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0-71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1부 예배-요한복음 6:60-71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

 

석장 정도의 내용이 6장 전체이기 때문에 봄에 시작했는데 한여름이 돼도 끝나지 않았죠? 오늘 마지막입니다. 6장의 핵심은 예수님이 자기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니까 실족해버리는 장면들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자기 살과 피를 마시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는 이미 객관적으로 있는 진리를 믿고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을 끊으라, 이건 불교가 말한 겁니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법칙을 믿으라고 설득하지, 자신을 믿고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하는 것은 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언어의 수준을 훨씬 넘는 것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자기가 하나님께 파송 받았다는 소위 말해서 인자의식, 비파송의식이 간절하지 않으면 이런 말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참 하나님의 자녀이고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하니까 완전히 실족해버렸습니다. 6장 41절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유대인들만 수군거린 게 아닙니다. 61절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이 말씀은 54-57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내가 보낸 사명을 수행하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57절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말을 하니까 60절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수군거립니다. 유대인들 모두가 수군거린 일을 제자들도 수군거립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불연속이 시작됐습니다. 제자들이 수군거려 걸림돌이 됐습니다. 한 4주 전에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57절을 가지고 설명했는데,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뜻은 예수님이 보내신 사명을 수행한다, 또는 예수님을 믿고 신뢰한다, 또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준행한다, 이런 뜻으로 설명했습니다. 57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이 뒤에 요한복음 4장 34절을 집어넣으라고 했죠?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보내신 바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양식을 얻음 같이,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이런 뜻으로 설명했죠?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성취함으로써 큰 원기를 얻듯이 여러분도 내가 보낸 이 사명, 내가 보낸 하나님 나라 복음전파의 사명을 준행함으로써 원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일하면 에너지가 빠지죠?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면 에너지가 공급이 돼요. 일반적으로 모든 노동은 에너지를 감가, 에너지를 축소시키고 빼갑니다. 그런데 사랑을 실천하고 자기 몸을 다른 사람에게 양식으로 주는 희생의 행동은 분명히 힘이 빠지는 일인데, 신적 생명력이 공급이 돼요. 주유가 돼요. 주입돼요. 예수님 말은 그겁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그 일을, 요한복음 4장 34절 그 원칙에 따라 했더니 내가 사마리아 그 여인에게 아버지의 복음을 전하려고 한 시간 동안 지친 몸을 이끌고 대화했더니 그 여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보고 내가 원기를 얻었듯이, 이런 뜻입니다. 내가 보낸 그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도, 나를 먹고 마시는 그 일로 인하여,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을 했더니 실족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건 내용을 보면 실족할 말이 아닙니다. 살코기를 먹고 피를 마시는 드라큘라 흡혈귀적인 생각을 하니까, 그 상상을 하니까 disgusting 역겹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예수님이 내 몸을 먹으라는 게 아니다, 내 피 헤모글로빈 적혈구 백혈구를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준 사명을 수행하라는 뜻이다, 나 예수를 먹으라는 말은 내가 보낸 사명, 사랑을 실천하고 자기 몸을 이웃에게 바치는 그 행위를 모방하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나를 먹는 것이다, 내 몸을 갈릴리 민중의 식탁에 제물로 바치듯이, 갈릴리 유대인 백성들의 유월절 어린양처럼 내 몸을 살로 주듯이,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식탁에 여러분의 자원 재능 여러분의 모든 생의 업적을 전부 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데 쓰라, 그럼 나를 먹는 것이다, 그러면 힘이 난다, 이런 말입니다. 말뜻이 이해되죠? 63절 ‘살리는 것은’ 내 몸 예수님의 육체 살갗 예수님의 단백질 덩어리가 아니다, 내가 한 말 그것을 먹으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여러분에게 들려주는 말, 레마, 레마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발음은 헤마 하듯이 레마 합니다. Rhema입니다. 헤마하듯이 레마, R 발음이 안 돼서, 프랑스말로 R발음이 전부 H로 들립니다. 축구선수 호날두, 영어로 로날드인데, 우리 신문에는 호나우드라고 쓰죠? 로날드에요. R 발음이 라틴발음으로 가면 H로 바뀌어요. restaurant 처럼 안 들리고 hestaurant 처럼 들려요. R 발음 생각하면 안 돼요. Rhema, 유명한 라틴어 로 발음이에요. Rhema, 내가 하는 말을 먹고 마시라는 뜻입니다. 내가 하는 말을 납득하고 소화하고 이해하라는 뜻입니다. 먹는다는 말은 납득하고 이해하면서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먹는다는 말은 납득하다, 소화시키다, 소화시키고 납득한 후에 행동으로 순종한다, 이것을 먹는 거라고 말합니다. 63절이 중요합니다. ‘살리는 것은’ 육체노동으로 단련된 내 몸 근육이 아니고 내가 한 Rhema가 여러분을 살립니다, 내가 한 말을 잘 섭취하시고 내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하시면 여러분은 삽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64-66절은 이 말을 하자마자 예수님 주변에 12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열두제자가 원래 12명을 선택했지만 남는 사람도 12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에 열두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도 이상하게 남았기 때문에 11+1만 남았습니다. 한 명은 마귀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굉장히 격한 용어를 쓰십니다. 7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하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마귀라 하는 게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그런 분은 아닌가봐요. 상당히 독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이런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성품, 마귀스럽다도 아니고 마귀다, 베드로한테 하는 말도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 안에 있는 사탄아 물러가라, 괄호하고 베드로 너 아니야,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냥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기탄없이 말하는 본문으로 쓰였거든요. 이 말은 예수님이 갈릴리 농민적 격정의 소유자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예수님이 11+1, 11명은 믿었지만 1명은 안 믿는, 배반할 자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이 만드신 떡을 먹는 것은 육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화학성분이죠. bread,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만든 떡을 먹는 것은 유익하지 않아, 그걸 먹으면 다시 배고파져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먹으면 영적 갈등과 허기가 해소되기 때문에 생물학적 허기와 갈증을 초월하는 영원한 목마름이 해갈된 상태입니다. 제가 지금 이런 상태에요. 제가 79년에 거듭났습니다. 그 후 충만한 상태, 저는 지금 영적인 기갈이 해결된 상태입니다. 79년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상태입니다. 저는 근원적인 기갈을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나 파리바게트에서 먹는 빵은 먹고 나면 7시간 지나면 또 빵에 대한 허기가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내가 만든 오병이어의 빵조각을 먹으면 그건 육입니다, 내가 빵 조각을 준 까닭이 무엇인 줄 아세요? 내 말을 그렇게 먹고 힘내라는 뜻입니다,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것은 하나의 메타포, 하나의 비유입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메시지는 그 빵을 매번 공급해서 빵가게를 도산시키겠다는 게 아니라 내 말을 그처럼 먹고 50씩 100씩 앉아서 천국잔치를 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 말씀을 듣고 잔치를 벌이라는 뜻으로 한 것입니다, 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이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진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조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죠? 광야에서 먹은 만나가 무슨 뜻인 줄 아세요?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럼 말씀 먹지 않고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먹지 않았는데 생기가 있는 사람은 살기입니다. 다른 사람을 각축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 내뿜는 기를 우리는 살기라고 말합니다. 살기어린 사람도 힘차고 생기 넘치는 사람도 힘차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감동 받아서 부지런하게 사는 것은 생기지만 내가 내 더러운 욕망과 탐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바쁘게 몰입해사는 것은 살기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안 먹었는데 생기가 있다? 하나님 말씀도 안 먹었는데 기분이 좋다, 하나님 말씀도 안 먹었는데 인생이 exciting하다, 무엇일까요? 그 사람은 살기가 가득 찼다고 봐야 합니다. 내가 마귀가 아닌가 자가 진단법은 하나님 말씀을 안 먹었는데도 인생이 재미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 중에 사는 자, 죽음, 살모드로 사는 사람입니다. 남을 죽이는, 남을 해치는, 남에 대해서 자기주장을 하는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살기로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하나님 말씀을 먹고 인생을 무릇 살아가는 겁니다, 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만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내가 오병이어 기적을 베푼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무릇 하나님 자녀와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한 번 듣고 섭취하고 납득하고 순종하는 그 행위를 통하여 계속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사는 것이라고 나는 정의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자체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람은 떡 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납득하고 소화시키고 이해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함으로 말미암아 그 실천의 힘을 통해 나오는 에너지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면 에너지가 납니다. 식사하는 게 맞죠? 우리가 식사하는 까닭은 에너지를 섭취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납득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면 우리 몸에 에너지가 공급돼요. 그게 바로 영생, 그 에너지를 가지고 사는 것을 우리는 영생한다, 또는 영원토록 사는 생명을 산다, 그런 사람은 영원히 존속 가능한 삶이니까 원래 의미의 영생이 맞죠? 즉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영원히 존속가능할만한 가치 있는 삶이라고 그랬죠? 영원히 존속 가능할만한 가치 있는 삶은 사랑의 삶이라고 그랬죠? 자기를 다른 사람의 양식으로 주는 삶이라고 했죠? 우리 엄마 아빠가 제한적으로 영생을 시범보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는 이유는 엄마 아빠의 영생실천, 즉 영원히 존속될만한 자기 내어줌의 삶 때문에 자녀의 삶이 가능한 거거든요. 이미 가정 안에 영생이 실천되고, 그런 엄마 아빠의 자기희생적 결과로 자녀가 태어나니까 자녀는 영생의 산물이죠. 엄마 아빠의 살아가는 자기희생의 결과로 자녀가 살아가니까 이 아이는 또 다시 영생으로의 부르심을 받은 거죠. 이건 정상적인 말입니다. 원리는 그렇게 마땅하죠? 그런데 하나님과 공존하는 삶은 엄마 아빠가 자기 목숨을 바쳐서 자녀를 사랑하는 그 원리로 모든 다른 인류를 향하여 엄마 아빠처럼 자기 살과 피를 내어주는 삶을 산단 말이에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란 거죠. 그렇게 멋진 삶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게 위탁을 하셨어요.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가 갈릴리 민중에게 했던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해요. 교회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고 교회가 가진 자원들을 전부 다 바쳐야 해요. 하나님 사랑하는 데 다 바쳐야 합니다. 이웃 사랑하는 데 다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먹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우리의 헌금 받은 것 재정 받은 것으로 이웃 사랑을 하면 이웃 사람이 그것 때문에 살죠? 그 사람은 무얼 먹고 사는 거예요? 그 교회의 봉사를 먹은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먹은 것이 맞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신 것 아니냐고요. 예를 들어서 한 교회가 있어요. 그 교회가 지역 사회를 다 섬겼습니다. 지역사회의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그 교회의 모든 형제자매들의 집중된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다 섬겼어요.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그 사람이 살아났어요. 그 사람은 무얼 먹은 거예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리스도의 피를 마신 거란 말이에요. 성만찬적인 자기 내어줌, 자기를 해체시킬 만큼 성도들의 집단순종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과정이란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알면 끝, 설교 끝냅니다. 안다고 하세요. 알면 끝내겠습니다. 어렵습니까? 저는 나름대로 납득이 됐습니다만, 저는 이런 기독교만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이런 기독교 말고는 더 이상 만민에게 전할 가치가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이런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런 삶으로 초청한 사람에게만 기대되기 때문에 아무라도 이렇게 살겠다고 자원봉사의 마음으로 나갈 수 없는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이런 삶으로 초청한 사람들만 이런 영생의 삶이 기대되기 때문에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이런 영생 공동체의 삶을 살도록 초청받지 않은 사람은 내게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굉장히 사람들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마음을 답답하게 만듭니다.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아니한 자는 따라다녀도 끝이 안 좋다는 뜻입니다. 제가 하나님보다 더 마음씨가 좋다면 이걸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 보다 더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정설이 우리가 소화시킬 수 없는 교리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또 부인할 수 없습니다. 65절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런 영생의 삶을 살도록 초청받는 것, 내가 자원봉사의 마음으로 어느 날 각성해서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감동으로 초청받는 사람에게만 이런 삶이 기대되는 겁니다.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런 말은 마음을 닫습니다.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67-69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주는 당신입니다. 당신이 주시는 말씀이 영생의 말씀인 걸 믿습니다, 왜? 예수 당신 말씀을 들을수록 우리는 자기부인이 잘 됩니다, 당신 말씀을 들을수록 우리 마음이 성령의 감동에 잘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자원 재능 모든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 분이 맞습니다, 왜? 예수님 당신이야말로 내 마음을 이렇게 뜨겁게 이웃 사랑의 화신으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가 가장 마지막 까지 썼던 책이 <인생독본>이라는 책입니다. 지혜의 달력>, 영어로는 이렇게 번역됐습니다. 1년 365일 내내 종교적 교양어록을 읽는 책을 만들어놨습니다. 굉장히 두꺼운 책입니다. 톨스토이는 그 책을 쓴 것을 보니 기독교 이해가 참 얇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책을 보면, 그 이전 책을 보면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 마지막 책을 보면 톨스토이가 기독교를 보통 고상한 종교사상과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왜? 그 책에 보면 UC 말로리, 법구경, 코란 에픽테토스, 모든 이 세상에 그럴 듯한 사람들을 전부 백가지로 다 쑤셔놨습니다. 읽어 보면 가끔 괜찮은 말이 나오지만 대부분이 너무 수준이 낮은 말들입니다. 그걸 러시아 농민들더러 읽으라고 한 겁니다. 인생독본은 엄청 두꺼운 책입니다만, 제가 볼 때는 별로 읽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이레째 읽을거리로 긴 글이 나옵니다. 긴 글은 전부 다 소설들입니다. 소설들은 전부 다 재미있습니다. 빅토르 위고, 모파상, 투르게네프 이런 사람들 소설인데, 이건 읽을 것이 있는데, 가장 큰 핵심은 톨스토이가 예수님과 법구경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한 것처럼 보여요. 법구경 코란 요한복음이 같이 나옵니다. 그걸 볼 때 약간 이 사람이 예수님을 잘못 알았나, 충분히 알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런 답답한 책입니다.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고, 만화책보다는 낫죠. 이분이 범주 없이 막 섞어놔서 쇼펜하우어가 엄청 많이 나와요. 루소 쇼펜하우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신을 바로 정확하게 fully representation 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막 섞어 놓고 인생 교양록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의 말은 우리를 실족시킵니다. 우리 이성을 가진 사람을 실족시킵니다. 왜? 보편적인 하나님 계시를 믿지, 특수한 예수 당신의 말에만 생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이성의 보편적 법칙과 어긋납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 예수 같은 사람이 나와서 공평하게 접근하게 해야지, 당신만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인자라고 주장하나? 이렇게 주장하면 우리 이성의 법칙은 완전히 실족합니다. 예수님의 고도의 배타적 자기주장은 우리를 수군거리게 만들고, 실족시키게 만드는데, 실족거리가 되느냐고 묻습니다. 이 예수님의 독특한 배타적 자기주장을 믿을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시고 우리의 통찰력을 여신 겁니다. 여기까지밖에 저는 말을 못합니다. 저는 추구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중요하지만 법구경와 코란과 예수님은 너무나 다릅니다. 절대로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배타적 주장을 하여 이성과 양심과 우주적 공평성을 믿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믿을 수 없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이런 주장을 저는 예수님 은혜로 하나님 은혜로 영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알고 보니 예수님의 이 엄청난 배타적 자기주장은 차원 높은 보편적 하나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됐습니다. 마무리 짓습니다. 예수님이 도무지 언뜻 들을 때 실족할 만큼 자기주장,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주장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처럼 높이려는 의도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기독교를 높이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배타적 주장 속에 감춰진 진리를 세계 만민에게 공평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배타적 주장이라는 포장지 속에 싼 겁니다.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불교나 모든 걸 동시에 공부한 사람보다 보편적 하나님 사랑, 비특권적 하나님 사랑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것이 참 신비합니다. 예수님의 배타적 자기주장,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생명의 음료니, 이런 말들은 도저히 수군거릴 수밖에 없는 말이고, 실족시킬 수밖에 없는 말이라는 걸 인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마음 문을 여셔서 예수님의 배타적 주장 속에 있는 진실의 정체를 깨닫게 하시면 구원이 임한 것이고, 그래서 구원은 선물인 것입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 제 친구들 똑같이 bible study 했지만 안 믿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 다 믿는 것 아닙니다. 제 아들딸도 이걸 완전히 이해 못합니다. 우리 가족 중에도 이해 못한 사람이 있고, 내 가장 친한 친구도 이해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제게 이런 성스러운 책임감, 영생을 살도록 부탁하는 초청을 아직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무슨 특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먼저 믿은 저는 아직까지 믿지 못한 내 친구들에 비해서 예수님처럼 성만찬적인 자기 나눔의 삶을 먼저 살도록 부르심 받았기 때문에 전혀 제가 저 잘났다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더 엄숙한 사랑의 삶으로, 더 영생 넘치는 사랑의 삶으로, 놀라운 사랑의 삶으로 자기 몸과 자기 살과 피를 남을 위해서 바치는 삶으로 부르심을 먼저 받은 것뿐입니다. 아직까지 믿지 못하는 내 친구, 국회에 근무하는 아주 친한 친구, 절친, Best friend입니다. 그 친구는 회권아 너를 만나면 마음이 평안하다, 하면서 교회가자 하면 절에 가야 하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한 두시간 동안 실컷 대화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너랑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그러면서 내 손을 자꾸 만집니다. 그런데 점치러 간다 그럽니다. 한민아 어떻게 너는 목사 친구인 나를 보고 나랑 식사를 두 시간 하면서 돈암동 생각을 하냐?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 야 그것도 전혀 나쁜 건 아니더라, 국회 차관보입니다. 엄청난 공간을 보니 달마대사 비슷한 그림이 있어요. 떼어주고 싶은데, 달마 누가 그려줬냐고 하니까 1월 초에 어떤 도사가 그려줬다면서, 아직까지 그 착한 친구는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관심은 있는 것 같아요. 회권아 잘 있나? 가보면 별 말이 없어요. 내 손을 악수하고 안 놔줘요. 마음이 평안하다고, 1년에 계속 하는 말이 그거밖에 없어요. 영적 갈급함은 있는데 예수 믿으려나 하면 안 믿어요. 달마대사만 자꾸 보여주고, 이런 사람도 있어요. 그 친구가 똑같이 저와 bible study를 했습니다. 왜 이 친구는 못 믿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하는 친구를 왜 아직까지 저처럼 믿게 안 해주셨는지 모릅니다. 다만 제가 그 친구보다 먼저 믿었다 하더라도 배타적 자기주장을 일삼는 예수님의 주장을 하나님의 아들, 온 세계 만민을 위한 살과 양식과 음료가 된 이분의 정체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건 나에게 주신 나의 고유한 사명입니다. 나는 영생을 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영생을 살도록 부르심 받은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놀랍고도 믿을 수 없는 예수님의 주장, 내 살은 참된 음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는 주장, 내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아무도 영생을 살 수 없다는 엄청난 주장을 일삼는 예수님의 참된 정체를 순식간에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주시고 계시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이 계시와 조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암흑 상태에서 예수님의 이 배타적 주장 때문에 수군거리다가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과 양심을 가진 이 세상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주장 때문에 실족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시고, 제 친구 한민도 도와주시고, 우리의 자녀도 친척들도 아직도 이 주장 때문에 disgusting 하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비난받습니다. 이 땅이 기독교 정체를 예수님의 정체를 교회의 정체를 제대로 알도록 성령 충만 주시고 조명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