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나는 생명의 떡이니-요한복음 6 :35-40

by 【고동엽】 2022. 2. 13.

주일2부 예배 - 요한복음 6 :35-40 (나는 생명의 떡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은 굉장히 함축적인 언어로 돼 있고 비유적인 언어로 돼 있기 때문에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이번 주에도 거룩한 식인종언어, 거룩한 인육을 먹는 이야기가 전면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도발적인 말씀은 제자들에게도 격한 감정을 일으켰는데, 요한복음 6 60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라는 반응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최초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을 볼 때 우리가 이 본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자신을 먹고 마시는 음식이라고 말한 사실을 해명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요한복음의 생명과 영생은 첫째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고, 둘째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양식을 먹는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섭취한다 소화한다 양육한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내가 만든 표적의 떡을 먹고 배 부르는 것 말고 나 자신을 먹고 배불러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 자신을 먹고 마셔야만 참 제자다, 내가 만든 표적의 떡을 먹고 배가 부르는 것은 참 제자가 아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표현 중 하나가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은 동물적인 양식을 섭취할 때 쓰는 동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때 쓰는 동사는 동물적인 양식섭취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굉장히 하등적인 양식을 먹고 배만 부른 상태라는 뜻입니다. 진짜 원기를 북돋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집요하게 찾아서 왕 삼으려고 하는 까닭은 여러분의 항상 채워줘야만 하는 굶주린 배를 채워줬기 때문이다, 내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까닭은 너희가 나를 붙들어 나를 임금 삼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핵심은 내가 생명의 떡이라는 영적 진리를 말해주고자 한 것이다, 내가 오천 명을 먹이는 양식이고 나를 먹고 마셔야만 사람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진리 하나를 알려주기 위해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푼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말 사위가 제자들에게 먹혀들지 않고 무리들에게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6 26절에서 논쟁적인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괄호하고 내가 여러분의 참 생명 떡임을 믿지 않고, 이런 뜻입니다. 표적을 만일 보았다면 오병이어 기적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면 나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는 말이 똑같은 말입니다. 풀을 섭취한 동물이 배가 가득 부른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풀을 섭취한 동물이 배가 가득 찬 표현을 쓴 이유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배를 채우기 위한 끊임없고 반복적인 사역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바로 나누어지고 찢겨진 떡이라는 걸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걸 깨닫게 하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임을 알려주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는데, 예수님 자신을 먹고 마시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만든 표적의 떡을 먹고 마시려고, 즉 일차원적이고 매우 하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예수님을 이용한다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예수 믿을 수 있습니다. 하등적인, 열등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왕 삼으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중심이 되지 않고 내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 main business가 되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 하더라도 예수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영접하는 게 아니라 내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자를 우리는 왕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핵심은 이것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 진리 하나를 알려주기 위하여 지금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것이다, 따라서 지금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나를 왕으로 삼는 일이 아니다, 나를 왕으로 삼아서 계속 돌로 떡을 만들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계속 베풀어달라고 하는 것은 마땅한 태도가 아니다, 지금 여러분이 나에게 보낼 마땅한 태도는 내가 하나님의 인 치신 자임을, 내가 하나님께 파송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집단전멸로부터 건져내려고 하는 선한 목자임을, 내가 여러분의 영적 순례의 길을 북돋아줄 영적 자양분임을, 나를 믿고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그 진리를 아는 것, 그것이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일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일차원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벌써 성공을 거뒀죠? 공산주의 혁명은 우리 일차원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지도자를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은 우리 일차원적인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 자유를 억압해도 되는 사회를 용납하는 것이거든요. 공산주의 사회는 우리의 떡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을 왕으로 삼는 사회입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출판 언론 종교의 자유 같은 것이 없습니다. 매우 억제돼 있습니다. ? 떡으로 우리 배를 동물적인 수준으로 섭취시켜 주고, 충만케 해주고, 우리 배를 채워주면 그런 몇 가지 자유 같은 것은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출연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거절했던 왕으로 세움 받은 자가 일어났다는 뜻이에요. 공산주의 사회는 동물적인 양식을 섭취하는 것을 인생의 전부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동물적 양식을 섭취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드신 허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절대허기가 있고, 절대 굶주림이 있고, 절대 공백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드실 때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하나님을 섭취하도록 인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신명기 8 3, 마태복음 4 4-1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중요합니다. 말씀을 먹고 산다는 말은 말씀을 순종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식을 먹는 겁니까? 하나님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면 양식을 먹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요약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하거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고, 구약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요약하면 요한복음 4 34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굶주려서 너무 기진맥진하고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정오 12시에 수가성 우물가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기진맥진했습니다. 배가 고프면 시야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급하게 동네에 가서 양식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니 분명히 털썩 주저앉았을 때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사람이었는데, 어떤 여인과 대화를 하면서 충만한 원기로 가득 차 있는 겁니다. 제자들이 이 양식을 드세요, 하니까 그 양식을 드실 생각도 하지 않고, 가득 찬 원기로 안전히 소생한 마음으로 있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요한복음 4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순간 나는 진수성찬을 먹은 것과 똑같아, 너희가 알지 못하는데 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성취할 때 실현시킬 때 나는 거대한 양식을 먹은 것과 똑같아, 나는 한 번 순종할 때마다 1000kcal를 섭취한 것과 같아,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겁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는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순종하면 힘이 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힘이 난다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서 입증됩니다. 여러분이 힘이 안 나는 까닭은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순종하지 않으면 힘이 빠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에너지가 넘칩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 사람한테만 드디어 위력이 발휘됩니다. 하나님 말씀은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음료가 되고 양식이 됩니다. 이건 너무 놀라운 일인데, 하나님 말씀을 먹는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6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은 이런 마음, 사람을 살리는 그 일에 전력하고 사람을 살리는 그 일에 투신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때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물리적으로 온 몸이 피폐했습니다. 온 몸이 상처를 입었어요. 온 몸이 소진되어 마모되었습니다. 마모되고 소진되었지만 예수님은 신적체험을 받았고 원기를 공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에스겔 선지자가 두루마리를 먹고 나서 전갈 같고 가시 같은 회중 안에서 말씀을 증거 할 힘을 얻었거든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나서 가시와 전갈 같은 적대적인 청중들 사이에서 말씀을 증거 할 에너지를 공급받았어요. 말씀의 두루마리를 삼키고 순종하면 에너지가 나요. 여러분, 직장에서 힘 빼는 사람을 만나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 번 증오해주고 한 방 날릴까요? 미워해요? 아닙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면 그 사람과 같은 동류의 인간이 됨으로 말미암아 힘이 빠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보면 그 사람이 내게 날리는 잽, 어퍼컷, , 이런 악한 언어들이 나에게서 더 이상 나의 힘을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하여 하나님 말씀이 규정하는 그 모습이 내 모습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에게 최악의 모습을 끌어내는 말, comment를 날려도 거기에 즉각 반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래 창조하실 때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야 할 위와 혈관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거기에 피가 돌게 하고 거기에 생명의 영양분이 순환하게 만든다는 말이에요. 이걸 인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절대적 허기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절대적 허기 상태는 한 번 먹고 나면 열흘 동안 내내 안 먹어도 되는, 거의 로봇 수준의 존재가 아니라 매일 먹는 기쁨을 허락해주셨어요. 매일 먹는 기쁨을 허락해주시기 위하여 매일 아침에 식사하게 하셨어요. 식사는 하나님 말씀을 매일 먹는 진리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매일 식사하게 해주신 거예요. 기쁘지 않습니까? 아침에 허기를 가지고 일어나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먹어야 하나? 또 먹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기 힘든 거예요. 정상적인 사람은 먹는 기쁨 때문에 가슴이 설레면서, 고구마를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아멘 주여,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정상적인 사람은 식사를 할 때 감격이 일어나거든요. 저는 아침에 고구마를 먹을 때나 음식을 먹을 때 골똘히 생각해보면 너무 감사해요. 진짜 감사하다 하거든요. ? 내 안에 허기를 창조해준 하나님 때문에, 그런데 내가 한 번 딱 먹었는데 동면 상태에 빠져서 일주일 동안 음식을 보자마자 돌처럼 느껴지면 얼마나 인생이 힘들어요? 그래서 아침식사의 기쁨이 나에게 상쾌한 공기를 주듯이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만 내가 영적이 상쾌함을 유지하고 영적인 에너지가 주유되고 공급되어서, 이 세상에 어떤 쓰레기 같은 부정적인 인간들을 만나더라도 내가 이겨낼 수 있고 내가 하나님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품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먹는다는 행위가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과 똑같아요. 예수님은 순종의 화신으로서의 말씀이죠. 요한복음 1 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은 어떤 말씀이에요? 육신이 된 말씀, 순종이 된 말씀, 실천이 된 말씀, 그런 뜻이죠.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실천된 말씀을 먹는다, 잘 무르익은 음식을 먹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순종된 사람을 먹는다는 말과 똑같기 때문에 이런 말과 같아요. 내가 너무 살기가 힘든데 너무 의롭게 사는 사람을 옆에서 보면, 의롭게 살면서 진실하게 살면서 사랑이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을 보면 내가 힘이 나고 용기가 나고 다시 한 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살고 싶다는 용기를 고취 받는 때가 있거든요. 그게 바로 그 사람을 먹는 거예요. 그 사람의 삶의 결과를 먹는 거거든요. 예수님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 살을 먹는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 순종의 결과를 먹는다, 예수님의 순종하는 모습을 먹고, 예수님의 그 순종을 모방하는 걸 말해요. 먹는다는 개념이 고대 이스라엘 맥락 안에서는 계약을 맺을 때 서로 엄숙하게 서로의 영혼이 결속될 때 먹었어요. 그래서 출애굽기 24 10-11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는 말은 계약적 결속상태를 서로 먹고 마시는 것, 내가 누군가와 식사를 할 때 그 사람의 우정 친절 사랑을 먹는 거거든요. 그 사람과 내가 일생 동안 서로 친구가 되겠다고 서로의 인격을 먹는 거란 말이에요. 그 사람의 인격을 먹는 거예요. 그래서 라반과 야곱이 길르앗에 서서 계약을 맺었어요. 서로 먹었어요. 이 말은 서로 친구가 되기로 약속을 먹는 거예요. 서로 인격을 먹는 거란 말이에요. 결혼식도 서로 먹는 겁니다. 사랑을 먹는 것이고 우정을 먹는 것이고 진실한 인격을 먹는 거예요. 먹는다는 말은 계약적 결속상태에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내가 섭취하고 소화한다, 예수님과 계약적 결속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영생을 위한 양식을 먹는 거거든요. 다시 한 번 요약하면,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괄호하고, 나는 섭취되어야 할, 나는 모방되어야 할, 나는 순종되어야 할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인생의 절대허기가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인생의 절대 허기 절대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는 절대 허기가 끝난 게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건 기독교가 타 종교보다 낫다, 이런 정도로 어설픈 주장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 인간은 우리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의 설계도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필수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하면 절대허기에 시달려서 인생을 살지 못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라는 특수음식을 먹어야만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처럼 자기 몸을 다른 사람 오천 명의 양식으로 내어 줄만큼 사랑이 충만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영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먹어야 영생한다는 말뜻을 쉽게 말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바쳐진 인생을 사는 사람만이 참으로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그 생명을 만끽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뭐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도 모르고 마음대로 살고 을지로 충무로에서 마음껏 명품가방 들고 다니고 헬스클럽에서 살 빼고 다니는 사람들은 살기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기가 충만한데, 살기가 충만한 사람과 생기가 충만한 사람이 닮아 있기 때문에 영적식별력을 가져야합니다. 타워팰리스 24층에 살면서 에쿠스 몰고 다니면서 바다가재 7만 원짜리 먹고 얼굴 예쁘게 하고 살 빼고 다니는 사람도 생기가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과 자신의 몸을 오천 명의 양식으로 바치면서 고요하게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사랑에 투신된 사람의 차이가 큽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만 영생을 누린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에 바쳐진 인생은 영생하고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하나님 말씀의 원칙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만이 영생한다는 말이에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바쳐진 사람만이 영생한다는 뜻이에요. 다른 말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는 말은 예수님을 섭취하고 소화하고 그를 따라하고 모방한다는 뜻이에요. 오병이어의 표적을 본 사람이 예수님 같은 사람이 우리 왕이 되면 우리 평생 배부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인생을 오병이어로 바쳐서 다른 사람의 양식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 라는 결단을 예수님은 하라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그런 뜻이에요.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자신을 부인하고 사는 일이야말로 참 영생의 원리임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야말로 참다운 영생의 길임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안 믿어집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때문에 소진할 용기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구원할 것이라 했거든요. 그 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약간 양심적으로 사는 것, 이거는 영생 아닙니다. 우리가 양심적으로, 약간 이성적으로 좀 더 분별력 있게 사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판단 하에서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의 절대기준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처럼 자기 인생을 오천 명의 양식으로 기꺼이 내어주는 결단만이 영생을 담보 받는 삶이고, 영생이 보존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내 인생처럼 투박하고 보잘것없는데 내가 내어놔도 오천 명이 안 먹으면 어떻게 해요? 자기 인생이 매우 소박하기 때문에 내가 희생을 한들 내 인생이 무슨 오천 명에 영향을 끼치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소박하고 이룬 것이 없고 내가 수능 7등급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 명문집안의 자녀가 아니라도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숭고하게 자기 몸을 드리려 한 그 순간 그 사람은 오천 명을 먹이는 양식으로, 즉 일인분 양식에 불과했던 말라비틀어진 오병이어 음식이 예수님 손에 가자마자 예수님 손안에서 오천 명을 먹이는 양식으로 바뀌듯이 바뀌는 겁니다. 그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 이걸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전 기독교 복음이 제대로 알려지기만 하면 온 인류가 기쁘게 받아들일 복음이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복음을 이런 뜻으로 알려주기엔 너무나 우리가 잘못된 시대에 살고 있고, 한국교회는 너무나 감동적 이기적 집단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이 말을 소리쳐도 누구도 우리말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이번에 제가 숭실대 채플을 맡아서 설문조사를 해봤거든요. 교목실장님 참 애를 많이 쓰시는데 어디까지나 채플은 채플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강사 많이 데려와도 눈을 뗄 수 없습니다, 그런 조롱이 있어요. 실장님 그 짧은 순간에 몇 마디해서 우리를 기독교인 만들려고 하십니까? 단념하세요, 그런 말이 있어요. 채플 개선하시겠다고요? 정말 개선하실래요? 폐지하세요, 이것이 개선입니다, 그런 말, 그런데 이번에 보니 채플이 좋아졌다가 4% 증가했어요. 굉장히 많이 증가했어요. 그 이유는 예수 믿으란 말을 안 했기 때문이에요.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 자체가 거역감을 일으키고,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대학생 1만 명을 인질로 잡아다가 옭아매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고, 그게 채플의 분위기였거든요. 진짜 멋진 기독교를 보여주지 못하고 눈 다 감게 해놓고, 이제 제가 깨우려고 하니까 눈을 뜨지도 않는 거예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들이에요. 제가 만약 채플 교목실장만 아니라면 그 1만 명 울리고 웃길 수 있어요. 제 실력으로, 그런데 제가 교목실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가기 때문에 영원히 눈을 감아버리는 거예요. 아무리 깨우려고 해도 안 돼요. 어떻게 하면 눈을 뜨게 할까? 눈만 뜨면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눈을 감아버리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에요. 가톨릭 5%, 기독교인 27%, 35%가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약 71%가 하나님 복음에 대해 적대적이에요.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적대적인 거예요. 제가 우리 한국 청년의 가슴속에 파고들어가지 못해요. 저는 좌절하지 않을 겁니다. 끝까지 파고들어야죠. 그래서 이번 가을학기에는 시나리오를 하나 썼어요. 제목은 숭실대 채플 과연 이대로 좋은가? 법정 드라마를 써서 피고로 교목실장이 나와서, 당신은 왜 이렇게 채플을 어두침침한 분위기로 왜 72%를 재웠는가? 왜 그들이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되었는가? 그럼 제가 포승줄에 묶여서 실제로 연기를 하려고 해요. 이런 역설적인 상황극을 가지고 한 번 2학기에 공연을 해보려고 합니다. 45분짜리 단막극인데, 제가 너무 우리 학우들을 깨우려고 애를 쓰는데도 이들이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학우들만 그런 게 아니에요. 제 아들 딸 내 조카 모두 I'm sick of christian, 이렇게 말해요. 진짜 기독교 형편없다고 말해요. 실제로 우리 아들은 아빠가 기독교인이라는 집단에 속한 것 자체가 distaste 라고 생각해요. 아빠가 몰라서 그렇지 자기가 버펄로에서 들은 설교 10개 중에서 정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고 주장을 해요. 메일을 길게 썼어요. 이게 기독교야? 아빠 이거 진짜 기독교 맞아? 이렇게 하면서 공격을 해오는데, 예수님을 섭취하고 모방하고 신적 에너지로 가득 찬 기독교를 우리가 살아주지 못하기 때문에 참 좋은 기독교를 보여주기만 하면 세상 만민이 결단할 수밖에 없는데, 이 기독교를 우리가 보여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절대적인 굶주림과 영적허기가 있는데 이건 비싼 음식으로 명품가방으로 될 일이 아니에요. 대학생이 평균 버는 돈이 40-55만원 번답니다. 그 중에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아르바이트 하는 사람은 18.3% 3, 1위가 명품 옷을 사기 위해서 한다고 했어요. 3개월 정도 하면 120만 원 정도 번대요. 120만 원 정도면 어느 정도 축에 끼는 옷을 살 수가 있다네요. 그런데 방송멘트가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지 말고 사람 자체가 명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끝났어요. 그건 다 허기거든요. 동시 다발적으로 연애를 하는 사람도 허기입니다. 영적허기거든요. 영적허기가 카사노바적인 연애 에너지로 방출되거나 명품에 대한 집착으로 방출되거나 아니면 디아블로 3 같은 게임에 미쳐서 혈관이 터져도 계속하는, 이런 것 전부 다 영적 허기가 있는 거거든요. 영적허기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섭취하고 종교적 언어로 부각된 예수 말고 생생한 예수, 진짜 양식 예수, 빵 예수, 떡 예수, 케이크 예수, 망고 스무디 같이 맛있는 예수, 이런 예수가 진짜 진실로 드려진다면 이 많은 숭실대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섭취할 텐데, 예수님에게 너무 많은 종교적 이미지, 용맹하고 이기적인 기독교인들이 교주로 예수님이 들어가니까 예수님을 섭취해야 할 양식이 되지 않고, 뭔가 먹는 마이너리티 패거리들과 쫓겨 다니는 그런 사람처럼 예수님이 알려지니까 예수님이 섭취될 양식이 아니라 기피될 대상이 돼버린 거예요. 여기서 심각하게 저는 반성합니다. 여러분들은 저보다 훨씬 책임감이 덜 들 텐데, 저로서는 무척 괴로움과 탄식이 있습니다. 제 인생이 이렇게 오래됐는데도 시원하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기독교가 뭔가 제대로 됐다는 느낌을 영원히 못 가질 것 같습니다. 제 상태로는 미완성 또는 종결되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제 인생이 끝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걸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저도 참 난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허기 절대허기 절대 굶주림이 있다는 걸 아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음식, 하나님의 아들, 사랑으로 점철된 사랑으로 공인된 그 예수님을 먹어야만 진짜 하나님이 창조한 생활 생명 영생을 누리도록 만드셨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먹지 않고 발산하는 모든 기운은 전부 다 살기라고 봐야 돼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전투적 호전적 삶의 의지, 일에 대한 의지, 승리에 대한 의지, 전부 다 살기입니다. 시장을 지배하려는 의지도 살기입니다. 예수님을 섭취하고 내 인생을 무엇보다 가장 거룩하게 재조정하고 재설정하는 것이 영생이고, 그런 예수님을 모방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영생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먹고 섭취한다는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자신이 먹고 섭취했던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계속 섭취하고 소화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둘째 예수님을 모방하고 예수님을 따라하고 하루 종일 묵상하고 예수님 때문에 용기를 고취 받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을 잘 믿고 예수님과 계약적 결속상태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지체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따라가며 추종하는 형제자매들과 강력한 영적인 우정을 나누는 것, 이것도 예수님을 먹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섭취하고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원래 우리에게 약속해주시고 선물로 주셨던 영생, 즉 영원히 존속할만한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영생을 영원히 언제 맛봅니까? 마지막 날입니다.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여러분 마지막 날에 우리가 영생을 누리는 부활을 경험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 간 사람은 결코 내쫓지 않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즉 나는 하나님 뜻을 한 번 행할 때마다 원기에 넘쳤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순종할 때 원기가 넘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먹는 것이다,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하여 한 번 순종할 때마다 여러분은 신적인 에너지로 충만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를 먹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섭취하여 다가오는 일주일 동안 신적원기로 가득 차서 이 세상에서 여러분을 힘 빠지게 만드는 사태, 사건들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결 속에서 조금도 주눅 들지 말고, 꼭 원기 왕성하게 일주일 동안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1부 설교를 듣고 나서 바로 올라가자마자 코멘트를 했습니다. 1부에서 설교를 이렇게 했거든요. 여러분 제가 에너지가 넘치죠? 대답을 바로 네, 유도했습니다. 제가 에너지가 넘치는 이유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올라가서 그것도 그렇지만 살 때문에 그렇다면서, 당신 살이 많아서 에너지가 넘친다, 이렇게 말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맞습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해야만 살이 있어야만 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육체가 단련돼야만,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러나 살만으로는 아닙니다. 많은 살찐 사람이 저처럼 일찍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예수 믿고 나서 34년 내내 똑같았습니다. 34년 내내 제 모습이 똑같습니다. 항상 에너지가 넘쳐요. 그건 살 때문이 아닙니다. 그때는 66kg밖에 안 됐습니다. 그때도 새벽 일찍 일어났고 하나님 말씀 충만했고 그때도 제가 사명의 길로 달려갔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살만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바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영생의 삶에 돌입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과 같은 사랑의 화신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만드신 허기를 예수님을 섭취함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계기로 삼아주십시오. 우리 안에 있는 이 모든 허기와 결핍은 주님을 섭취하고 모방하고 이해하고 신뢰하라는 부르심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모든 영적 허기와 결핍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선한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더 창조적임을 믿습니다. 허기와 갈증에 시달리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예수님이라는 특수양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