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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한복음 6:35-40

by 【고동엽】 2022. 2. 12.

주일1부 예배 - 요한복음 6:35-40 (나는 생명의 떡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6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 말은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간신히 이어지던 의사소통을 완전히 단절시키는 결정적인, 예수님과 제자 사이가 너무 낯설도록 거리를 크게 벌여놓은 대화입니다. 6 6-63절을 보면 최초로 이 대화를 들었던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의 담론이 식인종, 카니발리즘, 인육을 먹고 마신다는 이런 식의 대화가 그 당시 첫 제자들에게도 너무 힘든 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일주일 내내 묵상하더라도 오늘 날 우리가 예수님의 인육을 먹는 것 같은 무서울 비유를 이해할 길이 없습니다. 6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이것 보십시오. 이 말씀이 최초의 청중들에게도 어려웠습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마시라고 하는 이 말은 너무나 격렬한 혐오감 또는 격렬한 낯섦을 가져다주는 말이었습니다. 이 당시에도 이 말이 어려운 말이었다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어려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 분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신 분이고, 그 말씀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사람에게는 알려주시는 분일 줄 믿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말씀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말이고, 좀 더 나가면 구약성경과 이스라엘 역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생명과 먹는다는 말은 이미 한 번 나왔습니다. 4 14절과 34절에 나왔습니다. 4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 32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한 시간 전에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 한 시간 후에 왔을 때는 엄청난 에너지로 넘쳐 있었거든요. 누가 예수님께 음식을 갖다드렸냐고 물었는데, 그때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너희가 가져다 준 음식을 먹은 게 아니라 나는 특수한 음식을 섭취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에게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것이다, 기쁜 순종은 기쁜 음식과 같은 것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의 특수한 맥락에서 이해하라는 말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공급된다, 하나님 뜻에 순종할수록 영적 에너지가 충전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의 맥락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수록 세상이 알 수 없는 양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과 하나님 말씀을 섭취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구약의 맥락에서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루 종일 이해해도 어려운데, 잘 들으세요. 요한복음의 독특한 맥락에서는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양식을 먹는다는 뜻은 하나님이 보내서 하라고 하신 사명을 성취하는 겁니다. 구약의 맥락에서는 혹시 기억납니까?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은 사람,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 중에서 두루마리를 삼켜 먹은 사람 기억납니까? 어렵습니다.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은 사람은 에스겔 인자죠.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고 마셔서 하나님께 힘을 받아서 또 다시 사역을 감수했습니다. 말씀을 먹었다는 말은 말씀을 소화하고 이해하고 수행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죠? 구약에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나왔어요. 요한복음 1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러니까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먹는다는 말과 똑같은 거죠? 하나님 말씀을 먹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요구를 감미롭게 수행한다, 하나님 말씀을 납득하고 이해하여 순종한다, 두 번째 뜻은 하나님 뜻을 준행하여 성취하여 그 가운데 내가 경험했던 영적 소진 피폐를 되갚을 만큼 충분한 원기를 획득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적 맥락입니다. 그런데 구약적 맥락을 가지고도 예수님의 살을 먹고 마신다는 걸 이해하는데 모자랍니다. 구약적 맥락에서 한 가지 더, 포이에르 바하 라는 사람이 쓴 논문, 제가 다니엘서 강의 했을 때 썼죠? 다니엘서 1 8절 각주를 보면, 자세하게 포이에르 바하가 쓴 논문과 그런 글을 쓴 영국 학자를 인용해놨는데, 고대 셈족사회에서 계약을 체결할 때 먹고 마셨습니다. 양고기를 먹고 마셔요. 먹고 마시는 행위는 서로를 먹고 마시는 거예요. 서로의 인격을 먹고 마시는 거예요. 고대 셈족사회에서 계약을 맺을 때 먹고 마셨어요. 여러분, 출애굽기 24장에서 이스라엘 청년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셨다는 말이 기억납니까? 계약식사를 영어로 covenant meal 이라고 말해요. 성만찬의 영혼은 고대 이스라엘의 계약식사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가 엄숙한 계약을 맺을 때, 야곱이 라반과 여갈사하두다 라는 곳에서, 창세기에 보면 갈르엣이라는 곳에서, 여갈사하두다 라는 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야곱이 라반을 보내주죠? 식사를 하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먹는 겁니다. 식사를 하는 것은 내 진실을 먹는 겁니다. 내가 누구의 진실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긴장이 이완됩니다. 누구와 식사를 한다는 말은 평화의 관계로 돌입했다는 뜻입니다. 불가침 관계로 돌입했고, 지속적인 우호관계로 돌입했다, 지지관계로 돌입했다, 식사를 할 때 화학성분, 빵과 음식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서로의 진실을 주고받은 겁니다. 식사의 의미가 오늘날 chemical element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과 다른 의미가 있었어요. 서로의 인격의 진실성을 먹고 마시는 거였어요. 그게 계약이었어요. 예수님이 먹고 마신다는 말을 할 때는 그런 구약성경의 맥락과 고대 셈족사회에서 계약식사를 할 때 먹고 마셨다는 말뜻을 아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의 성만찬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일생 동안 예수님께서 나에게 주신 뜻을 수행할 의무를 짐 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의무를 수행하다 보면 내가 예수님을 먹은 것과 똑같아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할 때, 우리가 거룩한 드라큘라가 돼야 해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님처럼 바뀌어야 해요. 역설적으로 드라큘라 영화를 보면 드라큘라 피를 먹으면 드라큘라처럼 바뀌죠. 드라큘라가 사람의 피를 받으면 드라큘라처럼 되잖아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면 예수님처럼 바뀌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모방하고 소화하고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재구성될 것에 대한 기대로 들어가는 거란 말이에요. 너무 중요해요. 성만찬 식사가 고대 초대교회, 적어도 200년 동안의 성만찬은 복제예수를 양산하고 생산하는 하나의 현장이었어요. 성만찬에서 떡을 뗐다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 갈수록 더 감격으로 가득 차 있어요. 오늘날 우리가 성만찬이 힘이 없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성만찬을 하니까 그래요. 우리가 만일 을지로와 충무로와 테헤란로에서 성만찬의 엄숙한, 예수님과 계약식사를 한 사람다운 삶을 살고 진짜 성만찬을 교회에서 한다면 성만찬은 초대교회 교부들이 경험한 성만찬과 똑같은 성만찬이 되고, 치료를 일으키는 성만찬, 기적을 일어나는 성만찬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진지하게 순종하고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을 먹고 마신다는 성만찬의 용어가 낯선 용어가 돼 버린 거예요. 이 말이 어렵긴 하지만 우리 예수님이 말뜻을 어렵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심 사항에서 너무 떨어진 거예요. 특히 우리는 예수님이 만든 이적의 빵, 남들이 먹어보지 못한 특권의 빵, 기독교 신앙은 보통 사람이 맛보지 않은 빵을 맛보는 것, 이적의 빵을 맛보는 것, 오병이어가 오천 명을 먹이는 그런 현장에 가보는 것, 이게 기독교인의 특권 아니에요.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본질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만든 표적의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리키는 본질,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는 양식이 되러 오셨다는 그 진리를 이해하고 자신의 인생이 오천명분 양식으로 바뀌도록 허용하는 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거예요.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오천명분 양식으로 내어놓는 삶, 자신의 인생을 여러 사람의 양식으로 내어주면 신적인 능력과 에너지를 공급받아 잘 살게 된다, 능력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된다, 원기에 가득 찬 삶을 살게 된다, 그런 뜻이에요. 이해가 되나요? 저로서는 간신히 이해가 됐습니다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인데, 다시 한 번, 일주일 내내 이 말씀을 매 아침에 묵상을 했습니다. 지난 주 설교가 너무 어려운 것 가아서 많이 반성하면서, 왜 내가 지난주에 설교를 어렵게 했을까? 가만히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두꺼운 주석서를 봤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제일 좋다는 헨델이 쓴 주석서를 봤습니다. 그 주석은 이렇게 해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영적인 양식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영적 spiritually 을 너무 많이 강조해서 이 뜻을 너무 잘못 해석해 놨습니다. 그리고 다른 주석도 봤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영적 양식이란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내려오는 산 떡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 떡을 섭취하여 원기 왕성한 상태가 돼서 하나님 뜻을 준행하는 순종의 화신이 되라는 뜻입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면 어떤 상태가 돼요? 6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못 누립니다. 6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니 우리는 떡을 먹어야 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우리가 떡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고 마시자마자 하나님 양식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떡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먹지 않고 다른 것을 먹으면 생명으로 이르는 양식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르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지 않고도 생기가 많은 사람을 보죠? 그 생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 몸을 오천인 분의 양식으로 주려는 그 거룩한 희생의지로 넘치는 생기가 아닌 모든 생기는 살기입니다. 살기와 생기는 비슷하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먹어버리려고 하는 게 살기입니다. 그런데 살기가 가득 찬 사람도 생기가 가득 찬 사람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고 예수님 때문에 생기가 가득 차지 않은 나머지는 식물인간 상태로 살거나 아니면 살기 가득 찬 삶을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옵션밖에 남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살기가 가득 찬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성실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잘해버리는 성실입니다. 다른 사람을 물 먹이는 성실입니다. 항상 시험을 잘 치고 나면 친구들한테 미안한 마음을 갖는 성실입니다. 친구들이 시험 못 치고 나서, 시험이 엉뚱한 게 나왔다고 불평할 때 잘 치고 돌아와서 혼자 고소해하는, 이게 바로 제가 느끼는 인생, 저는 그런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이게 제 유일한 낙입니다. 밤새도록 공부해서 남들이 탄식할 때 막 서너 개씩 답안지 쓰고 룰라라 하는 것, 이런 것이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성실입니다. 살기입니다. 그러나 내가 기뻐할 때 다른 사람은 시험을 못 쳐서 죽는 겁니다. 내가 상 받을 때 남들은 박수쳐줘야 합니다. 밤잠을 설치는 성실은 성실이지만 모든 사람 만민을 복되게 하는 성실이 아닙니다. 그건 나 자신만을 위한 성실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뜻을 요약합니다. 하나님 뜻을 행할 능력을 공급받는다, 예수님이 한 번 먹을 때마다 하나님 뜻을 준행할 능력을 공급받는다는 겁니다. 예수님 말씀 한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1800kcal 된장찌개 + 돈가스 먹는 게 1800kcal입니다. 1800kcal 식사를 섭취하는 것 같다, 산상수훈 5 3절 묵상하면 3200kcal 먹는 것과 똑같다, 하루 종일 달려가도 넘치는 에너지가 납니다. 저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볼 때 에너지가 넘치죠? 에너지가 안 넘칠 때 있습니까? 저는 항상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고, 공부하는 게 쉽고, 강의도 쉽습니다. 저는 에너지가 넘칩니다. 그 이유는 제가 살아야 할 목적을 20대 때 분명히 알았고, 내가 그릇된 삶에서 전향한 것을 분명히 저는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외에는 어떤 다른 목적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섭취한다는 말을 약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꼭 깨달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실천적 말씀, 성육신한 말씀을 먹는 것이다, 즉 순종으로 삶에서 드러난 몸을 먹는 것이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계약적 결속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님과 계약적 결속상태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공급 받아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게 예수님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성경이 잘 외워집니다. 이게 너무 저한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먹는다는 뜻의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생을 누립니까? 이걸 신비적으로 보지 마세요. 예수님처럼 자신의 인생, 자신의 생명과 자원 재능과 모든 것들을 오천 명의 양식으로 내어주는 것, 이게 표적, 어떤 게 기적이에요? 제가 돌로 떡을 만드는 게 큰 기적이에요? 오천 명의 양식을 먹어치우려던 아주 악한 성실의 사람으로 살던 제가 오천 명의 양식으로 저를 드리는 게 더 큰 기적입니까? 어떤 게 더 큰 변화입니까? 돌이 떡이 되는 것보다 더 큰 변화는 인간이 바뀌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무엇을 보여주셨냐면 누구든지 사람은 오천 명의 양식을 먹어치우는 괴물 같은 존재로 살면 안 되고,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일인분 식사를 오천 명의 양식으로 바치는데 있다, 이게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 실천적 윤리적 함의란 말이에요. 그렇게 사신 예수님, 예수님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원히 만민의 양식으로 줬어요. 그게 바로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해방할 자라고 믿었는데, 엠마오로 낙심하여 내려간 두 제자가 성만찬의 떡을 떼자마자 눈이 밝아집니다. 배가 고프면 어떻게 돼요? 허기지면 눈이 어떻게 돼요? 시력이 약해지죠. 당분 포도당이 시신경으로 안 가잖아요. 그래서 눈이 약해져요. 그런데 양식이 들어가자, 특히 꿀 같은 게 들어가면 눈이 확 밝아지죠.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도 이랬어요. 시야에서 예수님이 사라졌죠? 인생에서 예수님이 사라졌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예수님이 사라진 그 상태에서 떡을 떼자마자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봤잖아요.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몸으로 바뀐 그 떡을 떼는 순간 내가 엠마오로 탈출자 변절자 이탈자 도망자, 그리스도의 제자 중에서 이탈한 이탈자 몸을 역진시키고 반전시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 성에 머물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돌아갔지 않습니까? 성만찬의 떡을 떼고 나서요. 우리가 성만찬의 떡을 떼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우리 발걸음이 사명자의 발걸음으로 재조정되지 않습니까?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자기 일인분 인생으로 낙향하는 겁니다. 일인 분 인생은 영생하지 못하는, 예수님과 계약적 관계에서 해체돼버린 삶을 사는 겁니다. 먹는 행위는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식사할 때 이건 먹는 게 아니라 진실을 먹는 겁니다. 제가 양진일 목사님과 식사를 할 때 내가 만일 초대한다, 그건 화학성분을 먹는 게 아니고 우리 진실을 먹는 것이고 우정을 먹는 것이고 사랑을 먹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요?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죠? 하나님이 음식 잡수시는 것 알죠? 향기로운 번제로 드린 번제가 하나님께 거룩한 냄새다, 하나님은 냄새 맡고, 하나님 음식은 냄새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그 거룩한 삶이 하나님께는 원기를 북돋는 음식이 됩니다. 여기서 조심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생물적 무감각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바친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다? 이러면 금방 잘못된 것 아니냐? 아리스토텔레스 신관에 따르면 잘못된 것 아니냐?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의 제사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음식 때문에 원기를 북돋는 분이에요. 이건 너무나 옳은 말이에요. 하나님은 낙심도 하지 못합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낙심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낙심도 하시고 후회도 하시고 기분이 잡치실 때가 있어요. 인간이 너무 힘들 때, 하나님 이렇게 말해요. 아이 싫다, 다 쓸어버리고 싶네, 하나님은 그렇게 말했어요. 하나님은 인간 피조물 때문에 기분이 다운되시는 분이에요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하나님도 그런 노래를 좋아한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온전한 전체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이 이실레 아크 투 아도나이, 이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런 말이 나오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요. 표현이 잘못된 거예요. 이 말은 하나님의 원기를 북돋는 향기란 뜻이에요. 진실한 인간이 진실한 언행을 통하여 하나님 뜻을 착하게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분을 북돋는 것이고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는 행위에요. 다시 요약합니다. 제사는 이교적 의미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께 음식을 갖다드리는 겁니다. 번제 화목제는 진짜 하나님께 음식을 갖다드려 하나님 원기를 북돋게 하는 거예요. 우리 하나님도 우리의 순종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셔서 기쁨에 가득 차세요. 씨 에이스 히오세 아다포토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이사야 42 1절에 나오거든요.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올라오실 때, 백성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죄 없는 예수님이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에 깊이 참수하면서 요단강에서 백성들의 죄를 뒤집어쓰는 마음으로 대속적인 침례를 받고 올라올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이, 나는 너를 기뻐했다, 말했거든요. 이 말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기쁨에 가득 찰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에요. 그게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는 것과 똑같아요. 성만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로 원기를 북돋아 주는 우주적 식사이다, 하나님도 우리 때문에 원기가 북돋아지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인격적 하나님을 이해하는 게 너무 중요해요. 그래서 예배가 정말 중요해요. 우리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기쁨에 가득 차실 수 있다는 뜻이에요. 의로운 순종을 바치는 당신의 종들 때문에 하나님 기분이 너무 좋으셔서 하나님이 기쁨에 넘치셔서,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너무 기쁘셔서 천군천사와 함께 기뻐하며 잔치를 연다고 하셨어요. 우리 하나님이 무생물적인 우주적 초월자가 아니고, 인격적 하나님이고 우리 인간의 행동여하에 따라 지극히 정서적 인격적인 심층반응을 보이시는 분이시고, 음식을 드신 것과 똑같은 원기 충만한 하나님이 되고 원기가 빠진 하나님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여러분이 기억해야 해요. 그래야만 이 기독교 신앙이 온전해져요. 구약 제사신학의 핵심은 인간의 감미로운 순종은 하나님께 양식이 된다는 거예요. 레위기의 핵심, 인간의 순종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음식이 돼서 하나님 기분이 업 된다는 거예요. 이게 구약의 제사신학이에요. 마무리하겠습니다. 먹고 마신다는 말은 계약신학의 용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계약신학의 용어는 하나님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인간의 순종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설계했느냐면 하나님 뜻에 한 번 순종할 때마다 우리가 능력에 가득 차게 만들어놓으셨어요. 결론적으로 지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순종하지 않는 사람, 지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순종이 없는 사람, 순종의 목표가 없는 사람, 지금 능력이 없고 낙심한 사람은 엠마오로 내려간 사람이에요. 성만찬에서 주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은 사람, 그 사람은 목적이 없어요. 예수님과 계약적 결속감이 없기 때문에 그는 내려가는 거예요. 낙향하는 거예요. 영적인 침강을 경험하는 거예요.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말은 첫째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늘 주야로 묵상하고 섭취할 것, 두 번째 화육된 하나님 말씀을 늘 주야로 모방하고 사모할 것, 예수님을 주야로 모방하고 사모할 것, 세 번째로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주님의 작은 종들과 친교를 통하여 계약적 결속상태를 유지할 것, 이게 예수님을 섭취하는 겁니다. 다시 세 가지 요약, 주님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첫째, 기록된 말씀을 자양분을 먹고 마시듯이 섭취할 것, 이해하고 순종하고 감미롭게 순종할 것, 화육된 말씀이신 예수님을 모방하고 88장 찬송을 자주 부를 것,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 그런 찬송을 부르면서 예수님을 하루 종일 묵상하는 것이 두 번째고, 예수님을 공동체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모방해내는 공동체와 계약적 결속상태를 견고하게 유지할 것, 그러면 원기가 넘치게 되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게 됩니다. 내가 6일 동안 엠마오 도상으로 갔다가 7일에 영적인 각성을 해서 다시 예루살렘 공동체에 돌아와서 능력에 사로잡힐 때까지 예루살렘 성에 머무는 대반전, 전환이 일어난다는 말이에요. 여러분 모두가 여러 가지 이유로 엠마오 도상으로 낙심하여 내려가는 길이었다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엠마오 도상의 제자가 눈이 밝아져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처럼 여러분도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여 제자 공동체에 합류하여 그 성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까지 기다리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어서 예수님과 함께 계약적 결속상태를 유지합시다. 알겠죠? 그러면 새 힘을 얻게 되고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과 똑같은 성만찬적 충만 상태가 올 줄 믿습니다. 여전히 어렵죠? 일생 동안 들고 가면서 나머지는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53살 될 때까지 이렇게밖에 못 깨달았습니다. 너무 어렵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저에게 남은 기간 동안 또 깨달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뜻을 잠시 묵상했습니다. 어렵지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고 우리 가슴에 격동을 일으키는 말씀인 걸 믿습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기적의 빵을 먹는데 우리 욕심을 충족시키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예수님을 모방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생명을 실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성만찬 신앙으로 전진하게 도와주소서. 기록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화육된 말씀을 주야로 모방하고 공동체적 지체적 말씀구현을 일삼는 형제자매들과 계약적 결속상태를 유지하여 엠마오 도상으로 내려가던 중의 발걸음을 다시 한 번 사명자의 공동체 동아리로 불러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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