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1부 예배-요한복음 6:41-51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떡, 내 살을 먹으라)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6장 60절 '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이 말은 이 말을 처음들은 제자들에게도 매우 힘든 말이었다, 난해한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요한복음을 계속 하면서 서너 가지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전제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의 신학적 전통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의 영생은 일반 종교적인 술어가 아니라 시편 133편, 신명기 30장 14절 또는 19절에 나오는 평화로운 공동체의 삶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생은 절대로 파편적인 개인들에게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 아니다, 영생은 뉴 에이지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신과 개인의 접속을 통해서 오는 신비한 삶이 아니라 영생은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다, 그런 맥락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신명기 30장과 시편 133편에 나온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런 철두철미한 구약적 맥락에서 영생을 이해해야만 한다, 신비주의 종교의 언어로 취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이걸 해석해야 한다, 그걸 많이 강조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런 모든 언어는 당대적 동시대적 시사적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경합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심을 사로잡고 한 데 모아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경합한 그룹이 있었다, 그 그룹의 명제들과 비교해볼 때 예수님 말씀이 이스라엘 민족을 공동체적으로 오래 존속하게 만드는 영생의 길이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생을 준다는 말은 남묘호랑교적인 어떤 신비로운,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주에서 무슨 레이저광선이 우리를 모두 비춰서 우리가 불로장생하게 만들어주는 영생으로 진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경합하던 그 당시의 바리새인 에세네파 사두개파 헤롯당파 열심당파 등, 이스라엘 민심을 한 데 모아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이런 모습이 될 것입니다, 라고 했던 사람들의 길과 반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재조정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 격랑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요한복음이 제대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과 경합하던 세력들은 무엇이 있었죠? 극단적인 현실부정학파, 열심당파입니다. 열심당파는 AD 6년에 갈릴리에서 나왔던 유다라는 무장항쟁의 시초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유다 출신이 조직한 반로마제국 항쟁파로써 이들은 신정국가를 세워야만 이스라엘의 신앙이 가능하고 영생이 가능하다고 믿는 열심당파입니다. 열심당파가 금과옥조로 삼는 성경은 마카베오 상하입니다. 160년 전에 자기들의 조상이 세계최강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마게도냐 제국의 후신이었던 셀루키드 왕조를 무력으로 몰아낸 것처럼 우리가 무력투쟁하면 로마제국이 물러갈 수 있다, 로마 6군단 10군단을 물리칠 수 있다, 이렇게 믿었던 사람이 열심당원입니다. 열심당원의 조상은 AD6년에 나타났던 갈릴리 유다, 사도행전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을 갈릴리 유다와 같은 패거리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극단적인 현실영합학파, 헤롯당파입니다. 헤롯당파는 현실적인 것이 신적인 것이야, 지금 로마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잖아, 이건 신적인 의지의 발현이야, 극단적인 헤겔철학입니다. 현실수용학파입니다. 현실수용학파의 특징은 지금 권력을 잡고 세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 뜻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이건 일종의 잘못된 하나님 섭리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어버리고 순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에서 잘못된 걸 보고 이걸 부르짖어서 극복하길 원하는 현실도 굉장히 많이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잘못된 섭리론자들은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야, 지금은 힘이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게 제일 좋아, 이런 학파가 헤롯분봉학파입니다. 헤롯분봉학파는 헤롯왕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지배용역업자로써 팔레스타인을 지배합니다.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간부들이 헤롯당파입니다. 이 헤롯당파가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4구역으로 나눠서 로마제국에게 십분의 일 속주세를 내주고 나라를 유지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친로마세력은 사두개파라고 합니다. 이런 중간에 배제학파, 이스라엘의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을 쓰레기취급하면서 선민의식을 가지고 우리만 하나님과 앞으로 미래를 개척할 것이라고 믿는 바리새파, 여기서 더 진화해서 동굴로 나가서 에세네 같은 시골의 굴에 가서 하루에 세 번씩 몸을 씻으려고 하는 극단적인 정결학파, 몸을 하루에 세 번씩 씻어 정결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에세네파입니다. 바리새파가 더 진화하면 에세네파가 됩니다. 에세네파의 특징은 악수하고 나서 바로 손 씻는 사람들, 예수님은 어떤 학파인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일단 식사를 하실 때 손을 씻지 않고 드셔서 몰래카메라에 찍히고, 예수님은 친 로마세력으로 알려진 사람 집에 가서 식사도 하시고, 열심당원 제자도 두 명씩 두시고, 예수님은 이 모든 구도를 흩뜨려놓고 혼란에 빠뜨린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다섯 개 학파가 경합하는 것은 이스라엘 미래의 영생의 길이 아니라고 믿고, 예수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 이사야 61장 1-4절, 누가복음 4장 16-20절, 이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뜻은 예수님을 철두철미하게 소화한다, 예수님 말을 듣고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 이것은 첫째 예수님을 모방하고 예수님 말을 듣고 힘이 난다, 둘째 예수님이 하라는 명령을 듣고 힘이 난다, 즉 예수님과 완벽한 계약적 결속상태에 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완벽한 계약적 결속상태에 갔을 때,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일종의 식인종적 언어는 철두철미한 계약적 결속상태, 또는 모방과 추종,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20절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식탁교제, 예수님이 주장했던 식탁교제의 분위기였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이 당시에 이 경합하는 5개 그룹과 얼마나 달랐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 11장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억울하게 모든 삶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신원하기 위해 나를 보냈다,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채무노예들의 석방운동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한편 동아리가 되면 자기에게 채무자가 된 자들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다음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동아리가 되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가 되면 땅이 없는 사람의 땅을 오랫동안 가로채고 있던 탐욕적인 지주가 선한 지주가 됩니다. 예수님과 먹고 마시며 계약적 결속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자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종과 자유자, 즉 노예와 주인의 경직된 위계질서를 자유롭게 풀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회적 평탄작업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제도를 동시에 고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노예제도 남녀차별 이방인과 유대인의 극단적 경계선상에 있는 악한 분리의 장벽을 다 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도 품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와 갈릴리에 있었던 오래된 적대감을 단숨에 넘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회를 경직되게 갈라놓았던 모든 적대적인 방벽들이 무너져서 해방을 경험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사회변혁적인 동력을 엄청 냈겠죠. 사마리아 사람을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고, 사마리아 사람의 미담을 널리 전파하는 것, 요즘 종북세력보다 더 심한 겁니다. 제가 김일성 주석에 대해서 높이 찬양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제가 김일성 주석과 공산주의 혁명가를 높이 정상적으로 말하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님이 들었던 것처럼, 요한복음 8장 38절에 사마리아 사람=귀신 들린 사람, 귀신들렸다는 말은 자기 영이 귀신에게 접수될 때 귀신들린 거거든요. 정상적인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을 할 때 귀신 들린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저렇게 착하게 말하니까 귀신 들린 사람 또는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예수님과 계약적으로 한 통속이 되고 한 동아리가 되면 예수님 말 때문에 신뢰하고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는, 예수님 인격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그 시대의 경직된 편견과 간섭의 질서를 재구성하고 재조정하고 재창조하는 동력을 발휘했다는 거죠. 그런 뜻으로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 말합니다. 그런데 이 논쟁은 예수님이 만든 떡을 먹고 마시는 사람과 예수님 자신을 먹고 마시는 사람의 구별에서 촉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준 떡을 먹고 배불렀다, 내가 다시 도전한다,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까닭은 내가 한 가지 진실을 너희에게 선포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여 여러분을 격앙시키고 흥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또 그런 떡을 만들어주길 기대하면서 나를 추종하는데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나 자신을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렇지만 잘 들어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어떤 예언자도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한 사람이 없거든요. 어떤 예언자도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말했지,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내 본적지가 하나님 나라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 독특한 의식은 예수님 당시에도 독특했고 세계종교사상에서도 유일하게 독특하고, 구약전체에서 엘리야 모세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다 합해도 나 하늘에서 왔다 이렇게 말하지 못해요. 예수님만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이 거침없는 말은 진짜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둘 중에 하나밖에 안 돼요. 예수님 저지른 행위가 정신 나간 분의 행위가 아니에요. 이건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힘든 진실이에요.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다니엘서 7장 13절밖에 없어요. 왜? 어떤 예언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본문에 가장 근접한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밖에 없어요. '인자 같은 이가' 크 바아르 에노시, 크는 lke란 뜻이고, 바아르, 아들이란 뜻이고, 에노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like a son of man입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지상성도를 규합해서 짐승나라와 싸워서 큰 나라를 이루는데 그 나라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나라가 된다, 이게 다니엘서 7장 13-15절 이야기거든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다니엘서 7장 13절밖에 없는데, 이때 인자라는 말이 나오죠. 인자는 신약성경에서 85번 나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인자라는 말을 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구약전체에서 랍비나 쿰란공동체의 지도자나 바리새지도자나 누구나 인자란 말, 다니엘서 7장 13절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이 다니엘서 2장 7장을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의식했는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건 철두철미하게 다니엘서적 주장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짐승의 네 나라가 지나갑니다. 짐승의 네 나라가 지나가고, 때가 차매 짐승의 네 나라를 깨어 부수는 산돌의 나라 인자의 나라가 온다, 그런 나라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철두철미하게 다니엘 2장 35-45절에 나오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언어의 큰 틀을 들여다보면 다니엘서 2장과 7장 사이의 언어를 막 쓰셨어요.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쓴 것은 <다니엘서> 제가 쓴 강해서예요. 그런데 그 책에 대해서 장신대 배정훈 교수가 서평을 했는데, 지나치게 다니엘서와 예수님을 연결을 많이 시킨다, 라는 비평을 했습니다. 어제 김세윤 박사님이 그걸 읽고 자기는 전적으로 다니엘서 2장과 7장에 대해서 예수님의 행적을 발견하려고 했던 내 책을 읽고 자기는 자기랑 입장이 똑같은 걸 알았다고, 서포터를 받았다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는 이야기를 한참 나눴습니다. 제가 요한복음 6장을 펴놓고 심학산에 올라가서 뜻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너무 이 본문은 오지 않아요. 계속 요한복음 6장 60절만 떠올라요. '이 말씀은 어렵도다' 심학산에 올라가면 보통 감동을 받는데 아무 감동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런데 아침에 또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확실하게 깨달음,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다시 아침에 정리가 됐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며칠 동안 이해가 되지 못한 것이 정리가 됐는데, 예수님이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은 자기의 신적기원을 강조하려는 본문, 단순한 그런 의미를 넘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철두철미하게 투신돼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에요. 그 말은 어떤 레토릭이냐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집행하는데 투신돼 있다, 그걸 강조하는 말이고 어떤 자기의 특권을 구사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모든 예언자들의 피파송의식, 나는 파송 받았다, 모세가 파라오한테 갔을 때 파송 받았죠? 모세가 파라오한테 내 백성 보내라할 때 하나님이 엄청나게 격려를 했죠. 하나님이 강력하게 파송해야만 가지, 어떻게 왕한테 가서 내 백성 보내란 말을 합니까? 못합니다. 모세부터 세례요한까지 모든 예언자들의 파송 당했다는 강한 파송의식을 합해도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는 이 대담무쌍한 피파송의식을 감당하지 못해요. 예수님이 더 크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보좌에서 파송된 인자의식을 가졌다는 말이에요. 제가 언젠가 그랬어요. 인자라는 말은 철두철미한 피파송의식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종을 의미한다, 인자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파송 당했다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예언자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쓸 때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뜻을 보탰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하나님 뜻을 성취하려고 하는 피파송의식을 가진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철두철미한 인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은 자기의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 이단교주와는 다릅니다. 이단교주 종교권력자들 사이비는 하나님과 자기의 친인척관계 또는 일촌관계를 강조함으로 특권을 강조하고,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복종을 유발할 때 그런 말을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다그치기 위하여, 자기의 순종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자기의 순종과 복종을 철두철미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자기의 피파송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사무치는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해서 자기가 더 영광을 받고, 자기가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은 정말 믿어야 합니다. 36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절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군거릴만 하죠. 그러나 예수님이 하는 말이 사무치는 진실입니다. 42절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거 보세요. 자기 부모가 우리가 아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제가 만일 그 당시 살았다면 이렇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뜻을 설명해드릴게요. 다니엘서 2장과 7장이 있는데 이 뜻은 피파송의식이 가득 찬 예언자의 레토릭입니다. 모세부터 세례요한까지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께 파송받았다는 의식을 다 합해도 예수님 만큼은 안 됩니다. 이건 극단적인 순종을 담보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저는 말씀드릴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예수님이 우리가 수군거리는 걸 싫어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수군수군합니다. 수군거리지 말고 직접 예수님께 아젠다를 가져가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이사야 54장입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건 이미 성경을 읽고 장로유전에 따라 성경해석을 하지 않고 아버지가 직접 가르쳐주신 대로 성경을 직접 제대로 읽은 사람은 내 마을 이해한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파악한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하고 내게로 오게 돼 있다, 이런 말입니다. 46절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여기서 신비가 있습니다. 여기는 교묘한 배제의 논리가 있습니다. 교묘한 배제의 논리는 성경에서 이중예정이라고 말합니다. 이중예정은 구원받은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그런데도 진실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즉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 방식대로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내 모습속에서 아버지를 본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성경을 읽고 깨달은 사람은 내 모습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무한책임적인 사랑의 화신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47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이때 이 말 자체를 절대로 파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생은 이웃과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영생을 누린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나 혼자 영생을 못 누립니다. 영생자체가 시편 133편 아닙니까?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면 위로부터 초월적인 은혜가 위로부터 임하여 영원히 eternal life, 영원히 존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여러분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무엇입니까? 김세윤 박사가 어제 논문을 하나 주더라고요. 그 논문이 이미다찌오 크리스티, 바울은 어떻게 예수를 닮는가?> 라는 논문인데, 예수를 먹는다는 말은 성만찬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에서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제가 아침에 깨달은 것은 이겁니다. 이걸 성만찬 본문과 제가 자세히 연결시킨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7-22절까지는 성만찬하는 고린도교인들의 야만스러운 모습이 나옵니다. 먼저 부자는 성만찬할 때 서로 파들끼리 앉습니다. 여기는 A파, 저기는 B파, 벧엘파, 게바파, 성만찬할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을 먹고 하나되기 위하여 영생의 교제를 누려야 할 성만찬 자리가 파당으로 분열돼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서 하나의 몸이 되어야 할 교우들이 부자들은 먼저 와서 발렌타인 30년산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막걸리 가져와서 먹고, 주님의 몸 공동체가 하나가 아니라 파괴적인 분열을 의미하는 게 됐습니다. 그때 나온 말이 고린도전서 11장입니다. 이게 바로 본회퍼의 하빌리타치온 주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 고므니띠오 산띠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본회퍼가 쓴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입증하는 것이 본회퍼의 박사학위 후 논문입니다. 그걸 독일말로 하빌리타치온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one peaceful body, 하나의 평화로운 몸을 이루어라, 한 공동체를 이루어라, 에베소서 4장 4-5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oneness unity peaceful fellowship, 하나의 평화로운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서 주님이 자기 몸을 내어 놓은 것이 성만찬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성만찬 용어입니다. 영생으로 가겠다는 말, 우리가 주님의 몸을 먹고 마시는 성만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게 교회다니는 것입니다. 교회다니는 것은 사회사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파당있는 사람들이 분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주권국가 행정국가 인종국가로 나누어져 있는 나라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초대교회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서 영생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아가야 지방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서 그들의 가난의 짐을 졌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되면 지금 민족국가 주권국가 연방국가 합중국으로 나누어져 있는 모든 자체 무장능력을 가진 모든 국가들은 비무장세력으로 다 격하되게 돼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식탁은 빈부차별이 영원히 없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처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파당으로 나누어진 세력들이 주님의 성찬 식탁에서 주님의 살을 먹고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즉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살과 모든 존재, 내 생명을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주기 위해서 내려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살 소망을 주는 나를 소진하고 나를 낭비하여 다른 사람에게 음식이 되는 용도로 나는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먹고 마시는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의 피가 될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순간마다 여러분도 나처럼 내 인생 전체를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주려고 하는 거룩한 열정, 자기 소진의 열정, 자기희생의 열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즉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마다 반 드라큘라 운동이 벌어질 것이다, 자기 살과 피를 남에게 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론적으로 잘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자기 살과 피를 누구한테 주는 사람이 돼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밥을 먹는 사람마다 세계평화, 세계영생을 풍성하게 증가시키겠죠? 그게 교회란 말이에요. 이런 교회가 온 세상에 퍼지면 우리가 기도했던 모든 사태가 해결되겠죠? MB 같은 분도 안 나오시는 거죠. MB 같은 분이 나올 수가 없죠. 이런 교회가 만일 우리 한국교회의 main stream 이라면, 그렇죠? 우리 같은 교회는 MB 같은 분이 안 나오잖아요. 우리는 좋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도 안 나오고 우리는 아무도 청문회 나갈만큼 높은 자리에 못 가니까 영원한 평행선이네요. 순수한 사람은 청문회 나갈 찬스가 없고, 모든 청문회 나가는 사람은 더러워진 사람만 나가니까 참 문제가 많습니다. 역설이에요. 결론 맺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전적으로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 식탁에 올려진 음식으로 주려고 하는 자기 소모 열정, 자기 낭비 열정, 자기 희생의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신을 알고 예수님을 모방하고 예수님과 계약적 결속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신도 그렇게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살과 피로 제공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식탁에 동참하는 사람마다 이 땅의 가난의 문제 빈부의 문제 차별의 문제 파당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소시키고 해결하는 영생의 떡을 만드는 운동이 된다, 즉 예수님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순간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이 돼버리니까 영생의 공동체가 됩니다. 즉 이웃끼리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평화를 누리는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교회가 전 세계에 퍼지는 것을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한다, 그럼 우리 목숨이 영생의 공동체가 됩니까? 일단 자녀를 낳고 키우면 자기 자녀에게 엄마 아버지는 양식이 됩니다. 엄마 아버지는 자기 자녀의 양식입니다. 잘 보세요. 일단 자녀가 일정하게 클 때까지는 엄마 아버지는 온통 모든 생명을 자녀를 위해 쓰니까 자녀는 엄마 아버지를 먹고 크는 겁니다. 우리가 훌륭한 분의 인생을 먹고 유지됩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생을 보고 우리는 힘을 얻습니다. 그분을 먹고 마시는 겁니다. 그 위대한 삶을 모방하고 우리가 힘을 얻기 때문에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겁니다. 결국 인류는 성만찬적인 자기 희생의 축제를 주도한 사람들이 인류를 끌어왔다, 인류는 MB 같은 사람, 최시중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끌어온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살과 피로 바친, 예수님 닮은 사람들의 성만찬 축제의 주도자들이 인류역사를 지금까지 끌어왔다, 그렇게 봐야만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다, 죄인 중심으로 역사를 보면 안 된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많이 깨달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며칠동안 엄청 감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이 말씀은 어렵도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우리 또한 우리 살과 피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줄 수 있는 결단에 이르게 하셔서 주님 이 세상이 성만찬적인 일치와 연합의 현장이 되게 하여주소서.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들의 의해 대표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떡, 내 살을 먹으라)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6장 60절 '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이 말은 이 말을 처음들은 제자들에게도 매우 힘든 말이었다, 난해한 말씀이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요한복음을 계속 하면서 서너 가지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전제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은 구약성경의 신학적 전통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의 영생은 일반 종교적인 술어가 아니라 시편 133편, 신명기 30장 14절 또는 19절에 나오는 평화로운 공동체의 삶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생은 절대로 파편적인 개인들에게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 아니다, 영생은 뉴 에이지 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신과 개인의 접속을 통해서 오는 신비한 삶이 아니라 영생은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다, 그런 맥락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신명기 30장과 시편 133편에 나온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런 철두철미한 구약적 맥락에서 영생을 이해해야만 한다, 신비주의 종교의 언어로 취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 용어로 이걸 해석해야 한다, 그걸 많이 강조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런 모든 언어는 당대적 동시대적 시사적 의미가 있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경합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이스라엘 민심을 사로잡고 한 데 모아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서 경합한 그룹이 있었다, 그 그룹의 명제들과 비교해볼 때 예수님 말씀이 이스라엘 민족을 공동체적으로 오래 존속하게 만드는 영생의 길이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생을 준다는 말은 남묘호랑교적인 어떤 신비로운, 예수님을 믿었을 때 우주에서 무슨 레이저광선이 우리를 모두 비춰서 우리가 불로장생하게 만들어주는 영생으로 진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경합하던 그 당시의 바리새인 에세네파 사두개파 헤롯당파 열심당파 등, 이스라엘 민심을 한 데 모아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이런 모습이 될 것입니다, 라고 했던 사람들의 길과 반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동체를 재구성하고 재조정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적 격랑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야 요한복음이 제대로 이해됩니다. 예수님과 경합하던 세력들은 무엇이 있었죠? 극단적인 현실부정학파, 열심당파입니다. 열심당파는 AD 6년에 갈릴리에서 나왔던 유다라는 무장항쟁의 시초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갈릴리 유다 출신이 조직한 반로마제국 항쟁파로써 이들은 신정국가를 세워야만 이스라엘의 신앙이 가능하고 영생이 가능하다고 믿는 열심당파입니다. 열심당파가 금과옥조로 삼는 성경은 마카베오 상하입니다. 160년 전에 자기들의 조상이 세계최강이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마게도냐 제국의 후신이었던 셀루키드 왕조를 무력으로 몰아낸 것처럼 우리가 무력투쟁하면 로마제국이 물러갈 수 있다, 로마 6군단 10군단을 물리칠 수 있다, 이렇게 믿었던 사람이 열심당원입니다. 열심당원의 조상은 AD6년에 나타났던 갈릴리 유다, 사도행전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을 갈릴리 유다와 같은 패거리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극단적인 현실영합학파, 헤롯당파입니다. 헤롯당파는 현실적인 것이 신적인 것이야, 지금 로마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잖아, 이건 신적인 의지의 발현이야, 극단적인 헤겔철학입니다. 현실수용학파입니다. 현실수용학파의 특징은 지금 권력을 잡고 세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 뜻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이건 일종의 잘못된 하나님 섭리론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어버리고 순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에서 잘못된 걸 보고 이걸 부르짖어서 극복하길 원하는 현실도 굉장히 많이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잘못된 섭리론자들은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야, 지금은 힘이 있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게 제일 좋아, 이런 학파가 헤롯분봉학파입니다. 헤롯분봉학파는 헤롯왕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정치적 지배용역업자로써 팔레스타인을 지배합니다.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간부들이 헤롯당파입니다. 이 헤롯당파가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4구역으로 나눠서 로마제국에게 십분의 일 속주세를 내주고 나라를 유지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친로마세력은 사두개파라고 합니다. 이런 중간에 배제학파, 이스라엘의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을 쓰레기취급하면서 선민의식을 가지고 우리만 하나님과 앞으로 미래를 개척할 것이라고 믿는 바리새파, 여기서 더 진화해서 동굴로 나가서 에세네 같은 시골의 굴에 가서 하루에 세 번씩 몸을 씻으려고 하는 극단적인 정결학파, 몸을 하루에 세 번씩 씻어 정결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에세네파입니다. 바리새파가 더 진화하면 에세네파가 됩니다. 에세네파의 특징은 악수하고 나서 바로 손 씻는 사람들, 예수님은 어떤 학파인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일단 식사를 하실 때 손을 씻지 않고 드셔서 몰래카메라에 찍히고, 예수님은 친 로마세력으로 알려진 사람 집에 가서 식사도 하시고, 열심당원 제자도 두 명씩 두시고, 예수님은 이 모든 구도를 흩뜨려놓고 혼란에 빠뜨린 분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다섯 개 학파가 경합하는 것은 이스라엘 미래의 영생의 길이 아니라고 믿고, 예수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 이사야 61장 1-4절, 누가복음 4장 16-20절, 이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뜻은 예수님을 철두철미하게 소화한다, 예수님 말을 듣고 힘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 이것은 첫째 예수님을 모방하고 예수님 말을 듣고 힘이 난다, 둘째 예수님이 하라는 명령을 듣고 힘이 난다, 즉 예수님과 완벽한 계약적 결속상태에 간 것입니다. 예수님과 완벽한 계약적 결속상태에 갔을 때,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일종의 식인종적 언어는 철두철미한 계약적 결속상태, 또는 모방과 추종,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누가복음 4장 18-20절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식탁교제, 예수님이 주장했던 식탁교제의 분위기였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이 당시에 이 경합하는 5개 그룹과 얼마나 달랐는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마태복음 11장 5절,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억울하게 모든 삶의 짐을 지고 가는 사람들을 신원하기 위해 나를 보냈다,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채무노예들의 석방운동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한편 동아리가 되면 자기에게 채무자가 된 자들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다음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동아리가 되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자가 되면 땅이 없는 사람의 땅을 오랫동안 가로채고 있던 탐욕적인 지주가 선한 지주가 됩니다. 예수님과 먹고 마시며 계약적 결속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자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종과 자유자, 즉 노예와 주인의 경직된 위계질서를 자유롭게 풀어줘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회적 평탄작업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제도를 동시에 고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노예제도 남녀차별 이방인과 유대인의 극단적 경계선상에 있는 악한 분리의 장벽을 다 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여인도 품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와 갈릴리에 있었던 오래된 적대감을 단숨에 넘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회를 경직되게 갈라놓았던 모든 적대적인 방벽들이 무너져서 해방을 경험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사회변혁적인 동력을 엄청 냈겠죠. 사마리아 사람을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고, 사마리아 사람의 미담을 널리 전파하는 것, 요즘 종북세력보다 더 심한 겁니다. 제가 김일성 주석에 대해서 높이 찬양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제가 김일성 주석과 공산주의 혁명가를 높이 정상적으로 말하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님이 들었던 것처럼, 요한복음 8장 38절에 사마리아 사람=귀신 들린 사람, 귀신들렸다는 말은 자기 영이 귀신에게 접수될 때 귀신들린 거거든요. 정상적인 사람은 할 수 없는 말을 할 때 귀신 들린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을 저렇게 착하게 말하니까 귀신 들린 사람 또는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예수님이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과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예수님과 계약적으로 한 통속이 되고 한 동아리가 되면 예수님 말 때문에 신뢰하고 예수님 때문에 힘을 얻는, 예수님 인격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고 그 시대의 경직된 편견과 간섭의 질서를 재구성하고 재조정하고 재창조하는 동력을 발휘했다는 거죠. 그런 뜻으로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 말합니다. 그런데 이 논쟁은 예수님이 만든 떡을 먹고 마시는 사람과 예수님 자신을 먹고 마시는 사람의 구별에서 촉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준 떡을 먹고 배불렀다, 내가 다시 도전한다,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까닭은 내가 한 가지 진실을 너희에게 선포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여 여러분을 격앙시키고 흥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또 그런 떡을 만들어주길 기대하면서 나를 추종하는데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나 자신을 먹고 마시라는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렇지만 잘 들어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말은 무엇일까? 어떤 예언자도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한 사람이 없거든요. 어떤 예언자도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셨다고 말했지,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내 본적지가 하나님 나라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 독특한 의식은 예수님 당시에도 독특했고 세계종교사상에서도 유일하게 독특하고, 구약전체에서 엘리야 모세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다 합해도 나 하늘에서 왔다 이렇게 말하지 못해요. 예수님만이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다, 이 거침없는 말은 진짜 정신이 나간 사람이거나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둘 중에 하나밖에 안 돼요. 예수님 저지른 행위가 정신 나간 분의 행위가 아니에요. 이건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힘든 진실이에요.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다니엘서 7장 13절밖에 없어요. 왜? 어떤 예언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본문에 가장 근접한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밖에 없어요. '인자 같은 이가' 크 바아르 에노시, 크는 lke란 뜻이고, 바아르, 아들이란 뜻이고, 에노시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like a son of man입니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지상성도를 규합해서 짐승나라와 싸워서 큰 나라를 이루는데 그 나라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나라가 된다, 이게 다니엘서 7장 13-15절 이야기거든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다니엘서 7장 13절밖에 없는데, 이때 인자라는 말이 나오죠. 인자는 신약성경에서 85번 나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인자라는 말을 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구약전체에서 랍비나 쿰란공동체의 지도자나 바리새지도자나 누구나 인자란 말, 다니엘서 7장 13절을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이 다니엘서 2장 7장을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의식했는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건 철두철미하게 다니엘서적 주장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 보면 짐승의 네 나라가 지나갑니다. 짐승의 네 나라가 지나가고, 때가 차매 짐승의 네 나라를 깨어 부수는 산돌의 나라 인자의 나라가 온다, 그런 나라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철두철미하게 다니엘 2장 35-45절에 나오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언어의 큰 틀을 들여다보면 다니엘서 2장과 7장 사이의 언어를 막 쓰셨어요.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쓴 것은 <다니엘서> 제가 쓴 강해서예요. 그런데 그 책에 대해서 장신대 배정훈 교수가 서평을 했는데, 지나치게 다니엘서와 예수님을 연결을 많이 시킨다, 라는 비평을 했습니다. 어제 김세윤 박사님이 그걸 읽고 자기는 전적으로 다니엘서 2장과 7장에 대해서 예수님의 행적을 발견하려고 했던 내 책을 읽고 자기는 자기랑 입장이 똑같은 걸 알았다고, 서포터를 받았다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는 이야기를 한참 나눴습니다. 제가 요한복음 6장을 펴놓고 심학산에 올라가서 뜻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너무 이 본문은 오지 않아요. 계속 요한복음 6장 60절만 떠올라요. '이 말씀은 어렵도다' 심학산에 올라가면 보통 감동을 받는데 아무 감동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런데 아침에 또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확실하게 깨달음,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은 다시 아침에 정리가 됐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한 번 깨달았어요. 며칠 동안 이해가 되지 못한 것이 정리가 됐는데, 예수님이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은 자기의 신적기원을 강조하려는 본문, 단순한 그런 의미를 넘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철두철미하게 투신돼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에요. 그 말은 어떤 레토릭이냐면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집행하는데 투신돼 있다, 그걸 강조하는 말이고 어떤 자기의 특권을 구사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났던 모든 예언자들의 피파송의식, 나는 파송 받았다, 모세가 파라오한테 갔을 때 파송 받았죠? 모세가 파라오한테 내 백성 보내라할 때 하나님이 엄청나게 격려를 했죠. 하나님이 강력하게 파송해야만 가지, 어떻게 왕한테 가서 내 백성 보내란 말을 합니까? 못합니다. 모세부터 세례요한까지 모든 예언자들의 파송 당했다는 강한 파송의식을 합해도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는 이 대담무쌍한 피파송의식을 감당하지 못해요. 예수님이 더 크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보좌에서 파송된 인자의식을 가졌다는 말이에요. 제가 언젠가 그랬어요. 인자라는 말은 철두철미한 피파송의식으로 가득 찬 하나님의 종을 의미한다, 인자는 철두철미하게 하나님께 파송 당했다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예언자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쓸 때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뜻을 보탰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면서 하나님 뜻을 성취하려고 하는 피파송의식을 가진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철두철미한 인자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은 자기의 순종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 이단교주와는 다릅니다. 이단교주 종교권력자들 사이비는 하나님과 자기의 친인척관계 또는 일촌관계를 강조함으로 특권을 강조하고,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복종을 유발할 때 그런 말을 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를 다그치기 위하여, 자기의 순종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자기의 순종과 복종을 철두철미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자기의 피파송의식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사무치는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해서 자기가 더 영광을 받고, 자기가 특권을 누리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말은 정말 믿어야 합니다. 36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절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수군거릴만 하죠. 그러나 예수님이 하는 말이 사무치는 진실입니다. 42절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이거 보세요. 자기 부모가 우리가 아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제가 만일 그 당시 살았다면 이렇게 설명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뜻을 설명해드릴게요. 다니엘서 2장과 7장이 있는데 이 뜻은 피파송의식이 가득 찬 예언자의 레토릭입니다. 모세부터 세례요한까지 모든 예언자들이 하나님께 파송받았다는 의식을 다 합해도 예수님 만큼은 안 됩니다. 이건 극단적인 순종을 담보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저는 말씀드릴 겁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예수님이 우리가 수군거리는 걸 싫어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수군수군합니다. 수군거리지 말고 직접 예수님께 아젠다를 가져가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이사야 54장입니다.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이건 이미 성경을 읽고 장로유전에 따라 성경해석을 하지 않고 아버지가 직접 가르쳐주신 대로 성경을 직접 제대로 읽은 사람은 내 마을 이해한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파악한 사람은 내 말을 이해하고 내게로 오게 돼 있다, 이런 말입니다. 46절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여기서 신비가 있습니다. 여기는 교묘한 배제의 논리가 있습니다. 교묘한 배제의 논리는 성경에서 이중예정이라고 말합니다. 이중예정은 구원받은 사람이 있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논리입니다. 그런데도 진실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즉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 방식대로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내 모습속에서 아버지를 본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하여 성경을 읽고 깨달은 사람은 내 모습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았다,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무한책임적인 사랑의 화신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47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이때 이 말 자체를 절대로 파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생은 이웃과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 영생을 누린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나 혼자 영생을 못 누립니다. 영생자체가 시편 133편 아닙니까?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면 위로부터 초월적인 은혜가 위로부터 임하여 영원히 eternal life, 영원히 존속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여러분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무엇입니까? 김세윤 박사가 어제 논문을 하나 주더라고요. 그 논문이 이미다찌오 크리스티, 바울은 어떻게 예수를 닮는가?> 라는 논문인데, 예수를 먹는다는 말은 성만찬의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에서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제가 아침에 깨달은 것은 이겁니다. 이걸 성만찬 본문과 제가 자세히 연결시킨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7-22절까지는 성만찬하는 고린도교인들의 야만스러운 모습이 나옵니다. 먼저 부자는 성만찬할 때 서로 파들끼리 앉습니다. 여기는 A파, 저기는 B파, 벧엘파, 게바파, 성만찬할 때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을 먹고 하나되기 위하여 영생의 교제를 누려야 할 성만찬 자리가 파당으로 분열돼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면서 하나의 몸이 되어야 할 교우들이 부자들은 먼저 와서 발렌타인 30년산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막걸리 가져와서 먹고, 주님의 몸 공동체가 하나가 아니라 파괴적인 분열을 의미하는 게 됐습니다. 그때 나온 말이 고린도전서 11장입니다. 이게 바로 본회퍼의 하빌리타치온 주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 고므니띠오 산띠오,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본회퍼가 쓴 <교회론>입니다. 교회가 사회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입증하는 것이 본회퍼의 박사학위 후 논문입니다. 그걸 독일말로 하빌리타치온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one peaceful body, 하나의 평화로운 몸을 이루어라, 한 공동체를 이루어라, 에베소서 4장 4-5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oneness unity peaceful fellowship, 하나의 평화로운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해서 주님이 자기 몸을 내어 놓은 것이 성만찬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성만찬 용어입니다. 영생으로 가겠다는 말, 우리가 주님의 몸을 먹고 마시는 성만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게 교회다니는 것입니다. 교회다니는 것은 사회사적으로 말하면 주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같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파당있는 사람들이 분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주권국가 행정국가 인종국가로 나누어져 있는 나라들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초대교회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해서 영생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아가야 지방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돈을 보내서 그들의 가난의 짐을 졌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세상의 왕이 되면 지금 민족국가 주권국가 연방국가 합중국으로 나누어져 있는 모든 자체 무장능력을 가진 모든 국가들은 비무장세력으로 다 격하되게 돼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식탁은 빈부차별이 영원히 없어집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처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파당으로 나누어진 세력들이 주님의 성찬 식탁에서 주님의 살을 먹고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즉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 살과 모든 존재, 내 생명을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주기 위해서 내려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살 소망을 주는 나를 소진하고 나를 낭비하여 다른 사람에게 음식이 되는 용도로 나는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먹고 마시는 사람마다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되려고 하는 사람의 피가 될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순간마다 여러분도 나처럼 내 인생 전체를 다른 사람의 음식으로 주려고 하는 거룩한 열정, 자기 소진의 열정, 자기희생의 열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즉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사람마다 반 드라큘라 운동이 벌어질 것이다, 자기 살과 피를 남에게 주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론적으로 잘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면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자기 살과 피를 누구한테 주는 사람이 돼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밥을 먹는 사람마다 세계평화, 세계영생을 풍성하게 증가시키겠죠? 그게 교회란 말이에요. 이런 교회가 온 세상에 퍼지면 우리가 기도했던 모든 사태가 해결되겠죠? MB 같은 분도 안 나오시는 거죠. MB 같은 분이 나올 수가 없죠. 이런 교회가 만일 우리 한국교회의 main stream 이라면, 그렇죠? 우리 같은 교회는 MB 같은 분이 안 나오잖아요. 우리는 좋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아무도 안 나오고 우리는 아무도 청문회 나갈만큼 높은 자리에 못 가니까 영원한 평행선이네요. 순수한 사람은 청문회 나갈 찬스가 없고, 모든 청문회 나가는 사람은 더러워진 사람만 나가니까 참 문제가 많습니다. 역설이에요. 결론 맺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전적으로 자기 목숨을 다른 사람 식탁에 올려진 음식으로 주려고 하는 자기 소모 열정, 자기 낭비 열정, 자기 희생의 열정으로 가득 찬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신을 알고 예수님을 모방하고 예수님과 계약적 결속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신도 그렇게 예수님처럼 자기 목숨을 살과 피로 제공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식탁에 동참하는 사람마다 이 땅의 가난의 문제 빈부의 문제 차별의 문제 파당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소시키고 해결하는 영생의 떡을 만드는 운동이 된다, 즉 예수님의 식탁에서 밥을 먹는 순간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과 피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이 돼버리니까 영생의 공동체가 됩니다. 즉 이웃끼리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가 있는 평화를 누리는 공동체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교회가 전 세계에 퍼지는 것을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한다, 그럼 우리 목숨이 영생의 공동체가 됩니까? 일단 자녀를 낳고 키우면 자기 자녀에게 엄마 아버지는 양식이 됩니다. 엄마 아버지는 자기 자녀의 양식입니다. 잘 보세요. 일단 자녀가 일정하게 클 때까지는 엄마 아버지는 온통 모든 생명을 자녀를 위해 쓰니까 자녀는 엄마 아버지를 먹고 크는 겁니다. 우리가 훌륭한 분의 인생을 먹고 유지됩니다. 우리는 위대한 인생을 보고 우리는 힘을 얻습니다. 그분을 먹고 마시는 겁니다. 그 위대한 삶을 모방하고 우리가 힘을 얻기 때문에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겁니다. 결국 인류는 성만찬적인 자기 희생의 축제를 주도한 사람들이 인류를 끌어왔다, 인류는 MB 같은 사람, 최시중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끌어온 게 아니라 자기 목숨을 살과 피로 바친, 예수님 닮은 사람들의 성만찬 축제의 주도자들이 인류역사를 지금까지 끌어왔다, 그렇게 봐야만 역사를 바로 보는 것이다, 죄인 중심으로 역사를 보면 안 된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많이 깨달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며칠동안 엄청 감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까지 '이 말씀은 어렵도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우리 또한 우리 살과 피를 다른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줄 수 있는 결단에 이르게 하셔서 주님 이 세상이 성만찬적인 일치와 연합의 현장이 되게 하여주소서.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사람들의 의해 대표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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