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2부 예배-요한복음 8:21-30
(하나님 아버지의 도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도제라는 말은 maestro 거장 master의 기술을 직접 가까운 거리에서 모방하며 maestro가 돼 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40년간 여호수아를 훈련시켰는데 여호수아가 모세의 도제가 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도제가 됩니다. 도제는 특징이 모방을 통한 창조입니다. 모방하는 사람이 창조하는 겁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마병과 병거처럼 이스라엘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세를 이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갈랐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반열을 가진 엘리야와 엘리사도 요단강을 갈랐습니다. 그래서 도제는 모방을 통해 창조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너무 독특한 분입니다. 종교인들의 말투가 아닙니다. 종교인의 말투는 겸손합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도발적입니다. 말씀을 막하십니다. 이 분을 보고 겸손하다고 말하기에는 특히 스토아철학의 관점에서 세네카의 관점에서 예수님은 겸손하다? 겸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단 손을 잘 안 씻으셨기 때문에 교양미도 없으셨고, 안식일에 밀밭서리를 하셨기 때문에 문명인의 규범도 비교적 자유롭게 무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단순히 안씻은 분이 아니라 손을 왜 안 씻으냐고 하시니까 말씀으로 실력으로 압도하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면서 논쟁도 벌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강력한 스크럼으로 돌파하십니다. 예수님은 문리학 하신 분입니까? 예수님께서 공부만 많이 하셔서 책상물림처럼 되셔서 확 밀면 넘어지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노동자의 독특한 아우라가 있어서 지금 나사렛에 가보면 절벽이라는 데가 있습니다. 나사렛 동네에 차를 타고 가보면 예수님을 떨어뜨리려고 했던 큰 절벽이 두 개 있습니다. 나사렛을 지나갈 때 예수님을 끌고 갔던 나사렛 지주들의 절벽이 있습니다. 그 절벽에서 만일 예수님을 민다면 바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스크럼을 푸시고 유유히 걸어가시면서 누가의 찬탄을 자아내십니다. 예수님의 멱살을 잡고 끌어가려던 린치를 가했던 사람들을 돌파해나가시는 모습을 누가복음 4장은 묘사하죠.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 아니고 인습적으로 매우 사람이 손쉽게 approach 를 받는 접근할 수 있는, 쉽게 말해 사인 받기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좀 까칠하신 분이시고, 도시 남자는 아닌데 어쨌든 까칠하십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놀라운 것은 인근의 질서를 볼 때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신적 담대함이 있습니다. 실제로 가문과 출생, 그가 살던 동아리가 매우 비천하다면 세상에서 당당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거의 전인적으로 이탈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이 겸손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육체노동을 하셨습니다. 순회목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신학박사들과 논쟁을 하는데 그 논쟁에서 절대로 지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 당당함은 어디서 왔을까? 예수님의 겸손하다고 말하기 힘든 비범한 대담성, 과감성은 어디서 왔을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대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그대로 한다고 말하는 예수님의 증언을 청취해야 합니다. 이것 외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보고 배운 것을 내가 그대로 한다는 예수님 말 외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강력한 대담함과 인습을 초월하는 돌파력을 가지고 말씀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를 보내신 이’ 요한복음에서 너무 많이 나오는 하나님의 별칭입니다. 얼마나 많이 나오냐? 요한복음 3장 34절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4장 34절 ‘나를 보내신 이’ 5장 24절 ‘나 보내신 이를’ 30절 ‘나를 보내신 이’ 너무 많습니다. 한글 성경 펴서 ‘나를 보내신 이’를 한 번 찾아보세요. 대한성서공회에서 찾아보세요. 엄청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파송의식, 내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하나님께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행하다가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엄숙한 사명자 의식이 너무 강했습니다. 그런 사명자 의식이 너무 강한 것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 하늘에서 왔다는 말은 형이상학적인 신화적 표현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왔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해하기 위해서 철두철미하게 복종하며 죽음까지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예수님의 자기의식을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이사야 55장 10-11절입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입에서 나간 말씀입니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이게 정확하게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요한복음 8장 29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요한복음 8장 29절과 이사야 55장 11절은 거의 축자적으로 같습니다. 예수님 머릿속에는 나는 하나님께 파송 받은 하나님의 독생자다, 나는 헛되이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사명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은 이단교주가 하는 말과 다릅니다. 이단교주들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형이상학적 무지를 이용해서 돈을 갈취하거나 집안을 거덜 내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말을 쓸 때 이런 일반종교인들과는 다르게 씁니다.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은 특권과 계보를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겠다는 결기어린 결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은 순종의 결심을 극한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은 철두철미하게 나는 아버지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려는 결기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런 의식으로 가득 찼을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경험을 함께 하기 위하여 수도원적 은둔, 고행, 또는 신비주의적인 경험들을 추구했을까요?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금식했다는 것을 빼고 광야에 오랫동안 잠적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의 일상생활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경험의 연속이었을 가능성 자체가 높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상생활의 경험을 로렌스 형제가 썼던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에서 약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과 데이비드 브레너드의 일기라는 책에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심층심리가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심층심리는 영혼의 질량과 부피가 확 작아집니다. 엄청 작아집니다. 작아졌다가 어느 순간에 엄청 부풀러져 있는 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어떤 역설적 경험을 하느냐? 자기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경험과 함께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어두운 밤을 지내서 엄청 큰 사명자 의식을 갖는 겁니다. 이사야 6장 5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극한 경험입니다.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경험에는 첫째 자기 영혼이 엄청 축소돼서 소멸된 것 같은 옛 자아의 죽음이 있고 새로운 자아의 탄생이 있습니다. 새로운 자아의 탄생은 내가 세상에 파송 받았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이익을 누리고 출세를 하고 뭔가 더러운 욕심을 탐하는 삶을 영원히 끝내는 겁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피파송의식입니다. 파송받은 자의 의식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나를 보내신 이’ 라는 표현을 그렇게 많이 쓴 이유, 3-8장에서 찾다가 ‘나를 보내신 이’를 너무 많이 찾아서 그냥 왔습니다. 너무 많아서요. 집에 있을 때 찾아보세요. 개혁성경 대한성서공회에서 따다가 하나의 파일로 묶어서 ‘나를 보내신 이’를 치면 쫙 나옵니다. 빨간 글씨 쳐서 읽어보세요. 예수님 안에 있는 ‘나를 보내신 이’ 의식은 바로 하늘에서 났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뜻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이사야 55장 10-11절의 하나님 뜻을 성취하는 기쁨을 내 삶의 연료로 삼는다는 듯입니다. 이사야 55장 10절에 나오는 그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8장 29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게 예수님의 당당함의 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당당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아시죠? 결코 세상에서 당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료적 위계와 질서 속에 가면 우리 영혼이 축소가 됩니다. 장군 앞에 가면 영관급 장교가 축소가 됩니다. 교수 앞에 가면 조교가 영혼의 70%가 축소됩니다. 강력한 독재자 남편한테 아내가 50% 축소된 영혼으로 삽니다. 이렇게 살죠. 이게 사는 방식이지, 100% 속에 있는 말 다 하고 살면 세계대전이 곳곳에서 벌어지죠. 우리는 그렇게 못 살죠. 저도 교목실장하면서 저한테도 관료적 온순성이 생겼습니다. 함부로 말 안하는 것, 두 시간짜리 회의에 참석해서 계속 끝까지 있는 것은 저한테 없는 본성인데 제가 어느 새 3년째 계속 2시간 회의를 참석하면서 너무 심심해서 아내한테 문자도 보내기도 하고, 그래도 회의가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이걸 저항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엄청난 관료적 온순성, 10년 만 살면 거의 내시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센터가 없는 거예요. 예언자들은 회리바람을 타고 다녀야지, 장소가 있으면 장소의 권력 기득권에 매이기 때문에 영적인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큰교회 목사님에게 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느냐? 이미 그 자체가 거대한 권력이기 때문에 말씀을 안 주시기 때문에 큰 교회 목사님이 되면 전부다 설교를 베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안 주시니까, 작은 교회 목사님들은 사람은 적은 반면에 엄청 은혜로운 말씀을 많이 받습니다. 다만 들을 사람이 적은 거죠. 지금 오정현 목사님은 큰 교회를 하기 때문에 저보다 늘 불리합니다. 항상 만나면 설교 준비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교인은 없지만 새벽마다, 오늘도 2시 반에 깨서 은혜로운 말씀을 많이 받았습니다. 교인 없는 저는 새벽에 두시 반에 깨워서 은혜를 주시고, 교인이 7만 명인 목사님께는 은혜를 안 주시고, 갈멜산의 초장이 마릅니다. 갈멜산의 초장이 마른다는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마르지 않는 초장이 마를 만큼 영적기근이 심하다는 말이에요. 큰 교회 목사님들은 갈멜산의 초장이 마르는 아모스 1장 상태가 와 버려요. 왜? 하나님은 거대한 종교 권력을 채워주고 축복해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안 주시고, 기근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거대한 센터, 하나의 institution, 제도, 하나의 권력기관, 관료적 첨탑들, 이 모든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동역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동역하려면 예수님처럼 센터를 만들면 안 됩니다. 베드로 집을 예수치유센터, 이렇게 상담자 받으면서 온라인으로 입금하세요, 하면서 거대한 관료조직을 만들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계속 걸어다녔습니다. 도상의 존재가 됐습니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두로와 시돈과 저 요단강 건너편을 계속 다니셨습니다. 이렇게 다녀야만 영이신 말씀과 소통합니다. 우리가 거대한 관료집단, 권력과 예산이 확보된 안정된 기관 안에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아침마다 말씀을 들으셨는데 이사야 50장 4-5절을 보면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가난한 목수이신 예수님께서 아침마다 귀를 여심을 당했고 깨우침을 당했고 학자들처럼 알아듣게 하시고 학자의 혀로 곤핍한 영혼을 지탱시키고 서포터하고 위로할 수 있는 말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침과 낮입니다. 예수님은 아침마다 도제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웠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감화 감동받으면서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사야 50장 4-5절은 메시야의 노래거든요. 예수님께서는 아침마다 내 귀를 여시고 나를 도덕적으로 강력한 담력으로 가득 차게 하시니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나를 핍박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내 등을 맡겼지만 내가 뒤로 물러나서 내 순종을 철회하지 않았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일상의 현장에서 아침마다 순종을 누적시킵니다. 그 순종을 누적시키게 하기 위해서 아침마다 귀를 항상 열어주셔서 알아듣게 하시고 말로 곤핍한 영혼을 위로할 수 있게 만드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귀를 여시는 훈련과 혓바닥을 놀리는 말 훈련을 아침마다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훈련은 토라를 낭독할 때입니다. 토라를 큰소리로 낭독하세요. 토라를 큰소리로 낭독하고 계속 암송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경험이 옵니다. 실제로 14세기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엄청 당했거든요. 유대인들이 박해를 엄청 당해서 뇌가 다 탈장을 했습니다. 기억력을 다 잃었어요. 한 랍비가 그 총명하던 랍비가 기억력을 다 잃었어요. 그 제자들까지도 다 멍청해졌어요. 한 가지밖에 기억을 못해요. 22개의 알파벳밖에 기억을 못해요. 고문을 당해서 다 잊어버렸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신비를 주셨느냐면 알파벳밖에 외우지 못하는 히브리 랍비에게 알파벳을 외울 때 하늘이 열리게 만드셨어요. 알파벳 외울 때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지적능력이 어린 이아가 돼버린 고문당해서 뇌가 망가진 랍비를 살리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가 엘리위젤의 책에 나옵니다. 엘리 위젤이라는 사람을 알죠? 노벨문학상 받았죠? <불꽃 속에 연단 받는 영혼들>이라는 책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하나님께 귀를 열어놓고 말 훈련, 혀 훈련을 받는 예수님처럼 우리가 일상의 현장에서 아침마다 하나님께 귀를 열어 놓고 말을 배운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이 당당함은 영적인 기쁨에서 오는, 영적면류관을 쓴 사람의 당당함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돈 없으면 당당하지 못하잖아요. 돈 없어서 당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령한 말씀이 가득차야 합니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 전화번호 몇 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으려면 돈 많은 사람 전화번호를 알고 있거나, 우리가 옷을 잘 입는 사람들은 저 옷이 얼마짜리인지 다 안다고 합니다. 저만 몰랐습니다. 대부분 제가 산 옷을 어디서 샀는지 알더라고요. 제 주변 교수들이 대개 차를 다이너스티나 에쿠스를 탑니다. 나이 저만큼 된 교수들은 전부 다 그걸 탑니다. 제 옷을 어디서 샀는지 알더라고요. 이마트에서 샀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몰랐는데 너희는 어떻게 그걸 아느냐? 영분별의 은사가 있느냐? 영분별 은사가 아니라 옷감은사가 있다고, 만져보면 안 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벌거벗은 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래도 전혀 꿀리지 않고, 주 예수를 믿으시오, 에쿠스를 타는 사람들은 연말에 마담한테서 문자를 받습니다. 오빠 잘 있어? 그러나 저는 그런 문자를 안 받습니다. 저는 대부분 가난한, 나보다 항상 소득이 낮은 사람과 살았지 나보다 잘 사는 사람, 나보다 옷 좋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내가 그래도 양목사보다는 약간 만 원 더 비싼 옷을 입고, 항상 나보다 못한 사람 가난한 사람과 살았기 때문에 내가 항상 최고를 입었다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만나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과 만나면 성령충만하지 않고 내 영혼이 축소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냉정할 정도로 위계 질서적입니다. 소득 차이 다 있습니다. 지금 아이들 수능점수까지 우리의 신분이 됩니다. 아이들 수능몇등급인가에 따라 아버지 등급도 같이 나갑니다. 이럴 때 우리가 예수님처럼, 육체노동자셨지만 그분은 아침마다 귀를 여시고 독생자의식을 가지고 도제처럼 배우고 느끼고,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행하다가 그처럼 찬란한 당당함을 가지시고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신학박사들 모든 산헤드린 회원과 논쟁을 벌이시는 물러서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인생은 각기 양처럼 제 길을 가는 죄인들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버리는 절대다수의 죄인, 마음대로 살아버리는 인류의 종말에 재난을 초래할 것 같은 악랄한 짓을 일삼는 절대다수의 인간과 그걸 멈추려고 하는, 각기 제길로 가는 인류와 달리 좁은 길로 가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면서 그 모순을 고스란히 감수하는 선량한 독생자급 인류로 나눠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한 그 모든 자리에서 순종을 누적시켜서 우리가 아는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갔다는 말이 하는데, 그 세상 죄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죄를 지고 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 42장 6절에 보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계명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열방의 빛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열방의 빛으로 사는 걸 실패했던 그 지점에서 내가 이사야 42장 6절에서 말한 열방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라고 말했습니다. 각기 제 길로 가서 세상을 재난스러운 종말로 치닫게 만드는 죄악된 아담인류와 각기 제 길로 가는 양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아사셀의 염소처럼 세상 죄를 지고 하나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 예수님과 인류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께 아침마다 순종을 바친 그런 자들의 희생을 통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자들의 죄를 담당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너무 부조리한 방법이죠? 죄 있는 사람의 죄를 죄 없는 사람의 어깨에다 짐 지워주고 죄 있는 사람의 죄를 용서해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은 각 시대에 독생성자급 어린양의 피의 정족수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 시대의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만큼 많은 독생성자급 어린양들이 또 필요한 거죠. 우리 모두가 한국의 중심죄악에 참여하지 않는, 탐욕과 음란과 쾌락과 독점과 배타심, 우리 한국사회를 양극화시키는 이런 죄에 참여하지 않는 순하고 착하고 똑똑하고 매우 젊고 싱싱한 독생성자급들이 계속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길로 올 수 없다, 각기 제 길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어린 양이 가는 그 길은 불순종한 아담의 자손으로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은 신화적 표현이 아닙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죽을 각오가 돼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 뜻을 행하다가 죽어서 들리는 그때에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죽음을 죽었음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28절,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 들린 후에 사람들은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죽음을 죽었음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인자를 든 후에’라는 말은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처럼 각기 제 길로 가는 양들의 죄를 뒤집어쓰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십자가에 매 맞고 고초를 당하면서 들리는 것,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과 바른 화해를 누리도록 평화를 누리도록 죄 없는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는 것, 이 어처구니없는 방법에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 세상에 왜 순결한 사람이 필요할까요? 죄 없는 독생성자급 인류가 우리시대에 필요할까요? 왜 우리시대의 젊은이 중에서 어린양과 같은 흠 없고 점 없는 젊은이, 죄로 오염되지 않고 방사능에 피폭되지 않는 양심에 피폭되지 않은 사람이 왜 필요해요? 우리 시대의 중심죄악을 예수님처럼 대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대속을 재현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말해서 대속은 예수님 혼자 하셨는데 그 예수님의 대속을 재현하기 위한 어린양이 필요한 겁니다. 원래 독생자는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독생자의 죽음을 재현할 representation 할 어린양들이 일정량 필요합니다. 그래서 순결한 자, 죄 없는 사람이 동시대 죄를, 73년생은 73년생 중에서 독생자가 나와야 합니다. 80년생은 80년생 중에서 독생자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독생성자급 순종을 일삼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그런 독생성자급 성자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들리는 그 순간에야 저 죄 없는 사람의 고난과 고초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독생성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우리 예수님은 왜 들려야 합니까?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이끌기 위하여, 원래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는 이런 결속이 있었거든요. 강력한 결속이 있었거든요. 영원한 결속, 예수님께서 해체당하시고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 수백억광년 멀리 떨어져 있던 죄인들이 예수님이 누리던 결속감의 자리에 죄인들이 막 쇄도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과 누렸던 엄청난 영적연합을 부정당하고 박탈당해서 저 음부로 떨어집니다. 음부로 떨어지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누렸던 엄청난 흡인과 견인과 화해와 일치가 죄인들 사이에 무조건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역사하여 죄인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막 천국으로 쇄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이 누렸던 엄청난 화해와 화평을 누리도록 막 쇄도합니다. 인자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그 순간은 천길 만길 저주 받아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막 올라가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떨어지는 그 순간에, 이건 삭개오가 있던 수치스러운 나무, 삭개오가 있던 심판받던 나무에 예수님이 올라가고 삭개오가 하나님께로 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삭개오가 죄인의 자리에서, 저주받은 자리에서, 매국노의 자리에서, 탐욕과 우상숭배의 자리에 있다가, 벌 받는 그 자리에 있다가 삭개오의 비난을 예수님께서 받자마자,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삭개오를 아브라함 자손이라 선포하는 순간 아브라함 자손이 되고 아브라함 품안으로 들어가고 예수님은 그 순간 삭개오가 받던 정죄를 대신 받았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는 순간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은 하나님 품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한 적개심의 돌덩어리들은 예수님 머리를 향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대신 벌 받는 순간은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하나님 품안으로 불러들이는 시간이고, 삭개오를 하나님 품안으로 불러들이는 시간입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첫 번째 들림은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심, 두 번째 들림은 부활하심, 세 번째 들림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으셔서 높은 보좌에 다시 올려 섬기게 되심, 이 세 번째 들리심 때문에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성령이 오셨네, 오순절 성령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음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객관적 사건입니다. 제가 요한복음에서 계속 이걸 강조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전 세계 만민에게 시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미국과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와 중국에 동시에 나타나실 수 있는 영이 되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지 않으면 예수님은 시공간에 제한되셔서 팔레스타인에서만 3차원에서 활동하셔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3차원공간을 훨훨 벗어나셔서 성령을 만민에게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동시다발적으로 ubiquitous 한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ubiquitous 메시아가 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임재를 느끼는 그 순간에 중국 광둥 성에서도 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예수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만민을 예수님께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이끌어주셨기 때문에 교회로 모이게 되신 겁니다. 높이 들리신 인자가 여러분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걸 느끼십니까? ubiquitous 하신 예수님, 온 세상에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시고 온 세상을 동시다발적으로 사랑하셔도 다함이 없고, 분할될 수 없는 전체의 사랑, 그게 바로 예수님의 사랑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몸에 부어주실 때 일어나는 겁니다. 원래 인간의 사랑은 분할됩니다. 절대로 삼각치정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왜? 인간의 사랑은 분할되는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A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B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한분할이 가능한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요한도 사랑하시고 베드로도 사랑하시고 둘 다 100%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ubiquitous 한 보편적이시고 여기도 계시고 저기도 계신 하나님께서 인자가 들렸을 때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일중일 동안 살면서 하나님께로 이끌어주시는 성령을 받으시면서 들리신 인자가 여러분을 인도하고 지도하는 한 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가향교회에 오신 여러분, 들리신 인자가 여러분을 일상생활에서 매우 당당하게 매우 지혜롭고 굳세게, 피조물의 비릿한 영향을 받지 않고 천상의 위엄을 갖춘 하나님 자녀다운 고귀한 품성을 매일매일 축적시켜주시고 매일매일 쌓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높이 들리신 인자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주셔서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나님과 누리던 엄청난 평화와 영생의 교제가 주님이 저주 받은 그 자리에 우리가 그 속으로 흡입돼 감으로써 우리가 대속의 은혜를 누렸습니다. 하나님 일주일 동안 우리 형제자매들이 높이 들리신 인자의 사랑으로 하나님께 견인되어가며 끌려가고 부양되고 예인되어 가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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