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2부 예배-요한복음 7:45-52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오늘 본문에 갈릴리라는 지역이 당국자들,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갈릴리는 선지자가 날 수 없는 지역이라는 겁니다. 이 선지자는 7장 40절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이 그 선지자는 이 말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알려져 있는, 즉 정관사 the가 붙어 있는 선지자입니다. 신명기 18장 15-18절에 나오는 모세가 한 말,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그 선지자는 미래로부터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할 메시아를 가리키는 일종의 별칭으로 그 선지자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그 선지자라는 말도 이스라엘 민족의 통속적 기대를 충족시킨 말입니다만, 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적 기대를 충족시킨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란 뜻이데, 히브리말로는 메시아, 그리스 말로는 그리스도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죠. 그리스도가 미가서 5장 2절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적 기상을 가진 표적의 예언자가 오거나 다윗적 기상을 가진 출중한 영웅호걸적 인재가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를 구사하는 모세 같은 풍모를 가진 예언자를 기대하거나 아니면 다윗과 같이 출중한 문무를 겸비한 왕의 혈통에서 나온 인물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항상 힘이 약한 민중이, 자기를 노예처럼 여기는 민중이 항상 자기 안에 있는 민중적 집중을 각성시켜서 모세적 기상을 만들어 낼 생각을 하지 않고 다윗적 기상을 가진 힘을 만들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초월 저편 하늘 저편에서 모세적 개인 또는 다윗적 개인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역사에 대한 능동적 참여가 아니라 운명적 사고를 갖는 거죠? 모세적 풍모를 가진 탁월한 영도자가 하늘 저편에서 올 것을 기대하는 이스라엘 민중들, 다윗의 혈통 또는 왕적 혈통에서 사람이 태어나서 자기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건져줄 것이라고 믿는 기대,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노예근성이다, 노예근성적 의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힘에 대한 숭배, 하나님에 대한 통치를 강력한 힘을 가진 영웅의 출현으로 바꿔버린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주목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강력한 힘을 집중시킨 한 영웅적인 개인을 기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시민의 미분적 개별적 각성들, 주체적 책임감을 합하면 영웅적 풍모가 나옵니다. 우리 모두가 조금씩 각성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려는 공민의식으로 가득 찬 개인들이 되면, 그 개인들의 동아리가 모세를 이루는 것이고 다윗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 같은 그 예언자를 기다리고 있거나 다윗의 혈통을 가진 후계자, 다윗과 같은 왕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적 아우라를 가진, 사람들을 굽질러서 따라오게 만드는 영도자적 인물이 아니고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신 전통적인,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항복시키는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서 가장 조합될 수 없는 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오신 메시아입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했습니다. 역사의 통계를 반전시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통계를 반전시킵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적더미에서 역사의 인물 불모지에서 메시아를 불러일으키시는 반전의 전문가이십니다.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이런 통념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뒤집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바리새인은 갈릴리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종교권력자들의 본거지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세계관에서는 저 빈촌 변방 유배된 저 장소에서는 인재가 나올 길이 없는 겁니다. 예루살렘적 세계관을 가지고 보면 갈릴리는 영원히 메시아가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절대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장 46절을 매우 오래전에 제가 설교했죠?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갈릴리 나사렛이거든요. 보십시오. 갈릴리 나사렛은 마이너스 마이너스 마이너스 8학군입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살지도 않았고 소작인들, 갈릴리 나사렛에서 6km 떨어져 있는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왕의 수도였던 세포리스라고 하는 수도의 석수장이들 토목기사들을 배출한 하나의 빈촌입니다. 예수님은 6km를 걸어서 세포리스 도시 토목 공사에 건축 일을 하신 시급 받는 알바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료보험도 안 되고 사대보험도 안 되는 알바 석수장이로써 돌을 다루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일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세포리스입니다. 6km밖에 안 됩니다. 그걸 알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위선자라는 말을 씁니다. 히포크리트라는 말이데, 이 말은 그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상류문화였던 연극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이 썼다는 것은 연극을 보셨다는 겁니다. 세포리스에 가면 큰 야외연극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야외연극장에서 목수일 마치시고 시급 받으셔서 하룻밤 주무시면서 연극을 보신 겁니다. 위선자들, 가면을 쓴 사람들이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지금 시험 문이 막히고 많은 푸대접을 받으시고 많은 편견의 희생자가 되신 겁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중랑구 금천구가 명문대 입학생이 제일 낮은 곳입니다. 서울시 25개 구 중에서, 중랑구 출신이다, 금천구 출신이다, 내 친척은 금천구에 산다, 그러면 결혼길이 좀 막힐 수 있습니다. 100명의 고등학생 중에서 중랑구는 0.62명의 서울대생을 배출했습니다. 서초 송파 강남구는 2명에 가까운 100명 중 두 명이 서울대를 들어갑니다. 금천구는 통계에 안 잡힙니다. 금천구는 호남의 아주 빈민들이 와서 촌락을 이뤘습니다. 충남 충복 수몰민들이 올라왔습니다. 교육을 시킬만한 기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경쟁하는 공부에서 불리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살던 갈릴리가 그런 곳입니다. 갈릴리에선 학자도 나지 못했고 랍비도 나지 못했고 인재도 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일부러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합니다. 마태라는 사람이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처음 시작하는 장면을 이사야 9장 1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갈릴리에는 백성들의 약한 것과 모든 병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병이 많은지,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갈릴리에서 40km이상 떨어진 곳입니다. 다마스쿠스라고 하는 지금 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장면을 보고 마태가 이렇게 썼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갈릴리를 선택하시고 갈릴리 태생이 되신 이유는 갈릴리가 모든 아픈 사람들의 집결지이고 사망의 그늘에 앉아 아우성치는 고통의 일터였고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상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는 지존무상하신 하나님이지만, 마음이 부서지고 심령이 깨어져 심령이 부서지고 망가진 사람들 틈 사이에 있는 겸손케 된 사람들의 하나님이다, 내 마음은 마음이 부서지고 지상의 권력과 부조리 때문에 부서져버린, 인생의 행복을 가눌 길도 없이 흩어져버린 자들 속에 나는 함께 한다, 이사야 57장 15절 말씀 때문에 우리 하나님의 품성상 갈릴리가 메시아가 나오기 너무 적합한 터전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나온 것이 문제가 됩니다. 종교권력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갈릴리는 다윗의 혈통을 가진 인물이 나올 수가 없고, 모세적 풍모를 가진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진 자가 나올 수 없다, 왜? 갈릴리는 소작인의 땅이고 고통이 아우성치는 곳이고 이방인들과 섞여 사는 혼혈의 땅이고 모든 경멸적인 것들이 모여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는 AD 66-70년 사이에 일어났던 로마에 대해 전면전을 벌였던 갈릴리 농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앞에 갈릴리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이냐? 작물이 풍부하고 기후가 너무 좋아 온갖 곡식과 과실과 유실수가 잘 자라고 남자인구의 성비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은데, 갈릴리는 남성적 호전성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고 농민적 저항의 의미가 되었고 또 착취당한 자들이 많아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라고 말합니다. 작은 도시라도 남자인구 1만 5천명이 금방 모이는 곳이었다, 이게 갈릴리입니다. 요세푸스라는 사람이 AD 90년경에 썼던 책인데 예수님 직후 갈릴리 모습이 남자 인구 1만 5천명이 있는 도시가 많았습니다. 그리스적 양식이 많은 세포리스, 요샛말로 하면 강남 같은 곳에 많은 친로마귀족들이 로마수입품을 가지고 먹고 살던, 대중목욕탕이 크게 있었던, 음악회가 있었고 마차경기장이 있었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마차경기장이 세포리스에 가면 있습니다. 마차경기가 요즘 같으면 축구 경기 같은 겁니다. 로마귀족들이 선선한 지중해성 기후에서 바나나 오렌지 먹고 나서 무화과 말린 것을 먹으면서 보던 것이 마차경기입니다. 산상도시에서 마차경기가 열렸으니까 그 당시 마차경기를 소화할 수 있는 지역적 유지들, 유산계급들이 꽤 많았다는 겁니다. 그런 것 때문에 바로 갈릴리 농민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 마태복음 21장 등에는 소작쟁의 때문에 매를 맞는 농민들의 이야기, 사회 비평적 관점이 동반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매 맞는 소작인들을 많이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많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이런 말을 하십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구약 요약판입니다. 마카리오이 호이페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이 아우톤 에슨 힘 아셀레이아 톤 우라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중 6절, 마카리오이 호이 페이돈 테스 카이 딥손 테스 텐 디카이오시넨 호티 아우토이 호르타스 손 타이, 디카이오시넨, 이건 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구현되지 않기 때문에 타는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충만히 배부를 것이고 갈증을 해갈시킬 것이다, 지난주에 공부했듯이 이런 겁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갈릴리가 어떤 곳입니까? 갈릴리에서 나지 않았다면 산상수훈 같은 이런 멋진 말이 나올 수가 없어요. 구약의 어떤 메시지도 예수님이 했던 이렇게 멋진 시적운문을 가진 도치구문이 나올 수 없습니다. 마카리오이 호이페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이 아우톤 에슨 힘 아셀레이아 톤 우라누, 복이 있도다 가난한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상속될 것입니다. 마카리오이 호이 펜둔테스 호티 오우토이 파라클레토스 운타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파라클레토스 운타이, 파라칼레토스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런 말입니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에 의하여 지지받을 것이며 지탱 받을 것이며 위로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컸기 때문에 이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강남오빠처럼 살면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강남오빠는 낮에는 근사하게 일하고 밤에는 완전히 망가져버리는 욕망의 성욕의 극한실험을 합니다. 첫 장면에 어린 아이가 어떻게 합니까? 음란문화가 벌써 그 어린 7살 아이까지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서 다리로 흔들고, 처녀 두 명을 손잡고 1대2로 물분자 H2O처럼 다니면서 성욕의 극대실험, 성적자기결정의 극대실험을 노리는 강남, 우리나라 한국은 성욕이 극대실험이 일어나는 나라로 3억이나 되는 사람이 그걸 봤습니다. 이건 진짜 의에 주린 나라가 아니라 희망이 없기 때문에 강남오빠적 자폭 같은 성욕의 극한, 갈 때까지 가보는 문화, 원래 우리나라가 이래선 안 되거든요. 강남이 우리나라를 대표해선 안 되거든요. 그건 부정한 겁니다. 그건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를 대표하니까, 어제 저는 서초동 문화예술회관에서 안익태 기념재단 코리아환상곡 음악회를 참여한다고, 그런데 불꽃 축제하는 인구 때문에 2시가 20분을 서울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차에 기름은 떨어져가고 너무나 슬픈 일을 당했습니다. 2350원짜리 기름을 넣었습니다. 저는 마음이 상해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 기름이 바로 여기 갑을분식앞의 기름입니다. 갈 데가 없습니다. 어디로 가도 다 막혔습니다. 오세훈이 만들어놓고 지금 박원순이 한 겁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됐을까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인간은 어디로 갔나요? 천연기념물 새두루미보다도 적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많았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갈릴리적 토양, 갈릴리적 아우성에서 오셔야 하는데 예루살렘 종교권력자였던 이 당국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갈릴리 아우성과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가 어디서 크는가가 중요합니다. 볼리비아 숲속에서 볼리비아 혁명을 돕다가 총에 맞아 죽던 체 게바라가 어떻게 체 게바라가 됐나요? 1960년대는 체 게바라와 모택통의 시대라고 합니다. 60년대는 미국 하바드대학생들이 전부 다 체 게바라 셔츠를 다 입고 다녔습니다. 하바드 예일 모든 유럽 학생들이 다 입고 다녔습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의 부잣집 의사의 아들입니다. 그 체 게바라가 의과대학 다니다가 모토사이클 하나 사서 안데스 일대를 다 돌아다녔습니다. 안데스 산맥 일대를 다니다가 가난한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습니다. 남미 전체의 가난을 봤고 남미 전체의 민중이 비참한 인간존엄성 파괴를 경험하는 걸 보면서 결심했습니다. 내가 의사가 돼선 안 되겠구나, 내가 혁명가가 돼야겠구나 생각하면서 스물다섯 살에 피델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쿠바를 최초로 무혈혁명으로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공산혁명을 하고, 쿠바부터 브라질까지 전부 다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다 볼리비아에서 잡혔습니다. <모토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면 일부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남미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남미의 절망을 보고 나서, 거기서 해방신학자도 나오고 보프신부도 나오고 쿠티에레즈도 나오고 보니노 신부도 나오고 70년대 세계 가톨릭 신학을 주도했던 모든 해방신학자들은 남미에서 나왔습니다. 남미적 저항물결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대면하는 역사적 토양이 갈릴리적 아우성이 묻어 있는 토양이라면 인물이 납니다. 갈릴리적 토양과 응답하면 인물이 나오고 메시아적 독생자급 인물이 나오고, 체 게바라 같은 인물이 나옵니다. 우리가 만일 강남오빠 스타일 같이 살아버리고, 선글라스 쓰고 다니면서 보트 타면서 말춤 추고 다니면 역사는 다 망해버립니다. 대중연예인과 스포츠선수가 10대 어린아이들 입에 가장 많이 회자된다면 우리나라는 너무나 잘못된 것입니다. 완벽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나를 딛고 걸어가라>라는 책을 쓴 노신은 일본에 유학을 갔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의사가 되려고 공부를 했고, 유학을 갔더니 일본유학생 중에서 중국 아이를 일본 아이들이 이지메를 하고 때리면서 중국을 모욕을 하는데, 의사였던 노신이 모욕당하는 중국동포를 보면서 피가 거꾸로 섰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애를 엄청 쓰면서 노신이 작가가 됐습니다. 큰 장편소설 쓰는 작가만 필요하지 않습니다. 짧은 단문, 발터 벤야민 같이 짧은 단문을 썼어요. 그 사람이 쓴 소설 중 <아큐정전>이라는 짧은 소설이 있어요. 거기에 아큐라는 모욕당하는 중국을 상징하는 바보가 나옵니다. 그 작은 <아큐정전>을 써서 중국에 엄청난 혁명의 물결을 일으키고 나라를 살리려고 했어요. 중국은 캉유웨이 같은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 변법자강운동을 했습니다. 캉유웨이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광동성에 있는 홍문이라는 무술사범입니다. <맹룡과강> <용쟁호투> 영화에 나왔던 홍문, 이소룡의 스승이었던 선문, 이런 사람들이 다 황비홍 영화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인데, 어제 제가 황비홍 노래 4번 들었습니다. 임자강 버전도 듣고 성룡버전도 듣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그걸 10번 들으면 거의 성령충만과 같습니다. 갈릴리가 바로 역사의 모순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정조준하면서 지성이 자라가서 메시아적 인물이 나와요. 그런 토양입니다. 메시아가 갈릴리에서 나오는 게 너무 당연하고 역사의 원칙인데 종교당국자들은 그걸 모릅니다. 종교권력자들은 그걸 모르기 때문에 갈릴리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합니다. 중랑구나 금천구가 인물 나기에는 더 좋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문둥병자들 안데스산맥의 평평한 자들, 감자나 돌맹이처럼 비난받고 핍박받은 농민들과 연대하는데 체 게바라가 나옵니다. 쓰촨성 출신의 등소평, 복건성 출신의 모택동이 농민의 아우성과 일생과 겹쳤던 사람입니다. 중국 공산당혁명사에 보면 16살의 등소평이 중국유학생 시절에 공산당에 들어갑니다. 20대 초반의 주원래가 중국유학생 공산당 총책임자가 됩니다. 전부 다 20대 때 큰일을 했습니다. 20대 때 기존역사, 예루살렘 종교권력이 휘두르는 역사에 대해서 강력한 문제제기, 안티테제를 만든 사람만이 예수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사람이 진짜 이 시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대중연예오락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것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대세가 돼선 안 됩니다. 그건 썩어갈 자가 돼야 하고, 우리나라의 대세는 이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만한 강력한 도덕적 엘리트 들이 따라야 하고, 의로움에 가득 찬 사람이 나와야 하고, 공론을 주도할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나와야 하고 의로운 삶을 누적시킨 사람이 나와서 그 나라를 이끌어가면 강남스타일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주와 종의 문제입니다. 갈릴리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은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저도 시골에서 컸습니다. 하동 김해평야 제가 익숙한 곳입니다. 저는 농민이 되어봤고 부역이라고 하는 여러분은 모를 텐데, 면단위 농민들 주민들을 도로 신작로를 닦는 일에 많이 동원했습니다. 저는 어렸는데 신작로 닦는 일에 많이 동원돼서 10리를 걸어가고 7km까지 걸어갔습니다. 하동읍내에 있는 길을 닦으러 제가 있는 작은 면단위에 있는 사람들이 서른 명 마흔명이 산을 넘고 곡괭이를 지고 일을 하러 가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나락을 져보고, 농사를 해봤는데 그때 제가 느낀 것은 항상 농민들이 농협에서 빚을 져서 빚을 갚는 데 시간을 다 보내는 걸 봤습니다. 제 아내는 농촌에 대해 목가적인 로망이 있습니다. 저는 농촌에 대해 목가적인 로망이 아니라 착취를 경험하는 농민들의 땅이라는 걸 경험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갈릴리적 토양과 아우성에서 메시아 예수님이 나왔다는 걸 보고 하늘에서 바로 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런 갈릴리적 토양과 대면하다가 그렇게 마음씨 착하시고 그렇게 실망도 안 하시고 절망도 잘 이기시는 멋진 예수님이 나왔다고 생각하셔서 우리가 역사와 정면으로 대면하고, 우리시대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를 정면으로 응시해서 연대한다면 우리도 자라갈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설교만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제 밑에서 설교만 듣는 사람이 아니라 여기 혁명가도 나올 수 있고, 여기에 대통령도 나올 수 있고 여기에 위대한 정당인도 나올 수 있고 기자도 나올 수 있고 대작가도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우리보다 훨씬 더 용감무쌍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제 나이가 많이 들어서 용감무쌍하면 문익환 목사처럼 돼버립니다. 나서면 너무 빨리 유명해지기 때문에 한국은 나서자마자 정치를 해야 합니다. 저도 나서고 싶은데 나서자마자 국회의원 돼라고 할까 싶어서 나가지를 못합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나라가 좁기 때문에, 김회권 그렇게 예언자처럼 외치더니 결국 국회의원 하려고 그랬네, 이 비난을 듣기 싫어서 나가지 못합니다. 대신 양목사를 보내려고 합니다. 제가 금방 그렇게 콜을 받을 거예요. 지금 우리 한국은 너무 좁기 때문에 사회적 발언을 약간만 하면 힘이 모이고 권력이 돼버립니다. 그걸 저는 두려워하는 겁니다. 저는 권력을 모으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데 이 시대에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면, 반드시 거기에 권력이 생겨버리고 문제가 발생해서 큰 문제가 됩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갈릴리적 핏빛 아우성에 연대하는 지성인이 되고 싶고 목사는 되고 싶지만 이 세상의 권력을 잡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님처럼 갈릴리적 토양을 가지고 갈릴리적 아우성에 응답하는 삶을 살다보면 과감하게 목자의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마가복음 6장 34절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런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게 참 위험한 겁니다. 지나친 공민의식으로 이 땅의 백성들을 향해서 자기 인생이 아닌 남의 인생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여하는 마음이 많으면 정치가가 되고 왕이 돼버립니다. 위험한 겁니다. 감옥 좀 가도 괜찮다, 오해받아도 괜찮다, 할 사람들은 그런 마음을 가지시고 큰 인물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정치가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대통령 후보감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런 분들이 갈릴리적 기억 갈릴리적 아우성,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일촌적 연대를 가지고 가족유사성을 가지고 그들과 탯줄적인 연합을 한 상태로써 정치가가 되길 원하고 그런 인재가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시고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크게 저에겐 중요합니다. 마이너스 마이너스 마이너스 8학군이 나쁘지 않다, 이 세계 경쟁중심의 공교육에선 딸릴지 몰라도 인간의 품성을 배우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선 결코 불리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갈릴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별로 없었고, 예루살렘 산헤드린 앞에서 붙잡혔을 때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니고데모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입법 사법 최고 권력을 가진 71명의 산헤드린 회원 중에서 니고데모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옹호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기 전에 그 사람의 행동을 조사해보기도 전에 그가 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니고데모가 나중에 예수님 장례식 돈을 대는 사람이 됐습니다. 니고데모는 아마 마지막에 교회에 합류한 것 같습니다. 왜? 실명으로 산헤드린 회원의 이름을 기록한 걸 보면 니고데모가 나중에 기독교공동체에 합류했음을 암시합니다. 본문 3장 7장, 장례식 19장에 나옵니다. 세 번이나 연속적으로 이름이 나온 사람은 기독교에 합류한 사람입니다. 그 말은 갈릴리적 편견이 지배적인 체제 안에서 내부자 소수파의 의견을 가지면 오히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71명의 회원 중에서 소수파 의견을 가지면, 너도 갈릴리 사람이야? 너도 예수 믿어? 너도 예수당이야? 이런 소수파로 내몰리는 듯한, 우리 지위를 위협하는 것 같은 무서운 편견들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가 니고데모를 생각하면서 견딜 수 있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갈릴리는 종교권력자들에겐 편견으로 정죄당했고 멸시당한 땅이었지만 갈릴리적 토양과 아우성에서는 소작인들이 매를 맞는 곳이었고 채무당한 노예들이 감옥에 끌려가서 매를 맞는 곳이었고,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 따라가야 하는 강제노역에 많이 동원되는 사람들입니다. 겉옷도 빼앗겼고, 채무 때문에 겉옷을 빼앗깁니다. 일수를 얻어 썼는데 그 일수를 갚지 못하면 겉옷을 빼앗겨서 그 다음날 일수 갚고 나서 겉옷을 빼아깁니다. 예수님 산상수훈에 보면 겉옷을 빼앗기는 사람 이야기, 오리를 가면 십리를 강제로 가는 이야기, 재판을 받아서 옥리에게 붙들려서 돈을 한 호리라도 갚지 못하면 풀려날 수 없는 죄수의 몸이 된 농민의 이야기, 산상수훈 자체 안에 예수님이 봤던 갈릴리 사회전모가 다 드러납니다. 산상수훈을 사회비평적으로 읽어보면 다 드러납니다. 오리를 걸어가는 사람 이야기, 겉옷을 빼앗기는 사람 이야기 전부다 갈릴리입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면속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름 속에서 우리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었다가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갈릴리적 삶의 저항을 주목하고 응시하면서 갈릴리지역과 갈릴리에서 일어난 그 일과 내 일이 하나가 되야만 위대한 인물이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물이 되고,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 구미시 봉산리에서 불산이 터져나왔습니다. 불산이 터져나오는데 우리나라 행정기관이 너무 잘못합니다. 금융통화위원이 부산저축은행 사태를 일으켜서 서민들의 돈을 다 잃게 만들었죠. 우리나라 환경부 장관은 4주만에 갔습니다. 이주를 해야 합니다. 1312마리의 소가 불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300여명이 2차 감염이 됐습니다. 슬픕니다. 이런 것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응시해야만 환경운동가가 나오고, 녹색정치가 우리나라 현장에 들어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환경문제가 정치적 아젠다가 되기에는 너무나 모자랍니다. 결론적으로 좀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예수님이 그렇게 험한 사람들과의 대면에서 멋있는 예수님이 나왔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가 거친 삶의 현실을 피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 같은 착한 마음, 하나님 아버지께 파송당한 맏아들의 마음, 독생성자의 마음을 품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흠모하고 찬양하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나오셔서 갈릴리 출신인걸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는 갈릴리를 싫어합니다. 우리는 8학군을 원합니다. 우리는 잘 사는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교제를 이루기 원합니다. 우리는 겉옷을 빼앗기는 사람, 오리동안 붙들려서 강제노역에 참여해야 하는 비참한 무지랭이급 인물들과 한통속이 되기 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받았고 서울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다시 한 번 갈릴리로 보냅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이 우리를 보내는 현장에 가서 일촌되게 하시고, 갈릴리적 토양에서 머금은 흙과 눈물을 만나게 하셔서 우리가 주님 닮은 제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우리나라가 연예오락 스포츠인들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게 하지 마시고 지성인이 지배하는 나라, 학문의 사람들, 도덕과 윤리적 이상이 가득찬 젊은이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는 주체가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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