하는 순간 제가 놀라운 강의를 준비하게 됩니다. 우리 교우들의 영적 기갈을 잘 통찰하여 교우들의 영적기갈에 응답하고자 하는 엄청난 무한책임적 결단이 좋은 설교자가 만들게 하고 좋은 목사가 되게 만드는 거예요. 여러분 오천 명의 굶주리는 그 허기를 내가 통찰하여 거기에 응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예수님 마음이에요. 우리가 그걸 배워야 해요. 오천 명의 무리가 뿜어내는 간절한 열망, 먹고자 하는 열망, 기갈에 찬 사람들의 안타까움, 탄식, 그걸 예수님이 딱 한 몸에 받으니까 요즘말로 하면 기를 받은 겁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자 하는 기를 받으니까 탄식의 언어가 되고 기도의 언어가 되고 아우성과 절규의 언어가 하나님께 올라가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역사하셔서 먹일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무얼 배워야 하느냐면 오천 명의 쇄도하는 무리를 식탁에 앉게 하여 친밀한 감정이 수수되는 공동체로 조성할 수 있는 엄청난 담력, 이게 필요합니다. 그 담력은 어떻게 능력으로 결실 맺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을 친히 창조해주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아름답게 유종의 미를 거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천 명의 무리에게 빵을 사서 나눠주려고 했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는데 핵심이 있지 않고, 식사대형으로 앉아서 친밀한 공동체를 창조하는데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먹여서 chemical 탄수화물을 섭취해서 일시적 허기 기갈을 충족시키는 일회성 행동에 관심이 없고, 오천 명을 식사대형의 친밀하고 우애 넘치는 형제자매 공동체로 만들어내는 그 과정,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관심이고,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은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오천 명의 군중을 50명씩 100명씩, 이게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오십부장과 백부장의 영적지도하에 있었던 만나를 먹는 식사대형입니다. 랍비들의 주석에 따르면 50명씩 100명씩 앉아 만나를 먹었던, 모세가 일으켰던 하늘의 표적을 그대로 재현한 거예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50명씩 100명씩 앉아 광야에서 식사를 하던 그 장면을 순식간에 재현한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걸 은근히 과시하는 거예요. 이 사태를 통하여, 예수님은 일회적인 굶주림의 해결에 관심이 없고 앉아서 식사하는 친밀한 오천 명의 식사공동체 창조에 더 핵심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앉게 하라는 겁니다. 앉게 하라가 중요한 이유, 성만찬 할 때 앉았거든요. 참된 성만찬은 무엇일까요? 한데 모여 식사대형으로 기대어 앉는 것, reclining이라는 동사로 쓰였어요. 식사하는 행위는 형제자매의 사랑의 감정에 기대는 행위에요. 우리가 새들마루에서 식사할 때 얼마나 메뉴가 간단해요. 하나 둘 세 가지에 밥이 잘 안 될 때가 얼마나 많아요. 어떤 식사당번때는 우리가 물밥을 먹어야 하잖아요. 그것도 현미물밥은 얼마나 먹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여러분께서는 화학성분을 섭취하지 않고 사랑에 기대서 밥을 먹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동체에서 불편한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잖아요. 새들마루에서 우리가 식사할 때 모든 사람은 얼굴이 환하게 가득 차 있고, ? 우리가 누구의 사랑에 기대어 앉았어요? 형제자매의 사랑에 기대어 앉아있기 때문에 식사가 맛있는 거예요. 저는 참고로 하고 싶지만 장소가 좁아서 가마솥에 가서 기대어 먹고 있습니다. 참고로 알고 계십시오. 제가 식사하는 곳은 가마솥인데 여러분 인구가 너무 많이 늘어나 교인이 너무 많이 늘어서 4층에서는 용신할 틈이 없어 우리는 할 수 없어 어른 교인들과 양보하는 마음으로 가마솥에 가서 5천원짜리 먹고 있습니다. 우리를 찾으려면 가마솥으로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밥이 모자라 가끔 가마솥에 사러 오대요. 그런데 여러분, 가마솥도 괜찮습니다. ? 서로 사랑에 기대어 앉으면서 사랑을 먹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오근재 장로님께서 떡을 만들어주셔서 그 떡을 일주일 내내 아침마다 떡 한조각 먹으면서 하나님께 찬미 드리면서 오근재 장로님 가정을 측복했습니다. 떡을 주면 오일 내내 축복받는 겁니다. 양목사님과 제가 만났거든요. 아침식사 뭐했습니까? 떡을 먹었습니다. 우리 둘 다 그 떡을 같이 먹은 겁니다. 식사대형으로 기대어 앉게 만든 것이 바로 떡이거든요. 그래서 503장 찬송에 보면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마지막 4절에 기갈 중에 있는 영혼 먹을 것 달라고 소리친다는 가사가 나와요. 오천 명의 기갈을 순식간에 통찰하여 식사 대형으로 앉게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게 바로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은 식사문제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초대교회 성만찬의 사회사적 의미는 무엇이죠? 빈부노소 격차 없이 노예와 자주자 상관없이 한 식탁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떡을 떼어 먹는 것, 그게 성만찬입니다. 중요한 겁니다. 모든 식사는 성만찬 적으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모든 기갈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성만찬에서 하나가 돼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게 오늘 메시지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화학성분 탄수화물 먹고 있죠? 이 탄수화물 단백질 아미노산의 원래 본질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먹는 거예요.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몸을 먹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만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몸과 창조주 하나님의 피를 먹고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이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말을 논문으로 써서 말하지 못하고 이렇게 드라마를 써서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 떡이라는 걸,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음료라는 걸 이렇게 산상수훈에서 알려줍니다. 이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은 그 사건자체보다 더 중요한 진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으킨 사건의 진실은 예수님 자체가 우리의 떡이고 우리의 피가 된다는 진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이 필요했단 말이에요. 오병이어의 기적은 우리의 살과 피가 되고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거룩한 신정주의적 교리를 알려주기 위하여 필요했습니다. 그게 핵심이에요.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축사한다는 건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 동사, 에오리스시제, 부정과거 시제, 나눠주다는 계속 반복하는 미완료시제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 자기 몸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나눠주시는 일은 계속 반복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 에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 생명 떡을 나눠주는 일은 지금도 계속 되기 때문에 미완료시제입니다.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제가 볼 때 간이 된 물고기이기 때문에 떡과 그걸로 식사는 됐다고 믿습니다. 원대로 먹었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여러분 이 기적의 원천은 동정심입니다. 오천 명의 굶주린 무리를 먹여야겠다는 예수님의 불타는 동정심이 기적의 원천입니다. 기적의 실마리는 한 소년이 떼어 바친 오병이어입니다. 오늘 기적을 요청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오천 명의 굶주린 무리는 세계도처에 있습니다. 소말리아 시에라리온 아프리카 우리나라 자녀 중에서도 도시락을 먹지 못한 아이도 많습니다. 제가 옛날에 일산에서 목회할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가 고픈 아이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아이들은 수돗물을 주로 먹었다고 설문조사에 나왔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잘 먹습니다. 그런데 우리 북한 동포들은 거의 먹지 못합니다. 우리 한국사람 한 끼 식사가 북한 사람 세끼 식사입니다. 인도네시아 가니까 하루에 두 끼만 먹습니다. 하루에 세 끼를 먹는 사람들은 주곡인 쌀과 밀이 충만한 곳입니다. 우리는 쌀이 충만합니다. 우리나라는 평야가 많습니다. 남쪽은, 주곡을 세 끼를 먹는 겁니다. 세끼를 먹기 때문에 머리가 좋습니다. 영양상태가 충만하기 때문에, 그러나 북한 동포들은 은율 재령평야 빼고는 평야가 없습니다. 개마고원과 전부 다 산입니다. 북한은 엄청나게 굶주립니다. 북한에서 왜 데모가 일어나요? 왜 홍경래의 난이 거기서 일어났어요? 북한에서 일어났죠. 너무 굶주려서,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겠다는, 간절한 그 굶주림에 응답할 때 기적이 가능한 조건이 되고요. 기적을 탄생시키는 실마리는 오병이어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하실 때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겁니까? 우리가 가진 오병이어를 내 놓는 겁니까? 이런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지금도 굶주린 무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누군가 굶주린 무리를 먹이겠다는 열망이 있는 곳에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한국 남한에는 아직도 시에라리온 같은 곳이 많습니다. 아직도 소말리아가 남한에 있습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소말리아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으로 자살하는 사람, 절망하는 사람들은 먹고 사는 성만찬에서 소외된 사람들, 먹고 사는 식탁에 기대앉는 가정의 친밀한 공동체가 파괴되니까 자살하는 것 아닙니까? 중간 결론 맺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천 명의 굶주린 남자들이 기대어 앉아서 식사대형으로 앉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해서는 굶주린 무리를 포착하는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 나타나야 하고, 그 선한 목자의 마음을 먹일 수 있는 능력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고, 원대로 능력을 베풀어서 커다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 이 일은 가능합니다. 우리 양목사님 이 땅에 청년들의 영적 기갈을 통찰하세요. 영적기갈을 통찰하는 순간 오천 명을 먹이는 능력도 생길 줄 믿습니다. 저는 우리 후대에서 정말로 탁월한 말씀의 종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말씀의 종이 나타나면 세계 만민의 지갑을 동시에 열어젖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훌륭한 말씀의 종이 탐욕적인 부자의 마음도 감동시켜서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이런 식탁의 대형에 그들의 오병이어를 바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폭력으로 갈취하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지금 장롱 속에 사람을 먹일 수 있는 엄청난 돈들이, 하늘에 쌓아둘 수 있는 보화들이 잠자고 있는데 신령한 말씀의 종이 나타나면 그런 물질들이 다 따라 나옵니다. 왜 열두 초대교회 교우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재산을 바쳤습니까? 사도적 권능과 청렴성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재산들이 교회로 오게 됩니다. 우리가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적 권능과 사도적 청결과 청렴을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지, 성도들이 바칠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은 얼마든지 바칩니다. 다만 우리 한국교회가 사도들처럼 영적 청렴성과 권능과 도덕성을 담보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굶주린 사람들과 돈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지 못합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굶주린 사람들을 볼 눈이 없고, 굶주린 사람을 볼 눈은 있지만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 카리스마와 영적권능을 가진 설교자나 영적지도자가 없는 겁니다. 그게 만나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처럼 선한 목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굶주린 무리를 보는 순간 역사가 일어난다고 봅니다. 또한 오천 명의 굶주린 무리가 여러분 눈에 보이거든, 그리고 불타는 목자의 심정이 떠오르거든 여러분이 그들을 먹일 마음을 가지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을 받고 여러분이 광야에 가서 그들을 안정시키고 식사대형으로 공동체로 창출하기를 바랍니다.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말은 또 다른 공동체를 먹일 수 있는 양식, 즉 이방인을 먹일 수 있는 양식, 이방인 가운데 일어난 이 기적은 유대인들에게도 통할 수 있는 기적이란 뜻입니다.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는 말은 열두 지파를 먹일 수 있는 충분한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한테도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잔치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까지도 먹일 수 있는 양식이 남아 있었습니다. 가향공동체에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은 가향공동체에 오지 않는 사람까지 먹일 수 있는 충분하고도 남는 영적 양식이 있어야 하고 물적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향공동체가 온 땅에 굶주린 젊은이들을 먹일 수 있는 신령한 오병이어의 잔디광장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양진일 목사님 같은 분이 사자후를 펼쳐서 오천 명까지 앉혀서 먹여 열두 바구니에 남는 양식을 가지고 이 무리에 들지 않는 양들까지 먹일 수 있는 신령한 종들, 말씀의 종들, 지도자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돼야 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모세 같은 그 선지자, 신명기 18장이 말한 그 선지자가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천 명 먹이신 사건은 바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그 기적을 재현했다는 것을 의미하고요. 또 오천 명을 실제로 먹인 사람은 누구에요? 예수님은 육신을 양식으로 오천 명을 먹였지만 신령한 영의 양식으로 오천 명을 동시에 성만찬 공동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공동체에 초대해서 진짜 오천 명을 먹인 사람이 누구에요? 베드로, 사도행전에서 영의 양식으로 오천 명을 먹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의 육체적 양식을 먹인 버전이 신령한 양식을 먹이는 버전으로 바뀐 게 베드로의 오천 명입니다. 제일 마지막 15절은 심히 우리에게 적용 안 되는 부분입니다. ? 일단 우리를 임금 삼으려고 덤벼드는 무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괄호하고, 아직까지 심히 적용 안 됨, 이렇게 써놨습니다. 일단 우리는 오천 명 자체를 우리를 임금 되도록 억지로 잡지도 않는 상황에서 적용 안 되지만 앞으로 될 줄로 믿고 미리 말합니다. 양목사님 지금은 주변에 추종자가 100명밖에 안 되지만 만 명이 왕 돼달라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혼자 산으로 가야 합니다. 영적인 고독,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이것이 민중을 섬기는 능력의 원천이 된다는 뜻입니다. 진짜 대중을 원합니까? 진짜 굶주린 오천 명을 살릴 영력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임금 되지 말고 그들의 인기 파도 위에 춤추는, 그런 환호와 박수 소리에 장단 맞추는 어릿광대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잠잠한 고독의 사람이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은 이게 어렵습니다. 큰 교회 목사님들은 몇 만명의 군중이 그들을 왕처럼 대접하기 때문에 힘듭니다. 그러나 양목사님과 저는 아직까지 유리합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춤추는 군중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다, 매우 쉬운 일입니다. 우리 양목사님 떠나도 누가 잡겠어요? 아무도 안 잡습니다. 제가 떠난다고 잡아요? 아무도 안 잡습니다. 다만 앞으로 많이 잡고자 할 때, 산으로 갈 것, 양목사님 써놓으세요. 지금은 적용 안 돼요. 앞으로 10년 후에, 제가 이 본문을 예수님 마음으로 준비하며 예견했는데 아침에 너무 난감합니다. 여러분과 저하고 아무 적용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잡아주는 사람이 없어요. 제가 예수님을 묵상하다가 제목을 잡고 아침에 난감해졌는데 어쨌든 대중과 군중이 여러분에게 소리쳐서 여러분을 분산시킬 때 진짜 능력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진짜 오천 명의 군중과 맞닥뜨렸을 때 카리스마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잠적되는 것이 군중의 지지와 열기 위에 춤추는 것보다 낫다, 이런 진리를 여러분이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너무 아름다우신 예수님 너무 위대하고 장엄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오천 명의 굶주린 무리들의 퀭한 눈동자를 보시고, 오천 명을 먹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온 몸을 휘감고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는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 우리도 이 순서대로 능력자 되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천 명을 먹인 날 그 군중의 열광을 일으킨 후에는 홀로 산으로 잠적하여 영성관리 철저히 하게 하여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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