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1부 예배-요한복음 7:25-36
(독생자의 고난_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가 그를 알지 못하나)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
요한복음을 처음 공부할 때 독생자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독생,자 라고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모노 게네스 히오스, 모노는 게네스를 수식합니다. 모노가 히오스를 수식하지 않고 게노스를 수식한다는 말은 독이라는 독특한 게 모노입니다. 모노드라마 할 때 모노, 모노가 제네시스할 때 게네스를 수식하기 때문에, 모노제네스는 독생이라는 뜻입니다. 독생이라는 말이 한 단어고, 자가 나옵니다. 히오스는 아들이거든요. 독생자는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독생자는 독특한 관련성 속에 있는 하나님 아들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썼던 두 그룹이 있습니다. 첫째 천사들, 하나님 옆에 있는 천군천사들의 일부를 하나님 아들들이라고 했습니다. 천군천사 중에 하나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천사가 있습니다. 욥기 1장에도 나오고 창세기 6장에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이라 불리는 특권천사가 있는데 그런 특권천사도 하나님 아들이라 불렀고 이스라엘도 하나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13장, 내 맏아들, 초태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초태생입니다. 집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에게 배타적으로 소속돼 있는 순종의 부담을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군천사 중 일부에게 적용돼 있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복수형으로 쓰이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집단 전체를 통칭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집단명사로서의 우리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몸뚱이와 예수님이 맞먹는 것처럼 1대 1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들로 호칭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그 아들, 독생자, 독특한 관련성 속에 있는 그 아들이라고 불림 받았단 말이에요. 요한복음은 삼위일체 복음의 대헌장입니다. 만일 요한복음이 없다면 삼위일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이 없다면 오늘 날 삼위일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기독교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그리스의 철학의 영향에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오리엔과 클레멘트라는 두 사람, 프락시아스, 이런 사람들이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는데,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요한복음을 연구합니다. 요한복음을 엄청 많이 연구합니다.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삼위일체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카르타고의 터툴리아누스와 히포의 어거스틴, 또 아프리카 사람들이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요한복음을 너무 많이 읽다가 삼위일체론 주장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3-7장을 이해해야 하고, 요한복음 3-7장은 독생자가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장입니다. 그다음 14-17장은 독생자가 무엇인가를 예수님 자신의 1인칭화자, 자기해설적인 강론, self explanatory, 자기스스로를 설명하는 강론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3-7장, 14-17장까지 해설된, 예를 든, 설명된 독생자의 뜻을 다시 풉니다. 첫째 독생자는 한 번도 하나님께 반역을 범해본 적이 없는 완벽한 신뢰와 순종 속에 있는 아들, 둘째 독생자는 만물보다 먼저 태어나신 자로 태어났다는 말뜻이 피조물이라는 의미를 갖지 않는 의미로 태어난 하나님 아들,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아들입니다. 태어났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만물보다 먼저 태어난 아들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셨을 때 하나님 아들은 안 계신 적이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겁니다. 김회권의 육체와 지성은 같이 있죠. 김회권의 언어, 김회권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 말도 내 가슴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거잖아요. 내가 말없이 존재할 수 없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 없이 하나님만 턱하니 심장도 없이 로고스, 지성도 없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순간 하나님의 말씀은 심장 속에 있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장 속에 있지만 하나님이 말을 뱉어서 하나님 당신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을 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독자적 귄위를 갖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 독생자는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나온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나온 하나님이란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장 14절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사야 55장 10-11절을 제가 인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기억이 납니다만, 여러분은 안 나죠.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하나님의 품 속에서 말씀이었던 하나님이 독자적인 하나의 인격체가 돼서 하나님 뜻을 수행하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 가슴속으로 돌아왔다고 했죠. 독생자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아버지 품속, 독생자께서 품속에 있던 말씀을 가지고 역사 속에 파송하셨다가 그 말씀을 이루신 그분이 다시 아버지 품속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을 우리는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품속으로 돌아가는 때, 이것을 마태복음에서는 아버지의 우편보좌로 돌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독생자의 뜻 첫째, 천인 무구한 진리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특한 위임 파송을 받은 아들, 둘째 천사들 또는 이스라엘 백성의 집단적 호칭과 다른 완벽한 순종의 부담을 지고 있는 아들입니다. 그다음 독생자는 첫째 육신의 장막을 입었지만 독생자의 영광을 은닉하고 있는 아들, 다시 말해서 기적과 표적과 엄청난 지혜를 내장하신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독생자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활동하신, 요셉을 아버지로 둔 독생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오신 독생자이기 때문에 완전히 성육신하신 독생자이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 이스라엘 사람 또는 유대인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왔습니다. 네 번째 독생자가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3-7장, 14-17장까지는 반복되는 말입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요한복음 6장 41절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나는 아버지에게서 파송 받았다, 내가 하는 이 모든 것은 아버지의 교훈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는 한 치도 거리감이 없다, 완벽하게 우리는 하나다, 이걸 강조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 독생자임을 드러내는 순간은 특권호소를 위함이 아니라 순종의 부담, 죽기까지 순종하실 것에 대한 자기 다그침의 맥락이라고 했습니다. 완벽한 순종의 화신인 독생자가 불순종의 화신들 사이에 오면 어떻게 될까요? 완벽한 순종의 화신인 독생자가 반역자 찬탈자 하나님 아버지 영광을 촉범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면 독생자가 필연적으로 고난을 겪는 겁니다.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더러운 사람들 사이에 오면 의사소통이 단절됩니다. 실제로 불가능해집니다. 음란한 사람들, 아주 지저분한 사람들 사이에 거룩한 사람이 와서 떨어진다? 그 사람은 죽는 겁니다. 의사소통 불가능 지점으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이 너무 답답해서, 에크 크락센, 자동차에서 경적 울리는 것을 한국식으로 발음하면 크락숀, 크락조, 외치다, 에 크 크락센,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답답해서 7장 28절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예수님이 결코 이렇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상당히 격앙됐습니다. 7장 37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저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독생자의 가장 큰 고난, 독생자의 반대말이 불순종의 아들들, 반역하는 아들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예루살렘 사람들 사이에 완전히 따돌림을 당했거든요. 순종의 화신인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면 이 패역한 세상에서 외쳐서 자기 진실을 절규하듯이 토해낼 수밖에 없는 답답함에 처한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은 격앙된 분위기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왜 이렇게 외쳤느냐? 유대인들은 딱 세 가지 삼단논법이 있었습니다. 첫째 메시아는 어디서 오는지 모를 만큼 신적기원, 초월적 기원을 갖고 있다, 대전제입니다. 둘째 소전제 예수는 갈릴리 출신이다, 결론 따라서 예수는 우리가 기다리는 그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이런 삼단논법에 의지해서 7장 25-32절까지 예수님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배제합니다. 예수님은 일단 갈릴리 출신이고, 요한복음 6장 42절처럼 요셉의 아들이고, 마가복음 6장처럼 그 형제들을 다 알고 있고, 마가복음 3장처럼 그 모친과 동생이 예수님에게 집에 가자고 조르면서 가정불화를 야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인간적 기원을 다 알고 그의 출생을 다 안다, 어떻게 그가 신적기원 초월적 기원, 신비한 출처를 가지고 홀연히 나타났던 구원자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 이 통속적 메시아 구원론은 외경 에녹서에 근거한 것이고, 구약성경에서 메시아의 신적기원을 말할 수 있는 구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밖에 없습니다. 크 바르 에느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이 구절 때문에 외경서, 에녹서 같은 외경에서 메시아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니엘서 7장 13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요한복음 6장 41절에서 했습니다. 6장 41절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내 목숨 바쳐 가면서까지 하나님께 무한책임을 지는 사명자라는 뜻이다, 무한책임을 지면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복종의 화신, 자발적 순종의 화신자, 그런 의미에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라고 함으로써 다니엘서 7장 13절을 예수님이 약간 해설해서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7장 29절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이게 바로 독생자의식입니다. 독생자의식에 준하는 준독생자 의식을 가졌던 사람은 모든 예언자 모세, 사무엘, 기드온, 그들은 준독생자 의식을 가졌죠. 준독생자 의식을 가졌던 모든 예언자들을 총적분해서 모든 예언자들이 파송 받았다는 의식을 다 한데 모아도 예수님 독생자가 느꼈던 고도의 무한책임적인 독생자의식은 없단 말이에요. 그걸 다 해도 예수님만큼은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예수님 안에 있는 무한책임적인 피파송의식, 독생자의식을 미분해보면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파송 당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독생자의 의식은 아니죠. 저도 파송 받았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경주김씨 김알지 64대손이지만, 출생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주김씨 혈통이 저를 파송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 시대에 파송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는 파송의식은 독생자의식은 아닙니다. 저는 무한책임까지는 못 갑니다. 저는 분투하지만 예수님만큼은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분투하지만 우리 모두 다 합해도 비산동 다 합해도 가향합해도 예수님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니엘서 7장 13절, 에녹서 등을 근거로 신비한 초월적 기원을 가진 메시아를 기다릴 줄 모르겠는데, 그런 삽입어구가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답답합니다, 여러분 제가 외쳐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소리 높여서 다시 한 번 호소합니다, 제가 하늘에서 왔다는 말뜻은 구름 타고 온다는 문자적 직역을 하면 안 됩니다, 나는 내 목숨을 바쳐가면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다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독생자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가 갈릴리에서 나왔고 우리 아버지가 목수라 하더라도 나의 신적기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답답함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이런 고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전할 때 느끼는 고독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중립적 무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처음 전할 때는 이런 고독이 있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정확하게 이런 배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골똘히 연구해서 참 하나님을 알려주면 김회권 너는 왜 그리 구원받기 힘드냐? 너만 신학자냐? 너만 목사냐? 바로 비난이 들어옵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옳게 알려주려면,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참 하나님을 알려주려면 우리는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저는 부처님이 말한 말이 틀렸다고 봅니다. 인자무적, 인자한 사람은 적이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참으로 인자한 사람은 대중적인 차원에서 적이 없을지 몰라도 진짜 인자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적이 있습니다. 왜?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은 폭력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 인자함과 자비함의 극치는 무엇입니까? 성폭행범을 인자하고 자비한 사람이 놓아두겠어요? 성폭행범이나 살인범이 나쁜 짓을 할 때 인자한 사람이, 천천히 하세요, 살살 좀 찔러요, 이렇게 하는 것이 인자하고 자비로운 게 아니잖아요. 그걸 즉시 멈추는 사람이 인자하고 자비로운 겁니다. 쌍용자동차 해고가 돼서 사람이 8개월째 죽는데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들은, 사장님 그렇게 너무 한꺼번에 해고하지 마시고 1년에 만 명씩만 하세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인자하고 자비로운 사람은 불의한 기업주의 노동유연성에 대한 집착을 방어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도와주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적이 없습니까? 석가모니는 틀렸습니다. 인자무적하지 아닙니다. 인자는 한편으로 무적하지만 인자는 엄청난 하나님의 원수와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역한 사람들, 종교권력을 누리는 종교권력자들과 갈등해서 배척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무신론자는 누구인줄 아세요? 이슬람보다 공산당 보다 훨씬 나쁜 사람들은 지금 하나님을 입에 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거짓종교권력가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진짜 무신론자입니다. 무신론자의 특징,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불가지론자들은 착한 무신론자들입니다. 진짜 무신론자들은 이사야 3장 8절, 29장 15절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면서 여호와가 어떻게 알랴? 여호와가 어떻게 우리가 지상에서 악을 범하는 가를 알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범하면서, 여호와의 눈을 촉범하면서, 여호와의 눈을 꼬챙이로 찌르면서 우리가 하는 이 행위를 보지 못할 거라고 믿고 있는 참담한 악, 교황들이 범한 악, 종교권력자들이 범한 악, 독생자를 죽여 버린 겁니다. 이게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속에 독립적인 하나의 소설 같은 narrative 형식을 가진 것입니다. 지금 외국어대학교 무슨 교수가 대심문관만 뽑아서 긴 작품을 해설해놨습니다. 그것만 한 번 읽어보세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길어서 못 읽겠는 사람들은 그것만 읽어보세요. 14세기에 세빌랴에 예수님이 재림합니다. 그 당시 인큐지트? 종교화형을 시켰던 종교심문관이 재림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당신이 하늘로 돌아갈 이유를 내가 말해주겠다, 당신은 왜 인간이 감당할 수도 자유를 줘서 인간을 자유롭다고 선언해서 기만하느냐? 인간은 절대로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은 노예근성으로 가득 차 있고 구제불능이다, 노예근성으로 가득 찬 인간은 가톨릭교회인 우리가 관리하는 게 낫다, 당신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인간은 절대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인간은 노예근성으로 적당하게 주교와 보좌신부 밑에서 죄 짓고 살면서 건성건성 교회 다니는 그 정도를 좋아하지, 당신처럼 성령 받아서 개인이 각성해서 이 시대를 개인이 책임지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허구다, 하면서 재림예수님을 천국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종용하는 밤의 대화가 일어납니다.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에서도 아하스페르츠가 정확하게 예수에게, 대심문관에 나오는 대사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사람의 아들> 아하스페르츠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려고 왔어? 인간은 원천적으로 죄인이라서 자유가 안 돼, 구제불능이야, 인간은 그냥 죄 짓다가 동물처럼 살다가 가는 거야,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롭도록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원하는 그 구원을 우리가 원하는가? 저는 약간 그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성경을 한 번도 읽지 않고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없으면서도 그냥 교회만 줄창 다니면서도 헌금하고 착하게 김장할 때 노동봉사하고 매 주일 가고, 성령의 감화 감동이 없고 하나님의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그걸 신앙생활이라 생각하고 교회만 시계추처럼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알고' 라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나는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는 나를 알고,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게 영생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고 교제하는 것이 영생인데,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는데 관심이 없고 예수님이 주는 구원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 자체가 구원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예수님이 주는 구원을 받아버리려고 하는 것 자체에 관심이 많습니다. 구원을 받아버리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물질적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의 시작인데, 그 모든 탐욕은 고스란히 가슴 한편에 젖혀놓고 예수님과 하나님은 상관없이 구원 자체를 하나님처럼 여기는 종교관, 대한민국의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구원을 열망하는 종교인들의 열기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으로 감화감동 받은 기독교가 대다수는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성령의 거룩한 영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바꾸어낼 능력도 없고 이 세상이 틀렸다고 책망할 수도 없습니다. 소녀시대니 반바지 입고 나와서 설치는 아이들은 검은 악령입니다. 악령이 아니면 14-17세 소녀들을 홀랑 벗겨서 화면에 띄워서 사람들로 보게 할 수 없습니다. 책망 받는 소돔과 고모라로 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걸 대중문화 한류니 하면서, 이번에도 <피에타>라는 영화가 황금사자상인가를 받았다고 하면서 신문에 났는데, 우리나라 모든 영화는 가장 참담한 영화만 상을 받습니다. 저는 보지 않았습니다.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 상 받는 영화는 전부 다 대한민국 사회를 너무나 엽기적으로 묘사한 사회입니다. 이번에도 어떤 감독 한 사람이 상을 받은 모양인데, 우리 대한민국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죠. 대한민국은 혀를 자르고 엽기적으로 사람 팔을 자른 장면을 시커멓게 하드코어 장면으로 보여주는 그런 영화를 찍어서 상 받은 것은 대한민국 문화의 본질도 아니고 한류도 아니죠. 그건 엽기적으로 누가 더 잔혹한가를 보여주는 경쟁일 뿐이죠. 황우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미국에서는 윤리적으로 여성의 난자를 채취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실험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을 조교들의 난자를 전부 다 채취해서 그 무지막지한 실험을 해서, 그것도 엉터리로 만들어서 백일하에 탄로가 났습니다. 그건 기술의 도전이 아니라 윤리가 없는 곳에서만 감히 있는 실험입니다. 황우석이가 상대적으로 유리한 것입니다. 물론 그것도 가짜였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정말 책망이 필요한 사회입니다. 정말로 독생자를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 대한민국은 너무나 부패해버렸기 때문에 소속하면 안 되는 사회입니다. 대한민국은 소속감을 절대로 줄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사람들은 독생자를 고대하는 사람들은 외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도발하니까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보세요. 요한복음 7장에서는 표적이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요한복음에서 나온 표적은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 4장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 5장에서 38년 된 병자, 6장, 이 4가지 밖에 없는데, 표적이 이렇게 많다는 표현을 볼 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까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독자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이보다 훨씬 더 표적이 많거든요. 사실 요한복음 5장에서 38년 병자 한 사람 고친 것 말고는 이 맥락에서 맞는 말이 없는데, 표적을 엄청 많이 행했다고 전제돼 있는 걸 보니 이 말은 매우 진도가 많이 나갈 때입니다. 지금 10월인데 예수님께서 붙잡혀 죽은 날은 그 다음해 3월말 경에 붙잡혀 죽었으니까,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 6-7개월 전에 한 말입니다. 매우 표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로부터 당국자들로부터 체포되기 직전에 있습니다. 33-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인가 하고 오해합니다. 36절 '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이 말은 내가 하는 순종의 길, 내가 가려는 독생자의 고도의 무한책임적인 순종과 복종의 길을 너희는 모방도 할 수 없고 따라 올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대화가 어떻게 이렇게 안 될까요? 말이 전혀 안 통합니다. 이 말뜻을 이해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세계를 종교권력의 세계에 집착하는 바리새인과 당국자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날 성령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를 거룩하게 도발할 때 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독생자는 따돌림 당하는 외로운 아들입니다. 종교권력자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대중들에게 오해받았다고 합니다. 표적을 많이 행했기 때문에 메시아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종교권력자들에게는 살기어린 오해를 받고, 저 무리들에게는 맹목적인 오해를 받습니다. 내 아버지만 나를 압니다, 아버지만 나를 알고 아버지 외에는 나를 알 자가 없다는 말을 예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독생자급 순종을 바치면 참 고독합니다. 알지 못합니다. 독생자급 순종은 배척과 고독의 경험이 불가피한 것 같습니다. 독생자급 순종은 우리 시대에 중심종교권력자들로부터 긴장을 유발시키고 반발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행복하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성령 충만하면 늘 즐겁다고 생각하는 사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하면 늘 즐겁다고 하는 것은 주일학교 아동들을 입문시킬 때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즐거울 때도 많지만 탄식도 많고 고뇌도 많고 슬픔도 많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이 성령 충만한 마음이라고 봅니다. 거룩한 영에 좌우되는 분위기 때문에 영적인 의사소통이 감흥이 안 되니까 고독함을 느끼고,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좋은 설교가 무엇일까요? 좋은 목사님은 우리 시대 대중들에 맞춰서 예수님을 바겐세일 하는 사람들일까요? 장경동 김문훈 같은 CTS에 나오는 그 사람들이 진짜 예수님을 바로 전달할까요? 저는 목이 쉬어서 다 말을 못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장경동 김문훈 같은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채색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참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물론 김삼환 목사나 조용기 목사에 대해서도 똑같이 느낍니다. 진짜 성경에 적혀 있는 예수님, 성령이 알려주는 예수님을 알려주는 사람이 너무 없다, 요한복음 3장 5절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도 알 수 없고 예수님도 알 수 없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람만이 하나님아버지께로부터 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령 받자마자 예수님의 세계, 아버지께로부터 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말이거든요.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난다는 뜻이에요. 하늘로부터 난다는 말과 거듭난다는 말이 요한복음에서 똑같은 거예요.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순종의 영이신 예수님의 영으로 세례 받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단 말이에요.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늘로부터 나신 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교회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물인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특수하게 위탁된 업무와 과업이 기독교란 생각이 듭니다. 잘 들으세요. 전도도 해야 합니다. 선교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참 기독교는 하늘로부터 태어난 사람, 위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수하게 위탁된 특수한 양식의 삶의 방식입니다. 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보편적으로 아무에게나 요구할 수 없고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에게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에게 기독교는 통하고 예수님과 영적으로 소통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저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봤지만 정말 보편적으로 될 것 같지만 안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 미완성입니다. 여러분이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거듭난 사람이 되어서 독생자급 의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배척받겠지만 왕따 당하겠지만 죽음을 당하겠지만 이 길이 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길이 참입니다. 이 고독과 배척의 길이 참입니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느끼는 이 고독,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고독, 이것이 기독교의 중요한 양상입니다. 기독교가 명랑쾌활하기만 하고 늘 over bright, 너무 밝기만 한 기독교는 참모습이 아닙니다. 때때로 슬픈 기독교, 때때로 외쳐서 가라사대, 외치는 예수 기독교, 이것이 바로 탄식하는 기독교, 안타까운 예수님의 기독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이셨지만 두 번이나 외치십니다.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너무나 답답해서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출생을 목수 아들 출신을 조롱하는 종교권력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자기 가슴속에 폭발하는 진실도 다 소통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자 외에는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고 고독 속으로 철수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하늘로부터 난 자가 된 자가 된 순간부터 이 예수님의 고독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땅으로부터 태어난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독생자의 고뇌를 알고 그 길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독생자의 고뇌에 동참하여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고, 다음 일주일도 독생자의 고뇌를 이해하고 그 길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버지 하나님 감사하옵고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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