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 요한복음 8장 41-50절 (아버지와 아들, 복종과 상속)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오늘 본문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교회의 세습, 또는 영광의 세습으로 특징지어지는 맥락을 고려하면서 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김정은 김정일, 박근혜와 박정희 관계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아들은 아버지를 상속할 수 있는 본래적 기득권을 갖고 태어납니다. 아들은 경쟁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버지의 영광과 특권을 상속합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 아들됨의 이해는 특권과 영광의 상속자였습니다. 이사야 61-65장은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다시 말해 여호와께 복 받은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제단에서 섬기면서 이방인들이 만든 양식을 먹고 사는 특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하나님 아들됨의 특권입니다. 하나님 아들됨의 근본적인 이해의 특징은 모든 열방들이 시온으로 몰려옵니다. 시온을 신성화하면서 시온에 사는 사람에게 한껏 부러워하면서 찬양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볼 때 용납할 수 없는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됨에 관한 이해가 생겼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격려하면서 이렇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예언들을 선포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이것은 굉장히 독특한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없이 영적으로 다운돼 있을 때 주신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 안에는 약간의 진실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재물을 가져와서 실제로 이방인 개종자들이 재산을 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에 돈을 바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포로기 이후, 스룹바벨 이전 성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이렇게 특권으로 가득 찬 각질화된 전통이 되는 것은 또 다른 것입니다. 이런 오해의 소지가 있는 본문은 오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각질화되고 교조화되고 진리를 대적하는 전통이 돼버릴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전통이 처음 생겼을 때 잘 해석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통이 각질화되면서 진리를 대적하는 수준까지 간다면 문제가 됩니다. 유대인들의 특권의식, 한 번 보십시오. 33절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이해가 안 되는 말이죠?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단 말이에요? 바벨론 포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 당시까지 약 500년 내내 종이 됐다고 기록돼 있는데, 왜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이라고 하는가? 이건 굉장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성전근처에 있는 유대인제사장이라는 뜻입니다. 성전근처에 있는 유대인 제사장들은 한 번도 종이라고 느낄 수 없을 만큼 특권적 지위를 보장 받았습니다. 첫째, 바벨론 포로 이후 페르시아가 들어서서 여호와의 성전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줬습니다. 마케도니아 그리스 제국이 할 때도 예루살렘 신성특별구역은 제사장들의 정치적 자율 역량이 존중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가 예루살렘 특별행정구역을 이전했습니다. 로마주둔군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신성한 특별구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를 줬습니다. 그래서 종이 된 적이 없다는 말은 맞는 겁니다. 제사장 또는 제사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종이 된 적이 없고, 항상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특수신분을 이용하면서 아브라함 자손답게 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한 이유는 바벨론 포로귀환부터 로마제국까지 약 500년간 예루살렘 신성특별구역에 살았던 제사장 직급, 제사장 계층 사람들이 누렸던 제한적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가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영생은 상속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자손은 영생을 얻는 게 아닙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5절 이하에 한 젊은 사람이 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상속하다는 말입니다. 영생을 상속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영생은 이미 주어진 선물입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은 영생을 상속하는 겁니다. 아브라함 자손들은 영생을 상속하게 예정돼 있기 때문에 죽어서 그들의 조상에게 돌아갔다는 말은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3장 36절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이 말은 무엇이죠? 솔로몬도 열조로 돌아갔어요. 히스기야도 열조로 돌아갔어요. 전부 다 영생의 상속자가 됐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죽어서 조상에게 갔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성경 맥락에서 죽어서 조상에게 돌아갔다는 말은 영생 상속 공동체로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이 이미 확보해놓았던 영생공동체에 자동 엔트리가 보장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다, 망실된 자다, 잃어버린 자다, 이런 말이 제일 무서운 말입니다.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다, 적몰된 자,
호적에서 파진 자, 망실된 자, 누가복음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장 망실된 자 삭개오에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렇게 말하죠. 아브라함 자손이 됐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확보해놓은 영생을 누리는 자가 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구원론은 아브라함 영생에 참여하느냐, 참여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삭개오 같은 민족반역자급 인물은 망실된 자입니다. 호적에서 파진 자, 호적에서 적몰된 자, 그는 영생상속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당시 구원론을 많이 수정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영생을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 자손의 범위를 이방인과 여자와 사마리아인 모두를 포함하여 굉장히 포괄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만일에 기독교인만 가게 된 천국의 범위를 넓혀서 웬만한 사람 다 천국 간다고 말하면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회교도도 천국간다, 불교도도 천국간다, 이건 유대인들의 적개심 어린 반응을 자아내는 예수님처럼, 천국의 범위가 넓다고 주장하면 그건 굉장히 돌을 맞을 짓이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는 아브라함 자손으로서 누려야 할 배타적 특권의식 때문에 내가 가진 구원을 다른 사람도 가진다고 생각하면 금방 내가 받은 예수 믿은 생활이 헛것이 된다고 느낍니다. 제가 옛날에 목회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혹시 천국 갔을 때 터번을 쓴 사람이 왔다 갔다 해도 놀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 커서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특수종교에 속한 사람을 구원했다 하더라도 거기서 데모를 하면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은 마음씨가 무척 좋기 때문에 우리를 충분히 실족시킬 수 있다, 그랬더니 어떤 여자교우가 질문합니다.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힘이 다 빠지네요, 그러면 우리가 불교보다 나은 게 무엇입니까? 불교도는 천국 못 갈 걸 믿고 자기가 예수를 믿었는데, 불교도가 천국 가는 것과 집사님 구원과 무슨 상관이에요? 집사님 구원을 잃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천국 들어간다는 데 무엇이 기분 나빠요? 훨씬 좋지 않습니까? 좋지 않습니다, 기분이 일단 나쁘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그건 천국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는 거예요. 불교도까지 오고, 터번 쓴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 분명히 천국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더라고요. 나는 그렇지 않는데요. 불교도도 와 있고 심지어 코스타리카의 부두교 믿는 사람도 구원 받아 왔다 갔다 하면 하나님의 착한 마음씨 때문에 내가 놀랄 것 같은데요. 아니요. 구원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어떤 구원을 원합니까? 기독교인만 가는 구원이요, 그분은 질문을 했지만 숱한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씨가 유대교가 말한 것보다 엄청 좋을 뿐만 아니라 무차별적 구원을 하기 때문에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활동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무차별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구원은 인간이 강구할 수 있는 대책이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무차별적인 구원의 선포, 무차별적으로 무조건적으로 한 없이 착한 하나님의 선포, 심지어 사마리아 사람까지도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는 도발적인 구원론,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놓고 안식일의 참된 예배를 회복해주신 예수님의 행동이 그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유대인의 구원론에 의하면 일어나면 안 됩니다. 38년 된 병자는 저주 받은 인생이고 그냥 죽어야 합니다. 이 지상에서 저주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무차별적으로 구원을 선포했고, 마음씨가 너무 좋으신 하나님, 종교와 종파의 차이를 초월하여 엄청 마음씨가 좋은 하나님을 선포하자마자 그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한 예수님이 마음씨가 매우 불량하고 완악하고 폐쇄적인 종교집단과 충돌한 겁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48절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귀신들렸다는 말과 사마리아인은 같은 말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미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는 협상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을 마귀 자식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을 이렇게 미워하는 집단이 지상에서 딱 한 그룹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미워하는 것 보니까 사마리아 사람 또는 당신은 귀신 들린 사람이다, 귀신들렸다고 서로 주장하는 것은 상대성원리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귀신 들렸다고 주장하려면 진짜 귀신들렸거나 말하는 그 사람이 귀신들린 것이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라고 말했습니다. 40절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아브라함, 성경 창세기 12-2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유대인이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큰 차이는 구전 아브라함 율법이 있고 랍비문서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지금 논쟁 중에 있는 유대인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구전 아브라함 율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하나님께 선택받았겠는가? 그걸 탈무드라고 합니다. 탈무드라고 하는 이스라엘 율법학자들의 해석편찬 총람이 있습니다. 모든 권위 있는 랍비들의 해석집, 주석섭 그 총람이 바로 탈무드입니다. 개신교식으로 말하면 우리시대의 권위 있는 목사들의 설교묶음이 탈무드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해설은 꼭 같을 필요는 없지만 권위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집, 구두 율법집, 성경텍스트에는 없지만 매우 기교한 해석까지 총동원된 랍비들의 이스라엘 성경 해석집, 랍비들은 구전율법과 문서율법을 다 가졌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에 적혀 있는 율법은 구두로 전파된 율법의 10분의 1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유대교입니다. 10분의 9에 관한 해석과 10분의 1인 적혀 있는 해석을 합한 것을 토라라고 말합니다. 10분의 9에는 어떤 내용이 있느냐? 아브라함이 매우 믿음이 좋았다고 말하고 아브라함은 우상숭배 지지자였던 데라와 싸움을 하면서까지, 아버지와 갈등하면서까지 아버지를 뿌리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주장합니다. 세계 만민의 조상이 될만한 모든 사람을 다 불렀는데 유일하게 순종한 사람은 아브라함밖에 없었다, 이렇게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공로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구전율법, 랍비들의 문서입니다. 예수님은 이 책을 안 읽은 겁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를 나쁘게 해석하는 모든 서류를 읽지 않은 겁니다. 그에 비해서 유대인들은 그 서류를 많이 읽은 겁니다. 여러분 나쁜 책을 읽지 않는 것도 큰 은혜입니다. 나쁜 책을 읽고 유대인의 구전율법을 이렇게 많이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 예수님과 같은 순백한 담백한 자기희생적 하나님 이해가 나오지 않습니다. 탈무드와 랍비문서 때문에 유대교가 이렇게 경화되고 각질화되고 잘못됐습니다. 그 문서 이른바 탈무드를 인수분해하면 적혀 있는 문서로 된 율법해석 플러스 10분의 9에 해당하는 구전율법입니다. 10분의 9라고 하는 이 부분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보다 훨씬 기괴망측한 내용이 많다는 것, 대부분의 내용은 공로주의적 해석이 많다는 것, 대부분의 내용은 극단적인 선민사상이 많다는 것, 대부분의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멸시를 정당화하는 해석이 많다는 것, 그걸 예수님께서 읽지 않은 겁니다. 타종교를 멸시하는 해석을 많이 읽은 사람은 참 하나님을 모릅니다. 정통해석은 기독교복음이 들어가기 전까지 일반 종교가 갖고 있는 장점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해석을 타종교 안에서 찾아내려는 종합주의적인 입장이 올바른 해석입니다. 눈과 비와 바람은 무릇 보편적으로 주셨죠? 네팔도 가니까 북두칠성이 맨 위에 있더라고요. 대한민국에서도 북두칠성이 위에 있죠? 네팔도 똑같아요. 모든 나라의 어린이들은 달과 태양은 자기 하늘위에 떠 있다고 믿어요. 이 말은 하나님은 세계만민에게 똑같은 동등한 거리에 접근 가능한 곳에 있다는 말이에요. 세계만민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똑같이 경험하기 때문에, 세계만민들은 선함과 악함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비와 눈과 햇빛을 똑같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물리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편적인 사랑을 베푼다면 영적세계에서도 하나님은 보편적인 자비를 베풀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 보편적인 자비와 하나님 지혜의 일부가 전통문학 전통종교 전통철학 안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많다는 거예요. 이게 정설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고 기독교만 옳고 힌두교가 우상숭배라고 하고, 물론 힌두교가 우상숭배 요소가 있죠. 그러나 기독교의 우상숭배요소도 타종교 못지않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천번제도 완전히 우상숭배입니다. 일천번제라는 것은 일천 마리 번제라는 뜻입니다. 일천 마리 번제는 일천 마리 제물을 드린 솔로몬의 제사, 이런 뜻인데 그걸 일천 번 제물, 번을 태울 번(燔)자가 아니라 숫자 헤아리는 번으로 바꿔서 일천 번제, 점점 만으로 가는 수혈적 헌금을 해서 365일 마지막에 왕창 헌금을 해서 하나님 뜻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미신입니다. 제일 첫날은 천 원 합니다. 둘째 날은 이천 원, 공차가 천입니다. 셋째 날 삼천 원, 3년 될 때 엄청 큰 헌금을 바칩니다.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는 것이 일천 번제 헌금입니다. 교회가 수준이 낮은가 아닌가 보려면 그 교회 안에 일천번제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일천 번제가 있으면 사돈 팔촌까지 그 교회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그걸 믿으면 뭐든지 다 믿을 수 있습니다. 교회도 타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굉장히 마음씨가 넓은 분이고 세계 만민을 동시다발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유대교적 종교적 아집으로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교적 입장이 모든 종교들 입장입니다. 악의에 가득 차 있는 배타성을 주장하는 종교들은 유대교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력화된 종교, 기구화된 종교, 제도권화된 모든 종교와 대결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 하나님은 이런 기구화된 종교전통이 감히 다 포섭할 수 없을 만큼 너무 크신 분이고, 너무 눈부신 자비로 가득 찬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예수님 입장은 모든 지방종교 토착화된 교황종교 모든 권력화된 제도종교와 이런 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특권의 관계가 아니라 아브라함 자손은 특권의 유무가 아니라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주장할 때 나는 특권의 강요가 아니라 순종하는 걸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잘 보아라, 내가 특권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항상 아버지 뜻에 철저한 복종을 하기 위해서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라고 말합니다. 특권의 강요가 아니라 특권의 포기를 통한 순종,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맥락이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라고 부를 때, 이런 사상이 놀랍게도 칼릴 지브란이라는 사람의 시에 나옵니다. 이런 기독교 사상이 놀랍게도 아랍 시인 칼릴 지브란이라고 하는 사람의 시에 나오고, 이런 사상이 놀랍게도 간디의 입에서 나옵니다. 아버지 아들이라는 의미가 자기를 살신성인적인 희생에 드리는 의미로 해석한 것은 놀랍게도 기독교 문명권에서 나온 게 아니라 엉뚱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우리를 경악에 빠뜨리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은 희생과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기득권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내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하는 것은 내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 뜻이 내게 더 많은 희생을 원할 때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은 자기부인의 극한 실험에 내 몸을 맡긴 자라는 뜻이다, 성령을 받자마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순간 나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아버지가 주신 쓴 잔을 마시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 아버지에 대한 모방과 추종과 동화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는 종말론적인 영광을 상속하게 된다, 지상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복종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순종 복종 동화 추종의 부담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가고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가면 아버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합니다. 그에 비해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아브라함 자손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귀의 자손이고 마귀의 욕심과 살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 이상을 원하면 마귀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누려야 할 욕망 이상을 누리기 위해서 타자를 증오하게 되고 타자의 생명을 빼앗기까지 합니다. 거짓말과 살상행위는 항상 같이 갑니다. 내가 과도한 욕망을 가지고 내가 욕심이 가득 찬 인생을 살게 되면 반드시 타자살해적 타자살상적 극한 야수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4대강은 원래 안 됩니다. 거짓말은 숱한 생명에 대한, 쌍용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이 계획되면 반드시 살상이 드러납니다. 오늘도 마귀는 암약합니다. 모든 거짓에는 살상, 살인이 있습니다. 살인은 존엄한 생명가치의 훼손과 박탈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귀를 우리는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는 어디에 암약합니까? 마귀는 종교집단 안에 암유합니다. 마귀가 가장 오랫동안 정체를 숨기면서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은 종교집단입니다. 종교가 가장 무서운 겁니다. 저도 이걸 알았으면 목사가 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했을 텐데 지금 제가 목사가 된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합니다. 컴퓨터 전공학자가 이미 컴퓨터로는 상당한 비즈니스 능력이 있는데 신학교를 가려고 한다면 정말 말립니다.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굉장히 믿음이 좋습니다, 당신이 지금 새벽기도 나오고 교회 중등부 아이들 떡볶이 사주면서 기타 치면서 훈련하면서 만인의 박수를 받는데, 신학교 들어가자마자 비참해집니다. 최후의 심판 전에 교인의 심판을 매주 받습니다.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 아니면, 그게 성직자인데, 왜 성직자입니까? 정말 성직자는 강권적인 부르심을 받거나 할 일이 없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부르신 직업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왜 신학교를 갑니까? 최후 심판 전에 교인심판을 받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신학교를 안 가길 바랍니다. 문제는 가면 갈수록 사람 구실을 못합니다. 마귀가 교회 집단과 종교권력 집단 안에 암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종교가 대부분 세상 사람에게 하는 것은 삼성화재와 LG화재랑 비슷합니다. 삼성화재 LG화재는 사후보험이 아니라 노후보험입니다. 죽을 때 보자, 교회는 쉽게 말하면 사후보험입니다. 죽을 때 좋은 데 가려면 보험 들라, 이런 식입니다. 지금 한국교회 같은 데서 천국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의도에 있는 조모 목사 이 사람은 항상 설교 시간에, 제가 어젯밤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끼게 때문에, 또 많은 목회자들이 자기가 기도 하는데 제3하늘을 봤다, 그렇게 말하면 거의 99% 사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 신비를 감추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헌금을 노리는 겁니다. 실제로 자기와 하나님 사이가 1촌적 연관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돈을 원하는 겁니다. 돈 이상 아무 것도 원치 않습니다. 제가 볼 때 거짓말 하는 목사다, 생명의 감가상각에 빠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도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그 사람의 헌금을 원하는 사람들은 교인이 많아야 해요. 정직하게 보면 사람을 많이 알수록 목사는 빨리 죽습니다. 적게 아는 사람이 유리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목사님들은 엄청나게 큰 교회, 한꺼번에 4만 명이 들어가는 교회를 짓는데 정신이상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감당할 사람들, 진실로 감당할 사람은 숫자가 너무 제한돼 있습니다. 그게 정직한 사람이고 정직함인데, 생명의 가치를 멸망시키고 훼손하면서까지 숱한 사람을 원하는 교회는 성령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사무치는 진실로 가득 찬 영입니다. 사무치는 진실이 가득 찬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듣게 만들고 깨닫게 만들고 순종하게 만드는 영입니다. 그건 매우 인격적으로 접근하는 영이기 때문에 인격적 접근이 불가능한 군중을 세워놓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겁을 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짓이 틈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하겠습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진실 때문에 계속 오해를 받으십니다. 귀신들린 자, 마귀의 자녀들과 논쟁을 하면서 예수님은 귀신 들린 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일종의 진리의 상대성이론을 경험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이 성령에 가득 찬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상대성 이론 경험입니다. 우리가 마귀에 지배를 받는 사람과 논쟁을 하면 우리가 귀신 들린 자라는 오해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런 논쟁에 빨려들지 않기를 바라야 됩니다만 이렇게 될 때 너무 실망하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유대인과 같은 종교권력으로 각질화된 집단과 이렇게 숨 가쁜 논쟁을 할 만큼 영력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는 누구와 논쟁할 수도 없는 것이고, 우리를 보고 마귀라고 하는 사람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순간에 이런 고독에 빠질 때가 있을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면 안 되고, 정말로 마귀를 분별할 수 있고 마귀적 확실성, 마귀적 정체성을 구분할 수 있는 영력, 영적분별력을 확보하는 게 필요합니다. 결론적으로 특권과 타자생명의 가치를 훼손하면서까지 하나님 아들됨을 과도하게 주장하면 그건 마귀에게 속해 있다, 하나님 아들됨을 희생과 봉사와 무궁무진한 사랑을 실천할 때만 아버지 하나님이라 부를 때 그 사람은 참 진리에 속했다, 성령에 속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이해하고 확실하게 해서 넘어가기를 원합니다. 이번 일주일 내내 오늘 이 본문 가지고는 은혜는 많이 안 나옵니다. 마귀의 말로 어떤 은혜란 말이 나옵니까? 저도 은혜란 말이 안 나오는데 아무리 하고 싶어도, 여러분이 마귀 아닌 걸 기뻐하십시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이 본론으로 힘들고 아마 다음 주에 다양한 은혜로운 권면이 나올 것 같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예수님께서 숨 가쁜 논쟁,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마귀 들린 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하나님 아들됨의 참된 가치와 본질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우리도 특권적 배타적 구원의식을 가지고 타자가 지옥 가는 것을 기뻐하는 배타적 구원론에 익숙해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도합니다. 사마리아 사람까지 귀신들린 사람까지 38년 된 병자까지 천국 갈 권리가 있다고 말했던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기독교의 모범인 줄 믿습니다. 인생 고난의 시궁창에 빠져서 생명의 가치를 박탈당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을 천국까지 인도하려고 하는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기독교의 전범인 걸 믿습니다. 주님 온 세계를 향해서 하나님의 보편적인 무차별적 사랑을 선포하도록 용기를 주소서. 주님 한국교회가 배타적 선민의식에 빠져서 타종교를 멸시하고, 타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 일으켜서 북한 동포를 증오하면서 존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증오의 심리학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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