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요한복음 8장 51-59절(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했던 아브라함)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
많이 추워진 날씨 속에서 가향교회 실내도 난방이 그렇게 튼튼하지 못해서 춥지만 노숙자 생각하면서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빨리 봄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강렬한 은총의 태양이 온누리에 퍼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인데, 요한복음은 굉장히 선문답 같은 본문이 많은 곳입니다. 선문답 같은 어려운 본문이 많은 이유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구약 1500년간 축적된 구원사를 정통으로 알지 못하면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이 나눈 이 대화는 정말 굉장한 대화입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인물이죠? 창세기부터 예수님 이때까지 1500년의 역사를 들었다 놨다 하는 굉장한 대화입니다. 그 대화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의미 깊게 다가오는가를 알려면 유대인의 입장과 예수님의 입장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머릿속에는 요한복음 내내 강조되는 독생자의식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한복음 1장 18절과 3장 16절을 설명하면서 독생자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독은 생을 꾸미는 글자라고요. 독생, 자, 이렇게 읽어야 원전에 맞다고 했습니다. 모노게네스 히오스, 모노게네스는 같이 붙어 있는 단어입니다. 모노게네스는 창세기 genesis 할 때 그 genesis입니다. 모노는 모노드라마 할 때 그 모노입니다. 모노가 독특한 방식으로 낳아진바 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으로 말하면 the only begotten son 이라고 돼 있죠? the only son이 아니라 the only uniquely begotten son, begotten 이라는 분사를 수식하죠. 예수님은 독특하게 태어나진바 된 아들이라는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독생자라면 독생자 아닌 아들이라는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들들이라는 말은 천상의 천사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천상의 천사들, 이런 영적 존재들이 하나님 아들이었고, 천상에 있는 하나님 아들들의 지상대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원래 오리지널하게 썼던 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천군천사의 하나님 여호와 할 때는 하늘에서 하나님 뜻을 순종하는 천사들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 아들들이라는 말은 욥기 1장, 창세기 6장 1절을 통해 나오는 천상에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 수행하는 대리자들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는 그 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독특하게 배포되고 사용됐습니다. 창세기 13장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아들이라고 불림을 받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드렸던 18복기도문이 있습니다. 18복기도문은 18가지 복을 비는데 기도문에 이렇게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아버지, 조상들을 걸고넘어지면서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천상에 있는 영적존재가 하나님 아들, 그다음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적으로 하나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천상 세계에 있는 미가엘 천사나 가브리엘 천사 같은 일련의 천사무리들을 가리키는 아들이 아니라 단독자로서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할 때는 순종의 화신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 할 때는 순종의 결정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천군천사들의 하나님 아들됨과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됨의 원형 아들됨입니다. 하나님 아들됨의 원형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파생적, 뒤에 생겨난 하나님 아들됨의 원형의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에 독생, 독특하게 하나님 아들이 됐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 아들은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보면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장 1-2절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얼굴을 맞대고 있는 아들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던 아들, 영원히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있던 아들, 이게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에 있는 아들이라는 사전적의미를 뛰어넘어서 천상에 있는 영적 세계에 그들의 불순종 반역을 만회할, 지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순종을 만회할 온전한 100% 순종을 드릴 아들,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 뜻을 성취해갈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독생자 의식으로 예수님이 내세웠을 때 유대인들은 너무 놀랐습니다. 왜? 어떤 죄인도 자기를 이스라엘백성 전체와 이 세계 존재하는 모든, 천상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영적존재들의 동아리들 모두를 refresh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의 불순종과 죄들을 만회하고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릴 무게를 가진 아들, 그런 무게를 가진 순종을 자기가 드릴 수 있다고 하는 기막히고 도발적인 하나님 아들 의식을 가진 예수님을 감당을 못했습니다. 5.18 사태가 벌어진 요한복음 5장 18-19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감당을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예수님의 의식은 4대 성인의 의식이 되기에는 너무 도발적입니다. 예수님의 의식에는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라 부르는 의식, 독생자 의식이라고 했죠. 독생자 의식은 세계만민의 모든 불순종과 내 순종은 맞먹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1년 내내 지었던 모든 죄와 불순종 허물들을 다 짊어지고 가서 없애버리는 존재가 있었죠. 대속죄일에 바쳤던 재물이었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갔던 유월절 어린양과 같은 대속죄일과 같은 제물, 염소제물과 같은 의식을 가졌단 거죠. 독특한 의식을 가졌던 예수님을 보고 세례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 안에서 세례요한이 보기에 무슨 생각이었느냐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불순종을 짊어지고 가서 순종의 길을 내겠다, 이런 의식이 너무 많았다는 뜻입니다. 이건 교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교육으로만 되는 건 아니지만 교육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점지했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자각과 노력과 교육 모든 것도 중요했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부르심도 중요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아들 되심은 내가 소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과 준하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입양된 경험입니다. 이 세계만민 중에서 하나님 자녀로 입양된 사람이 많지 않지 않습니까? 얼마나 적은 사람만이 하나님 아들로 입양됐습니까? 극히 적은 사람만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바 아버지라 부를 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자기랑 똑같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기를 가깝게 여기면서 기도하면 얼마나 우습겠어요? 그리고 사는 모습이 우리랑 똑같은데, 내가 찌개 먹을 때 자기도 찌개 먹고 내가 추울 때 자기도 추우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찬송을 부르고 온 몸을 흔들면서 하나님과 너무 가깝다고 느끼는 행태를 보일 때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냐고요.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역겨운 도발감을 일으켰다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라 부를 수밖에 없는 독생자의식이 정말 강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또한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요약하면 독생자 의식은 이스라엘이 범했던 모든 죄, 천상체계의 천군천사 일부가 범했던 모든 죄를 다 무효화시킬 수 있는,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죄 짓지 않은 것처럼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순종을 바칠 수 있는 아들이 독생자 예수입니다. 빌립보서 2장 10-11절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의 죽음과 예수의 삶이 죄 문제를 해결했음을 인정하는 날이 온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생자의식을 가졌던 예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지도자들 사이의 논쟁입니다. 51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어느 시대 때 누가 해도 이런 말은 제 명대로 살기 힘듭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경험이 갖는 파괴적 보편성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이것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기 때문에 죽음의 파괴적 보편성, 죽음의 치명적인 보편성, 그것을 능히 뛰어넘을 수 있는 삶의 전망과 통찰이 있기 때문에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영원히 안 죽는다는 말이죠. 죽음을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예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겪지 않는다, 이런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실이 있고 죽음의 파괴적 보편성을 경험한 유대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을 정신이 탈구된 사람의 말로 믿게 만드는 파괴적 결과가 있는 겁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어떤 사람들을 귀신 들렸다고 말할 때는 나랑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정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남한에 있는 극우세력이 북한 사람들을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말하고 북한 사람들은 남한의 어떤 일부 특정한 사람을 귀신들린 사람으로 똑같이 여깁니다. 귀신은 회개 불가능한 존재거든요. 귀신은 박멸대상일 뿐 회개가 안 된다고 보는 것이 교부들의 생각이었고 성경에서 일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귀신도 회개할 수 있다는 학설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초대교부 중 오리겐 같은 사람은 귀신도 갱생가능성이 있다고 봤고, 어거스틴 같은 사람은 귀신갱생불가론자입니다. 귀신은 박멸될 뿐이고 갱생이 안 된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몰트만 같은 사람들이 귀신도 회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냐? 귀신 마저도 회개시켜야 참 하나님이시지, 귀신을 구원을 못하면 하나님이 불완전한 구원자가 아니냐?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튼 누구를 귀신 들렸다고 말할 때는 그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언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죽음의 보편성을 이미 경험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예수님은 우리하고 다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피곤해서 털썩 주저앉으면서 물 좀 달라고 할 때는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머리를 푸시고 물 위를 걸어가신 것은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공감해서도 안 됩니다. 새벽 4시에 물 위를 떠다니시는데 어떻게 공감이 됩니까? 문도 노크도 안 하고 들어오시는 분, 예수님을 너무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러나 인간의 장막이 끝나는 부분에서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분인 것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실제로 유대인에게 당신 자신을 이해시키는데 절망을 하셨습니다. 죽음의 파괴적 보편성을 다 경험하고 있는 인간 일반에게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하나님이 죽지 않는다고 말할 때 이런 경우를 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근원적으로 대화가 안 되는 것은 우리는 이미 죽음의 파괴적 보편성을 경험했습니다. 모두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죽지 않으셨기 때문에 한 번도 죽지 않으신, 죽음을 이기신, 죽음을 가볍게 돌파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지금 이런 말을 아주 상식적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로써 죽음을 영원히 극복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써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니까 그는 귀신들린 자의 소리다, 우리가 죄 가운데 빠지면, 죄와 불순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마저도 귀신 들린 자의 말처럼 들린다는 겁니다.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그렇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을 친 아버지라 불렀을 때 자기를 지상에서 호화롭게 만들거나 지상에서 면류관을 쓰게 만들어서,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왕좌를 요구했는가, 내가 땅을 요구했는가, 내가 숱한 조공 예물을 요구했는가, 그렇다면 영광을 구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목수 생활을 계속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갈릴리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안식일에 밀밭에 뛰어들었습니다. 어떻게 이해가 됩니까? 종교지도자들마저도 하나님과 자기가 가깝다는 걸 은근히 과시해서 재정적 헌금을 갈취하는 사기배들 모리배들이 많은 이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도의 능력이 많으신 그분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 밀밭에 가서 밀서리를 하셔야 하는 것은 영광을 구하지 않은 것이 맞죠? 예수님께서 숱한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다면 마지막 수난주간에 노숙을 하셨겠습니까? 감람산에서 밤이슬을 맞으면서 노숙을 하셨겠냐고요? 감람산 토굴에서 잠을 주무시는 예수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영광을 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종교권력은 반드시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결탁됩니다. 모든 종교권력 모든 정치권력은 영광을 추구하는 것과 관련됐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까운 모든 사람들은 영광을 추구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진짜 하나님과 가깝지 않음을 입증합니다. 하나님과 진짜 가까운 사람은 자기를 위해서 영광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를 십자가의 길로 디밀어가는 순종의 극한 원동력만 나옵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 진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사람들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데 관심이 없고 십자가의 무한책임적인 사랑의 실천에 자기를 좁은 문으로 디밀어가는 힘만 느낍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겁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에스겔의 마른 골짜기로 내려가도록 충동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씌우셔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급 아들들을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도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지금 영광의 면류관을 쓴 사람들은 하나님과 매우 멀리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쓴 사람, 하나님 때문에 영광의 면류관을 썼거나 자기 지식적 재능과 예술적 재능과 몸의 매력 등으로 말미암아 영광의 면류관을 써가는 모든 세상의 영적 정신적 길들은 참 하나님과 한 번도 접촉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세계관입니다. 참 하나님을 한 번만 접촉하고 나면, 참하나님의 영광의 역설적 본질을 한 번만 맛보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광을 추구할 마음이 없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친아버지라 불러서 영광을 추구했느냐?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됨을 취하는 언동을 했다고 해서 내 삶이 바꾸어졌느냐? 내가 땅을 갑자기 기증받았느냐? 내 통장에 많은 기부금이 들어왔느냐? No 아니다, 나는 여전히 가난하고 거리의 아우성에 여전히 밀착돼 있고 내가 가야 할 이스라엘 죄를 대속할만한 고난의 십자가 길,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사무치는 진실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 우리에게 하셨던 유일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종교와 복음의 차이입니다. 종교권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추구적인 존재가 됩니다. 모든 제도권종교는 왜 권력을 추구할까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제도권 종교로부터 버림받은 참된 하나님의 예언자들은 왜 권력을 멀리 하고 혈혈단신 단기필마로 거리의 아우성과 동역을 하게 될까요? 그건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거리의 아우성, 필요가 있는 곳으로 질주하고 달려가는 섬김의 영이 지배합니다. 그러나 종교권력으로 보호를 받는 유대인과 같은 예루살렘 권력집단의 하수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권력이 주는 몽롱한 안정감을 느낍니다. 지금도 자기가 누리는 권력이 주는 몽롱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운행하는 질주하시는 하나님의 자기갱신적인 에너지가 우리 온 몸에 퍼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아우성과 눈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서시고 달려가시고, 태풍처럼 질풍처럼 달려가셔서 도우시고 사랑하시고 손을 뻗으시고 눈물을 닦아주시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증거가 되는 거죠. 종교권력은 왜 정치권력을 닮아갈까요? 왜 나쁜 목사님은 독재자를 닮아갈까요? 모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마지막 행로는 악마적 권력 집착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권력이 모이는 곳, 권력이 나를 고체처럼 시멘트처럼 에워싼다, 권력이 시멘트처럼 거대한 중세의 아성처럼 나를 에워쌀 때 성령의 교통이 더 이상 나에게 감격을 전하지 않을 때 그걸 깨고 나오는 것은 성령의 힘입니다. 담임목사는 아무라도 부르는 것이 담임목사님이고 예언자입니다. 원래 예언자는 생활밀착형 지도자입니다. 제사장들은 옷을 제관을 입고 있었고 모자를 쓰고 있었고 시체 옆에도 안 가기 때문에, 제사장들은 어린이 청소년 시체위에 온 몸을 포개면서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믿고 아이의 혼이 돌아오게 하소서, 엘리야처럼 사르밧 과부 아들의 시신에 올라가서 몸 개그를 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일단 시체와 접촉하면 불결해집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시체위에 올라가서아이의 혼을 살려달라고 식어버린 아이의 몸을 전신마사지 하는 것이 예언자입니다. 한 자매님이 국을 끓이다가 독초가 들어간 국을 끓여서 신학생들이 기숙사에서 먹고 중독이 됐을 때, 바로 밑으로 달려가 밀가루를 풀어서 기도해서 독을 풀어주신 분이고 타이어가 펑크 났을 때 고쳐주시는 것이 예언자입니다. 생활밀착형 예언자, 이게 예언자의 본류입니다. 왕은 일단 내려오지 않습니다. 왕은 상비군이 지키기 때문에 내려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언자만 민중친화적인 생활밀착형 종이었습니다. 예언자는 영이 불면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열왕기상 17장부터 열왕기하 10장까지 엘리야 엘리사의 생활밀착형 예언행위, 민중 친화적 예언행위를 보십시오. 이 분들은 소송에도 관여합니다. 과부가 땅을 잃었을 때 과부땅 찾기 소송에도 관여해서 기어코 찾아줍니다. 이분들은 생활법률지식 구전율법의 전문가였고 그다음 전쟁이 나면 공익근무요원으로 가서 전훈장교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병거와 마병이여, 라는 말을 듣고 나중에 둘 다 무공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이게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시신위에 올라가서 식어버린 아이 몸과 자기 몸을 포개는 전신마사지사요, 예언자는 국방의 위기 때 전쟁의 용사들을 도와주는 전쟁컨설턴트였고 도끼자루가 물에 빠졌을 때 전전긍긍할 때 부력의 원리를 이용해서 도끼자룰 건져 올리는 신출귀몰한 생활밀착형 과학자였고, 그는 물 근원이 타락하고 부패했을 때 물 수질을 개선했던 환경주의자였습니다. 그게 바로 예언자, 그게 바로 하나님 영에 사로잡힌 자,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이것입니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하나님 아는 사람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 사이에서 너무 고독합니다.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여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안다는 말뜻은 무엇이죠?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 분명히 있죠? 예수님은 하나님을 순종하면서 알고 알기 위해서 순종했습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나타나기를 아브라함은 1500년 동안 기다렸다. 백오동에 무슨 새가 오죠? 대중가요도 잊어버렸습니까? 봉황을 기다렸다, 조용필 노래 몰라요? 한오백년 몰라요? 백오동을 키운 뜻은 봉황을 보자는 뜻이죠. 봉황새가 100년 만에 한 번 오는 길조가 백오동나무에 오른단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25년 내내 기다렸던 것은 네 후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것이 아브라함이 25년 동안 기다렸던 약속이죠? 창세기 22장 16-22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모리아산의 번제로 바쳤더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상적인 순종, 결박당하여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자기 몸을 결박당한 채, 수동적 능동의 순종을 바쳐서 자기 몸을 결박당한 채 완전화된 이상화된 이삭이 이 땅에 나타나기를 기다린 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모리아 산에서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의 아들 결박당할 그 종을 본 거죠. 아브라함은 이상화된 이삭 적분자, 이삭을 무한적분하면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이삭 같은 순종, 다 알고도 결박당해 있는 이삭 같은 아들이 나타날 것을 즐거워했어요. 왜? 그런 아들 때문에 천한만민이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자신과 같은 존재가 출연할 것을 보고 기뻐했어요. 아브라함이 기뻐했다는 본문은 안 나오죠? 랍비문서에 나와요. 예수님이 랍비문서를 많이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죠. 왜? 예수님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은 랍비들의 문서 해설집에 보면 아브라함이 수풀에 걸려 있는 수양을 보며 기뻐하는 장면이 나와요. 우리 성경에는 안 나오죠. 그 랍비해설집에 나옵니다. 70인역 헬라어 성경에 아브라함이 기뻐하는 장면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 말이 구약성경에 없는데 하는 이유는 헬라어 구약성경 창세기를 알았거나 이것을 이렇게 해석했던 랍비들의 해석을 나사렛 회당에서 들었을 가능성이 높은 거예요. 구약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기뻐하는 장면이 안 나와요. 그런데 랍비들의 해설집과 70인역과 같은 헬라어 성경에는 나온다는 말이에요. 그 말은 예수님이 상당히 책을 많이 읽으신 분인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은 공부도 안 하는데 목수일 배틀질 할 때 수리수리 하면서 가끔 적어보고 그러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document로 된 책을 일단 읽으신 분이에요. 그걸 아시는 분이 영이 임하지, 아무 텍스트가 없는 사람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텍스트가 있는 사람에게 영이 임하는 것,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참고로 공부하실 때 하나님께서 무언가 영으로 격동시켜주시려면 최소한 무언가 텍스트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구약성경 참조적이시고 구약성경 의식적이시고 구약성경 회고적이시고 구약성경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가 많았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 말씀이 많은 사람에게 그 말씀의 성취가 일어나게 하셨어요. 구약성경을 많이 모르면 성경말씀을 모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알고 있어야만 나온단 말이에요. 예수님은 구약성경 말씀을 참조하신 분이고 구약성경 말씀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지가 가득찬 분이었다, 그게 바로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을 안다는 당당한 의식,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예수님 안에서의 엄청난 자신감, 혈혈단신 단기필마로 거대한 종교집단과 논쟁을 벌이는 예수님 모습 속에서 그 자유를 보게 됩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은 마음이 완악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건 좀 많은 해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연세가 우리가 알기로 33세인데, 수염이 좀 짙게 나셨는지, 40세도 못 되었는데 이러면 이해가 되는데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좀 노안이 아니었겠는가, 실제로 예수님은 30세 때 등장했다는 말은 그 당시 세상 나이로 볼 때는 지금 50세에 등장했다는 말과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이 30세에 나타났다는 말은 청년 때에 나타났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 예수님 어머니, 맏아들과 엄마의 나이가 14세 차이가 됐습니다. 예수님과 어머니 차이가 14-15세정도, 마리아가 45세이고 예수님이 30세이면 굉장히 늦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어린 아들처럼, 예수님과 제자들 나이차이가 15세정도 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처럼 대화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약간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데 나쁜 의미로 늙어 보였다기 보다는 노숙해보였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코멘트가 없습니다. I don't think so.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런 말을 듣고도 돌로 안 치면 유대인이 아닙니다. 59절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참람한 신성모독적인 말, 나이가 50도 안 된 한 사람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이건 말로 해결이 안 되고 돌로 해결해야 하는 겁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직분을 공감한다면 좀 그렇고 유대인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공감까지는 아니지만 그럴 수 있었겠구나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인간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사무치는 진실의 결과이거나 아니면 사기꾼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기꾼일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과 자기의 최측근적 가까움을 강조해서 어떤 영광도 취하지 않고 자기에게 어떤 유익도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종교적 언어가 공적 담론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딱 하나입니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기독교인이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는 순간 기독교 집단을 이롭게 하거나 기독교인을 이롭게 하면 그것은 공적담론으로서 하나님 담론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기독교는 자기 생명 소진적인 자기 생명희생적인 자기이익 파괴적인 언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담론, 예수님과 같은 격조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수록 나에게 유리한 말을 계속 쏟아낸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이유하 자매님 재산을 다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타나셔서 윤구 형제 집을 나에게 등기이전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 담론이 아니에요. 반대로 하나님 나에게 재산을 팔아서 상우형제 결혼자금으로 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 나오면 그럴듯하죠. 예수님의 하나님 담론의 특징은 자기 존재근거를 허물어뜨리고 자기생명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자기이익을 무너뜨리는 하나님 담론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권력담론이 아니고 정치담론이 아니고 신학담론 진짜 신령한 생명담론이 되는 거죠. 기독교가 하나님 담론을 안다고 하면서 결국 기독교 집단을 이익 되게 만들거나 자기교회 종교권력집단을 공고하게 만드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그것은 가짜죠. 그건 하나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런 분별력을 잘 가지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이교회 안 다닐지라도 목사님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수록 어딘가 모르게 자기를 이롭게 하거나 자기교회 집단을 서빙하게 만들거나 뭔가 타종교나 타자에 비해서 기독교를 privileging 특권화시키는 쪽으로 간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겠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아들에게 독생자적 희생의 길로 밀어붙여서,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있었다는 주장의 의미는 무엇이에요? 하나님과 영원전부터 함께 있었다는 주장 안에서 예수님이 가져가는 이익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순종의 무한부담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영원 전부터 있었다는 말은 이삭과 같은 절대순종, 절대복종의 길을 가기 위하여 하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오래 믿었다는 말은 권력담론이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내가 입양을 당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이 예수님에게 희생을 의미하는 말이 됐듯이 내가 하나님을 믿은 지 40년이 됐다는 말, 내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을 믿었다는 예수님 독생자의 고백이 당신을 영화롭게 만드는 고백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바치는, 모리아 산의 제물로 바치는 희생의 언어였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25년간 믿었다, 내가 모태신앙이다, 내가 5대째 믿었다, 이런 모든 유사영원적 신앙고백, 내가 오래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너희 까불지 마, 이렇게 하는 배제담론이 아니라 내가 걸어가야 할 고독한 순종의 길이 있습니다, 하는 말과 다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언어는 철두철미하게 비특권적, 자기희생적, 모리아 산장의 고독한 순종의 길을 완성시키는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자기의 유일한 친밀성을 드러낸 동기였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알려진 하나님 되기를 원하고 한국교회가 이런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원하고 을지로와 충무로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하나님 담론 신앙담론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안다고 했을 때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지 우리는 알다가도 모를 신비감에 빠집니다. 예수님 안에 내가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영원하신 하나님 독생자고백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고백이 아니오, 자기를 십자가의 길로 내모는 모리아 산으로 내모는 고독한 순종한 다짐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예수 오래 믿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타자를 배제하거나 멸시하는 권력담론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자기 희생담론이 되게 도와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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